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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르네상스의 미술/독일 르네상스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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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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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 Renaissance

르네상스라고 하는 개념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세기의 스위스 역사가인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명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년)에 의하여 확립된 것인데, 여기에서는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만이 전적으로 고찰의 대상이 되고 있어서, 알프스 이북의 독일이나 프랑스에 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바꾸어 말한다면 적어도 부르크하르트의 시점(時點)에 있어서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만 인정할 수 있는 현상이었으며, 사람들이 북방 유럽에도 이와 평행적인 현상을 찾아보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 하겠다.

오늘날에도 르네상스라 하면 이탈리아의 그것을 가리키는 일이 일반적이며, 북방 르네상스 혹은 독일 르네상스라고 하는 개념에는 많든 적든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그것을 편의적으로 적용하였다는 감이 강하다.

결국 독일에는 제일 먼저 이탈리아 르네상스 성립의 기반이 되는 고전 고대(그리스·로마)의 인문주의적 전통이 결핍되어 있으며, 따라서 르네상스의 본의(本義)인 그것의 '재생(再生)·부흥(復興)'은 원래 구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기타 도시국가의 형성과 국민적 의식의 각성 및 전제군주(그들은 또한 학문과 예술의 보호자이기도 하였다)의 출현 등 이탈리아에는 있었지만 독일에는 없었던 여러 조건이 겹쳐, 독일 르네상스는 성격적으로 보나 현상적으로 보나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것을 미술의 분야에 한정시켜 본다면 먼저 독일에 있어서 고딕식 예술의 뿌리깊은 전통, 환언하면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명쾌한 합리주의적·과학적인 정신의 결여를 들 수 있다. 물론 이 시대의 독일 미술에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여러 성과의 이입(移入)이라는 형태로서, 또 부분적으로는 뒤에 보는 바와 같이 독일인 자신의 노력의 결과에 의하여 이탈리아적인 과학정신과 합리성, 즉 구체적으로 말하여 원근법과 비례의 이론이 다소나마 독일 미술속에 도입되고 있었다. 그러나 개략하여 전시대의 후기 고딕 예술의 표현주의적 혹은 정신주의적인 전통이 독일 르네상스의 거의 전반에 걸쳐 저류를 이루고 있었다고 하여도 무방하다.

또한 1517년 루터의 이른바 <95개 조항의 테제>에서 시작되는 종교개혁은, 미술의 분야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반드시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 광범한 사회적·사상적인 의의 때문에 뒤러와 크라나흐 및 그뤼네발트 등 당대 대예술가들의 정신생활에, 더 나아가 그들의 창작활동에 준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독일 르네상스의 발달은 물론 종교개혁 이전에까지 소급하지만, 그러나 적어도 그 종료는 종교개혁의 종언(終焉) 즉 반(反)종교개혁 시대의 시작(16세기 중엽)과 때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 이후의 독일 미술은 30년 전쟁에 의한 국토의 황폐와 독일 특유한 정치적·경제적인 후진성 등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예술에만 추종함으로써 일찍이 그들의 강렬한 개성과 힘있는 독창성은 그림자를 감추게 되어, 전체적으로 아류적(亞流的)인 성격이-거의 금세기 초두의 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독일의 르네상스가 시대적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포함하는가에 대해서는 일정한 정설이 없으므로 일단 여기에는 뒤러의 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15세기 중엽에서 홀바인의 죽음으로 끝나는 16세기 중엽까지의 약 1세기 동안이라고 하여둔다.

또한 지역에 대해서도 반드시 오늘날의 독일에 한정할 필요는 없고, 필요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도 포함한 독일어권 전체라고 생각하여도 무방하다.

회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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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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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繪畵

독일에 있어서는 이탈리아와 비교하여 고딕 예술의 전통이 뿌리 깊이 박혀, 그것이 신시대의 갖가지 경향과 혼합되어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상을 보여 준다. 먼저 형식 면에서 말하면 고딕의 제단(祭壇) 조각에서 점차로 발전하여 이윽고 독립적인 존재가 된 제단화 형식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대부분은 여닫이 문에 의한 북방(北方) 특유의 다층식(多層式)인 것인데, 후술하는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는 그 대표적인 예의 작품이다. 또 이들 작품을 주문하거나 기증하는 사람이 일찍이 교회에서나 제후(諸後)가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 점차로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유복한 시민계급으로 바뀌어졌다는 것도 당시의 새로운 경향의 하나였다.

또 오늘날의 통념에서 보면

'회화'란 액자에 넣어 이동이 가능한 소위 이젤화(畵)를 가리키는 일이 보통인데, 이와 같은 회화 형식(단 당시는 판화가 태반을 점유하였다)이 성립한 것도 겨우 그 무렵부터이며, 그 이전의

회화는 전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거나 대규모의 벽화, 혹은 사본(寫本)을 장식하는 미니어처(細密畵)였다. 따라서 이들은 거의 예외없이 그리스도의 사적(事跡)과 사도 전기에서 그 주제를 구했고, 초상화나 풍속화 및 풍경화와 같은 장르는 당시에는 아직도 성립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면과 내용면에 있어서 중세적인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되어 회화가 근대적 의미에서 자율적인 존재라고 주장하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거기에는 여태까지 없었던 여러 가지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되고, 특히 초상화와 풍경화의 분야에서 그 시대의 독일 미술이 유럽 미술 전반에 수행한 기여는 매우 컸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독일 르네상스의 회화라고 할 때에 그 중핵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뒤러를 중심으로 하여 그와 거의 같은 후대인 크라나흐와 그뤼네발트, 조금 후의 홀바인 등의 화가가 있지만, 그들 이전에서 신시대로 향하는 길을 준비하였던 약간의 화가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따뜻하고 순한 인간미와 고귀한 아름다움에 넘친 성모상을 많이 그렸던 슈테판 로호나를 비롯한 쾰른파(派)의 화가들과, 네덜란드 회화의 영향하에 독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현실의 자연에 예리한 관찰의 눈을 돌리고 동시에 고딕적인 평면성을 벗어나 3차원적인 공간 표현에도 훌륭한 솜씨를 보인 바젤의 화가 콘라드 비츠, 그리고 조각가로 활약하면서 동시에 화가로서도 중요한 작품을 남기고 고딕적인 생경함이나 형식주의로부터 보다 자유로이 생생한 사실적 양식으로 향하는 길을 연 미하엘 바흐, 또한 화가로서 다른 사람 보다 특히 기술면에서나 표현에서도 매우 훌륭한 동판화를 남겨 뒤러의 선구자적 존재가 된 마르틴 손가우어 등은 이들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화가이다.

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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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recht Durer(1471∼1528)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부친 아래서 금세공을 배웠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 미하엘 보르게무트의 문하생이 되었다. 1490∼1494년에 걸쳐 각지를 편력한 뒤에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아그네스 프라이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후 곧 신혼인 아내를 혼자 남겨 두고 베네치아로 여행, 이듬해인 1495년에 귀국하였다.

이 제1차 이탈리아 여행에서 당시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미술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은 뒤러 자신에게 있어서나, 또 후의 독일 회화 전체를 위해서도 커다란 의의를 갖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구체적인 성과는 오히려 그가 여행 도중에 틈틈이 그린 몇 점의 수채화에 있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자연에 접할 때에 화가가 가지는 신선한 감동이 싱싱한 서정성과 날카로운 자연 관조(觀照)를 바탕으로 하여 훌륭하게 그려져 있으며, 이른바 도나우파(派)의 작품과 더불어 그 후의 유럽 풍경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당시에 이미 작가로서의 뒤러의 명성은 꽤 높았으나,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오히려 판화였다. 특히 1498년에 간행한 목판 연작 <요한 묵시록>은 뒤러만이 아니라 유럽 목판화 사상에 있어서 최초의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그 한점 한점마다 고도한 기술적 완성과 탁월한 화면 구성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네 사람의 기사(騎士)>는 특히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이것과 같은 해 및 2년 후에 그려진 2점의 <자화상(自畵像)>(각각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과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은 고도의 사실성과 깊은 정신성 혹은 내면성이 하나로 융합된 명작이다.

1505년부터 1507년엔 걸친 제2차 이탈리아 여행은 그에게 많은 성과를 가져다 주어, 그 후부터 그의 예술에는 이탈리아적인 합리성과 명쾌한 공간 구성 또는 형태 감각이 점차로 침투해 온다. 또 이 무렵부터 뒤러는 동판화에도 손을 대고 있었고, 특히 1513∼1514년 사이에 만든 <기사의 죽음과 악마> <멜랑콜리아> <서재(書齋)의 성(聖) 히에로니무스>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1520∼1521년, 이번에는 처음으로 아내를 동반하고 네덜란드로 여행하였고, 이때에는 특히 초상화의 걸작을 많이 남겼다. 1526년 <네 사람의 사도(使徒)>를 완성한 뒤러는 이후 비례론(比例論) 등 이론적 저작을 집필했고, 2년 후인 1528년 고향 뉘른베르크에서 운명하였다.

네 사람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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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 작으로 그의 풍부했던 작품 활동의 최후의 정점을 장식하는 작품인데, 1526년 완성과 동시에 작자 자신에 의해서 뉘른베르크시(市)에 기증되었다. 요한·베드로·마가·바울의 네 사람을 좌우 두 사람씩 대폭(對幅)에 그린 이 작품은 독일 고딕의 전통에 뿌리 박은 힘있고 진지한 내면성과, 신시대의 명쾌한 모뉴멘털한 형태 감각과, 그리고 뒤러 특유의 고귀한 이상성이 3위1체가 된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알려졌다(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그뤼네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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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newald (본명 Mathias Neithardt, 1470∼1528)

뒤러와 거의 동시대의 대화가였으나, 그 인간성과 생애에 대해서는 의문에 싸여 있었다. 1470년 전후경에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고, 뒤러와 마찬가지로 1528년에 할레에서 사망한 그는 뒤러에 비하면 작품의 수도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젠하임 제단화>의 한 작품만으로도 그 이름은 불후의 것으로 되었다.

이젠하임 제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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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뤼네발트 작품인데 높이가 2m 50cm 남짓이나 되고, 총 폭이 6m에 이르는 이 작품은 이른바 여닫이 문 형식에 의한 북방 특유의 제단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탄생>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등 아홉 점의 화면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각각 다른 화가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그뤼네발트의 독자적인 표현주의적 경향과 환상성·신비성, 날카로운 리얼리즘 등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고고한 예술을 문자 그대로 집대성한 것이다. 또 독일 회화사상(繪畵史上)에서는 최대의 색채의 마술사로서 그의 천분도 이 작품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코르마르운타린덴 미술관 소장).

크라나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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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as Cranach (1472∼1553)

프랑켄 지방의 크라나하에서 태어났다. 초기의 크라나흐는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와 볼프 후버 등과 이른바 도나우파(派)의 일각을 형성하고, 독일의 산림 풍경을 신선하고 서정적으로 그렸으며, 또 동시에 그뤼네발트를 생각케 하는 표현주의적 색채가 농후하고 극적인 박력이 넘치는 작품을 남기고 있다(전자의 예로서 베를린의 다렘 미술관 소장인 <이집트 도피 徐中의 휴식>, 후자의 예는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들 수 있다). 1505년 비텐베르크에 이사한 그는 커다란 아틀리에를 차리고, 우미한 여성의 나체상과 신화화(神話畵)를 많이 그렸으며, 루터나 기타 저명인사의 초상화에도 걸작이 많다. 1537∼1544년에 걸쳐 그곳 시장(市長)을 지냈던 그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을 열렬하게 지지하기도 하였고, 만년에 가서는 바이마르의 궁정화가로 지내다가 1553년 거기에서 운명하였다. 또 이름이 같은 그의 아들(1515∼1586)도 화가로서 부친의 조수·후계자가 되어 활약하였다.

홀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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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Holbein (1497?∼1543)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최후를 장식하는 화가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동명인 부친(1465?∼1524)도 당시의 중요한 화가였고 아들인 홀바인도 처음에는 부친 아래서 배웠으며, 1515년 당시 유럽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바젤에 가서 그곳에서 화가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곳에서 1526년까지 머문 후에 약 2년간을 런던에 체재하였다가 다시 바젤로 돌아왔다(1526∼1528). 이 제1차 런던 체재중에 이미 초상화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고 있던 그는 재차 런던 행차를 결의, 일단 고향인 아우크스부르크에 갔다가 1532년에 런던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안주하여 1543년에 사망하였다. 그 동안의 1536년에는 헨리 8세의 궁정화가에 임명된 적도 있다.

홀바인은 유럽에 있어서 고금을 통하여 최대의 초상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으며, 뒤러와 크라나흐가 대표하는 독일 르네상스의 빛나는 초상화 예술의 전통을 그 정점에까지 끌어 올린 공적은 매우 크다. 모델에 대한 냉정하고 예리한 관찰과 정확하고 극명을 다한 세부 묘사, 명쾌한 화면 구성, 나아가서 작품을 단순한 초상화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성격에 대한 투철한 이해력 등을 그의 특색으로 하는 홀바인의 예술은, 가령 <로트르담의 에라스무스>(1523년,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와 <게오르크 초상>(1532년, 베를린 다름미술관)에 그 진가를 찾아볼 수가 있다.

알트도르퍼와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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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odorfer, Grien

뒤러와 크라나흐 등 거장(巨匠) 이외에도 풍경화에 명작을 남기고 있는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1480?∼1538)와 종교화나 그 밖에 특이하고 수수께끼 같은 여성의 나부상(裸婦像)을 즐겨 그렸던 한스 발둥 그린(1480?∼1545) 등 개성적인 화가가 적지 않은데, 대체로 16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 조각 및 건축과 마찬가지로 독일 회화도 이탈리아의 지배 아래 들어가서 점차로 만네리화(化)하여 이전의 힘있는 활력을 잃어 갔다.

조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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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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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彫刻

중세의 조각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건축에 존속하여 있었고, 그때문에 표현상으로나 기술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으며, 그 소재도 거의 돌에 한정되어 있었다. 후기 고딕으로부터 르네상스에 걸쳐 회화가 점차로 건축으로부터 독립해 간 것처럼, 조각도 역시 건축의 지배에서 벗어나 점진적으로 자립적인 존재가 되어 갔다.

바꾸어 말하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중세적인 제약을 탈피하여 보다 자유스러운 표현과 보다 다양한 소재 그리고 기법의 길을 개척하여 온 것이다. 다만 예술적 달성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이 무렵의(16세기 전반) 독일 조각은 같은 시대의 독일 회화에 미치지 못하며, 또 전 시대 즉 후기 고딕의 독일 조각에 비교하여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다. 틸만 리멘시나이더, 파이트 시토스, 미하엘 파하 등 모두가 독일 후기 고딕 조각의 최후를 장식하는 사람들이기도 했고, 이에 계속하는 성기 르네상스의 조각가들은 말하자면 그들의 작풍(作風)을 이어간 사람이라 하여도 무방하다. 적어도 전통적인 종교 조각에 대하여는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며, 이 시대에 볼 만한 작품은 오히려 새로운 청동 조각이나 세속적인 주제에 의한 것이 많다.

피셔 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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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 Vischer

1450년경부터 1550년경에 걸쳐 뉘른베르크를 중심으로 활약. 독일에 있어서 청동 조각의 기법과 표현의 양면에 있어서 완성자로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일족의 창시자인 헤르만의 아들 페터(1460∼1529)는 제1인자로 뉘른베르크에 있는 <성 제발두스 감실(龕室)>에 의하여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이 작품은 최초의 구상으로부터 완성(1519)까지의 전후 약 20년이 걸린 대작인데,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도 제작에 참가하였다. 주위에 열두 제자를 안배한 이 감실은 뉘른베르크의 빛나는 금세공의 전통을 이은 고도의 기술적 완성과, 고딕적인 장중함에다가 르네상스의 새로운 인간적인 체온을 나타내어, 독일 르네상스의 조각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스부르크에 있는 막시밀리안 황제 묘묘(墓廟)를 위하여 제작된 <아더왕(王)과 테오도리크왕의 상(像, 1513)>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초상조각은 아니지만 인간을 묘사해 낸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리얼한 작품이다.

마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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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rad Meit (1485?∼1544?)

보름스 출신이며, 그의 작품에는 네덜란드 총독 마르가레테 묘묘(墓廟)와 같은 기념비적인 것도 있지만, 그의 특기는 오히려 대리석이나 알라바스터로 만든 나부상(裸婦像)과 흉상 등의 소조각이다. 이것은 모두가 반들반들하게 한 끝손질과 인체의 부드러운 살결을 보여주며, 또 은밀한 가운데에서도 세속적이고 친밀한 정감을 풍기고 있어 당시의 조각계에 이채를 보이고 있다.

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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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y Hering (1484?∼1554?)

그는 소조각(小彫刻)을 특기로 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성 위리발트 기념상>과 같은 르네상스적인 조화·위용이 넘치는 기념비적인 작품도 남기고 있다.

건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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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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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建築

독일의 르네상스 건축도 회화와 마찬가지로 독일 본래의 고딕 양식과 새로운 이탈리아 양식의 융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향으로서는 새로운 자유도시의 출현, 즉 시민계급의 대두와 더불어 그때까지의 종교 건축이 점차로 퇴조하게 되는 데 반하여, 성관(城館)이나 시 청사 등 세속적인 건물이 융성하게 되어 갔다.

미하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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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에 있으며, 얼마 안 되는 종교 건축 가운데에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수학한 바 있는 암스테르담 출신 건축가인 프레데릭 수스트리스(Frederich Zustris)의 설계로 1597년에 완성하였다. 위쪽으로 위쪽으로 향한 수직성을 강조하는 종래의 고딕 건축에 비교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그 본을 따 온 이 교회는 수직선과 동시에 수평선인 횡적 확대도 강조하여 매우 명쾌하고 안정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성관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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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館建築

대표적인 것으로는 르네상스에 있어서 독일 고유의 성관 건축의 한 전형(典型)이 된 아샤펜부르크 성관, 이탈리아 양식을 배워 명쾌하고 안정된 수평구조를 강조한 오도하인리히 건축(1559년 완성) 등이 있다.

시 청사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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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廳舍建築

신흥 시민계급과 자유도시의 상징이라고도 할 시청사의 건축에는 아우구스부르크의 건축가인 엘리아스 홀(Elias Holl, 1573∼1646)이 만든 것(아우구스부르크, 1615∼1620)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밖에 브레멘의 시청사도 안트워프의 건축가인 코르넬리스 플로리스(1514∼1575)의 영향에 의한 그 풍부한 장식성으로 인하여 후의 바로크 건축에로 향하는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