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동양미술의 흐름/일본의 미술/일본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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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공전[편집]

佛敎-公傳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긴메이조(欽明朝 532∼571)의 일로서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석가불상(釋迦佛像)> 1체(體) 및 번개(幡蓋)·경론(經論) 등을 선물로 보낸 것이 시초이다. 이 불상을 에워싸고 불교를 신앙할 것인지 아니면 배척할 것인지로 대립되었다. 격렬한 항쟁 끝에 진보파인 숭불파(崇佛派)가 승리를 하여 소가노 마코(蘇我馬子)의 발원(發願)에 의해서 호코지(法興寺)가 건립됨으로써 불법흥륭(佛法興隆)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이 절에는 일본 최고(最古)의 불상인 구라츠쿠리노토리(鞍作止利)가 만든 <석가대상>이 현존하고 있다.

호류지의 불상[편집]

法隆寺-佛像

호류지 금당(金堂)의 본존(本尊)인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은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는 작례(作例)인데 배광(背光) 이면에는 조상기(造像記)가 음각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구라쓰 쿠리노토리가 제작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형식은 호류지 유메도노(夢殿)의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에서도 볼 수 있다. 준엄한 표정, 예스럽고 소박한 미소, 편평(扁平)한 체구, 보주형(寶珠形)의 두광(頭光), 궐수상(蕨手狀)의 수발(垂髮), 지느러미 모양의 천의(天衣) 등 모두 다 도리양식(止利樣式)의 특색을 잘 전하고 있다. 그 밖에도 도리파에 속하는 작례로서는 구호류지 <신해명관음상(辛亥銘觀音像)>이 있다.

또한 호류지 금당(金堂)의 <사천왕상(四天王像)>은 지국천(持國天)·증장천(增長天)·광목천(廣目天)·다문천(多聞天)의 4구(軀)로서 모두 다 목조채색(木造彩色)이다. 호류지의 불상은 제수식(齊隋式) 불상이다.

백제 관음상[편집]

百濟觀音像

호류지의 호조덴(寶藏殿)에 안치된 불상으로 녹나무(樟木材)의 일목조채색상(一木造彩色像)으로서 날씬해서 마치 경쾌한 느낌을 주는 불상이다. 이름으로 보아 한국에서 만들어졌거나 한국 사람이 건너가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제수식 불상의 표본이다.

반가사유상[편집]

半跏思惟像

의자에 앉은 불상 자세의 일종으로서 반가부좌(半跏趺坐) 의상(倚像) 중에서 한 쪽 손을 뺨에 대고서 사유형(思惟形)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반가사유상>으로서는 48체불 중의 <병인년명 보살반가상(丙寅年銘菩薩半跏像)>, 또한 추구지(中宮寺)나 고류지(廣隆寺) 등의 것이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고류지의 <반가사유상>은 청순한 표정이면서 조각적인 수법에 추구지의 그것과 공통된 점이 있으나 한국산의 적송(赤松)으로 되어 있고 600년경으로 추정되는 이것과 아주 흡사한 백제 금동불이 한국에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한국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야마다데라의 불두[편집]

舊山田寺-佛頭

하쿠호시대(白鳳時代 670년대)의 기준작례(基準作例)로서 초당양식(初唐樣式)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코후쿠지(興福寺) 강당의 본존(本尊)이었으나 대화로 이재되어 두부(頭部)만 남아 있다. 둥근 얼굴의 엉성한 동안(童顔)은 하쿠호불(佛)의 전형이다. 그러나 뺨이나 입 언저리에는 야쿠시지(藥師寺) <금당삼존(金堂三尊)>에 통하는 미묘한 촉지적(觸知的)인 살붙임이 보인다. 이것이 철저화되어서 완벽한 경지에 다다랐을 때에 덴표우(天平) 조각이 탄생하게 된다.

야쿠시지 금당삼존과 성관음성[편집]

藥師寺 金堂三尊-聖觀音像

모두 덴표시대설과 하쿠호시대설이 있다. 야쿠시지 삼존상은 금당 중앙의 백대리석으로 구축한 단상(壇上)에 안치되어 있다. 주존(主尊)은 수미좌(須彌座)를 통하고 높이 4m의 대불이다. 자태의 자유로운 표현이나 완성의 아름다움 등으로 일본 불상조각 최고 걸작의 하나이다. 또한 <성관음상>은 도인도(東院堂) 본존으로서 얼굴의 표정이나 측면에서 보았을 때의 신체의 두께에 당당한 품격이 느껴진다. 야쿠시지 삼존상과 거의 동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유메치가에 관음상[편집]

夢違觀音像

악몽을 보았을 때 이 관음에 빌면 길몽으로 바꿔 준다는 신앙에 의하여 예부터 유메치가에 관음의 이름으로 친숙해 왔다. 발바닥의 촉꽂이까지 완전한 동주(同鑄)이다. 또한 정면의 화불(化佛)과 대좌(台座)는 후보(後補)이고 광배(光背)는 없어졌다. 동조도금(銅造鍍金)의 전형적인 하쿠호불(佛)로서 슬쩍 웃음을 머금은 얼굴은 둥그스름한 동안(童顔)이고 두부도 신장의 약 6분의 1로서 거의 자연비율에 가깝게 되어 있다.

도다이지의 덴표불[편집]

東大寺-天平佛

산가츠도(三月堂) 본존의 <후쿠켄사쿠관음상(不空羅索觀音像)>은 건칠(乾漆)로서, 삼목팔비(三目八臀)라는 초인간적인 형태를 하고 있으나 조금도 이상한 느낌이 없으며 온화하고 위엄이 있는 얼굴, 떡 벌어진 어깨에서 배에 걸친 살붙임, 꽉 밟은 발붙임 등 불상조각의 우수함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산가쓰도(法華堂)에는 이 밖에도 건칠의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따위 큰 불상이 있고 덴표조각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호류지오중탑의 소상군[편집]

法隆寺五重塔-塑像群

덴표미술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명작이다. 호류지오중탑의 최하층의 심주(心柱) 사방에 소토(塑土)로 산악의 동굴 비슷한 무대를 만들고 30, 40cm 정도의 소상 인물군을 배치한 것으로서, 소토라는 부드러운 재료를 구사하여 인물의 표정이나 자태, 복장 등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조각사적으로뿐만 아니라 당시의 풍속을 전하는 좋은 자료이다.

고후쿠지 십대제자·팔부중상[편집]

興福寺十大弟子·八部衆像저마다 개성적인 표현에 뛰어난데, 그 중에서도 아수라상(阿修羅像)의 소년의 얼굴 모습 속에 한 가닥의 우수를 머금은 듯한 표정은 그 무렵의 뛰어난 조형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덴표 후기의 조각[편집]

天平後期彫刻

도다이지 가이단인(東大寺戒壇院)의 <사천왕상(四天王像)>이나 신야쿠시지(新藥師寺)의 <십이신장상(十二神將像)> 등 어느 것이나 채색을 한 소상으로서 얼굴이나 갑주(甲胄)의 표현 등 기술적으로 우수한데 <십이신장상>에서는 과장적인 표현으로 돌려진 양상이 명백하게 보인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호케도(法華堂)의 <일광(日光)·월광(月光)>의 소상은 상냥한 표정이나 모습으로서 우미(優美)한 조각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으나 전기 작품처럼 생생한 데는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쇼린지(聖林寺)의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에서 몸 전체의 조화의 아름다움은 이해되지만 지나치게 정리되고 박력이 있어 부족한 듯도 하다.

그러나 덴표 말기의 것일지라도 도쇼다이지(唐招提寺) 금당의 <건칠노사나불상(乾漆盧舍那佛像)>은 기술적으로 훌륭할 뿐만 아니라, 덴표불상의 특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실적인 경향에서 탈피되어, 안에 품은 강한 정신력을 느끼게끔 하는 차분한 대작이다.

밀교의 조각[편집]

密敎-彫刻

새로 전해진 밀교의 영향으로 그 교령윤신(敎令輪身)으로서의 신비적이고 주술적(呪術的)인 의궤(儀軌)에 의거하여 많은 부처와 보살을 조각하였다. 불교 중에서도 가장 미술을 이용한 것이 밀교였다.

밀교적인 신비성을 느끼게 하면서도 아직 전 시대의 사실적인 특색을 잃지 않은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다치바나데라(橘寺)의 <일라상(日羅像)>이나 또는 도쇼다이지(唐招提寺)의 <대일여래상(大日如來像)>을 들 수 있다.

그와는 달리 진고지(眞護寺)의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 등은 얼굴 모습도 더욱 힘차게 긴장되어, 현세를 초월한 부처로서의 위력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또한 간신지(觀心寺)의 <여의륜관음상(如意輪觀音像)>은 밀교 특유의 신비감이 전체에 감돌면서, 한편으로는 인간 육체의 풍만함을 느끼게 하는 이상야릇한 조상이다.

밀교적인 양상을 가장 많이 띠고 있는 불상에 구카이(空海)가 세운 고오고고쿠지(敎王護國寺) 등에서 <오대 명왕상(五大明王像)>을 비롯한 몇 체의 불상을 볼 수 있다.

밀교 분위기를 뚜렷이 나타낸 불상조각도 10세기가 가까워 옴에 따라서 그 특색이 희미해졌다. 무로지(室生寺)의 불상, 그 중에서도 미로쿠도(彌勒堂)의 <석가여래상>은 전체로서의 살붙임이 잘 정돈되어 얼굴도 팽팽해지고, 그 의문(衣紋)을 새기는 방법도 형식화되어 새로운 스타일임이 확실하다.

신상 조각[편집]

神像 彫刻

부처·보살이 일본에서는 신의 모습으로 현신한다는 본지 수적(本地垂迹) 신앙이 번성한 결과, 불상조각 수법을 응용한 신상이 비교적 많이 제작되었다. 마쓰오진자(松尾神社)의 <남녀신상(男女神像)>이나 고오고고쿠지(敎王護國寺)의 <여신상> 등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좋은 예이다.

간센지의 아미타여래좌상[편집]

岩船寺-阿彌陀如來坐像10세기에 들어서자 전의 신비적인 중압감은 점점 없어지고 아미타여래좌상처럼 용자(容姿)도 온화한 친밀감을 가질 수 있는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양식에 있어서나 기술에 있어서나 순수한 일본식 조각 제작은 역시 11세기가 된 다음부터이다.

보도인 호오도 아미타여래상[편집]

平等院 鳳凰堂 阿彌陀如來像후지와라시대(藤原時代, 11세기)에 조초(定朝)가 호조지(法成寺)에 만든 것으로서 정토신앙(淨土信仰)의 태생인 아미타여래상을 그 앞에서 꿇어 엎드리고 싶을 만큼 자비로운 모습으로 표현하여 그후 얼마 동안은 조초(定朝) 양식의 우미한 일본적인 정서에 넘치는 불상이 유행하였다. 조루리지(淨瑠璃寺)의 <구체아미타상>이나 산센인(三千院)의 <아미타삼존상(阿彌陀三尊像)>도 같은 계통의 것이다.

게이파[편집]

慶派

12세기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의 조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타버린 나라의 도다이지, 고후쿠지의 부흥이었다. 이 때의 작품들은 고전적인 사실주의가 하나의 목표였었다. 거기에 무가적(武家的)인 힘찬 기력이 조금씩 곁들여진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각계를 리드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 시치조붓쇼(七條佛所)라는 불공(佛工)의 계통으로 이름에 케이(慶) 자를 붙이는 자가 많았으므로 게이파라고 하였다. 그 중심이 된 것이 운케이(運慶)이다. 운케이는 훌륭한 조각을 차례로 만들어 눈부신 활약을 하였는데 제자나 자식복도 있었다. 운케이가 만든 고후쿠지의 <무저상(無著像)> <세친상(世親像)>에는 같은 제재(題材)인 나라시대의 <십대제자상(十大弟子像)>과의 관련과, 다시 거기에 중후감이 합쳐진 운케이 독자적인 원숙한 힘찬 작품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운케이가 완성시킨 가마쿠라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운케이의 중후한 작풍과 대조되는 것이 가이케이(快慶)의 작품이다. 헤이안 말기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함과 송양식(宋樣式)에서 볼 수 있는 현세적인 아름다움을 받아들인 단정한 모습의 조상을 만들어 역시 하나의 가마쿠라 양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보스턴의 <미륵보살상>이 있고, 도다이지 고케이도(公慶堂)의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이나 사이호인(西方院)의 <아미타여래상> 등에서 가이케이의 작품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조케이(定慶)의 <유마상(維摩像)>에서도 송양식의 강한 영향을 볼 수 있으며, 그의 <금강역사상>에서의 노창(努脹)된 근육의 표현 등에도 극단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사실성을 엿볼 수 있다.

나형상[편집]

裸形像

가마쿠라시대에 있어서의 사실에 대한 의욕 및 송조각의 영향에 의해서 나형 조각에 정말 옷을 입힌 조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각적인 체파악의 진보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또한 실물인 옷으로써 조상의 옷으로 한다는 것은 곧 인형적인 표현에 이어져, 조각적인 표현으로부터는 도리어 이탈해가는 결과가 되었다. 덴코지(傳香寺)의 <지장보살상>(1228), 쓰루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의 <변재천좌상(辯財天座像)>(1266), 세이렌지(靑蓮寺)의 <고보대사상(弘法大師像)> 등 이외에도 많은 유품이 있다.

가마쿠라대불[편집]

鎌倉大佛

고도쿠인(高德院) <아미타여래상>으로서 신흥도시 가마쿠라의 13세기에서의 활력을 상징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양식에서 가마쿠라문화의 패턴을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안정(安定)에 넘치는 중후한 양감이나 깊이 새긴 의문 구성(衣紋構成)은 운케이 양식을 계승하고 있고, 길게 째진 눈을 가진 수려한 얼굴이나, 가슴에서 배에 걸쳐서 커다랗게 만들어졌고 좀 굽은 등으로 구성한 몸매 등에서는 중국 남송(南宋)의 불교미술의 영향을 분명히 간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