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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울산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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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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檢丹里遺蹟

사적 제332호. 웅촌면 검단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환호(環濠) 유적. 1990년 2

4월에 실시된 부산대학교 박물관조사팀의 발굴조사 결과 환호 1기(基), 환호 안쪽에서 집터 93기, 수혈(竪穴) 3기, 가마터 2기, 고인돌 3기 등의 중요유적과 석촉, 돌칼 등 49점의 석기와 민무늬토기〔無文土器〕등 422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곳이 BC 4세기 무렵 청동기시대 전기의 중요한 유적으로 밝혀졌다.

울산 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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蔚山鶴城

사적 제9호. 중구 학성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왜성(倭城)으로 증성(甑城)·시루성이라고도 한다. 울산시의 남동쪽을 흐르는 태화강 어귀의 삼각주에 있는 해발고도 50m의 학성산 정상부 대지상에 본성을 쌓고, 서쪽 산중턱에 한층 낮게 외성을 두었다. 본성의 주위에는 참호와 토루를 둘렀으며 동쪽 1km 지점의 반구동(半鷗洞) 강변에 소규모의 토성을 배치하였다. 본성의 성곽은 동서 90m, 남북 35m이며 화강암과 잡석을 3

8m 높이로 경사지게 쌓은 2개의 성문을 북향으로 설치하였다.석축 방식이지만 4면 귀를 모가 나게 돌출시켰는데, 이는 다른 왜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이 성은 정유재란 당시 남해안까지 패퇴한 왜군이 방위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 충당한 것이었다. 이 성을 근거로 1597년(선조 30) 12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등은 조·명 연합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반구대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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盤龜臺岩刻?

국보 제285호.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암각화이다. 태화강 상류 반구대 일대의 인공호 서쪽 기슭에 북쪽으로 향한 암벽에 새겨졌다. 댐의 축조로 인해 평상시에는 수면 밑에 있다가 물이 마르면 그 모습을 보인다.크기는 가로 약 8m, 세로 약 2m이고, 조각은 암벽 밑에까지 부분적으로 퍼지고 있어 밑에서부터 암각화 상단선까지의 높이는 3.7m 정도이다. 반반하고 매끈거리는 병풍 같은 바위면에 고래·개·늑대·호랑이·사슴·멧돼지·곰·토끼·여우·거북·물고기·사람 등의 형상과 고래잡이 모습, 배와 어부의 모습, 사냥하는 광경 등을 쪼아서 표현하였다.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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澗月寺址石造如來坐像

보물 제 370호. 대좌의 일부와 광배가 없어졌으나 전체의 형태는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머리 부분은 목 이상이 떨어진 것을 복원한 것으로 머리카락은 나형(둥근 소용돌이 모양)이며, 육계(부처 머리 끝에 상투처럼 솟은 모양)는 넓적하고 커서 머리와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넉넉하고 둥근 얼굴에 작고 단정한 입과 긴 눈, 짧은 귀의 모습에서 온화하고 인간적인 부처의 얼굴임을 느낄 수 있다. 손의 모양은 항미촉지인이며, 신체는 풍만하지만 입체감이 없어 펑퍼짐한 모습이다.대좌는 3단으로 구분된 연화좌(연꽃 모양으로 만든 자리)인데, 화려한 편이다. 이러한 내용의 형식들은 모두 9세기 신라말 불상조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불상의 높이는 1.35m이다.

망해사지 석조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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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海寺址石造浮屠

보물 제173호. 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옛날에는 동쪽과 서쪽에 똑같은 모양의 2개 부도였으나, 동쪽 부도는 일찍이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세웠다. 높이는 약 4m이다.상륜(탑의 맨꼭대기 장식)은 두 탑 모두 없어졌으나 일부가 별도로 보관되어 있다. 이 부도들은 팔각원당의 신라시대 조각수법에서 다소 특징없이 섬세한 모습이 엿보이나 우아함과 단아함을 잃지 않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훌륭한 작품에 속한다. 망해사지는 처용설화와 관련있는 절터로써 신라 헌강왕(875~885)때 세워졌다고 하며 여기서 보면 아득히 처용암이 있는 바다가 보인다고 한다.

태화사지 12지상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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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和寺地十二支像浮屠보물 제441 호.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67번지. 우리나라 속종형 부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표면에 십이지상을 조각한 것으로는 유일한 고승의 사리탑이다. 장방형의 대석 위에 석종형의 탑신을 안치한 형태이며, 그 탑신의 앞면에 감실을 설치하고 하단에는 십이지상을 양각했는데,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 형상이다. 십이지상은 능묘와 석탑에는 보이나 부도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남쪽은 오상(말)이고 북쪽은 자상(쥐)이다.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632~647, 재위) 때 창건한 것으로 전하나 이 부도는 그 뒤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러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110m, 하경 90cm이다.

천전리 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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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前里刻石

국보 제147호.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다.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 중상류 계곡물가의 판판한 바위면(9.7m×2.7m)에 새겨진 선사시대 마애조각이다. 바위면에는 아래위 2단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내용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윗부분에는 신라시대 선각(선모양을 새김) 그림과 명문(글을 새김)이 있다.기하학 무늬는 마름모무늬, 겹동그라미무늬, 우렁무늬, 물결무늬, 가지무늬 등 다양하며, 각 무늬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바뀌어 있다. 동물상은 주로 왼쪽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데 사슴·호랑이 같은 동물들이 암수 두 마리가 마주보면서 서있는 독특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겹동그라미는 태양을 상징하는데, 대체로 이러한 기하무늬들이 뜻하는 것은 이곳이 청동기시대 이후 농경사회의 풍요와 종족번성을 기원했던 신앙의식이 행하여진 제천단이었음을 나타낸다.아랫부분의 선각 그림과 명문들은 이곳에 찾아온 신라 법흥왕 26년 입종갈문왕이 순례한 기념으로 적은 글과 그림이다. 말을 타고 가는 모습, 큰 돛을 단 범을 새겼는데, 이러한 선각그림과 글씨는 신라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신라화랑 수련장으로 추정되어 크게 주목된다.

석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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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南寺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 여승 수도의 도량. 가지산 보림사의 개종자 도의가 헌덕왕 16년(824)에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 제18대 헌종 15년(1674년) 탁영, 석천선사에 의하여 중건되고 다시 또 조선 제23대 순조 3년(1803년) 침허, 수일 등의 선사가 중수하였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해진데다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그 후 비구니인 인홍 스님께서 주지로 부임, 석남사를 재건했다.대웅전, 극락전, 정수원, 강선당 등의 건축물이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정조 15년(1791)에 세웠다는 극락전이고 다음이 순조 3년에 세운 대웅전이다. 이 사찰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부도 1기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삼층석탑, 수조 등 귀중한 문화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