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동양미술의 흐름/인도·동남아의 미술/조형전반시대(바라문교시대∼팔라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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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시대[편집]

베다시대의 예술활동[편집]

Beda時代-藝術活動

인도 아리아인(人)의 고향은 아직 잘 밝혀져 있지 않다. 그들은 이란 고원(高原)과 북서 인도로 침입하여 무력(武力)으로 인더스 문명을 정복하고, 오천지방(五川地方)의 도시를 파괴하여 풍성한 삼림지대를 개척하고, 소택(沼澤) 등을 개간(開墾)하면서 이 고장을 방목생활에 적합하도록 환경을 변화시켜 갔다.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경의 일이다. 이렇게 자연환경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이 고장은 도리어 불모지로 화하고, 정복자들은 다시 동방으로 이동을 개시하였다. 인도의 중원(中原)으로 진출하여, 쥬므나강(江)과 갠지스강(江) 중간에 펼쳐진 비옥한 충적층평야(沖積層平野)에 정착하여 농경을 영위하며 힌두사회를 형성하여 갔다. 소위 베다시대, 2대 서사시 시대(二大敍事詩時代)가 그에 해당된다.

그들은 가부장제도(家父長制度)에 의한 대가족생활을 영위하며, 자연현상인 태양·수(水)·화(火)·뇌(雷)·풍(風)·서광(曙光) 등을 신격화한 다신교(多神敎)를 신앙하고 종교의식이나 의례를 극단적으로 존중하였기 때문에 제사(祭祀)를 관장하는 승관(僧官)들의 지위가 높아졌다. 이러한 자연신에 대한 신앙은 우상숭배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 제사 때에 소마주(酒)를 바치며 제신(諸神)을 찬미하는 시가(詩歌)의 독송(讀誦)이 중심이 되어 있었으므로, 찬가집(讚歌集) 리그 베다나 주법용(呪法用)의 아다르바 베다, 우파니샤드 등의 뛰어난 작품이 탄생되어 갔다.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승관(僧官) 바라문을 중심으로 한 카스트제도가 확립되고 왕후(王侯)·전사족(戰士族:크사트리야)·상공서민(商工庶民=바이샤)·노예(奴隸:수드라) 등의 신분이 정해져 갖가지 규제가 가하여졌다.

이 시대의 예술활동은 찬가시문(讚歌詩文)이라는 정신적 방면으로만 기울어져 즉물적(卽物的)인 조형미술활동은 부진하여 기원전 1000년기(年期)에서 기원전 400년경까지 괄목할 만한 미술활동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농경사회의 기부(基部)에서 생활한 서민들과 노예들이 오곡풍요나 현세안락(現世安樂)을 위해 민간신앙이나 주술(呪術)에 의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촌락의 수신(樹神)과 지모신, 원만 화합을 약속하는 남녀애신(男女愛神)의 우상(偶像)이, 그야말로 얻기 손쉬운 소재인 점토(粘土)·테라코타류(類)로 만들어져 신변 가까이에 놓고 예배(禮拜)되었다. 동물과 형상완구(形象玩具), 도박용(賭博用) 주사위도 만들어져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상태는 2대 서사시 마하 바라타, 라마야나가 만들어진 시대도 변함이 없었으나, 다만 서서히이기는 하지만 농촌형태에서 읍(邑)·도시에로 사회가 발전해 가고 도로나 역체(驛遞)가 정비되어 통상무역이 번성해져, 서민계급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은 바라문 계급에 억압되었던, 침체되고 인습(因習)에 젖은 지금까지의 상황에 몹시 불만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바라문교 사회의 전통에 비교적 시달리지 않았던 귀족과두정체국가가 히말라야 산하(山下)에 존재해 있어서 사회개혁이나, 자유와 평등·사랑을 주장하는 사상가·종교가들의 출현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종교사상가에 불교를 일으킨 석가모니와 자이나교의 마하비라(大勇)가 있다.

석가 출현 전후[편집]

스투파의 건축[편집]

-建築

히말라야 산록(山麓)의 가비라(迦毘羅)에서 태어난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불평등한 계급제도의 모순과 인간이 갖는 고뇌로부터의 해탈(解脫)·자비(慈悲) 등을 사색하면서 그 해결책을 얻고서, 실천윤리학(實踐倫理學)으로서의 색채를 띤 설교를 중심으로, 갠지스강 유역의 농촌과 도시를 순력하고 포교하였다. 그의 교설(敎說)의 근본은 사체(四諦:苦諦·集諦·滅諦·道諦)·팔정도 (八正道)·연기설(緣起說)을 중심으로 하여 집착과 무명(無明)에 의한 대립항쟁을 그만둘 것을 권장하며, 신분의 평등을 제창하고, 또한 우상과 사사(邪祠)를 예배귀의(禮拜歸依)만 하고 타력본원(他力本願)에 의지하는 그러한 우(愚)를 지적하고, 자기의 실천윤리를 확립하는 것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것을 평이한 속어(俗語)로 포설(布說)하였다. 그는 우상숭배를 금지하기조차 하였다. 그가 우상숭배를 금하며 정신적인 양식(糧食)∼법(法, 다르마)을 남겨도 뒤에 남겨진 제자들과 무지한 대중들에 있어서 즉물적인 조사숭배(祖師崇拜:이 경우 유체를 화장하여 유골을 신앙예배한다)가 일어남은 당연하였다. 그의 사후(死後), 그의 사리(舍利)를 둘러싸고 분배(分配) 싸움이 있었다고 설화(說話)는 전하고 있다. 그리고 사리는 사리 용기(舍利容器)에 봉납(奉納)되고 묘분(墓墳)이 축조되었고 그 묘분을 스투파(stupa)라 했다. 이것이 소위 탑파(塔婆), 탑의 기원이다. 석가모니가 가르친 다르마(法)의 실천은 그의 사후 얼마 안 가 조사숭배라는 타력본원의 신앙형태로 변하여 불교미술이 조형활동의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마우리아조시대[편집]

마우리아조의 미술활동[편집]

-朝-美術活動

갠지스강 유역의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군소도시국가(群小都市國家)가 군립(群立)하여 서로 싸우고 있을 때에 알렉산드르 대왕은 기원전 327년 북서(北西) 인도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소문난 원정군도 오랜 여정(旅程)으로 피로하여, 지방의 태수(太守)와 화평을 맺고 인더스강을 따라 수륙 양군(水陸兩軍) 두 갈래로 나뉘어 바빌론으로 되돌아갔다. 그 결과 북서(北西) 인도에는 그리스계(系) 종족을 중심으로 한 주류군(駐留軍)이 폴리스(도시국가)를 잔류시키고, 대왕(大王)의 이상의 하나였던 동서문화의 융합, 세계통일국가의 실현, 통상무역의 범위 확대 등과 같은 자극이 인도 반도(半島)의 군소국가(群小國家) 위에 마치었다. 이리하여 인도사상(史上) 최초의 통일국가가 출현하였다. 마가다국(國)의 찬드라굽타가 먼저 난다조(朝)를 멸망시키고 마우리아조(朝)를 수립하였다. 그는 갠지스강(江) 일대의 곡창 지역의 모든 부(富)를 손에 넣어, 북서(北西)인도의 그리스 세력을 구축하고 인도 남반분(南半分)을 제외한 대제국을 만들었다.

찬드라굽타왕(王)은 갠지스강 유역의 파탈리푸트라(현재의 파트나)에 도읍(都邑)하고 인도 중원(中原)에서 군림하였다. 이 시대에 미술활동은 갑자기 활발하여졌으나, 그 위에 그리스 고전미술의 조형활동의 물결이 서(西)아시아, 이란 고원(高原)의 페르시아 미술과 결합하면서 인도에 유입되어 들어왔다. 그 영향은 우선 파탈리푸트라의 도시계획·궁전건축·장식미술에서 볼 수 있다. 최근의 고고발굴(考古發掘)에 의해 궁전지(宮殿址)의 일부가 발견되고, 거의 백본(百本)의 석주(石柱)를 가진 궁전과 성채(城砦) 등이 확인되어 있다. 특히 백주(百柱)가 있는 방은 이미 아카이메네스­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에 선례(先例)가 있고, 호화로운 석제 주두(石製柱頭)의 조형표현과 파르메트·로제타 무늬를 부조(浮彫)로 장식한 의장 등은 서아시아 석조기술(石彫技術)이 직접 인도에 유입되어 있던 것을 생각케 한다. 이러한 궁정미술의 조형감각과 기법에는 그때까지의 인도에 없던 연마된 돌의 표면을 애호하였던 일이나 의장이 몹시 서구적인 것으로 보아서, 그레코­페르시아 미술의 영향이 농후하였다.

아소카왕[편집]

Asoka王 특히 3대째 영주(英主)인 아소카왕(기원전 268?∼전232?)은 유명한 숭불왕(崇佛王)으로서, 불교사상의 연구를 장려하고 불교경전의 편찬을 국비로 행하고 자비와 평등과 박애를 국책 속에 엮어 넣어, 불법(佛法)을 정치 이상의 하나로 표방하였다. 또한 민중에 대해, 비문(碑文)으로 만든 법칙문(法勅文)을 광포(廣布)하였는데, 그 유구(遺構)가 소위 아소카왕(王) 마애비문(摩崖碑文), 왕주(王柱) 등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아소카 왕주(王柱)는 그 조형미의 점에서도 특필할 가치가 있다. 주두에 4성수(四聖獸=인도 4대하의 상징동물과 지역의 토템이라 생각되는 사자·코끼리·황소·말)를 각각 환조(丸彫)로 표현하고 있다. 동물의 형자(形姿)를 파악하는 방법과 그 세부의 조형은 근육과 발의 박진적(迫進的)인 표출이 볼 만한 점으로서 거울과 같이 연마한 바위 표면의 촉각을 자극하는 아름다움 등과 아울러 매력의 근원이 되고 있다. 이러한 큰 석조 유품은 마우리아조(朝) 궁정미술가(宮廷美術家)가 만들어 낸 것인데, 그 공인(工人)은 페르세폴리스 조각과 퍽 흡사하므로 오히려 서(西)아시아로부터 건너온 석조공(石彫工)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대해 서민예술은 예(例)의 점토(粘土)나 테라코타에 의한 손바닥에 얹을 수 있는 소품(小品)이다. 이런 것 중 아마도 풍요다산(豊饒多産)의 기원 대상인 수정여신(樹精女神)과 지모신(地母神)의 반신상(半身像), 틀어올려 딴 머리 타래가 큰 여인의 목 등은 어느 것이나 끈(紐) 모양의 점토를 장식으로 붙였고, 눈을 뜨고 이목구비가 다분히 사실적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완구(玩具)의 형상동물(形象動物)도 궁정미술의 정연단엄(整然端嚴)한 조형감각과는 이질적이어서 귀엽고, 또한 요점을 터득한 뛰어난 작품이 되어 있다.

이러한 민간신앙의 대상물이나 완구류(玩具類)는 기왕에 석가모니가 금지하였던 우상류(偶像類)와 동질의 것이었음이 틀림 없으나, 관조(觀照)도 섬세하고 표현기술도 조금씩 진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슝가-안드라조시대[편집]

고대 초기 불교유적[편집]

古代初期佛敎遺跡

마우리아조(朝)의 아소카왕(王)은 불교를 기반으로 한 이상적인 정치를 함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안락(安樂)을 약속하였으나, 시설이나 관리에 다액의 실비(失費)를 거듭하고, 또한 군사적 약체를 초래하여 왕의 사후(死後) 마우리아 왕조(王朝)의 통일은 급속하게 붕괴되어 갔다. 그러나 불교미술 유품은 이 무렵부터 각지에서 제작되어 갠지스강(江) 유역이나 중(中)인도 지방, 또한 불교가 당시의 상업교통로를 통하여 유포되어 간 듯하여, 남(南)인도의 키스트나강 유역과 데칸 고원서부 등 각지에 지상유구(地上遺構), 석굴과 같은 형식이 남아 있다. 이러한 불교유적에는 당연히 석가모니가 전도하며 다니던 유서깊은 성지(聖地)나 포교승(布敎僧)들이 승단생활(僧團生活)을 영위하는 데 편리한 장소 등이 선택되었다. 이미 아소카왕 때, 그러한 성지에 아소카 왕주(王柱)나 석가모니의 사리(舍利:sarira)를 모신 스투파가 많아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소카왕 시대의 스투파의 부속 건축은 목조였던 모양인지 그 유구(遺構)는 남아 있지 않다. 지상(地上) 유적으로서 유명한 것은 바르프트·산치·보도가야 등의 스투파이다. 이들은 모두 석조 유구였다. 바르프트의 유적에서는 이것이 1873년에 발견되었을 때, 이미 황폐가 심하여 중심부의 석적(石積)은 토민(土民)들의 손으로 모두 없어져서 복원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주위의 난순(欄楯)과 문주(門柱)의 일부가 캘커타 박물관에 운반되어 복원되었다.

산치의 스투파[편집]

중인도(中印度)의 보팔주(州)의 비루사에 인접한 구릉에 3개의 반구(半球) 모양의 스투파가 있다. 이것이 산치의 스투파이다. 언덕 중복에 있는 제2탑이 가장 오랜 기원전 2세기경 조립한 것으로서, 정상(頂上)의 대탑이 기원전 1세기, 제3탑이 기원 1세기경의 건립이라고 한다. 형식은 모두 같고, 중심부의 복발(覆鉢)이 반원구형(半圓球形)이 되어 있고, 내부에 사리(遺身)가 납입되었고, 주위를 돌담 모양의 난순(欄楯)이 둘러싸고, 사방에 탑문주(塔門柱)가 열려 있다. 참례자가 탑문주를 들어가서 탑 주위를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석가모니를 추모하게 된다.

복발 자체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주위의 난순이나 탑문주에 부조(浮彫)의 장식이 되어 있다. 그 주제(主題)는 난순에서 원형 미댈리언(medalion)을 만들어 내고, 문주(門柱)에서 횡량(橫梁)이나 기둥에 정사각형 구획(區劃)을 만들어 석가모니의 일대기(佛傳)의 중요 장면이나 전생 이야기(本生譚)가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장식표현의 형식은 바르프트·보도가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세부의 조형표현을 살펴보자.

스투파의 세부조형[편집]

-細部造形

산치 제2탑은 대략 120명 신자의 봉납합력(奉納合力)에 의한 것을 명문(銘文)에서 알 수 있다. 난순이나 문주의 장식 의장(意匠)은, 연화(蓮華)와 덩굴풀을 구성한 복잡다양한 식물 무늬나 조수(鳥獸)·인물, 그 밖에 서아시아 기원(起源)의 유익동물(有翼動物:예컨대 그리폰)이나 반인반수(半人半獸) 등 공상 짐승에 걸쳐서 문장풍(紋章風)으로 원형구획(圓形區劃) 속에 싸여서 표현되어 있다. 조각기법이나 조형감각은 마우리아 왕조의 궁정미술 아류(亞流)로서 상당히 토착공인(土著工人)의 소박한 표현으로 변용(變容)되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제1탑에서 한결 현저하다. 봉납자의 명문은 현존하는 것만 670에 이르며, 많은 사람들의 협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전부가 동시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탑문주에 관해서 말하면 남·북·동·서의 순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연대차는 조형표현 속에 양식적인 변화가 되어 나타나 있지는 않다. 문주나 난순이 당시의 건축 양식과 구조의 반영인데, 그런 것들에는 연화문당초(蓮華文唐草)나 거치문(巨齒文), 난순의 가로대와 입석(笠石=冠石)을 이용한 테두리 장식 속에, 직사각형이나 4각으로 불전(佛傳)이나 본생담(本生譚)의 주요 장면이 치밀 성심(緻密誠心)껏 표현되어 있다. 즉 석가모니의 이련선하(尼連禪河)의 기적, 사위성(舍衛城) 밖의 신변(神變), 원후봉밀(猿候奉密), 삼도보제(三道寶梯), 아도세왕의 예배, 사문출유도(四門出遺圖), 강마성도(降魔成道) 등을 비롯하여, 상왕(象王)이나 서민의 보리수(菩提樹), 법륜주예배도(法輪柱禮拜圖) 등 주제는 다채롭다. 또한 본생담에서는 포시태자(布施太子)의 이야기나 사마선 본생(一仙本生), 육아상(六牙象) 본생, 대원(大猿) 본생, 일각선인(一角仙人) 본생 등 당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고 있던 불교설화가 선택되어 있었다.

불교설화의 표현[편집]

佛敎說話-表現

재미있는 것은 그 조형표현은 마치 원시인이 즐긴 공간공포(空間恐佈)의 관념을 생각하게 하듯 화면에 여백을 남기지 않는 치밀 세교(細巧)의 모양을 보이고 있다.

예를 이련선하의 기적에서 든다면, 이것은 대가섭(大迦葉)을 마술(魔術)로써 귀의(歸依)시킨 설화인데, 석가모니가 강 위를 걸어서 건넌 기적을 나타낸 것이다. 구획 가득히 유수(流水)의 선조문(線條紋)이 보이고, 물새·물고기·악어·연화가 측면관조(觀照)로 배치되어 있어서 그 곳이 강이라는 것을 나타냈고, 강변에 가섭(迦葉)과 3인의 제자가 서 있고, 앞에서 보아 오른쪽 구석 보리수 밑에 평반(平盤)의 대좌(臺坐)가 조각되어 있다. 다시 화면 중앙의 유수 속에 직사각형의 반(盤)과 위쪽에 배에 탄 가섭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강 위를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빠질까봐 염려하여 가섭들이 배를 띄운 순간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설화 표현에는 등장인물에 두번 시간적인 변이를 보이며 표현되어 있다. 더욱 주의할 것은 가섭 등이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석가모니는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슨 이유일까.

불무 표현의 시대[편집]

佛無表現-時代

자세히 주의해 보면, 산치의 불전도(佛傳圖)뿐만 아니라, 바르프트의 예에서도 석가모니가 있어야 할 곳에 보리수나 공석(公席)의 대좌, 불족적(佛足跡), 법륜(法輪) 등이 있을 뿐 인간 모습의 그가 없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석가모니를 인간으로 표현한다는 데 대한 금기(禁忌)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각자(覺者)인 그의 자질을 초인간적 존재로 생각했던 고대 인도인은, 그의 존재를 표시하는 경우, 그의 상징물(법륜·불족적·스투파·보리수)이나, 또는 있어야 할 장소에 공간을 설정하여 무표현인 채로 둔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동물·새·수목 따위는 극히 형식화되어 유형적으로 되어 있다.

인물은 당시의 풍속을 잘 나타냈고, 상투 모양의 터번(turban)에 잠방이를 입고, 가슴과 팔에 장신구를 단 나형(裸形)의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크게 뜬 눈, 입술이 두꺼운 표정의 같은 모양으로 등장한다. 군중 묘사나 행렬도(行列圖)는 동일 패턴의 반복이며, 개성묘사나 약동하는 동적 표현은 없다. 오히려 동물의 모습쪽이 훨씬 사실적인 맛이 있다. 이와 같은 설화표현 속에 하늘을 나는 천인(天人)이나 긴나라조(緊那羅鳥) 등의 신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는데, 문주신(門柱神)에 벽사신(僻邪神)으로서 약차신(藥叉神)과 약차 여신(藥叉女神)이 크게 표현되었고, 문주 콘솔(console) 부분에 약차 여신이 풍만한 육체를 과시하면서 매달렸다. 이 무렵에는 민간신앙의 신들이 상당히 불교 속에도 수호신의 형식으로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이 후의 인왕(仁王)이나 사천왕(四天王)의 기원(起源)이라고 한다. 문주 횡량(橫棚)에는 사자·코끼리 등의 동물 외에 약차 여신이나 배불뚝이 쿠베라 등이 환조(丸彫)로 표현되기 시작했고, 그 조형은 토착 석공인(石工人)의 기술·감각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남인도의 불교 유적[편집]

南印度-佛敎遺跡

남인도 키스트나강(江) 주변의 불교 유적 아마라바티, 나가르주니콘다, 자가야피타 등에서는 기원 전후경부터 스투파가 만들어져서, 복발(覆鉢)에 부조(浮彫) 장식을 한다든지 문주에 면한 복발 기부(基部)에 다섯개의 기둥(아야카주)을 만든다든지 구조상의 변화가 보인다. 난순이나 문주의 부조 인물상에도 손발이 긴, 자유로운 자태의 약동(躍動) 인물이 등장하여 조형상의 이질성(異質性)을 볼 수 있는 것이 흥미롭다.

석굴 사원[편집]

石窟寺院

한편, 석굴 사원도 일찍이 아소카왕 무렵에 바라발 언덕 석굴군(石窟群)이 개착(開鑿)되고 있었다. 스투를 안치하는 사당(祠堂)과 승려의 생활·면학의 장소인 승원굴로 나누어 바쟈 석굴, 피타루코라석굴, 아잔타 초기 굴(제8∼제13굴까지) 등이 연이어 개착되고 있는데, 상세한 점은 굽타 왕조의 항에서 말하기로 한다.

쿠샨조시대[편집]

쿠샨 왕조의 출현[편집]

-王朝-出現

인도 미술사 가운데서 획기적인 사건은, 슝가-안드라 왕조 시대까지 석가모니의 상(像)이 만들어지지 못했던 금기(禁忌:상징물 또는 무표현)가 이 시대에 타파되어, 그리스 고전기의 신상(神像) 조각과 같이 이상미(理想美)를 담은 불상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쿠샨 왕조는 고대 인도의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출현해 온, 그 때까지의 제왕(帝王)들과는 다른 생활환경을 가졌고, 그의 제국 유지에 있어서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통상의 중간부를 확보하여 비단·향료 무역의 중간이익을 얻고 있던 상업경제를 기초로 한 제국이었다.

인도 북서부의 헬레니즘[편집]

印度北西部-

기원 전후, 인도 북서부에는 알렉산드르 대왕의 원정군이 남기고 간 박트리아·그리스계 왕국이 존재하였고, 한편 유목 기마민족 사카족이나, 이란 고원에서 패권을 잡고 있던 파르티아제국 등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기원전 2세기에 북서 인도에 불교가 유포하여, 그리스인들 사이에 신자를 가졌던 것 같다. 박트리아 왕국의 메난드로스왕(기원전160∼120? 통치)은 유명한 숭불왕(崇佛王)으로서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미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 따위 경전의 주인공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교가 자유·평등·자비를 가르치는 실천윤리학이라는 면과, 그 후의 복잡한 인도 철학과 혼합한 사상이라는 재미있는 점이 이민족(異民族), 특히 그리스적 사유(思惟)를 즐겼던 사람들을 사로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에 침입해 와서 기원전 1세기에 박트리아 왕국을 북서 인도에서 구축한 사카·파르티아족도 이란 고원에 군림하고 있을 때, 궁정 용어로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건축 형식이나 의장·미술에서까지 그리스 양식을 즐겼기 때문에 제2, 제3의 메난드로스가 있었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지역에 쿠샨족이 북방 스텝대(帶)에서 침입해 왔다.

쿠샨족은 중국 문헌에 의하면, 대월지족(大越氏族)의 5부족(五翕侯라고도 불린다)의 하나인 귀상족(貴霜族)이 그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유목 기마민족으로서, 그리스 애호(愛好)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으로 그들 왕후(王侯)의 초상이나 출토 유품, 화폐 등에서도 그것이 확인되고 있다. 쿠샨 왕조 미술에는 두드러진 두가지의 경향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북서 인도의 소위 간다라 미술, 다른 하나는 인도 중원의 마투라 미술이다.

간다라 미술[편집]

-美術

북서 인도의 간다라 지방에는 19세기 초부터 많은 수의 불상조각이 출토되었다. 두발·이목구비가 그리스풍의 키톤을 입은 헬레니즘 신상(神像)조각을 연상시키는 조형표현으로서, 간다라 지방에 많기 때문에 간다라 미술이라고 불렸다. 연구자 후셰 박사는 이러한 조각을 그레코 불교미술이라고 명명하고, 그리스계 석조공인(石造工人)을 아버지로 하고, 불교 신자를 어머니로 가진 사람들이 기원 전후경 조립한 유품으로서, 그리스 조각의 동방에서의 재생품이라고 논했다. 그는 그 후 기원(起源) 연대에 몇 번이나 수정을 가했으나 그레코 불교미술의 명칭을 변경한 일은 없었다. 북서 인도의 불교 유적의 과학적 조직 발굴, 그 중에서도 J.마셜경(卿)의 타키시라를 비롯하여 J.아칸, R.길슈만 등의 베그라무, M.호이러경의 타키시라와 챠르사다, 슈란베르제의 술 쿠호탈의 발굴조사 등이 실시되어 많은 새 지식이 얻어짐에 따라서 로마노 불교미술, 파르티아­인도 미술이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 특히 서아시아의 대상(隊商)도시 팔미라나 하트라 등의 파르티아­로마노 미술이 번영한 유적에서 출토된 조각류는, 여러 가지 점에서 조형상의 친근성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쿠샨 왕조 미술의 한 형식을 기원 전후경부터 침입한 쿠샨인의 창작 활동으로서 다루는 경향을 보인다.

불상의 기원[편집]

佛像-起源

제작유품은 시스트 청흑편암(靑黑片岩)의 것과, 풀가사리 모르타르의 스투코제 유품으로 나누어진다. 기원(起源) 문제는 아직 불명한 점이 많으나, 비단 무역이나 유리 무역을 영위한 북서 인도에 거주한 주민은 상인적인 자유로운 생활태도나 헬레니즘적 종교사상, 미의식(美意識) 등을 가지고 있어서, 아마도 인도 고유 소승부파(小乘部派)의 불타(佛陀) 상징표현이나 무표현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쿠샨인이 지배했을 무렵 전통의 타파나 무시를 예사로 하는 사회풍조에 호응하여 석가모니를 조형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초기 단계에서는 불전도의 설화 표현 속에 석가모니를 등장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표현했다. 그리고 등장인물이나 배경도 모두 파르티아­로마노 조각의 기법으로 표현하였고, 쿠샨인 스스로를 모델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출가유성(出家逾城)도, 강마성도(降魔成道)나 열반(涅槃)도 서아시아­그리스계 신들의 초상조각의 표현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수려한 이마나 높은 코, 수염, 육계(부처의 정부에 있는 상투처럼 究起한 살덩어리)의 그리스 상투 풍의 모양, 아름다운 균정(均整)이 잡힌 육체, 그 프로포션 등이 그것이며, 나아가서 성자(聖者)를 표시하는 서아시아 기원인 광배(光背)가 여기에 첨가되어 있다. 군중 속의 한 사람이었던 불타는 드디어 다른 등장인물보다도 크게 웅위(雄偉)한 모습으로 표현되게 되어, 단독 예배상(禮拜像)이 출현한다. 이 경과는 극히 급속도로 진전된 듯한데 지금으로서는 편년(編年) 순서를 유품에서 제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또한 불타의 사색(思索)·설법하는 자태에 결가부좌(結跏趺坐) 형식이 만들어졌는데, 그때 그의 행동양태를 나타내는 손의 모양(인상이라고 부른다)에는 서아시아 기원이나 인도 무언극(無言劇)의 손짓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입상에는 행동하는 모습으로서 그리스 사상가가 거리에서 연설하는 모습이 도입되었다. 이와 같은 불상 조립은 불교 건축에도 변화를 주어, 스투파 형식의 기반부(基盤部)에는 불감(佛龕)이 만들어졌고, 문주나 난순 대신에 많은 불상을 개인이 일체(一體)씩 봉납(奉納)한 것같이 생각된다. 이와 같이 하여 스투파의 형식으로서는 기단부(基段部)가 건축으로서 발달하고, 차차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타쿠시라 유적에는 그와 같은 대표 건조물이 보인다.

보살·천부의 출현[편집]

菩藏·天部-出現

각자(覺者)가 인간 형자(形姿)를 취하기 시작함에 따라서, 보살(깨달음을 열 수 있는 유정)이라는 뜻)이라는 불격(佛格)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수행중의 석가모니의 모습, 다시 말해서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호화로운 상투나 머리장식, 목가슴 장식, 완천(腕釧), 완환(腕環) 등의 장신구를 찬란하게 달고 있다. 또한 귀자모신(鬼子母神)인 하리티상(像)이나 판체카상 등의 천부상(天部像)도 만들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많은 신자에 의한 불상 봉납이 왕성해지자 대량 생산에 의한 찍어내기 스투코상(像)이 성행되어 복잡한 구도의 대벽면(大壁面) 처리도 가능하여졌다. 소재의 유연한 질감과 처리의 용이성 때문에 우미(優美)하고 환영받는 조형이 나타났고, 핫다 출토 유물과 같은 섬세하고 약간 염미(艶味)를 담은 퇴폐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형기법이나 감각은 중앙아시아로 유포되어, 많은 오아시스 도시에 채색(彩色) 스투코상(像)의 유행을 보게 되었다.

마투라 미술[편집]

-美術

쿠샨인(人)은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 침입하여, 자무나강 기슭인 마투라에 도읍하여 중원(中原)에서 군림했다. 특히 카니슈카왕(144?∼170?)은 불교도 보호 숭배하여, 아소카왕을 본받아 경전(經典)의 편찬을 실시하고, 사원 건립을 장려했다고 한다. 법상유식(法相唯識)의 체계를 만든 용수(龍樹)나, 불교 시인인 마명(馬鳴) 등의 소위 대승불교(大乘佛敎) 고취자(鼓吹者)가 나타났고, 한편으로는 자이나교(敎)도 세력을 얻어 조형활동을 겨루었다. 원래 마투라 지방은 테라코타 조상(彫像)에 의한 상민(常民) 미술의 근거지로서, 기원전 6세기∼5세기경부터 알려졌고, 많은 유품을 출토시키고 있다. 거기서는 예로부터 전통적인 인도인의 미의식이 지모신상(地母神像)이나 남녀대상(男女對像)에 발휘되고 있었는데, 기원전 2세기 전반, 시쿠리산(産)의 황반(黃斑)이 있는 적색 사암(砂岩)을 사용하여, 이 지방에 갑자기 불교 미술이나 자이나교 미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인도인에게 지금까지 금기였던 석가모니의 상이 조립되기에 이르렀다. 서구 학자에 의하면 이 조불(造佛)활동을 간다라 조상(彫像)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쿠마라스와미(인도인 미술사학자로서 훌륭한 업적이 있다) 등은 독자적인 조불활동으로서 마투라파(派)를 중시하고 있다.

마투라 조각의 특색은, 인도인의 미의식을 기조(基調)로 한, 건강한 육체미와 명쾌한 표정을 가진 조형이라는 점에 있다. 소라같이 틀어 올린 육계 밑에 크게 뜬 눈이나, 강한 면(面) 구성을 가진 코, 두꺼운 입술로 된 밝은 표정이 비치고 있다. 굵은 목과 단단한 가슴 폭이 있는 체구, 커다란 손발 등이 이러한 조형을 보고 있으면 당시의 왕자·제왕의 이상미(理想美)가 그대로 불상, 특히 석가모니의 상에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슝가 왕조 이래 불전(佛傳)이나 본생담(本生譚)에 표현된 인도인의 골상(骨相)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육계나 백호(白毫), 손바닥이나 발바닥의 법륜상(法輪相)·삼보표(三寶標) 등, 각자의 초인적 자질을 나타낸 육체적 특징을 분명히 조형화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판비(板碑) 형식의 불좌상(佛坐像)에서는 완전한 정면 관조(觀照)가 되어, 오른손의 시무외인(施无畏印)의 배면(背面)은 파내지 않고 어깨에서 바위를 파다가 남겨 두고 있다. 편단(偏袒) 우견(右肩)의 옷을 표현도, 엷은 나(羅)나 명주와 같이 아래 육체를 비치게 하여 건강한 육체미를 보이고 있다. 마투라에서는 극히 초기의 불상 표현에 있어서, 조형상 분명히 각자인데도 명문(銘文)에는 보살이라고 쓰여 있는 예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보살상은 제왕(帝王) 및 현세의 유정(有情)의 이상미를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물론 차차 귀족의 장신구나 머리 장식을 단 보살상도 만들어졌고, 청년의 이상미가 그 속에 담겨지게 되었다.

민간신앙의 인기자(人氣者)로서 불교의 수호신이 된 약차 여신(藥叉女神)이나, 복(福)의 신인 쿠베라, 태양신 수리아 등이 자유로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 표현은 고대파의 딱딱한 조형을 탈피하고 있다. 특히 난순주(欄楯柱)의 수정여신(樹精女神)은 건강한 육체미를 자랑하며 풍만한 유방과 노출된 허리, 그리고 매혹적인 미태(媚態)까지도 보이면서 표현되어, 인도 미의식의 위험한 일면과 호색벽(好色癖)의 일면이 이미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이 무렵 불전(佛傳)이나 본생담의 주제가 이러한 수정여신을 표현한 난순주나 가로대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것도 흥미가 있다. 또한 제왕상도, 두부(頭部)가 없어졌으나 염고진좌상(閻膏珍坐像)이나 카니슈카왕(王)의 입상 등이 제작되고, 그들이 유목 기마민족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승마복이나 장화, 장신구의 의장에서 세계적 성격을 엿볼 수가 있다. 쿠샨 왕조의 사람들은 또한 자이나교도 보호하고 있었던 모양이며, 불상 조각을 닮은 조형감각이나 장식문양(紋樣)을 가진 자이나교 미술작품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리하여 인도인의 건강미나 제왕의 이상미가 쿠샨 왕조에 확립되어, 그것이 다음의 굽타 왕조에서 개화(開花)하여 인도 고전 조각이 완성되었다.

굽타 왕조[편집]

마투라파의 새로운 조형[편집]

-派-造形

쿠샨 왕조가 인도의 중원에서 동화작용(同化作用)을 일으켜서, 본래의 질실강건(質實剛健)한 기풍과 군사력을 상실하자, 순수 인도의 전통에 복귀하여 고전 인도문화를 담당하는 굽타 왕조가 통일국가를 이룩했다. 기원 4세기 초두경이다. 한번 세계적인 문화교류의 무대에 선 인도가 다시 통일국가의 정치·경제·문화 기구 속에서 미적 감각, 표현기법을 세련시키는 방향으로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불상조각의 분야에서도 마투라파는 쿠샨 왕조 이후 조형 활동의 중심지로서 세련된 조형을 창조해 나갔다. 본래 풍토와 습속(習俗)에서도 나체에 익숙했던 인도인이, 한 번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추구하여 그 이상상(理想像)을 창조한다고 한다면, 나형상풍(裸形像風)에 얇은 납의(納衣)를 투시하여 육체를 만들어 내는 표현기법에 습숙(習熟)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마투라파에서는 간다라 조상(彫像)의 의문선(衣紋線)을 훌륭히 도입하여, 얇은 납의가 육체에 밀착되어 만들어 내는 의문(衣紋) 주름이, 가는 유수(流水) 모양의 유동감이 넘치는 장식효과를 보이면서 전신을 덮는 표현형식을 발견했다. 그 이상상은 마투라 박물관 소장의 자말푸르 출토의 불입상(佛立像)이다.

각자(覺者)의 이상상은 현세의 제왕·지배자의 명쾌 건강한 미에서, 깊은 정신을 담고 사색에 잠긴 철인적인 이상미로 바꾸어져서, 표정도 생각에 잠기는 듯한 아래로 내려 뜬 눈의 조용한 온화함을 보이고, 손의 표현도 복잡한 감정을 가득히 담아 표현되었다. 장식미는 광배(光背)의 식물문(植物紋)의 복잡한 구성 속에서 가진 기교를 다하여 발휘되기도 하였다.

사르나트파[편집]

아소카왕 이래 석가모니의 성지(聖地)로서 조형활동의 근거지였기도 한 녹야원(鹿野苑) 사르나트 지방은 굽타 왕조가 되어 창조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사르나트파의 특색은 납의의 의문(衣紋) 주름을 전부 생략하고 나체 그대로의 평활(平滑)한 면(面)구성 속에 육체미의 미묘한 기복(起伏)을 표현하려고 한다. 근육과 골격이 울퉁불퉁한 건강미는 체념(諦念)에 잠긴 명상삼매(暝想三昧)의 경지에 있는 각자의 정신미의 그릇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이상미로 바꾸어졌고, 정연(整然)한 프로포션이나 우미(優美)함이 가미된 조형감각이 이 파의 제작물 매력의 원천이 되어 있다. 사르나트 박물관 소장의 전법륜불좌상(轉法輪佛坐像)은 그 대표작의 예라 하겠다. 광배나 상좌후병(牀座後屛)의 연화당초문(蓮華唐草紋)의 복잡한 아라베스크, 악어나 사자가 장식 의장화된 그로테스크한 표현 등은 굽타 왕조 장식미술의 일면을 대표하고 있으며, 더욱이 아잔타 석굴 벽면에 호화 현란한 꽃을 피우고 있다. 이와 같은 조상(彫像)은 아잔타 석굴내의 석조 유품에서도 공통되나 난숙(爛熟)한 고전미는 마침내 우미한 것만을 추구하여 정신미의 조형화라는 어려운 조작(操作)을 포척(抛擲)하고, 오히려 미태(媚態)를, 또한 퇴폐적인 느슨한 미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민간신앙의 비속(卑俗)한 신들이 불교 세계에 속속 침입하였고, 한편에서는 힌두교 미술도 조형표현의 표본을 불교 조각에서 얻어 보다 자유분방한 육체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석굴사원·벽화[편집]

石窟寺院·壁畵

건축 분야에 눈을 돌리면, 먼저 석굴사원과 그 벽화가 굽타 왕조에서 최성기를 맞고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석굴사원의 앞선 예는 아소카 시대로 소급하여, 기원 전후경 봄베이주(州)에 속하는 데칸 고원의 서북단(端) 지역을 중심으로 석굴사원이 개착(開鑿)되어 나갔다. 바자 석굴, 콘다네 석굴, 피탈코라 석굴, 아잔타 석굴, 베드사 석굴, 나시크 석굴, 카루리 석굴, 진나르 석굴, 칸헤리 석굴, 에로라 석굴 등 십여개소에 이르며, 굴원(窟院)의 수도 적은 곳에는 십여개, 많은 곳은 150굴이나 만들어져 있었다. 굴원의 형식은 계류(溪流) 측벽의 마애(摩崖)를 이용한 횡혈(橫穴) 구조이며, 스투파 예배를 위한 사당굴(祠堂窟)과 승려의 생활과 수행(修行)의 장소인 승원굴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기능별의 차가 내부구조의 차로서 표현된다.

사당 형식은 목조건축을 그대로 석굴에 옮긴 흔적을 볼 수 있고, 원형 돔형의 천장에는 늑골지주(肋骨支柱=rib)가 돌로 조출(彫出)되었고, 내진(內陣)과 외진 경계에 굵은 열주(列柱)가 새겨져 있다.

탑파(塔婆)는 처음 원형사당 중앙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후에 안이 깊은 직사각형의 사당이 만들어져서 카루리의 예나 아잔타의 제10굴·제19굴과 같이 오벽(奧壁)이 원형이고, 요도(繞道)를 가진 좁고 긴 사당의 형식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외벽부에 벽화가, 열주 두식(頭飾)에 부조(浮彫)의 비천(飛天), 식물 문양(植物文樣)이 조출(彫出)된다. 입구도 2층 형식으로 상부에 크게 보주형(寶珠形)의 채광창을 조출했고, 좌우 벽에 대소 구획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안에는 불·보살·천인들의 입상·좌상을 고부조(高浮彫)로 장식하고 있다. 하부에 장방형의 입구가 수개소 개착되어 있어, 승원굴 입구의 열주 현관식의 개방된 표현과는 대조적이다.

승원굴은 생활 수행의 장소로서 편리하도록 4각형의 중앙홀(열주로 내진과 외진을 구획한 아잔타 제16굴의 예가 대표적)과 안방, 좌우에 작은 방을 가진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아잔타 석굴에서는 특히 승원굴 벽간(壁間)에 불전·천불상·오취윤생도(五趣輪生圖)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벽화는 당시 굽타 왕조의 세속 풍습을 그대로 반영하여, 불전도(佛傳圖)의 궁정(宮廷)생활은 물질의 혜택을 받아 서아시아나 남해 지방의 진보(珍寶)에 위요(圍繞)되어 있던 굽타 왕조의 궁정생활을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오취윤생도에는 서민생활이 표현되고 있다. 제1굴의 지연화보살(持蓮華菩薩)은 그 여성적 우미함이 굽타 왕조 회화의 특색의 하나가 되어 있다. 특히 수행(修行)에 전념하는 승려의 주거에 장식하는 벽화로서는 좀 심하다고 생각되는 궁정 환락이나 미녀 군무(群舞)의 그림 등, 매우 대담하게 관능미를 표현한 작품이 많은 것도 흥미롭다.

미술의 성숙을 도운 것에 범어(梵語) 연구, 문학의 발달을 들 수 있는데, 미술제작상의 논(論:주석), 법전이 비시누다루모타람의 화론(畵論)을 비롯하여 회화육법(繪畵六法)을 밝힌 야쇼다라의 카마스트라 주해서 등의 고전 미술의 의궤(儀軌)·지남서(指南書) 유(類)의 편찬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풍조가 조형미술면에 미친 영향은 아잔타 벽화나 사르나트파(派) 조각이, 통일된 굽타 왕조의 미의식·양식에서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본다면 알 수 있다. 이 밖에 지상건축으로서 사르나트의 다메크탑이나 나란다의 불전건축·사당건축 등이 있다.

팔라조시대[편집]

팔라 미술[편집]

-美術

6세기에 굽타 왕조가 분열되어, 8세기까지 여명(餘命)을 보지하나, 그후 통일국가는 오랫동안 출현하지 못하게 된다. 8세기 중기에 벵골에 팔라 왕조가 출현하여 인도 반도의 일부를 영유하고, 13세기 이슬람의 침입까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불상조각·불교미술에 관해서는 그것은 눈물겨운 쇠퇴 타락의 시대인지는 모르나, 인도인의 미의식 발달사나 창조활동의 계보에서 본다면, 불교 의궤(儀軌)의 복잡한 전개나 밀교(密敎)의 출현, 자질구레한 주술의례의 성행이 조형활동에 반영되어, 다목다비상(多目多臂像)이나 보관불(寶冠佛)의 출현을 촉구했던 것이다. 나아가서 힌두교상(像)과의 유사 접근이나 힌두교 미술의 개화 전기(前期)의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팔라 왕조의 제왕(諸王) 가운데는 다르마팔라, 데바팔라왕 등이 불교 신자가 되어 불교를 보호했기 때문에, 그 영토내가 진언밀교(眞言密敎)의 거점이 되었을 정도였다. 유품은 팔라 왕조의 세력 범위에 속해 있던 비하르 벵골지방에 한정되고, 출토 불명의 것을 포함하여 수량은 상당히 많다. 이 무렵의 불상조각은 굽타 왕조 이래의 미의식에 힘입고 있는 현교적(顯敎的) 작품군(群)과, 팔라 왕조 왕들에 의해서 신앙 보호된 밀교적인 유품군으로 나누어진다.

전통적인 불교조각은 갠지스강 유역의 불적(佛跡), 특히 마가다 지방의 석가모니의 성적(聖跡)인 강마성도(降魔成道)의 땅인 보도가야, 초전법륜(初轉法輪)을 완성한 사르나트, 최후의 생을 마친 쿠시나가라, 왕사성(王舍城)이 있었던 라지길 등에서 출토되고 있다. 당시의 불교도는 이와 같은 성지순례(巡禮)가 성행하였고, 그들은 50cm 정도의 석조 부조상(浮彫像)을 성지에 봉납하는 관습을 가졌으며, 또한 그와 같은 수요에 따른 작품을 화실에서 다량 생산한 것 같다. 그것들은 소위 포터블한 작은 상으로서, 연판형 광배(蓮瓣形光背)를 가지고, 불전에 관계된 강마인(降魔印:바른 손을 지면을 향해서 가리키는 인상)이나 초전법륜인, 또한 대좌(臺座) 기타에 원숭이를 배치한 원후봉밀상 등의 설화를 표현한 불상으로 되어 있다. 특히 대좌의 마루턱이나 광배 주변부, 두부 주위에 범어(梵語)로

'연기법신게(緣起法身偈)'와 같은 문구로 새겨서, 봉납용의 사입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형기법은 단조롭고 매력이 없으며, 굽타 왕조에 완성된 조형의 형해화(形骸化)라는 면이 짙은 것 같다.

그런데 밀교상의 출현은 인도 농경사회 속에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힌두교와 불교와의 대립의 양상이나 타협의 모양을 나타내는 현상으로서 주목해야만 하겠다.

힌두교 신상과의 습합[편집]

-敎神像-習合

석가모니는 농경생산에 관한 미신·주술 따위를 금지까지 했는데, 이 무렵이 되자 불교도 이제야말로 농민층에 어필하기 위해서 민간신앙 속에 뿌리를 박고 있던 힌두교의 신들을 수용하여, 보살(菩薩)사상이 왕성해짐에 따라서 많은 상용(像容)을 힌두교 신들에게서 차용·전용(轉用)하기에 이르렀다. 불교에서도 주술기도(呪術祈禱) 따위를 받아들여서, 기원 4세기 다라니(陀羅尼)라는 주법의 문구만을 독립된 경전으로서 편집하였고, 그것은 주문의 음성(音聲)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한편 만다라(曼茶羅)라는 방형(方形)이나 원형의 제단을 쌓아 제불(諸佛)을 안치 공양(供養)하여 그 앞에서 비밀 수법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비밀 기도나 진언 밀주(密言密呪)로 된 주문을 구체적인 조형으로 만든 것이, 악령이나 역기(疫氣)를 소복(消伏)시키는 무서운 형자(形姿)를 한 명왕(明王)이며, 또한 초자연적 능력을 몸짓이나 손짓으로 표현하는 많은 손이나 눈을 가진 관음보살, 문수상(文殊像)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힌두교 신상과의 접근 습합(習合)의 결과, 불교는 힌두교 속에 매몰되거나 힌두 팽창의 기운에 밀려 남방 지방이나 중앙아시아 지방에 도피하여 포교되었다. 인도 불교의 쇠퇴는 민간신앙이나 힌두교의 승리를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