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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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편집]

落花岩

충청남도 부여, 백마강에 닿아 있는 부소산 서쪽 끝에 절벽을 이룬 큰 바위. 백제 31대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하자 3천 궁녀가 이 바위에서 백마강에 몸을 던져 빠져죽었다 하여 유명하다. 이 곳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부소산성[편집]

扶蘇山城

사적 제5호. 백제 수도 사비성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성으로 둘레 2,200m, 면적 약 74만㎡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에 있다. 반월루(半月樓)가 있는 곳에서 산정을 두른 약 600m의 산성 안에는 영월루(迎月樓)와 군창지(軍倉址) 등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538년(성왕 16) 웅진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때를 전후하여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월성(半月城) 또는 사비성(泗泌城)이라고도 한다.

고란사[편집]

皐蘭寺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암자로 백마강 왼쪽 절벽 위에 있다. 경치가 매우 좋고, 고란초(皐蘭草)로 더욱 이름이 있다. 450년경 백제 때에 창건되었다.

궁남지[편집]

宮南池

사적 제135호. 백제 무왕 시대의 별궁 연못으로,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다. “마래방죽”이라고도 한다. 이 연못의 동쪽에는 초석(礎石)이 남아 있고, 주변에 옛 기와가 많이 남아 있다. 또 부근에는 대리석을 3단으로 쌓아올린 팔각형의 우물이 남아 있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백제시대 법왕(法王)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가에서 홀로 살던 중 용신(龍神)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서동(薯童)으로, 이 서동이 법왕의 뒤를 이어 무왕(武王)이 되었다.

정림사지[편집]

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이다. 가람배치는 전형적인 일탑식(一塔式) 배치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문(中門)·석탑(石塔)·금당(金堂)·강당이 일직선상에 세워져 있고, 주위를 회랑(回廊)으로 구획지었다.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보물 제108호인 정림사지 석불좌상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편집]

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 정림사지에 있는 백제시대의 5층 석탑으로 높이 833cm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소정방이 새겨 놓은 대당평백제국비석(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글을 볼 수 있다. 이 석탑의 양식인 얇고 넓으면서 끝이 약간 반전된 옥개석, 2단으로 얕게 표현된 층급받침이 경쾌한 느낌을 준다. 마치 다층누각 형태의 목조건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석탑이다.

갑사[편집]

甲寺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계룡산 동쪽 기슭에 있는 절. 신라 24대 진흥왕(振興王) 17년(556)에 혜명대사(惠明大師)가 중건(重建)했다. 그 뒤에 의상(義湘)이 도량(道揚)을 설치하고 법당을 증수하여 규모가 커졌다. 경내에는 대적전(大寂殿)·부도(浮屠)·철당간지주(鐵幢竿支柱) 등의 보물과 군자대(君子臺)·용문폭(龍門瀑) 등 비경이 있다. 동구의 울창한 숲길은 여름에도 서늘한 감을 주며 계곡 사이로 펼쳐지는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사보(寺寶)로는 천근 범종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목각판(木刻板) 등이 있다.

갑사 동종[편집]

甲寺銅鐘

보물 제478호. 갑사 종각에 있는 조선시대의 종으로 높이 132.5cm, 입지름 92cm이다. 어깨 위에는 여의두(如意頭) 입화형(立花形)이 돌려 있고, 그 아래 한 가닥의 융기선으로 2줄의 가로띠를 만들어 위띠에 나란한 4각형 속에 연꽃무늬를, 아래띠에는 동그라미 속에 범자(梵字)를 양주(陽鑄)하여 촘촘히 배치하였다. 이 가로띠에 붙여서 4곳에 젖꼭지와 같은 돌기가 3개씩 3줄로 늘어선 유곽(乳廓)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당초문(唐草紋)으로 장식하였다. 유곽 밑에는 원형의 당좌(幢座)를 배치하고, 아래에 구름무늬를 깔았다.1584년(선조 17)에 만들어져 수많은 난리를 거치면서도 오늘과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마곡사[편집]

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있는 절.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였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이 재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30여 칸의 대사찰이었는데, 현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대광보전(보물 제802호)·영산전(보물 제800호)·사천왕문·해탈문(解脫門) 등이 있을 뿐이다.이 밖에 사보(寺寶)로는 5층석탑(보물 제799호)·범종(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괘불(掛佛) 1폭, 목패(木牌), 세조가 타던 연(輦), 청동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가 있다.

마곡사 대광보전[편집]

麻谷寺大光寶殿

보물 제802호. 마곡사에 있는 조선 후기 목조건물.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다포계 양식의 단층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자연석 더미 기단 위에 세웠으며, 기둥에는 뚜렷한 배흘림이 보이고, 개구부는 앞면 5칸과 측면 앞칸에만 두었다. 1787년에 만들어졌으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타고 온 어가가 보관되어 있다.

마곡사 오층석탑[편집]

麻谷寺五層石塔

보물 제799호.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 있는 고려 후기의 석탑으로 높이 8.7m이다. 중층(重層) 4각형의 일반형이다. 2층 기단 위의 5층 탑신부에는 불(佛)·보살 등을 조식하고, 옥개석(屋蓋石) 네 모서리의 전각(轉角)에는 풍경을 장식해 놓은 듯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상륜부(相輪部)는 라마탑 형식의 청동도금제로, 국내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다보탑이라고도 한다.

마곡사 대웅보전[편집]

麻谷寺大雄寶殿

마곡사에 있는 보물 제801호. 17세기 조선 중기에 건립된 마곡사의 법당.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1.5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운 중층(重層) 다포계(多包系)의 팔작건물로서 다른 건축양식에 비해 구조가 특이하다. 외부는 일부가 변형되었으나 내부는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편집]

扶餘陵山里古墳群

사적 제14호. 부여군 능산리 일대에 분포하는 백제의 무덤군이다. 1915년과 1917년 6기의 고분이 발견된데 이어 1965년 2기가 더 발견되어 총8기의 고분이 세상에 알려졌다. 백제 말기인 사비시대(538∼660)의 백제 왕족묘로 추정되며, 구조적으로는 판석으로 짠 직사각형의 널방에 꺾임천장을 갖춘 전형적인 능산리형 돌방무덤이다. 그러나 능산리고분은 대부분 심하게 도굴당하여 출토유물이 거의 없으며, 능산리형 돌방무덤은 백제 영역이던 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현충사[편집]

顯忠祠

사적 제155호.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에 있다. 조선 숙종 30년(1706) 충청도 유생들이 조정에 건의하여 건립되었고, 이듬해 이름을 하사받았다. 186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 위기를 맞이한데다 경술국치 후 일제의 탄압으로 20여 년 간 거의 철폐되다시피 하였으나 1932년 동아일보사 주관으로 범국민적 모금을 벌여 보수하고 다시 영정을 모셨으며, 1962년 전시관이 건립되었다. 1966년에는 현충사의 성역화 사업으로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현재 본전·고택·정려(旌閭)·유물전시관·활터 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이충무공묘[편집]

李忠武公墓

사적 제112호. 충남 아산시 음봉면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묘소이다.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이 충무공이 전사하자 1599년 2월에 충남 아산 빙항산에 장사지냈다. 그 후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가 다시 현재의 위치로 모셨다. 묘역은 9,583㎡이며 묘 1기 외에 비석 1기, 상석(床石) 1기, 장명등 1쌍, 석상(石像) 1쌍이 보존되어 있다.

『난중일기』[편집]

亂中日記

국보 제76호.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겪는 중에 쓴 진중일기(陣中日記)이다. 선조 25년(1592) 5월 1일부터 동왕 31년(1598) 9월 17일까지, 즉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달부터 시작하여 충무공이 전사(戰死)하기 전달까지의 것으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전해진 난중일기의 자필 초본이다. 내용은 시취(詩趣)에 넘치는 일상생활, 동료·친척과의 왕래 교섭, 사가(私家)의 일, 수군의 통제에 관한 비책(秘策), 충성과 강개·비분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료(史料)로서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관촉사 미륵보살입상[편집]

灌燭寺彌勒菩薩立像

보물 제218호. 충청남도 은진에 있는 높이 18m나 되는 한국 최대의 석조불상이다. 거대한 암석을 이용한 거상(巨像)이라는 외에 기법 자체는 졸렬하고 석재를 다루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오는 무계획하고 체념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허리의 아래와 위가 두 개의 암석으로 나뉘며 머리 부분을 기형적으로 크게 다루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게 외포(畏怖)의 느낌을 주는 주술적인 효과는 있을지언정 예술상의 가치는 부족하다.

무녕왕릉[편집]

武寧王陵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 무녕왕과 왕비의 능. 1971년 발굴되었다. 송산리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분구(墳丘)는 지름 약 20m의 원형 구조를 가지며 묘실의 바닥면에서 천장까지 7.7m이다. 묘실은 연화문전(蓮花文塼)·문자전(文字塼) 등으로 쌓인 단실묘(單室墓)로 평면 4.2×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을 둔다. 천장은 아치를 이루고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그 아래에 연자창(連子窓)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이 들어간다.출토된 유물로는 널길(羨道)에서 발견된 한 개의 뿔을 가진 철제(鐵製) 석수(石獸), 청자육이호(靑瓷六耳壺) 동제(銅製)의 발(鉢)·시(匙)·오주전(五銖錢)과 함께 이 분묘의 피장자가 무녕왕 부부임을 밝히는 각자석판(刻字石板) 2장 등이 있다.현실에서는청자사이병(靑瓷四耳甁)·청동용기류(靑銅容器類)·철모·현금(玄琴) 등의 부장품과 금·은의 식금구(飾金具)가 달린 목관이 나왔는데, 왕의 것은 동쪽에, 왕비의 것은 서쪽에 묻혀 있었다. 붕괴된 관 안에는 목침·족좌(足座)·동경(銅鏡)·단룡환두(單龍環頭)의 칼, 울두(蔚斗)와 동제(銅製)의 용기류 화염형관식(火焰形冠飾)·수식(首飾)·이식(耳飾)·식리(飾履)·팔찌(釗) 등의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공주 고분군[편집]

公州古墳群

충청남도 공주시 일대에 흩어져 있는 백제의 고분군이다. 송산리(宋山里) 1∼6호분(사적 13호)·시목동 고분(枾木洞古墳)을 비롯하여 금성동(錦城洞)·옥룡동(玉龍洞)·금학동(金鶴洞) 등의 고분이 대표적이다. 석실무덤이 주류를 이루는데, 소형에서부터 한 변의 길이가 3m를 넘는 대형 등 크기와 형식 면에서 여러 가지이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편집]

公州宋山里古墳群

사적 제13호.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고분군. 해발고도 130m의 송산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벽돌무덤과 활석·괴석으로 만들어진 돌방무덤 10여 기가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7기의 분포를 보면 계곡 서쪽에는 무녕왕릉과 5∼6호분, 동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5호분은 궁륭으로 된 천장식 돌방무덤인데, 1∼4호분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직후부터 6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6호분과 무녕왕릉은 터널형 천장의 벽돌무덤으로서 6호분은 벽 네 면의 일부에 사신도를 그려 넣은 벽화고분으로서 긴 배수구가 널길을 향해 밖으로 뻗어 있다. 벽돌의 무늬와 축조 방법상 무녕왕릉보다 조금 앞선 6세기 초의 무덤으로 보인다.

공주 공산성[편집]

公州公山城

사적 제12호.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山城洞)에 있는 산성으로,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 475년(문주왕 1) 백제가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다시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 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다. 성터는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이며 사방에 석루(石壘)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대부분 조선 중기에 개수된 것이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높이 약 2.5m로 전면만을 석축하였으며, 안쪽 면은 토사·잡석으로 다져 붙였다. 성내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칠백의총[편집]

七百義塚

사적 제105호.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위치해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과 조헌(趙憲), 승장(僧將) 영규(靈圭) 외 함께 전사한 700명의 장졸의 유골을 합장한 무덤이다. 후세에 순의비(殉義碑)와 종용사(從容祠)를 건립하였으나 왜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해방 직후 재건한 것을 1970∼1976년에 크게 중수(重修)하였다.

무량사[편집]

無量寺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에 있는 절이다. 신라 때 창건한 것으로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조선 7대 세조 때 김시습(金時習)이 은거(隱居)하여 있다가 죽은 곳으로 유명하며, 극락전(極樂殿)·석등·5층 석탑 등이 있다.

무량사 극락전[편집]

無量寺極樂殿

보물 제356호. 무량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중층(重層) 불전(佛殿) 건축물이다. 하층은 정면 5칸에 17.14m, 측면 4칸에 12.23m이며, 상층은 정면 3칸에 12.23m, 측면 2칸에 7.34m의 중층 팔작지붕이다. 외관상으로 보면 중층이나 내부는 상하층의 구분 없이 하나로 통해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사방 주위에 1칸의 외둘레칸을 통하게 하였으며, 안쪽에 3칸×4칸의 평면을 지어 고주(高柱)를 돌려 세웠다.

무량사 석등[편집]

無量寺石燈

무량사에 있는 10세기경의 화강석 석등이다. 극락전 앞에 있는 5층석탑(보물 185호) 바로 앞에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옥개석이 약간 큰 편이지만 엷은 옥개에 추녀마다 날아갈 듯 경쾌하게 만들어져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성주사지[편집]

聖住寺址

사적 제307호.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이다. 많은 소조불(塑造佛) 파편과 백제·신라 시대의 기와 등 여러 유물이 발굴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절의 중창자인 낭혜(朗慧)가 입적한 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세운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제8호)와중앙3층석탑, 동·서3층석탑, 석등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성주사지 서삼층석탑[편집]

聖住寺址西三層石塔

보물 제47호. 성주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이다. 성주사지에 일렬로 있는 3개의 석탑 중 하나로 높이는 4m 정도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신라 석탑의 기본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3기의 3층석탑은 3세불(三世佛)인 정광불(定光佛)·약사불·가섭불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성주사지 오층석탑[편집]

聖住寺址五層石塔

보물 제19호. 성주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금당지(金堂址) 전면에 있는 것으로 보아 불탑으로 추정된다.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으로 층수에 차이가 있을 뿐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형수법이 같은 절터 안에 있는 다른 3개의 탑(중앙3층석탑·서3층석탑·동3층석탑)과 같다.

수덕사[편집]

修德寺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德崇山)에 있는 절이다. 백제 15대 침류왕 2년(358)에 수덕각시라는 관음 화신(觀音化身)이 중생 제도를 위해 창건했다는 전설을 지닌 고찰(古刹)이다. 국보 제49호인 대웅전은 형태가 장중하고 세부 구조가 견실 치밀한 우수한 건축물이다. 고려 25대 충렬왕 34년(1308)의 건물임이 8·15광복 전 수리공사 때 밝혀졌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의 중 혜현(惠現)이 이곳에서 삼론(三論)을 공부했다고 한다.산 위에는 비구(남자 중)가 거처하는 정혜사(定慧寺)가 있으며, 서쪽에 비구니(여자 중)가 사는 총림(叢林)이 있다. 관음 바위·미륵 석불·만공탑·전원사 등이 있다. 특히 담징(曇徵)이 그린 대웅전 벽화가 유명하다.

수덕사 대웅전[편집]

修德寺大雄殿

국보 제49호. 수덕사에 있는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집이며 공포는 2출목으로 되고 대체적으로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형식이나, 전반적으로 무량수전에 비해 고려 후기의 성격을 보인다. 1940년의 수리시에 나온 묵서명(墨書銘)에 의하여 그 연대가 1308년임이 확인되었다.

해미읍성[편집]

海美邑城

사적 제116호.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옛 석성. 조선 9대 성종(成宗) 22년(1491)에 축조된 원형의 읍성(邑城)으로, 성의 길이 1,800m, 성벽 높이 5m, 면적은 64,463㎡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완전한 읍성의 하나이다. 속칭 탱자성이라고도 하는데 1973년부터 복원사업을 실시하여 민가 및 관공서가 철거되고, 3대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등이 복원되었다.

서산 마애삼존불상[편집]

瑞山磨崖三尊佛像

국보 제84호.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백제 말기 마애삼존불상으로 높이는 2.8m이다. 중앙의 본존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있다. 이 삼존상은 『법화경』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 즉 석가불·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로, 『법화경』 사상이 백제사회에 유행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이다.

보원사지[편집]

普願寺址

사적 제316호.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던 절터이다. 강당사(講堂寺)라고도 하는데,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오층석탑·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 등이 남아 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편집]

普願寺址五層石塔

보물 제104호. 보원사지에 있다. 고려 초기의 탑파 양식을 보여주며, 높이 9m나 되는 큰 탑이다. 하성 기단의 각 면에 사자 모양을 새기고 상성 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겨 신라 말기 석탑의 수법을 보여준다. 한편 얇고 길게 뻗은 처마가 백제의 전통을 따르고 있어 특이하다.

홍주성[편집]

洪州城

사적 제231호.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성이다. 현재의 성은 조선 5대 문종(文宗) 1년(1451)에 수축한 것으로 동쪽에 조양문(朝陽門), 서쪽에 경의문(景義門), 북쪽에 망화문(望華門)이 있다.

태안 마애삼존불[편집]

泰安磨崖三尊佛

보물 제432호.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에 소재하는 화강석 석불상이다. 2여래·1보살이라는 파격적인 이 3존상은 우리나라 조각 사상 희귀한 것이다. 따라서 그 독특한 형식은 조각뿐 아니라, 교리사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물이다. 연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6세기 중엽경의 중국 불상의 백제식 번안으로 추측된다.

안국사지 석불입상[편집]

安國寺址石佛立像

보물 제100호. 고려 후기의 화강암 불상. 충청남도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에 있다. 본존 높이 4.91m, 좌보살 높이 3.55m, 우보살 높이 1.7m. 본존 머리 위에는 장방형 갓이 씌워져 있고 몸통은 방주형(方柱形)이다. 얼굴은 넓적하고 목이 짧으며, 표정 또한 괴상하다. 오른쪽 보살상은 입체감이 두드러지며 머리에 높은 보관을 썼는데, 왼쪽 보살상은 머리가 절단되었고 전면에 마멸이 심하다.

안국사지 석탑[편집]

安國寺址石塔

보물 제101호. 고려시대의 4층 석탑. 충청남도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에 있다. 탑신부에 비해서 기단부가 소홀한 편이다. 지상에 2매의 장대석을 놓아 지대석을 삼았으며, 상면에 낮은 괴임이 표출되었을 뿐 그 위의 중석(中石)은 1매석을 얹었고 우주(隅柱)나 탱주(撑柱)도 없는 자연석에 가까운 석재이다. 소박한 느낌을 주며, 탑신에 불상을 조각한 점 등 가치가 높다.

보협인석탑[편집]

-石塔

천안시 북면 대평리 소재. 1기, 기단부 55×66cm, 높이 187cm.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특수형에 속하는 오월왕전홍숙팔만사천기탑계의 이형석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무이하다. 북면 대평리 탑골에 있는(구룡사라 구전) 절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흩어져 있다가 1967년에 천안으로 반출되었다가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기단석 각면에 2구씩의 나한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탑신괴임석에는 당초문과 양연문이 조각되어 있고, 탑신 각면에 석가본생도 조각과 사리공이 있다. 개석에는 당초문과 단선문 48판의 연화문 조각이, 상륜부에는 4개의 마이상을 한 연화판을 네 귀퉁이에 세워 조각하였다.

천흥사 동종[편집]

天興寺銅鐘

국보 제280호.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에 있던 천흥사의 동종. 종구직경 955m/m, 종고 1676m/m. 구성 요소로 볼 때 신라종의 특징인 단용·음관·상대·하대·유두·당좌 및 비천상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대표적인 고려 전기종으로서 외형상으로는 신라종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유사점이 많으나 구성이 간소화되었고, 위패형의 명문곽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명문에 의하면 1010년에 주성된 종임을 알 수 있고 규모는 종고 1,676mm, 구경 955mm, 두께 88mm로 현존하는 고려 전기종 중에서 최대의 종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에 전시되고 있다. 천흥사가 폐사된 후 어떤 이유인지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사용되다가 광주군청으로 옮겨졌고 다시 덕수궁 미술관에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게 되었다.

천흥사지 오층석탑[편집]

天興寺址五層石塔

보물 제354호.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190 소재. 수량 1식, 높이 5.3m. 신라시대 석탑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5층석탑이다. 기단은 이중기단을 갖추었는데 하층기단은 지대석 면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없이 1면에 7구씩의 안상을 새겼다.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네 개의 우주만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에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체감률은 작은 편이다. 옥개석은 평박하고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며 전각의 반전이 큰 편이다. 현재 상륜부는 전부 없어서 원래 상태를 알 수 없으나 석탑 자체에서 나타나는 형식과 양식에서 수려한 수법을 보이고 있고, 양식적 특징을 갖춘 탑으로 천흥사 동종(1010)과 시대를 같이 하는 고려 초기의 탑이다.

천원 삼태리마애불[편집]

天原三台里磨崖佛

보물 제407호.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산 27 소재. 불상 높이 7m. 이 불상은 거대한 산정바위에 돌을 새김한 마애불입상이다. 넓적하면서도 박력있는 얼굴, 길게 치켜올라간 눈, 광대뼈가 나온 뺨, 큰 코와 작은 입 등의 이목구비가 매우 강건한 인상을 주고 있다. 소발의 머리카락, 둥글고 큰 육계도 퍽 인상적이며, 두 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독특한 손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이런 수인은 고려시대의 미륵불상 수인들과 같은 것이어서 불상 명칭까지 알 수 있다. 넓은 어깨에 걸친 통견의 불의는 배 아래서부터 U자형의 주름을 형성한 점이나 손목을 돌아 내린 의습의 대칭적인 표현 등은 거침없고 활달한 편이지만 선각의 평행적인 처리, 끝단의 마무리 등에서는 도식화된 면을 엿볼 수 있다. 전체적인 형태나 상호,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고려 시대의 불상양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마애불상으로 평가된다.

어필부역면세권[편집]

御筆賦役免稅權

보물 제259호.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640(광덕사내) 소재. 교지의 규모는 세로 47cm, 가로 28cm이다. 세조 3년(1457) 8월에 왕이 온양온천에 행행하다가 이곳 광덕사와 개천사(지금의 광덕면 보산원리)에 들러 이와 같은 면부장을 써 주었다. 내용은 본 사찰의 승려들은 부역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세조는 우리나라의 유명사찰을 거의 찾아 참불한 제왕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면부장을 남긴 사찰은 많지 않다.

유관순 열사 유적[편집]

柳寬順烈士遺蹟

사적 제230호.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외. 생가 20평, 봉화지 1식, 사적 2.449㎡, 봉화지 1,600식.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학생들과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하였고, 일본인들이 휴교령을 내리자 같은 해 3월 13일 고향 병천으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의 3·1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궐기할 것을 설득했다.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의 횃불을 올렸던 곳으로 1972년 10월 14일 국가에서 사적지로 지정하였다.

계유명 삼존천불비상[편집]

癸酉銘三尊千佛碑像

국보 제108호. 조치원 서광암에서 발견된 이 비상은 연화대와 이단을 이루는 천개를 상하에 갖추고 있다. 신부의 하부에는 삼존상이 새겨져 있고 좌우에 명문이 있으며 그 밖에는 천불좌상이 가득 새겨져 있다. 조성시대는 통일신라 초기로 추정된다.

금동보살입상[편집]

金銅菩薩立像

국보 제247호. 1974년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 절터에서 출토.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삼면 보관을 쓴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가까우며, 보관의 중앙에 화불이 있어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둥글고 아담한 단판연화좌의 양식과 함께 백제 후기 약 7세기경의 작품이다.

신원사 괘불[편집]

新元寺掛佛

국보 제299호. 공주시 계룡면 양와리. 제작연대는 미상이며 조선시대 말기로 추정되는 바로자나 불화로서 길이 9.76m 폭 6.17m로 마포에 채색하여 그렸으며 대법회시 밖에 내걸었던 행사용 불화이다.

석가여래 진신사리탑[편집]

釋迦如來眞身舍利塔

1990년 미얀마에서 4과, 태국에서 3과 도합 7과의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모셔다 봉안하고 있는 탑이다. 이곳에 가람을 세우고 탑을 세우면 천년만대로 국익을 도모한다는 옛 말에 따라 현 주지 운담 대사의 원력으로 세우게 되었다.

계백 장군 유적 전적지[편집]

階伯將軍遺蹟戰蹟地

논산시 부적면 산 4번지 소재.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에 침입하였을 때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 신라 김유신의 군사 5만여 명과 대결 4차례에 걸쳐 물리쳤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한 계백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한 것으로 조선 숙종 6년(1680)에 충곡서원을 건립하고 계백 장군 위패를 주향으로 모시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근래에는 묘소에서 묘제로 지낸다.

성주 도씨 종중문서[편집]

星州都氏宗中文書

보물 제724호.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 소재. 문서 5건(왕지 28cm×35cm 4건, 녹패 18cm×48cm 1건). 도씨 중종에 소장된 본문서는 성주 도씨 7세 도응에게 조선 태조 2년(1393) 3년, 4년, 6년에 각각 발급된 사령 왕지 4건과 녹패 1건이다.도응은 고려 말의 공민왕 때에 중대광문하시찬성을 역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태조왕이 4차례에 걸쳐 왕지를 보내며 관직을 수여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두문동 72인의 한 분이다. 4차례의 왕지에는 고려말 조선초의 관직명이 병용되었고, 왕지에 쓰인 쇄보 4건은 「조선지보」로 녹패는 「선사지인」으로 되어 있으며, 필체는 초서체가 사용되었다. 본문서를 통해 관제의 연혁, 쇄보의 사용경위, 서체의 변화, 문서양식의 변천과정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김장생 묘역[편집]

金長生墓域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 7-4번지 소재. 사계 김장생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학문은 아들 김집에게 이어져 조선 예학의 태두로 기호학파 학문의 주류를 이루며 문하에 송시열·송준길 등 조선 유학의 거유들을 배출시켰다. 1688년에 문묘에 배향되고, 연산의 돈암서원, 안성의 도기서원, 강경죽림서원 등 국내 10여 개소 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개태사[편집]

開泰寺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108번지 소재. 이규보 선생이 쓴 「개태사 조전원문」에 의하면 고려 태조 19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하고 이곳에 국찰로 창건케한 국립 개국사찰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왕이 명하여 개태사를 창건케 하였는데 이는 태조가 전쟁을 하면서도 백성이 생업을 유지케 되고, 나라를 세웠음은 부처님과 산신령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절을 창건하여 개태사라 불렀다.이 일대는 백제의 계백장군과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전투를 벌렸던 곳에 가까우며 고금을 통하여 군사, 교통상의 요지로서 사찰주변에는 6km에 달하는 토성이 있었고, 승병이 주둔하여 사찰을 수비하였다. 이곳 지역에는 동시대의 철확(가마솥,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과 삼존석불상(보물 제219호)이 봉안되어 있다.

쌍계사 대웅전[편집]

雙溪寺大雄殿

보물 제408호.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3 쌍계사. 정면 5칸 19.7m, 측면 3칸 10m, 단층 8작지붕. 조선 영조 14년(1378)에 재중건 되었는데 기둥과 대들보는 굵은 재목을 사용했고, 규모도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정면 5칸은 6개의 기둥을 같은 간격으로 세우고, 각 칸마다 두 짝씩 문을 달았다. 문짝의 문살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꽃새김을 한 꽃살문이다. 문살에 조각된 꽃무늬는 국화·작약·목단·무궁화 등을 화려하게 조각했고, 꽃과 문살에도 채색하여 아름답게 꾸몄다. 배흘림있는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짜돌리고 그 위에 외사출목 내오출목의 다포식 공포를 배열하였는데 우리나라 불전건물로서는 가장 출목수가 많은 공포의 사례이다. 건물 내부에는 3불을 봉안하였는데 불상마다 상부에는 장려한 닫집을 달았으며 닫집의 섬세한 조각과 장식은 장엄한 느낌을 준다.

노성산성[편집]

魯城山城

사적 제393호.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 산 1-1 소재. 노성산 산정에 있는 산성으로 석축으로 된 테뫼형이다. 공주·논산·연산으로 갈라지는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동북방향으로는 양화산성과 대하고 있다. 산성의 둘레는 약 900여 m이고, 높이는 서쪽이 4.2m, 남쪽이 6.8m이고, 서쪽문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데 폭은 6m이다. 여기에 사용된 석재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지만 20cm×60cm 정도로서 네모지게 다듬고 자연의 지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구축한 축성술은 근방의 산성 중에도 보기 드문 형태이다. 성내에는 우물 4개소가 있고, 정상부분에는 경사면을 삭토하여 만든 토루가 있고, 산꼭대기에는 장대지로 추정되는 곳과 장대지 동쪽으로 조금 내려온 곳에 봉화대로 추정되는 부분이 25cm 정도의 석축으로 되어 있다. 성안에서는 백제시대, 신라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토기편과 와편들이 발견되고 있어서 조선시대까지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보령 관아문[편집]

保寧官衙門

지방유형문화재 제40호. 충남 보령시 주포면 부령리 소재. 보령관아문은 조선시대 보령현과 외곽을 두루고 있는 보려성 전문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 13년(1431) 현감 박효성 부임 후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현존 성곽 약 640m가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고, 아문의 현판 “해산루”가 당시(중종 33년:1590)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로 전해오고 있다.

남포 관아문[편집]

藍浦官衙門

지방유형문화재 제65호. 충남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소재. 남포관아문은 조선시대 남포현과 외곽을 두루고 있는 남포읍성 정문으로 진서루는 외삼문, 옥산아문은 내삼문이었다. 조선 태종 6년(1397) 병마사를 두어 현사를 겸하게 하다가 세종 1년(1466) 진을 현으로 고쳐두었다. 당시 객사, 동헌, 아사, 향청, 작청, 현사 등 관아건물이 『여지도서』에 기록으로 전한다.현존 건물 3동이 원형보존, 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진서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으로 하층에 삼문을 설치하여 동헌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옥산아문은 내삼문으로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양쪽에 1칸씩 홍살과 익실을 두었다. 동헌은 현감의 집무건물로 정면 7칸 측면 3칸 중앙에 2칸의 우물정 마루를 두고 좌·우편에 4칸의 작은 방을 두었고, 장초석, 덤벙주초에 원기둥으로 건립하였다.

오천현 관아[편집]

鰲川懸官衙

지방유형문화재 제136호.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소재. 오천현 관아는 조선시대 충청수영청의 관청건물로 당시에는 객사 82칸, 상서헌 9칸, 내동헌 10칸, 외동헌 10칸, 아사 5칸, 관청고 10칸, 군사 7칸 등으로 이루어졌음이 여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현존 관아건물로는 장교청, 진휼청, 공해관으로 3동이 있다. 장교청은 조선 순조 33년(1833)에 건립한 건물로 수영의 군간부들이 의논하던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우측에 온돌방을 둔 건물로 1986년까지 오천면 청사로 사용하였다. 진휼청은 수영에서 빈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곡식을 꾸어주고 거두어들이던 곳으로 오천성 서문 주변에 있다. 공해관은 수영의 내삼문으로 솟을 형식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초익공 건물로 당초에는 현오천초등학교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개심사 대웅전[편집]

開心寺大雄殿

보물 제143호.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의 상왕산록에 있다. 백제 의자왕 14년(651) 때 혜감국사가 창건했다. 임진왜란 때 모두 타버린 것을 다시 재건하였다. 대웅전은 다포식 건축양식으로 작법이 아름다워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지붕 처마 가까이에는 죽 늘어선 도자기 연봉들이 있는데 기왓장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불단 위에 연꽃조각 대좌를 두고 아미타불이 앉아 있으며, 양 옆의 보살들은 지장과 관음보살입상이다. 군더더기 없는 얼굴 모양, 정연한 조각 등이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다.

간월암[편집]

看月庵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만공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다른 암자와 달리 간조시에는 물과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신비로운 암자로 만조시에는 물 위에 떠 있는 암자처럼 느껴진다. 밀물과 썰물은 6시간마다 바뀌며 주위 자연경관과 옛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고찰이 어우러져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편집]

牙山外巖里民俗-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소재. 충남 아산시와 천안시의 경계인 광덕산 밑에 위치하고 있는 외암리 민속마을은 약 500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한 예안 이씨 일가가 주류를 이루어 살고 있다. 문중에 걸출한 인물들이 많아 큰집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많다. 이끼낀 돌담을 돌면 이 마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데 돌담 너머로 뜰 안에 심어 놓은 과일나무 및 마을 입구의 장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디딜방아·연자방아·물레방아·초가지붕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 밖에 많은 민속유물들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맹씨행단[편집]

孟氏杏亶

사적 제109호.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 소재. 아산맹씨행단은 아산시에서 구온양을 거쳐 좌부리라는 곳을 지나 6km쯤 되는 지점에 있다. 아산맹씨행단 내에는 맹사성 정승이 심은 6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고 고택이 있는데 이 건물은 우리나라 민가 중에서 제일 오래된 집이다. 고택 뒤에는 맹 정승, 부친인 희도, 조부 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세덕사가 있다.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어서 행단이라 부르게 된 듯하나 공부하던 자리의 의미인 행단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석조약사여래입상[편집]

石造藥師如來立像

보물 제536호.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산2-4 소재.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장륙불상(1장 6척)이다.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긴 다소 불균형한 상이지만 얼굴이나 옷주름의 뛰어난 조각 솜씨 때문에 우수한 불상으로 돋보이고 있다. 갸름하고 단아한 얼굴, 맵시 있는 이목구비, 잔잔한 미소 등은 고려시대의 독특한 불상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불상의 체구가 직사각형이면서 평판적이지만 손이나 팔, 어깨와 다리를 서투르게 표현하지 않은 점이나 옷주름의 유려한 솜씨 등으로 당시의 석불상으로는 드물게 우수한 모습을 표현한 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비암사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석상[편집]

碑巖寺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

국보 제106호.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 비암사에서 출토되었으나 현재는 국립 청주박물관에 있다. 본래 연기군 전의면 산 속의 비암사에는 3위의 비상이 전해왔는데, 1960년 9월에 발견·조사하여 모두 국보보물로 지정하고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 보존하였는데 이 석상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상이란 석비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비상이 3위나 있었음으로 비암사라는 사명이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삼존석상은 옥개와 대좌를 잃고 신부만이 남아 있다. 전면에는 대형의 주형광배를 지닌 군상이 조각되었으며 중앙에는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이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는 바 의단은 밑으로 내려 대좌의 반을 덮고 의습은 좌우대칭으로 표현했으며 통견한 법의를 비롯해 습벽 사이에 연주가 장식되어 있다. 본존상 좌우에는 각각 1위의 보살입상과 인왕입상이 모두 유경연화좌 위에 적립하였으며 본존과 보살 사이에 각 1위의 나한상반신이 표현되었다. 모두 칠존상이 조각되었는 바 이들 칠존상은 모두 다시 하부에는 대판중엽의 연화좌에 이중으로 실려 있으며 연화좌와 각 상 사이에는 상대하는 장신의 사자 2두가 새겨졌다. 광배에는 화부와 비천상이 조각되어 화사하다. 양 측면에는 좌우 양쪽

끝에 원주형을 표현하고 연화좌에는 모두 같은 양식의 천부주악상을 꿇어 앉혔다. 뒷면은 4단으로 등분하되 삼조의 행선대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단마다 5위의 좌상을 병열하여 합계 20위를 배치하였다. 각 상의 모두 같은 형태로서 연화와 보주형 두광을 갖고 있으며 양손으로 수중공수하였고 흉부마다 전면의 본존상과 같이 만자를 새겨놓았다. 조각에 있어서 양측면의 주악상은 연대가 가장 오랜 석상일 것이며 명문의 계유년은 신라문무왕대(661~680)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비상은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유민의 유력자인 전씨가 발원하여 이룩한 것으로 짐작된다.

서광암 계유명 삼존천불비상[편집]

-庵癸酉銘三尊千佛碑像국보 제108호. 총 높이 91cm. 조치원읍내에서 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산기슭의 서광암에서 1961년에 발견·조사되었다. 상·하 2석으로 연화대석과 신부가 1석이며 정상부에 얽힌 2단형 천개가 별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석상은 단판의 앙화원형 대좌 위에 세워졌는데 연판의 조각은 측면에서 그쳤다. 신부는 장방형 비신형을 이루고 그 하부중앙에 삼존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양측에는 각 4행의 명문을 음각하였다. 그리고 삼존과 명문 이상의 전면을 10단으로 나누었는데 상9단에는 각 20위의 작은 여래좌상을 조각하였다. 이 같은 소형불상의 배치는 측면 각 14단에 각 8위씩 후면 16단에 각 12위씩으로 4면 전체에 720위의 소불이 조각되어 공간을 남기지 않았다. 전면 삼존상에서의 본존은 방형 대좌에 결가부좌하였으며 무릎 밑과 하단에 연화좌가 있고 그 사이에는 상현좌의 양식을 조각하였다. 두부는 부서져 없어졌으며 통견의 가슴에는 만자가 보인다. 수인은 오른손을 올려서 현장하고 왼손은 가슴 앞에서 선장하였다. 좌·우 양 협시 보살은 둥근 양연좌에 섰으며 상부는 나체인데 하반신은 상의가 X자로 교차된 천의가 있으며 연화와 주문으로 원형두광을 갖추고 있다. 옥개석은 장방형 2단을 이루고 1석 조성으로서 상·하단 4면과 뒷면에도 신부와 동일한 소형여래상대가 있어 전체 약 200위에 달한다. 이와 같이 전면에 새겨진 소불상대는 천불신앙에 따르는 천불의 표현으로 해석되는 바, 석상에 조성된 천불의 유례로서는 최고의 작품일 것이다.

금동관세음보살입상[편집]

金銅觀世音菩薩立像

국보 제293호. 국립부여박물관. 1970년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서 발견되었다. 삼면화관(三面花冠)을 쓴 머리와 부드럽고 아름답게 표현된 몸통 부분과 소박하게 표현된 연화대좌(蓮花臺座)는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주며 내려뜬 눈과 입가의 미소는 보살상이 지니는 자비로움을 전신에 넘쳐흐르게 하는 백제 말기의 우수한 불상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편집]

金銅彌勒菩薩半跏像

국보 제83호. 국립부여박물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고개 숙인 얼굴의 뺨에 오른손가락을 살짝 대어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은 부처가 출가 전에 인생무상을 사유하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한다. 안정된 형태와 부드럽고 우아한 자세, 나신의 상체에서 보이는 인체미, 의습의 입체적인 표현과 미소를 머금은 얼굴표정 등은 법열(法悅)의 극치를 자아내는 사유형(思惟形)의 반가상(半跏像)으로 백제인의 종교적 예술성을 잘 표현한 우리나라 불상조각을 대표하는 명품이다. 우리의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비조, 백봉시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금동석가여래입상[편집]

金銅釋迦如來立像

보물 제196호. 국립부여박물관. 1919년에 부여의 부소산성에 있는 송월대에서 발견된 삼존불상이다. 연화문을 음각한 둥근 대좌 위에 일주(一鑄)의 삼존이 조성되었으나, 우협시보살상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본존은 육계가 높고 상호는 길쭉한 편이다. 수인은 여원·시무외인(與願·施無畏印)을 결하고 있는데, 신체에 비하여 손이 무척 크다. 우협시보살은 합장상을 보이고 있다. 광배의 바탕은 화염문으로 채워져 있으며, 두광(頭光) 위에는 화불(化佛) 1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