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함경남북도·양강도
괘궁정
[편집]掛弓停
양강도 혜산시 북쪽 압록강변 절벽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누정. 보물급. 북방 방어에 중요한 초소였다. 원래 혜진산성의 남문 누각이었으나, 193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괘궁정(掛弓停)이란 이름은 당시 이곳에 주둔하던 병사들이 건물에 활을 걸어 놓고 적군의 동태를 감시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함흥본궁
[편집]咸興本宮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에 있는 궁궐로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이다. 함흥본궁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으로 뒤에 왕이 된 방과(芳果:정종)와 방원(芳遠: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이성계가 왕이 된 다음 1392∼1398년 사이 조상들이 살던 집터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후 권좌를 물려주고 말년의 외로움과 울분을 달래던 곳이다. 이성계는 이곳에서 아들인 태조 방원이 보낸 사신들을 죽이거나 가두곤 했는데 “함흥차사”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이성계가 죽은 뒤에는 그의 4대조 조상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사용되었다.이 건물은 당시 왕족의 주택구조와 양식의 일단을 보여주는데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1610년에 개수하고 17세기 말경에 다시 지었으며, 6·25전쟁 때 일부 파괴되었으나 여러 차례 보수하여 대부분 복구되었다.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정전(正殿)과 이성계 조상들의 위패를 모셨던 이안전, 누각인 풍패루 등이다. 함흥 본궁 안쪽의 중심건물인 정전은 크기가 정면 5칸에 총길이 15m, 옆면 3칸에 총길이 9.15m이다.이곳엔 함흥역사박물관이 들어섰고, 신라 진흥왕순수비 2점과 창의 사비 등이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또한 정원도 잘 꾸며져 있고 고목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편집]黃草嶺眞興王巡狩碑
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는 높이 1,206m의 황초령은 옛날 관북의 내륙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는 원래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에 있었으나, 1852년에 차령진에 옮겨졌으며, 그 후 함흥역사박물관 본궁 분관에 옮겼다가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와 나란히 보관하였다.황초령비는 몸돌만으로 되었는데 그 높이는 1.17m, 넓이는 44㎝, 두께는 21㎝이다. 비석은 화강석을 잘 다듬어 만든 것인데 형태는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 비문은 12줄에 35자씩 모두 420자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글씨는 명필로 알려져 있는 예서체와 해서체를 아울러 썼다.이 비는 신라의 진흥왕이 확장된 영역을 순시하면서 세운 것이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인 서기 568년(진흥왕 29년) 8월이다. 비문의 내용은 비를 세우게 된 연유와 의의, 그리고 진흥왕의 업적과 순회한 목적, 수행한 사람들의 직위, 이름들이 적혀 있다.이 비는 우리나라 고대 역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당시의 신라 영역 범위와 관직제도·명칭·지명 등을 밝혀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같은 성격의 비는 서울 북한산성과 경상남도 창녕에도 각각 세워져 있다.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편집]磨雲嶺眞興王巡狩碑
함경남도 장진군의 황초령과 이원군의 마운령에 각각 서 있었다. 마운령에 있던 비는 1929년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 만덕산 산중에 파묻혀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비의 발견은 16세기말에 발견된 것을 17세기말 금석학의 대가이며 우리나라 고고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추사 김정희의 고증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은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에 있는 함흥본궁 뜰안에 옮겨놓았다.비석은 화강석으로 네모나게 다듬어서 만들었는데 비몸돌의 높이는 1.36m, 너비는 45㎝, 두께는 30㎝이며, 갓돌은 배집형식으로 되어 있다. 비에는 앞면에 26자씩 10줄, 뒷면에 25자씩 8줄, 모두 415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앞에서 10자, 뒤에서 19자가 깎여 없어졌거나 잘 보이지 않는데 “황초령 순수비”에 의하면 앞의 10자 가운데 7자까지는 알 수 있으므로 결국 393자를 읽을 수 있다. 글씨체는 해서체이다.비문에는 진흥왕의 업적과, 변방을 돌아보는 목적, 그리고 비를 세우게 된 연유 등이 적혀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왕을 따라갔던 사람들의 출신과 벼슬, 이름이 새겨져 있다.이 비는 지금 있는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서 비문이 제일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신라의 24대 왕인 진흥왕이 568년 8월에 이곳을 돌아보고 간 것을 기념하여 세운 이 비는 당시의 역사와 서예, 이두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성읍성
[편집]鏡城邑城
함경북도 청진시 승암노동자구에 있는 성으로 고려가 1107년 처음으로 토성을 쌓았고, 1437년에 토성의 일부 구간을 석성벽으로 고쳤다. 지금의 성은 1616년부터 1622년까지 6년 6개월에 걸쳐 쌓은 것이다. 이때 성문들과 포루·성가퀴·해자·못·우물을 만들었다.이 성은 북으로는 청진방면, 남으로는 길주방면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충지로서 큰길이 동문과 서문을 통하게 된, 방위상 유리한 자연지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류성(柳城)·치성(雉城)이라고도 부르는 이 성은 평지에 7∼10m의 높이로 쌓았으며,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동서 길이가 810m, 남북 넓이는 약 290m, 둘레는 약 2,200m에 이른다. 성벽은 요고성으로 쌓았다. 성벽 위에는 성가퀴를 돌렸는데 옛 문헌에 의하면 510개의 성가퀴가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북벽에 일부만 남아 있다.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포루(각루)를 설치하여 성 밑에 붙는 적을 쏘도록 하였다.성의 사방엔 각각 하나씩 성문을 냈다. 정문인 남문은 수성문이라 하고 동문은 용성문, 서문은 호위문, 북문은 현무문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남문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일제 때 파괴되었다. 성밖에는 참호를 파서 성 방어를 강화하였다. 성안에는 12개의 작은 못과 54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병영·무기고·식량창고·관청·주택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다.경성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역사가 있는 유적으로서 우리나라 동북방어의 주요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성의 축성형식은 수원성 등 후세의 성들에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