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충청북도
법주사
[편집]法住寺
속리산에 있는 절.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창건하였다.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天竺, 印度)에 갔다가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에 있었기 때문에 법주사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지금 이 절에 있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목조 5층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을 비롯하여 동쪽 암벽에 새긴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및 절 어귀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은 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들이다. 또 경내에는 고려 충숙왕 1년(1341)에 세운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를 비롯한 수십 개의 비와 부도(浮屠)가 있고 높이 27m의 동양 최대의 거불이 1964년 6월에 점안식을 했다.법주사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을 위하여 인왕경회(仁王?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법주사 팔상전
[편집]法住寺捌相殿
국보 제55호. 속리산에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고식(古式) 목조 5층탑으로 중요하다. 삼국시대의 양식에서 많이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렸으나 1624년(인조 2년)에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재건한 것으로 전하며, 탑파관념이 없던 시대의 사상을 잘 반영하는 탑파건물이다.
법주사 쌍사자석등
[편집]法住寺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 법주사에 있는 석등의 하나. 신라 33대 성덕왕 9년(720)에 건립한 것으로 추측된다. 쌍사자가 마주 보고 서서 앞발로 중대(中臺)를 받들고 뒷발 밑에 연화좌가 있다. 중대의 둘레에 이중으로 연판(蓮瓣)을 새겼고 화대(火袋)를 팔각으로 하여 위에는 개석을 덮었으며 그 위에 보주(寶珠)가 있다. 경남 합천의 영암사지석등, 국립광주박물관의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과 함께 신라시대의 3대 석등으로 일컬어진다. 높이 3.3m.
법주사 석련지
[편집]法住寺石蓮池
국보 제64호. 법주사에 있는 석련지. 석련지는 돌을 깎아 만든 조그만 연못을 일컫는다. 신라 33대 성덕왕 19년(720)에 만들었다. 법당인 용화보전이 있을 때 정면에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 세계 연화지를 상징하며 화강암으로 조각하였다. 석조물 여기저기에 꽃·구름·덩굴 등의 무늬를 아름답게 조각해 놓았다. 높이 1.95m.
중원 고구려비
[편집]中原高句麗碑
국보 제205호.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선돌 마을에서, 1979년에 발견된 고구려 문자왕(文咨王)의 남진순수비(南進巡狩碑). 높이 135cm·폭 56cm·두께 33cm인 화강암의 사면(四面)에 예서체(隸書體) 글씨가 1행 23자꼴로 528자 새겨져 있다. 문자왕 4년(495)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편집]中原塔坪里七層石塔
국보 제6호.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탑평리에 있는 석탑. 신라시대 원성왕 12년에 건립되었다. 2층 기단(基壇) 위에 세웠으며 신라 때의 전형적인 석탑으로 높이 14.5m이다.
중원미륵리사지
[편집]中原彌勒里寺址
사적 제317호.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 있는 절터. 면적 80,454㎡.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식(石窟式) 법당의 중앙에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측면과 후면 석벽 중앙은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을 부조하여 장식하였다. 상부에는 목조건물을 지어 천장을 만들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절터 안에는 석불입상·5층석탑·3층석탑·석등·귀부(龜趺)·당간지주·불상대좌 등의 석조 유물이 있다. 이들 유물의 조형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은거하러 가던 중 이곳에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제천 의림지
[편집]提川義林池
충북기념물 제11호. 삼한시대의 유명한 저수지. 김제의 벽골제·밀양의 수산제(守山堤)와 함께 삼한시대의 3대 수리시설로, 당시 농업 기술 발달의 정도를 보여준다. 둘레 약 2km, 면적 약 15만㎢, 물깊이 약 13m로, 단양·청풍의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축조 공사를 하였다.
용두사지 철당간
[편집]龍頭寺址鐵幢竿
국보 제41호. 용두사에 있는 당간. 고려 4대 광종 3년(962)에 건립하였으며, 전체의 높이 12.7m, 지주의 높이 4.2m이다.
온달산성
[편집]溫達山城
사적 제264호.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옛 석성(石城).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장군이 신라가 침입해 오자 이 성을 쌓고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고 한다. 둘레 683m, 동쪽 높이 6m, 남·북쪽 높이 7∼8m, 서쪽 높이 10m, 두께 3∼4m이다. 성 안에 우물터가 있고, 산 아래 남한 강변을 따라 절벽이 있는데, 이곳에 석회암 동굴이 있다.
덕주사 마애불
[편집]德周寺磨崖佛
보물 제406호. 제천시 한수면 월악산 꼭대기 아래에 있는 고려시대 마애불. 높이 13m. 덕주사 법당지(法堂址) 동쪽 바위에 조각되어 있다. 덕주사는 마의태자의 누이 덕주공주가 건립하였다고 하나 6·25전쟁 때 불타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이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면에는 건물을 세운 구멍들이 있어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얼굴은 길고 풍만하며, 기다란 눈과 큼직한 코, 늘어진 턱은 살찐 얼굴을 강조하고 있다. 산 아래 미륵사지의 석불입상과 마주보고 있다.
충렬사
[편집]忠烈祠
사적 제189호. 충신 열사를 추모하고 그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 충주시 단월동에 있다. 1697년(숙종 23년)에 건립하였으며, 임경업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상당산성
[편집]上黨山城
사적 제212호. 청주시 산성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성. 성벽은 네모난 화강암으로 쌓았는데 둘레 4km, 서벽과 동벽의 높이는 3∼4m이다. 백제 때의 토성이 있던 자리를 1716년(숙종 42년)에 석성으로 개축한 듯하다.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가 30만 명의 병력을 쌓았다고도 하며, 따라서 김유신 장군의 전적지인 낭비성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
[편집]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국보 제197호.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 32 소재. 탑비에 의하면 속성 조씨이고 자가무작인 보각국사가 태조 원년(1392)에 73세로 입적하자 태조가 내신으로 하여금 칙명으로 조성토록하여 권근이 비문을 짓고 석천택이 써서 태조 3년(1394)에 세우고 탑명을 정혜원융이라 하였다.탑을 중심으로 하여 뒤에는 보각국사비를 세우고 앞에는 배례석과 석등을 장엄하게 갖추었다.탑은 9각 원당형으로서 지대석 위에 하대·중대·상대를 얹고 그 위에 8각의 탑신과 옥개석을 갖춘 우수한 부도탑이다. 소문의 8각 지대석 위에 놓인 8각의 하대는 어형 2단의 받침 위에 얹혀 복연 16판인데 판 안에 삼산형의 화판이 조식되어 있으며 1단의 굄이 조각되어 있다.중대는 엔터시스형이며 8면에 장방형의 안상이 마련되었고 그 안상에 운룡과 사자상이 교차로 4면씩이 배치되어 있다. 상대는 1단의 각형 받침 위에 16엽의 앙연이 하대의 복연과 아래위 대칭으로 조각되었으며 그 상단에 탑신굄이 없어 8각의 홈을 파서 탑신을 안정시켰다.옥개석의 낙수면은 급경사이나 기왓골은 없으며 합각마루에 용두를 조각하였고 추녀와 사례도 양각하였으며 16엽의 단엽 연화문과 정면에 8엽의 단엽 화문을 돌려 보주굄을 두었다.
사자빈신사지 석탑
[편집]獅子頻迅寺址石塔
보물 제94호.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002-1 소재. 사찰인 사자빈신사터에 건조되어 남아 있는 석탑이다. 일반형의 석탑양식에서 벗어난 기단부에 네 마리의 사자를 배치한 특수양식의 탑이다. 원래는 9층탑이었으나 4층만 남아 있고 기단석에는 “왕의 장수, 국가의 안녕, 불법의 융성을 기원하며 아울러 불법의 힘으로 적(거란군)을 물리쳐줄 것을 염원하는 뜻에서 절을 세우고 9층탑을 조성한다”라는 조성경위를 조각한 비문이 남아 있다.
제천 장락리 칠층석탑
[편집]堤川長樂里七層石塔
보물 제459호. 제천시 장락동 65번지 소재. 통일신라시대의 말기(9세기 말)에 조성된 탑으로 높이는 9,1m이고 석재는 회흑색의 점판암으로 절단하여 쌓아 올렸는데 석재는 제천의 명산인 용두산에서 채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단은 단층으로 수개의 자연석으로 하여 탑신부를 올렸는데 초층 네 모퉁이에는 화강석주를 세워 다른 전탑이나 모전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이 있다.
청풍문화재단지
[편집]淸風文化財團地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소재. 정부의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으로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1978년 6월 3일부터 시작하여 1985년 10월 17일 준공되기까지 수몰지역 내의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1985년 12월 23일 개장하였다. 청소년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이 관람하고 있으며, 제천시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보물 2점, 지방유형문화재 9점 및 생활유물 2천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영조대왕 태실비
[편집]英祖大王胎室碑
충청북도 지정 기념물 제69호. 규모는 1곽 10평. 청원군 남성면 무성리 산 6-1 소재. 조선 영조의 태실로서 형태는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조성한 것으로 중앙에 2단으로 된 정방형의 대리석 위에 계란 모양의 태실석과 팔각의 갓처마돌을 놓고 주위에 8개의 장대석을 놓고 팔각의 모서리에는 우주석을 세웠다.
문산관
[편집]文山館
충청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49호.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 산 6-1 소재. 문산관은 조선시대 문의면의 객사이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있던 관사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전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구조는 지붕이 좀더 높은 정당(政堂)이 중앙에 있고 그 좌우로 익실(翼室)을 두고 좌·우익실은 온돌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심사 대웅전
[편집]安心寺大雄殿
보물 제664호.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 217 소재. 안심사의 주존불을 모신 법당이며 목조기와집으로 조선 중기의 일반형 건물이다. 신라 혜공왕 11년(775)에 진표율사가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원명국사가 중건하고, 그 후 조선 인조 4년(1626)에 송암대사가 중건하였다. 현존건물은 송암대사가 중건한 것으로 청원군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대웅전의 암막새 기와에는 강의 11년(1672)의 명문(銘文)이 있어서 조선 현종 13년(1672)에 기와를 다시 올린 것을 알 수 있으며 1980년에도 기와를 거의 교체하여 보수하였다. 1989년는 단청을 새로 하였다. 국보 제297호인 괘불이 있다.
중봉 조헌 신도비
[편집]重峯趙憲神道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926-1번지 소재. 중봉 조헌의 묘소로부터 동남방 100m 거리에 위치한 신도비로 인조 27년(1649)에 건립되었다.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을 썼으며, 우의정 김상용이 썼다. 비석높이 175cm, 폭 100cm, 두께 32cm이며 비문에는 조헌의 일생과 금산 싸움이 소상히 적혀 있다.
청석교
[편집]靑石橋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1068-3 소재. 660년 신라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본래는 이 다리로부터 좀 떨어진 지금 경부선 철도 자리였는데 철도공사를 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높이 175cm, 너비 220cm, 길이 983cm인데 양쪽 개울가를 돌로 쌓고 개울바닥에 장대석을 놓은 다음 각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넓은 판석을 얹어 놓은 다리이다.
영동 신항리 삼존불입상
[편집]永同新項里三尊佛立像
보물 제984호. 영동군 용산면 신항리 135-1 소재. 옛 석은사 터에 부조된 통일신라시대의 삼존석불입상이다. 네모난 판석에 부조된 이 불상은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이 배치된 삼존형식을 이루고 있다. 본존불상은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작은 편으로 둥근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다. 두터운 통견의 법의가 가슴에서 U자형으로 벌어져 역삼각형 모양의 띠매듭이 보인다. 옷주름선은 오른손 아래에서 3가닥의 음각선을 이루어 흘러내리고 있다. 이중의 원형 두광을 지니고 있는데 안에는 연화문, 밖에는 확대된 연주문이 이어져 있다. 보주형 두광을 지니고 삼면보관을 쓴 보살상은 각각 손으로 지물을 감싸 잡거나 합장한 자세이다.반듯한 어깨와 중후한 체구 등 각부에서 고식이 나타난 이 삼존불상은 태안마애삼존불상과 서산마애삼존불상 등 7세기 석불사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7세기 후반 내지 8세기 초기의 작품으로 크게 주목되는 삼존불상이다.
영국사
[편집]寧國寺
영국사는 신라 문무왕 8년 원각대사가 창건하고 효소왕이 육궁백관(六宮百官)을 인솔하고 피난했다는 전설이 있는 옥새봉과 육조골이 있고, 고려 문종 때 대각국사가 국청사(國淸寺)라 한 것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했다 하여 영국사라 개칭하였다.이곳에는 원각국사비(보물 제534호), 망탑봉 3층석탑(보물 제535호), 부도(보물 제532호), 3층석탑(보물 제533호), 지방유형문화재 2점 등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하다.
진천 영수사 괘불
[편집]鎭川靈水寺掛佛
지방유형문화재 제44호.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 산 542(영수사) 소재. 길이 8.8m, 폭 5.8m의 저포. 원래는 진천읍 상계리 미역수골에 있던 백련암에 있던 것을 이 암자가 폐허되어 괘불만 현 영수암으로 옮겼다. 저포에 채색을 넣어 그린 이 탱화는 석가모니가 인도의 영산에서 설법장면을 묘사한 초대형 영산회상도로 묵기에는 순치 10년(1653) 7월에 화주 심인 법사의 발원에 의해 화원·비구·명옥·소즙·현욱·법능이 그렸다 한다.3백여 년이 지난 요즘도 닦고보면 새로 그린 것 같으며 충식이나 부후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가뭄이 들어 한해가 심할 때 이 괘불을 밖에 높이 달고 승도들이 기우 기도를 드리면 비가 내린다고 한다.
진천 용화사 석불입상
[편집]鎭川龍華寺石佛立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38호. 진천읍 신정리 584-4 소재. 화강암으로 된 불상으로 높이 7.5m, 아랫부분의 폭이 1.7m가 된다. 불상의 목부분에는 영락줄(목, 팔 등에 두르는 구슬을 꿴 장식품)이 있고 손에는 연꽃을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김유신 장군의 위엄을 기리기 위한 송덕불상이라 불리워지고 있는데 신라시대에 길상사의 제향을 국제로 하였고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예를 따라 국제로 건립하였다고 추정된다.
진천 노원리 마애여래입상
[편집]鎭川-里磨崖如來立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89호.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서원. 상호(相好)에서 대좌(臺座)까지 얕은 부조(浮彫)로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도식화(圖式化) 되었으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등이 뚜렷하며 상호에서 보이는 원만상은 타불상과 비교되는 특징이 있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6.1m, 너비 4.2m이며 부드러운 미소, 감은 듯한 두 눈, 통견의 법의, 수평으로 조각된 대좌 등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대불상의 특징과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불상이다.
괴산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
[편집]槐山-寺址石造如來坐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소재.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 불신만 남아 있던 것을 불두(佛頭)를 찾고, 왼팔목 등을 보수한 것으로 보수 부위를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불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으로 통식을 따르고 있으나,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항마좌는 그 예가 드문 편이다. 결과부좌(結跨趺座)한 높이 95cm의 좌불은 나발(螺髮)의 머리에 높은 육계가 있고, 신체에 비해서 큰 얼굴을 약간 숙이고 있는 상호(相好)는 원만하다. 굴곡이 배제된 네모진 상체에 띠주름 같은 삼도(三道)표현, 평판적이고 네모진 형태, 둔감한 옷주름선 등에서 도식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괴산 봉학사지 오층석탑
[편집]槐山-寺址五層石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소재. 봉학사지 5층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4장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세워진 것으로 초층탑신만이 2장의 돌로 되어 있고, 각층의 탑신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기단부는 없어지고 넓직한 지대석 위에 기단갑석으로 보이는 부재를 얹고 탑신을 쌓았다. 각층 탑신의 면석에는 아무런 수식이 없고 모퉁이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上輪部)에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1개가 있고, 옥개석은 5단받침과 2단의 탑신괴임으로 되어 있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한 편이고, 전각(轉角)의 반전(反戰)이 약하여 고려 초기의 작풍을 보이고 있다.
괴산 원풍리 마애불좌상
[편집]槐山院豊里磨崖佛坐像보물 제97호.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원풍리 마애불좌상은 12m 높이의 암벽에 3.6×3.6m 크기의 방형 감실을 파고 그 안에 3.1m 높이의 불상 2구를 반육각으로 조각하였는데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병좌상으로서는 희귀한 예로 주목되고 있다.넓적하면서도 힘있는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의 조각수법은 평면적으로 양감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신체 또한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으로 형식화되었으며, 통견의 법의 주름은 무딘 선각으로 표현되었다. 광배에는 화불이 조각되었으나 세부수법은 마멸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것은 법화경의 사상을 반영한 석가·다보 이불병좌상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이불병좌상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각연사
[편집]覺淵寺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소재.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다. 각연사 창건 유례기에는 “법흥왕 때에 어느 대사가 쌍곡리에 절을 지으려고 목수를 시켜 나무를 다듬고 있는데 까마귀떼가 날아와서 나무 조각을 물고 날아가길 자주 하므로 이상하게 생각한 대사가 그 까마귀떼를 따라가 보니 깊은 산골에 있는 연못 속에 나무 조각을 떨어뜨려 연못을 살펴보니 그 속에 석불이 앉아 있어 그곳에 절을 세우고 “覺有佛於淵中” 하였기 때문에 절이름을 覺淵寺라 하였다.”한다.각연사에는 보물 제433호인 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하여 비로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대웅전, 통일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호), 부도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도명산 마애불
[편집]道明山磨崖佛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0호.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소재.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삼존상으로 당대의 불상을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이다. 본존불은 현재 높이 9.1m 정도이지만, 깨어진 부분까지 감안하면 15m가 넘는 대불이며, 삼존 모두 장대한 불상들이다.본존불은 얼굴이 2m나 되는데 다소 도식적이지만 이목구비가 시원스럽고 큼직하다. 어깨는 각이 지고 신체 역시 사각형이며 선각의 옷주름이 U자 모양으로 밀집하게 표현되었는데, 규격화된 인상이 짙다. 따라서 얼굴과 신체, 옷주름은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유지하면서 조성되었다고 여겨지며, 이러한 특징은 고려초기에 유행하던 선각마애불상과 같은 경향을 보여준다. 오른쪽 협시상은 규격화된 선각선들이 본존불과 비슷한 경향이며, 보살상의 형태로 생각된다. 왼쪽 협시상은 타원형의 얼굴과 둥근 머리, 이목구비 등이 약간의 부조기법으로 만들어져 세련된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목 이하는 선각 위주이며 천의자락, 신체의 굴곡 등은 다소의 곡선미가 있다.
괴산향교
[편집]槐山鄕校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2호.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소재. 괴산향교는 조선 초기에 창건되고 중종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했으나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공자를 주향하고, 그 양편에 4성을 배향하였으며, 동·서 양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20현을 종향하고, 매년 춘추로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집이며 동·서양재는 각각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이 밖에 부속건물로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현재의 명륜당은 선조 20년(1569)에 짓고, 인조 25년(1647)에 중건하였으며, 숙종 9년(1683)에 중수하고, 1981년에 크게 보수한 바 있다.
감곡성당
[편집]甘谷聖堂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소재. 감곡천주교회는 1896년 프랑스 신부인 임가밀로 신부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전국에서 18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며 충북 도내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당이다. 임가밀로 신부는 1914년 최초로 성체거동행사를 개최하였고 문맹퇴치를 위하여 학교를 설립하여 일본 식민지하에서 억압받는 청년과 아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우리말을 가르쳐 민족의 뿌리가 마르지 않게 하였다.1930년 지금의 고딕식 성당을 건립하고 1934년 지금의 화강석으로 된 사제관을 2층으로 지었다.
신후재 영정
[편집]申厚載影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4호.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 소재. 신후재(1636~1699)는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 호는 규정이다. 현종 원년(1660)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라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나 경신 대출척으로 사직되었다가 기사환국(1689)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우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사은사 겸 진주 주청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영정은 좌안 8분면의 정장 관복을 입고 의장에 앉은 전신상이다. 복식은 숙종연간의 제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단양 적성비
[편집]丹陽赤城碑
국보 제198호.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 3-1 소재. 높이 93cm, 상폭 100cm, 하폭 53cm. 삼국시대에 신라가 죽령을 넘어 단양 일대에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여 국경을 넓히고 이곳의 백성들을 선무한 내용이 담긴 기념비이다.당시 진흥왕이 명하여 신라척경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장과 동시에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시책과 민심을 안정시키고 적성주민을 칭송하는 내용이다.국왕의 교시를 받은 고관 10명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이사부·비치부·무력 등 진흥왕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 주목되며, 새로운 관직 명으로 大象等下干支 등은 학계의 관심거리이다. 이 석비의 건립연대는 신라 진흥왕 6~11년(545~550)경으로 추정된다.
적성산성
[편집]赤城山城
사적 제265호.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 3-1 소재. 길이 923m, 면적 2만 6,816평. 적성산성은 석축성으로 성의 길이가 923m이나 대부분 붕괴되었고 북동쪽 내외 협축한 부분의 안쪽벽 높이 2~3m, 폭 1m의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삼국시대의 산성으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신라와 고구려 세력관계 변동을 알아 보는 데 큰 의미를 가진다. 성내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신라의 북진과 이곳 주민들의 선무활동이 담긴 내용으로 국내 최고의 금석문인 적성비가 있다.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 있어 신라의 축성술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수동굴
[편집]古藪洞窟
천연기념물 제256호. 단양군 단양읍 소수리 산 4-2 소재. 면적 18,210평, 길이 1,300m. 고수동굴은 약 4억 5천만년 동안 생성되어 온 석회암 자연동굴로서 현재 개방된 길이는 1.7km, 입구 높이 5m, 폭 5m이다. 지하수가 많이 흘러들어 다양한 형태의 종유석과 석순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지하궁전을 연상케 하는 장년기의 동굴 지형을 이루고 있다. 동굴의 특색은 지질학적으로 동굴의 생성원인을 밝혀주며 형성물의 특이한 배치와 석주, 호신상 등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