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에게해와 그리스·로마 미술/에게해의 미술
에게해의 예술
[편집]-海-藝術
에게해(Aegae海)의 키클라데스 군도(群島)의 하나로 테라라고 하는 섬이 있다. 기원전 2000년 무렵이라고 추측되는 오랜 옛날, 이 섬에 큰 분화(噴火)가 일어났다. 그때 매몰된 도시가 1866년부터 7년에 걸쳐 프랑스인에 의하여 발굴되었으며, 용암 속에서 장식 무늬가 있는 도자기의 조각도 발견되었다. 2년 후, 후기 청동기시대(이른바 미케네 시대)의 분묘가 로도스섬의 이말리수스에서 새로 발견되어, 특색 있는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이어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 발굴 후인 1876년에 미케네의 발굴을 시도하여, 이름 높은 사자문(獅子門)의 남쪽에 있는 왕족의 분묘에서 대량의 금은과 기타 세공품을 발견했다. 이리하여, 그리스 태고문화(太古文化)의 탐구가 점차 활기를 띠고 진행되었다. 1900년, 영국인 아더 에번스는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유적 발굴에 손을 댔다. 그래서 그리스 본토 및 그 밖의 여러 섬들의 소위 '미케네 문명'보다도 더 오랜, 한층 세련된 문화를 거기서 발견하였고, 이것이 선사(先史) 에게 세계의 구명(究明)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에번스는 크노소스 출토의 유품, 특히 항아리의 형태나 장식 양식의 변화에서 크레타 청동기 시대의 연대 구분법을 안출(案出)하고, 또 크레타 문명에 '미노스 문명'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는 전설상 크레타에 군림했다고 하는 미노스왕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그래서 미노스 문명을 초기·중기 및 후기의 3기로 대별하고, 다시 이 각 시기를 제1, 제2, 제3의 3기로 나누었다. 1918년에는 그리스 본토와 에게 제도(諸島)에 대해서, 각각 헬라딕 시대 및 키클라데스 시대라는 명칭의 연대 구분법이 제안되었다. 이들 3개의 구분법은 후기의 국면(局面)에 있어서도 거의 같이 쓰이고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처음(기원전 1550년경)부터 에게해 전역의 물질문명은 크거나 작거나 같은 유형의 것이기 때문이다. 후기 헬라딕 시대와 후기 키클라데스 시대는, 그 시대에 있어서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미케네의 이름을 따서 미케네 시대라고 불리고 있다.
크레타 문명의 미술
[편집]- 文明-美術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3000년의 오랜 옛날로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2000년경에는 가치나 정도에 있어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고도의 문화를 전개하였다. 이 문명은 다른 먼 곳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고 크레타섬에서 싹이 터서 여기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미노스왕은 그리스 대륙의 여러 지역에도 군림하고, 다시 시리아까지도 정복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아마도 가공적(架空的)인 이야기일 것이다. 때때로 단기적(短期的)으로 침략을 했거나 남(南)키클라데스 제도를 점령했다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전략을 암시하는 근거는 없다. 미노스왕의 통치는 기원전 1700년과 기원전 1400년 사이의 한 시기라고 생각되는데, 이 미노스왕이 크노소스에서 나와 크레타 전토를 지배했다고 하는 것도 실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 자력(自力)으로 크레타의 다른 장소를 지배한 다른 군주도 있었다고 추측된다. 크레타인이 전쟁보다도 오히려 다른 민족과의 무역에 주력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다. 크레타 문명은 중기(中期) 미노스 시대(기원전 2200∼1700년경)에 제1의 성기(盛期)에 달했다. 이 시대는 이집트의 중왕국(中王國) 시대에 해당된다. 크노소스나 파이스토스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대이다. 계속되는 후기 미노스 시대의 제1기(기원전 1700∼1500) 내지 제2기(기원전 1500∼1400)에는 원숙한 황금시대를 맞는다.
크레타에서는 여성이 지도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예를 들면 희생제물도 여사제(女司祭)가 신에게 바치고, 종교적 숭배도 여신(女神)에게 중점을 두었다. 대지(大地)의 여신 레아, 출생의 여신 엘레우시아 등이 크레타 최대의 신이었다. 크레타의 통치가 어떠한 형태로 행하여 졌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여성에 의하여 규제된 문화가 전쟁이나 정복에 몰두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자는 의복에 무구(武具)를 붙이고 있지 않았다. 요새나 성을 쌓았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 그런 것은 거의 필요가 없었다. 섬은 자연적 경계인 바다에 의하여 수호되었기 때문이다. 크레타의 궁전은 크노소스·파이스토스·하기아 트리아다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으나, 특히 크노소스의 왕궁이 대표적이다. 이 왕궁은 기원전 1700년경 전쟁이나 지진에 의하여 궤멸되었다. 그러나 곧 재건되어, 여기에 크레타 문명의 최성기(最盛期)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크노소스의 궁전은 낮고 가파르지 않은 언덕 위에 있다. 평면도(平面圖)를 보면, 먼저 파격적인 방의 복잡한 배치가 주의를 끈다. 가운데에 장방형의 커다란 뜰이 있고, 거실이나 침실·목욕탕 내지는 신전(神殿) 등, 여러 종류의 방들이 둘러싸고 있다. 방의 배치가 아주 불규칙하여 전체적으로 긴밀한 통일이 결여되어 있다. 숙고(熟考)된 기준에 따라서 설계되었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거대한 미궁(迷宮, Labyrinth)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통풍이나 채광을 위한 고려(考慮)를 비롯하여 완전한 하수(下水)장치 등 위생시설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엿보인다. 그리고 저장실(貯藏室)에는 술·기름·곡물류를 넣는 커다란 항아리가 길게열을 지어 있어, 크레타 왕족의 부유함을 말해 주고 있다. 크노소스의 궁전은 현재로는 옛날의 양식을 기초로 하여 부분적으로 복원(復元)되어 있다. 아름답게 장식된 옥좌(玉座)가 놓인 방의 건축에 있어서, 크레타인은 석재(石材)뿐 아니라 목재도 사용했다. 흥미있는 것은 낮은 주춧돌 위에 고정시켜 세운 나무기둥이, 상부(上部)에서 하부(下部)를 향해 차차 가늘게 되어 있는 점이다.
크레타인은 대리석이나 청동의 큰 조상(彫像)은 만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술의 다른 분야에서 예상 밖으로 볼 만한 예술적 재능을 보여 주고 있다. 벽화를 보면 그들이 특히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서 친숙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좌가 놓인 방의 벽화에서는 기복(起伏) 있는 땅 위에 백합 비슷한 꽃이 피어 있고, 옥좌의 양측에 우아한 형체를 가진 신화·전설상의 동물이 가로누워 있다. 또한 크레타의 벽화에는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나 남녀의 행렬 등을 그린 것도 있다. 남자는 허리가 호리호리하고, 대체로 허리에 띠만을 두르고 있다. 여자는 꼭 끼는 옷을 입었고, 그 스커트에는 이따금 꼰 끈이나 레이스의 장식이 붙어 있다. 크노소스의 궁중 여관(宮中女官)을 그린 벽화에서는, 얼굴이 예쁜 여자들이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값비싼 장신구를 붙이고 있다. 여기서도 크레타 문명의 세련된 일면과 동시에 여자가 차지한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이 엿보인다.
바피오의 잔
[편집]-盞
크레타인의 사치는 금·은·상아·보석을 재료로 한 정교한 제품에 반영되어 있다. 금제(金製)인 이른바 '바피오(Vaphio)의 잔'(그리스 본토의 바피오에서 발견, 아테네 국립미술관 소장)은 단조 세공(鍛造細工)의 우수작이다. 이것은 한쌍의 잔인데 하나는 황소를 포획하는 것을 표현하고, 다른 하나에는 그 사육(飼育)의 목가적인 정경이 묘사되어 있다. 그 밖에 활석(滑石)의 항아리에 수획제(收獲祭)의 행렬이나 전사(戰士)를 나타낸 것도 유명하다.
미케네 문명의 미술
[편집]-文明-美術
기원전 1400년경 크레타 문명에 갑자기 강한 무력의 손이 뻗쳐서, 크노소스의 왕궁을 포함한 에게궁전이 파괴되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온 용감한 민족에 의해서였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발칸 반도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 본토에 있어서는, 이미 기원전 2000년 전후에 선사(先史) 그리스의 원주민과 나란히, 인도-유럽어족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여러 가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더욱이 다음 5세기 사이에 인도-유럽어족의 그리스인이 대량으로 북방에서 남하해 왔다. 그 후, 그리스의 세 종족이 제각기 영토를 지배하게 됐다. 즉 아이올리스인은 테살리아에서 보이오티아까지의 영역, 이오니아인은 아티카와 에우보이아, 코린트 지협(地峽), 또한 후에 아카이아라고 불린 지방, 아카이아인은 아르골리스 및 아마도 라코니아 내지는 네스토르왕의 거성(巨城)이라고 상상되는 필로스를 포함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해안을 지배했다. 호메로스 서사시 속에서는 모든 그리스인이 아카이아인이라 불리고 있다. 그 전설상의 왕은 아가멤논이었다.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아가멤논은 그리스군의 총수(總帥)가 되어 출정했다. 그는 미케네 성주(城主)였다. 이 도시의 언덕이 슐리만에 의하여 발굴된 것이다. 미케네는 선사(先史) 그리스 시대인 기원전 16세기와 기원전 12세기 사이에 그리스 종족이 낳은 문화의 중심으로서 번영했다. 그 문화 전반을 이 도시의 이름을 따서 미케네 문명이라 부른다.
크레타 문명과 달라서 미케네의 경우는 여인에 의해 규제된 문화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전사(戰士)인 남자가 지배적이었다. 죽은 사람의 얼굴에 씌운 엷은 금판(金板)의 <마스크>(미케네의 수갱분묘에서 발굴된 것, 기원전 16세기, 아테네 국립미술관 소장)는 남자다운 전사의 얼굴을 꾸밈없이 잘 묘사한 것이다. 수염이 있는 이 얼굴은, 아직 예술적 숙련을 거치지 않은 조형(造形)의 경직성(硬直性)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 표정에는 의지의 강인성(强靭性), 끈기 내지 결단력이란 것이 반영되고 있다. 이 마스크는 고대의 예술이 대개 그렇듯이 장례(葬禮)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죽은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여 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매장된 죽은 사람의 몸뚱이를 보존하고 그 모습을 영속(永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얼굴을 사실적으로 충실히 나타낸 것은 그 때문이다.
미케네적 특색은 특히 건축에 나타나 있다. 미케네의 궁전은 크레타의 것과 같은 관(館)이 아니고 언덕 위에 쌓아올린 거대한 성(城)인 것이다. 미케네나 티린스의 산성(山城)이 그 대표적인 예다. 미케네에는 '사자문(獅子門)'이라고 불리는 성문이 남아 있다. 그 구조를 보면, 한쌍의 통돌에 문중방(門中枋)을 얹고, 그 위에 두 마리의 사자를 부조(浮彫)한 삼각형의 커다란 석판(石板)이 얹혀 있다. 이 사자문의 안쪽 오른쪽에 있는 다섯 개의 수갱분묘 속에서 슐리만은 무수한 재보(財寶)를 발견하였다.
성 입구에서 차례로 통로를 더듬어 궁전의 깊숙한 곳에 들어가면, 귀중품의 배치나 구조에 있어서 미케네인은 고유의 풍습을 지키고 있다.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은, 앞뜰을 가진 메가론(megaron)을 채용한 것이다. 확실히 이 메가론은 미케네 문명의 소유자가 인도-유럽 어족임을 말하여 주고 있다. 메가론이란 것은 그리스어로 '넓은 방'이란 뜻이며, 본디는 원시 그리스의 주거(住居)였다. 소위 '남자의 크고 넓은 방'의 평면도는,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장방형으로서 현관 다음에 전실(前室)이 있고, 그 뒤에 커다란 주실(主室)의 있다. 주실 중앙에는 난로가 비치되어 있다.
미케네 궁전은, 이와 같이 거주 건축의 근본 형식에 있어서는, 그리스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여기서도 크레타 미술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건축의 세부(細部)나 내부의 장비(裝備)는 크레타 미술을 모방한 점이 많다. 무인(武人)다운 강건한 왕후들도 차츰 주거(住居)의 쾌적성을 충분히 즐기게끔 되었다. 그들은 기분이 좋은 거실이나 욕탕의 설비를 갖추고, 그들은 넓은 방을 좋아하는 벽화로 장식했다. 따라서 미케네 성(城)의 실내는 크레타의 궁전을 닮은 셈이다. 그런 경우, 회화에 있어서 미케네의 요소와 크레타의 요소가 결합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벽화의 한 예는 티린스의 성을 장식한 프레스코의 단편(斷片)인 <멧돼지 사냥>(아테네 국립미술관 소장)이다. 얼핏 보아 크레타풍이라고 판단되는 동물이 경묘(輕妙)한 필치로 벽면에 그려져 있다. 동체는 날씬하고 선은 쭉쭉 뻗어 있어 생동감(生動感)이 넘친다. 그러나 이 프레스코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얼핏 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크레타 양식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멧돼지에게 덤벼들고 있는 개를 보면 한 마리의 개가 멧돼지 등에 뛰어들어 물어뜯고 있다. 당초 크레타인이 그러한 정경(情景)을 그린 것일까. 크레타 미술에서는 모두가 특수한 의도라는 것을 갖지 않아서 여유가 있고 옹색하지 않는 취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개들이 멧돼지를 유일한 목표로 쫓고 있는 식으로, 그림 전체가 한가지 방향을 취하고 있다. 잘 보면, 묘선(描線)도 씩씩하고 힘이 있다. 배경의 식물조차도 크노소스의 '옥좌가 놓인 방'의 벽화에 그려진 식물처럼 유쾌하고 우미한 것과는 취향을 달리하여 거친 느낌을 준다. 이와같이 미케네 미술은 크레타인의 유화(柔和)하고 미려(美麗)한 예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만은 아니고, 아주 늠름한 것으로 양식화(樣式化)한 것이었다.
미케네 외에 티린스나 오르코메노스 그 밖의 여러 곳에 산재하는 지하묘실 건축도 미케네 문명의 한 특색이다. 이것은 언덕의 경사면이 낮은 곳에서부터 높은 쪽으로 긴 통로를 파내고, 그 막바지에 입구가 있어, 여기서부터 지하의 원추형(円錐形)의 묘실로 통하도록 된 것이다. 이 묘실의 입구는 각별히 아름답게 장식한 형적(形跡)이 있다. 덧붙인다면, 그리스 왕후들의 장례식에서는 개·말 내지 노예까지도 영전(靈前)의 공물(供物)로서 도살하는 풍습이 있었다.
기원전 1400년경 본토 그리스인은 크레타섬을 공략했다. 궁전을 파괴하고 폐허 속에 그들 자신의 성곽(城郭)풍의 커다란 집을 세웠다. 크레타 문명의 발달도 여기서 끊어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과거 수세기 사이에 크레타적인 것과 미케네적인 것이 결합했다면, 설혹 의식적으로 미케네 문명에 상위(上位)가 양도되었다고 해도, 양자(兩者)가 합쳐 온 것을 이제 와서 인위적으로 분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하튼 크레타 문명은 성숙의 극에 달하고 미케네 문명도 또한 기원전 1200년경 새로운 그리스 민족이 북방에서 발칸 반도에 침입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 민족의 부족 중 특히 우수했던 것은 강건한 도리아인이었다. 그들은 원주민인 아이올리스인, 이오니아 내지 아카이아인을 극복하거나 혹은 밀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