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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르네상스의 미술/프랑스 르네상스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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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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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르네상스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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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이 알프스를 넘어 유럽 각지로 전파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프랑스에 있어서 15세기에는 아직도 고딕 말기의 플랑프와이앵 양식이 지속되고 있었으며, 14세기에는 장식주의(裝飾主義) 연장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종교 건축에 있어서는 특히 이 경향이 16세기가 되어도 계속되는 형편이었다. 파리의 성(聖) 젤만 오크세로아, 성 제르베, 성 에티엔누 듀 몽 등의 파사드나 오델 드 크뤼니 등은 고딕 전통이 아직도 뿌리깊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프랑스 각지에도 플랑프와이앵 양식이 남아 있었으나 특히 브뤼쥐의 오델 자크 쿨은 15세기 프랑스 건축의 대표적인 예이다.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7)는 이탈리아 전역을 통하여 그곳의 예술과 친숙하게 되어 이탈리아의 미술가를 초청하여 르네상스 양식을 이식(移殖)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건축가는 이러한 새로운 외래의 디자인과 기술을 습득하여 독자적인 프랑스 건축을 만들어 내게 되지만 그러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을 올바르게 이해하여 직접적으로 고전 건축의 전통과 연결되는 양식을 완성한 것은 앙리 2세(재위 1547∼1559)의 시대가 된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전자의 시대를 초기 르네상스, 후자의 시대를 후기 르네상스라고 불러 구분하고 있다.

종교 건축보다도 세속 건축, 특히 국왕이나 귀족의 주거샤토에 새로운 건축양식이 적극적으로 채용되었다. 루와르강(江) 유역에 산재하는 샨브르성(城=1519년 起工), 쉬농소성(1515년 起工), 아제 르 리도성(1518∼1527), 블르와 성의 프랑수아 1세의 집(1515∼1524) 등은 초기 르네상스의 가장 아름다운 성이다. 좌우 대칭의 플랜과 벽기둥이나 수평의 코니스를 규칙적으로 배열한 외관상의 구성 등에 이탈리아적인 새로운 양식을 보여 주면서 상부에는 전통적인 경사 지붕을 얹고, 거기에 지붕과 굴뚝을 화려하게 돌출시키고 있다.

프랑수아 1세가 1528년 이후 파리 지방에 거주하게 되자 파리 주변에도 많은 성 출현하게 되었다. 퐁텐블로성(1528년 기공)과 생제르맹 앙레성(1539년 가공) 등이 그 대표작이다.

고전 양식의 성관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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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樣式-城館建築

1530년 대 이후에는 프랑스의 젊은 건축가들이 이탈리아로 가서, 직접 고대 건축이나 르네상스 건축을 배우고 돌아와 고전 양식의 건축을 보급시켰다. 필리베르 들로름(Ph. Delorme, 1515?∼1570), 장 뷰랑(J. Bullant, 1510?∼1578), 피엘 레스코(P. Lescot, 1510?∼1578)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1540년 혹은 1541년에는 건축론을 저술한 셀리오가 이탈리아에서 초대되었고 나아가서 로마의 건축 이론가 비트루비우스(기원전 1세기)의 연구가 성행하여 이탈리아로부터의 새로운 물결이 프랑스에 정착한다.

후기 르네상스의 대표적 건축은 레스코가 만든 루브르궁 중정(中庭)에 면해 있는 한 건축물과 들로름의 아네성과 또한 베르누이유성 등이다.

이 시대의 작가는 건축에 있어서 실제적인 작가임과 동시에 뛰어난 건축 이론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조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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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르네상스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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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가 전쟁으로 황폐하게 되자 지방에 있는 아틀리에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플랑드르 출신인 클라우스 슬뤼테르(Claus Sluter)는 디종에서 산몰 수도원 교회당에 <성모자> <부르고뉴공(公) 필립 대담공과 왕비 등>, 내정(內庭)에 있는 <모세의 샘> 등의 작품을 남겼다. 사실적인 기법 위에 옷 주름의 표현과 극적인 표정, 그리고 개성의 예리한 관찰로써 만든 모뉴멘털하고 표현적으로 독특한 양식을 제시하여 그 비창미(悲愴美)의 조각이 부르고뉴 지방의 묘비 조각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그 영향은 한때 유럽으로 퍼졌다.

슬뤼테르의 예술은 고딕 말기의 바로크라고도 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고딕 양식의 존속은 1530년경까지 토로와의 유파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이미 1430년경부터 슬뤼테르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특히 투르지방에서는 우미하고 온화한 정감을 표현하는 조각이 출현하고 있었다. 이것은 투르에 정주한 이탈리아인 조각가인 쥐스토 일가(一家)의 활약 등 이탈리아의 영향으로 초래된 경향이다. 1527년 이후에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이탈리아의 미술가가 퐁텐블로에서 활약하였는데 로소와 프레마티스는 우아한 이상미의 새로운 카논을 프랑스에 전하였다. 16세기에 파리가 또다시 예술의 중심지가 되자, 일 드 프랑스를 포함하여 파리 지방은 르네상스 양식이 전개되는 무대가 되어, 장 구종(Jean Goujon, 1515?∼1568?)과 제르맹 필롱(Germain Pilon, 1535?∼1590)이 궁정 조각가로 활약하였다.

회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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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르네상스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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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있어서 프랑스는 샤를 6세의 패배와 잇달은 내전과 영국군의 침공 등으로 왕가는 여태까지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의 전통적 영역인 미니어처의 제작은 계속되고 있기는 하였으나 파리는 이미 한 지방도시에 불과하였다. 그러한 파리를 대신하여 몇몇의 지방과 도시가 그 시기의 회화의 중심지로 되었다. 주요한 곳으로 법황청이 있던 아비뇽과 르늘당쥐(재위 1434∼1480)가 지배한 프로방스 지방 그리고 베리공(公)에 의하여 육성되고 프랑스 왕실의 소재지가 된 루와르 계곡 지방(溪谷地方)이 있다.

프로방스 지방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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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남부인 이 지방은 이탈리아와 카타로니아의 영향을 받았으나 플랑드르 미술도 그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여러 경향을 내포하면서 프로방스의 독특한 작풍(作風)을 만들어 냈다. 앙겔랑 사롱통의 <성모(聖母) 대관(戴冠)>과, 작가는 확실치 않으나 루브르 미술관 소장의 지보적 작품 중 하나인 <아비뇽의 피에타>, 니콜라 프로맹의 <불타는 나무> 등이 그 대표작이다. 파리파(派)를 상기시키는 복잡한 구성과 호화스러운 정경인 <성모 대관>과 모뉴멘털한 크기 가운데에 정치한 묘출력(描出力)을 융합시켜 조용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피에타>는 특출한 일품이다.

루아르 계곡 지방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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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谷地方-繪畵

브뤼쥐를 중심으로 하는 이 지방은 프로방스 지방 이상으로 플랑드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4세기 후반에 있어서 프랑스에는 디종과 물랭, 그리고 브뤼쥐에서 많은 플랑드르의 화가가 활약하고 있었다. A. 보느뵈(Beauneveu), 작크마르 드 헤스댕(Jacquemart de Hesdin), 브레데를랑(Breederlam), 장마누엘(Jean Manouel) 등의 작가들이다. <베리공(公)의 가장 호화한 기도서>를 제작한 폴, 앵느캥, 에르맹 등 세 랭부르 형제(Limbourg)는 플랑드르에서 베리공의 초대를 받고 와서 이들 프랑코-프라망 화가들의 정점에 위치하는 활약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 기도서의 미니어처에는 금바탕을 배제한 원근법에 의한 자연의 묘사에서, 여태까지 보지 못한 눈앞의 자연 공간을 그리려고 한 현실적 관심을 똑똑하게 알 수가 있다.

푸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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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Fouquet (1420∼1481)

랭부르 형제의 계보(系譜)로부터, 투르에서 출생하여 그곳과 브뤼쥐에서 제작 활동을 한 푸케가 나타나 중세 말기의 프랑스 회화를 완결한다.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했으나 플랑드르로부터 직접 배운 것은 없었다.

또 이탈리아에 체재(1443∼1447)하기도 했으나, 그가 그린 <샤를 7세>나 <에티엔 슈발리에>에서 볼 수 있는 명확한 선과 명석한 색조와 정대(靜大)한 정취는 고딕 정신의 연장이며 프랑스 독자적인 감성의 싹을 느끼게 한다. <성모자>에 담긴 기하학적인 형태의 바닥에서 나오는 조용한 인간 감정은 당시의 플랑드르에서나 이탈리아의 미술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현실의 풍경을 화면에 받아들여 실재하는 건물을 묘사하고 풍속을 그리며, 초상에 있어서도 개성적인 특징을 재현하는 푸케의 작품은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쳐 장 부르디숑(Jean Bourdichon)과 물랭의 화가들에게 계승되었다. 후자에 속하는 오탄에 있는 <그리스도 강탄(降誕)>은 고딕 미술의 내부에서 자라온 자연주의와 인간주의의 훌륭한 성숙을 보여주고 있다.

퐁텐블로파와 클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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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8세와 루이 12세 및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정복은 프랑스에 이탈리아의 취미를 유입시켰다. 특히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앙드레아 델 사록토 등의 미술가와 그리고 많은 작품을 받아들였다. 퐁텐블로 성관(城館)의 건립과 그 장식을 담당한 이탈리아 미술가와 또한 그들에게서 배운 프랑스의 미술가는, 이탈리아의 모방에서 출발하여 점차 독자적인 고아한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서 '퐁텐블로파(派)'를 형성하였다.

한편으로, 플랑드르계(系)의 초상화가도 정밀하고 세련된 작품을 제작하여 왕후(王侯)와 귀족에게 환영을 받고 있었다. 안트워프 출신인 장 클루에(Jean Clouet, 1485?∼1541) 와 그 아들인 프랑수아 클루에(Francoir Clouet, 1516?∼1572), 그리고 덴 하그 출신인 코르네유 드 리옹이 그 유파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

클루에 부자 가운데 부친 장은 프랑수아 1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투르에서 활약하였는데, 그보다 더한 명성을 얻었으며 걸작을 남긴 것은 아들인 프랑수아이며 부친의 뒤를 이어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세밀하고 명쾌한 데생과, 억제되고는 있지만 정묘한 색채와 깊은 관찰 및 고귀한 형태감은 그후 프랑스 회화의 조류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