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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의 네덜란드 회화[편집]

80년 동안이나 계속된 독립전쟁 중에 네덜란드의 시민들은 신교(新敎)를 믿는 공화제 국가를 실현하여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라이덴·하를렘·암스테르담 등의 세계적인 무역도시로서 황금시대를 이룩하게 되었다. 자유와 평화를 희구하는 근면하고 소박한 시민 가운데서, 무역이나 상업으로 부(富)를 얻은 사람들이 교회나 왕후(王侯)를 대신하여 예술의 보호자가 되어 종교화(宗敎畵)나 역사화 대신에 초상화·풍경화·풍속화를 화가에게 주문하게 되었다. 렘브란트가 그린 종교화도 제단에 장식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주택을 장식하는 감상화(鑑賞畵)로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페르메르나 테어보르흐가 그린 시민의 실내 풍경, 얀스 텐이나 오스타데 등의 야외 정경, 할스가 그린 초상화 등은 이 시대 네덜란드인의 기념비적 표현이 되고 있다. 또한 풍경이나 동물도 즐겨 테마가 되어서, 풍경화가 로이스달, 그 제자로서 전원풍경을 그린 홉베마, 강이나 바다의 표현에 뛰어난 고이엔, 동물화의 퀴프, 소를 즐겨 그린 포터 등도 유명하다. 사실주의는 정물화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추구되어, 카루프나 헴이 그린 포도송이에 매달린 한방울의 물방울은 손끝으로 다치면 떨어질 것같이 느껴진다. 그 밖에 건물을 그린 사렌담의 이름도 들어야 하겠다. 이와 같이 많은 화가가 이 시대에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나게 위대한 화가는 렘브란트인 것이다.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예술가로서 오늘날까지도 빛나는 존재이다.

할스[편집]

Frans Hals (1580?∼1666)

네덜란드의 초상화·풍속화의 대가. 할스는 메헬렌에서 출생하여 하를렘에서 죽었다. 초상화가이며 풍속화가인 환 만데르에게서 배우고, 초기에는 루벤스의 영향도 받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주로 하를렘에서 활약한 그는 네덜란드 초상화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기도 한 중요한 작가이다. 특히 집단초상(集團肖像)에 있어서는 구성의 다양성, 인물의 성격 부여의 점에서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물의 성격이 예리하게 파악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모습에도 어떤 기품이 있어서,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동작에 의해서 생동하고 있는 점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초기의 정성들인 부채(賦彩)는 차츰 경쾌한 터치로 바뀌어져 43세경부터 거의 인상주의적이라고 해도 좋을 밝고 근대적인 취미에 넘치는 걸작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 후 60세가 될 무렵부터 그의 화풍에 깊이 있는 엄정한 표현이 나타난다. 1664년에 <하를렘 양로원의 이사(理事)들>(하를렘 시립 미술관)을 그린 남녀 두쌍의 집단초상화는 그의 최대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이엔[편집]

Jan van Goyen (1596∼1656)

네덜란드의 화가. 라이덴 태생으로, 주로 헤이그에서 제작활동을 계속했다. 에사이어스 반 데어 벨데에게 배웠는데, 1627년부터 고유색(固有色)의 고집을 버리고 갈색이 진한 거의 단색화법으로 볼 수 있는 색조로서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낮게 긋고, 광대한 하늘을 희미하게 채우고 있는, 대기에 싸인 저지대의 정밀한 기분을 그려서, 로이스달과 나란히 네덜란드 최대의 풍경화가가 되었다. <하를렘의 바다>(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와 <겨울 풍경>(카이제 프리드리히), <하반(河畔)의 성채(城砦)>(보스턴 미술관) 등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오스타데[편집]

Adriaen van Ostade (1610∼1685)

네덜란드 화가. 1610년 직물업자의 아들로서 하를렘에서 출생, 1685년 죽을 때까지 거기서 활약한 풍속화가이다. 처음에는 할스와 브라웰의, 그리고 1640년경에는 렘브란트의 명암법에도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는 밝은 청·회·자색의 색조가 두드러졌다. 1640년대에 들어서면 비교적 어두운 화면에 인물, 특히 무뚝뚝한 농부가 선술집에서 법석대는 모습이 동적(動的)으로 포착되어 있다. <화가의 아틀리에>(암스테르담 미술관), <농부의 무리>(베를린 프리드리히 미술관), <농부의 가족>(런던 버킹검 궁전) 등은 8백 가까운 유화 가운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렘브란트[편집]

Harmensz van Rijn Rembrandt (1606∼1669)네덜란드 화가. 유럽 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1606년 방앗간 집 아들로서 라이덴에서 출생했다. 젊었을 때 라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나 1년도 못 되어 화가로서 출세할 결심을 굳히고, 자콥 스와넨부르흐 밑에서 3년간 수업을 받았다. 이어 암스테르담에서 피테르 라스트만에게서 이탈리아 회화의 기법을 익혔고, 특히 카라바조풍 명암법의 영향을 받았다.

1626년부터 1631년에 걸친 라이덴 시대에 비롯되는 초기에서부터 일관하여, 그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밝은 세속적(世俗的) 작풍과는 반대의 어두운 내면적·집중적인 작풍으로 성서(聖書)의 제재(題材)를 그렸다. <드비아스와 그 아내>(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사원의 시메온>(헤이그 마우리트후이스 미술관), <성(聖) 가족>(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등이 초기의 대표작이다.

1632년부터 1641년까지의 암스테르담 시대에는 당대 최대의 초상화가로서 많은 주문을 받았다. 1634년에는 사스키아 반 우일렌부르흐와 결혼하여 사회적으로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사스키아와 건배하는 렘브란트>(드레스덴 회화관)이나 <자화상>(베를린 다렘 미술관)이나, 다섯장으로 된 연작 <수난>(뮌헨), <뇌우의 풍경>(브륜스비크 미술관)의 풍경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더욱더 시민의 생활 감정을 내면적으로 심화시키고 있었다.

1642년의 <야경(夜警)>의 제작과 함께 그는 커다란 전환기를 맞았다. 원래 집단 초상화는 거기에 표현되는 구성원을 동격(同格)으로 취급할 것을 요구당했는데, <야경>에서 그는 이 요구를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이 걸작은 비판을 받았고 이후는 주문도 줄었다. 같은 해 아내의 죽음을 당하여 렘브란트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차차 곤궁해졌다. 이리하여 고독과 궁핍에 시달리면서 그의 압도적인 후기의 걸작이 만들어졌다.

그의 성서의 여러 정경(情景)의 해석도 순인간적 관점에서 이루어져, 세부(細部)는 의미를 잃어서 따뜻한 황금색에 빛나는 색조 속에 인간의 영혼이 훌륭하게 포착되어 있다. <탕자 돌아오다>(에르미타쥬 미술관), <목욕하는 바테시바>(루브르 미술관), <나사업자 조합>(암스테르담 왕립미술관), <사원(寺院) 속의 시메온>(스톡홀름 국립미술관) 등은 만년의 걸작들이다. 또한 전생애를 통해서 여러 번 그려진 자화상 속에 그의 영혼의 발전을 뒷받침할 수가 있다.

로이스달[편집]

Jacob Van Ruisdael (1628/29∼1682)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살로몬 판 로이스달의 조카로, 일찍부터 풍경화가 밑에서 자란 그는 하를렘에서 출생하여, 주로 하를렘과 암스테르담에서 활약했다. 블롱이나 판 에버딩겐, 특히 고이엔의 영향을 받았다. <하를렘 조망(眺望)> <벤트하임의 성> <숲속의 풍경> <유대인 묘지>(드레스덴 내셔널갤러리) 등의 작품이 있다. 그가 그리는 작품에는 육중한 하늘과 평원, 울발(鬱勃)한 삼림과 고목, 분류(奔流)나 폐허 등이 즐겨 그려지고 있는데, 그것들이 조성하는 풍경에는 시적인 멜랑콜릭한 정서가 넘쳐 있기 때문에, 18∼19세기의 영국이나 프랑스의 감상적·낭만적 풍경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페르메르[편집]

Jan Vermeer(1632∼1675)

네덜란드의 화가. 1632년 델프트에서 출생, 그곳에서 43년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는 렘브란트파(派)인 카렐루 파브리티우스나 피터 데 호포의 영향을 받았다. 초기의 작품으로 지목되는 <졸고 있는 여자>(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는 아직까지 명암이 비교적 명료하게 대조되어 있으나, 차차 실내에 있어서 빛이 공간을 채우고, 그 속에서 색채가 서로 교감(交感)하는 것 같은 유례 없는 아름다운 화면을 나타내게 되었다. 대체로 일상적인 상류 가정의 모습이 그려지고, 색채의 부드럽고 맑은 색조가 빈틈 없고 단정한 구도에 잘 조화되어 조용하고 평온한 느낌을 준다. 그의 것이라고 판명된 작품은 30여 점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2점이 풍경화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델프트 풍경>(헤이그 국립미술관), <편지를 읽는 여인>(암스테르담 왕립미술관), <아틀리에>(빈 미술사 미술관) 등이 있다.

17∼18세기 네덜란드의 건축[편집]

-建築

17세기 네덜란드의 건축에는,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벽돌과 석재를 사용한 간소하고 견실하면서도 회화적 효과가 잘 살려진 작품이 많다.

대표적인 건축가로서는 먼저 리벤 드 카이와 헨드릭 드 카이저를 들 수 있다.

카이는 하를렘의 식육점 조합을 위해서 전통적인 높은 급경사의 지붕을 가진 직사각형의 건물을 구상했는데, 그 벽면에 벽돌과 석재를 훌륭하게 이용하여 바로크적인 회화적 효과를 주고 있다.

한편 카이저는 암스테르담에 종교개혁 이후 최초의 교회당인 서(西)교회당과 남교회당을 바실리카 형식으로 건립했다. 특히 서교회당의 내부공간은 후의 건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는, 본당을 제거하고 설교단을 설치한 삼랑식(三廊式) 직사각형 설계의 형식으로서, 모든 것을 중심인 설교단에 따라 질서 짓기 위하여 측랑(側廊)은 두개의 원통궁륭으로 신랑(身廊)과 연결되어, 그 부분은 박공벽으로서 밖에서 뚜렷이 알 수 있도록 강조되어 있다.

또한 이 두 사람은 구성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주름 모양을 사용, 수평선을 강조시키고, 하중(荷重)과 지중(支重)의 힘이 마주 버티는 느낌을 표현했다.

카이저보다 거의 1세대 후의 캄펜은 팔라디오풍(風)의 고전주의를 네덜란드에 도입했는데, 제자 포스트와 함께 지은 헤이그에 있는 마우리트호이스(현재는 미술관으로 이용)는 벽면이 이오니아식 주두(柱頭)를 가진 편개주(片蓋柱)에 의해서 다섯으로 구분되었고, 돌출된 중앙부의 세 개의 벽면을 사암(砂岩), 그 외측의 양변을 벽돌로 만들어 침착한 가운데 변화를 가지게 했고, 한편 중앙부의 위에 고전주의적인 커다란 페디먼트를 올려 놓았다.

또한 그는 암스테르담에 시청을 세웠는데, 그 당당한 정면은 중앙부가 돌출하여, 거기 따라서 좌우 양단부도 약간 돌출되어 있는데, 그러한 요철(凹凸)이 심한 면을 코니스 상층과 하층으로 나누어서 각층을 편개주의 열이 둘러싸고 있다.

중앙부는 거대한 박공벽과 시계탑을 가졌고, 다시 각 부분에는 안트워프의 건축가 코르넬리스 플로리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플로리스(Floris) 양식의 장식이 사용되고 있다. 내부에는 두 개의 안뜰과 원통궁륭에 덮인, 시민을 위한 거대한 홀이 있는데 당시의 시민의 자부와 위력을 나타낸 건축이다.

캄펜 이후 피터 포스트가 나타나 마우리트호이스를 완성시키고, 헤이그 근처에 아담한 벽돌 건축인 호이스텐 보스를 건립했다.

그 밖에 필립 빙그본즈가 암스테르담에 트리펜호이스를 세웠다. 네덜란드의 건축은 프랑스, 독일 영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18세기가 되자 차차 네덜란드 독자적인 양풍(樣風)이 흐려져 갔다.

17∼18세기 네덜란드의 공예[편집]

-工藝

17∼18세기의 네덜란드의 공예는 지방적인 특색을 살린 자기 제조가 발달했다.

이미 16세기경 마졸리카 도기의 제법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17세기가 되자 네덜란드의 회화나 동판화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나 풍속의 모티프와 함께, 중국의 만력(萬歷) 등의 영향을 받아 조화(鳥花)의 모티프를 나타낸 소위 델프트(Delft)의 발달을 보았다.

석유(錫釉)의 하얀 바탕에 청으로 덧그림을 그린 델프트 도기는 식기·접시·항아리·완구 등으로 델프트뿐만 아니라 널리 유럽 북부 일대에 보급되었다.

18세기 중엽부터는 독일의 마이센이라든가 작센에서 경질의 자기(磁器)가 제조되기 시작하여, 델프트 도기는 한때 돌아보지 않게 되었었으나 1680년대가 되자 다시 왕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