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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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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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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寺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에 있는 절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緣起)가 창건한 것으로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 선덕여왕 12년(643) 자장(慈藏)이 증축,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7층탑·석등롱(石燈籠) 등을 건조하였다. 헌강왕 1년(875) 도선(道詵)이 다시 증축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다. 선조 39년(606) 벽암선사(碧巖禪師)가 7년을 걸려 재건하고 이어 대웅전·각황전(覺皇殿)·보제루(普濟樓) 등이 차례로 복구되었다. 현존하는 부속 건물은 모두 신라시대에 속하는 것으로서 국보로 지정되었다. 각황전 앞 석등(石燈)·3층사자석탑(三層獅子石塔)·동5층석탑(東五層石塔), 서5층석탑 등이 유명하며, 웅대한 건축물인 각황전과대웅전이 이름 높다. 의상대사가 화엄경을 선양하여 화엄 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화엄사 각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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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寺覺皇殿

국보 제67호.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불탄 것을 1643년(인조 21)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재건한 조선시대 중기 및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사찰 건물로 규모에 있어서도 근정전(勤政殿) 다음 가는 큰 사찰이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신라시대의 큰 석단 위에 동향(東向)으로 세운 중층불전(重層佛殿)으로 건립 연대는 18세기 초(1703년)로 되어 있다.

화엄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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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寺大雄殿

보물 제299호. 화엄사에 있는 불전으로 건평 35평, 높이 10.6m의 목조건물이다. 원래의 건물은 정유재란에 소실되고, 현재의 것은 조선 인조(仁祖) 14년(1636)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중건한 것이다. 전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 단층 구조로 된 극히 드문 구조 양식의 건물로, 내부의 불화(佛畵) 및 돌층계 등도 매우 특이하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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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寺覺皇殿-石燈

국보 제12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으로 높이 6.4m, 직경 2.8m이다. 기석은 8각, 간석(竿石)은 병(甁) 모양으로 중간에 띠를 둘렀고, 각 면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현존하는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신라시대 불교 전성기의 특징을 나타낸 대표적 작품이다.

화엄사 사자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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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寺獅子石塔

국보 제35호. 화엄사에 있는 3층석탑으로 사리탑(舍利塔)이라고도 불린다. 높이 7.17m. 하단의 각면에 3구씩으로 도합 12구의 천인상(天人像)을 양각으로 표현했고, 상성기단(上成基壇)의 네 구석에는 앉아 있는 암수사자를 기둥처럼 세우고 그 중앙에 서 있는 스님상을 두어 위의 무게를 받게 하였다. 탑신은 기단에 비해 비율이 작은 느낌이 드나 층급(層級, 받침)은 5단이고 조층에는 각 면마다 문비(門扉)의 문양이 새겨 있으며 그 양 옆에서 인왕상(仁王像)이 배치되어 섬세한 효과를 낸다. 착상이 기발하고 특이한 형식을 갖춘 점에서 불국사의 동쪽 다보탑과 쌍벽을 이룬다.

연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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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寺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있으며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는데,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 소실되고 그 후 중건했다. 여기에는 동부도(東浮屠, 국보 53호), 북부도(北浮屠, 국보 54호), 동부도비(碑, 보물 153호), 삼층석탑(보물 151호), 서부도(西浮屠, 보물 154호),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 보물 152호) 등이 있다.

연곡사 동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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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寺東浮屠

국보 제53호. 연곡사에 있는 부도의 하나로 고려 초에 만들어졌다. 신라식으로 된 기단(基壇)·탑신(塔身)·옥개(屋蓋)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네모진 장대석(長臺石)에 8각의 2층 기단을 두고 각 층에 운룡(雲龍) 사자와 그 밖의 동물 형상을 새겼다.

연곡사 북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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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寺北浮屠

국보 제54호. 연곡사에 있는 부도의 하나로 고려 초기의 건립으로 추측된다. 전체가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그 구조와 형식은 연곡사 동부도와 같으며 8각 탑신의 네 면에 사천왕을 새겼다.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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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廣寺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曹溪山)에 있는 절이다. 신라 말엽에 혜림(慧林)이 창건하여 길선사(吉禪寺)라 하던 것을 고려 19대 명종 27년(1197)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크게 확장하였고, 21대 희종 4년(1208) 보조국사를 비롯하여 15대 국사가 나와 승보 종찰(僧寶宗刹)이라 불리며, 국보인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국사전(國師殿)·경패(經牌)·금동요령(金銅搖鈴) 등의 보물이 있다.

송광사 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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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廣寺國師殿

국보 제56호. 송광사에 있는 전각이다. 낮은 석단(石壇) 위에 천축식(天竺式)의 영향을 많이 받은 조선 초기의 중요한 건축물로서 건립(建立) 당시의 단청(丹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송광사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1998년에 새로 지었다. 보물 제302호인 약사전과 보물 제303호인 영산전이 앞쪽에 있다.

도갑사 해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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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岬寺解脫門

국보 제50호. 전라남도 영암군 서면 도갑리 도갑사에 있는 문이다. 신라시대의 승려인 통고가 처음으로 지었다고도 하지만, 1957년 중수시에 발견한 묵서명에 의해 조선 성종 4년(1473)에 건립된 문임이 확인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중앙이 통로이고 좌우에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둔 일반적인 형식의 절문이다.

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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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住寺

사적 제312호. 전라남도 화순군 도양면 영구산 기슭에 있던 절. 신라 때 고승 아도 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으며 2백 년 뒤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세웠다고 한다. 여기에 사각 석실 미륵불·9층 석탑·원형 연화탑 등 석탑 15기, 큰 와석불(臥石佛)을 포함한 석불 100여 좌 등 대유물군(大遺物群)이 마치 노천 박물관처럼 자리잡고 있다. 속칭 운주사(雲舟寺)라고도 한다.

운주사 구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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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住寺九層石塔

보물 제796호. 지금까지 운주사에 남아 있는 탑 12개 가운데 하나로 입구에 서 있다. 5층 석탑과 함께 높이가 가장 높다.

쌍봉사 철감선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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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峰寺澈鑑禪師塔

국보 제57호.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사에 있는 부도(浮屠)로 신라 말기에 건립되었다. 8각 원당 형식(圓堂形式)에 조각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높이는 2.3m이다.

홍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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虹橋

보물 304호.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있다. 영조 13년(1737) 송광사 주시 사미성습보제(沙彌性習普濟) 등이 건조한 후 광무 3년(1899)에 중수하였다. 용두가 한 개씩 조각되어 3개의 석교를 만들고 특히 벌교강의 조수를 받아들이는 부분에 이 홍교를 만들어 옛날에는 홍교를 통해 어선이 왕래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구름교만이 남아 있다.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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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出山磨崖如來坐像

국보 제144호.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석불(石佛)이다. 결가부좌한 좌상(坐像)으로, 큰 바위를 깎아 새겼으며 육계(肉?)·소발(素髮)·백호(白豪)를 갖추었다.

담양 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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潭陽瀟灑園

사적 제304호.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원이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가,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자 시골로 은거하러 내려가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조선시대 정원 중에서도 첫손으로 꼽힌다.

낙안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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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安邑城

사적 제302호.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읍성으로 둘레 1.4km이다. 고려 말부터 있던 토성을 조선 초에 돌로 쌓은 것이다. 높이 4m, 두께 3∼4m, 아랫부분은 7∼8m로, 적대(敵臺)는 6개였다. 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옹성은 남·서문터에서만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성곽은 커다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남문터는 마을 안 골목길에 있는데, 네모진 바위를 3단으로 쌓아올린 성문벽이 길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 후기에 임경업(林慶業)이 쌓았다고 하는데, 수구(水口)가 남아 있다. 성내에 있는 객사(客舍)와 임경업장군비각,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민가 등은 우리의 전통 가옥을 연구하는 데 좋은 탐사 코스가 되고 있다.

무위사 극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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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寺極樂殿

국보 제13호.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주심포(柱心包)식 건물이다. 1956년 중수시에 벽화의 묵서명(墨書銘)으로 “十二年丙申三月初吉畵成”이라는 명문이 나와 건축도 벽화가 만들어진 성종(成宗) 7년(1476)의 것으로 추측된다.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이고 공포(?包)는 안팎 2출목(出目)이고 두공(頭工) 위의 첨차가 좌우로 길게 뻗어 장설(長舌)로 되었고 점차 아래쪽은 주심포 특유의 곡선으로 되어 짧고 강한 앙설(仰舌)이 있다. 세부에 이르기까지 견실한 수법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월남사지 모전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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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南寺址模塼石塔

보물 제298호.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에 있으며, 모전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탑파이다. 단층의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3층탑으로서 기단의 면석(面石)과 우주(隅柱)는 별석이고 갑석은 4개의 돌을 맞춰 구성했고 탑신도 여러 개의 판석으로 짜여졌다. 옥개석은 받침 3단 낙수면(落水面) 3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층급 받침은 말각(抹角) 2, 각(角) 1의 혼합이고 모두 여러 장의 돌로 짜여 있다. 탑은 세장(細長)하여 안정감이 없으나 이 지방 재래의 백제 계통에 전탑 양식을 가미한 특이한 작품이다.

청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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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海鎭

사적 제308호.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자리에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장보고(張保皐) 장군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일본과 무역을 하던 곳이다.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성을 쌓아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였다. 섬 안에서 토성을 쌓았던 자리와 건물들이 계속 확인되고 있으며, 청자 조각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명량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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鳴梁大捷碑

보물 제503호. 임진왜란 중에 이긴 명량대첩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있다. 1688년(숙종 14)에 건립하였으며, 조선시대 일반 석비 형식을 따라, 정사각형 지대석(地臺石)에 직사각형 비좌석(碑座石)을 겹치고, 위에 신석(身石)을 꽂고, 운룡문(雲龍紋)을 새긴 직사각형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짜임이다. 1597년(선조 30) 9월 이순신(李舜臣)이 우수영의 건너편에 있는 진도 벽파정 아래에 진을 치고, 우수영∼진도의 해협을 흐르는 급류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물리친 일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진 것을 8·15광복 뒤 제자리에 다시 세웠다.

다산 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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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草堂

사적 제107호.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다. 조선시대의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이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백여 권에 이르는 책을 저술하였다.

목조삼존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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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造三尊佛龕

국보 제42호. 송광면 신평리 12(송광사) 소재. 높이 13.9cm, 지금 6.9cm. 통일신라시대 때의 작품이다. 불감은 송광사의 16국사 중 제1세이며 수선사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일으켰던 보조국사가 당(唐)으로부터 귀국할 때 지니고 왔다고 한다.목조로 된 전개식 삼면으로 닫으면 원통형이 되고 열면 중앙 반원부에 본존과 좌우 협시보살을 배치하게 되어 있으며, 정교한 기법과 양식은 인도풍 분위기를 풍겨주고 국내 불감류로서는 희귀한 작품이다.

정혜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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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慧寺大雄殿

보물 제804호. 서면 청소리 711(정혜사) 소재.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조선시대 때 축조했다. 742년 경덕왕 때 보조국사가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으로 다포계이다.내부의 3, 4출목의 살미 첨차는 운공형으로 길게 대들보를 받치고 있고 첨차의 모서리 부분이 교두형으로 되어 있다.

동화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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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華寺三層石塔

보물 제831호. 별량면 대룡리 282(동화사) 소재. 고려 초기 대각국사에 의해 일반형 신라석탑의 양식을 계승하여 건립하고 조선조에 승려 법흥이 중건했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복발과 양화, 보륜, 보개, 보주 등의 제부제가 잘 남아 있다. 이렇게 삼륜이 정연하게 남아 있은 예는 드물다.

금둔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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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芚寺址三層石塔

보물 제945호. 낙안면 상송리 산 2-1(금둔사) 소재. 통일신라시대 전통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삼층기단부 각 면석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양각으로 선명하게 조출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기단부는 전형적인 이중기단으로 지대석은 수매 판석을 깔고 하층기단은 각 구를 2구로 나눠 중앙에 당주와 4우주를 문각했고 하대갑석은 4매판석으로 결구, 상면 중앙에 호형과 각형 몰딩(테두리장식)을 주어 상층기단을 받았다.

금둔사지 석불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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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芚寺址石佛碑像

보물 제946호. 낙안면 상송리 산 2-1(금둔사) 소재. 높이 3m, 불상높이 2.1m.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석물 후면에는 코끼리상을 새겨 불타의 잉태 및 탄생과 관계되는 동물을 새겨 다른 석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작품이다. 양식을 보면 머리 위에 육계가 있고 머리는 소발이며 백호의 소공이 있고 눈은 정면으로 약간 밑을 보고 코와 입술이 곱게 흘러 매우 사실적 수법을 보인 작품이다.

선암사 승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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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岩寺昇仙橋

보물 제400호. 승주읍 죽학리 산 48-1(선암사) 소재. 길이 14m, 높이 4.7m, 폭 4m. 조선시대 때 축조했다. 숙종 39년(1713) 호암화상이 6년 만에 완공한 다리이다. 기저부(基底部)에 별다른 가설이 없고 홍예(虹預)는 하단부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문양은 반원형을 이루고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다. 다리 중심석 아래의 조그맣게 돌출시킨 석재는 용의 머리 같기도 하다.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선암사 삼층석탑 내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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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岩寺三層石塔內遺物

보물 제955호. 승주읍 죽학리 산 48-1(선암사) 소재. 1986년 선암사 2층 석탑 중 동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로 모두 사리장엄구로서 청자항아리, 백자 항아리 각 1점씩, 사리 장치로는 금동사리탑과 수정용기 및 사리 1과 등이다.금동사리탑은 9세기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팔각 원단형을 그대로 고수하여 당시의 금속공예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선암사 대각국사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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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岩寺大覺國師眞影

보물 제1044호. 승주읍 죽학리 산 48-1(선암사) 소재. 고려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불문에 들어가 국사난원의 제자로 15세에 승통이 되었으며 30세에 미복으로 송나라로 가서 화엄과 천태종 등을 공부하고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들어 불교문화 발전을 꿰하고 천태종을 열어 불교계를 통합하려 했던 대종교이자 화엄종의 대가였다.초상화는 화승 도일 비구가 제작하였고, 당대의 화풍이 살아있는 대표적인 수준작이며, 화면 좌측상단에 전당 혜동이 쓴 장문의 글이 기록되어 있다.

검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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劍丹山城

사적 제418호. 해룡면 성산리 산 84 소재. 검단산성은 안산 혹은 검단산으로 부르며 도상에는 피봉산으로 표기되어 있다.해발 138.4m의 낮은 산으로 여수반도와 순천지역을 연결하는 길목에 있고 왜성과는 직선 2.5km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은 6~7세기에 걸쳐 축성된 백제시대 성으로 그 당시의 유물(토기, 기와)연지·저장공·건물지·문지·수문 등이 발견되었고 정유재란시는 조선군과 명군의 연합군이 순천 왜성에 주둔한 왜군과 대치하면서 임시로 사용했으리라 추정된다.산성형식은 산봉우리에다 마치 테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퇴뫼식이다. 성벽 축조방법은 협축식으로 성의 총길이는 430m, 내벽 높이는 1~3m, 외벽 높이는 4~6m, 두께는 5m 정도 되는 산성이다.

충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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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愍寺

사적 제381호. 여수시에 있다.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전에 지은 충무공 사액사당 제1호. 조선 선조 34년(1601) 영의정 오성 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계청을 받아 왕명으로 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한 충무공의 사당으로 국내 최초이며, 최고의 것이다.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 때 훼철되어 단만을 쌓았다가 고종 10년(1873) 중수하였으나 1919년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철폐되었다. 광복 후 1947년 복설, 현재는 여수 여천 충무공 유적 영구보존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성역화 사업에는 조금 미흡한 점이 있다. 중건된 사우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주벽으로 하고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을 배향하고 있다.우부승지 김사용이 계청하여 사액(충민사공)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목조 와즙의 맞배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집이었다. 1971년부터 여수 여천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정화사업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1975년부터 공사하고 착공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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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南館

조선시대 사백여 년 간 수군의 본거지로 혹은 구국의 성지로 이용되었고 전승의 사명을 다한 역사적 현장으로 여수를 상징하는 곳이다.진남관 정면에 있는 망해루는 일제시대에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에 재 복원한 2층 누각이다. 또한 1599년 선조 32년 기해년 12월에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75칸의 거대한 객사이다. 그 후 절도사 이도빈이 1664년 갑진년에 개축하고 숙종 42년(1716) 94대 이여옥 수사 때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고 숙종 44년(1718) 95대 수사 이재면이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이 객사는 조선 역대 왕들의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정례참배를 행했으며 또한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는 하례를 드리고 나라에 슬픔이 있을 때는 봉도식을 관민일동이 수행해 왔다. 1910년 고종 4년 경술년 때에는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시초로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학교로 사용한 바 있다. 준국보 제480호로 1959년에는 보물 제324호로 지정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보수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1973년 단청을 하고 1978년에 4억 2천만원을 투입하여 진입도로를 개설한 바 있다.건평 240평,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길이 75cm, 높이 14m, 둘레 2.4m의 기둥 68개가 거대하고 웅장한 모양을 자랑하며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이다.조선 초기 객사양식으로서 보기 드문 건물이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고 그 사이의 공간에는 화반을 받쳤는데 이러한 구성의 건축은 주심포 내지는 익공집계통의 수법에 의하여 2출목으로 짜올려서 외목도리를 받쳤다. 건물의 전후면에는 안쪽으로 제2주례에 고주들을 배치하여 그 위에 대량을 가구하였다.

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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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國寺

여수시 영취산 중턱에 자리잡은 사찰로 1195년(고려 명종 25년)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 호국 불교의 성지인 이곳은 임진왜란시 승병 훈련소로도 유명하였다.이 절은 호국정신이 창건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고, 이 정신이 크게 부가된 것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시에 의승군의 본거지가 되어 400여 명이 활약한 때이다. 절안에는 보물 제396호인 대웅전, 원통전, 팔상전, 부조전, 응진전 등 14채의 절집과 괘불, 보물 제578호인 대웅전 후불 탱화, 그리고 보물 제563호인 홍교가 있다.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어 흥국사라고 전한다.

오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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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忠祠

여수시 오충사는 당초에는 가곡사(佳谷祠)라 하였는데 헌종 13년(1847)에 정재로 씨가 선조인 정철(丁哲, 1554~1595) 장군께서 이충무공을 따라 해전에 참전중 왜군의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국가에서 충절공(忠節公)이란 시호를 내린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충의공 정춘(忠義公 丁春 1555~1599년경) 장군과 함께 해전에서 전사하신 4위를 함께 모셔 사충사라 하였으나 1864년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의해 해체 되었다가 1921년 이 지역 유림들이 현 위치인 웅천동으로 복원하고 이충무공을 주향으로 하여 오충신을 모시게 되었다.오충사의 주신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정철·정춘·정인·정대수를 모시는 곳으로 1938년 경 일제시대 때에 일부 철거되었다가 1962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향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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向日庵

지방문화재 제40호. 여수시 향일암은 낙산사의 홍연암, 남해 금산 보리암, 강화도 보문암과 함께 한국의 4대 관음기도처 중의 하나이다. “해를 향한 암자”라는 뜻의 향일암은 여수시 돌산읍에 644년(신라 선덕여왕 13년) 원효대사가 원통암으로 창건하였다. 기암절벽 위에 동백나무와 아열대 식물의 숲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해 수평선의 일출광경이 특히 장관을 이루어 숙종 41년(1715년) 인목대사가 향일암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주위의 바위들이 거북등처럼 되어 있어 영구암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평일은 물론, 특히 매년 12월 31일~1월 1일에는 향일암 일출제가 열려 관광객들이 전국각지에서 이곳 “해맞이 명소”에 몰려든다.

나주향교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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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州鄕校大成殿

보물 제394호. 나주시 향교동 32-3. 나주향교의 중심건물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27위의 위패가 모셔진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나 쇠서의 형태는 익공이 비슷하게 변하고 창방(昌枋) 위에는 익공집에서 나타나는 화반들이 배치되어 있다.전면 1칸을 개방하여 툇간(退間)으로 하고 안쪽에 고주(高柱)를 세워 중앙과 좌우 양단문에 각각 문호를 달았으며 주문에는 큼직한 살(窓)을 만들었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고, 후면에 고주 4개를 한 줄로 세워 앞뒤 고주에는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 동자주형의 태공을 세워 종양(宗樑)을 받쳤다. 건물 내부에 세운 고주와 주위의 평주와는 퇴양(退樑)으로 연결하였으며 이것을 받는 공포의 살미첨차는 한몸으로 합쳐서 양봉(樑奉)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초석 상면에 연화문을 새긴 장식이 특이하다. 대성전 건물은 공포와 개가구재의 세부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철천리 칠불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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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川里七佛石像

보물 제461호. 나주시 봉황면 칠전리 산 124-2. 불상이 있는 이곳은 백제 성왕 22년(544) 연기조사가 구례 화엄사와 함께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절이 소실된 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고 전해온다.이 불은 칠천리 석불입상이 있는 바로 앞 약 10m 떨어진 전면(前面)에 있다. 같은 경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불상을 조각한 기법이나 형식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불상은 1m 높이의 원추형바위 마애불로 좌상과 입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높이는 모두 1m 내외이다.이들 불상 순서를 보면, 북쪽과 동북방향에 좌상 2구를 새겼으며, 남쪽으로는 입상 4구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서쪽에 2구의 불상을 양각으로 새긴 것이 엿보이나 깎아낸 듯한 흔적이 역력하며 현재로서는 좌상인지 입상이었는지를 가려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마애불이 8구였다고 보여지나 현재로서는 6구뿐이다. 또 구전으로는 원추형의 바위 정상에 별석으로 조각한 동자상이 얹혀져 있었다 하나 현재는 유실되고 없다. 7불이란 이름은 아마 여기서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한다.칠불석상은 원추형 비슷한 사면석에 다수의 불상이 비스듬하게 조각된 예는 극히 드물며 또한 이렇게 석면불을 조성한 예 역시 우리나라의 귀중한 불상의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불상은 일부에서 전형적 양식의 퇴화가 엿보이며 기법의 순화 의문의 도덕적 처리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철천리 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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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川里石佛立像

보물 제462호.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산 124-2. 낮은 야산인 구릉지대의 정상에 있는데 주변에 민묘(民墓)가 있고 그 옆에 미륵사라는 소규모의 절이 있다.총높이가 5m가 넘은 거불로 불신 높이만 해서도 3.94m나 되며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과 대좌까지 한 돌에 조각하였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상호는 4각형에 가깝고 얼굴 전체가 다소 비만스럽게 보인다. 그러면서도 길게 내려뜨린 귀, 호형을 그린 눈썹과 눈꼬리가 귀 위로 치켜진 모습, 위아래 입술이 두툼하게 생긴 모습에서 어딘가 강한 인상을 풍긴다. 이는 통일 신라말 이후 고려로 넘어오면서 나타나는 기량의 한계석이라 할 것이다. 더구나 뒤바꿔진 시무외인의 어색한 손, 넓은 어깨에 비해 목이 너무 두껍고 짧은 것은 마치 목 위에 머리가 얹혀져 있는 듯한 부조화를 낳고 있으며, 상체의 발달된 양감에 비해 하체, 특히 다리부분이 너무 빈약하게 처리되었다.그러나 상호에서 보여준 강한 인상, 어딘가 멀리 바라보면서 기원하는 듯한 눈, 다소 몸에 바짝 붙여지긴 하였으나 촘촘하게 주름이 진 활발한 의습, 아직도 전대에서만 볼 수 있는 당당한 어깨 등은 당대의 저력과 힘을 충분히 살려준 작품이라 하겠다.이 석불은 얼굴의 비만감과 또는 괴체화 되어가는 신체적 조형 및 형식적인 의문 등이 고려 초부터 유행하던 거불양식을 알 수 있게 한다. 정북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석양을 바라보면 햇빛을 받아 석상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죽림사 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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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林寺掛佛

보물 제1279호.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죽림사. 괘불은 야외에서 불사를 할 때 장엄하게 쓰이는 것으로 보통은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괘불함에 보관했다가 불사가 있을 때마다 꺼내서 쓰게 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괘불은 말았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안료가 많이 훼손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죽림사 괘불은 광해군 14년(1622)에 제작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괘불로서는 가장 빠른 시기에 속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 괘불은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독존인 좌상으로 비단 바탕의 채색화로 연화대 위에 가부좌를 한 상이다. 색조는 주로 홍색을 띠고 있으며, 항마인을 결한 여래상이다. 하단에 “천계이년임술십일월십칠일 죽림사(天啓二年壬戌十一月十七日 竹林寺)”라 기명되었으나 죽림사 부분을 지우고 옆줄을 다시 쓴 것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한다.괘불은 석가 독존도로 정면에서 볼 때와 올려다 볼 때 차이가 크다. 대개 경배의 대상물로 제작되는 조형물은 경배의 위치에서 보는 것이 올바른 감상법이라고 할 때 죽림사 괘불은 정면에서 볼 때 약간 가분수형이지만 아래서 올려다 볼 때 원만상으로 보인다.

나주 읍성 남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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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州邑城南門址

사적 제337호. 나주시 성북동·교동 일대. 나주읍성은 보성읍성과 함께 읍성축조론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태종 4년(1404)에 긴급 수축(修築)되었다. 이는 동년 7월에 왜선 33척이 전라도로 침입해 오자 수군지휘관인 김영열(金英烈)을 보내 격퇴한 뒤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서 불과 3개월 만인 동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다. 따라서 이 때의 나주읍성 수축은 계획적인 읍성축조였다기보다는 기왕의 토축(土築) 부분을 석축화하는 정도에 만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후에도 나주읍성에 대한 본격적인 수축 논의는 계속되었다.이처럼 조선시대에 들어 세 차례에 걸쳐 증·개축이 이루어진 나주읍성은 한말에까지 그 골격을 유지해 오다가 1910~1920년 사이에 일제에 의해 4대문과 성벽에 대한 훼철작업이 빠른 속도로 행해졌고, 그 읍성터는 식민통치 건물지, 일반대지, 혹은 도로망 등으로 전용되었다. 해방 이후 나주의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훼손이 더욱 격심해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옥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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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龍寺址

사적 제407호.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소재. 옥룡사지는 통일신라 말의 뛰어난 고승이자 한국풍수지리의 대가인 선각국사 도선이 35년간 머무르면서 수백 명의 제자를 가르치다 입적한 곳으로 우리나라 불교역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천년의 불교성지이다.옥룡이라는 지명은 도선의 도호인 옥룡지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옥룡사는 신라 말에 조그만 암자였던 것을 도선국사가 864년에 중수하였으며, 수백 명의 사문들이 그의 법문을 듣고자 몰려들어 옥룡사파란 지파가 형성되자 몰려드는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인근에 운암사라는 사찰을 추가로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1878년 화재로 소실된 후 폐찰 되었으며 현재 서 있는 대웅전은 1969년에 건립되었다. 옥룡사지에는 도선국사와 수제자인 통진대사의 비와 탑이 세워져 있었으나 1920년경에 모두 없어져 버리고 비문만이 탁분되어 『동문선』 등에 전해온다.옥룡사지 주변에는 도선국사가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 심었다는 것으로 전해 오는 동백나무 7천여 본이 7ha에 거쳐 울창한 동백 숲을 이루고 있다.

중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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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興寺

광양시에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의병의 격전지였던 중흥산성 옛 터전에 둘러싸여 있는 호국사찰. 통일신라 말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폐사되어 이후 작은 암자가 건립되어 유지되어 오다 1936년 중건하였으나 다시 폐사가 되었다. 1936년 독지가 하태호에 의해 재중건되어 오늘날의 규모를 갖추었다. 중흥사에는 국보 제103호인 쌍사자석등(광주 국립박물관에 보관)과 3층석탑(보물 제112호), 석조지장보살반가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2호) 등의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중흥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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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興寺三層石塔

보물 제112호. 통일신라 말에 건립된 고탑으로 3.8m의 높이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추었으며, 기단면석의 각 면이 양분되어 인왕(仁王), 사천왕(四天王), 천부상(天部像), 신장(神將)과 보살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1층 탑신의 4면에는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부처상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옥개받침은 3단씩인데 옥상(屋上)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었으며, 옥개석은 받침이 너무 짧고 두터운 특징이 있으며 상륜에는 보주만이 있다. 크기보다는 외관에 치중하여 섬세하고 장식적인 경향이 두드러진 신라하대 탑판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중흥사 석조지장보살반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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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興寺石造地藏菩薩半跏像전라남도유형문화재제142호. 광양시에 있다. 한쪽 다리만 가부좌를 튼 돌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보살상인데 자세로 보아 지장보살로 판단된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저고리를 입어 일반인의 차림새와 비슷하고 얼굴 또한 수수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투박하지만 친근감을 갖게 한다.

금성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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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城山城址

담양에서 북으로 10여 ㎞ 되는 금성산 산정에 성지가 있다. 원래 육군 진수지(鎭守地)였으며 내성 3.6㎞, 외성 5.7㎞의 석성(石城)이 둘리어 있다.

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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瀟灑園

양산보(梁山甫)가 살던 곳인데, 그 당시 정송강(鄭松江) 등 시인·문인들의 유람지였다. 사미인곡(思美人曲)·속(續)사미인곡과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은 이곳을 배경으로 쓴 명시로서 국문학 사상 중요한 곳이다.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80년쯤 전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읍내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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邑內里五層石塔

보물 제506호. 담양군 당양읍 지침리 45 소재. 총높이 7m(1기). 고려시대의 탑. 담양읍에서 순창으로 향한 도로를 따라 1km쯤 올라가다 보면 평지가 전개되는데 광활한 지역에 경영된 가람(伽藍)으로 짐작된 가운데에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이 5층석탑만 유존되고 있다.탑의 형태는 1층 기단에 5층석탑으로 일반형과 약간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부 지대석은 1석으로 구성하였고 중석은 중앙에 탱주가 생략된 4개의 모서리 기둥이 배치되었는데 특히 기단부 높이가 다른 5층석탑에 비해 매우 낮게 조성되었음이 특이하다. 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기단부 중대석이 짧은데 비해 1층 옥신이 높아 고준한 감이 있으나 각부의 체감률이 적당하여 탑의 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 중기를 내려가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에 석당간(보물 제505호)이 있다.

읍내리 석당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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邑內里石幢竿

보물 제505호. 담양군 담양읍 객사리 4 소재. 총높이 15m(1기). 조선시대의 석당간. 담양읍에서 동쪽으로 순창행 도로를 따라 1km쯤 가면 논 가운데 5층석탑(보물 제506호)이 있고 그 왼편으로 석당간 1기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단층 기단 위에 지대석을 겸하는 장방형으로 상면이 약간 경사졌을 뿐 측면에 아무런 조식이 없으며 정면 중앙에 장방형 1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당간대좌(幢竿臺座)와 양지주(兩支柱)를 받치고 있다. 지주는 방형 석주로 약 80cm의 사이를 두고 남북으로 상대하고 있다. 하단부는 기단 받침대 안에 묻혀 있으므로 구조는 알 수 없다. 당간은 가늘고 긴 8각석주 3개를 연결하였는데 그 위에 원형 당간을 올려 마디의 표식이 뚜렷하다.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석당간은 조선 헌종 5년(1839)에 중건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큰 바람에 꺾여 나무로 대신 세웠다(大風折以木代立)” 운운한 내용으로 보아 큰 바람에 넘어진 것을 이때 다시 복원한 것으로 본다.그러나 양지주는 그 양식이 고려시대 것으로 추측되며 또한 인근 5층석탑이 고려시대의 조성임을 감안할 때 이 석당간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언곡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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彦谷寺址三層石塔

문화재자료 제20호. 담양군 무정면 봉안리 68 소재. 고려시대의 탑. 언곡사지는 백제 성왕 6년(528)경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고증할 길이 없으며 절 이름 역시 각종 지리지에 등장하지 않아 전해지는 내용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추성지(秋成誌, 1758)』에는 석탑 존재사실이 나타나고 『무정면지(武貞面誌, 1934년)』에는 언곡사라는 절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언곡사지 3층석탑은 1927년 현 봉안리 뒷산인 비봉산에 있었던 것을 무정초등학교로 옮긴 것을 1995년 지금의 위치로 다시 원상, 복원하였다. 무정 초등학교로 옮길 때 1층 탑신에서 금동불이 발견되었으나 당시 일본인 교장이 금동불을 매각하여 그 돈으로 학교실습답을 사들였다고 한다.이 석탑은 현재 기단부(基壇部)와 면석(面石) 2매가 유실된 상태이며 상륜부(相輪部) 일체가 남아 있지 않다. 탑의 구조를 보면 기단부 중석인 면석 2매가 양쪽에서 탑신부(塔神部)를 받치고 있다. 면석의 양식을 보면 각면에 양우주와 탱주1주가 모각되었고, 그 위로 갑석이 이어지고 있는데, 갑석은 상·하 수평이며 하면은 각형부연이 표출되었고 상면은 2단의 각형괴임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이 석탑은 기단부의 중석 이하가 모두 유실되어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평박한 옥개석이라든지 전각의 밋밋한 반전, 또는 층급받침이 4단 및 3단으로 줄어든 점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연동사지 지장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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煙洞寺址地藏菩薩立像

문화재자료 제188호.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 산 91-3 소재. 총높이 267cm, 고려시대의 입상. 방형석주형에 전후면을 약간 다듬어 머리부분을 조각하고 신체부분은 손모 습가 형식화된 옷주름이 나타날 뿐이다. 머리를 보면 정상부가 민머리로 되어 육계가 없는 소발이며 상호는 동글넓적하고 코는 납작하며 입은 작은 편이다. 귀는 길게 내려왔으며 목에는 삼도가 희미하게 보인다. 법의는 통견이나 지극히 간략화된 상태인데, 특히 양팔을 걸쳐 내려온 한 가닥의 법의 자락이 특징적이다. 몸체 하단은 땅속에 묻혀 자세한 면모를 파악할 수 없지만, 배면은 원통형의 기둥처럼 평평하게 처리하였고 약간 앞을 향해 고개를 숙인 모습이 역력하다. 가슴하단에 장식된 띠매듭은 비교적 사실적인 표현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내려온 기법이다.머리부분과 상호에 다소 사실적인 기법이 나타나고 있으나 신체부분으로 내려와서는 전혀 균형이 맞지 않은 간략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어깨의 움추린 듯한 모습, 고개가 짧고 경직된 채 앞으로 숙인 점 등은 이 석불의 조성연대를 어느 정도 짐작케 한다. 따라서 정상부에 육계가 없이 민머리로 처리한 것으로 보아 지장보살로 처리한 것으로 봄이 옳을 것 같으며 시대는 고려 하대로 추정된다.

개선사지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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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仙寺址石燈

보물 제111호. 담양군 남면 학선리 593 소재. 총높이 3.5m(1기). 통일신라 때의 석등. 팔각형을 기본으로 삼는 고복형(鼓複形) 석등으로 높이는 3.5m이다.세부양식을 살펴보면 넓은 방형 지대석 위에 팔각하대석을 올렸는데 1992년에 새로운 석재로 교체하였다. 그 위의 상대석의 복련은 복판팔엽의 양련으로 하대석의 복련과 대칭을 이룬다. 상대갑석 위에는 둥그런 괴임을 마련하였고 화사석의 각 면에는 장방형의 호창을 내고 간주 양쪽을 이용하여 조등기(造燈記)를 음각하였다. 팔각지붕 마루 끝에 귀꽃을 장식하였으나 현재는 대부분 깨졌고 하나만 남아 있다. 화사석 기둥면에 새겨진 조등기는 한 기둥에 각기 두 줄씩 기록되어 있고, 9행과 10행에 쓰여진 세주(細注)는 각기 두 줄로 되어 있다. 조등기는 총 10행 136자이며, 자경은 4cm, 서체는 해서(楷書)이다.

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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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音寺

오산면에 있는 사찰. 백제 분서왕 3년(300) 처녀 성덕(聖德)이 창건하였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까지 다섯 번을 고쳐 지었으며, 이때 건축된 원통전(圓通殿)은 고려 말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경내 면적은 약 4정보 가량 되며 13채가 있다.

도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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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林寺

곡성군 곡성읍에 있는 절. 신라 무열왕 7년(660)에 원효대사가 사불산 화엄사로부터 이주하여 지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웅진당·지장전·칠성각·요사채 등이 있고 절 입구에는 허백련 화백이 쓴 「오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도선국사·사명대사·서산대사 등 도인이 숲같이 많이 모여들었다 하여 도리사라 하는데 인근에는 도림사 계곡(지방기념물 제101호)이 있다.

도림사 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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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林寺掛佛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9호. 주존이 좌상이며 협시는 입상인 특이한 예로 후불벽화(탱화)의 한 잔영으로 보인다. 평소에는 괘불함에 넣어 두어 대웅전 불상 뒤편에 봉안해 두었다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꺼내어 신도들 앞에 내놓기 때문에 쉽게 접할 기회가 적다.이 삼존불정화(三尊佛幀畵)는 17세기 후반기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본존불은 결가부좌(結跏趺座)를 한 좌상인데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는 전형적인 석가여래좌상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머리는 뾰족한 보주형의 정상발주가 있고 나발은 극도로 형식화되었고 얼굴은 둥근 원망상으로 긴 눈썹에 눈은 작은 편이다.좌우대칭으로 서 있는 두 보살은 거의 비슷한 형태인데 왼쪽 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묘사된 것으로 오른쪽 향좌가 다르다. 이 괘불정화는 전체적으로 청·홍·녹, 그리고 연분홍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바, 이는 아직까지 조선 전기의 조화된 색감을 엿볼 수 있으며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는 화기(畵記)가 있어 귀중한 자료로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태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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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安寺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신라 경덕왕 원년(724)에 동리산파를 일으켜 세웠던 혜철스님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대안사로 불리웠으며 우리나라 불교의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파의 본산지이다. 선암사·송광사·화엄사·쌍계사 등을 거느려 꽤 오랫동안 영화를 누렸던 사찰로 혜철선사와 도선국사가 득도한 정양 수도의 도량이다.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광자선사가 32칸으로 넓혀 지었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조계종의 본산지로 지위를 굳혀 따로 분리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효령대군이 머물며 왕가의 온당으로 삼았다.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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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보물 제273호. 사찰중심에서 오른쪽 북쪽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위에 흙담장을 쌓고 그 안에 부도와 탑비를 함께 모신 혜철스님의 부도탑이다. 이 부도는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팔각을 고수하고 있다. 연대는 경문왕 원년(816)으로 추정된다.

태안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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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安寺 銅鐘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24호. 대웅전 안에 놓인 이 동종은 조선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조각이 아름답고 부드럽다. 정상에는 융통과 용뉴가 있으며 종신에는 상대와 하대가 있고 중앙상부 4면에 유곽과 전후좌우로는 화문장식을 한 원통의 당좌를 두었다. 종신 중앙에는 세조 3년(1457)에 주조한 것을 종이 깨져 금 400근을 넣어 선조 14년(1581)에 만들었다는 문귀가 해서체로 쓰여져 있다.현재 국내 사찰에 있는 대다수의 종은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것인데 비해 이 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 초기 동종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높이 96.5cm 입지름 66cm이다.

보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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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林寺

장흥군 유치면 덕봉리 45 소재. 유치면 가지산 계곡(봉덕리 45번지)에 위치한 고찰이다. 동양 3보림(인도·중국·한국)의 하나로 우리나라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원표대덕이 터를 잡은 당시인 759년에는 초암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듯하며, 옛 모습의 보림사는 웅장하고 수려한 모습이었으나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쇠락하다가, 한국전쟁 때 병화를 겪기도 하였다.현재 보림사에는 철조비로자나불 등의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가 남아 있어 역사의 흐름과 우리나라의 불교미술사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보림사에는 선승들이 즐겨 들었던 작설차가 특산품으로 전한다.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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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林寺三層石塔-石燈

국보제44호.남탑 높이5.4m, 북탑 높이 5.9m, 석등 높이 3.12m.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때의 작품. 보림사의 대적광전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3층석탑과 1개의 석등으로 신라의 전형적인 탑 양식으로 옥개석 위에 연꽃을 아로새긴 보주를 얹어 석등의 전체적인 인상이 경쾌하고 화려하다. 또한 석등은 석탑과 함께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이 시대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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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국보 제117호. 높이 남탑 2.51m. 통일신라 헌안왕 2년(858)에 주종.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이다. 철조비로사나불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유행했던 대표적인 불상으로, 헌안왕 2년(858) 장사현 부수 김언경이 사재로 쇠 2,500근을 사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불상의 왼팔 후면에 새겨져 조성연대가 확인된다. 반쯤 뜬 눈과 굵은 입술 평면으로 깎인 콧등이 근엄한 인상을 주며, 의연하고 자비스런 미소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숙연한 감정을 절로 느끼게 한다. 6·25전쟁으로 보림사의 모든 불상이 소실됐으나 이 철불만은 화를 면하였다.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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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

보물 제157호. 높이 3.7m. 통일신라 헌강왕 10년(884)에 세웠다. 보림사 대웅보전의 뒤편에 위치한 탑으로 보조선사의 사리탑이다.팔각원형탑을 기본으로 삼았고 팔각지대석 위에 3단의 하대석을 두었다. 하대석의 맨 아래쪽에는 각 면마다 사자상을 새겼으며, 상단은 구름무늬가 입체적으로 자각되어 보기드문 형식이다. 중대석은 팔각형으로 배흘림을 하였으며 탑신 역시 팔각으로 사면에 사천왕상을 새겼으며, 앞뒤쪽은 문비를 새기고 각 면마다 안상을 새겼다. 좌우면은 특별한 장식이 없다. 옥개는 부연을 새기고 지붕은 기와모양으로 하였으나 지대석이나 중대석 상륜부와 석질이 전혀 다르다. 상륜부는 지붕 위로 복발, 횡대, 화형, 보륜, 보주를 차례대로 올렸다.

천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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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冠寺

장흥군 관성읍 농안리 740 소재.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동국여지승람』에 통일신라시대 통영화상이 세웠다고 한다. 천관사의 옛 이름은 화엄사라 하였고, 옛날에는 89암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폐찰되었다. 현존하는 법당은 1963년도에 장한택 스님이 극락보전을 그 터에 다시 세우고, 다시 천관사라 칭하였고, 신도들이 요사채를 짓고 주위에 산재해 있는 탑 등의 유물을 모아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천관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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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冠寺三層石塔

보물 제795호. 천관사 경내 왼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양질의 화강암에 이중기단의 일반형으로 매우 안정감이 있으나 옥개석 상면의 추녀 끝 전각이 밋밋하고 중후하여 전체적으로 담담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 여러 개의 지대석 위에 중석을 놓아 각 면에 우주를 새겼으나 탱주가 생략되었고 하대갑석은 약간 두꺼운 편이나 상면은 가벼운 경사와 함께 2단괴임으로 상층단을 받치고 있다. 또한 상층갑석의 부연이 생략되고 옥개석 층급 받침이 얇은 점으로 보아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천관사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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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冠寺石燈

지방유형문화재 제134호.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천관사 극락보전 앞에 5층 석탑과 일진석에 위치한다. 좌대와 간석, 앙련, 화사석, 옥개석, 보주 등이 잘 갖추어진 석등이다. 보림사 석등과 동일한 형식을 취했으나 지대석의 복련과 옥개석에 귀꽃이 없는 점이 다르다.

천관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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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冠寺五層石塔

유형문화재 제135호. 높이 4.2m. 고려시대의 석탑. 4장의 장대석, 4장의 면석으로 기단을 구축하였고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각각 하나의 돌로 하였다. 층급 받침은 3단으로 하였으며 옥개석이 두꺼운 점이 특징이다. 옥개석이 두꺼운 관계로 옥개석의 반전이 급하나 탑이 중후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