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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현 대 미 술/20세기의 건축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멘델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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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h Mendelsohn (1887∼1953)

에리히 멘델존은 아렌슈타인 출신이며, 베를린과 뮌헨에서 수업한 뒤 1915년 베를린에서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그의 <아인슈타인탑(塔)>(포츠담 1921)은 표현주의 건축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1926년부터 1930년에 걸쳐 뉘른베르크, 슈투트가르트 그리고 켐니츠에 세운 <쇼켄 백화점>은 그의 대표적인 건축작품이다. 1933년 나치스에게 쫓겨 국외로 탈출하여 런던과 예루살렘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정주하게 되었으며 시민권도 취득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시나고그'(유대인 집회소)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또한 브루노 타우트(1880∼1938)의 1921년 마구데부르크시(市)의 색채도시 계획도 표현주의 건축의 예로 알려져 있으며, 타우트는 1925년부터 1933년까지 베를린에서 많은 지트룬그(집합주택)을 설계하였다.

아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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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us Johannes Pieter Oud (1890∼1963)J.J.P

아우드는 네덜란드 태생이며 델프트와 암스테르담에 공부를 하였다. 뮌헨에 있던 테오도르 피셔 아래서 수련을 쌓았고 로테르담에 정주하면서 데 스틸파(派)의 유력한 멤버가 되어 활약하였다.

1918년부터 1933년까지 그는 로테르담시(市)의 건축기사로 있으면서 집합주택을 건축하였고 이 분야에서 그는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기능적 양식의 주요한 대표자로 평가를 받고 있어 근대건축 발전에 공헌하여 왔다. 그의 주요한 작품에는 <튀센디켄 집합주택>(로테르담 1921), <와이센호프 집합주택>(쉬토우트갈트 1927) 등이 있다. 특히 데 스틸파의 건축에서는 게리트 토마스 리트펠트(1888∼1964)의 <위트레흐트 저택>(1924)도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로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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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Gropius (1883∼1969)

베를린 출신으로 뮌헨과 베를린의 기술전문학교에서 건축을 이수하여 1907년에서 1910년까지 페터 베렌스의 조수로 근무하였다. 그가 독립하여 최초에 착수한 <파그스 제화공장(製靴工場)>(1911)은 그 단순 명쾌한 기하학적 형태로 세상의 주목을 끌었는데, 콘크리트와 경질(硬質) 벽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글라스와 철로 만든 이 처녀 작품은 그의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입장을 일찍부터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1919년 바이마르에 신설한 바우하우스의 교장에 취임하고 건축을 중축으로 하여 모든 예술의 통합을 기도한 새 이념을 발표함으로써 현대미술에 한 기원을 세웠으며 동시에 근대건축 및 디자인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1926년 데사우에 세운 <바우하우스 신교사>는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많은 아틀리에와 공방(工房)이 따른 건물이며 근대건축의 모뉴먼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25년 그의 저서로서 국제 건축양식을 주창하였고 주택난 해결을 위한 지트룽그(집합주택) 계획에 참가하여 프레하브 주택에 착안하여 건축의 표준화를 추진하였다. 193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 교수직에 있으면서 1946년 건축가협동집단(약칭 TAC, 타크)을 조직하여 미국 전축계에 공헌하였다. 1949의 <하버드대학원 센터>, 1953년의 <보스턴 센터>는 그의 만년의 걸작으로 저명한 건물이다.

미스 반 데르 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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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

그는 아헨 출생으로 브루노 파울과 페터 베렌스의 지도하에 수련을 쌓은 뒤에 베를린에서 건축사무소를 개설하였다. 대체로 1910년경부터 즉물적(卽物的)인 새 건축양식을 주창하였는데 이 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쇠와 글라스의 고층건물'안(案)으로서 제출되어 주목을 끌었으며 1927년에는 슈투트가르트의 집합주택 전시회에서 주택으로서는 처음으로 철골조(鐵骨組) 건물을 건축하였다. 그의 원칙은 합목적성과 논리성에 있으며, 1929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의 <독일관>을 비롯, 1947년 시카고의 <레이크 쇼머 드라이브 아파트>에 이르는 대표작에는 이 원칙이 일관되어 있다. 1930년 그로피우스의 후임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장직에 취임하였으나 나치스에게 추방당하여 1938년 미국으로 망명,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건축과장으로 있으며 신교사의 설계를 담당하였다.

르 코르뷔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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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orbusier (1887∼1965)

본명은 샤를 에도아르 잔레이며 스위스의 조 드 폰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동판조각을 배웠으나 1905년부터 빈에 있는 요제프 호프만과 파리의 오귀스트 페레의 지도로 건축을 공부하여 1911년 페터 베렌스의 아틀리에에서 수련을 쌓아갔다. 1917년 파리에 정주하면서 건축 및 회화 방면에서 활약, 화가인 오잔판과 함께 퓌리슴을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또한 잡지 <레에프리 누보>를 발간하여 건축과 회화 및 공예를 총합하는 전위적인 평론을 발표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1922년 종제(從弟)인 피에르 잔레와 공동으로 건축사무소를 개설하여 퀴비슴의 미학을 기초로 한 독자적이고 합리적인 구조이론에 입각하여 개인주택에서 비롯하여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기능주의 건축을 추진하였다. 1927년의 '국제연맹 회관안(會館案)'은 그의 근대건축 5원칙(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프래닝, 긴 창문, 자유로운 파사드)을 구체화한 획기적인 설계로서 유명하다. 1930년대에는 알제리·브라질·바르셀로나 등지에서 '빛나는 도시' 플랜에 입각한 도시계획을 단행하여 여러 가지의 고층건물을 발전시켰다. 1949년의 <마르세유 아파트>는 그의 독특한 표준 척도를 대규모로 실현한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한 작품에는 <모스크바 소비조합 본부>(1928)와 <파리 학생회관의 스위스관>(1932) 및 <난트 루제의 고층 공동주택>(1953) 등이 있다.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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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Lloyd Wright (1868∼1959)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미국 위스콘신주 리칠란드 센터에서 태어났다. 위스콘신 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에서 1888년부터 1894년까지 아드라 설리반 사무소에 근무하였는데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건축에서 동사무소의 치프 디자이너로서 참가하게 되었다.

1894년에 독립한 사무소를 개설하여 처음에는 개인저택을 전담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서는 대건축에 착수, <힐사이드 홈 학교>(1902), <라킨 비누회사의 빌딩>(1904), <유니티 교회>(1906), <시티 내셔널 뱅크>(1909) 등의 작품을 세웠다. 이러한 활약을 통하여 설리반의 후계자로서 시카고파(派)를 지도하면서 미국 건축의 절충양식을 타파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1911년 위스콘신에 자택 <타리신 동편장(東便莊)>과 1938년에는 애리조나에 <타리신 서편장(西便莊)>을 세워 이 두 곳에서 제자와 기거를 함께 하면서 새 건축가의 양성에 힘썼다. 그 동안 유럽과 일본을 여행하면서 특히 일본의 <데이코쿠 호텔>과 <자유학원>을 건축하였다.

1930년대의 저명한 작품에는 <존슨회사 사무소>, <카우프만 저택>이 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 설계와 <존슨회사 연구소>와 <웨이파라의 교회> 등이 걸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9년 애리조나의 피닉스에서 사망하였다.

액션 아키텍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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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Architecture

액션 아키텍처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의 비평가인 캘만이 지적한 건축의 한 경향인데 포로크의 액션 페인팅에서 감지(感知)되는 다이너미즘과 그러한 동적 공간을 형성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합리적이고 기계적인 질서를 부정한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인간성 회복의 동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피터 스미슨, 비토리고 비가노, 루이스 칸 등이 대표적인 건축가라 하겠다.

웅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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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wald Ungers (1926∼ )

독일의 건축가로 아이펠에서 출생하였다. 카를스루에 공대를 졸업한 후, 1950년 쾰른에 자신의 개인 사무소를 개설하여 설계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쾰른에 있는 자신의 주택과 베를린의 국경이 있던 시구(市區)에 있는 아파트단지 같은 주거 계획안들을 완성시킨 후 1960년 중반까지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베를린 공과대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1969년부터 코넬 대학교에 재직중이다.

그는 저술을 통해 건축에 관계하는 이론의 기반을 구축하였으며 몇가지 중요한 공모전 출품작을 내놓았다. 엔스 헤데 소재의 학생 주거지(1964), 베를린의 동물원에 위치하는 국립박물관(1965), 동물원 재정리 계획(1973), 쾰른 소재의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1975), 마르부르크의 리테르시(市) 소재의 주거지 개발계획(1976) 등을 들 수 있다. 1970년 말 베를린의 괴테공원에 있는 주거지와 프랑크푸르트 의사당, 바덴 지방 도서관 등을 지었다.

그는 새로운 합리적인 건축으로 독일을 대표하는 중요한 전문가에 속한다. 그리고 건축에 혁신적인 실험을 시도하였으며 싱켈의 낭만적인 개념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 건축가이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신세계의 자치지역> <주제로서의 건축> 등이 있다.

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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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i Otto (1925∼)

독일의 건축가로 작센에서 출생하였다. 베를린 기술대학교와 버지니아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52년 베를린에 스튜디오를 개설하였으며, 1957년 베를린의 경량 건물 개발원(EL)의 후신으로 경량판 개발협회(IL)를 만들었다. 또한 1964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기술전문대학을 설립하여 경량구조 연구소장이 되었다.

그를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한마디로 평가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그의 작품은 합리적인 성향과 동시에 독일식 낭만주의를 함께 갖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경비행기 항공기술로부터 받은 인상과 브르노 타우드의 결정체사원, 알프스 건축스케치 등은 각각 낭만적 성향과 표현주의적 환상을 주어 그의 건축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최초로 독특한 현대적인 텐트를 만들어 냈고 텐트를 경량건물에 적용 가능한 원형으로 판단하고 재응용하는 데 힘썼다. 그의 작품 중 1950년대에 지은 연방 식물원의 여러 작은 직물구조로 된 파빌리온은 서정적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그의 작품은 미적인 요소와 구조적인 요소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1960년대 그가 지은 건축은 내부의 저부(低部)와 고부(高部)를 통해 일정치 않게 분할시켜 비대칭적인 지붕 형상을 만들어 자유로운 형태의 정겨운 모양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생태학적 현상을 분석하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고 자연을 형성하고 있는 구조체들을 연구·분석했다. 건축학에서 그는 20세기의 첨단 기술원을 연구하여 현대적인 텐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몬트리올 만국박물관> <뮌헨 올림픽 경기장 지붕> 등이 있다.

스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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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Stirling (1926∼ )

영국의 건축가로 글래스고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선박 기술자였다. 리버플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후 1953년 런던을 중심으로 다른 건축가들과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건축사무소를 개설하여 당시에 지배적이던 국제주의 양식과는 무관한 독특한 여러 근대적인 건물들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케임브리지의 처칠대학 공모전(1959), 라이체스터 대학교 공학관(1959∼1963) 등이 그것이다.

1963년부터 1971년까지 독자적인 활동을 하여 독창적인 많은 디자인이 나왔다. 그 이후부터는 그의 보조 건축가인 M.빌포드와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성(聖) 앤드류 대학 소재의 미술센터 계획안(1971),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 공모전 출품작(1975), 슈투트가르트 주립미술관 확장 계획안(1977:1984년에 개장)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붉은 벽돌과 판유리로 된 온실이 서로 극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형태의 정교함이 대담하게 드러난다. 또한 그는 모든 예술적 창조가 지니는 의도적인 성격을 받아들였고, 1945년 이후의 많은 건축물들을 병들게 했던 위선적인 결정주의로부터 그 자신 스스로 자유롭고자 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레스터 대학 공학부 건물>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부 건물> <하버드 대학 포그박물관> 등이 있다.

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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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monn Kevin Roche (1922∼ )

아일랜드의 건축가로 더블린에서 출생하였다. 아일랜드 국립대학교·일리노이 공대에서 공부한 후 여러 사무소를 전전하였다. 1948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51년 사리넨의 사무소에 들어가 1954년부터 수석 설계사가 되어 디자인 부분에서 활동하였다. 1961년 사리넨이 사망한 후에 J.영켈루와 함께 운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건물을 통해, 미스 반 데르 로에의 추상적인 기하학에 강한 조각적인 표현과 특정한 상황으로부터 발전된 유형성을 결합시키고자 했다.

주요 작품으로 <오클랜드 미술관> <로체스터 공대> <포드재단 본부> <매사추세츠 대학 미술 센터> 등이 있다.

벤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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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Venturi (1925∼ )

미국의 건축가로 매사추세츠에서 출생하였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후 1958년까지 사리넨과 루이스 칸의 사무소 등지에서 일을 하다가 자신의 건축회사를 설립하였다. 1959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부교수로,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예일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고도의 다양한 표현이 특징인 지각심리학적 요소들을 건축용어로 변환시키고자 노력한 결정체로 나타난다. 또한 이론가로서 형태의 질적 문제를 건축 디자인의 예술적 자극원으로 인식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크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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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 Krier (1946∼ )

독일의 건축가로 룩셈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슈투트가르트의 기술전문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968년부터 1970년 사이에는 제임스 스털링과, 1971년부터 1972년까지는 클라이흐스 밑에서 활동하였다. 1974년에는 런던에서 개인 사무소를 개설하였고, 1973년부터 1976년까지 건축협회부설학교에서 학생을 지도, 1977년부터는 왕립미술대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하였다.

그는 건축에서 좀더 급진적인 성향을 제외하고 그의 형인 크리어(R.Krier)처럼 합리주의 건축을 개념적 도구로 삼아서 전기 유럽의 산업도시의 재현을 추구하였다. 또한 19세기 초의 신고전주의를 타당성 있는 영원한 양식으로 간주하고, 수많은 도해를 건축기술로 처리하여 예증시키고자 하였다. 그 계획안(案)으로는 룩셈부르크에 있는 <프랑스의 국립고등학교> 계획안, 런던의 <민트 광장> 계획안, 파리의 <라빌레테 지역> 계획안, 룩셈부르크 중심지역의 계획안 등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도시의 재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