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황해남·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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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다라니석당[편집]

海州陀羅尼石幢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탁월함과 예술정신의 깊이를 맘껏 보여주는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인 해주 다라니석당은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에 있다. 다리니석당은 다라니경을 새겨 기둥처럼 세운 돌구조물을 말한다. 원래 우리나라에 네 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평북 용천 성동리에 있는 다라니석당과 해주 다라니석당만 남아 있다.해주 다라니석당은 바닥단과 6각형 화강석 돌기둥과 세 층의 지붕으로 이루어졌다. 그 높이는 4.64m이고, 석당의 밑 받침부분은 연꽃무늬로 장식돼 있으며, 그 위의 6각형 화강석 돌기둥 전체엔 대불정(大佛頂) 다라니경이 음각돼 있다. 맨윗부분엔 3중 옥개석이 놓여 있는데 각 옥개석 위에 귀꽃을 장식하는 등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석당의 머리부분은 지붕돌의 추녀형태가 독특하며, 지붕돌은 그 받침돌을 석당몸돌보다 작은 6각형돌을 끼운 데 비해 셋째 지붕돌의 받침돌은 동그랗게 다듬은 돌을 올려놓았다. 특히 옥개석의 날렵한 경사면은 마치 목조건축물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부용당터[편집]

芙蓉堂-

황해남도 해주시 부용동에 있는 조선시대 누정 부용당의 터. 부용당은 아담하지만 탁월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알려졌으나 아쉽게도 6·25전쟁 때 불에 타버렸다. 누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주변의 연못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악1호분[편집]

安岳一號墳

황해남도 안악군(安岳郡)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많이 깎였으나 방대형의 본래 모습은 어느 정도 지니고 있으며, 널방「墓室」의 구조는 널길과 네모「方形」의 널방「玄室」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墳」이다. 널방의 4벽면은 평탄한 편석(片石)을 진흙과 석회를 섞어 쌓아 올렸다. 천장은 평행3각굄천장이다. 널길은 널방 남벽에 있고, 널길과 널방 사이에 돌문「石扉」이 있다. 벽화는 4벽과 천장 전부에 그려져 있으며, 인물풍속도인데 박락(剝落)이 심하다. 널방 서벽 상부에 사냥그림이 있고, 하부에 7명의 여인입상(女人立像)이 있다. 동벽에 의장행렬(儀仗行列)과 3대의 우교차(牛轎車)가, 남벽에는 행렬도와 기수 4명이 있고, 말탄 인물이 흐릿하게 보인다. 천장에는 다양한 무늬와 해·달·별 등을 그렸다.

안악2호분[편집]

安岳二號墳

안악군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방대형이며, 묘실의 구조는 연도와 방형의 현실 및 현실 동벽에 감이 하나 있는 외간무덤이다. 현실의 네 벽은 석회암·화강암 등의 판석으로 축조하고 두껍게 면화를 발라 정리하였다. 천장은 벽면과 평행하는 2단의 평행굄 위에 3단의 3각 굄을 올려 좁히고 꼭대기 중심에 한 장의 덮개돌을 덮은 평행3각굄천장이다. 현실남벽의 동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 연도와 현실 입구 사이에는 좌우 양쪽으로 열리는 돌문이 있다.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이나 박락이 심하여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벽화는 연도·현실의 네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으며, 그 배치상태를 보면 현실 네 모서리에는 구름무늬단청을 한 포기둥을 세워서 그 윗도리를 표시한 횡대를 받치게 하였다. 연도의 좌우 벽에는 각각 한 명의 문지기를 그렸고, 그 양쪽에는 무인행렬도를 그렸다. 현실 북벽 중앙에는 화려한 장막을 걷어올린 장방 안의 좌상에 한 여인이 호젓하게 앉아 있는 상이 그려져 있고 장방 밖의 왼쪽에는 6명의 시녀상이, 오른쪽에는 측근 문관으로 보이는 3명의 남자상이 그려져 있다. 현실 서쪽의 윗단에는 여인과 아동군상이 그려져 있다. 동벽은 박락이 심하여 남쪽 윗부분에 그려진 2명의 비천상과 3명의 산연화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남벽의 현문 윗벽에는 동벽의 것과 같은 비천 2명과 현문을 중심으로 좌우벽에는 각각 1명의 문지기를 그렸다. 현실의 천장에는 평행굄 제1단 북벽 측면에 붉은빛 바탕에 먹으로 반규무늬를 그리고 다른 세 면에는 연잎당초무늬를 그렸다. 다음 평행굄 제2단 측면에는 보륜을 마름모꼴 격자로 꿰고 그 속에 연꽃을 배치한 무늬, 연꽃당초무늬, 괴운무늬 등으로 장식하였으며, 천장 중앙에는 커다란 연꽃대과무늬를 그렸다.

안악3호분(동수묘)[편집]

安岳三號墳

안악군에 위치한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 1949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이 무덤은 현무암과 석회암의 큰 판석으로 짜여진 돌방무덤으로 남쪽인 앞으로부터 널길·연실·앞방·뒷방으로 형성되며, 앞방은 좌우에 조그만 옆방이 하나씩 달려 있어 좌우 너비가 커지고 있다. 한편, 앞방과 뒷방은 4개의 팔각돌기둥으로 구분되어 서로 투시할 수 있고, 주실 즉 뒷방은 동벽과 뒷벽의 안쪽에 판석벽과 돌기둥을 각각 세워 회랑부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각방의 천장은 네 귀에 각각 삼각형 돌을 얹어 천장공간을 좁히기를 두 번 반복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는 모줄임천장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모줄임천장이다.벽화는 널길벽에 위병, 앞방의 동쪽 옆방에 부엌·도살실·우사·차고 등, 서쪽 옆방에 주인공 내외의 좌상, 앞방 남벽에 무악의장도와 묵서묘지, 뒷방 동벽·서벽에 각각 무악도, 회랑벽에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결국 벽화내용은 무악대와 장송대에 둘러싸인 주실 앞에 주인 내외의 초상도를 모신 혼전과 하인들이 있는 부엌·우사·마구고 등을 두고 맨 앞은 위병이 지키는 설계로, 이것은 왕·귀족·대관들의 생전주택을 재현시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벽화는 벽의 면적 81㎡, 천장의 면적 58㎡나 되는 넓은 널방에 가득 차게 그려져 있다.또한 이 동수묘에서는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명문에서 보인 “永和十三年”은 동진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을 나타낸다. 즉 낙랑 옛 땅의 중국계 주민들이 해상교통을 통하여 강남의 동진과 연락을 가지고 동진의 연호를 쓰고 있음을 말해준다. 동수묘의 주인공인 동수는 미천왕 27년(326)에 랴오둥에서 고구려로 귀투한 무장이며, 고국원왕 27년(357)에 죽어서 안악 유순리에 묻힌 것이다. 동수묘의 구조는 여러 점에서 당대의 중국묘 형식을 본받고 있다. 즉 남북일렬로 여러 방을 배열하는 것이나 앞방 좌우에 옆방을 설치하는 것은 한대 벽돌무덤의 기본 설계법이며, 또 옆으로 넓어진 앞방에 사각형의 주실을 달아 T자형 평면을 만드는 것은 낙랑의 덧널무덤이나 벽돌무덤에서 흔히 보는 형식이다.또, 큰 판석으로 묘실을 짜는 것은 랴오둥 반도의 한대 묘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수묘에서 처음 보는 고구려 고분의 특색처럼 되어 있는 모줄임천장도 산둥성 기남의 후한 대돌무덤에 나타나고, 팔각형 돌기둥도 이 기남묘에 있거니와 기둥 꼭대기에 두공을 얹어 천장석을 받들게 하고 있는 점이 똑같다. 모줄임천장은 원래 근동지방에서 일어난 수법이며,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3세기에는 이미 중국본토로 들어와 있던 것이다. 고분벽화 자체도 한대에서 시행한 것이며, 특히 동수묘와 같은 고구려 전기 고분벽화에서 묘주들이 휘장을 친 방안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랴오둥 지방의 고분들과 같다.결국,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고구려 고분벽화인 동수묘는 랴오둥지방에서 넘어온 동수의 무덤이며, 그것은 중국의 한·위·진대의 벽화고분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고구려 영토 안에 세워진 최초의 중국계 벽화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묘실 평면·모줄임천장·돌기둥·벽화내용 등 여러 면에서 그 뒤 고구려 벽화고분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며, 고구려 벽화고분의 발생과정에서 중국 벽화고분과 고구려 벽화고분을 연결하는 과도기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혜사[편집]

慈惠寺

황남 신천군 신천읍 서원리에 위치한 자혜사는 창건연대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는 않으며, 1716년(숙종 42년)에 쓴 자혜사 중수기에도 이 절의 창건연대를 알지 못한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차례 거듭된 피해를 입어 그 사적마저 멸실되었음을 전하고 있다.1572년에 재건된 현재의 절에는 대웅전과 승방, 5층석탑과 석등이 남아 있는데 석등과 석탑은 고려 초기의 것이므로 절도 고려 초기에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자혜사 대웅전은 송광사 국사전과 공통점이 많은 맞배형의 익공집으로, 조선 초기 건축양식의 한 면을 보여준다. 앞면 3칸(9.28m), 옆면 4칸(9.25m)인 배집인데 뒷면보다 앞면을 낮추어 처마를 길게 연장하였으며, 앞은 겹처마인데 비해 뒤는 홑처마로 되어 있다. 기둥은 배부른 기둥이고 두공은 2익공 바깥도리식이다. 매칸마다 액방과 장여 사이에 연꽃무늬를 뚫어 새긴 화반을 하나씩 얹었다. 건물 안 바닥에는 널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통천장이다. 용마루를 받친 화반대공 좌우에는 활개를 달아 받침대로 삼았으며 화려한 단청장식을 하였다.건물은 대체로 균형이 짜이고 조화가 잘되어 얌전하고도 아담한 감을 준다.

선죽교[편집]

善竹橋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교(石橋). 구명은 전시교(善地橋)라 하였으며, 다리의 동쪽에 한호(韓濩) 글씨의 비(碑)가 있다. 돌기둥과 노면(路面)이 맞닿는 부분에는 시렁돌을 철도의 침목처럼 올렸으며, 돌기둥 위에 마련된 노면에는 양쪽 가에 긴 난간돌을 놓았고 그 사이를 여러 줄의 판석(板石)으로 깔았다. 노면 위에는 교량의 난간주 구실을 하는 돌기둥을 3단으로 쌓았다.이 다리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를 문병하고 오다가 방원(芳遠)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철퇴를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 돌다리에서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공민왕릉[편집]

恭愍王陵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봉명산의 무선봉 중턱에 자리한 2기의 무덤으로, 서쪽 것이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이며, 동쪽 것이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이다. 이 일대의 지형은 풍수설에 잘 어울리는데, 무덤구역은 3개의 층단과 맨 아래의 경단으로 이루어졌다.공민왕은 1365년 왕비가 난산으로 죽자, 자신이 직접 주관하여 9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방대한 무덤공사를 벌였는데, 이 능의 건축과 설계는 당시 고려의 수학, 천문지리, 석조건축물, 조형예술의 수준이 집대성되었다.고려시대에 궁전·무덤 등의 건축물을 웅장하게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건축 구획을 여러 개의 층단으로 배치하던 수법을 도입하여, 제일 윗단에 봉분을 두고 그 아래로 여러 개의 층단을 구성하면서 조각과 시설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장엄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개성 남대문[편집]

開城南大門

개성직할시에 있는 내성(內城)의 남문(南門)으로 1391년에 착공되어 1394년(태조 3)에 완공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보수를 했으며, 1900년(고종 4)에 크게 개수했다. 1950년 6·25전쟁 때 파괴되어 1954년에 다시 복구하였다.내성은 1393년(태조 2)에 쌓은 석성(石城)으로 남대문·동대문·북소문 등 7개의 문과 두 곳에 수구문(水口門)을 설치하였다. 남대문은 돌로 된 축대 위에 있는 목조단층 문루로서 정면 3칸(12.63m), 측면 2칸(7.96m)이다.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화강석을 쌓아 만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문(虹霓門)을 만들었다. 문루의 네 모서리의 기둥들을 약간 안쪽으로 눕혀 건물을 안정되게 보이도록 하면서 건물의 강도도 높여 주었다. 지붕은 겹쳐마의 합각지붕이고 공포(?包)는 안팎 3포로 짜올려 고려 말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만월대터[편집]

滿月臺-

개성시 송악동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시대의 왕궁터로 919년에 창건되었다.왕궁은 황성부분과 궁성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만월대라고 할 때에는 왕궁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궁성부분, 그 가운데서도 관료들이 조화를 하던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의 주 건축군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왕궁 안에 있던 궁성 성벽자리는 현재 동·서·북쪽 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은 석비례와 진흙을 엇바꾸어 여러 겹으로 다져 쌓았다.만월대 유적은 고려시기의 우수한 건축예술이 남김없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궁전건물의 설계에서 일정한 비례관계가 적용된 것, 건물배치에서 지형조건을 잘 고려한 것 등은 고려시기의 건축술이 높은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1361년 북으로부터 침입한 홍건적에 의해 불타버린 후 고려왕조의 쇠약으로 다시 복구되지 못하였고, 몇 개의 정자와 부속건물이 남았을 뿐이다. 조선이 수도를 옮기면서 완전히 폐허로 되었다. 이는 고려사연구와 우리 민족문화의 찬란한 전통과 그 유구성을 밝히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첨성대[편집]

瞻星臺

개성시 송악동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옛 궁성터인 만월대 서문 밖에 있는 건축물로 고려 때에 세운 것이다. 첨성대는 5개의 화강석 기둥 위에 돌마루를 깔았는데 매개 기둥은 어느 것이나 다 길이가 같고, 자름면이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첨성대의 높이는 2.8m이고, 한 변의 길이는 2.6m이다. 기둥들은 정방형의 네 귀에 각각 세워지고 나머지 하나는 정방형 복판에 세워져 있다.돌마루는 돌기둥과 더불어 교묘하게 사개를 틀어 맞추어서 견고하고 단정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의 남북쪽 두 측면에는 쇠붙이를 끼우는 방법으로 돌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윗면 서쪽에는 둥근 구멍 2개가 더 뚫어져 있는데, 이 구멍들은 관측기구들을 설치하는 데 쓰인 것 같다. 돌구조물로서 돌에 의해 사개를 교묘하게 짠 것이라든가 쇠붙이 이음을 적용한 것은 당시 구조물 축조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개성 첨성대는 경주 첨성대와 더불어 중세기 우리나라의 높은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가치있는 유물이다.

정방산성[편집]

正方山城사리원에서 동북쪽으로 약 7㎞ 거리에 있는 계동역으로부터 다시 5리 가량 산길을 오르면 산성에 다다른다. 정방산성은 한반도 중부를 가로지른 정방산맥 서쪽 끝 정방산의 산봉우리인 기봉산·이난봉·돼지골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둘레가 12㎞나 되는 유명한 산성으로 고려시대에 쌓은 것이다.성벽은 납작하게 대충 다듬은 성석으로 쌓았으며, 평균 높이는 5∼6m이지만 남쪽 성벽은 10m도 넘는다. 성벽은 북쪽의 가파른 벼랑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남산령·기봉산의 산등성이들과 정방골을 싸고 돌았다. 성의 동·서·남·북 네 곳에는 홍예문길을 낸 축대 위에 문루를 세운 성문들이 있었다. 또한 정방산성 남문의 문루는 봉산평야에서 정방산으로 들어가는 골짜기를 가로지른 성벽 위에 건설되어 그 존재가치가 매우 컸다. 이 남문은 평면상 규모가 우리나라 단층문루 중에서 가장 큰 편이며, 개성 남대문과 비슷한 모양이다.성안에는 남장대·서장대·동장대·안국장대(북쪽) 등과 병영·무기창고·군량창고 등의 집터와 우물터 등이 남아 있으며, 건물이 서 있던 자리에는 대포·쇠활촉·마름쇠·부속품 등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유물들은 조선조 초기의 무기류의 일단을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되며, 이들 일부 유물들이 북한측에 의해 사리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1361년의 홍건적 침입 등 여러 차례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한 이 성은 조선조 인조 10년(1632년) 김자묵 도원수 지휘하에 개축한 것으로 1895년까지 산성 별장을 두고 있었다. 이 성안에 유명한 성불사가 자리하고 있다.

성불사[편집]

成佛寺

북한 국보급 제31호.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봉산군 정방산성 안에 위치한 고찰로서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인 898년(신라 효공왕 2년)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현재는 1327년에 지어진 응진전과 극락전·명부전·청풍루·운하당·산신각 등의 6채의 건물과 5층석탑, 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사적비에 의하면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에 나옹왕사에 의해 중창되었는데, 이때 건물의 중창뿐 아니라 석탑을 비롯해 많은 석물을 조성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선조 2년에 설숭대사가 중수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영조 27년에 찬훈대사가 다시 중수했다. 1924년에도 명부전·향로전·청풍루·극락전·응진전 등을 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