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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미술의 기초/미술이란 무엇인가/표현과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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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과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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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現-環境

인간은 자신의 의지만으로써는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좋거나 싫거나 관계 없이 자기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조형표현이라고 하는 인간의 행위도 유형 무형의 환경에서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작품으로 이루어져 생겨나온 것이다. 표현에 영향을 미친 환경은 우선 시대의 차이이며, 다음에 작품을 낳은 풍토(風土)의 차이라 할 수 있겠다.

표현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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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現-時代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인류 문화의 발달 정도가 달라지고, 정치나 종교나 생활양식 등이 달라지게 되므로 그들이 조형표현에도 영향을 끼쳐서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다른 조형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류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 시대와 미술이 어떻게 관계해서 변화하였는지의 개략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인류 최초의 회화(繪畵) 유품은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 전의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라고 하는데 아직 농경의 기술을 모르고 동굴 속에서 살면서 수렵으로 생활하던 인류는 손쉬운 재료를 사용하여 동굴 벽에, 마치 어린이가 돌이나 나뭇조각을 가지고 지면(地面)이나 벽에 낙서를 하듯이 자기들 생활에 가장 가까운 동물의 가지가지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처럼 사실적(寫實的)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표현은 동물을 사랑하기도 하고 동물을 두려워하기도 하여, 동물의 생태나 습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기억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표현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시적인 조형은 매우 솔직한 표현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강한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강조되었고 어린이의 표현처럼 심리적인 밸런스가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지나치다고 생각되리만큼 장식이 많은 것은 인간이 가진 장식본능의 발로이기도 하겠다.

이윽고 농경이 시작됨에 따라 살기 위한 집이 세워지게 되자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옹기그릇 따위가 만들어지게 되어 여러 가지 조형활동이 성하게 된다. 집들이 모여서 마을이 생기고, 마을이 커지면 마을이 나뉘어 민족의 이동이 일어나고, 또한 지구의 지배자가 나와 나라와 통치자가 생긴다. 그리되면 풍토나 산물이나 또는 왕의 지배 면적의 대소 등에 따라서 문화의 발달에도 지속(遲速)의 차가 생겨 조형 활동에도 다양성을 띠게 되는데, 가령 이집트왕은 태양의 아들(파라오)이라 불렸듯이, 산·강·새 따위 자연물이나 자연현상이 신격화되어, 왕이나 귀족의 궁전이나 분묘(墳墓)가 중심이 된 여러 가지 조형활동이 이룩된다.

이집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믿어서 왕이 죽으면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아름답게 장식된 관(棺)에 넣고, 분묘 벽에는 왕 생전의 공적을 표시하는 그림이 그려졌고, 왕의 상(像)을 문앞에 세웠으며, 실내에는 왕의 일용품이 놓여졌고 종자(從者)의 상 등이 만들어졌다.

자연신의 신앙은 마침내 신화(神話)를 낳았고 전설이나 신화가 사람들의 생활감정까지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스에서는 우수한 대리석의 산출과 그 민족이 지닌 고유한 성이라 할 자유와 미를 사랑하는 심정에서, 신(神)을 인간이 가장 이상(理想)으로 하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眞)과 미가 일치되어 여러 가지 학문이 발전하였으며, 먼 후세까지의 규범이 될 만한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자연신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교나 불교 등의 종교가 생기자, 이윽고 그들 종교를 중심으로 한 조형미술이 발달한다. 우상 숭배를 부정하는 회교에서는 여기저기에 특징 있는 교회를 세워, 그것을 이른바 아라비아 무늬로 장식하였으나 그림이나 조각은 그곳에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교회의 건조와 함께 그리스도나 성모, 또는 사도들에 관한 많은 조각(그림)이 만들어졌다. 또한 비잔틴 사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창문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붙여졌다.

종교개혁과 함께 일어난 르네상스는 유럽 미술의 가장 화려한 황금시대의 한 시기를 만들어 내었다.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는 각지에 불교미술을 남기면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었다.

종교에 의하여 발달한 조형미술은 각지의 왕조나 권역자의 위엄을 나타내는 듯한 미술로 발전하거나, 또는 네덜란드 등과 같이 서민생활이나 생활주변의 자연으로 눈을 돌리게 하여 점차 근대화(近代化)가 이루어졌다. 유럽에서는 왕·왕자·왕비·공주 등의 초상(肖像)이 걸리거나 하였고, 또한 18세기가 되면 바티칸 궁전에는 장식 과잉이라고도 생각될 그러한 가구 등이 놓였다.

19세기로 접어들어 과학이 장족의 진보를 보이게 되자 조형미술도 급속하게 근대화로의 징조를 보인다. 빛의 과학적인 리얼리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상파(印象派)에서 후기인상파로, 더욱이 파리파(派)에 이르러 더욱 더 표현은 개성적인 성격이 짙어지고, 또한 표현을 위한 데포르메(變形)가 행해진다. 그리고 종래의 종교나 문학적인 정조(情操)에 예속된 느낌이 있었던 조형활동은 그 조형성이 존중되어 추상화가 촉진되었다.

이와 같이 시대와 더불어 조형미술도 변천해 왔으나 '역사는 반복된다'는 속담처럼, 그 진전 도상에서 이따금 과거로의 복귀(復歸)현상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것 그대로는 아니고, 새로운 시대정신에 의하여 순화(醇化)된 새로운 것의 탄생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미술은 전통의 계승과 함께 항상 새로운 것으로의 창조를 계속한다.

풍토와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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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土-表現

시대의 진전에 따라 표현의 양상이 다르듯이, 기후나 산물이나 민족이나 종교나 또는 생활양식 등이 다른 풍토의 차이에 의해서도 표현의 재료나 방법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 한 예로서 유럽과 한국을 비교하여 보자.

우선 유럽은 대륙의 일부로서 공기는 건조하고 투명하며, 그리스나 이탈리아 등에서는 양질의 대리석 따위가 산출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서양인의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은 합리적이어서, 사물을 대함에 계획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짙다. 이에 비하여 한국은 대륙에 이어진 반도 국가로서 기후가 온화하고 자연환경이 아름답다. 이러한 자연환경 때문인지 한국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을 존중하게 되었다.

고려자기나 조선백자는 한국의 풍토와 한국의 기호(嗜好)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회화표현으로서는 유화(油畵)와 수묵화(水墨畵)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유화의 도구는 즉흥적으로 그리기보다는 견고하게 캔버스 위에 그림물감을 덧칠해 나가는 데 적합한 재료이고, 또한 사실적인 표현에 적합한 재료이다. 즉 눈에 보이는 대로의 형상과 빛깔을 표현할 수도 있고, 또한 대상의 재질감(材質感)을 그림물감의 채색 방법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획적으로 작업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반하여 수묵화는 심상적(心想的)인 풍경이나 인물을 오히려 즉흥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선 빛깔이 부정된다. 부정된다고는 하지만 먹의 농담(濃淡)에 의하여 빛깔의 느낌을 낼 수는 있는데, 묵색(墨色)이 중시되는 것은 현실의 빛깔과는 차원이 다른 빛깔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명암(明暗)·음영(陰影)에 의한 양감(量感)의 표현을 부정한다. 묘선(描線)이나 먹에 의하여 두께나 무게의 느낌을 내려고 한다.

표현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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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現-交流

표현은 풍토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데 또한 생각지도 않았던 상사(相似)를 다른 풍토의 조형 속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이것은 민족의 이동이나 민족간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고대 역사에 있어서 문화상의 커다란 변혁의 하나는 중국 남북조로부터의 불교 전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교의(敎義)만으로서의 전래가 아니라 철학에서, 문학에서, 그리고 건축을 비롯한 모든 조형문화의 전래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국제 국가였던 당(唐)나라는 조형미술에서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인도와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졌고, 또한 인도의 간다라 불상은 그리스·로마 조각의 영향을 받아서 극히 그리스식(式)이었다.

실크로드는 동서문화를 연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중앙 아시아의 여러 가지 집기(什器)들이 고대한국에도 전래되어, 이것들이 당시 한국의 조형활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만하다.

또한 20세기 초의 유럽 화가들은 동양회화에 흥미를 느꼈고 고갱은 색면(色面)으로써 대상을 파악하여 동양화가 특징으로 하는 그림물감의 평면도(平面塗)를 시도했다. 또한 선묘(線描)의 아름다움은 마티스 등의 그림에서도 살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세계를 휩쓴 앵포르멜의 회화기법도 동양화의 몰골법(沒骨法)과 깊은 유대를 가졌다.

교통기관이나 보도기관의 발달에 따라 문화교류는 더욱 왕성하게 되어 조형표현도 구역의 차이를 줄였다고는 하나 결국 그들이 지역의 전통 속에 흡수 융화되어 항상 새로운 문화가 계속하여 생겨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