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동양미술의 흐름/인도·동남아의 미술/인더스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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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문명의 성격[편집]

Indus 文明-性格

인더스 문명(文明)이라는 명칭은 인더스강(江)의 충적층평야(沖積層平野)에 이룩되었던 도시문명을 총칭하며, 현재의 정치지리(政治地理) 관점에서 본다면 인도령(印度領)은 아니다. 1920년에 우선 하라파 유적이, 그 다음다음 해에 모헨조다로가 발굴되어, 그것이 하수도 설비를 보유하는 극히 고도의 도시문명을 영위한 유적이었으므로, 인도 미술사(美術史)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획기적인 일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이런 인더스 문명을 창조한 주민들이 어떤 종족이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후에 침입해 온 인도 아리아 인종과는 전혀 별개의 종족이었다.

그들은 정연한 도시계획(都市計劃)에 따라서 시민의 견고한 주택과 대욕장(大浴場), 폭(幅) 30피트(9.14m)나 되는 곧은 가로(街路)를 건설하였다. 그 소재는 소성연와(燒成煉瓦:오지벽돌)를 쌓고, 주택은 두꺼운 벽돌로 된 격벽(隔壁)이 있으며, 우물·변소, 욕실과 같은 위생시설이 완비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배수(排水)를 위한 거구(渠溝)가 암거(暗渠)로 되어 있으며 하수도의 발달은 현대 도시가 무색할 정도의 모던화(化)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도시건설에 있어서 그들의 미의식은, 고대(古代)이집트나 서(西)아시아 고대세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시 유적에 반드시 수반된다 해도 무방할 정도의 거대한 신전 건축(神殿建築)과 커다란 우상(偶像) 등에 관해서는 아무런 흥미나 관심도 베풀지 않었었다.

대규모의 건축이라 하면 재미있게도 대욕장(大浴場)이 잔존되어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 이 대욕장이 그들의 종교의례를 행한 장소였으며, 민중의 종교의식을 위한 집합장소였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인더스 도시문명의 성격의 일단(一端)은 이상의 특색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생활에 있어 독특한 도량형제도(度量衡制度)를 정하고 벽돌의 모양이나 크기를 정하였으며, 도시 계획의 규모도 대체로 일정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모헨조다로에서는 발굴 결과 주거적(住居跡)이 7기(期)로 나눠지며, 하라파 유적에서는 8시기(時期)까지 확인되었는데, 그 어느 것이나 홍적층(洪積層)의 퇴적으로 도시가 매몰되면 아주 동일한 형식과 규모의 도시를 몇 번이고 만들어 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이러한 보수성(保守性)도 주목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미술유품[편집]

美術遺品

현재 인더스 문명 유적은 서(西) 파키스탄의 황무지나 사막지에 산재하여 있는데, 기원전 3000년경에는 그곳은 우량(雨量)도 많고 수많은 소성연와는 산림의 무진장한 장작을 연료로 하였다고 생각된다. 하천의 물은 댐과 관개설비(灌漑設備)에 의해 농경 생산과 해외상업 무역으로 번영하고 있었음이 그 발굴유품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 까닭은 도시 유적으로부터 허다한 수의 테라코타제(製)의 토우류(土偶類), 석회암제(石灰岩製)의 상(像), 동석제(凍石製)의 호부(護符)·도장 그리고 귀금속으로 된 장신구 등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테라코타제(製)의 토우류는 신상(神像)·동물·완구류로 나뉘며, 그 어느 것이나 점토(粘土)를 손으로 반죽하여 만들어 낸 단순 소박한 조형(造形)이면서도 힘차고 늠름한 미의식을 엿볼 수가 있다. 신상(神像)에는 오곡풍요(五穀豊饒)·다산(多産)의 기원 대상으로서, 유방(乳房)이나 허리 짜임새만을 과장한 지모신(地母神)의 부류가 많고, 눈·코를 극단적으로 생략하며 두발의 상투나 장신구를 되는 대로 만들고 때로는 표정이 파충류와 흡사한 그로테스크한 것도 있다. 동물 형상은 그들이 일상 친근히여기고 있었던 봉우·원숭이·양(羊) 또는 거북 같은 것도 조형화(造形化)하였으며 그 조형감각은 거칠고 치졸(稚拙)하지만, 그런 동물들의 특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그들이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이러한 자연물에 대하고 있었는지를 절실히 추감(追感)할 수가 있다. 이러한 치졸한 솜씨의 테라코타 토우(土偶)에 비해서, 석회암제(石灰岩製)나 청동제(靑銅製)의 조상(彫像)에서는, 제작자도 주문주(注文主)도 테라코타를 애호한 상민(常民)·대중과는 이질적인 사람들로 보이며, 조형감각도 표현기법도 놀랄 만큼 뛰어나 있다. 유명한 하라파 출토(出土)의 석회암제 토르소나 모헨조다로 출토의 동제 무희상(銅製舞姬像) 등을 보면 양감(量感)의 파악방식이나 육체의 사실적인 관조(觀照)에 의한 모델링의 적확한 표현 등 그 미적(美的) 천분(天分)이 풍부함은 근대적인 조형감각을 생각케 할 정도이다.

동석제(凍石製)의 호부(護符)·도장류는 거기에 표현된 문자가 아직 해독(解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사용 목적이 확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판면(板面)에 크게 일각수(一角獸)·봉우·무소·코끼리·사바신(神)·길가메시신(神), 생명의 나무와 같은 주제(主題)가 치밀 정교하게 인각(印刻)되어 있어, 그 뛰어난 조형감각은 석조 유품(石彫遺品)이나 청동유품과 동질(同質, covegercial)의 것이다. 이런 것은 토테미즘에 의한 호부(護符)라거나 소유권 주장의 도장이라거나 그 밖에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는데, 유품이 서아시아의 에라므 지방이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도 발견되어 그들이 평화로운 외교·통상무역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인도 각지의 사금(砂金), 특히 남(南)인도의 마이소르나 아프가니스탄·페르시아 등 각지의 금(金)이 바터무역으로 집적(集積)되어 호화로운 황금의 장신구나 은제의 뚜껑이 달린 용기(容器)의 출토유물 등으로 제작되고 있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 밖에 녹로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 내고 붉은 바탕 표면에 흑색채문(黑色彩紋)을 베푼 뚜껑 달린 항아리 종류가 있는데, 이런 소성채문토기(燒成彩紋土器)가 이란 고원(高原)의 채문토기문화와 유사한 조형·채화기법을 보이고 있음은 주목을 끈다.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1500년경까지 번영을 보인 이 인더스 문명은 상당히 고도의 조형미술을 낳았으며, 또한 서민미술(庶民美術)로서 5000년 동안 상민(常民)에게 애호를 받아 온 테라코타 조소유품(彫塑遺品)이 먼저 창조되었는데 북서(北西) 인도로부터 침입하여 온 아리아(人)에 의해 이 문명도 철저히 파괴되어 그 미술전통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소멸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