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동양미술의 흐름/인도·동남아의 미술/힌두교 미술 전성시대(인도-이슬람시대)
힌두교의 신상
[편집]-敎-神像
이미 전술한 바 있지만 힌두교는 바라문교(敎)를 모태로 하여 인도의 농경사회에 뿌리깊게 성장하여 갔다. 자연현상을 그대로 신격화하여 태양신(太陽神)의 수리아, 풍신(風神) 바유, 뇌정신(雷霆神) 인드라, 화신(火神) 아그니, 폭풍신(暴風神) 루드라가 신앙되어 우상을 만드는 일이 없었다. 그후 루드라는 파괴와 창조를 다스리는 시바신이 되었고 천공계(天空界)의 지배신(支配神) 비시누신이 신앙의 중심이 되어 갔다. 더욱이 농촌에서 도시로 발달하여, 상공업자들이 먼 곳과 교류해서 경제생활이 풍족하여졌고, 먼 나라들의 견문(見聞)이 증대됨에 따라 자연현상의 제신(諸神) 외에 현세의 신분·직업에서 도출되어 나오는 영웅전설(英雄傳說)의 제신(諸神)이 등장한다. 즉 크샤트리야 계급을 기초로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와 같은 서사시 신화(敍事詩神話)가 생겨났다. 또한 예를 들면 라마야나 속에서 취급되어 있는 라마 왕자나 처(妻)인 시타가 민족적 영웅으로서, 크리시나 신(神)이나 비시누신(神)과 습합(習合)하는 현상도 일어났다. 더욱이 굽타조(朝)의 문호(文豪) 칼리다사(5세기 전반경)를 비롯한 시인들이 다수의 민간전승을 기초로 하여 신화문학을 창출하고, 그 주인공들이 사람들에게 친숙해져 신상조각(神像彫刻)으로서 조형화되어 갔다. 그 밖에 이 지방에서 생긴 민간신앙의 제신(諸神:지모신과 성수에 서식하는 수정, 동물 토템, 물을 다스리는 용신)이 힌두교 속에 도입되어 범신론적(汎神論的) 구성을 만들어 내었다.
힌두교의 건축
[편집]-敎-建築
다분히 추상적(抽象的) 사고(思考)를 장기로 하는 동시에 현실세계를 감각적으로 애호하는 것으로써 현실 도피를 꾀하는 인도인의 성벽(性癖)에는 시바 링감을 중심으로 하는 성기 숭배(性器崇拜)와 사랑의 결합을 오도(悟道)의 수단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극단적인 좌도경향(左道傾向)을 보이는 일면도 있으나 즉물적(卽物的)인 속효성(速效性)을 강조하는 점도 있다. 불교건축의 일부에 수정여신(樹精女神)을 매달기도 하며, 또는 인드라니 수리아가 마차나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부조(浮彫)되는 등 힌두교 제신(諸神)에 대한 불교화(佛敎化)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힌두교 미술의 본격적인 조형활동은 6세기경부터이다. 서남 인도 니시가츠 산맥의 동산록(東山麓)에 있는 아이호레 석조 사원(石造寺院). 바다미 사원은 5∼6세기경의 힌두교 사원으로서 조기(早期) 예의 하나이다. 아이호레의 두르가 사당(祠堂)은 건물 후방에 제당(祭堂)을 만들고 그 위에다 높은 탑을 쌓아 올린 형식을 갖고 있다. 높은 탑은 외관상의 체재만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지 않으며 시카라라고 불리어, 본당(本堂)의 비마나와 구별되었다. 이러한 건축구조의 특색이 힌두교 건축의 분포(分布)에 있어서 남북간의 상위함이 있다고 하여 시카라형(型) 건축(北)과 비마나형(型) 건축(南)으로 구분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사카라가 고탑(高塔)의 일부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그것을 가지고 곧바로 시카라형(型)이라고는 결정할 수 없는 점에서, 비마나형(型)을 북(北)·남(南)·중간지(中間地)의 3형식으로 나누어 논하는 학자도 많다.
이러한 시카라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며 높이 솟아 있어 4각추(四角錐)의 기본형식을 기초로 석재(石材)를 갖가지로 조성하여, 층(層)을 작게 중첩(重疊)시켜 윤곽선에 복잡한 음영(陰影)을 주는 복잡한 구성으로 되어 갔다. 그리고 정상에 만두형(饅頭形)의 아마카라와 물병(水甁)을 놓아 힌두교 사당(祠堂)의 형식이 완성된다. 북형(北型)의 대표 사원으로서는 파라슈라메슈바라사(寺:8세기)와 링가라지 사원(6세기∼10세기), 복잡한 대소(大小) 비마나가 군립(群立)하여 웅위(雄偉)한 인상을 주는 카주라호의 칸다르야 마하데바 사원 등이 있다. 남형(南型)의 예로는 마마라프람의 5개의 라타라고 불리는 유적(7세기), 에로라의 카이라사 사원(8세기), 탄조르의 대사원(10세기) 등이 있다.
힌두교의 조각
[편집]-敎-彫刻
힌두교가 다신교(多神敎)로서, 민간신앙의 사사(邪祠)나 토지신(土地神)을 수용하고 신자(信神)나 서민의 일상생활에 미태(媚態)를 보이기 시작하자, 외잡(猥雜)한 성행위(性行爲)를 풍요생산의 주술(呪術)의 하나로 긍정하여 갔다. 더욱이 그러한 성행위가 오각(悟覺)에로의 길(道)과 합치한다는 좌도밀교(左道密敎)의 교의(敎義)로 되어, 불교에서는 이를 밀의(密儀)의 하나로서 도입시켜서, 음습(陰濕)한 경사(傾斜)의 길을 더듬는 데 대해 힌두교에서는 이것이 개방적으로 건축 세부의 의장(意匠)으로서 조출(彫出)되어 갔다. 코나라크의 수리아 사원과 카주라호의 칸다르야 마하데바 사원의 남녀 애욕군상(愛慾群像)은 그 전형이다. 애경(愛經=카마스트라)에서 설명되어 있는 교환자태(交歡姿態)의 모든 예가 조형화되어,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 희게 빛나도록 표현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밝고 건강한 표현인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도인의 미의식의 하나인 공간공포(空間恐佈)의 관념이 여기에서도 크게 작용하여 이러한 복잡한 자태의 군상(群像)이 건축의장(建築意匠)으로서 완전하게 엮어 넣어져 있다. 이러한 남녀 육체 표현의 자유 유연(自由柔軟)한 조형도 인도 무용이나 그 밖의 나형(裸形)의 자태를 철저히 추구한 작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감미롭고 우아한 감각이 개방되어 건강한 미태(媚態)로 승화되어 간 인도인적인 조형감각의 일면을 보는 느낌이 든다.
물론 힌두교의 협의(狹義)의 제신(諸神)을 중심으로 신앙하는 비시누파(派)와 시바파(派)가 교파(敎派)를 양분하여, 그리고 그 양파는 모두 다 조형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에레판타 석굴은 시바파의 사원으로서 유명한데, 여기에는 창조·보존(保存)·파괴를 상징하는 브라흐마·비시누·시바의 삼신(三神)의 힘을 결집(結集)한 삼안(三顔)의 신(神) 토리므르티상(像)이 위풍당당(偉風堂堂)한 형자(形姿)로 조형되어 있다. 이 상에는 현세 제왕(現世帝王)의 이상미(理想美)가 담겨 있는 듯이 보인다. 에로라 석굴(石窟)에서는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의 서사시 신화가 주제로서 채택되어 벽면에 조각되었고, 시바·비시누신(神)도 거기에서는 갖가지로 화신(化身)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기타 마맛라프람의 강가(갠지스강에 얽힌 서사시의 설화표현)에 유래(由來)하는 대벽면 부조(大壁面浮彫) 등에 수다스러운 표현 과다는 힌두교 미술의 일면이 엿보인다. 또한 남인도에서는 포터블한 힌두 신동상(神銅像)이 다수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시바신이 화염륜(火焰輪) 가운데서 춤추는 나타라자상(像)이 유명하다. 금속 주조(金屬鑄造)의 공예감각이 볼 만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11∼12세기경을 정점(頂點)으로 하여 점점 자그마한 상(像)으로 되어 갔고 그 후 쇠퇴되어 갔다. 힌두교 미술은 고대의 상민미술 가운데서 배태(胚胎)되고 있던 인도 미의식(印度美意識)의 일면(一面)이 그 조형의 무대가 넓게 주어지면 석재를 이용하여 한껏 활동한 유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도·이슬람 시대
[편집]-時代
인도 반도에 대한 이슬람교도의 침입은 이미 8세기 초기에 무하마드 이븐 카심의 신드 지방 침입이 있었고, 그 후 술탄 마흐무드가 11세기 초에 17회에 걸쳐 중부인도의 카나우지, 마투라에 침입하여 약탈과 파괴를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본격적 인도 정복은 12세기 후기에 시작되어, 델리를 수도로 하여 노예왕조(奴隸王朝)가 성립되어 14세기에 최성기(最盛期)를 이룩하였다. 그후 16세기 전반에 무갈왕조(王朝)가 출현하여 동(東)은 벵골, 서(西)는 오크소스강(江), 남(南)은 나르마다강(江)에 이르는 대제국(大帝國)을 형성하여, 악바르대왕 때에는 아소카왕(王) 이래의 공전(空前)의 대제국으로까지 팽창하였다.
이슬람교 세계에서는 우상숭배를 금하였기 때문에, 조소미술(彫塑美術)은 도리어 이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회당(會堂)인 모스크 건축(建築)과 궁전·묘묘(廟墓)에다 창조력과 부(富)를 기울여 시문(詩文)을 중심으로 한 문학활동과 학술연구를 애호하였으므로 뛰어난 저작장정(著作裝幀), 삽화예술(揷畵藝術)이 번성하고, 또 한편으로는 금공(金工)·도예(陶藝)·직물(織物)과 같은 공예미술이 실용을 초월한 미의식의 배출구가 되었으므로 이것들도 눈부신 발달을 이루었다.
인도-이슬람의 건축
[편집]-建築
오늘날 북서인도에서 북부인도를 순력(巡歷)할 때 눈에 띄는 건축물은 모두 인도-이슬람 시대의 호화로운 사원·묘묘(廟墓)이다. 최고(最高)의 유례(類例)로 델리 남쪽에 있는 크투브 사원(寺院)을 들 수 있다. 삼방회랑(三方廻廊)과 열주예배당(列柱禮拜堂)의 형식에는 이란 건축의 영향이 엿보이는데, 임립(林立)한 가늘고 긴 석주(石柱)에 인도의 양식이 가미되어 특히 높이 72m에 달하는 5층의 첨탑(尖塔)이 유명하다. 서(西)아시아의 사막지대에서 발달된 연와축조(煉瓦築造)의 궁륭건축 이반은 그후 둥근 천장의 거대한 돔을 만들어 내어 회교사원 예배당의 상징물이 되었으며, 이러한 기술과 장식의장이 인도 반도에 전래되었다. 인도-이슬람 건축이 그 미적 효과를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호화로운 구조와 의장을 보인 것은 무델 왕조(王朝)에 있어서였다. 수도 델리·아그라 및 그 주변이 건축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악바르왕(王)은 궁전을 라호르·아그라 등에 조영(造營)한 것을 비롯하여, 그가 건설한 것으로 델리에 건립한 부친 후마윤왕(王)의 묘묘와 황제 자신의 묘(廟), 파테푸르 시크리의 자미 마스지드 사원(寺院)과 궁전·객사(客舍)·첨탑(尖塔) 등이 있다. 그 어느 것이나 돔건축에 정교번잡(精巧頻雜)한 힌두 건축 세부를 갖는 독특한 양식을 볼 수 있다.
인도 이슬람 건축의 대표작은 무엇보다도 샤 자한이 애비(愛妃)를 위해서 1632년에서 1643년까지의 10년여를 소비하여 조영한 아그라의 타지마할 묘묘(墓廟)를 꼽을 수 있다. 백대리석(白大理石)을 아낌없이 쓴 세련된 미가 자아내는 섬세한 인상과 양파형(形)의 대(大)돔을 중심으로 하여 네 귀에 미너렛을 가진 형태미, 규모의 크기가 몽환적(夢幻的)인 미적 효과를 발휘하여 보는 사람들을 매혹케 한다.
그 밖에 이 왕(王)이 세운 일군의 궁전 건축도 주목을 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건축활동은 무갈 왕조 이후는 볼 수 없으며 또한 볼 만한 유구(遺構)도 별로 없다.
라지푸트 회화
[편집]-繪畵
기원 7세기에서 10세기 말경까지 라지푸트족(族)이 북서(北西)인도를 지배하고, 그 회화 전통은 고대파(古代派) 벽화의 영향하에 온존(溫存)되어, 기원 16세기∼19세기에 걸쳐 펀자브나 라자스탄 지방의 라지푸트 토후(土侯) 아래에서 성하게 제작되었다. 주제는 인도의 민간신앙설화나 비시누파(派)의 신앙에 관한 제 설화(諸說話)로서, 섬세 미묘한 묘선(描線)으로 윤곽선을 쳐서 다채색(多彩色)을 세밀하게 착색하는 미니어처를 만들어 내었다. 제신(諸神)의 화신(化身)인 남녀의 표정과 자태, 의복 등은 상당히 유형적(類型的)인 패턴으로 표현되나 회화면(繪畵面)에 일종의 무드(情趣)가 넘치고 있다. 초기 작품은 평면적인 것이 많은데, 그 후에 배경의 원근감(遠近感)과 투시화법(透視畵法), 음영(陰影)에 의한 입체감 등이 가미되어 섬세한 감각은 후기의 작품에서 보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라자스타니파(派)와 파하리파(派)가 있어 근세(近世)까지 제작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굴 회화
[편집]-繪畵
무굴 왕조에 번성하였던 회화 미니어처는 무굴 회화라고 불리는 일군(一群)의 작품으로서, 페르시아 세밀화(細密畵)의 영향하에 발달하였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무굴조(朝)의 시조(始祖)인 바부르가 티무르조(朝)의 도서관에 비장되어 있던 다수의 사본 삽도(寫本揷圖)의 종류를 천성인 회화 취향(繪畵趣向)에서 인도에 반입해 온 것이 무굴 세밀화(細密畵) 발생의 중요한 한 원인이라고 한다. 이란 화법(畵法)의 영향은 전입(轉入)된 세밀화(細密畵)뿐만이 아니라, 1544년 이란 화가가 도래(渡來)하여 궁정내에서 하므사 나마의 사본(寫本) 2500매의 삽도(揷圖)를 그리고 있었던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인도 화가가 등장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제재(題材)는 시문학(詩文學)의 삽도인 세속화(世俗畵)가 중심으로서 또한 화조(花鳥)·수렵(狩獵)·전쟁·왕후 귀족의 초상화 등의 비종교적 주제로서 라지푸트 회화와는 대조적이다. 악바르왕(王)에서 자항기르왕(王) 때가 최성기(最盛期)로 이미 인도풍(風)의 현실 묘사의 표현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궁정 화가(宮廷畵家)에 만수르, 아브불 하산, 아누프차타르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