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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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성[편집]

水原城

사적 제3호.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석전교축(石塼交築) 읍성. 둘레 5,520m, 높이 7m에 이르며, 서쪽으로 팔달산(八達山)을 끼고 동쪽으로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축성한 평산성(平山城)으로, 창룡문(滄龍門)·화서문(華西門)·팔달문(八達門)·장안문(長安門)의 사대문을 비롯하여 암문(暗門)·수문(水門)·적대(敵臺)·각루(角樓)·포사(鋪舍) 등의 각종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정조의 명령에 의해 1794년 2월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주관하에 성역에 착수,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축조방법은 전통적인 축성경험을 바탕으로 유형원(柳馨遠)과 정약용(丁若鏞) 등의 과학적 지식과 중국성제의 장점을 활용하였다. 성벽은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돌과 모래로 다진 뒤 그 위에 배흘림을 준 규형(圭形)의 벽을 쌓았다. 성곽 주위의 호(壕)는 산지 부분에서는 두르지 않았으나 평지부분은 둘렀고 성의 남서쪽에 해당하는 화양루와 서남암문 사이의 작은 계속에서 흐르는 계곡물은 자연호를 이룬다.종래의 조선시대 성곽이 보통 때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하고 있는 반면, 수원 성곽은 산성은 설치하지 않고 읍성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1975년부터 4개년 계획으로 실시되었던 복원공사로 현재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97년 유네스코에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화서문[편집]

華西門

보물 제403호. 수원성의 서문.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돌로 된 기부에 홍예문(虹?門)을 두어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다. 문의 앞부분에는 반달형으로 된 전축(塼築) 옹성(甕城)이 있는데 높이는 안쪽 2.62m, 바깥쪽 3.65m, 두께는 3.25m이다. 이 옹성은 한 평이 트여 있어 문을 출입할 때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1975년 수원성을 중수 공사할 때 보수되었다.

팔달문[편집]

八達門

보물 제402호. 수원성의 남문. 문루의 규모는 높이 9m, 너비 25m로, 누상에 종이 걸려 있다. 수원성은 정조(正祖) 18년(1794)에 이궁(離宮)으로 축성되었다.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 서양문화의 영향을 반영한 점이 중요한데, 이는 전축(塼築)의 보루 같은 구조 면에서나 건축기계 면에서 실측할 수 있다. 흥인문에서와 같은 옹성을 앞쪽에 두고 역시 위에는 총안을 뚫었다.

팔달문 동종[편집]

八達門銅鐘

화성축성과 동시에 건조된 성의 사대문의 남문인 팔달문 2층 누상에 달려 있는 종. 종걸이는 음통이 없는 용두뿐이고 상대에는 내부에 글씨를 넣은 수십 개의 문양을 두 줄로 나란히 돌렸으며 종신에는 이 종을 주조한 장소와 연대 유래, 주조자들의 명문이 주자 혹은 각자되어 있다. 하대에는 보상당초화문을 양주하여 돌린 고려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한 조선종의 형식을 하고 있다.

남한산성[편집]

南漢山城

사적 제57호. 남한산 도립공원에 있다. 선조 28년(1595)에 축조하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난했지만 결국은 45일 만에 굴욕의 항복을 한 고전장(古戰場)으로 유명하다. 성벽 둘레가 약 8km이고, 높이는 2.2m이다. 성 안에는 숭열전·연무관·침과정 등이 있다. 현존하는 성벽은 광해군 이후 여러 차례 중수축된 것이고, 이의 보수가 완공되었다.

광릉[편집]

光陵

사적 제197호.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부평리에 있는 조선 제7대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의 능. 1468년(세조 14)과 1483년(성종 14)에 정하였다. 이 능은 세조기 석실의 유해무익함을 강조하고 석실과 병석(屛石)을 쓰지 말라고 한 유명(遺命)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십이지상을 난간동자석주(欄干童子石柱)에 옮겨 새겼다. 회격으로 바꿈으로써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했으며, 능 배치상에 있어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이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이로써 국초 왕릉제의 일대개혁을 이루었다.

용주사[편집]

龍珠寺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에 있는 절. 조선 22대 정조 14년(1790)에 보경(寶鏡)이 창건. 장조(莊祖:사도세자)의 능을 이 곳에 두고 이 절을 능사(能寺)로 삼았다.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판 은중경(恩重經)과 김홍도(金弘道)의 불화(佛畵)가 특히 유명하다.

용주사 범종[편집]

龍珠寺梵鐘

국보 제120호. 용주사에 있는 범종. 구리로 만들었으며,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몸체에 비천상과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형태이다. 높이 1.44m, 지름 87cm.

행주산성[편집]

幸州山城

사적 제56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성(城).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왜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터이다. 즉 임진왜란의 3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이 치러진 곳이다. 산꼭대기에 토축(土築)의 성벽을 두르고 그 중앙을 한층 높이 쌓았으며, 남단과 북단에서 서북방에 이어진 골짜기를 흙담으로 둘러쌓았다. 권율 장군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한 동상과 대첩비(大捷碑), 기공사(紀功祠)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무기가 바닥나자 성 안의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돌을 날라다 주는 데서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겨났다.

동구릉[편집]

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아홉능(陵). 조선 태조의 건원릉(建元陵), 5대 문종(文宗) 및 문종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현릉(顯陵), 14대 선조(宣祖)와 선조비 의인(懿仁)왕후 및 계비(繼妃) 인목(仁穆)왕후의 목릉(穆陵), 16대 인조비(仁祖妃) 장렬(莊烈)왕후의 숭릉(崇陵), 경종비(景宗妃) 단의(端懿)왕후의 혜릉(惠陵), 21대 영조(英祖) 및 영조 계비 정순(貞純)왕후의 원릉(元陵), 23대 순조의 세자 익종(翼宗)과 익조비 신정(神貞)왕후의 수릉(綏陵), 24대 헌종(憲宗)과 헌종비 효정(孝顯)왕후 및 계비 효종(孝宗)왕후의 경릉(景陵) 등이 있다. 조선 왕실의 가족릉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크다.

융건릉[편집]

隆健陵

사적 제206호. 비운의 사도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에 있다.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 기슭에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그 곁에 묻혔다.

봉선사 동종[편집]

奉先寺銅鍾

보물 제397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운악산에 위치한 봉선사에 있는 종.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다시 지을 때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

서오릉[편집]

西五陵

사적 제198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다섯 능(陵). 조선 예종(睿宗) 및 예종비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창릉(昌陵), 숙종(肅宗)과 숙종 계비 인현왕후 및 동계비(同繼妃) 인원(仁元)왕후의 명릉(明陵), 숙종비 인경(仁敬)왕후의 익릉(翼陵), 영조비(英祖妃) 정성(貞聖)왕후의 홍릉(弘陵), 덕종(德宗) 및 덕종비 소혜(昭惠)왕후의 경릉(敬陵)이 있다.

서삼릉[편집]

西三陵

사적 제200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세 능(陵). 중종 계비(中宗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과 인종(仁宗) 및 인종비 인성왕후(仁聖王后)의 효릉(孝陵)과 철종(哲宗) 및 철종비 철인왕후(哲人王后)의 예릉(睿陵)을 말한다.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편집]

坡州龍尾里石佛立像

보물 제93호.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다. 천연 암벽에 부처상을 조각한 것으로, 오른쪽 석불은 사각형 모자, 왼쪽 석불은 둥근 모자를 쓴 모습이므로 용미리 쌍미륵 석불이라고도 한다.

홍유릉[편집]

洪裕陵

사적 제207호.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과 유릉을 합쳐서 일컫는 이름. 홍릉은 조선조 제26대 고종과 그의 비 명성황후(明星皇后) 민씨의 능이며, 유릉은 조선시대 제27대 왕 순종과 그의 비 순명효왕후(純明孝皇后) 민씨와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능이다. 모두 종래 왕릉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으며, 양쪽으로 문무석을 세워 홍살문까지 기린·코끼리·해태·사자 등의 석수를 세웠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릉이자 최초의 황제릉으로, 특이하고 아늑한 느낌이 없다.

영령릉[편집]

英寧陵

사적 제195호.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영릉(英陵)은 광주(廣州) 헌능(憲陵)에 있던 것을 14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이장하였고, 영릉(寧陵)은 구리(九里) 건원능(建元陵) 부근에서 1673년(현종 14)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영릉(英陵)은 최고의 명당자리라고 하며, 해마다 이곳에서 한글날을 전후하여 각종 행사가 열리며, 평소에도 찾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영릉(寧陵)은 찾는 이가 적어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신륵사[편집]

神勒寺

경기도 여주읍 한강 상류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 대부분의 절이 산속에 있으나 신륵사는 강변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32대 우왕 2년(1376)에 나옹(懶翁)이 죽은 곳으로, 다층석탑·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보제존자 석종(普濟尊者石鐘)·조사당(祖師堂)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5백여 명의 승려가 싸움에 나섰는데, 이때 많은 건물이 불탔으나 현종 무렵 다시 재건하였다. 신륵사의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다. 신륵사의 륵(勒)자는 말을 다스린다는 뜻이 있는데, 고려시대 고종 때 건너마을에 용마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인당대사가 나타나 고삐를 잡아채자 순해졌다고 하며, 다른 일화에 따르면 나옹대사가 굴레를 씌워 얌전하게 다르렸다고 하여 “신륵사”라는 이름이 생겼났다.

신륵사 다층석탑[편집]

神勒寺多層石塔

보물 제225호. 신륵사에 있는 석탑. 높이 3m. 건립 연대는 15세기 후반쯤으로 추측되는 8층 대리석제 탑이다. 2층기단 위에 세워졌고 기단부의 면석(面石)에는 용문(龍文)을, 위와 아래의 갑석(甲石)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갑석이나 조각의 기법은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통한다. 탑신은 낮고 평평하며 옥개석은 두터운 판석으로 되었다.

신륵사 다층전탑[편집]

神勒寺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경기도 여주읍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벽돌탑. 높이 9.4m. 재료는 기단부(基壇部)가 화강석, 탑신부(塔身部)가 벽돌이다. 일반 석탑의 기단과 비슷한 2중 기단 위에 다시 3단의 석단(石段)이 있고, 그 위에 탑신부를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1단이 있어 7층으로 보인다.

신륵사 조사당[편집]

神勒寺祖師堂

보물 제180호. 경기도 여주읍 신륵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건물. 정면 1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다포계(多包系) 건물이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었으며, 불단(佛壇) 뒷벽에는 중앙에 나옹(懶翁)과 그 좌우에 지공(指空) 및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태조가 무학대사를 위해 지었다는 설이 전해 온다. 기록에 의하면 신륵사가 조선 예종(睿宗, 재위 1468∼1469) 때 중수되었다고 하므로 이 건물도 그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달사지[편집]

高達寺址

경기도 여주읍 북내면 상교리에 있던 신라시대의 절. 신라 35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하였다. 고려 4대 광종 이후 역대 임금의 비호를 받은 절이었으나 어느 때 폐사(廢寺)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고달원비귀부(보물 제6호)·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등이 남아 있다.

고달사지 부도[편집]

高達寺址浮屠

국보 제4호. 경기도 여주읍 북내면 고달사 터에 있는 고려시대 초기의 화강석제 부도. 높이 3.4m. 8각 원당형(圓堂形) 부도 중에서 매우 뛰어난 거작이다. 조영 양식이 신라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적인 면에서는 고려시대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신라 말의 고승 원감대사(圓鑑大師)의 묘탑(墓塔)이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 절터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元宗大師)의 묘탑인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元宗大師慧眞塔)보다는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고달사지 석불좌[편집]

高達寺址石佛座

보물 제8호. 경기도 여주읍 북내면에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석제 불좌. 총높이 1.48m. 고달사터에 남아 있으며, 대좌(臺座)가 3단이고, 각 단이 다른 돌로 되어 있는데 기본형은 4각형이다. 윗단의 윗면은 불상을 안치하던 곳으로 1단의 각형받침이 있다.

창성사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편집]

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고려 우왕 12년(1386)에 명승인 진각국사(1307~1382)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수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건립한 비다. 진각국사는 충렬왕 33년에 출생하여 13세에 화엄종 반용사에 들어가 19세에 상풍선에 오른 고려말 화엄종사로서 왕은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창성사가 폐사되어 1965년도에 이 비를 매향동 현위치로 옮겼다.

수원향교[편집]

水原鄕校

고려 원종 22년에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세워졌던 것을 화성 축성과 더불어 현위치로 옮겨 건립하고 공자, 맹자 등 선인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향교 앞에 하마비가 있고 나무로 건립된 홍살문이 있으며 외삼문은 소슬삼문 형태이며 명륜당, 내삼문, 동무, 서무, 대성전의 건물이 있다.

망월사 혜거국사 부도[편집]

望月寺慧炬國師浮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의정부시 호원동 산91번지 망월사 부근. 혜거국사의 사리를 봉안한 팔각원당 부도이다. 전체의 높이는 3.4m이고 탑의 몸통 둘레는 3.1m이다. 기단부 위에 구형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과 상륜부로 구성돼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대석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대석은 팔각형 삼단의 일석으로 조성되고 높이가 80cm이다. 탑 몸통은 공 모양으로 조성되고, 괴임대 위쪽과 옥개석 아래쪽에 홈을 파서 탑 전체의 안정감을 꾀했다. 옥개석은 복발과 보주까지 한 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낙수면은 목조건물의 지붕 모양이며, 귀꽃은 모두 8개이다. 상륜부는 옥개석과 일석이며 복발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신숙주 묘[편집]

申叔舟墓

경기도 기념물 제88호. 의정부시 고산동 산 53-7번지. 무송군부인 윤씨의 묘와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석, 상석, 문인상, 신도비, 한글창제사적비 등 각종 석물들이 있는데, 그 중 한글창제사적비는 최근에 건립한 것이다. 신숙주는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자는 범웅, 호는 보한재·희현당이고 공조참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 때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을 충성으로 보필하였고, 특히 계유정란 이후부터는 조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성종의 특명으로 간행된 『보한재집』 17권을 비롯하여, 세조 6년(1460) 여진정벌을 마치고 북정에 관한 것을 편찬한 『북정록』 6권, 세종 25년(1443) 일본 서장관으로 갔을 때의 견문록인 『해동제국기』 1권과 그 밖에 『동국정운』, 『사성통고』, 『오례의』, 『경국대전』 등이 있다.

삼막사 마애삼존불[편집]

三幕寺磨崖三尊佛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 자연 암벽에 감실을 만들고, 거기에 부조한 치성광삼존불(熾盛光三尊佛)로 조선 후기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며, 석굴사원으로 중요한 자료이다.주존(主尊)인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머리는 소발(素髮)에 반달형 계주가 보이며, 얼굴은 사각형이지만 눈과 입, 볼 등을 율동감 있게 묘사하여 미소짓게 함으로써 중후하고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게 한다. 목은 짧아서 더욱 어깨가 움츠려 보이고, 신체는 두터운 불의(佛儀)에 파묻히고 선각(線刻)으로 묘사하여 양감을 느낄 수 없다.좌우 협시(脇侍)인 일광(日光), 월광보살(月光菩薩)은 각각 연화대 위에 합장한 모습인데, 머리에는 소박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본존과 비슷하지만 환한 미소 때문에 활력이 넘쳐 보인다. 이 삼존불은 얼굴이나 상체의 활달한 부조(浮彫)로 생동감이 넘쳐 조선(朝鮮) 불상(佛像)에서는 파격적 수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몸의 표현을 생략한 평판적이고 경직된 상체와 하부로 내려갈수록 얕은 기법 등은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이 불상 아래 건륭(乾隆) 28년(영조(英祖) 39년, 1763)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칠성신앙과 다산신앙이 결합된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상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삼막사 삼층석탑[편집]

三幕寺三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안양시 석수동 산 10-1 삼막사 경내. 삼막사 승도(僧徒)인 김윤후(金允候)가 몽골군의 원수(元帥)인 살리타이를 살해, 싸움을 이긴 승적을 기념한 탑이라 전한다.기단부(基壇部)는 장대석(長臺石) 4매(四枚)로 하층기단(下層基壇) 하대(下臺)를 만들고, 하층기단 면석(面石)도 역시 장대석 4매로 되었으며, 갑석(甲石)은 2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상층기단(上層基壇) 면석(面石)은 4매석(四枚石)으로 짜여있고, 갑석은 한 귀퉁이가 파실(破失) 되었다.탑신부(塔身部)는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였는데 각층의 옥개받침은 3단씩이다. 전체적으로 둔중하여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높이는 2.55m이다.

명빈묘[편집]

明賓墓

사적 제364호. 조선조 제3대 태종의 후궁인 명빈(明嬪) 김씨의 묘이다. 명빈(?~1479)은 지돈령부사(知敦寧付事) 안정공(安靖公) 김구덕(金九德)의 딸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태종 11년(1411) 11월 명빈으로 책봉(冊封) 되었고 성종 10년(1479) 6월 5일 사망하기까지 태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7대에 걸쳐 내명부를 지켰으나 태종과의 후사는 없다. 묘역의 석물(石物)은 표석 1기, 문인석 1쌍, 상석(혼유석) 향로석 등이 있다.

조선방역지도[편집]

朝鮮方域地圖

국보 제248호. 과천에서는 유일한 국보급 문화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조선방역지도는 우리나라 8도의 주와 현을 표시한 지도로 상단에는 조선방역지도라고 가로로 쓰여 있고 중심부인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전도를 그렸으며, 그 아래에는 제작자의 이름을 적은 좌목이 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효령대군영정[편집]

孝寧大君影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 관악산 연주암 경내 효령각에 소장.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 아들로 효성이 지극하고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하여 늘 태종의 사냥터에 따라다녔으며 동생인 세종대왕과는 우애가 깊어 밤늦도록 국정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고 한다. 영정은 정면에서 바라본 전신좌상이다. 이모를 거듭하여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기 어려우나 원본의 형태를 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조선 초기의 초상화를 연구하는 데 참고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온온사[편집]

穩穩舍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과천시 중앙동사무소 뒤편에 소재. 과천의 객사였던 온온사가 축조된 것은 조선 인조 27년(1649)이었다. 과천현 신수읍지에 의하면 이때에 객사동헌을 현감이었던 여인홍(1649~1651 재직)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과천객사가 온온사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정조 연간이었다. 즉 생부인 사도 세자(장헌세자:고종 때에 장조로 추증)의 원묘인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이후 이름을 현릉원으로 고치고 참배하기 위해 거동할 때 과천의 객사에서 머물며 주위 경치가 쉬어 가기가 편하다고 하여 “온온사”란 현판을 내림으로써 이름을 갖게 되었다.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편집]

-里寺址石造菩薩立像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7호. 과천정부청사 맞은편 과천보광사 경내. 높이 17m의 각주형 돌에 전면만을 선각하여 제작되었고, 둥근 얼굴에는 간략히 눈과 코를 새겼으나 입은 보이지 않으며, 목이 없어 몸에 붙은 얼굴 아래로는 굵은 삼도를 표현하였다. 제작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보살상으로 추정된다.

정정옹주묘[편집]

-翁主墓

안산시 향토유적 제14호. 안산시 부곡동 산 50-40. 선조 후궁 정빈홍씨의 소생으로 선조 37년 정정옹주로 봉해지고 묘는 부곡동에 있다.

부계팔경도[편집]

-界八景圖

안산시 향토유적 제16호. 소재지는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모산 유원성이 고향땅 부곡지방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그린 8폭의 부곡 팔경은 산수와 전원 기암괴석을 독특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부계전도[편집]

-界全圖

안산시 향토유적 제17호. 안산시 선부동 237. 유원성(1851~1945)이 부곡동 일대에 있는 조상들의 산소를 표기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그림 크기 76.2×133cm, 족자 크기 120×180cm로서 부곡지방의 지형·산세·지명 등이 상세하게 세필로 기록되어 있어 1920년대 부곡지방의 지형구조가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가를 비교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이익선생묘[편집]

李瀷先生墓

경기도 기념물 제40호. 안산시 일동 555. 수원·인천간 산업도로가 바라보이는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소의 석물로는 묘비(墓碑)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봉분의 규모는 600×550×220cm이다. 묘소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무덤 앞에 안내판이 있다. 묘소 우측에는 사당이 있다.

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편집]

深福寺石造毘盧舍那佛坐像보물 제565호.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115. 이 석불좌상은 왼손을 밑으로 지권인을 결한 채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는 비로자나불좌상이다. 굵고 낮은 육계를 한 갸름한 얼굴, 짧은 목과 단정한 어깨, 좁은 무릎폭을 갖추고 있으며, 대체로 온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체에 걸친 법의는 가슴이 노출된 통견의로서 반원꼴의 화문이 조각된 굵은 옷깃이 특징적이며, 양팔과 무릎 위에서 도식적인 평행밀집식 옷주름을, 양 무릎 사이에는 부채꼴의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다.대좌는 16엽의 양련이 조각된 상대석과 두 마리의 사자가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중대석, 8엽복판의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불상은 비교적 볼륨감이 있고 단정한 모습의 우수한 상으로 경기도에서는 드물게 보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이다.

대동법시행기념비[편집]

大同法施行記念碑

유형문화재 제40호. 평택시 소사동 140-1 소재. 조선 효종 때 김육이 충청감사로 있을 때 공부의 불균형과 부역의 불공평을 없애기 위하여 호서지방에서 실시한 대동법이 좋은 성과를 거두자 대동법 시행을 만인에게 알리며, 백성을 생각하는 그 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효종 10년(1659)에 이곳에서 남동쪽 약 50m 지점 언덕에 세웠던 것을 1970년대에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던 폐단을 없애고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인데, 동법을 시행한 후부터는 공부의 불균형과 부역의 불공평이 없어지고, 민간의 상거래까지 원활해졌다.

팽성읍 객사[편집]

-邑客舍

유형문화재 제137호. 팽성읍 객사리 117. 조선시대 팽성현의 객사로 현종(1659~1674) 때 크게 중창하였고, 다시 영조 36년(1760)에 중수하고, 순조 1년(1801)에 또 다시 중수한 것이다.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는데, 본채는 전체 9칸 가운데 3칸은 중대청이고, 좌·우에 동·서헌이 각각 3칸씩이다.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고을 수령이 한달에 두 번 배례를 올리던 곳으로 이곳은 굵은 원형 기둥에 초익공을 결구하고 지붕도 동·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되었다. 대문간채의 중앙에 1칸의 대문이 있는데 솟을지붕으로 꾸몄다.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용마루 양끝에는 용두를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봉수대[편집]

烽燧臺

향토유적 제1호. 포승면 원정리 109-54. 원정리 봉수대는 봉화재, 또는 용수로 불리며 조선시대 서남쪽 봉화의 주요 직봉을 이루었던 순천봉화와 연결을 가지며 서해안의 외적침입을 알리게 하는 등 군사적 통신수단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봉화재 정상에는 약 2m 높이의 방형 석축으로 된 500평의 평지가 있으며 현재 석축은 부분적으로 훼손되었고 봉화대 북쪽 100m 아래에는 봉화수의 주거지와 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봉화재는 남양만 상단부에 위치하여 하단의 모양이 용이 누운 것 같다 하여 용수지라고도 하며 전체 산맥은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이라 전해진다.

자재암[편집]

自在庵

소요산에 위치한 자재암은 신라 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기거했다는 전설 때문인지 무수한 승려들이 수도차 거쳐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1994년 암자의 서책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반야바라밀다심경』이 발견되었는데 낙장 하나 없는 완벽한 언해본으로 보물 1211호로 지정돼 있다.

사패지 경계석[편집]

賜牌地境界石

향토유적 제1호. 동두천시 생연동 379. 사패지 경계석의 위치는 조선 초기의 무신(武臣) 어유소(魚有沼 1434~1489) 장군이 1488년 국왕인 성종과 함께 어등산(御登山)에 올라 화살을 쏘아 맞혀 솔개가 떨어진 지점이라 하며, 이로 인하여 현 동두천시 일원(一圓)을 사패지로 주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전해온다. 능안 마을의 밭 한가운데 서 있는 이 사패지 경계석은 일반 무인석보다 그 규모가 작으며 머리 부분은 6·25전쟁 때 일부가 파손되어 탄흔(彈痕)이 역력하다. 높이 140cm, 폭 47~50cm.

탑동 석불[편집]

塔洞石佛

향토유적 제5호. 동두천시 탑동 산 168. 고려시대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석불좌상이다.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 이곳에 살던 주민 배기주와 이우상이 어느날 꿈에 부처가 현몽, 다음날 이곳을 파보니 땅속에 미륵좌상 석불과 탑이 묻혀 있었다고 한다. 화강암의 석불좌상은 연화문이 선명히 조각된 대좌 위에 항마좌(降魔坐)를 하고 있는데 육계와 삼도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나발에서 수인에 이르기까지 심하게 마모되었으나 얼굴 부분은 온화한 느낌을 준다. 석불좌상의 높이 80cm, 최대 높이 100cm.

삼충단[편집]

三忠壇

향토유적 제9호. 동두천시 상패동 105. 삼충단은 조선 단종 원년(1453)부터 세조 2년(1456)까지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거 단종의 복위 운동에 가담했던 민신(閔伸)·김문기(金文起)·조극관(趙克寬) 등 세 충신의 호패비를 모신 곳이다. 곡담 내 대리석 호패비들은 각각 높이 67cm, 폭 28cm, 두께 10cm이며, 삼충단 규모는 정면 9.6m, 측면 7.2m이다.

사릉[편집]

思陵사적 제209호.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 65-1.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 중종 16년(1521) 왕후가 82세의 일기로 승하하고, 77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 11월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였다.

흥국사 대웅보전[편집]

興國寺大雄寶殿

문화재자료 제56호.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 33. 신라 진평왕 21년 원광국사가 수락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고, 선조 1년(1568) 선조의 덕흥대원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흥덕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불암사 경판[편집]

佛巖寺經板

유형문화재 제53호.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 797. 석씨원류 외 31종 총591매의 경판이 대웅전 좌측에 있는 동축당 다락 위에 가장되어 있는데, 양단에 나무를 끼어서 판목이 균제를 지니게 하였고 재목은 자장목을 사용했다.

벽제관지[편집]

碧蹄館址

사적 제144호. 이 자리는 옛날 역관(歷官)이 있던 자리로 고양시 고양동 사무소 북쪽에 인접해 있다.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는 역관에 머물러 휴식하는 공용의 숙박시설(宿泊施設)이기도 했다.벽제관은 한성에 인접하고 있었으므로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은 한성에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이 역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관복으로 갈아 입고 예의를 갖추어 들어 가는 것이 정해진 예법이었다.본래 고양시의 고읍치(古邑治)는 벽제관에서 서북방으로 5리 정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로 읍치를 옮긴 인조 3년(1625)에 이곳에 새로 세운 객관이 지금의 벽제관이다. 당시 규모는 면적 1,265평, 건물은 601평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언제 다시 건물을 세웠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일제 때 일부가 헐렸고 6·25 때 완전히 불타버렸다.그러나 1960년경까지도 객관문(客館門)은 남아 있었으나 퇴락(頹落)해 무너져버려 현재에는 객사의 윤곽과 터, 그리고 7척(尺) 간격으로 원좌주초석의 장대석(長臺石)이 남아 있을 뿐이다.

명월암 마애여래입상[편집]

明月庵磨崖如來立像

보물 제822호. 이천시 관고동 산 64-1. 높이 약 10m, 두께 4m 가량의 동남간을 향한 바위면에 선각(線刻) 되어 있다. 높이가 9.6m 어깨폭이 3m 가량으로 규모면에서 관내에서 제일 큰 불상이다. 머리는 승려 모양의 맨머리여서 지장보살의 상으로 여겨지며, 얼굴은 둥근 형태의 살찐 편이며 입이 커서 투박한 느낌을 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왼손은 가사자락을 움켜 쥔 모습으로 왼손으로부터 늘어진 가사의 주름이 무릎 아랫부분까지 늘어져 있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올려 손바닥을 펴서 밖을 향하게 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조성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말 고승인 나옹선사가 부모님을 천도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이천향교[편집]

利川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2호. 이천시 창전동 336. 망현산(아리산, 또는 위후산) 밑에 자리잡은 이천향교는 조선개국 11년 임오년(서기 1402년, 태종 2)에 당시의 감무(監務) 변인달(邊仁達)이 신축했다. 현재의 규모는 대성전이 겹처마 맞배집 형태로 58.87㎡이며, 동(동무)와 서(서무)가 각각 12.83㎡로 되어 있고 이들을 둘러싼 담장과 문으로 되어 있으며, 문 왼편 밑으로 홑처마 맞배집 형태의 명륜당은 37.65㎡의 규모이며 1998년 60.18㎡의 관리사를 개축하였다.

원종대사 혜진탑 귀부 및 이수[편집]

元宗大師慧眞塔龜趺-二首보물 제6호.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9-3. 975년에 세운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비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1915년 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진 비신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비신없이 귀부와 이수만 맞물려 있다.원종대사부도비 귀부와 이수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귀부와 이수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태산 같은 힘을 분출시키고 있다. 전체적으로 각이 깊고 뚜렷하여 귀부의 튀어올라온 거북등만 보아도 그 힘을 당할 장사가 천하에 없을 듯이 보인다. 치켜 올라간 꼬리가 험상궂기 이를 데 없고, 콧등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부릅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여의주를 물지 않은 게 특이하다.

원종대사 혜진탑[편집]

元宗大師慧眞塔

보물 제7호.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산 46-1. 원종대사 입적 19년 만인 고려 경종 2년(977)에 화강석으로 조성한 부도이다.나말여초에 유행했던 팔각원당형의 기본형식에 각 부의 수법이 섬세하고 우아하면서도 다소 시대적인 특징도 드러나고 있다. 4매석이 맞물려 짜인 넓은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4매로 짜인 사각의 하대구조가 특이하다.

창덕궁 측우대[편집]

昌德宮測雨臺

보물 제844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83-1(영능전시관). 직경 16.2cm, 길이 4.3cm의 구멍이 파여 그 안에 측우기를 앉혀 놓게 되어 있다. 본래 창덕궁 금문원(檎文院)에 설치되었다가 1920년경 경성박물관 앞 계단으로 옮겨 전시하였다가

6·25전쟁 때 측우기는 없어지고 측우대만 남아 창경원(昌慶園) 명정전(明政殿) 뒤에 전시되었다. 이후 1960년 말에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겼다가 1970년 후반에 영능 전시관으로 옮겼다.자체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조선 정조 6년(1782) 6월과 7월 사이에 계속된 가뭄에 비가 오기를 기원하고 기다리며 이를 제작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명문은 심염조(沈念祖)가 찬(撰)하고 정지검(鄭志儉)이 썼다.

현등사 삼층석탑[편집]

懸燈寺三層石塔

유형문화재 제63호. 가평군 하면 하판리 산163. 신라법흥왕 때 도선국사가 인도의 고승 다라아미를 위하여 건조한 탑. 높이 3.7m로 자연석반을 지대석으로 하고 그 위에 4각하대석과 낮은 상대 중석, 다시 두터운 상대 갑석으로 기단부를 이루고 있으며 아무런 조각이 없는 4각 개신 위에 1층 개반석은 상대 갑석보다 넓으나 2층부터는 개와 개반석의 크기가 차차 작아졌으며 각 개반석은 4귀가 들리고 곡률이 큰 것이 특징이다.

현등사 소장 봉선사종[편집]

懸燈寺所藏奉先寺鐘

유형문화재 제168호. 가평군 하면 하판리 산 163. 조선조 15대 임금인 광해군 11년(1619)에 봉선사에서 제작한 조선 중기의 범종으로 현재 현등사 법당 안에서 의식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단아한 모습의 장식석이 돋보이는 중종(中鐘)으로, 쌍용이 어우러진 모양의 종뉴 아래 포탄형의 종신(鐘身)이 연결된 모양이다. 종신의 외형선은 종의 윗부분으로부터 아랫부분을 향해 벌어지며 내려오는 선형(線形)이다.전형적인 한국종의 특징인 음통(音筒)이 없고, 종신에는 띠 장식이 둘러져 부분적으로 중국종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사실적인 조각 수법이나 뛰어난 풍만감, 짜임새 있는 표면구조, 생동감 넘치는 장식문양 등에서 우수한 범종(梵鐘)이다. 조선시대 범종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