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르네상스의 미술/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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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건축의 전개[편집]

-建築-展開

1401년에 피렌체의 모직물업조합(毛織物業組合)은 대성당의 세례당에 있는 제2의 청동문 제작자를 결정하는 경연대회를 벌였는데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코의 두 작품이 남아 드디어 상은 기베르티에게로 돌아갔다. 무념(無念)의 브루넬레스코는 1403년경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에 가서 고대 건축과 조각의 연구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1417년 그의 연구 성과는 대성당의 돔형 지붕 설계의 경쟁에 있어서 승자로 결실되었다. 대성당의 설계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02)에 의한 것인데, 1336년부터 조토의 손에 맡겨져서 그 서쪽 끝의 유명한 종루(鐘樓)가 세워졌으나 둥근지붕은 미완성이었다. 공사는 최정탑(最頂塔)을 제하고는 1436년에 일단 완성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판테온과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대성당에 유사한 대천개(大天蓋)를 가지고 있으나 뒤의 둘은 건조물(建造物)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부벽(扶壁)들에 의해 외관(外觀)의 미(美)가 파손되어 있는 데 반하여, 브루넬레스코의 방법에서는 건축적 기능이 내면에 숨겨지고 중량을 지탱할 부벽은 시각적 효과를 해치지 않는 석괴(石塊) 중에 묻혀 있어서, 형체미가 기능에서보다 우선하는 르네상스적 특색이 나타나고 있다. 대천개 기초부의 갤러리는 바초 다뇨로가 1507년에 착공하였으나 평판이 좋지 못하여 완성하지 못하였고, 또 1490년 로렌초 메디치에 의하여 파사드(건물의 정면)의 경작 기획에는 40명 이상의 무명 예술가가 응모하였으나 이것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건축사는 대성당에서 시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기(前期), 이른바 콰트로첸토는 1400년대의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초기 르네상스[편집]

브루넬레스키[편집]

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처음에는 금세공(金細工)이었으나 건축가가 된 것은 그의 나이 이미 40대의 일이었다. 1430년경 세운 파치가(家) 예배당은 고대 신전(神殿)에서 패턴을 구하면서도, 독자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 명쾌하고 전아한 형식을 만들어 냈다. 특히 내부는 코린트식의 벽기둥, 그 위의 엔태블러처, 둥근 꽃무늬 장식 등의 회색의 석재와 크림색인 석회벽의 대조는 장식적인 효과를 높여 준다. 로마나 초기 그리스도교의 원당(圓堂) 건축에 자극된 8각형 플랜 산타마리아 델 안제리 성당은 미완성으로 그쳤지만, 벽면이 뚫려 통하는 여덟개의 예배당은 중앙의 원당 주위에 있고, 파치 예배당과 같이 우산처럼 보이는 도움이 덮여 명암(明暗)의 대상이 현저하여 활력이 넘쳐 보인다. 1444년에 착공한 산토 스프리토 성당은 산 로렌초 성당(1421∼69)의 라틴 십자형식 원근법적 효과를 한층 높인 것인데 여기에서는 아케이드(arcade)의 우미한 열(列)이 내부 공간을 통일한다.

미켈로초[편집]

Michelozzo di Bartolomeo (1396∼1472)

도나텔로의 친구이며, 오르산미켈레의 감실(龕室) 장식을 그와 협력해서 하였고,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할 때에 그를 따라갔으며, 베네치아에서 그를 위해 산 소르조 마조레의 도서관(1433년 완공, 1614년 파괴)을 세웠으며, 귀국 후 건립한 메디치 릭 카르디(1444∼49, 1659년 릭카르디가(家)가 소유하였으며 이 명칭으로 부른다)는 초기 르네상스에 있어서 시민 건축의 대표이다. 이 낮은 직사각형 플랜은 팔라초 베키오와 뒤에 세운 팔레제 저택과 같은 것이다.

릭 카르디의 저택은 맨 아래층의 조면(粗面)으로 된 절석(切石)이 2층에서는 평활(平滑)한 석벽(石璧)으로 되어 있고, 3층에는 잇는 틈새가 없이 미끈하게 칠한 것과 같은 석벽으로 되어 있다. 또 2, 3층에 있는 창문의 제작 방식(1층은 1517년 미켈란젤로가 만듦)과 최상부의 코니스(벽면에 돌출한 수평석) 등은 수평면을 강조하는 외관상의 특색을 볼 수 있고, 안쪽은 아케이드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전정(前庭)이 있으며, 컴퍼지트 오더(混合株式)의 주두(柱頭)가 있어서 고전적인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성새(城塞)로부터 사저(私邸)의 건축으로의 추이(推移)를 나타내는 과도적 건축물이며, 더욱이 이 전정의 안쪽에는 꽃이 피고 밝은 정원이 있다. 이와 같이 출입구에서 전정을 통하여 안뜰로 연결하는 선의 원근법 응용이 당시의 저택 건축을 완성시킨 형식이었다. 그는 메디치가(家)를 위해 건립한 피렌체 주변의 니빌라(別莊)의 카렛지(1434 이후)와 카파지올로(1451)는 배틀먼트(총안이 붙은 흉벽)가 있어서 마치 소요새와 같은 봉건적 건축이다. 또 그는 밀라노의 산 테우스톨조 성당 내에 있는 폴티나리 예배당 등을 세웠다.

알베르티[편집]

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

피렌체의 명문인 알베르티가의 추방 중에 제노바에서 태어나 어린 때를 베네치아에서 보냈고, 볼로냐 대학에서 법률을 배웠다. 그는 시작(詩作)에도 뛰어나 만능인(萬能人)이라 불렸고 1431년부터 로마 교황청에서 일했으며, 1434년에 겨우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건축가가 아니라 저술가였으며 이론가였다. 비트루비우스(기원전 1세기경에 활약한 로마의 건축가)를 모방한 <건축론>은 1452년에 불완전하지만 일단은 완성하였다(1485년 출판). 그의 지도하에, 베르나르도 로셀리노가 피렌체의 루첼라이 저택을, 마테오 데 파스티가 리미니의 텐피오를 건축하였으며, 그것은 계산과 분석 위에 세워진 합리적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루첼라이 저택(1446∼1451)의 파사드는 3층의 적석건축(積石建築)이며, 이연창식(二連窓式)인 반원창(半圓窓)은 릭 카르디 저택의 형식을 간직하고 있으나 미켈로초보다는 중세의 성채(城砦)가 갖는 엄숙함을 다소 완화하고 한층 더 장식화한 것이다. 도리아식(式), 그 위에 이오니아식, 그리고 코린트식 등 위쪽으로 향하여 경쾌하게 되어 가는 세 오더를 벽기둥의 형태로 배열하면서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절석(切石)을 쌓아 올린 방식도 종래의 불규칙으로부터 질서있는 것으로 변하여 전아한 향취마저 보여준다. 다만 정상의 코니스를 건물 전체의 프러포션에서 본다면 미켈로초의 선례(先例)보다 얼마간 힘이 약해져 있다. 그러나 각층을 구획하는 엔태블러처에는 릭 카르디 저택의 코니스에 대신한 부조가 장식되어 있고, 조석(粗石)을 쌓아 올리는 것 대신에 평활하고, 또한 섬세한 돌을 정연하게 정렬하였으며, 벽기둥으로 칸이 지워진 격간(格間=柱間의 구획)의 리드미컬한 변화는 실로 장식적인 것이다.

건축미에 관한 그의 해석은 리미니에 있는 13세기의 프란체스코회의 교회 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1447년 착공). 신전(神殿)이라고 불려지는 이 건물은 이곳 전제군주 시기스몬드 마라테스타의 주문에 의하여 그의 죽은 부인 이소타와 문학자들의 매장장(埋葬場)으로 건축되었다. 알베르티는 구연와건축(舊煉瓦建築)을 바탕으로 이것에 대리석의 외장(外裝)을 하여 로마 개선문풍의 파사드를 만들었다.

파사드의 벽기둥 위에 있는 엔태블러처와 그 위의 삼각 박공중앙이 분단되어 있다)에는 로마 후기의 건축이 가지고 있던 힘있는 중량감을 감지할 수 있다. 이 공사는 1468년 시기스몬드의 죽음에 의하여 중단되어 신전은 삼각 박공이 없는 채 끝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5년에 파괴되었으나 1950년에 복원되었다.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건축[편집]

베네치아에 있어서 르네상스 건축의 완만한 실현은 <벤드라미니 저택>(1481∼1509)의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피에트로 롬바르도(1435∼1515)가 설계하였는데, 당시 피렌체에는 브루넬레스코와 알베르티에 의하여 고전적 양식이 유행하고 있었으나, 여기서는 트레이서리(곡선 무늬의 장식)가 종형(縱型)으로 구획된 창문 따위에 중세적 전통이 남아 있다.

파사드의 벽기둥 형태는 각층마다 다르고 특히 외측 격간(格間)을 테두리한 벽기둥은 두개를 나란히 세우기 위하여 파사드 중앙에 3련의 창문이 된 것은 그후 베네치아 건축의 특징이 되었고 이것이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피렌체와 비교하여 창문은 상당히 넓고 크다.

1509년 루카 파초리는 <신성비례론(神聖比例論)>에서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건축을 하려는 자는 모두가 건축가를 피렌체에서 데리고 온다'고 말하고 있다. 고대 건축의 구성 요소나 당시의 건축 평면도를 수록한 발베리니 사본이라고 불리는 스케치북은 줄리아노 다 산갈로가 만든 것이다.

상갈로[편집]

Giuliano da Sangallo (1445∼1516) 처음에는 목각(木刻)을 배웠고 후에는 건축으로 전환하였으며, 요새도 구축하는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바티칸에 봉사하였다. 로렌초 데 메디치를 위해 세운 폿조 아 카이아노의 별장(1480∼1485?)은 그의 대표작이다. 별장은 피렌체와 푸라토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형식은 미켈로초와 공통된 점은 없고 어느 점에서는 팔라디오의 선례(先例)라 할 수 있다. 별장은 정원과 과수원의 중앙에 위치하여 일종의 열주(列柱)의 대(臺) 위에 있는 장방형의 플랜을 갖는다. 지붕은 네 면으로 돌출하였고, 중앙 입구에는 여섯개의 이오니아식(式) 둥근 기둥이 나란히 서서 그 위에 테라코타의 프리즈(띠모양의 장식 소벽)가 있으며 최상부는 삼각 박공으로 되어 있다. 이 현관 출입구는 2층 건물의 중앙에 있어 가장 잘 눈에 띄고 여기에서 건물의 중앙에 위치한 격간 천장의 큰 홀로 통한다.

전성기 르네상스[편집]

브라만테[편집]

Donato Bramante (1444∼1514)

중부 이탈리아의 움브리아 출신. 처음에 화가가 되려고 하여 밀라노에서 피에로델라 프란체스카에게 배웠고 만테냐의 영향을 받았지만 건축가로 길을 바꾸어 밀라노의 산 사티로 성당의 설계를 담당하였다. 피에타 예배당은 이 성당의 중심 플랜인데 하층은 원통형(圓筒形)으로 되어 있으며 상부에는 네개의 합각머리에 그리스 십자가 얹혀 있고, 그 위에 또다시 팔각형의 층을 얹고 정상에는 원통의 소탑이 서 있다. 이 구심적 설계는 바실리카 건축(교회당 건축의 한 형식으로 집중식 건축에 대응한 것. 아일에 붙은 네이브와 보통 서쪽 끝에 후진이 있다)에는 볼 수 없는 형식과, 그리고 공간의 처리 방법을 제시하여 후기 르네상스 건축의 범례가 되었다. 최하층의 원통부에는 기둥에 당초(唐草) 문양을 그려 넣은 벽기둥이 좁은 감실(龕室)과 넓은 패널을 테두리하였으며 상층에는 꼭 같은 벽기둥이 8각형 동부(胴部)의 구석에서 굽혀져 있다. 그리하여 건물의 각부에는 다채로운 음영(陰影)을 부여하였다. 이 교회의 8각형인 세례당 내부는 같은 당초 무늬의 벽기둥과, 1층과 층을 구획하는 프리즈대(帶)로 나동(裸童)을 부조하였고, 각변(各邊) 중앙의 원형 내에는 인두(人頭)의 고부조(高浮彫)를 새겨 그가 도나텔로를 숭배했다고 하는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

1499년, 그는 로마로 초빙을 받아 교황청에 종사하여 전성기 르네상스의 건축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두 국면은 각각 다른 두 곳에서 전개된다. 즉 초기 르네상스의 건축가들은 주로 피렌체와 북이탈리아에서 활약하였고 성기에는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16세기의 도래와 함께 로마가 이탈리아 예술활동의 중심이 되고 이 세기 전반에 있어서의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은 여기에 개화하게 된다.

브라만테는 로마에 있어서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최초로 실현한 건축가이다. 1499년 로마에 도착한 그는 우르비노에서 기하학 응용의 이점을 깨쳤고 만토바에서는 알베르티의 작품을 접하였으며 바비아에서는 레오나르도로부터 양괴(量塊) 처리 방법을 배워, 풍부한 경험을 쌓아서 산 피에트로 인 몬트리오 성당 내에 템피에토(小畵殿)라고 불리는 도리아식(式) 오더의 주주회랑(周柱回廊)이 있는 소성당을

건립하였다(1502). 원형의 성기소(聖器所)와 그 주위를 싸는 주주랑(周柱廊)과 높은 원통(圓筒)에 받쳐진 대원개(大圓蓋) 등, 모두가 곡선으로 되어 있다. 산 사티로 성당에 비하면 훨씬 소규모이며 또 매우 검소하다. 16개의 열주(列柱)는 도리아식이며 그 위에 엔태블러처와 프리즈, 그리고 난간이 얹혀 있다. 이 난간 너머에 감실이 붙은 원동(圓胴)이 보이고 또한 정탑(頂塔)이 있는 원개(圓蓋)가 있다. 셀리오의 판화에서 알 수 있는 한에 있어서는 성당의 중정(中庭)에 세워진 이 '소신전'은 주위의 원형 회랑과 잘 조화된 것이다. 이제는 기념물적 형식이 건축 설계의 중요한 특색이 되어 버렸고 합리성이 화려한 매력보다도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가 세운 두 성당인 산 사티로와 템피에토와의 근본적 차이점이다.

상갈로[편집]

Antonio Picconi da Sangallo (1485∼1546) 줄리아노 산갈로의 조카, 브라만테의 제자. 1511년 추기경 알렉산드로 파르네세(후에 파울루스 3세)의 주문을 받아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1517년에 착공했는데 산갈로의 설계는 1, 2층뿐이고 3층은 1547년 미켈란젤로가 추가했다. 이 건물은 중앙부가 공동(空洞)의 직사각 플랜으로 각 구획은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피렌체의 팔라초(저택), 예컨대 릭 카르디 저택과 같은 양식을 답습하고 있다. 당시 이탈리아 각지에서는 알베르티(루첼라이 저택)와 브라만테의 건축 이후에는 오더의 사용이 성행(盛行)하였었는데도 파사드의 각 층에는 오더가 중첩되어 있지 않다. 전체적인 균형이나 돌출부의 크기에서 코니스는 중후한 양감(量感)을 보여준다. 초기 르네상스의 저택에 있어서는 적석(積石)과 오더 배열의 방법이 주로 건축 요소간의 리듬과 같은 표면적 효과에 중점을 두는 데 대하여 파르네세 저택에서는 벽면을 기둥과 적석으로 구획짓지 않고 코니스와 장단교착(長短交錯)으로 병렬한 우석(隅石)과 각 층계간의 대(帶)에 의하여 벽면을 구획하여 전체를 하나의 양괴(量塊)로 정리해 냈다. 주목할 것은 창(窓)의 취급방법으로서 일층에서는 직선의 추녀를 달았고 창의 대(臺)는 소용돌이형 까치발(벽주 또는 벽체에서 돌출되어 선반의 널빤지를 받치기 위하여 버티어 놓은 받침) 위에 있고, 그것이 2층에서는 창틀로 지탱되어 있는 삼각형과 반원형의 박공벽이 교대로 사용되어 양 층이 다같이 개구부(開口部)가 직사각형인데 3층에서는 모두가 박공벽의 아래에 있는 개구부가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성기(盛期) 르네상스에 있어서의 창의 취급 방식은 실내에 광선과 공기를 잘 들게 한다는 실제상의 기능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건물 전체의 설계에 따른 통일적인 외관을 갖는 것이었다. 다만 1, 2층의 리드미컬한 창의 배열을 무너뜨리지 않게 입구가 꽤 작다는 것은 건물의 힘을 약하게 한다. 로마시대의 콜로세움이나 마르켈루스 극장과 같이 돌을 사용한 건물의 중정(中庭)에는 이들 고대의 조영물(造營物)을 모방한 것이 있다. 중정에 면한 기둥은 콜로세움의 외관을 본따서 1, 2층에는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의 둥근기둥을, 3층에는 코린트식 벽기둥을 세웠고, 건물의 기초부와 엔태블러처도 선례(先例)에 따르고 있다. 파사드도 마찬가지로 창 위에 박공벽이 붙여지나 가로 틀이 되는 작은 둥근기둥을 없앰으로써 벽면에 붙여진 둥근기둥과 너무 가깝게 배열됐기 때문에 일어나는 공간의 협소와 번잡을 피하고 있다. 15세기의 건축가가 열주랑(列柱廊)의 중정을 설계함에 있어서 문제로 삼은 구석의 받침기둥이 여기에서는 둥근기둥 대신에 각주(角柱)로 되어 있다. 구석의 기둥은 크게 모가 나 있으므로 건물을 직각으로 굴곡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릭 카르디의 전정(前庭)과 비교해 보면 한층 괴량적(塊量的)이고 위압적이며, 또 세부에 일관된 고전주의가 응용되어 초기와 성기에 있어서 건축이 이상(理想)하는 바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편집]

로마에 있어서의 성기(盛期) 르네상스의 저택은 카스틸리오네가 <정신론(廷臣論)>에서 말한 신하의 이상(理想)이라 할 예의범절과 같이 위엄에 넘치고 절도가 있는 태도를 모토로 건축되었으나, 그외에 성기(盛期) 르네상스적 성격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기회편승주의와 아레티노(1492∼1556)의 독설(毒舌) 중에 언급되어 있다.

이것이 건축상에 나타난 것은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개축을 의도한 율리우스 2세의 자부와 결단이다. 324∼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건립된 구 성당(舊聖堂)은 중세 말에 대파되었으며 재건의 계획이 니콜라우스 5세의 명령으로 알베르티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505년 율리우스 2세는 이 콘스탄티누스가 세웠던 교회 안에 자기의 영묘(靈廟)를 건립하도록 미켈란젤로에게 명하였다. 미켈란젤로의 안(案)은 거대한 규모여서 현재의 건물 내에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나, 교황은 이보다도 더 큰 대묘묘(大墓廟)를 세우도록 제안하여 건축가를 모아 드디어 브라만테가 그 임무를 맡아서 1506년 4월 18일에 초석(礎石)을 놓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즐겨 사용한 집중식 플랜인데 길이가 똑같은 그리스 십자형으로서 그 교차부에 대원개(大圓蓋)가 있고 묘는 그 아래에 둔다.

기획에는 줄리아노 다 산갈로와 프라조콘다 디 베로나 및 브라만테의 조카가 되는 라파엘로의 세 사람이 협력하였다. 대원개를 떠받치는 4각주는 브라만테의 안으로 완성되었고 외진(外陣)의 태반은 그가 죽은 해인 1514년에 되었다. 그후 페루치와 안토니오 다 산갈로가 원안에 상당한 손질을 하였다.

미켈란젤로[편집]

Buonarroti Michelangelo(1475∼1564)

1547년 미켈란젤로는 건축의 총감독에 임명되어 건물 서쪽 끝의 부분을 자기의 설계에 따라 건축하였다. 그는 다시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 플랜으로 돌아와서 그 동쪽 끝에 있는 열주랑(列柱廊)에서 들어갈 수 있게 교차부상에 거대한 대천개(大天蓋)를 얹음으로써 어디서 보아도 대천개가 건물 전체를 덮도록 하는 안을 세웠다.

1564년 그가 죽은 해에 외벽과 내부는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대천개 주위의 소천개는 그의 안대로 1564∼1585년 사이에 비뇰라가 만들었고 대천개는 그의 원안에 따라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가 1585∼1590년 사이에 건축하였다. 1605년 십자의 동편 부분을 확장하게 되어 가르로 마데르나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하였던 파사드를 떠받치는 현관에 다시 삼격간(三格間)을 가한 위에 층계가 미켈란젤로가 계획한 열주랑을 한층 더 확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애써 만든 대천개의 위용은 손상되었으나 1667년에 건물의 전면에 광대한 광장을 둘러싼 달걀형의 도리아식 주랑(柱廊)을 베르니니가 설치함으로써 그 결함이 보정(補正)되었다.

오늘날 미켈란젤로의 대천개의 참모습은 서쪽에서 바라보아 그 면모를 엿볼 수 있음에 불과하다. 후진(後陣)과 익랑(翼廊)의 벽면은 바닥에서 27m에 이르는 코린트식 벽기둥으로서 장식되었고, 그 위에 층계가 있는 엔태블러처가 얹혀 있다. 그리하여 지면에서 층계까지 50m나 된다. 이들 위에 소천개가 있고 대천개도 올려져서 전체의 높이가 135m에 이른다.

피렌체의 대성당과 같이 산 피에트로 대성당도 두 개의 골격으로 나뉜다. 외관으로서 지배적인 효과를 갖기 위하여 내부보다는 얼마간 험한 경사가 지는 천개는 16개의 리브(Lib)가 붙어 있고 측면의 압압력(押壓力)은 원개동(圓蓋胴)을 싸는 한 쌍의 원주열(圓柱列) 및 돌속에 묻혀진 주위의 철쇄(鐵鎖)로 지탱되어 있고, 이와 같이 거대한 원개는 그때까지 시도한 적이 없었다. 미켈란젤로의 구축법은 판테온에서 시작하여 아야 소피아 성당,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또 다음의 시대로 잇는 구축적인 요소로서의 대천개의 역사적 발전의 정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내부의 거대한 공간성의 인상은 만약에 미켈란젤로의 원안이 변경되지 아니하였다면 한층 더 높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1층 이상의 높이로 한결같이 사용되어 있는 둥근기둥과 벽기둥은 오늘날 자이언트 오더라고 불려지는 성기 르네상스의 특색 있는 하나의 건축 요소가 되어 있다.

마니에리슴[편집]

라우렌치아나 도서관[편집]

1524년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家)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그 가문의 문고로서 도서관 설립의 청을 받았다. 이것이 최초의 마니에리슴 건축이 되는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이다. 그는 1517년까지 이 공사의 감독 지도를 하여 그 동안 간혹 중단한 적도 있었지마는 1530∼1534년 동안 그것을 속행하였다.

그 후에 그가 로마에 갔기 때문에 미완성으로 남겨져 있었으나 1560년 안마나테가 미켈란젤로의 설계대로 공사를 진행하였으며, 용암류(熔岩流)와 같은 기묘한 계단, 좁고 높은 현관의 실내, 도서관 입구, 또 일정치 않은 건축 요소의 배합(분단된 삼각박공 파르네세 저택 3층의 창문에도 있었던 기둥을 떠받치지 않는 까치발, 쑥 들어간 丹柱群 등) 등은 비고전적인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페루치[편집]

Baldassare Peruzzi (1481∼1536)

시에나 출신인 그는 브라만테=라파엘로파(派)의 한 사람으로 1535년 마시미 저택의 공사를 착수하였다. 마시미의 구저택은 1527년 로마 약탈로 파괴되어 신축할 필요가 있었으나, 대지는 좁고 또 구부러진 가로에 면접해 있어서 건축하는 데에는 불리한 조건에 있었다.

마시미 저택 현관의 주랑(柱廊)은 상층(上層)을 예상하게 하는 논리적인 필연성이 없다. 3,4층의 창문이 작은 것은 가로가 파르네세 저택의 경우만큼 넓지 않은 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오더의 세부에 정성들인 장식은 이 특수한 환경에서는 건물에 잘 조화되고 있다. 현관에 있는 여섯 개의 도리아식 둥근기둥(이 저택의 별명인 아레 코론네(丹柱)는 이것으로부터 유래하였다)은 인상적인 것인데, 양측의 벽에 붙여진 벽기둥의 넓었다가 좁았다 하는 격간(格間)은 일종의 리듬감을 감돌게 한다. 어둠침침한 1층현관의 주랑(柱廊)과 상층의 평활한 면과는 현저한 명암의 대조를 이룬다.

마니에리슴의 전개[편집]

라파엘로의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가 건립한 <테 저택>(1525∼1535)은 마니에리슴 양식의 대표적 건축이다. 특히 정원 정면은 도리아식 원주열(파르네세 저댁에서 유래)이 서 있고, 양측에 단속(斷續)하는 아키트레브(브라만테에 따랐다), 또한 곳곳에 보이는 각석(角石)의 중적(重積) 등 건축 요소의 상호작용은 긴장과 활력을 환기한다. <전기(傳記)>의 저자 바사리도 미켈란젤로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서 본 바와 같은 공간의 압축과 안쪽으로 잡아 끌려고 하는 운동의 강제를 우피치(피렌체)의 중정(中庭)에서 실현했다. 거기에는 클라이맥스도 없었다. 개구부(開口部)가 저편을 엿보게 해준다.

비뇰라[편집]

Giacomo Barozzi da Vignola (1507∼1573)

볼로냐에서 활약하고 있다가 1540년경 로마에 갔으며, 프랑스와 1세의 초청으로 1541∼1543년 프랑스에 갔다가 또다시 볼로냐로 돌아왔으며, 1546년 로마에 정주, 줄리아장(莊 1550∼1555)과 카프라를라의 파르네세 장(1559∼1564)을 건립하였다. 한편으로 <오주식(五柱式)의 법칙>(1562), <원근법론>(1583)을 저작하였으며 그가 세운 예수회의 대본산(大本山)인 <제수성당>(1568년, 파사드는 델라 포르타에 의하여 1575년 완성)은 마니에리슴의 대표적 건축이다. 그것은 교회측의 희망에 따라서 광대한 네이브가 후진(後陣)까지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로써 설교와 전례(典禮)가 잘 전망되도록 되어 있다. 그 위에 네이브는 아일의 제실(祭室) 위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약한 빛으로 침침한 데에 비해 동편 원개의 드럼에 있는 창문에서는 풍부한 광선이 들어 와서 극적인 심리 효과를 높여 주고 있다. 파사드는 높은 네이브와 낮은 아일과의 차이를 알베르티가 개선문 형식으로 해결한 것을 그도 역시 따르고 있다.

팔라디오[편집]

Andrea Palladio (1508∼1580)

피렌체 출생으로 주로 그 곳에서 활약했으며, 비트루비우스와 알베르티의 저서를 연구하여 당대 건축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 자신도 <건축 사서(建築四書)>를 저작하여 비트루비우스의 기술과 남아 있는 건축물과의 상세한 대조를 하였다. 그는 알베르티 이상으로 이론과 실천과의 긴밀한 관련을 실증하였고 더한층 실제적이어서 후세에 대한 영향도 컸다. 베네치아의 <발마라나 저택>(1556∼1566)은 자이언트 오더의 벽기둥이 대석(臺石) 위에서 2층까지 달하고 그 위에 엔태블러처가 단속(斷續)한다. 자이언트 오더의 하반부, 즉 1층은 소오더의 벽기둥이 각 격간(格間)을 틀 짓고, 중앙 정면에 사격간(四格間)의 창 위에 있는 부조와 현관 아치 위에 있는 삼각 소실(小室)의 조각은 풍요한 장식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다만 구석의 부분에는 자이언트 오더에 계속하지 않고 1층의 소오더 바로 위의 2층에 조상(彫像)이 놓여져서 이 주택은 다른 팔라초와 같이 독립된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양측의 건물을 고려하여 의식적으로 자이언트 오더를 반복하지 않았다.

건물의 네 주위의 환경을 고려한 것에 그가 카프라가(家)를 위하여 베네치아 근처에 세운 <로톤다(圓形의 別莊)>가 있다(1567경∼1591). 이것은 피서용의 별장이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복잡한 플랜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대천개(大天蓋)에 덮여진 공간의 주위를 엄격한 시머트리로 배열된 방이 둘러싼다. 외관상으로는 로마의 판테온에서 본을 딴 대천개가 이오니아식(式)인 기둥과 박공인 정문 현관이 돌출한 4각형의 대석(臺石) 위에 서 있다. 이 현관은 장식과 비례에 있어서 고대적 개념의 충실한 번역판이지만 건물 전체에 대한 그 기능은 <발마라나 저택> 구석의 오더에서 표현한 정성들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그 돌출부가 건물과 그 환경의 사이에 긴밀한 상관 관계를 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서구건축은 풍경과 건물이 극히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후의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