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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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편집]

彌勒寺

사적 제150호.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용화산에 있던 백제 때의 절로서 지금은 터와 몇 가지 유물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백제 무왕이 이곳을 지날 때 연못에 미륵 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으므로 못을 메우고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국보인 석탑(石塔)과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幢竿支柱)만이 남아 있다.

미륵사지 석탑[편집]

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에 남아 있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구조상의 특징은 첫째, 목조탑을 충실히 모방하여 많은 소석재(小石材)로 건물을 가구(架構)했고, 둘째, 2층 기단 없는 4각형 기단에 사방 3칸의 다층탑이며, 셋째, 2층 이상이 초층에 비해 급격히 줄고 옥개석이 평평하나 네 끝이 가볍게 반전(反轉)하여 고준(高峻)한 형태가 된 것이 특징이다. 현재 6층으로 높이는 14.2m이지만 동과 서쪽 벽 일부만 남아 있을 뿐 모두 붕괴되어 일제시대에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원래는 7층으로 상륜부까지 합하면 무려 20m 정도가 되는 거대한 탑이었을 것이다. 거대하고 웅장한 이 석탑은 백제의 무왕(武王)이 이 지역을 새로운 별도의 도읍으로 잡으면서 장대한 규모로 건설한 미륵사의 기둥으로 제작된 것인 듯한데, 신라 쪽에서도 이 사찰을 창건하는 데 백 명의 목수를 파견하여 원조를 하였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백제의 국력을 총집중하여 건설한 국제적인 걸작품이다.

미륵사지 당간지주[편집]

彌勒寺址幢竿支柱

보물 제236호. 미륵사 절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당간지주로서 높이는 약 3.95m이다. 현재 원위치에는 지주만이 약 90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으며, 별다른 장식이 없어서 오히려 단아한 느낌을 풍긴다.

풍남문[편집]

豊南門

보물 제308호. 전라북도 전주시 전동에 있는 옛 전주읍성의 남문이다. 고려 말에 세운 것을 조선 영조 431년(1768)에 다시 조성한 듯하다. 1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 2층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문루(重層門樓)의 팔작지붕이다. 일반적인 성문건축과 같이 성벽의 일부를 형성하는 석축기대(石築基臺) 중앙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다. 하층 전후면의 중앙 기둥 위에 위치한 공포 하부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이러한 장식적인 면은 조선 후기의 건축일수록 더욱 많아진다.

금산사[편집]

金山寺

국보 제35호.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 기슭에 있는 절. 백제 29대 법왕 1년(599)에 창건된 것으로 견훤(甄萱)이 아들 신검(神劍)에 의하여 유폐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전·13층탑·사리탑 등의 유물이 있으며 신라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도량(道場)이었다.

금산사 미륵전[편집]

金山寺彌勒殿

국보 제62호. 금산사에 있는 3층의 불전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이다. 1층과 2층은 각각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었다. 기둥 사이에는 모두 공간포를 하나씩 두었고 공포는 안팎 모두 2개의 출목으로 되고 내출목은 간단한 초기의 운공(雲工)으로 되어 있다. 이 건물에서는 고층건물의 안전도를 높이기 위해 각 추녀는 높은 기둥에 연결되고 뒷몸을 파서 박은 후 비녀장을 질러 빠져나지 못하게 했고, 가운데 도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동자기둥(童子柱)을 세워주는 등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금산사 육각다층석탑[편집]

金山寺六角多層石塔

보물 제27호.

금산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높이 2.18m이며, 점판암으로 만들어졌다. 기단(基壇)은 지상에 6각의 화강암 석재 3단이 놓이고 각면에 사자가 새겨져 있다. 특수한 석재를 사용한데다 각층의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여 매우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금산사 석련대[편집]

金山寺石蓮臺

보물 제23호. 금산사 경내에 있는 석련대로 높이 1.67m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10세기 무렵 만들어진 듯하며, 지대석은 남아 있지 않고, 하대석은 측면이 10각형으로 각면마다 인사를 새겼다. 8면은 서화형(瑞花形)을, 2면은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벽골제[편집]

碧骨堤

사적 제111호.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던 신라시대의 관개용 저수지 둑이다. 백제시대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며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름난 관개용 저수지이다. 지금은 논 가운데 그 유지(遺址)가 군데군데 남아 있을 따름이다.

고창읍성[편집]

高敞邑城

사적 제145호.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있는 조선 초기의 성이다. 성의 길이는 1,680m, 높이 3.6∼4m이며, 면적은 18만 9,430㎡이다. 1453년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 성벽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고,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쌓았는데, 공북루·작청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한 해의 재앙이나 질병을 막기 위한 여인들의 성벽 밟기놀이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운사[편집]

禪雲寺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위치한 절이다. 백제 25대 위덕왕 28년(581)에 창건, 고려 27대 충숙왕 5년(1318)에 효정 선사(孝正禪師)가 중수했다. 조선 9대 성종 14년(1483)에 행호(幸浩) 선사가 재건하였는데,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15대 광해군 6년(1614)에 원준(元俊) 대사가 재건하였다. 동백꽃으로 만든 향유가 유명하다. 보물로 지정된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지장보살·대웅전 등이 있다.

선운사 금동보살좌상[편집]

禪雲寺金銅菩薩坐像

보물 제279호. 선운사에 있는 1476년(성종 7)에 만들어진 금동 불상으로 높이는 1m이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으며, 4각형에 가까운 살찐 얼굴, 짧은 목, 옷의 무늬 등은 조선시대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일제 때 약탈당했으나 1940년에 되찾았다.

선운사 대웅전[편집]

禪雲寺大雄殿

보물 제290호. 선운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3년(광해군 5) 재건하였다.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긴 평면을 이루며, 단청 벽화가 뛰어나다. 단층 맞배지붕으로 전면 5칸에는 모두 빗살분합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황토현 전적지[편집]

黃土峴戰蹟址 사적 제295호.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이 관군과 처음으로 싸워 대승을 거둔 자리이다.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다. 이곳은 해발고도 70m이며, 당시 태인(泰仁)과 고부(古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1894년 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봉기한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하고, 1만여 명의 군사가 집결하였다. 농민군과 관군은 황토현에서 대치하였으며, 4월 6일 밤 농민군이 기습공격을 하여 대부분의 관군이 전사하여 농민군은 1개월 만에 호남지방을 석권하였다.지금 이 고갯마루에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만인의총[편집]

萬人義塚

사적 제272호.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유적이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의병과 백성들의 무덤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이 이끈 왜병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이복남(李福男)·정기원(鄭基遠) 등 8명의 충신과 병사 2천여 명 및 주민 1만여 명이 묻힌 곳이다.

녹두장군 옛집[편집]

綠豆將軍-

사적 제293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에 앞장서던 때 살았던 집을 복원한 것이다.

만복사탑[편집]

萬福寺塔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탑으로 고려 말과 조선시대 초기의 과도기적인 양식을 보이는 탑파이다. 높이 약 5.5m의 4층 석탑으로 옥신석(屋身石) 밑에 받침돌을 깐 것은 고려시대의 강릉 신복사지탑(神福寺址塔)이나 서울의 홍제동탑(弘濟洞塔) 등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屋蓋石)의 층급받침은 얕게 2단으로 되고 기단부는 간단한 지대석으로 변했다. 둔하면서도 백제탑의 여운을 남기는 옥개석의 긴 처마가 지역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황산대첩비지[편집]

荒山大捷碑址

사적 제104호.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있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의 터이다. 1380년(고려 우왕 6) 왜구가 경상도와 전라도에 대거 침입하자 이성계는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도(慶尙道)의 순찰사로 뛰어난 전술과 사술(射術)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1577년(선조 10) 호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으며, 운봉현감(雲峰縣監) 박광옥(朴光玉)이 자세하게 전투 내용을 써서 황산대첩 사적비를 세웠다. 청일전쟁(淸日戰爭) 때 파손된 것을 1957년 재건하였으나 비신은 여러 조각으로 깨어지고 비문 또한 거의 훼손되었으므로, 비지(碑址)를 사적으로 지정한 것이다.

광한루[편집]

廣寒樓

사적 제303호. 전라북도 남원시(南原市)에 있는 누정(樓亭)으로 춘향전의 무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돌기둥 위에 세워진 작은 규모의 정자인 이곳은 조선 초기 황희(黃喜)가 세웠다. 본래는 광통루(廣通樓)였으나, 4대 세종 16년(1434)에 중건(重建)되면서 정인지(鄭麟趾)가 광한루로 개칭하였다.지금의 건물은 16대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것이며, 경내에 춘향(春香)의 사당이 있다.

내소사[편집]

來蘇寺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있는 절이다. 633년 신라의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이곳에 소래사(蘇來寺)를 지었던 것을 후에 내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633년 청민(靑旻)에 의해, 1902년 관해(觀海)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내소사에는 고려동종·법화경·절본사경·대웅보전 등의 중요한 문화재가 있다.

내소사 고려동종[편집]

來蘇寺高麗銅鐘

보물 제277호. 고려 종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는 구리종으로 높이 103cm, 구경 67cm이다. 명문에 따르면, 이 종은 1222년(고려 고종 9)에 만들어져 원래 청림사에 있던 것을 1853년(조선 철종 4)에 내소사로 옮긴 것이다.

내소사 대웅보전[편집]

來蘇寺大雄寶殿

보물 제291호.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불당(佛堂)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잡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기단을 설치하고 자연석 주춧돌을 썼다. 문짝은 초화문(草花紋)을 투각(透刻)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처마 밑에 받친 공포는 외부로 많이 뻗은 외삼출목(外三出目)으로 길게 뻗어나온 쇠서들이 겹겹이 중첩되어 한층 더 한국적인 색채를 풍겨주고 있다.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편집]

實相寺百丈庵三層石塔

국보 제10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에 있는 탑으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이다. 신라의 특수한 양식을 나타낸 탑으로, 1층 탑신에는 천부상(天部像), 2층에는 교란형(交蘭形) 조각 위에 8명의 천녀상(天女像), 3층에는 4불상이 새겨져 있다.

실상사 철제여래좌상[편집]

實相寺鐵製如來坐像

보물 제41호. 실상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철조불상으로 높이 2.66m이다. 얼굴은 둥글면서 탄력적이고, 어깨의 선은 부드럽다. 수철 스님이 무려 4천 근에 달하는 쇠를 녹여 만든 불상이라고 한다.

전주객사[편집]

全州客舍

보물 제583호.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1가 1 소재. 조선 초 전주부성을 창건할 때 같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성종 3년(1473)에 전주부윤 조근이 전주사고를 창설할 때 남은 재력으로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다.전패를 모시고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던 곳이며 조정의 칙사가 오면 이곳에 유숙하면서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에 경영된 객사라 해서 고사에서 따 풍패지관이라고 편액했다. 주사와 동서익사로 객관 본전이 구성되었던 것인데 지금 동사는 헐리고 없다.

조선 태조 이성계 영정[편집]

朝鮮太祖李成桂影幀

보물 제931호.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경기전). 경기전에 봉안된 어용은 경주 집경전본을 모사한 것이었는데 세종 24년(1442) 7월에 집경전의 어용과 함께 개화하여 동년 10월에 봉안했다. 현재 경기전 어진은 고종 9년(1872) 9월에 개화한 것이다.

전동성당[편집]

殿洞聖堂

사적 제288호. 전주시 완산구 전동 1가 200-1 소재. 천주교 신자가 처형된 자리에 프랑스인 신부 위돌박의 설계 및 감독 아래 중국인 벽돌공 100여 명을 투입, 1908년에 착공하여 1914년에 준공하였는데 곡선미를 그대로 살린 로마네스크 및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동양에서 제일가는 성당건물 중의 하나이다.

조경단[편집]

肇慶壇

지방기념물 제3호. 전주시 덕진동 1가 산 28 소재. 덕진에서 약 1km 들어간 건지산에 있으며, 광무 3년(1899) 5월에 이곳에 단을 쌓고 비를 세워 전주 이씨 시조의 묘소를 정하고 “대한조경단”이라 하였다.단은 장방형의 돌을 사용하여 둘레를 쌓아 만들고 단의 주변에는 동서남북에 문이 있는 담을 쌓았다. 서향의 문과 일직선상에 있는 남향의 문에서 20m 떨어진 곳에 비석이 있다. 비석은 대리석이며 너비 180cm, 두께 30cm, 높이 202cm이다. 앞면에는 고종의 어필로 된 대한조경단이라고 쓰여진 전제가 새겨져 있다. 비각은 한 변이 7.2m의 정방형의 3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불지사 대웅전[편집]

-寺大雄殿

유형문화재 제117호. 군산시 나포면 장상리 836 소재. 백제 의자왕 때 창건된 절이라고 하나 뚜렷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웅전은 약 150cm의 높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건물이다.

상주사 대웅전[편집]

-寺大雄殿

유형문화재 제37호. 군산시 서수면 축동리 544 소재. 백제 무왕 7년(606)에 혜공대사가 창건하였고, 공민왕 11년(1362)에 나옹대사, 인조 19년(1641)에 취계대사, 그리고 영조 38년(1762)에 학봉선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나한전·범종각 등이 있으며, 그 가운데 대웅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죽산리 탑동 삼층석탑[편집]

竹山里塔洞三層石塔

유형문화재 제66호.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66-1 소재. 탑동마을 청룡사지(靑龍寺地) 내 밭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석탑은 단 기단 위에 3층 탑신이 세워져 있는데 상륜부 일부가 현존하고 있다. 소실된 부분은 1975년에 중수되었으며, 그때 원형이 변형된 부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장암 삼층석탑[편집]

-庵三層石塔

국보 제10호.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백장암). 기단구조와 각부 장식조각이 서로 다른 양식을 보여주는 이형석탑으로서, 방형대석을 놓아서 기단을 삼고 그 위에 방형별석의 탑신 받침을 얹어 사각형 3층의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1층 탑신은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높으며, 2층과 3층의 옥신은 일반형 석탑에 비하여 감축률이 적다. 화려한 조각을 장식한 점이 특징이다.제1탑신에는 각면에 보살상과 신장입상을 2구씩 병립시켰고, 2층 3층은 아랫부분에 난간을 모각하고, 2층 각면에는 주악천인상을, 3층에는 각면에 1구씩 천인상을 부조하였다. 각 옥개석 추녀에도 연목과 두공을 모각하여 목조건축의 분위기를 재현하고 있다. 상륜부는 일부 없어진 부분도 있으나, 노반·복발·보개·수연이 완전한 찰주에 포개어져 있음은 희귀한 예라 하겠다.

용담사지 석불입상[편집]

-寺址石佛立像

보물 제42호.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 292. 고려시대. 이 석불입상은 높이 6m에 이르는 거상이다. 대좌는 타원형의 자연석으로, 그 위에 입상을 발 밑에 촉을 끼워 세운 것이다. 두부의 육계는 높으며, 얼굴이나 귀도 긴 편이나 안면마멸이 심하여 상호는 분명치 않다. 목에는 형식적인 삼도가 새겨져 있어 시대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측면은 편평하나, 귀의 처리는 뚜렷하다. 전면은 의문이 마멸되어 측면에서만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의습문은 굵고 듬성듬성한 음각문이다. 광배는 불상과 일상으로 된 거신광으로서 상부 결실이 심하고, 외연을 따라 화염문이 있는 것 같지만 마멸되었다. 일부분만 남은 두부 후면의 원형 후광도 굵은 수법이나 세부 문양이 분명치 않다. 이 불상은 하나의 돌에 불신과 광배를 조각한 거구장신이며 광배, 대좌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길 초상[편집]

李尙吉肖像

보물 제792호. 남원시 덕과면 사곡리 30(국립 전주박물관 보관). 이상길은 벽진 이씨로 조선 명종 11년에 출생하여 18세인 선조 16년(1585)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사헌부 정언을 거쳐 선조 32년(1599) 광주 목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때 선정의 실적이 높게 평가되어 통정대부로 특진되었다. 그는 벼슬을 하는 동안 많은 공을 세워 평난공신을 비롯 호종 정사 진무, 원종 등 여러 공신에 책봉되었다. 인조 23년(1636)에는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의정을 증직하고 강화도 충렬사에 위패를 봉안케하였다. 효종은 충숙공의 시호를 내렸으며, 헌종 7년(1666)에는 부조묘를 하사하여 묘당안에 영정을 봉안케 하였다. 묘당은 처음에 공이 거주하던 서울 가회동에 세웠는데 종손이 남원으로 이주함에 따라 순조 24년(1824) 5월 2일 부조묘를 덕과면 사곡리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편집]

-庵址磨崖佛像群

보물 제1123호. 남원시 신내면 덕동리 산 215. 수성암에 조각된 9구의 마애불상으로 2구는 크고 나머지는 작다.주불은 2m로서 북측에 있는 불상은 통견이며, 옷자락이 발등까지 덮고 있다. 손이 법의에 덮여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정장군사라고 하기도 한다. 남쪽 배불은 북쪽 불사과 마찬가지로 코가 크며 타원형의 얼굴이다. 명문이 있어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두 주불 아래쪽과 앞면에는 7개의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모두 좌불로 선으로 그린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기묘제현 수필[편집]

己卯諸賢隨筆

보물 제1197호.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740-1. 조선 중종 13년(1518)에 쓰여진 간찰들로서 선조 36년(1603)에 당시 전라감사 한준겸과 대재학 이호민의 주선으로 국장의 기술로 배접하여 병풍첩으로 만들었고, 표지로 보호되어 훼손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당시 홍문관 박사로 재직하던 안처순이 구례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자 그의 친한 벗들이 이별의 정을 담은 시문을 써서 그에게 주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기묘명현이었다. 안처순의 손자인 안응국이 책으로 묶어 기묘제현 수필이라 제하였다. 글씨는 석봉 한호의 친필로 쓰여졌다.

은선리 삼층석탑[편집]

-里三層石塔

보물 제167호.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43소재. 높이 7.2m, 기단은 2.7m 두께 27cm, 정방형에 제1층의 높이는 2.28m, 넓이 1.38m의 판석 두 장을 양측에 세우고 앞뒤에 면석 2장 등 모두 4매의 판석으로 세워졌다. 제2층탑신은 높이가 아주 낮아져서 85cm에 넓이 90cm이며, 제3층 탑신은 높이 55cm에 넓이 60cm 가량이다. 각 층의 옥개는 두 장의 판석을 방형으로 맞추었다. 이 탑의 특징은 제1층의 탑신이 장신인 동시에 제2층에 감실을 만들고 두 개의 석비를 달아 붙인 점이다. 익산의 왕궁 5층 석탑과 비슷하나 감실에 석비를 달아 붙인 점이 다르다.

천곡사지 칠층석탑[편집]

-寺址七層石塔

보물 제309호. 정읍시 망제동 10소재. 망제봉의 서쪽 기슭 천곡리 골짜기에 있어 통칭 천곡사지 석탑이라고 한다. 원래는 오층석탑이 또 하나 있었는데 1925년경 일본인들이 어디론지 옮겼다. 이때 해체한 탑 속에서 고려 태조 21년(938)이라는 명문이 나와 이를 탑의 축조연대로 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현존하는 7층석탑은 남승의 탑이고 옮겨간 탑은 여승의 탑이라 한다.탑의 형태는 신라의 형태를 벗어난 고려탑의 형태로써 그 구조는 탑의 규모에 비하여 기단의 규모가 작은 편이며, 1층의 탑신은 네 개의 판석을 서로 엇물려 세웠다. 제2층의 탑신은 높이가 제1층보다 훨씬 낮은 동시에 크기가 다른 두 개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3층 이상의 탑신은 모두 장방형태로 다듬어진 한 덩이의 돌로 세워져 있는데 좁은 편이나 두꺼워서 둔중한 감을 주기도 한다.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편집]

井邑普化里石佛立像

보물 제914호.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 110-6. 2기의 백제 석불입상이다. 오른쪽 어깨에 법의를 걸치지 않고 맨살을 내놓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모습인데 신라 통일 이전에는 금동불이나 마애불에는 이 같은 수법의 사용이 있었으나 화강암의 완전한 입상석불에 사용된 것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기의 불상 가운데 오른쪽 불상은 머리 위에 육계가 놓여 있고 두 눈은 깊이 패어 있으며 코는 떨어져 나갔다.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있고 왼손은 부처의 대자대비 큰 덕을 표시하는 시무외인(施無畏人)을 취하고 있다.

무성서원[편집]

武城書院

사적 제166호.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소재. 신라 말의 유현인 고운 최치원과 조선 중종 때 태인현감이던 신잠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사액됨으로써 무성서원이라 하였다. 사우는 최치원을 비롯하여 신잠·정극인·송세림·정언충·김약묵·김관 등의 향현을 배향하였다. 현존 건물로는 현가루를 비롯하여 강당·동서재·사우·비각 등이 있다. 사우는 성종 15년(1484)에 중수되었고, 강당은 순조 25년(1825)에 불타 없어진 것을 순조 28년(1828)에 중건하였다. 이 서원에는 성종 17년 이후의 봉심안·강안·심원록·원규 등의 귀중한 서원 연구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대원사[편집]

大院寺

완주군 모악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대원사는 고구려 말 보덕화상의 제자인 일승·심정·대원 등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고려 때에는 원명국사가 건립하였고 조선조에는 정유재란으로 불탄 후 한때 진묵대사가 재건하여 머물렀으며 조선 말에는 종교사상가인 강증산이 도를 깨우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웅전 뒤편에 5층석탑이 있으며 높이가 238cm로 2층의 기단 위에 5층을 세웠다.

은수사[편집]

銀水寺

진안군 은수사는 현재 조계종단 소속인데 조선 초기에는 상원사(上院寺)라 했고, 숙종 무렵에는 상원사는 없어지고 사지만 남아 있었는데 그 뒤 누군가 암자를 지어 정명암(正明奄)이라 했다. 은수사 황혜수(黃惠修) 주지 스님에 의하면 “正”은 5획으로 오행, “明”은 일월이므로 정명암이란 이름은 음양오행의 순환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정명암도 퇴락하여 없어졌다가 1920년에 이주부(李主簿)가 중창하였고, 이때 은수사(銀水寺)로 개칭되었다. 한글학회의 『지명총람』에 의하면 은수사란 이름은, 태조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하였으므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은수사는 본시 불당 겸 요사채로 쓰인 건물과 그 위 산신도각(山紳度閣)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근래 극락전, 태극전, 대웅전과 요사채를 건립하여 바야흐로 대가람으로 도약을 기약하고 있다.국내 최대 크기였던 법고(1982년 제작)가 소장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 삼신할머니상이 상원사지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은수사 경내에 천연기념물인 마이산 줄사철군락(천연기념물 제380호)과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가 있다.

금당사[편집]

金塘寺

진안군 마이면 동촌리에 있다. 조계종단 소속. 고구려 보장왕 때의 열반종의 종조 보덕화상의 제자인 무상화상과 김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중기의 지리서에는 금당사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지 않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마이산에는 상원사, 혈암사, 쇄암사만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이중 어느 것이 금당사의 전신인지 또 언제 현재의 자리에 건립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금당사는 매우 퇴락하여 1978년에 지장전을 중건하였고 뒤이어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였다.대웅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이고 팔작 기와지붕이며, 지장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맞배기와지붕이며, 삼성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맞배지붕으로 건립되었다. 금당사에는 괘불탱화, 목불좌상, 3층석탑 등 문화재 3점이 소장되어 있다.

백산서원[편집]

柏山書院

향토문화재. 무주군 무풍면 헌내리 소재. 조선 세종 때 삼정승의 벼슬을 두루 거친 문효공 하연과 정경부인 성산 이씨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순조 때 타진사를 세워 영정을 모셨다가 순종 때 다시 세우고 백산서원이라 했다. 타진사에 모신 영정은 세종 10년(1428) 하연의 셋째 아들 하우명의 작품이라 전해 오는데 영정의 부본은 일본 천리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풍루[편집]

寒風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소재. 본래 무주읍내 앞 냇가에 위치했던 누각인데 옛날은 전주 한벽루, 남원 광한루 등과 함께 호남의 삼한 중 하나로 유명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누각으로 손꼽아 왔다. 예로부터 이름난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 풍류를 즐겼던 이 누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세웠는데 일제시대 때는 일본 군인들에 의해 영동군 양산 강변으로 옮겨져 금호루라는 현판이 걸렸다가 1971년 무주 군민들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신광사 대웅전[편집]

-寺大雄殿

지방유형문화재 제113호. 천천면 와룡리 38 소재. 장수군 천천면 와룡리 신광마을 서쪽에 있는 것으로 신라 흥덕왕 5년(831) 무량국사가 창건하였고, 조선조 헌종 15년(1849) 당시 장수현감 조능하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이 신광사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맞배 너와지붕의 대웅전과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으로 된 명부전이 있다. 이 외에도 대웅전 남쪽에는 정면, 측면 모두 1칸으로 된 칠성각과 대웅전 정면에는 2동의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다.

어서각[편집]

御書閣

지방문화재자료 제32호.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1118-1 소재.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것으로 번암면 소재지에 있다. 입구에 최근 세운 철제 홍살문이 있으며, 이 홍살문을 지나면 삼문이 있고 이 삼문 안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어서각이 있다. 정면의 중앙칸에는 어서각이라는 현판과 중수와 관련된 4개의 현판이 벽면에 걸려 있다. 어서각 안에는 조선 영조가 직접 쓴 글씨가 보존되어 있다.

창계서원[편집]

滄溪書院

지방문화재자료 제36호. 장수군 장수읍 선창리 566-1 소재. 장수군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으로 조선 숙종 21년(1695) 창건되었다가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58년 이 지방 유림들에 의해 복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창계사가 있으며, 창계사 바로 앞과 창계사의 왼쪽에는 창계서원의 유지비가 세워져 있다.한편 창계사 안에는 익성공 방촌 황희를 주벽으로 하여 열성공 췌부 황수신, 뇌계 유호인, 송탄 장응두, 무명재 강백진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임실 용암리 석등[편집]

任實龍巖里石燈

보물 제267호.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188-1 소재. 우리나라 석등으로는 가장 큰 것의 하나이며 아깝게도 상륜부가 없어졌다.8각의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는 2매석으로 되었으며 8각하대의 각 측면에는 가늘고 길쭉한 안상(眼象)을 새기고 상하에는 굽을 둘렀다. 이 위에 올려진 연화대석 위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8판씩 조각하였는데 그 끝에는 큼직한 귀꽃을 달아 장식하였다. 간주석은 원주형으로 중앙에는 북모양으로 배가 부른 양각대가 있고 상·하단의 주위에는 복엽8판의 양 복면을 대칭이 되도록 조각하였다. 상대석에는 낮고 높은 2단의 원형괴임이 조출(彫出)되고 측면에는 단엽 8판의 암연이 새겨져있다. 화사석(火舍石)은 8면에 모두 장방형의 화창을 내었다. 옥개석은 하면에 3단의 낮은 괴임을 각출하였고 추녀의 낙수홈도 각이 낮다. 전각 끝에는 삼선형의 큼직한 귀꽃을 세워놓았고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낙수면의 각 합각은 뚜렷하며 상부에 복연을 놓아 상륜부를 받도록 하였다. 옥개석 정상에는 8각의 노반과 암화석만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보개(寶蓋)와 보주(寶珠) 등 여러 가지 상륜부재가 있었을 것이다.이 석등은 조각된 문양이 섬세하고 다양하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석불연화좌대[편집]

石佛蓮華座臺

지방유형문화재 제82호.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76-1 소재. 중기사지 석불연화좌대는 신평면 용암리 소재 서쪽 약 30m 지점에서 출토되었다. 이 좌대는 2기가 있는데, 1기는 상대, 중대, 하대석 모두 팔각으로 중대안상(中臺眼象)에 합장한 좌상이 조각되어 있고 하대 역시 각 면마다 문양이 조각되어 있으나 문양을 판별할 수 없고 다른 1기는 상대가 반구형으로 판내의 화문이 중판연화문(重瓣蓮花文)의 양연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중대는 판각으로 되어 있으나 각면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4면에는 석등화창같이 장방형으로 되어져 있다. 문양 등 규모로 보아 2기의 상대석이 서로 바뀌어 놓여진 것으로 보이며 이 지역에 위치한 보물 제267호 석등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운서정[편집]

雲棲亭

지방유형문화재 제135호.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 산 52 소재. 관촌면 오원천변의 사선대 위에 있는 운서정은 울창한 수목들에 둘러싸여 운치를 더하고 있다. 운서정은 당대의 부호인 승지 김양군의 아들 승희공이 부친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8년 당시 쌀 3백 석을 들여 6년간에 걸쳐 지은 곳이다. 정각과 동·서재, 그리고 가정문으로 이루어진 운서정은 이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거대한 목재와 석축 등을 사용한 건축양식이다. 건립 후 일제하에 경향의 우국지사들이 모여 망국의 한을 달래던 곳으로도 유명한 운서정은 오늘날에는 관광지 사선대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이도리 미륵불상[편집]

二道里彌勒佛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45호.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210-4 소재. 임실읍 이도리 미륵불상은 높이 2.54m. 어깨폭 81cm로 수정마을 운수사(雲水寺)에 남아 있다. 운수사는 창건 연대와 설립 경위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백제시대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이 석불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산세의 액막이를 위해 세운 절에 남아 있은 것으로 지금은 숲과 합도는 없어지고 석불만 남아 있다. 삼은은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으나, 목 이하는 조각이 희미하다. 불신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고 머리와 눈썹, 그리고 수염은 검은색, 입술은 붉은 칠을 하고 있어 토속적인 색채가 강하다. 백제시대의 유물이라고 하나 조각연대는 분명치 않다.

남원 양씨 종중문서[편집]

南原楊氏宗中文書

보물 제 725호.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595. 이 홍패(紅牌)는 1355년(고려 공민왕 4년, 을미(乙未) 원(元)의 연호(年號)로는 지정(至正) 15년) 양이시(楊以時)가 동진사과(同進士科)라는 문과에 급제하고 왕명으로 받은 합격증인데 그 크기는 가로 34cm 세로 64cm이다. 또다른 하나는 1376년(고려 우왕 2년)에 종사랑 장복·직장(從仕郞掌服·直長)으로 있던 양수생(楊首生-양이시의 아들)이 문과 을과 제2인자로 급제하고 받은 합격증의 크기는 34cm이며 세로가 65cm이다.이들 두 홍패는 붉은색의 두꺼운 한지에 묵필(墨筆)로 서사한 것인데 조선시대의 교지(敎旨)에 비해 규격이 약간 적다. 길고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손이 닿아 지면이 약간 파손되고 글씨도 희미한 부분이 있지만 비교적 보관이 잘 되어 원형에 가까운 셈인데 종이의 붉은 색이 많이 바래서 명료한 색을 나타내고 있지는 못하나 그것이 홍색 지면인 것은 알 수 있다.알려진 바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홍패는 국내에 오직 3매가 남아 있다고 전한다.

순화리 삼층석탑[편집]

淳化里三層石塔

유형문화재 제26호.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514-2 소재. 순화리 3층석탑(石塔)은 현재의 순창여자중학교 본관건물과 두 숙직실 사이에 위치해 있다. 고려시대의 전 옥천사(玉川寺) 경내에 건립되었던 것이라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석탑 가까이에서 지금도 기와 파편과 그릇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어 이 부근에 큰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탑은 화강암으로 조성한 3층인데 탑의 기단부 지대석은 서북쪽의 일부가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고 다른 부분은 땅에 묻혀 있다.

순창 객사[편집]

淳昌客舍

유형문화재 제48호.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313 소재. 순창초등학교 교문에서 약 50m 쯤 떨어진 운동장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創建) 연대는 1759년 7월 (조선영조 35년)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이곳에는 정당(正堂) 동대청(東大廳), 서대청(西大廳)이 있었으며, 전면에 중문(中門)과 외문(外門), 그리고 옆에 무곽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 남아 있다.건물은 원래 정면 13칸, 측면 2칸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붕은 팔자솟을지붕이었으나, 서대청이 없어진 뒤 동대청만이 팔작지붕으로 남아 있고, 정당 3칸 서쪽은 맞배지붕 형태로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초석(柱礎石)은 장대석 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포작(包作)의 형태로 보아 익공(翼工)집이면서도 외목도리를 하여 처마를 길게 밖으로 빼낸 것이 특징이다.

신경준 고지도[편집]

申景濬古地圖

유형문화재 제89호.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594 소재. 조선조 영조와 정조 때의 유명한 실학자인 여암(旅庵) 신경준이 군사도의 형식으로 작성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오고 있는 옛날 지도 3매가 있다. 지도에는 명칭이 없으나 편의상 「북방강역도(北方彊域圖)」와 「강화도 이북의 해역도(江華島 以北의 海域圖)」로 이름을 붙였다.오랜 시일을 지나면서 여러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약간 훼손된 부분이 있으나 잘 보관되어 온 편이며 현재는 설씨부인(薛氏夫人)의 권선문첩(勸善門帖, 보물 제728호)과 함께 고령 신씨 종손인 신남두(申南頭)의 본가에 세워진 보호각(保護閣, 1990년 신축)에 보관 관리되고 있다.

강천사 오층석탑[편집]

剛泉寺五層石塔

유형문화재 제92호. 순창군 팔덕면 청계 996 소재. 강천사(剛泉寺) 다보탑(多寶塔)은 현재 강천사 대웅전 바로 앞 뜰에 위치해 있다. 고려 충숙왕 3년(1316)에 덕현선사가 강천사를 중창할 때 세웠으나 6·25전쟁 때 강천사의 전체 건물이 소실되어 이 탑도 화를 입어 도괴되었다. 그 후 1959년 당시의 주지(住指) 김장엽(金奬燁) 스님이 강천사를 다시 세울 때 탑도 다시 세웠다. 높이는 2.5m이고 5층탑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2, 3, 4층의 옥개석이 6·25 당시의 총탄에 의해 일부가 파손되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파손된 석등의 중대석과 보주가 일부 남아 있으며 당간지주 4기와 가공된 석재들이 몇 개 흩어져 있다.

순평사 금동여래좌상[편집]

淳平寺金銅如來坐像

유형문화재 제165호.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426 소재. 순평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의 전체높이는 104cm, 상호높이는 30cm이며, 어깨너비 42cm인데, 불상이 지닌 여러 특징으로 보아 14~1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우아하고 귀족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불상이 처음 어디에서 조성되었는지, 또 어디에 모셔졌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구전에 의하면 전에는 남원에 있는 어느 사찰에 모셨던 것이라는데, 해방(1945년)후에도 전남 담양의 어느 개인에게 옮겨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