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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르네상스의 미술/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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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르네상스 회화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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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期-繪畵-展開

알베르티. 브루넬레스코가 건축에서, 그리고 기베르티 도나텔로가 조각에서 이룬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회화에 있어서는 마사초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사리의 열전(列傳)에 기술된 것처럼, 그가 프레스코화(畵)를 그린 피렌체에 있는 카르멜회(會)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는 많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수업의 도장이 되었다.

피렌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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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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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accio (1401∼1428)

전술한 바와 같이 현존하는 예배당의 벽화는 그와 마졸리노 그리고 반세기 후의 필리피노 리피 등 세 화가가 제작한 것인데, 그가 그린 것은 <낙원 추방(樂園追放)> <공전(貢錢)> <그림자를 비추어 환자를 고치는 성(聖) 베드로> <가난한 자에게 적선하는 성 베드로> 등이 있다. <낙원 추방>은 화염의 칼을 잡은 천사에 의하여 낙원에서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를 그렸는데 소박하기는 하나 비극적인 미래를 암시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두 사람 얼굴의 뛰어난 묘사와 자태의 리드미컬한 운동, 명암의 표현도 훌륭하다.

화면이 큰 <공전>은 짧은 토거를 입은 로마의 세리(稅吏)가 손을 내밀어 신전에 바치는 세금을 강요하고 있다. 진퇴 양난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돌아본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명하여 강가에 가게 한다. 그림의 좌단에서 베드로는 물고기 입 안에서 화폐를 발견하고 오른편에서 이 돈을 세리에게 내준다. 복잡한 동작이 간명하게 그려져 있다. 조토의 인물이 외부의 자극에 의하여 움직여져 그 자리에 나란히 선 것처럼 보이는 것에 반해서 마사초의 인물은 자기의 의지로 서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은 한층 더 심화되어 사람·언덕·나무·건물은 벌써 가면극 무대의 소도구가 아니고 분위기 속에 융합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선의 원근법은 물론 공기 원근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다. 그리스도의 주위를 에워싼 제자들, 등을 돌리는 세리의 묘사는 조토보다 장중하며, 화면에는 파탄이 없다.

브란카치 예배당의 벽화와 같은 시기 작품인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 있는 벽화 <성(聖) 삼위일체>는 원근법을 가장 명료하게 그려낸 것이다. 여기에는 전시대의 우아·유려한 회화 대신으로 중후한 질량으로서의 인물이 있으며, 충실하고 팽팽한 묘사를 볼 수 있다. 섬세하고 가련한 꽃과 그리고 보석 대신으로 정연한 건물이 배경으로 되어 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왼편의 성모 마리아의 단순한 몸짓은 정적인 화면에 유일한 동작이 되어 인상적이다. 다른 인물들은 조상(彫像)처럼 정지해 있다. 입체적인 인상 표현은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층 더 몸의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단순화와 응축화(凝縮化)와 동격화에 의해서 화상은 생명을 가진 현실적 존재로서 다가온다.

우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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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olo Uccello (1397∼1475)

원근법의 연구에 몰두한 이 화가는 마사초의 후계자, 또는 원근법의 발명자라고 불리는데, 실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시적 환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화려한 색반(色斑)과 풍부한 금을 사용하여 장식적 효과를 높이는 고딕의 전통에 살아 온 작가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유명한 <산 로마노의 전투>(1458년, 우피치 루브르·런던 국립 화랑)는 1432년 산 로마노에 있었던 시에나군(軍)을 격파한 니코로 다 트렌티노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한 것이다. 기마전은 일대 야외극(野外劇)으로서 장식풍으로 그려져 있고, 여기저기에 그가 자랑으로 여기는 단축법(短縮法=지상에 가로누운 병사와 말)과 원근법(遠近法=떨어진 창의 방향에 주의)을 구사하고 있는데, 서 있는 말은 마치 회전목마처럼 정지하고 있다.

카스타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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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a del Castagno (1423∼1457)

조숙하였고 요절한 그는 마사초와 조각가인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인 <최후의 만찬>(1450)은 피렌체의 산 아폴로니아 수도원의 식당에 그려졌다. 현실의 식당의 연장인 것처럼 극적 장면은 패널로 막은 방에서 베풀어진다. 초점은 조금 왼편에 기울어 중심 인물인 그리스도와 유다 및 베드로의 배경이 되는 패널의 무늬만 번개처럼 반짝이고 그 섬광(閃光)은 유다의 머리 위에까지 달한다. 그러나 배후의 패널은 측면의 패널과 동수(同數)인 것을 생각하면 안쪽으로 향하는 거리감이 부족하고 또 인물 상호간의 연관성도 결핍되어 있다. 유다가 다른 사도들과 같은 열에 있지 않은 것은 중세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베네치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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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enico Veneziano (1400∼1461)

마치 그의 이름과 같이 베네치아 출생인 그는 1439년경 피렌체에 정주하였다. 유채화의 거장(巨匠)으로서 그의 밝은 색조는, 명암과 공간의 처리가 뛰어난 기법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서명한 두 작품 가운데 특히 <산타루치아 제단화(祭壇畵)>(1445?, 우피치 미술관)가 알려져 있다. 이것은 사크라 컨베르사치오네(Sacra Conversazione=성스러운 담화)의 최초 작품인데 성모자(聖母子)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늘어선 여러 성인들 사이에 서로 담화를 주고 받는 것 같은 정경을 보여 준다. 마사초의 작품에 비교하면 그의 인물은 중량감이 부족하며, 개성적인 표정을 가지고 있으나 힘이 없으며, 건축 요소도 화사하다. 그러나 색채는 매우 밝고 화려하며, 초기 르네상스의 색채화가임에 손색이 없다.

안젤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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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 Angelico (1417∼1455)

이 천사와 같은 화가는 민중의 교화를 위해 간명한 중세적 종교화를 제작하였다. 마사초의 형식에 따르고 있었으나 그 점에서는 당시의 예술의 풍조에 역행하였다고 하겠다. 가장 서정적인 작품은 그가 소속한 수도회인 산마르코 수도원의 벽화 중의 하나인 <수태 고지(受胎告知)>일 것이다.

이른봄 조용한 수녀원의 정원에 면한 화랑에 있는 이 작품은 실로 초기 르네상스의 종교화에 알맞은 밝은 색채이다. 양손을 가슴에 포개어 무릎을 굽히는 듯한 동작은 그의 <수태 고지>에서 무한히 경건한 정취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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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 Filippo Lippi (1406?∼1469)

마사초의 유일한 수제자라고 하는 그는 어린 시절에 양친을 잃고 피렌체의 카르미네회(會) 수도원에 맡겨져 수도 화가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프라 안젤리코와 달라서 종교화를 현실적으로 그린 최초의 화가인데, 당시 유행한 의상과 머리모양을 그림에 대담하게 채용하였다. 또 운동 묘사(특히 옷이 접힌 주름의 표현)와 섬세한 색채로 널리 알려졌다. 수녀 루크레치아 부티의 유괴사건은 그의 만년을 먹칠한 추문이었으나(1456),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필리피노(1457∼1504)도 뛰어난 색채화가였다.

또 발도비네티(1425∼1499)와 멜로초 다 포를리(1438∼1494) 등도 색채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유려한 선과 인간 감정의 정묘한 표현으로 알려진 화가들이다.

프란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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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o della Francesca (1422∼1492)

마사초의 경향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했던 사람이다. 움브리아의 보르고 산 세폴크로에서 출생하여, 피렌체에서 도메니코 베네치아 아래서 산 타지오 성당 장식에 협력하였다. 이윽고 모국으로 돌아와 피렌체·아레초·페라라·울르비노 등에서 그림을 그렸다. 아레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 내의 성십자가 전설에서 취재한 프레스코화(1452∼1459)는 영웅적인 인물상, 즉 당당한 장부(丈夫)를 그리고 있다. 그 엄숙감과 장중감은 엄격 양식인 그리스 조각을 생각나게 한다.

<성십자가 앞에 예배하는 시바의 여왕>은 여왕의 배후에 한덩어리의 빛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표현하여, 충분한 공간을 지니면서 전후 좌우로 퍼져 간다. 그의 대표작은 고국의 시청사(市廳舍)에 그린 <그리스도의 부활>(1460년)로서, 동트는 여명 속에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위용은 관 앞에서 잠에 떨어진 파수병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정열이 있고 내면적 생명의 충실이 있다. 그는 공간형식이론(空間形式理論)의 탐구자로서 <회화원근법론(繪畵遠近法論)>이란 논문과 <산술·기하학론>의 소론을 저작하여, 예리한 수리적 계산과 과학적 분석을 가지고 이것을 화면에 실증하였다.

1445년경 프란체스카가 피렌체를 떠난 뒤부터 1460∼1470년경에 동시(同市)의 화단은 쇠미하였다. 그리하여 중세적인 기사도(騎士道) 로맨스의 설화화가(說話畵家)들인 페세리노(1422∼1457), 베노초 고촐리(1421?∼1497) 등이 풍속적 종교화를 제작하였다. 조각과 금공(金工)에서도 알려진 바 있는 폴라이우올로 형제 안토니오와 피에로가 해부학 연구 성과를 판화 <10인의 벌거숭이 남자의 싸움>(1470?)과 유채화 <성(聖) 세바스티안>(1475)에서 겨우 실증하고 있다. 이들의 과장된 근육활동은 뒤의 화가 뒤러 등에도 영향을 끼쳤다.

북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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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탈리아의 파도바와 베로나는 계속하여 베네치아에게 정복당하여 신문화와 연결이 되지만 처음에는 오히려 위의 두 도시가 능동적이었다. 총독 저택을 장식한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뒤를 이어서 피사넬로는 국제적인 고딕 양식을 베네치아에 가지고 가서, 우아한 성모자(聖母子), 공상적인 의상, 우화동물 등 장식 문양적인 표현이 북이탈리아에 퍼졌다. 그러나 마졸리노와 같은 화가가 베네치아에 체재하여 신경향의 양식도 전했던 것이다. 필리포 리피, 우첼로, 카스타뇨 등 피렌체의 화가들은 북이탈리아에서 한때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조토가 파도바의 아레나 예배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렸고(1306), 도나텔로가 그곳에 10년간(1443∼53) 체재하여 산토의 주제단(主祭壇)과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騎馬像)>을 제작한 일은 마사초에 이어서 초기 르네상스의 중요한 화가인 만테냐에게 적잖은 자극이 되었다.

만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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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a Mantegna (1431∼1506)

초기 르네상스의 예술가에 있어서 두 과제, 즉 원근법으로 자연을 질서있게 배열하고, 역사 연구에 의하여 문화를 구체화한다는 것은 중요한 책무였던 것이다. 전자는 공간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이고 후자는 고고학적으로 충실히 그 구도 속에 고대를 재현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만테냐는 그것을 가장 훌륭하게 구체화하였다. 파도바에서 처음 스콸치오네에에게 사사하고 그의 양자가 되어 1450년에는 일류 화가에 버금갈 만한 조숙한 천재였다.

초기의 작품에서는 고대적인 테마와 고대 건축의 폐허, 고대 조각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다. 1464년의 제단화(祭壇畵) 일부 <그리스도의 할례>(우피치)에서는 배후 건물의 세세한 부분, 대리석의 석리(石理), 부조(浮彫)·널빤지·소용돌이무늬까지 소홀히 다루지 않았고, 인물의 의상도 상세하게 그렸다. 1944년 폭격에 파괴된 파도바의 에레미타니 성당의 프레스코화 <형장(刑場)에 끌려 가는 성 야곱>(1455)은 중풍환자를 고치는 야곱의 기적 장면을 표현하고 있는데, 개선문과 로마병사의 군장(軍裝)에서 고대에 대한 그의 태도를 알 수 있다. 앙시적(仰視的) 원근법에 비상한 특기가 있었고, 인물에는 마사초 이상으로 조상적(彫像的)·기념비적이다. 기적을 지켜보는 군중의 공간 처리도 대단히 훌륭하다. 그의 만년작인 <돌아가신 그리스도>(1501?,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은 발바닥으로부터 본다고 하는 이상한 구상이기는 하지만 단축법(短縮法)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그의 색채는 싸늘하게 말라 버려 생기가 부족하고 철선(鐵線)과 같이 강한 윤곽선을 가진 소묘(素描)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카를로 크리벨리 등도 이 영향을 받고 있다).

그는 또 이탈리아 최초의 판화가이며 또한 뛰어난 한 사람이다. 그의 판화는 이탈리아에 퍼져 뒤러는 그의 판화로 이탈리아의 예술에 관해 알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베네치아의 화가인 야코포 벨리니의 딸 니콜로시아와 결혼하여 그의 처남인 조반니 벨리니와 더불어 베네치아파(派)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야코포 벨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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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po Bellini (1400?∼1470)

젠틸레다 파브리아노의 제자로 그의 맏아들은 스승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15세기 중엽 북이탈리아의 거장이었으며 현존하는 그의 두 권의 스케치북(대영박물관·루브르)이 그의 아들과 만테냐에게 이용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젠틸레 벨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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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tile Bellini(1429∼1507)

야코포 벨리니의 맏아들이다. 마호메트 2세와 그 신하들의 초상을 그리기 위하여 콘스탄티노플에 가서(1479∼81)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는 군상 처리를 썩 잘하여 <산 로렌초교(橋)를 건너는 참다운 십자가의 행렬>(1500)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회화에 있어서 연대의 기록자였으며, 번영의 항구 베네치아의 풍속을 그렸다. 그의 윤곽선은 만테냐의 것처럼 딱딱하고 거친 것이 아니고 색채도 따뜻하고 밝다.

젠틸레의 제자 카르파초(1455?∼1525)의 대표작인 <성우르술라 이야기>(1490∼1515)에는 베네치아의 당대 풍속이 성녀의 전설 중에 나타나고 있다.

조반니 벨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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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Bellini (1430?∼1516)

젠틸레의 동생. <사크라 콘베르사치오네(성스러운 담화) 도(圖)>라고 불리는 구도의 작품을 많이 그렸다. 대부분은 중앙반원(中央半圓)의 천장 아래, 등이 높은 의자에 한 단 더 높이 성모자(아기는 거의 나체)가 앉고, 의자의 맨 아래의 단에 앉은 연주하는 천사(1∼3명), 그리고 그 좌우에 시대와 지방을 달리하는 여러 성인이 대칭으로 늘어서 있다. 간소하고 넓은 공간에 온화한 양광(陽光)이 전체를 통괄하여 중심적 주제에 모여 있다. 부드러운 분위기의 효과나 관능적인 인물은 틀림없이 명쾌한 베네치아의 산물이라 생각된다.

15세기말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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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란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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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enico Ghirlandajo(1449∼1494)

그는 피렌체의 생활과 풍속을 웅변으로 설명하였다. 그곳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내에 그린 성모전(聖母傳) 연작의 일부인 <성모 마리아의 탄생>(1486∼90)의 장면은 명확히 당시의 귀인(貴人)의 산실(産室)을 찾아 보는 귀부인의 일행을 묘사하고 있다. 배경의 프리즈(frieze=띠 모양으로 장식된 소벽)와 네모기둥에는 도나텔로의 영향이 역력하다. 그는 당시 후고 반 데어 구스의 <포르티나리의 제단화(祭壇畵)>(1475년)의 플랑드르적인 사실주의에 접하여 세부 묘사를 즐기는 성향에 자극을 받았다. <최후의 만찬>(1480)은 피렌체의 산 마르코에 그린 것인데 우연적인 요소가 많이 그려져 있다. 배신자 유다는 식탁의 반대쪽에 등을 보이게 그리는 전통적 구도이다. 그의 의도는 오히려 이 구도보다도 현실적인 세부를 표현하는 것에 있다. 벽에 붙은 꽃병, 새가 나는 수도원의 뜰 등과 같은 것이다. 사도들은 지루한 연회장의 손님처럼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구세주의 말을 이제 마이동풍(馬耳東風) 격으로 듣고 있다.

시뇨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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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a Signorelli (1441∼1523)

프란체스카의 제자로, 폴라이우올로 형제와 페루지노 등의 영향을 받아 활동하는 인체의 과장된 근육을 표현하기 위하여 나체 남성상을 많이 그렸고, 해부에 의하여 골격 구조, 다리와 인대(靭帶)의 상호작용을 연구하였다. 그가 그린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벽화 연작(連作)에는, 중세의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표현에 비교하여 박력이 넘쳐 흐르고 있다.

보티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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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ro Botticelli (1445∼1510)

그는 필리포 리피의 제자인데 폴라이우올로와 베로키오의 영향을 받아, 풍경과 육체의 미 등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것보다도 정신적이고 지성적인 것, 그리고 형이하학적인 물질보다도 사상과 감정의 표현에 심히 끌린 것 같다. <비너스의 탄생>(1485년)에는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부자연한 것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다와 기슭의 선은 중세의 전통에서 보는 V자형의 무늬와 날카로운 지그재그형이 되어 있다. 비너스는 프락시텔레스의 헬레니즘기(期)의 모양에 암시를 받은 얌전하고 수줍은 모습으로 서 있다. 그녀의 긴 머리는 가느다란 철사와 같고 수심에 찬 표정을 가지고 강변에 밀려서 있다. 여기에는 당시의 고대 신화에의 동경이 있다.

그의 작품은 대단히 개성적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영향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봄>(1478?), <비너스의 탄생>(1485년), <아펠레스의 중상>(1494?), <수태 고지(受胎告知)>(1495?), <신비스런 탄생>(1500?)으로 나가는 그의 양식은, 팽팽한 신경질적 철선(鐵線) 묘사에 중점을 두어 분위기 묘사는 차차 무시되고 이윽고 단테의 <신곡> 삽화가 그려졌다(1492∼97). 그는 1494년의 사보나롤라에 의한 피렌체의 종교개혁에 깊은 감명을 받고, 허영의 소각(燒却)에 의해 초기에 제작한 관능적이고 이교도적인 작품을 많이 소각하여 전통적 종교화로 돌아갔다.

코지모 로셀리의 제자 피에로 디 코지모(1462∼1521)는 그와 같이 개성적이었으며 이교적 신화를 다루었고, 더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일상적 현실의 연장으로서 그것을 그렸다.

페루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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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ugino (1445?∼1523)

1481년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로셀리 등과 함께 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를 제작한 한 사람으로, 성기(盛期) 르네상스를 이끌어 나간 화가이며, 움브리아 지방 출신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린 <교회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는 호평을 받아, 피렌체와 페르지아에 그의 화실을 가지고 1493∼1497년 사이에 그의 감미로운 성모자상의 연작을 이탈리아 각지로 보냈다. 1500년경에는 로마의 은행가 아고스티노키지에 의하여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라파엘로는 이 무렵 페루지노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1495년에 제작한 <피에타>(피렌체, 피티)는 조용하고 한적한 움브리아 지방의 풍경을 무대로 관상(觀想)과 정감에 넘친 비극이 담겨져 있다. 각 인물의 두부와 신체는 산비탈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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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da Vinci (1452∼1519)피렌체의 공증인 서자로 태어났으며, 조각·금공·회화의 아틀리에를 차려 놓고 있던 베로키오에게서 배웠다. <그리스도의 세례> 그림 가운데 좌단의 천사가 실로 빼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스승이 붓을 버렸다고 하는 일화는 이 화실에 있었던 무렵의 일이었다. 사실 베로키오는 그 후 조각에 전념했다. 1475∼1481년 피렌체에서 독립적인 자기 아틀리에를 가지고 1499년까지 밀라노의 로도비코 스포르차를 위하여 일하였고, 그 후에는 피렌체(1500∼1506), 밀라노(1506∼1513), 로마(1513∼1515), 프랑스의 앙부아즈(1513∼1519)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작품은 극히 적고 실제로는 건축에 관계했으나 남아 있는 건축물은 한 점도 없으며, 조각 역시 그러하다. 다만 회화는 10여 점이 있는데 그 중 몇 점은 미완성이다.

초기의 <삼왕예배(三王禮拜)>(1481?)는 작은 화면에 약 60명의 인물을 담고 있으나, 그는 주요 인물 즉 성모자와 예배하는 3왕을 강조하여 다른 순례자들의 모습은 얼굴과 손으로 암시한 데 불과하였다. 그것이 양단(兩端)이 조상적(彫像的) 인물 안에서 완전한 삼각형 구도에 담겨져서 배후의 떠들썩한 군중과 대조적으로 엄숙한 예배도를 만들고 있다. 그가 즐겨 그렸던 말(馬)의 묘사가 원경(遠景)으로 보인다. 베로키오가 베네치아시(市)의 청에 응하여 <콜레오니 장군 기마상(騎馬像)>을 제작하였을 때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여기에 관계를 하였음이 틀림없다. 인체는 물론이고 말의 해부에도 관심을 가져 뛰어난 소묘가 남아 있다. 그는 엄밀한 계획을 세워서 실험하고 분석·종합하여 회화의 영역에 과학을 도입하였다.

그는 그 당시 위대한 예술가이자 만능인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그의 사상과 지식의 중요성을 거의 인정받지 못한 것은 이들 실험의 결과와 사색의 성과를 기록한 수기가 늦게까지 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이한 왼손잡이의 서법(書法=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갔기 때문에 거울에 비추어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과 그의 의견이 이교적이라고 비판을 받을 위험이 발표의 기회를 늦추었다고 생각된다.<최후의 만찬>

Ceacolo (1495∼1497)

그의 과학적 연구가 회화에 응용된 이 그림은 석고에 유채(油彩)로 그렸기 때문에 그의 생존중에 파손되었다. 원형의 미(美)는 성 필리포 등의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소묘(素描)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초기 르네상스의 양식을 개혁하였느냐 하는 것은 카스타뇨와 기를란다요의 같은 제목의 벽화와 비교하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간결하게 그 중심 과제에 육박하였고 또한 극적인 것이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에 그려진 이 만찬의 그림은 기묘한 현실감을 가지고 있다. 이 장면에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한복음 13장 21절)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표시하여 거기에 심한 동요가 일어난다.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 자고 있던 요한이, 레오나르도의 화면에서는 성급하게 그리스도에게 다그쳐 묻는 베드로 쪽을 머리를 기울여 그것을 듣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같은 자리에서 고립되어 있지 않는 유다는 앞으로 몸을 구부려, 머리는 다른 사도들보다 낮으며 그 표정도 어둡고 애매하다. 그리스도는 흥분한 주위에 휩싸이지도 않고 대오(大悟)한 사람처럼 평온하다. 열두 사람들의 제자들은 세 사람씩 네 패로 갈라져서 그의 몸짓과 동작에 의하여 서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구도나 소묘 같은 기술적 문제뿐만 아니고, 그가 인간의 행동과 정신적 반응에 보여 준 깊은 통찰력은 그의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화면의 초점은 원근법에 따라서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머리 부분에 맞추어 그가 시각상의 중심점을 차지한다. 제자들은 전술한 네 패로 정리되어 전화면이 완전히 육체적·정신적 통일체(統一體)를 이룩한다. 인물은 전형인(典型人)의 표현이며 평소 그가 연구한 소묘의 무수한 초상에서 추상하 여 보편화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최후의 만찬>은 종교적 고백이 아니고 오히려 당시의 과학적 심리 관찰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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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na Lisa(1503-1505)

그녀는 피렌체 시민인 프란체스코 데르 조콘다의 아내 엘리자베타 부인이었는데, 당시 사랑하던 자식을 잃고 레오나르도의 모델로 앉아 있을 동안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여성이다. 종래의 초상화는 소위 그려진 공문서로 사실적 묘사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델의 신분과 직업과 성격을 알려주는 부속품과 장식품은 그리지 않았다. 양손(얼굴에 대하여 장식의 역할을 한다)을 그냥 그대로 보이는 반신상인데, 눈이나, 입가에 감도는 끊일듯 말듯한 미소로 친밀감을 나타내는 방법은 그 후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스푸마토(sfumato)'라 불리는, 윤곽을 엷게 선염(渲染)하는 기법으로서, 머리나 팔의 연연한 입체감을 보여주며, 육체적·정신적인 실재성을 초상에게 부여하고 있다. 배경으로서도 좌우는 불균형적이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 변화에 따라 높이를 바꾼다. 여기에도 과학적 실험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안료(顔料)는 변색되었고 투명하게 밝은 색상이 없어져서 현실의 화면에는 균열이 생겨 이지러져 있다.

라파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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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zio Raffaello(1483∼1520)

1504년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도착한 전년에 레오나르도의 <안기아리의 전투>와 미켈란젤로의 <카시나의 전투>의 경작(競作)이 제작중이었으므로 젊은 화가들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그는 전자의 박식과 후자의 박력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그의 스승 페루지노의 감미로움과 두 거장의 장점을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하였다. 1508년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로마에 나와 교황청의 어용화가(御用畵家)가 되었다. 카스틸리오네의 <신하론(臣下論)>(1528刊)에는 완벽한 화가라고까지 칭찬을 하고 있다.

초기의 <성모의 결혼>(1504)은 페루지노의 <교회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그보다 훨씬 긴밀한 구도로서 인물은 보다 적고 건물도 간소하여 전경(前景)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바티칸궁의 서명(署名)하는 방에 그린 <아테네 학당>(1509∼11)은 아마도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염두에 두고 화면을 통합시켜, 중앙에는 고대 그리스의 2대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고, 바로 위에 삼중(三重)의 대아치가 꿰뚫려 전개된다. 중앙의 2대 철인과 동일 평면상에 20여 명의 사람이 나란히 서 있고 전경(前景)에는 좌우에 소수인으로 된 두 집단이 있다. 억센 육체와 힘있는 표현력에는 당시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고투(苦鬪)하고 있던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가령 전경(前景)에서 책상에 기대어 팔을 턱에 괴고 있는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예레미야를 복사한 것처럼 재현한 것이다.

라파엘로의 작품 중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성모자상이다. 그 우아하고 감미로운 표현에서 그를 과소 평가하는 경향도 있었으나, 거기에는 단순하게 주제에 영합함이 없이 엄정한 묘사가 있다. 가령 <성 시스티나의 성모자>(1513)는 두 천사가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하여 그림의 하단에 있고, 좌우에 시머트리하게 교황 식스투스 4세와 성녀 바르바라가 배치되어 있다. 시선은 교황의 장포(長袍)에서 성모의 의복을 거쳐 머리 끝에 이르는 흐름을 따라, 여기부터 조용하고 아름답게 굽어 내려져 있는 막(幕)과 성모의 모양을 부풀게 하는 곳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 처지고, 동공(瞳孔)의 방향을 따라 어깨와 다리를 거쳐 하단에 있는 두 천사에 이른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천사들이 올려다보는 눈길을 따라 시선의 운동은 상승한다. 미묘한 형태의 리듬과 반복하여 상승·하강하는 유선(流線)에 따라 그 자체는 정지하고 있는 인물에 일종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음악적 리듬에 의하여 라파엘로는 주제에 알맞은 숭고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어, 그리스로마의 미술을 추모하는 형태인 고전적 조화를 이뤘다. 그는 또한 초상화에도 뛰어나서 <카스틸리오네>(1515), <레오 10세>(1518) 등 당시 휴머니스트와 교황을 모델로 하여 정신과 육체, 외모와 사상의 일치를 초상화에서 해결하고 있다.

미켈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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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onarroti Michelangelo(1475∼1564)

그의 그림 역시 조각에 못지않게 후세에 큰 자극을 주었다. 본의 아니게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의 벽화 장식을 맡아서 거의 혼자 힘으로 일을 수행하였다(1508∼1512). 그것은 천장의 중심부를 직사각형의 아홉 폭으로 나누어 천지 창조에서 홍수에 이르는 인류의 대서사시를 기록한 것이다. <원죄>에서는 천상의 낙원은 황량(荒凉)하지만 아담과 이브는 힘이 넘치는 거인으로 표현되어 있다. 레오나르도가 성서적 주제에 정신을 부여하려고 한 것과 같이, 미켈란젤로는 고대의 진부한 내용에 신선한 생명을 부여하였다. 마사초와 시뇨렐리의 벽화에서 느낀 극적인 박력에 자극을 받아, 그리고 인체해부로써 얻은 지식에 의하여 한층 더 표현력이 뛰어난 것이 되었다. <암흑에서 빛을 나누는 천부(天父)>는 미켈란젤로만이 가능한 초인적인 관념을 초인적인 존재가 구체화하고 있다. 암흑의 혼돈에서 신은 우주적인 것을 창조한다. 이들 아홉 개의 중요한 패널은 몰딩(moulding)에 의해 지탱이 되어 건축적·조각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패널의 네 구석에는 대(臺)가 있어 나체의 인물이 여러 가지 자세로 앉아 있다. 표면상으로 그들 상은 두 인물 사이의 원형 장식을 둘러싼 무거운 화환(花環)의 끈을 받드는 역할을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패널 내의 인물에 따라 일종의 무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위를 둘러싸는 인물 가운데 우울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예언자 예레미야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초상이라고 한다. 이것과 대조적인 것은 델포이의 여예언자(女豫言者)로 그는 예언의 두루마리를 손에 잡고, 부르는 소리의 방향으로 활발하게 돌아다보고 있다. 예레미야에서 부정된 생명에의 의욕이 여기에서 긍정되고 있다. 부대적 배경과 세부(細部)는 전혀 생략되어 있거나 한쪽 구석으로 밀려져서, 오로지 초자연적 인체의 표현에 힘이 쏠려 있다. 레오나르도나 라파엘로의 서정적인 감미로움은 강건하고 영웅적인 헤라클레스와 같은 거인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1536∼41), 그는 같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정면 제단(祭壇)에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그의 정신적 고민이 화면을 지배하여 미(美)라든가 완벽이라는 형용에 의한 판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현세적이고 감각적·육체적인 것 모두가 혼란 속에 몰입하였으며, 인상(人像)이 웅성거리는 공간은 비현실적이고 통일된 것은 하나도 없다. 르네상스 회화의 원칙은 분해되고 파괴되어 있다.

원근법이나 단축법은 무시되어 위쪽의 인물은 아랫 부분에 비하여 한층 더 과장되어 있다. 중앙의 그리스도는 고전적 영웅상이지만 그 분노한 모습은 미를 초월하여 격렬한 힘을 느끼게 한다. 이 벽화에 내려진 비난은 16세기 중엽의 반종교개혁 운동과 관련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후의 벽화 <성 바울의 개종>(이 화제는 반종교개혁측의 화가에 의하여 가끔 그려졌다)과 <성 베드로의 순교>(1542∼50)는 파울루스 3세를 위하여 파오리나 예배당에 그려졌으나 그 비합리·불안정, 그리고 긴장한 화면은 명백하게 마니에리슴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베네치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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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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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rgione (1478∼1510)

그는 조반지 벨리니 이래 색채를 구사하여 특이한 화풍을 세운 베네치아파(派)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요절한 그에 관하여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수수께끼에 싸인 <태풍>(1505?)은 폐허가 된 어느 조용한 촌락을 배경으로 하여, 바른쪽 잔디 위에서 젖을 물린 나체의 부인이 앉아 있고 왼쪽 끝에 젊은 병사가 서 있다. 때마침 구름은 낮게 깔려 있으며 번개마저 번쩍인다. 이것은 플리니우스가 말한 것처럼 페아레스(그리스의 화가)는 어느 누구든 그릴 수 없는 것 즉 태풍을 그렸다고 하는, 고대의 기록에 대한 도전이라 여겨진다. 그의 <잠자는 비너스>는 밝은 광채 아래 풍만한 미를 드러내어 놓고, 그리스의 조각가도 미치지 못하는 관능미를 현실화하고 있다. 1508년에 그리기 시작한 이 그림은 그의 죽음으로 미완성인 채 남겨졌지만 그 풍경은 그의 시정을 계승한 티치아노의 붓으로 완성되었다.

티치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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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celli Tiziano(1447∼1576)

베네치아파(派) 최고의 화가라고 칭송받는 그는 처음엔 젠틸레, 이어서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가 되어 동문(同門)인 조르조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세바스티아노가 로마로 떠나고 스승인 조반니가 죽은 뒤에 그는 베네치아 화단을 지배하게 되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는 조르조네의 평온한 정원의 정서를 베네치아 시민의 실내로 바꾸어, 한층 더 화려한 색채의 음악적 표현을 더하고 있다. 프레스코화에 맞지 않는 항구인 베네치아에서는 비잔티움의 광채육리(光彩陸離)한 모자이크가 애호되었는데, 이 시대에는 북방에서 전래한 유채화법이 베네치아에서 채용되어 회화사상 일대 전기(轉機)를 가져오게 하였다. <성모의 승천(昇天)>은 티치아노가 조르조네의 마력으로부터 해방될 무렵의 작품이었다(1518). 극적 박력이 충만한 이 작품은 조르조네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표현했고, 라파엘로의 <성 시스티나의 성모자>의의 숭고한 정밀(靜謐)은 장대한 야외극으로 변해 갔다.

1533년 카를로 5세로부터 귀족으로 봉하여져 궁정화가가 된 그는 황제와 교황을 비롯하여 많은 고관과 상급 승직자 및 지식인의 초상을 그렸다. 그의 명성은 오히려 이들 초상화에서 얻은 것이다. <젊은 영국인>(1540?)이라고 불리는 남자상의 인물은 신비적으로 숨을 쉬는 듯하며 앞을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만년의 걸작 <가시관(冠)>(1570)은 어두컴컴한 화면에 이상한 빛이 비쳐서 비극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구도상의 불안정과 긴장이 마니에리슴의 반영을 시사하고 있다.

코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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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reggio (1489?∼1534)

그는 대부분 파르마에서 제작하였으며, 레오나르도나 만테냐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전자로부터 유화(柔和)한 관능미를, 후자로부터는 이상한 각도로부터의 원근법을 계승하였다. <성야(聖夜)>에는 '개구리 스튜(stew) 요리'라고 악평된 천사의 무리가 좌상 화면에 떠다고, 목동은 양치는 긴 막대기를 가지고 그곳에 달려간다. 볼품없고 컴컴한 방에 있는 행복한 성모자의 얼굴에는 광명이 넘쳐 흐른다. 두 젊은 조산원 중의 한 사람은 이 빛에 놀라고 다른 한 사람은 목동을 기쁜 눈길로 쳐다본다. 밖에는 당나귀를 돌보고 있는 요셉이 보인다. 좌우의 균형은 색채와 명암으로 잡혀져 있다. 이들 천사의 무리에 의하여 암시된 천상의 열린 문은 파르마의 산 지오반니 에반젤리스타 교회의 원천장(圓天障)의 회화(1524∼30)에서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무한한 공간이 열려 스리스도는 천국을 향하여 승천해 간다. 이 환상은 다음 대의 바로크의 장식 화가들에게 계승된다.

피렌체파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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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派-繼承

1520년 라파엘로가 전년에 죽은 레오나르도의 뒤를 따라 타계함으로써 드디어 성기(盛期) 르네상스라고 하는 짧은 황금시대는 종막을 고한다. 피렌체의 여광(餘光)은 프라 바르톨로메오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가 계승했다. 전자의 대표작 <피에타>(1510?)는 정적의 땅거미 속에 연출되는 애수(哀愁)의 무언극이며 경건한 도메니코 회(會) 수도화가의 기원이 스며 있다. 후자는 <하르파에스의 성모>(1517)와 <세례자 요한>(1515?) 등의 전아(典雅)하고 우미한 종교화를 제작하여 색채화가로서 알려졌다.

마니에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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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토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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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po Pontormo (1494∼1556)

일찍이 고아가 되어 피렌체로 나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에게 배웠다. 초기 작품인 <이집트의 요셉>(1515)에서는 근경(近景)과 원경의 공간 처리가 명료하지 않고, 특히 중세적 요소를 몇 군데서 볼 수 있다. 좌전방에서 요셉은 이집트의 파라오(王)에게 청원을 한다. 우전방에서 요셉은 파라오의 허락을 받아 아이들과 함께 계단을 올라가 죽음의 침상에 있는 부친 야곱과 만난다. 건축에 관해서는 야곱의 침소는 무대면(舞臺面)과 같은 곳에 있고, 계단 위 여성 나상 아래의 지주(支柱)는 계단에 붙여져 있는 데에 불과하다. 계단은 나선형(螺旋形)인데 마찬가지로 지주가 없다. 야곱의 침상 바로 아래에 있는 아동상(가느다란 둥근기둥 위에 있다)은 살색으로 채색되어, 다른 두 조상(彫像)과 달리 현실의 육체를 가진 듯이 보인다. 화면에 초점이 없고 중앙에 원근법을 무시한 두 집단이 있으며, 그 뒤쪽의 무리는 커다란 돌을 굴리고 있다. 후경의 건물은 뒤러의 판화 <방탕한 자식>(1498)에서 본을 받은 것이다.

<십자가 강림(降臨)>(1526∼28)에는 인상(人像)의 중첩이 십자가를 대신한다. 화면은 이차원적인데 중앙의 빈 곳에 유선(有線)이 상승·하강하고 있다. 불안정감은 동부(胴部)의 극단적인 신장(伸長)으로 강조되었고, 또 청색과 핑크색의 밝은 배합이 인물상을 한층 우미하게 한다.

그는 내향적이고 염세주의자였는데, 1년 반(1555∼56)에 걸친 일기에서 만년의 산 로렌초의 프레스코화의 제작 상황을 전해주어 흥미가 깊다. 그보다 적극적인 성격이었으나 뜻밖의 일로 자살했다고 하는 로소도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아틀리에에서 배웠다.

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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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Rosso Fiorentino (1496∼1540)

1513∼1523년 피렌체에서 활약하다가 로마에 갔으나, 1527년 동시(同市)의 겁략(劫略)을 피하여 북이탈리아를 편력하고, 1530년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와 1세를 섬겨 프리마티치오와 폰틴블로우의 장식을 담당하였다. 그의 <십자가 강림>(1521)은 복잡한 격자형(格子型)의 구도로서 예각적(銳角的)인 겹옷과 비현실적인 빛과 불안과 긴장을 지니고 있다. <제트로의 처녀들을 구하는 모세>(1523)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생각하게 하는 조소적(彫塑的)인 인체가 압축된

공간에 마주 엉켜, 밝으나 냉랭한 색조가 화면을 지배하고 있으며 일종의 인체에 의한 장식 무늬의 느낌이 있다.

브론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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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nolo Bronzino (1503∼1572)

폰토르모의 제자였던 그는 토스카나의 대공 코시모 1세(메디치家 출신)를 섬겨 초상화가로 알려졌다. 코시모의 처 <엘레오노라 다트레도>(1545?)는 빈틈없이 고귀한, 그러나 차가운 귀족계급의 전형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밝으나 금속적인 냉정함이 있다. <비너스와 큐피드>(1546?)는 마니에리슴의 일면인 관능적인 묘사를 볼 수 있다.

파르미지아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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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migianino (1503∼1540)

마니에리슴 회화는 그에 의하여 정점에 달한다. 그는 고국 파르마에서 코레지오의 작품에 접하고 로마 체재중(1524∼27)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매우 우미·섬세한 여성미를 묘사하였다. 그가 처음 로마에 나오기 직전에 그린 <자화상>(1523)은 볼록렌즈에 비친 상을 그려, 마치 오늘날의 어안(魚眼)렌즈와 같은 효과를 가져서 특이한 작품이 되고 있다. 대표작은 <목이 긴 성모>(1534?)로서 화면 전체에 걸쳐 불합리한 요소가 산재한다. 성모는 한층 더 크게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왼편에는 다섯 천사가 서로 모여 있고, 제법 큰 나체의 그리스도가 성모의 무릎에서 떨어질 듯이 보인다. 성모의 옷은 이유도 없이 오른편으로 퍼져 성모는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 분명치 않다. 또 우측에는 거대한 둥근기둥 두 개가 나란히 세워졌고, 그 앞에 작은 예언자가 두루마리를 풀어내린 채 서 있다. 전·중 후경에 논리적 관계가 없고, 성모자의 일단(一團)이 실내에 있는지 실외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성모의 발끝이 화면에서 나와 있다. 게다가 인체는 마치 좌단 천사의 암포라형(型)의 단지가 상징하고 있는 듯한 형태를 갖는다. 초상화 <안타에>(1540?)는 <목이 긴 성모>에 있던 한 소녀천사가 성장한 모습이라 여겨지는데, 그 화사한 손가락과 크게 뜬 눈과 스커트의 주름에 스민 신경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후년 연금술에 빠져 그의 죽음을 재촉하였다.

베네치아의 마니에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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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는, 이탈리아 각지를 갑작스럽게 휩쓴 마니에리슴이라고 하는 질병을 지연시키고 그 충격을 완화시킨 것은 티치아노의 장수(長壽)였다. 교회의 개혁운동은 베네치아에서 1530년대 말에 일어나 그 전후에 티치아노가 마니에리슴적인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1543?)와 10년 전에 그린 <성모 마리아의 참배>를 비교해 보면 그 동안의 추이가 명백해진다.

틴토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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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po Tintoretto (1518∼1594)

티치아노의 색채와 미켈란젤로의 소묘를 자기 것으로 소화할 것을 모토로 한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에 있어서 마니에리슴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다. 대담한 단축법, 당돌한 후퇴, 대각선과 돋보이게 해 주는 역할의 다용(多用)은 틴토레토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이다. 그의 화면에는 항상 중심이 없고 인물은 대부분 등을 돌렸으며, 그는 <그리스도의 책형>(1568)을 측면에서 그린 최초의 화가이다. <성마르코 유체의 발견>(1562)은 일견 혼란한 구도로 보인다.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의 사교(司敎)로 그곳 카타콤베에 매장되었는데, 후에 신도가 그곳을 찾았을 때 성인이 출현하여 그의 유체를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 기적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오른편 전경의 동적인 집단은 사실에 있어서는 마르코에 의하여 악령(惡靈)을 입에서 토하게 하여 구제되는 병자를 표현한 것이다. 왼편 전경에서 시체에 절을 하는 노인은 그림을 주문한 신심회(信心會)의 대표이다. 명암의 현저한 대조, 기묘한 동작, 일방적으로 강제된 깊이 들어 가는 운동은 르네상스의 조화를 무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림은 신비한 사건을 인상지운 점으로 성공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1592∼94)에서는 식탁을 화면에 대하여 경사지게 놓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13명의 배치는 극단적인 원근법으로 그려지고, 유다는 또다시 사도들과 동렬에 두지 않고 혼자 등을 돌려 마주보고 있다. 이 장면에는 심부름꾼과 기타 향연에 필요한 요소를 덧붙여 그려 넣었고, 더욱이 천장에는 <마르코 유체의 발견>과 같이 영적인 천사의 무리가 떠돌고 있다. 광원(光源)은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리스도와 왼편 램프와의 두가지가 있으며 그 빛이 실내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는 유다의 배신이라고 하는 인간극보다도 성찬의 의식이 더 중시되고 있는 것 같다. 주목할 것은 오른편 앞쪽에서, 등을 돌려 무릎을 꿇는 여자 쪽으로 돌아보는, 조심스럽게 걷는 남자인데 이것은 마니에리슴적인 표현이다.마니에리슴의 예술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더 인간의 권위를 회복하여 그 위대함을 구가하려고 하는 바로크가 뒤를 계속한다. 베로네제는 이 화풍(畵風)을 일찍이 밝히고 있다.

베로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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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olo Veronese (1528∼1588)

베로나에서 태어나 1553년 베네치아에 가서 티치아노의 작품을 익혔고, 1560년에는 로마에 가서 고대 로마의 장식화(裝飾畵)에 이끌린 그는 <카나의 결혼>(1563), <레비가(家)의 향연>(1573)과 같은 작품에 당시의 호화로운 베네치아의 연회를 묘사하였다. 그가 시대 역행적이었던 것은 정신적 내용보다도 미를 평가의 기준으로 하는 점이며, 당시의 엄격한 반(反)종교개혁 운동의 시대에 있어서 성기(盛期) 르네상스의 장중·화려한 양식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구도는 화면에 평행하게 전개되어 등장 인물은 우아하고 당당하며 색채는 밝게 빛나고 있으나 틴토레토의 신비적인 조명은 없다. 배경의 둥근기둥과 조각이 붙은 삼각소실(三角小室)이 있는 아치, 또 원경의 건물은 베네치아에 있는 산소비노와 산미켈리, 팔라디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다. 총독 관저의 대회의장 천장 중앙에 그려진 만년의 <베네치아의 승리>는 동시(同市)의 수호여신이 구름 위에 있고, 아래의 발코니에는 신사 숙녀가 운집하여 있으며, 최하층에는 두 사람의 마상(馬上)의 기사가 떡 버티고 서 있어, 현란하고 호화로운 장식무늬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