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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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편집]

佛國寺

사적 및 명승 제1호. 신라 법흥왕(法興王) 22년(535)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 즉 8세기 중엽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다시 창건되었다. 신라 당시의 석축물들을 그대로 남기고 있어 유명하다. 본래는 수심 전각(殿閣)이 있던 거찰(巨刹)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지상건물 일체가 불타버렸다. 사역(寺域)은 높은 석단(石壇)에 의해 상하 양단으로 나뉘고 그 양단은 동쪽이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서쪽은 칠보교(七寶橋)·연화교(蓮花橋)로서 두 개의 쌍교(雙橋)로 연결되는데, 원래는 다리 아래 아치 밑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대웅전(大雄殿)이 있는 위쪽은 홍교(虹橋)를 타고 올라가는 천계(天界)로 꾸며지며 있었다. 상단사역(上壇寺域)은 동쪽 지역, 서쪽 지역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동역(東域)은 북으로부터 강당(講堂), 대웅전, 쌍탑, 중문(中門, 紫霞門이라고 하며 국보 제23호). 중문 좌우에는 종루(鐘樓), 그리고 중문과 대웅전, 강당을 연결하는 회랑이 있는 부분이다. 한편 서역(西域)은 서방정토(西方淨土)를 표시하는 뜻에서 극락전(極樂殿)을 중심 건물로 하고 그 앞에 석등, 그 좌우에 승방(僧房)이 있고 중문으로 안양문(安養門)이 있다. 이 동서의 건물군(群)이 서 있는 상단(上壇)의 석축은 상하단으로 되어 있다. 하단에는 자연석을 쌓고 상단에는 다듬은 돌로 쌓아 안정감을 내게 하였다. 대웅전 앞의 쌍탑(多寶塔·釋迦塔)은 8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신라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를 최대한으로 과시했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寺刹)은 공식적인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부분부분의 구조, 또는 각개 독립건물의 구조에 있어서 참신하고도 기지있고 또 유서가 있는 건축설계를 하고 있다. 무의미한 크기보다 깊이 있고 멋있는 불도량(佛道場)를 만들려는 의도가 역력히 보이며, 그것이 석공(石工)의 묘기와 합쳐져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사찰을 만들어내고 있다.

불국사 석가탑[편집]

佛國寺釋迦塔

국보 제21호. 불국사 쌍탑의 하나인 서탑(西塔)으로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불린다. 높이 7.4m, 기단의 폭 4.3m로 2층이나 되는 웅대한 기단과 탑신의 아름다움이 조화된 신라식 석탑의 좋은 예이다. 2층 기단 위는 순백의 화강암으로 건립했고 상륜(相輪)의 일부가 없어졌을 뿐 완전한 형태의 3층탑이다. 단순 소박하고 장중 우직하며 남성적인 점에 있어서 같은 쌍탑인 다보탑과 대조되는데 이와 같은 다른 형태의 탑을 배치시킨 쌍탑가람식 배치는 매우 독특하다.

불국사 다보탑[편집]

佛國寺多寶塔

국보 제20호. 불국사의 동탑(東塔)으로 535년(법흥왕 22년)에 창건되었다. 정통석탑(正統石塔)의 형식을 벗어난 신라의 독창적인 석탑양식을 보이는데 신라 전성기 석조예술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다. 방형의 이성기단(二成基壇)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올라가면서 팔각형 주부구조(八角形主部構造)를 이루는 특이한 탑파형식을 가졌다. 상륜부에 보주(寶珠)가 없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았으며, 총높이 10.4m, 기단 폭 4.39m이다. 석조탑이면서도 경쾌한 맛이 흡사 목조탑과 같고 층층이 변화를 주어 번잡한 듯하면서도 전체의 통일을 이룬다. 어떻게 보면 석조건물이나 목조건물에서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묘취(妙趣)를 느끼게 하는 장려하고 단아한 탑이다.

불국사 사리탑[편집]

佛國寺舍利塔

보물 제61호. 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등형의 탑이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형 하대석, 그 위에 팔판간석(八瓣竿石) 받침을 얹고 긴 운문간석(雲文竿石)을 세워서 앙련(仰蓮) 상대석을 놓아 기단부를 구성했고, 그 위에 원통형의 탑신석, 팔각 옥개석을 얹었다. 간석을 길게 하고 탑신석 4면에 감(龕)을 만든 것 등은 처음부터 석등형의 부도를시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연판(蓮瓣)의 모습이나 조각의 솜씨가 신라시대의 그것을 연상시키나 하대석 주위의 삼화문안상(三花紋眼象)은 그 시대가 이미 고려로 들어간 것임을 보여준다.

안압지[편집]

雁鴨池

경상북도 경주시 북동쪽에 있는 연못이다. 30대 문무왕 때 신라의 지도 모양으로 임해전(臨海殿)의 앞에 판 못인데 지금은 갈대·싸리 등으로 덮여 그 자취만 남아 있다.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을 세우고, 연못 가운데에 세 개의 섬을 만들어 놀기도 하였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 안에 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고 한다.

분황사[편집]

芬皇寺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던 신라시대의 절. 신라 선덕왕 3년(634)에 완성되었다. 이 절에는 신라시대의 명승 원효(元曉), 자장(慈藏) 등이 주석(柱錫)했고, 솔거의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벽화도 있었다. 또 경덕왕 14년(755) 장인(匠人) 강고내미(强古乃未)가 조성한 무게 30만 6,700근의 약사동상(藥師銅像)도 있었다. 사역은 축소되고 황폐되어 원래 모습을 찾기 어렵고 오직 석탑(국보 제30호)과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다.석탑은 널리 토석기단 위에 안산암 석재를 전(塼)과 같은 모양으로 가공하여 건조하였다. 이 탑의 외형은 전탑과 같으나 사용된 탑재(塔材)는 석재를 사용하였고 다만 전탑 건조와 같은 수법을 썼기 때문에 옥개석(屋蓋石) 받침과 낙수면은 모두 층단(層段)을 이루어 전탑 특유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탑은 현재 3층만을 남기고 있다. 원래는 7층 내지 9층은 되었으리라고 생각되나 일찍이 퇴락되었던 것이 조선시대에 사승(寺僧)의 잘못으로 다시 허물어졌다. 이 석탑은 『삼국유사』 “양지(良志)”의 전탑 축조의 기록으로 보아 이 석탑에 앞서 전탑이 존재하였음을 알리고 그 전탑을 모방하여 전탑과 같은 수법의 석탑을 건조하였다고 보아야 하겠다. 삼국시대 고신라의 유일한 탑파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석굴암[편집]

石窟庵

국보 제24호. 경상북도 월성군 토함산에 있다. 바위산에 굴을 파고 도량(道場)을 만드는 방법은 인도(印度)에서 시작했으며 차이트야(Chaitya, 塔院) 또는 뷔하아라(Vi­hara, 僧院)라고 불리는 석굴이 서기전부터 있었다.경주(慶州)의 석굴암은 8세기 중엽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이와 같은 배경 아래서 신라인이 고안해 낸 한국적인 석굴이라 하겠다. 전방후원(前方后圓)의 평면형은 인도나 중국 석굴의 어느 것과도 통하고 있지만 화강암으로 궁륭천장(穹?天障)의 석실을 축성한다는 것은 당시의 석실분(石室墳) 축성법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동쪽 봉우리 아래 암벽 밑 샘터 부근을 터로 하였으며 암벽의 석재를 채석하여 봉토분(封土墳) 모양의 인공석굴을 축성하였다. 이 석굴을 주배전(主拜殿)으로 하는 사찰건물이 그 전면에 있었고 이 전체를 석불사(石佛寺)라 명명하였는데 석굴은 전방후원의 기본형식을 따른다. 원형주실(圓形主室)과 방형전실(方形前室)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하는 간도(間道=扉道)로 구성되었고 전체의 방향은 동동남(東東南), 즉 동해 쪽을 향하고 있다.주실의 크기는 직경 약 7m에 천장 높이 약 8m이며 간도의 폭은 3.4m, 길이 2.8m, 전실은 폭 약 6.5m, 길이 약 4.5m가 된다. 주실은 석재로 쌓은 궁룡천장이고 그 위에 봉토를 덮고 있다. 전실에는 좌우 양벽에 팔부신장(八部神將)을 각 4구(軀)씩 높이 약 2.65m, 폭 1.2m의 화강암석판에 양각하여 세웠고, 그 석판 아래에는 높이 약 0.8m의 안상석(眼象石)을 두 개의 조각을 받들도록 받쳤다. 전실의 북쪽벽 좌우에는 각 1구씩의 인왕상(仁王像)이 세워져 있다. 간도 좌우벽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그리고 주실 입구에는 좌우 팔각석주(八角石柱)가 하나씩 서 있다.주실은 중앙에 결가부좌(結跏趺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높이 3.26m의 석가여래좌상이 높이 1.58m의 대좌(台座) 위에 앉혔고 주위 벽에는 전실과 같은 안상대석 위에 15개의 조각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좌우 5개씩 총 10개의 감실(龕室)을 벽면에 만들어 그 속에 원각(圓刻)된 여러 보살좌상을 하나씩 앉혔다. 본존불 뒤,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앞에 대리석제의 작은 탑이 있었다고 하나 1908년 이래 분실되었다.본존 주위의 불상들은 입구 좌우 제1석(石)이 각각 천부(天部), 제2석이 보살상이고 나머지는 본존 후면 중앙에 십일면관음보살상을 두고 그 좌우에 각 5구씩 합해서 10대 제자(弟子)의 상을 배치하였다.

첨성대[편집]

瞻星臺

국보 제31호. 경주에 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왕 때의 일로, “이 왕 때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是王代鍊石築瞻星臺)”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축조연대를 알 수 없다. 형태는 밑에 방형 이중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작은 가공석재로 평면원형으로 쌓되 밑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상부에서는 직선으로 올라간다. 정상에는 장대석으로 이중의 정(井)자형 석재를 얹었다. 27단으로 구성된 전체의 높이 30척이다. 사용된 석재는 366개이며 남면 중앙에서 약간 위로 방형 창구가 있어 이곳으로 내부에 들어가 다시 정상까지 오르내리게 되었던 모양이고 정상에는 따로 시설이 있어 그곳에서 성숙의 운행을 관측하여 길흉을 판단하였던 듯하다. 첨성대를 축조한 석재는 처음부터 첨성대의 외형이 설계되어 그 설계에 맞추어서 가공된 듯하며 외형은 매우 부드러운 곡선을 나타내고 있다. 첨성대는 현존하는 동양최고의 천문대라는 점에서뿐 아니라 당초 설계에 있어서도 상당한 배려와 연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오릉[편집]

新羅五陵

사적 제172호. 경상북도 경주 남쪽 약 2km 지점, 문천(蚊川) 남안의 송림 속에 있는 능묘(陵墓)이다. 신라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그의 왕비 알영 부인(閼英夫人)·남해왕(南解王)·유리왕(儒理王)·파사왕(破寺王)의 능이라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시조의 시체가 승천한 후 7일 만에 떨어진 것을 5개소에 매장한 것에서 오릉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천마총[편집]

天馬?

신라 22대 지증왕(智證王)의 능으로 추정되는 경주의 고분(古墳)이다. 지름 47m, 높이 12.7m이며, 1973년에 발굴되어, 천마도(국보 제207호), 금관(국보 제188호), 금모(국보 제189호) 등 11,297점의 부장품(副葬品)이 출토되었다. 유물 중에 순백의 천마(天馬)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그림이 그려진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천마도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그 밖에 서조도(瑞鳥圖)와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도 출토되었다.

경주 석빙고[편집]

慶州石氷庫

보물 제66호. 얼음을 저장하기 위하여 만든 석조 창고로서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사용하였다. 경주시 인왕동(仁旺洞) 월성(月城)의 북쪽 축조되었다.길이 18.8m, 홍예(紅霓) 높이 4.97m, 너비 5.94m이다. 남북으로 길게 조영하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는데 너비 2.01m, 높이 1.78m이다. 여기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빙실의 밑면도 외부의 형태와 같은 직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바닥 중앙에 배수구가 있어 내부의 물이 이 경사를 따라 외부로 배출된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벽은 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렸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지대석(址臺石)을 삼아 견실하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 준다. 환기 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房]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더 깊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다.조선 후기에 몇몇 석빙고를 축조하였으나, 그 규모나 기법에서 경주석빙고가 가장 정연한 걸작으로 꼽힌다.

황룡사지[편집]

皇龍寺址

사적 제6호. 경상북도 경주에 있던 대찰로 목조건물이었다. 신라 24대 진흥왕 때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 14년(645)에 완성하였다. 구층탑(九層塔)과 장육존상(丈六尊像)이 있었고, 신라 호국신앙(護國信仰)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고려 23대 고종 25년(1238) 몽골의 병란으로 소실되었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창건설화에 의하면 신궁을 지으려 하였으나 황룡(黃龍)이 나타나므로 신궁건축의 계획을 바꾸어 황룡사를 지었다는 호국·호법의 신인 용과의 특이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황룡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어느 사찰보다도 월등히 많이 볼 수 있다.

감은사지[편집]

感恩寺址

사적 제31호.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던 절이다. 신라 31대 신문왕이 부왕(父王)인 30대 문무왕(文武王)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682년에 지은 것이다.

감은사지 쌍석탑[편집]

感恩寺址雙石塔

국보 제112호. 월성의 감은사지에 있으며 의성탑리 오층석탑에 이어 초기 전형양식을 가진 신라식 석탑으로서 건립 연대(682년)가 뚜렷한 점이 주목된다. 동서 양탑이 모두 3층이고 그 정상부까지의 총 높이는 약 9.5m로서 그 위에 약 3.4m의 철찰주(鐵刹柱)가 더 올라가 있다. 이 탑은 중성기단(重成基壇)이라는 발전된 기단형식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단부가 넓고 높아졌고 탑신부에 있어서도 층수가 줄고 각 층이 일정한 체감률을 가지고 올라간다. 옥개석(屋蓋石)은 네 귀에서의 반전(反轉)이 뚜렸해지고 처마끝이 수직이 아니라 사각(斜角)을 이루도록 잘라졌는데 탑신과 기단이 모두 당당하면서 서로 조화가 되고 전체적으로 매우 균형잡힌 안정감을 준다.

감은사지 석탑사리구[편집]

感恩寺址石塔舍利具

1959년 12월 감은사지의 서3층석탑(西三層石塔)을 보수할 때 발견한 장치함이다. 높이 24cm의 금동제 각주형기(角柱形器)로서 바닥에 간단한 다리가 붙고 밑이 평평하고 사각추형(四角錐形)을 이룬 뚜껑을 가졌다. 뚜껑의 표면은 각면마다 양주(陽鑄)된 봉황문이 특수한 접착제로 붙여졌고 뚜껑 둘레에는 연화문과 삼엽화문(三葉花紋)이 장식되고 꼭대기에는 사릉화형(四菱花形) 손잡이가 달렸다.

의성탑리 오층석탑[편집]

義城塔里五層石塔

보물 제77호.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에 있다. 신라 석탑의 초기형식을 보이는 석탑으로 초층 옥신(初層屋身)은 목조건물을, 옥개석은 전탑(塼塔)을 모방한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총높이 9.65m로서 단층기단(短層基壇) 위에 섰는데 기단은 모두 별석(別石)으로 된 지대석(址臺石), 우주(隅柱), 탱주(?柱), 중석(中石) 등으로 조성, 각 기둥과 초층 옥신의 구조는 상촉하관(上促下寬)의 엔터시스를 가지고 있어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에서와 같이 목조건물을 모방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목탑과 전탑 형식을 혼합하면서 전체적으로 전탑적인 외관을 갖췄고 단층이기는 하나 기단의 형식, 옥신, 옥개석의 형식 및 기단 갑석상면(基壇甲石上面)의 괴임 등이 이른바 신라 석탑형식의 방향을 제시하여 모든 신라 석탑의 출발점이 되는 시원형식(始源形式)을 가지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포석정[편집]

鮑石亭

사적 제1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의 서쪽에 있는 석구. 『삼국유사』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 서쪽 이궁원에서 연회를 베풀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시냇물을 끌어들여 포어(鮑魚) 모양으로 만든 수구에 흐르게 하고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시회(詩會)를 벌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

봉덕사종[편집]

奉德寺鐘

국보 제29호. 통일신라시대(771)에 주조된 종으로, 에밀레종 또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라고도 한다. 현재 경주 박물관에 있다. 전체의 높이 3.78m, 구경(口徑) 2.27m, 아랫부분의 두께가 23cm나 되는 큰 종이다. 긴 명문이 있는데 성덕왕(聖德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경덕왕(景德王)과 혜공왕(惠恭王)의 2대에 걸쳐 어린애를 희생하는 전설까지 낳고 고심 끝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당좌(撞座)는 유곽 사이 아래에 1개씩 두 개가 있으나 비천이 쌍비천이 아닌 점이 특이하다. 무늬대의 보상화문(寶相花紋)이 도안이라기보다는 사실적으로 물결치듯이 힘있게 묘사되고 비천의 모습도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어 원숙한 신라 성기(盛期)의 미술을 보여주는 걸작품이라 하겠다.

문무대왕릉[편집]

文武大王陵

사적 제158호. 신라 문무왕의 해중왕릉(海中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이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고 한 유언을 따라서 장사한 것이다. 이 바위를 대왕암(大王巖) 또는 대왕바위라 하며,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둘200m로서, 수로를 만들어 바다로 물이 통하게 하였다. 1967년 발견되었으나 이곳이 진짜 문무왕릉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다.

김유신묘[편집]

金庾信墓

사적 제21호.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무덤이다.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한 호석(護石)으로 장치한 원형 토분(圓形土墳)이다. 묘 앞에는 신라태대각천김유신묘(新羅太大角天金庾信墓)라고 새긴 묘표가 있으나 그의 묘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경주 흥륜사지[편집]

慶州興輪寺址

사적 제15호. 신라 최초로 세워진 절인 흥륜사의 절터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에 있다.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금당·탑·좌경루·남문·강당 등이 절 안에 있었고, 보현보살의 벽화도 있었다고 한다.

태종무열왕릉비[편집]

太宗武烈王陵碑

국보 제25호. 통일신라 초기의 화강석 비석.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다. 무열왕릉 전방 약 40m 좌측에 머리를 서남을 향하여 세웠는데, 오늘날 몸통 부분은 현재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귀부는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목을 길게 앞으로 빼었으며 그 위 아래에는 보상화(寶相華) 무늬를 조각하였다. 이수에는 좌우에 3룡식(三龍式) 6룡이 반결쟁주(蟠結爭珠)하는 모양을 표현하였고 전면 중앙하부에 높이 42cm, 폭 33cm의 액(額)을 만들고 그 안에 전서(篆書)로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가 양각되어 있다. 사실적인 표현과 능숙한 기법으로 우리나라의 여러 비석조각 중에서도 최대의 걸작으로 꼽힌다.

서출지[편집]

書出池

사적 제138호.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못으로, 신라 소지왕(昭智王) 때, 이 못 근처에서 왕비의 비행(非行)을 알리는 글발이 전해졌다는 고사가 있다.

봉정사[편집]

鳳停寺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天燈山)에 있는 절로 신라 30대 문무왕 12년(672)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했다. 이 절의 극락전(極樂殿)은 국보 15호이며, 대웅전(大雄殿)은 보물 5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이다.

봉정사 극락전[편집]

鳳停寺極樂殿

국보 제15호. 봉정사 경내에 있다. 정면 3간, 측면 4간의 맞배집이며, 영주시 부석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마당에는 경북 유형문화재 제182호인 3층석탑이 서 있다. 건립 시기는 주심포식인 점에서 고려 중기로 보는 견해와 고려 말기로 추측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봉정사 대웅전[편집]

鳳停寺大雄殿

보물 제55호. 봉정사 경내에 있는 건물이다. 일반 법당과는 달리 건물 앞쪽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단청이 오래 되어 그런지 전체적으로 고풍스런 느낌이 든다. 조선시대 초기에 건립된 듯하며, 정면과 측면이 모두 3간인 단층집으로 팔작(八作) 지붕을 가진 전형적인 다포(多包)집이다.

봉정사 화엄강당[편집]

鳳停寺華嚴講堂

보물 제448호.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봉정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건물이다. 1969년 해체·복원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588년(선조 21)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장대석(長臺石) 댓돌 위에 두꺼운 널판을 쪽마루처럼 깔았고,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달았다. 한때는 강당으로 사용되었던 듯하나 지금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석사[편집]

浮石寺

경상북도 영주시 봉황산 중턱에 있는 절로 676년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특히 화엄의 큰 가르침을 베풀던 곳으로, 의상을 “부석존자”,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이라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1372년(공민왕 21) 주지가 된 원응국사(圓應國師)에 의해 많은 건물들이 다시 세워졌다. 경내에는 무량수전·조사당·소조여래좌상·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 등의 보물을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의 문화재가 있다.

부석사 조사당[편집]

浮石寺祖師堂

국보 제19호.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고려시대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낸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무량수전과 같은 주심포 집이지만 소루·주두의 측면이 직선으로 되고 굽받침이 없어지며 첨차의 하단이 다각(多角)으로 잘리는 등 다포집 계통의 요소를 보인다. 건립 연대는 1916년 개수시에 발견한 묵명(墨銘)에 의해 북원(北元) 선광(宣光) 7년, 즉 우왕(禑王) 3년(1377)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이나 조사당 모두 송(宋)을 통해 들어온 천축계(天竺系) 양식이거나 그것을 절충한 건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편집]

浮石寺無量壽殿

국보 제18호. 부석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양식상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목조건축 중 제일 오래 된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중옥식(重屋式) 팔작(八作) 집이다. 1916년의 해체 수리시에 나온 명문에 의하면 1358년에 왜구(倭寇)에 의해 불태워진 것을 우왕(禑王) 2년(1376)에 재건한 것이라 하나 세부에 있어서 14세기의 건물보다 훨씬 고식이며 적어도 13세기의 것이 아니면 그러한 고식 양식을 재현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부석사 석등[편집]

浮石寺石燈

국보 제17호. 부석사의 무량수전 앞에 있으며, 높이 2.97m이다. 8각을 기본형으로 한 화강암 제품으로 통일신라시대 때 세운 것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신라시대의 석등 가운데 최고로 꼽는다.

부석사 아미타여래좌상[편집]

浮石寺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45호. 부석사 무량수전 안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높이 2.78m로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또한 온몸이 금빛찬란하여 매우 정교한 솜씨로 지어졌는데, 흙으로 빚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직지사[편집]

直指寺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황악산에 위치한 조계종 25교구 본사이다. 신라 19대 눌지왕 2년(418)에 묵호자(墨胡子)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중건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조선 15대 광해군 2년(1610)에 재건하였다.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편집]

直指寺石造藥師如來坐像보물 제319호. 직지사 경내에 있다.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전체 높이 1.6m, 불상 높이 1.26m이다. 불신과 광배(光背)가 1개의 돌로 조각된 상으로 사각대석 위에 놓여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과는 다른 빈약한 체구, 어색한 손의 위치, 간략한 옷주름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직지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편집]

直指寺大雄殿-三層石塔

보물제606호.전체높이 8.1m, 탑 높이 5.3m. 원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었던 도천사 자리에 파손, 산재해 있던 것을 1974년 직지사 주지 오녹원이 이곳에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고, 탑봉 상륜부는 1976년 전문가(한수영 박사)의 고증으로 복원되었다. 8개의 석주와 8면의 석판으로 된 초대 위에 4개의 석주와 4개의 석판으로 정방체를 이룬 탑신이 조화를 이루어 안정감을 주는 거탑이다. 1층과 2층은 6단, 3층은 5단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조성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직지사 비로전 앞 삼층석탑[편집]

直指寺毘盧殿-三層石塔

보물 제607호로 전체높이는 8.1m, 탑높이는 5.3m이다. 원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뒷산에 있었던 도천사 유허지에 되괴된 채 산재한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상륜부는 없어져 1980년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복원했다. 탑의 규모가 크고 전체적으로 조형미가 우수한 작품으로 대웅전 앞 삼층석탑과 수법이 같으며 한 사람이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상세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도선국사가 도천사를 창건할 때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편집]

直指寺大雄殿-三尊佛幀畵보물 제670호. 비단바탕, 채색 3점 1괄1. 약사여래불화(좌) 6m×2m 2, 석가여래불화(중) 6m×2.4m 3, 아미타불화(우) 6m×2m이다. 영조 11년(1735) 대웅전 중건 때 진기, 지영 두 스님이 불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9년 만인 영조 20년(1744) 5월에 완성, 봉안했다.중앙의 그림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현 두 보살과 범천·체석천 및 십대제자를 배치했다. 왼쪽 그림은 약그릇을 든 약사여래가 중앙에 안좌하고 주위에 일광·월광 등 8보살과 사천왕 12신장이 에워쌌다. 오른쪽 그림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세지 등 보살과 신장들이 둘러싼 구도이다.전체적으로는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안정감이 있고, 비범한 묘사와 정교한 장식표현은 생동감이 있으며, 주위에 그려진 범서가 특이하다.

하회마을[편집]

河回-

중요민속자료 제122호.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동의 풍산 유씨들이 모여사는 마을. 낙동강물이 이 마을을 감싸고 S자로 흐르기 때문에 물돌이동, 즉 한자로 하회(河回)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크게 공을 세운 서애 유성룡이 태어난 마을이며, 하회탈춤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양반들이 살던 가옥과 노비들의 초가집 등 130여 채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하회별신굿놀이 등에 이용되던 각시탈·양반탈·할미탈 등 하회탈 11개, 대감탈과 양반탈 등 병산탈 2개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보물 제306호인 양진당, 보물 제414호인 충효당 등이 있다.

충효당[편집]

忠孝堂

보물 제414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생가로 조선 중기에 지은 단층 기와지붕이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다. 규모는 총 52칸이다. 행랑채에 달린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대청 앞에 마주서게 되며 이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대청 정면과 측면에는 난간이 있는 툇마루가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일을 기록한 유성룡의 『징비록』과 『보물 제132호』가 보관되어 있다.

개심사지 오층석탑[편집]

開心寺址五層石塔

경상북도 예천에 있고 고려 현종(顯宗) 1년(1010년)에 건립한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탑파로서 신라식을 계승하고 있다. 하성 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이 하나씩인 네 개의 돌로 되고 각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조각했고 상성기단에는 각면에 탱주 한 개를 두고 팔부신장(八部神將)을 조각했다. 처마가 길게 뻗어 고려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용문사 대장전[편집]

龍門寺大藏殿

보물 제145호.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사에 있다. 조선 중기의 목조 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인 다포계 단층 맞배지붕인 건물이다. 나직한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민흘림 기둥을 세웠다. 이곳에는 높이 4.2m, 둘레 3.15m인 윤장대(보물 제684호)가 있다.

문경 새재[편집]

聞慶-

사적 제147호인 제1, 제2, 제3관문과 그에 딸린 부속 성벽을 통틀어 말한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다. 영남에서 한양(서울)으로 통하는 길이요, 문경·상주 방면으로 가기 위한 소백산맥의 고개로서, 너무 높아서 새들도 넘기 힘들다는 뜻으로 “새재”(조령, 鳥嶺)라 하였다.조선시대 전기부터 개척되기 시작한 새재는 지금의 중성(中城)부터 설치되었다. 중성은 1708년(숙종 34)에 다시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제2관문(조곡관)이다. 이곳에서 다시 3km 쯤 떨어진 지점에 제1관문을 세우고 “주흘관”이라 하였다. 숙종 때 새재 위에 조령산성을 쌓아 북쪽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하였는데, 이것이 곧 제3관문(조령관)으로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룬다. 제1·제2·제3관문의 양쪽 산골짜기에 있으며 관문을 중심으로 좌우 성벽은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다.

문경 관문[편집]

聞慶關門

사적 제147호.

문경 새재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문이다. 제1·제2·제3관문 및 부속성벽을 통틀어 말한다. 옛날에 영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문경에서 주흘산(主屹山, 1,106m)을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도산서원[편집]

陶山書院

사적 제170호. 조선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모신 서원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있다. 퇴계가 죽은 지 4년 후인 조선 14대 선조 7년(1574)에 유림(儒林)에 의하여 그가 만년에 독서하던 곳인 도산 서당의 뒤에 지어져, 이듬해 낙성하고 선조로부터 친필로 된 편액(扁額)을 받았다. 그 후 15대 광해군 7년(1615)에 조목(趙穆)을 배양했다. 왕명으로 이 서원에 제사를 드리게 한 일이 자주 있었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소수서원(紹修書院)·숭양서원(崧陽書院) 등과 더불어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교전당(敎典堂)과 신위를 봉안한 상덕사(尙德祠) 및 그 정문 등은 국보이다. 현재 271종 4,917책의 장서와 장판(藏板) 및 퇴계의 유품이 남아 있다.

소수서원[편집]

紹修書院

사적 제55호.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서원이다. 1543년(중종 38)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을 모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시초로, 1544년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補),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周世鵬)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550년 이황(李滉)이 임금에게 아뢰어 최초로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얻고 나라가 인정하는 사학(私學)이 되었다.

영일 장기읍성[편집]

迎日-邑城

사적 제386호.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127-2 소재. 동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있으며, 그 구릉 아래쪽으로는 장기천이 동해로 흘러 현내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향교만이 복원 유지되고 있을 뿐, 잡초에 묻힌 성벽은 허물어진 곳이 대부분이다. 이 읍성은 일찍부터 동해안을 지키는 다른 읍성들과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였다.동해안의 중요 진성을 들면 울산의 처용암지방·울주군 강동면정자리지방,양남의수념지방·감포·장기·포항·영일지방·흥해·칠포지방들인데 이들 지역은 해안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펼쳐져 있고 삼국시대에는 서라벌을 침공하는 왜구를 방어한 군사기지로, 고려·조선시대에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편집]

迎日冷水里新羅碑

국보 제264호.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342-2 소재. 이 비에는 “신라의 실성왕과 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의 절거리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를 내렸는데 계미년 9월 25일에 지증왕 등 각 부의 대표 7명이 함께 논의하여 두 왕의 조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다음 별교를 통해 절거리가 죽은 후에는 아우 아사노(또는 아우의 아들 사노)에게 재산이 상속되고 미추, 사신지는 재물분배에 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말 것이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중죄에 처할 것임을 결정하였고 이 명령은 중앙기관의 전사인 7명과 지방관서의 촌주 2명이 일을 마치고 이 사실을 기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계미란 간기와 지증왕 등 각 칭호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지어 볼 때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특히 이 비는 국가에서 세운 비로 당시 신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고,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현존 최고의 신라고비이다.고르지 못한 네모꼴의 자연석 앞·뒤·위 3면에 글자를 새겼으며, 매 행별 글자 수와 크기가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앞면이 12행 152자, 뒷면 7행 59자, 윗면 5행 20자로 총 231자가 새겨져 있다.

보경사 원진국사비[편집]

寶鏡寺圓眞國師碑

보물 제252호.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22소재. 고려시대에 제작된 원진국사비는 당초문양이며, 비상단귀점이 톡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원진국사(1187-1221)의 속성은 신씨, 호는 승형, 자는 영회이며, 13세에 희양산 봉암사의 동순에서 삭발하고 이듬해 금산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희종 4년(1208) 금강산 유점사에 머물다가 강종 3년에 삼중대사를 비수하고 고종 3년(1215)에 대선사가 되어 보경사 주지가 되었다. 경진년 봄에 의종은 그의 사자를 삭발하여 대사에게 친속하게 하는 등 왕실의 신임을 받았고 우왕 9년에 입적하자 왕이 국사로 추증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하였다. 비명은 통의대부 추밀원 우부승선성 국자감 대사성 사자금어대신 이공로가 짓고 글씨는 장사랑 대관서승 겸 보문각 교감 김효인이 썼다.비석은 갓이 없고 신석양각을 귀접이한 독특한 형식으로 귀부와 대석은 단일석이고 비좌는 폭이 배면과 같은 정도의 넓이로 주위에 단변 44연변을 조각하였고, 귀갑은 6각형의 갑문내에 왕자를 질서있게 새겼으며, 귀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두화를 조각하였으며 신석 둘레에는 7.4cm의 당초문양을 장식하였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편집]

淨惠寺址十三層石塔

국보 제40호.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소재. 정혜사는 신라 때의 사찰이기는 하나 창건연대를 알 수는 없다. 『동경통지』에는 “신라 제37대 선덕왕 원년(708)에 당의 첨의사 백우경이 참소를 입어 이곳 자옥산 아래에 우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뛰어난 경치터를 골라서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는데 선덕왕도 행차한 바가 있다”고 적고 있다. “후에 이것을 고쳐 절을 마련했는데 곧 정혜사라 한다”고 기록했다.이 절터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의 13층 석탑만 남아 있다. 이 탑은 기초 지대석의 폭이 2m이고, 탑 전체의 높이는 5.9m로서 13층으로 되어 있다. 이 탑의 특징은 처음 층을 크게 부각시키고 2층부터 줄여나가 전체적으로 안정된 조화를 보여주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2층 옥신 4면의 감실모양의 열린 공간을 설치하고 있어 기단축조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특수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독락당[편집]

獨樂堂

보물 제413호.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소재. 독락당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의 사랑채이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건립된 독락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온돌방(1칸×2칸)과 대청(3칸×2칸)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짜임새는 5량에 두리 기둥을 세우고 식서 하나를 둔 초익공(初翼工)의 공포(?包)로 꾸몄다. 대청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고 종도리를 받친 대공(臺工)의 모양이 특이하다. 독락당 옆쪽 담장 살창을 달아 대청에서 살창을 통하여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특출한 공간구성이며, 독락당 뒤쪽의 계정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보여준다.

남간사지 당간지주[편집]

南澗寺址幢竿支柱

보물 제909호. 경주시 탑동 소재. 남산지역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높이 약 3.6m, 폭 66cm, 두께 45cm의 돌기둥으로 기둥의 윗부분과 옆모서리를 줄여 나갔다. 꼭대기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십자형의 간구(竿溝)가 있고, 몸체에는 두 곳에 동그란 구멍이 나 있다. 특히 십자형 간구는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것이다.

남산 미륵곡석불좌상[편집]

南山彌勒谷石佛坐像

보물 제136호. 경주시 배반동(보리사) 소재.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불상이다. 8각(八角)의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별도로 마련된 광배(光背)에는 화불(化佛)과 보상화(寶相華), 그리고 당초무늬(唐草紋)로 장식되어 화려하며 특히 광배 뒷면에는 약사여래상을 가는 선으로 조각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은 그 예가 드물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의 제작으로 보이며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대작이다.

마동사지 삼층석탑[편집]

-洞寺址三層石塔

보물 제912호. 경주시 마동 소재. 화강석(花崗石)으로 만든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3층석탑으로 현재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고 높이는 5.4m이다. 기단은 2겹으로 쌓되 아랫기단의 갑돌 및 가운뎃돌은 각각 8매의 돌을 짜맞추어 만들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석굴암을 조성한 김대성(金大城)과 인연이 있다고 한다. 즉 김대성이 무술을 닦을 때 큰 곰을 잡아 운반하다가 날이 저물어 현재의 석탑이 있는 부근 민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에 곰이 덤벼들면서 절을 지어 주지 않으면 해치겠다고 하기에 이곳 마동에 절을 짓고 몽성사(夢成寺)라고 하였다가 뒤에 장수사(長壽寺)라 개명하였다는 것이다. 이 석탑도 몽성사 또는 장수사라는 사찰과 관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남산 불곡석불좌상[편집]

南山佛谷石佛坐像

보물 제198호. 경주시 인왕동 소재. 높이 3m, 폭 4m 정도되는 바위에 높이는 1.7m, 폭 1.2m, 깊이 0.6m의 감실을 파 그 안에 새긴 것으로 불상의 높이는 1.4m정도이다. 감실은 입구가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석굴의 느낌을 주는 데 단석산의 석굴사원군위 제2석굴암과 함께 석굴양식의 변천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산죽이 무성한 대숲 사이 작은 바위 속에 새겨진 석불좌상은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신라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남아 있는 남산의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남산 탑곡마애조상군[편집]

南山塔谷磨崖彫像群

보물 제201호. 경주시 배반동 소재.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마애조상군의 만다라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리사사적[편집]

桃李寺事蹟

구미시 해평면 냉산에 있는 도리사의 사적과 그 창건자인 아도의 행장록(行狀綠). 목판본. 1권 1책. 인조 17년(1639) 영희(寧熙)라는 승려가 썼다. 책의 첫머리에는 “아도화상(阿度和尙)사적비”의 비문을 실었고, 아도가 어머니 고씨(高氏)를 따라 출가, 승려가 된 내력과 눌지왕(訥祗王) 때 신라에서 불교를 포교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그 후 소지왕의 외동딸의 병을 고쳐주는 등 영험을 보여 왕에게 사찰을 짓게 하였는데, 겨울에도 눈 속에 5색 복숭아꽃과 배꽃이 만발하였으므로 절 이름을 도리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험준한 곳에 있는 금수굴(金水屈)에서 혼자 죽었을 때의 일화 등도 기록 되었다. 말미에는 『신라본기(新羅本紀)』 『계림고기(鷄林古記)』 등에 의거하여 부속암자 및 탑·비·굴 등의 위치와 형태, 또 명사들의 도리사와 관련한 시문(詩文) 등을 적었다.

도리사석탑[편집]

桃李寺石塔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동 도리사 극락전 앞뜰에 있는 화강암석제 석탑. 보물 제470호. 총 높이 4.5m, 기단 높이 1.3m, 기단 너비 3m 안팎.동국대학교에서 보수한 이 석탑은 밑에 얕은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각 면 8개씩의 방주(方柱)를 세워 기단을 삼았는데, 우주(隅柱)를 나타낸 것 같다. 이 위에 약간 넓게 여러 장의 판석(板石)을 덮어 갑석(甲石)으로 삼았다. 또한 갑석 위에는 직사각형의 소석재(小石材)를 삼중으로 쌓아 신부(身部)를 형성하고 다시 약간 넓게 개석(蓋石)을 덮었다. 개석 위에는 2단의 굄이 있어 상층 신부를 받쳤다. 이 위에 크기가 갑자기 줄어든 일석(一石)으로 된 신부가 다시 놓이고 2단의 층단(層段)을 이루고 있으며, 어려운 특수형 석탑이다.

천생산성[편집]

天生山城

기념물 제12호. 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 신장리 산42-2외 11필에 위치하며, 조선시대 때 축조된 것이다. 천생산성은 낙동강 본류를 가로 지른 구미대교에서 정동쪽 4km 지점의 천생산상(天生山上)으로서 선산군 장천면 신장리에 내성(內城), 외성(外城)의 대부분이 걸쳐 있고 성의 북쪽과 남쪽, 서쪽 일부분이 구미시 금전동, 황상동, 신동에 걸쳐 있다. 낙동강을 끼고 절험한 산중에 축조되어 병란 때 인근의 주민을 대피시켜 항쟁하였던 군사요충지로서, 서남향 15km 지점에 유존하는 금오산의 금오산성(金烏山城)과, 동남향 13km 지점에 유존하는 가산의 가산산성(架山山城)과 더불어 영남 일원의 매우 중요한 산성지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산성은 비슷한 형태인 두 개의 산봉우리를 이용하여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자연절벽을 이용한 무성(無城)절벽으로 처리하였고, 북·동·남쪽으로 정상주위를 따라 퇴뫼식으로 축조되었다.

선산 낙산리 고분군[편집]

善山洛山里古墳群

사적 제336호.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위치한다. 원래 낙산 일대는 가야시대와 신라 진흥왕 때 일선주(一善州)의 소재지로서 대규모의 가야, 신라고분이 밀집, 형성되어 있다. 확인된 고분수는 정묘산 64기, 월파정산 81기, 불로산이 60기이다. 1980∼1990년에 효성여대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였고 1990년부터 사적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9기의 고분을 발굴하여 가야시대 등잔을 비롯하여 400여 점의 유물이 수습되어 현재 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편집]

龜尾黃桑洞磨崖如來立像

보물 제1122호. 경상북도 구미시 황상동 산 90-14에 소재하고 있다.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산록에서 툭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면을 쪼아 부조(浮彫)한 높이 7.2m, 어깨폭 2.8m의 거대한 입불상이다. 이런 거대성과 함께 고(高) 부조로 중후하게 조작하여 압도하는 느낌을 준다. 육계와 나발(螺髮)이 구비되어 있고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풍만한 얼굴은 양감(量感) 있는 부피감을 더해 주며, 탄력 있는 곡선, 그리고 우아한 이목구비와 함께 매력적인 장중함을 나타내고 있다. 얇은 불의(佛依)에 감싸인 체구는 터질 듯한 팽만함으로 충만하고 있는데, 당당한 어깨,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아미타불의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변형을 묘사한 두 손, 특히 둔부까지를 강조하여 비만스럽게 보이려 한 점과 좌우로 벌린 거대한 두 발 등에서 다소 둔중스럽게까지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양손을 모으고 지그시 눈을 감은 듯한 이 불상의 응시방향을 연장하여 보면 놀랍게도 정동향으로 천생산성과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선산 해평동 석조여래좌상[편집]

善山海平洞石造如來坐像

보물 제492호.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526에 있는 이 불상은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구비한 좌불상이다. 군데군데 약간의 마멸과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하다.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얼굴은 둥글고 단정하다. 눈, 입, 귀가 모두 작으며 코는 시멘트로 새로 만들었다. 신체는 단정하지만 체구는 작다.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좌상이다. 법의는 통견(通肩)인데 의문(衣文)은 유려하며 배에는 형식적인 띠 매듭이 표현되었다. 광배는 단형거신광(丹形擧身光)인데 꼭지에 약간의 손상이 있고 전면에 풍화현상이 나타날 뿐 거의 완전하다. 두신광(頭身光)은 이중원권(二重原權)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안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이 새겨졌고 두광 중심에는 연화문(蓮花文)이 있다. 모두 신광 주위에는 맨 아래쪽에 향로가 양쪽으로 있으며, 그 뒤에 각각 2구의 화불(化佛), 그리고 제일 꼭지에 삼존불이 조각되었다.주변에는 화도문이 있는데 모든 수법은 섬세하고 화려한 9세기 불상광배양식이다. 대좌는 8각대좌이며, 상대석(上臺石)은 반구형(半球形)인데 중판연화(重辦蓮花) 16엽(葉)이 조각되었다.중대(中臺)는 8각이며 모서리에는 우주(隅柱)가 표현되었고 전면에 여래형 좌상, 양좌 측면과 후면에 꽃가지를, 그리고 다른 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을 조각하였다. 하대(下臺)는 하부의 8각 각 면에 안상(眼象)이 있는데 그 양 끝에 운문(雲文) 비슷한 것이 조각된 것은 특이하며, 상부에는 복판연화문(複辦蓮花文)이 있다. 지대석(地臺石)은 4각인데 각 모서리마다 구멍이 뚫려 있다.

금오산 마애보살입상[편집]

金烏山 磨崖菩薩立像

보물 제490호.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산24-1에 있는 이 보살상은 암벽 모서리에 조각되어 있다.상(像)의 중심선이 모서리여서 양쪽 암벽에다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하며 눈, 코, 입 등도 원만상으로 처리되었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며 목의 삼도(三道)는 명확하지만 목이 짧아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식적인 것이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진 상가의와 그 아래로 내려진 “U”형의 상의(尙儀), 양팔에서 내려진 옷자락 등 모두 묵직하게 표현되고 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두광, 신광 모두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신광은 보주형(寶珠形)을 이루고 있다. 대좌는 입상을 중심으로 반원형이 되게부각(浮刻)되어있다.전체높이는5.55m,몸높이는 4.175m, 대석이 5m의 크기이다.입상 전면의 평평한 대지에는 현재 주초(柱礎)도 있고 기와조각들도 흩어져 있으며 암벽에도 목조가구 흔적이 보이므로 사찰이 건립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편집]

善山洛山洞三層石塔

보물 제469호.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837-1에 소재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때의 석탑이다.이 석탑은 국보 제130호의 죽장동 오층석탑의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거의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기단까지 경작지로 침식되었고 일부 손상을 입고 있으나 한국 석탑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이다.이 석탑이 모전석탑의 계통에 속하는 예임은 옥개석 상면의 기단으로 곧 짐작할 수 있다. 죽장동 석탑과 함께 모전석탑의 분포와 이에 따르는 문화의 유전계통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유례라고 할 것이다. 석탑 자체가 거대한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각 부를 다수의 부재로 구성하였고 기단부의 탱주(?柱) 수가 많음은 건축연대를 고증하는 데 참고가 된다.석재구성에 있어서도 규율성을 잃지 않고 있으며 위풍당당한 장중한 풍도(風度)와 아울러 볼 때 이 석탑의 조립시기는 통일신라 초기로 생각할 수 있다.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편집]

善山竹杖洞五層石塔

국보 제130호.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505-2에 소재하고 있으며 시대는 미상이다. 선산읍 죽장리 죽장사지, 즉 현 법륜사에 있는 탑으로서 화강석으로 쌓여 있으며 총높이 10m가 넘는 거대한 오층석탑으로 기단이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큰 탑이다.탑의 전장은 3m이고 일층옥신은 일변이 2.1m 정도의 입방형으로 하층 전면에는 석간의 자취가 남아 있고 그 내부는 사방형의 소방을 이루고 있다. 18개의 장방형으로 만든 큰 돌로 터전을 잡고 그 위에 상·하 두 층의 단을 마련하고서 5층의 탑신으로 쌓았다. 아래층 단은 14개의 평평한 돌로 짜여 있고 그 위에 다시 18개의 작은 돌로 구성되어 그 규모가 매우 크다. 초층은 6개의 돌로 조립되었고 남쪽으로는 불상을 모셔 놓기 위하여 만든 방이 있는데 이 방을 감실이라고 한다. 현재 그 내부는 비어 있지만 탑을 건립했을 때에는 불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렇게 거대하고 웅장한 석탑을 건립하는 데는 반드시 당시의 나라 힘이나 불교의 위치와 관련되는 일일 것이므로 우리나라 역사상 불교예술이 가장 찬란히 꽃 피었던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지 않았나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