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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현 대 미 술/현대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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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디자인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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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에 들어와서 과학기술의 급속한 진보와 기계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은 미술에서도 이러한 새 기계시대의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 가는가 하는 문제가 클로즈업되었다. 그것은 이러한 현실에서 심각한 영향을 받는 미의식(美意識)의 근본적인 문제인 동시에 가장 구체적인, 그리고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걸친 미적 요구에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정당하게 수용하여 근대건축이 주축이 되고 미술의 제 분야를 총합적으로 결집하여 기계와 기계생산을 본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념과 태세를 확립하고자 설립된 것이 바로 독일의 예술실험학교인 바우하우스였다. 여기는 본디 윤리성이 강한 표현주의와 새로운 소재에 대하여 의욕적인 러시아의 구성주의 그리고 바우하우스와 똑같은 총합적인 이념에 입각한 네덜란드의 신조형주의(新造形主義) 등의 조류를 따르는 미술가와 기능성을 중시하는 건축가의 연구지도 아래 목공·금공·도기·직물·인쇄들로 분류된 각 공방(工房)에서 기계 생산의 원형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시작품(試作品)의 개발이 의욕적으로 진척되고 있었다. 이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실험은 독일뿐만 아니고 세계 각국에서 디자인의 근대화의 저류를 이루고 있어서 20세기의 디자인은 바우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고까지 할 정도이다.

독일에서의 이와 같은 동향에 자극을 받아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유럽과 미국에서도 각각 디자인 근대화의 운동이 진전되었는데 거기에는 국민성이나 생산기구의 차이에 의한 지역적인 특색이 인정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덴마크의 가구나 스웨디시 모던으로 알려진 북구의 디자인은 기능성을 중시하는 바우하우스풍(風)의 디자인과는 대조적으로 수공예적인 특색을 기능보다 앞세우려고 하였으며 그 전아하고 섬세한 형태감각은 20세기 디자인에 이채를 띠는 성과가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르 코르뷔지에의 아틀리에에서 배출된 여류(女流)인 샬로트 페리앙은 여성다운 자상한 솜씨로 실내장식이나 가구의 표준화를 추진하여 공업 디자인 근대화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특출한 분야는 그래픽 디자인으로서 특히 카산들과 가르뤼가 그린 포스터류(類)는 명석한 형식감정에 입각하여 있기 때문에 이 분야의 디자인은 타국의 추종을 허락지 않는다.

19세기 말 미술공예운동의 첨단에 있었던 영국은 기계생산의 원칙을 용인하지 않았던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으로 지연되었고, 수공예에 오랫동안 집착하여 있던 이탈리아는 신시대의 디자인에서는 부득이 여러 외국을 추종하게 되었다.

한편 기계문명의 중심지였던 미국은 상업주의의 요청에 따라 각종 디자인의 개발이 진보하여 티그, 헨리 드레폭스, 로위, 게디스 등이 그 선구적인 디자이너였으며 특히 로위는 다방면에 걸쳐 활약하여 미국 디자인계(界)의 개척정신을 상징하고 있다고 하겠다.

1930년대 말부터 미국에는 그로피우스, 브로이어, 모홀리 나기 등 우수한 바우하우스의 지도자도 건너와서 20세기의 디자인을 강력하게 추진할 기반을 만들어 냈다.

바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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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bert Bayer (1900∼1985)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인데 처음에는 린츠와 달므시타트에서 건축을 배웠다. 후에 데사우 시대의 바우하우스에서 수학, 칸딘스키의 지도를 받았다. 졸업 후 1925년부터 1928년까지 그는 바우하우스의 인쇄에 관한 전문 코스의 공방에서 후진을 지도하였다. 이 공방에서 광고에 관한 교과를 처음으로 설치한 것은 그였다.

광고·인쇄에 대해서 그는 합리적·기능적인 수많은 신감각을 제시·제창하였는데, 가령 대문자의 철폐나 원과 직선의 단순한 요소에 의한 '유니버설 타입'의 디자인을 고안한 것은 특히 유명하다.

그는 쉬르레알리슴에 가까운 그림을 그린 화가였기 때문에 그 합리적·기능적인 제작은 단순한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고 예술성을 풍부하게 지닐 수 있었다. 1928년부터는 파리와 베를린에서, 또 1938년 이후에는 미국에서 그래픽 디자인의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브로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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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Breuer (1902∼1981)

헝가리에서 태어나서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하였다. 이어 데사우 시대의 바우하우스에서 교편을 잡아 그로피우스와 협력하여 많은 건축설계를 하였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가구에 관한 전문 코스의 공방을 담당하였는데 그가 뜻한 바는, 가구는 대량생산에 대응할 수 있는 단순한 형태와 다양한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단정하여 공장과 협력하여 조립될 수 있는 유니트 가구의 개발에 있었다. 1925년에 스틸파이프로 만든 의자는 그의 명성을 단번에 유명하게 만든 수작으로서 대량 생산되는 가구에 있어서의 미적인 가능성을 실증한 최초의 작품이라 하겠다.

1937년 독일의 정치정세가 악화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다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설계에 종사하고 있으며,1952년에는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의 설계에 참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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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ill (1908∼

)

그는 스위스의 윈터투르에서 출생하였다. 취리히의 공예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수업하였다. 그는 건축을 중추로 여러 예술을 통합하려던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독자적으로, 가장 전형적으로 구현해서 활약한 예술가였으며 1930년에 건축가가 되어 귀국하고부터 회화·조각·디자인 등 매우 폭넓고 다채롭게 활약하였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 두 선배에 관해서는 가끔 예술론적인 저술까지도 발표하였다.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점은 금속에 의한 다이내믹한 공간구성인데 1935년부터 1953년에 이르는 동안 무한한 다이너미즘을 테마로 하는 일련의 제작을 하였다. 그의 4차원적인 추구는 디자인 분야에도 시사한 바가 크다.

스웨디시 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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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dish Modern

스웨디시 모던은 1920년대부터 1930대에 걸쳐 눈부신 약진을 보인 스웨덴의 공예작품에 대한 호칭이며 후에는 여기에 종사하는 미술공예가들도 스스로 이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본디 스웨덴 디자인협회에서 1915년 '예술가를 산업계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우수한 디자이너를 산업계로 보내는 중개 알선을 해왔고 이에 호응하여 글라스·도자기 등의 회사에 들어간 빌헬름 코게 시몬, 가테, 이드왈트 하르트, 에드윈 오라시 등은 1920년대에 파리와 뉴욕을 비롯하여 스웨덴 국내외에서 작품을 전시하여 '스웨디시 그레이스(스웨덴적 우아)'내지는 스웨디시 모던이란 찬사로 맞이하였다. 1939년 뉴욕의 만국박람회 출품에 즈음하여 이 '스웨디시 모던'을 호칭으로 결정하면서 그 어필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① 스웨디시 모던은 디자인에서의 온건을 목표로 한다. ② 현대의 기술보다 만인이 사용할 수 있는 양질의 일용품을 디자인한다. ③ 자연의 형식과 소재에 대한 충실한 처리를 기한다. ④ 미술가와 생산자가 협력하여 미적으로 건전한 제품을 생산한다.

상기한 어필에도 표시한 바와 같이 스웨디시 모던은 기계생산의 비정함에 따스한 사람의 피를 통하게 한 친밀한 디자인을 만들어 냈다.

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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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Koge (1889∼1960)

스웨덴의 선구적인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처음 화가가 되려고 앙리 마티스에게 사사한 적도 있었으나 뒤에 그래픽 디자인 분야로 옮겨 1910년대 전반은 오직 이 분야에서만 활약하였다. 1915년에는 스웨덴 디자이너 협회가 내건 '예술가를 산업계로'에 따라 구스타프스베루이 도자기회사에 입사하여 스웨디시 모던의 중심적인 디자이너로서 도자기제품에 수많은 우수한 디자인을 만들어 냈다.

그의 작풍은 기능적인 원리에 따르면서도 손작업의 뉘앙스를 담은 유기적인 형체의 미에 특색이 있다. 더욱이 구스타프스베루이 도자기회사에서 코게의 지도를 받은 디자이너로서는 스티그 린드베루이(1916∼)가 있다. 린드베루이는 예술적인 가치를 제일로 내세운 코게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현대 디자인의 유니크한 존재가 되어 있다.

클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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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are Klint (1888∼1954)

덴마크의 우수한 가구디자인을 개척한 디자이너로 알려졌다.

원래 소박한 질감과 전아한 형태를 가진 덴마크의 가구에는 빈의 가구공예가 끼친 영향을 볼 수 있었는데 이와 나란히 클린트는 그러한 가구공예에 디자인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는 처음 화가로 출발하였으나 1920년대에 건축과 디자인 분야로 전환하였다.

그가 디자이너로서 착안한 것은 찬장·책장·책상 등 물품을 넣어 두는 가구인데 그는 수납물(收納物)의 수량과 치수 따위를 신중하게 계산하여 이와 같은 가구의 표준화를 꾀하였다. 1924년 코펜하겐 미술학교에서 가구과(家具科)의 강의를 담당하여 기능주의 이념에 입각한 가구디자인을 지도하였다.

현대에서 눈부신 발전을 한 덴마크 가구는 오히려 반기능주의적인 친밀감이 넘치는 디자인이 특색으로 되어 있으나, 그 근본에는 클린트가 지도한 바와 같은 근대적인 기능을 고려한 구조 이념이 숨겨져 있다.

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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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o Alvar Henrik Aalto (1898∼1976)

핀란드의 선구적인 건축가이면서 가구디자이너이다. 1921년 헬싱키의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23년에 건축사무소를 열어 스웨덴의 에테보리 박람회나 파이미오의 사나토리움 등의 설계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툴크시(市) 주택지 계획이나 오르 공장 공동체 계획 등 대규모적인 구상을 가진 건설에도 그의 업적을 이룩해 놓았다. 그의 건축은 그로피우스나 르 코르뷔지에 들과는 달라서 곡선을 많이 사용하여 자유로운 인간미를 풍기는 것인데, 이 특색은 1933년에 발표한 자작나무로 만든 곡목의자(曲木椅子)에도 잘 나타나 있었고 널리 구미(歐美)로 보급되었다. 1940년 예일대학과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초청을 받아 학생회관을 세웠다. 특히 그는 가구 외에 천(布地)이나 조명 기구 따위의 디자인에도 손을 대어 기능주의에 반대하는 북유럽 디자인의 새 분야를 개척하였다.

페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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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otte Perriand (1902∼?)

프랑스의 크래프트 디자인 분야에서 제1인자로 지목되는 여류 디자이너이다. 그녀는 젊어서부터 르 코르뷔지에의 아틀리에에서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기능적인 조형이념의 영향으로 금속가구 연구에 종사하였다.

후에 르 코르뷔지에 종제이었고 협력자인 피에르 잔레와 결혼하여 그와 기능적인 건축을 위한 실내장식이나 가구의 표준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만든 가구는 기능 일변도인 딱딱함이 없고 여성다운 우미한 형식을 곁들인 유니크한 것이었다. 특히 회전축(回轉軸)으로 상체를 회전하도록 되어 있는 안락의자는 그의 독창적인 형식과 함께 섬세한 배려로 다듬어진 수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카산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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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sandre (1901∼1968)

본명은 아돌프 젠 마리 무론(A. Jean Marie Mouron)이며 러시아의 하리코프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파리로 나와서부터 그림을 배워 주로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리는 한편 상공업용 포스터도 제작하였는데, 이 작품이 1930년 '아리앙스 그래픽'에게 인정을 받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포스터는 다이내믹한 구성인데도 섬세한 감성이 잘 표현되었던 것이어서 그 명석한 형식 감정은 프랑스적인 감정에 영합되는 것이었다. 그 후에 그는 오로지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만 활약을 계속하여 디자인 근대화의 선구적인 추진자가 되었고 아울러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는 지로두와 모차르트 가극의 무대장치도 한 적이 있었다.

카를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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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Carlu (1900∼?)

카산드르와 함께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신풍을 일으킨 선구적 디자이너의 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건축을 배웠으나 그래픽의 분야로 전환하여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오직 그리는 도안화(化)에만 한정하지 않고 추상적인 형태의 레이아웃이나 사진의 몽타주를 구사하여 변화무쌍한 구상의 미를 표현하였다. 샤프한 추상형태에 즉물적(卽物的)인 사진을 배합한 화면은 강한 표현력을 갖지만 세련된 형태 감각과 구성력으로 비참주의(悲慘主義)에 빠지지 않게 되어 있다.

그는 상업 디자인의 분야뿐만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프랑스 정보국에서 국가적인 정보 선전 활동에도 종사하였고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나치스 항전을 위하여 많은 포스터를 제작하였다.

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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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Dorwin Teague (1885∼1960)

1885년 미국의 인디애나주(州) 티케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1년부터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활약하다가 1926년에는 공업 디자인 사무소를 개설하였다.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의 회장 5관(館)을 설계한 외에도 U.S스틸, 포드 자동차, 뒤퐁 회사, 베크라이트 회사, 이스트만 코닥 회사 등의 여러 제품의 디자인도 하였다.

그는 미국에 있어서의 디자인 근대화를 이룩한 초창기의 한 사람이며, 사무소를 설치하여 디자인의 근대기업화를 시도한 최초의 디자이너였다. 1944년에는 공업 디자이너 협회(약칭 SID)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직을 맡아 명실공히 미국 디자인계(界)의 지도적 지위를 담당하였다. 디자인의 윤리성을 강조하여 상업주의의 독주를 규제하려는 SID의 이념은 그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였다.

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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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mond F. Loewy (1893∼1986)

프랑스 출신의 미국 디자이너. 파리에서 출생하여 그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191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귀화하면서 처음으로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29년 게스테트너 등사기의 디자인을 시발로 하여 공업 디자인 분야에 진출하게 되었고 그 후에는 디자인의 모든 분야에서 활약을 하였기 때문에 디자인의 마술사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유선형 기관차, 샤즈 로박 냉장고, 럭키스트라이크 담배포장, 코카콜라의 병 등이 가장 많이 알려진 디자인이다.

도윈 티그의 뒤를 이어 공업 디자이너 협회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그의 사무소에서 우수한 디자이너를 많이 두어 국제적으로 폭넓은 활약을 하고 있으며 그의 자서전 <입술연지에서 기관차까지>가 있다.

게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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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man Bel Gaddes (1893∼1958)

미국의 미시간주(州) 아드리안에서 태어났다. 1918년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 회사의 로스앤젤레스 소극장 무대미술가가 되어 이 소극장을 중심으로 <펠레아스와 멜리잔드> <잔다르크> <햄릿> 등 우수한 무대장치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졌고, 특히 단테의 <신곡> 야외극장을 위한 무대장치 계획은 유명하다. 1927년에 공업 디자인으로 전환하여 극장 계획을 위시하여 자동차·기관차·선박·비행기 등을 디자인하였다. 그의 탈것에 대한 디자인은 유선형을 기능적으로 개발한 것인데 이분야에서 새로운 기축을 내세우게 되었다.

또한 1929년 시카고 미국박람회에 발표한 알루미늄과 스틸 제품인 <회전 공중 레스토랑>은 참신한 아이디어로서 화제를 일으켜 미국은 물론이며 세계 여러 나라의 디자인계(界)를 자극하였다.

스트림라인과 다이맥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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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amline, Dymaxion스트림 라인이란 유선형(流線形)이란 뜻이다. 원래부터 물이나 공기 따위의 유체의 저항을 가장 적게 하기 위한 곡선으로 구성된 형태를 말하며, 이 형태를 비행기나 기관차나 선박 등의 디자인에 사용한 사람은 벨 게디스나 백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이었다.

이 디자인이 1930년대의 미국에서 대유행을 불러일으켜 속도와 관계가 없는 것까지도 스트림 라인으로 디자인하기에 이르러 한 시대를 구획했다. 특히 풀러는 유선형의 바람막이를 단 아파트의 풀랜까지도 고안하였다. 이 풀러의 상표(商標)가 된 것이 다이맥시온이며 이것은 다이내믹(dynamic:유동적)과 맥시멈(maximum:최대한)을 합성하여 만든 새로운 단어이다. 그는 이 신조어로써 자동차와 주택 등을 디자인하여 공업디자인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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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Eames (1907∼1978)

미국의 가구디자이너로 세인트루이스에서 출생하였다. 재학시절에 강철회사에서 일하면서 엔지니어링과 건축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워싱턴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였다.

1930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첫 건축사무실을 개설하여 가구와 공작물, 양탄자와 조각, 건축과 그림을 디자인하고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1941년에 뉴욕 근대미술관 주최로 열린 '오거닉 디자인 설계공모전'에 사리넨과 함께 성형합판 의자를 출품하여 대상을 받은 후부터 의자 디자인만을 주로 하게 되었다.

1946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개최한 '가구신작전(家具新作展)'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1947년부터 밀러사(社)에 의해 제품으로 만들어졌다.

그 후에도 파이버글라스 의자의 개발 등 항상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1961년 그의 부인 레이와 함께 공업 디자인의 국제상인 카프만 대상의 제1회 수상자로 뽑혔다.

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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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iger Milton

뉴욕에 있는 쿠퍼 유니온 예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몰랑디와 함께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에칭을 공부하였다. 그 후에는 영상 아트와 쿠퍼 유니온 예술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하기도 하였고 푸쉬 핀 스튜디오를 공동으로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에스콰이어>라는 잡지의 디자인 디렉터이기도 하였다.

1975년 뉴욕 모던 아트 박물관과 브뤼셀의 로열 미술박물관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에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그 당시에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람회를 대표하였다.

그는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 중요한 활동으로는 뉴욕 사운드 트랙을 완벽하게 갖춘 환경 속에 아이들과 상점을 위해 설립된 아동용 상점을 디자인한 것, 인디애나폴리스에 새로 건축한 연방 사무실 빌딩에 벽화를 제작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빌리지 보이스> <뉴욕 매거진> <서커스> <모어(More)> <뉴 웨스트(New West)> <파리 매치> <큐(Cue)> <렉스프레스(L'Express)>등 수많은 발행물을 디자인하였고, 세계 무역센터에 있는 식당을 위한 그래픽 디자인과 조망대 등을 책임맡아서 일하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포스터에 그려진 누드와 같은 회화적인 시도부터 1964년 AGI포스터처럼 아주 견고하게 숙련된 그래픽적인 요소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는 가장 훌륭한 디자이너는 '그 시대의 작품 자체이며 그들 주변에 어떤 상황이 전개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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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e Roling (1940∼ )

네덜란드인으로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암스테르담에 있는 주립미술 아카데미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공부하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 뢸링교수에게 직접 배우기도 하였다.

19세부터 유럽과 미국의 박물관과 갤러리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시회를 갖기 시작하였는데 그녀의 폭넓은 활동 가운데는 개인회사와 미술품 수집가들이 정부 빌딩을 위하여 그에게 위임하여 만든 커다란 조각과 기념비적인 미술작품의 제작이 있었다.

그는 작품 제작에 있어서 자주 사용하는 물질이 플라스틱, 콘크리트, 사진술, 나무, 페인트, 금속, 유리 등으로 재료를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독일의 PTT를 위한 포스터를 비롯하여 우표제작, 극장의 무대장치, 의상, 패션, 리놀륨 판화, 드로잉, 실크스크린 등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독일의 우체국을 위한 시리즈로 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과 독일의 지로센터를 위한 색칠된 5개의 조각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웨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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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J. Wegner (1914∼?)

덴마크의 가구디자이너로 가구직공으로 일하다가 코펜하겐의 공예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코펜하겐의 강사로 있으면서 많은 가구회사의 일을 하였다.

그는 1954년 스칸디나비아 라닝

상을 받았고, 1956년 엥겔벨 상을 받았다. 1958년에는 파리 유네스코 본부 회의실의 디자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프린트 산세사(社)의 작품으로, 불교 선종의 곡록(曲綠)을 서구적인 디자인으로 응용한 것이 돋보였다.

셰르마이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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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an Chermayeff (1932∼ )

런던 출생으로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미술과 건축을 공부하였다. 1960년 게이스마르와 함께 합자회사를 창설하였고, 1967년 미국의 건축연합으로부터 산업미술 메달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은 매우 광범위하고 특히 그래픽 디자인, 회사상표, 전람회 디자인, 건축 그래픽 등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그의 작품의 특징은 시각적인 미술과 매우 유사한 것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다양하게 층을 이룬 놀랍고도 명확한 메시지를 제시한다.

그는 디자이너의 정신과 화가의 안목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그의 작품인 <아이들을 위한 하얀집 협회(Conference)> <고양이 콜라주에 대한 사인 계획>에서는 이 두가지의 조화를 통해 상상의 풍부를 꾀하려는 해결에 이르렀으면서도 목적에서는 빗나가지 않았다. 그의 디자인 철학은 '필요에 독특하게 들어맞는 해결점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1971년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였고, 1974년 제5차 애비뉴(Avenue) 연합회에서 도시의 시각적 환경에 대한 공헌으로 그에게 상을 부여하였다.

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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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Burns (1942∼ )

영국에서 출생하였고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회화와 조각을 공부하였다.

1965년 캐나다로 이주하여 2년 동안 텔레비전 아트 디렉터로 활동한 후 1969년에는 자신의 다자인 실습소를 설립하였다. 1971년 쿠퍼(Heathe Cooper)와 번스 앤드 쿠퍼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이 그룹은 그후 14년 동안 캐나다 그래픽 디자인계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한때 AGI의 국제 부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1982년 예일대학교에서 '뷰 포인트'라는 이름의 주요 학생회의를 이끌었는데 이 모임은 그 주제를 AGI 멤버들의 작품과 경력에 대한 영향력의 탐구에 뿌리를 두고 있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6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번스 앤드 컴퍼니를 설립하여 컴퓨터의 도움을 받은 디자인 테크놀러지의 개발에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그의 작품은 그의 전시회에서 5개의 기본적 형태를 상징화하기 위해 아크릴의 명료한 플라스틱 물질이 조각되어진 플라토닉 형상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