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17∼18세기의 미술/17∼18세기의 독일 미술
17∼18세기 독일의 회화
[편집]-獨逸-繪畵
30년 전쟁(1618∼1648)은 17세기의 독일 미술에 오랫동안 불모기(不毛期)를 가져왔다. 재능 있는 화가들은 귀족이나 교회로부터의 주문을 받으러 거의 외국으로 떠났다.
전후 셴펠트가 이탈리아로부터 남독일로 돌아와, 빛이 담뿍 담긴 이탈리아의 전원생활을 그리운 추억의 서정을 아로새기면서,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콘트라스트와 독특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써서 그림을 그린 후 독일 회화는 다시금 생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17세기 후반까지도 화가들은 여전히 네덜란드의 루벤스·렘브란트·반 다이크나 이탈리아의 카라바조·코르토나의 수법을 절충적으로 모방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는 비르만이 뛰어났다.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 작 <마리아의 탄식(歎息)>(1700년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생생하고 빠른 터치로 군상(群像)을 어두운 배경에서 두드러지게 돋보이도록 한 수법은 참으로 독특한 것으로서, 깊은 심리적 표현을 가진 드라마틱한 효과를 낳고 있다.
18세기에 들어서서도 외국의 영향은 여전히 결정적인 것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하였던 두 작가, 즉 페스네가 파리 출신이고, 데스마레가 스웨덴인이었음은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하여 주는 것이다. 국제적 명성을 떨친 유일한 독일인은 멩스였으나 그는 로마에서 살면서 그 후에도 계속 죽을 때까지 마드리드의 궁정에 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이론가로서도 뛰어나 독일어로 저술된 저서 <회화에 있어서의 미와 취미에 관한 고찰> 가운데서 주장한 고전주의의 입장은 독일 미술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상 말한 회화 분야에 비하여 미술사상(美術史上) 훨씬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독일에 있어서의 벽화(壁畵)·천장화(天障畵)의 제작활동이었다. 17세기 말에서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쳐, 특히 오스트리아와 남(南)독일의 궁전·교회당·수도원의 제 공간(諸空間)에 환상적 세계를 펼쳐보이는 프레스코화(畵)는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의 발달을 보였다. 오스트리아의 그란·트로가·마울베르치, 남(南)독일의 아잠·침머만·귄터·치크 등은 대담한 원근법을 구사하여 천장에 그린 회화공간을 건물 내부의 실제공간과 교묘하게 연결시키기도 하고, 실제의 조각작품과 그림으로 된 인물을 구별할 수 없게 하기도 하여, 건축·조각·회화의 협동 연결로써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미(美)의 세계를 창출하였기 때문에 관람자는 현혹되어 바로크 내지는 로코코의 호화·화려하고 밝은 환상적 세계 속으로 부지불식간에 끌려들고 만다.
마울베르치
[편집]Frang Anton Maulbertsch (1724∼1796)
18세기 오스트리아 최대의 프레스코 유채화가(油彩畵家). 마울베르치는 보덴 호반(湖畔) 랑겐아르겐에서 태어나서 빈에서 사망하였다. 1739년부터 빈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1770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빈에서는 트로가의 영향을, 이탈리아를 여행해서는 베네치아파(派)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 중에서도 렘브란트의 예술로부터 배운 바가 많다. 렘브란트 풍(風)의 강렬한 명암대비(明暗對比)로 생겨나는 동적 형식에 의한 그의 천장화는 보다 우아한 방향으로 기울어진 다른 로코코 화가들에 비하여, 보다 격렬하고 퍼세틱한 팬터지를 나타내고 있다.
멩스
[편집]Anton Raphael Mengs (1728∼1779)
독일의 화가. 바로크·로코코에서 고전주의로 향하는 과도기(過渡期)의 독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서, 보헤미아의 아우지히에서 태어나 아버지 이스마엘과 더불어 1741년에서 1744년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1745년 이후 드레스덴, 1761년 이후 마드리드의 궁정화가가 되어 1779년 그곳에서 영면하였다.
로코코의 벽화에서 보이는 극단적 단축법(短縮法)을 피하고, 평면적인 구성을 가진 초기 고전주의의 대표적 벽화 <파르나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는 뛰어난 데생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러한 특징은 초상화의 영역에서 가장 잘 발휘되고 있다. 르네상스 이래의 과제였던 인체표현의 전통이, 데생과 구도를 라파엘로에게서, 명암법(明暗法)을 코레조에게서, 색채를 티치아노에게 배운 그는 작풍에 있어서 하나의 뛰어난 성과를 낳았다. 그가 결단코 절충적 수법에 빠져들지 않은 것은 고대도시 헤르쿨라네움의 발굴이나, 그가 해후(邂逅)하였던 빙켈만의 예술관에 의해 파악할 수 있었던 고대의 위대한 정신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7∼18세기 독일의 조각
[편집]-獨逸-彫刻
이 시대 독일 조각의 첫째 특징은, 조각은 단독으로 감상할 수가 없고 건축체(建築體)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오로지 장식적 의미밖에 가질 수 없으며, 작품도 멀리서 볼 것을 예상하여 세부의 손질을 소홀히 하고 있다. 둘째 특징은 고딕, 특히 말기 고딕시대의 작품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더욱이, 17세기 초두의 우수한 조각가 페테르의 걸작인 레겐스부르크의 대성당에 있는 <책형 군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영혼의 심각한 감동의 표출 가운데 나타나 있으나, 십자가를 안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긴 머리나 복잡하게 흐르는 날카로운 능선(稜線)을 가진 의상의 무늬도 고딕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베를린의 실뤼터도 역시 뛰어난 조각가이다. 그의 인체 표현에는 고딕적 형식을 상기시키는 것은 없고, 영혼의 격동이 고전주의적인 형식으로서 파악되어 있다.
남(南)독일 출신의 페르모저도 특필할 만한 존재이다. 그는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수업한 후, 드레스덴의 궁정 조각가가 되었는데, 그의 군상 표현은 상상력에 넘치는 것이며, 복잡하고 격렬한 운동중에 포착되는 개개 형상이 파탄 직전에 멋지게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로코코에서 고전주의로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것은 빈의 도너일 것이다. 그는 즐겨서 둔탁한 광택을 갖는 납(鉛)을 재료로 써서, 우아한 여성상을 차분히 가라앉은 수법으로 제작하였다.
1730년대로부터 남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조각과 회화와 건축공간과의 총합화(總合化)가 성행하기 시작했다(17∼18세기의 독일회화). 에기트 퀴린 아잠, 그리고 만하임의 궁정조각가 에겔, 보덴호(湖) 지방에서 활약한 호이히트마이어, 뮌헨의 궁정조각가 귄터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황홀·고뇌·귀의(歸依)·열광은 심한 몸짓과 바람에 나부끼는 의상(衣裳)의 표현에 있어서 조형화(造形化)되어, 독일 바로크의 환상적인 종합예술 공간에 꼭 알맞는 조상이 되어 있어, 프랑스 로코코의 우아함이나 섬세함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창출하고 있다.
아잠
[편집]Egid Quirin Asam (1692∼1750)
화가로서 활약하던 형 코스마스 다미안 아잠과 더불어 남(南)독일에서 제작활동을 계속하였던 에기트 퀴린 아잠은 뮌헨의 성(聖) 요한 네포므크 교회당과 로르의 수도원 부속 교회당의 제단조각(祭壇彫刻)으로 유명하다. 후자에서는 마리아가 방금 승천하려는 순간을 훌륭하게 포착하고 있다. 높은 천공(天空)으로 향하는 성모 마리아는 진정 공중에 매달린 것 같고, 그 무대와 같은 제단은 색채의 홍수와 황금색의 광휘(光輝)에 넘치는 내부공간의 중심이어서 감각적으로 현실화된 신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채색된 조상은 심한 몸짓에 의해 오히려 반조각적(反彫刻的)인 자세를 나타내면서, 그것으로써 한층 더 총합적 인상 속에 오묘하게 융합되어 있다.
귄터
[편집]Ignaz G
nther (1725∼1775)
독일화가. 18세기 후반의 바이에른의 지도적 조각가인 귄터는 아르트만시타인에서 태어나 시트라우프와 에겔 밑에서 수업을 쌓고 그의 주된 활동무대였던 뮌헨에서 사거(死去)하였다. 독일에서는 고딕 이래 전통적으로 목각(木刻)이 성행하였는데 귄터도 우수한 목조각가(木彫刻家)로서 채색이나 도금된 목각작품에 우수한 것이 많다.
비교적 작게 조형된 두부(頭部), 피로한 듯한 표정, 화사하고 우아한 모습을 가진 천사나 여성상은 로코코적인 세속성과 감상을 극복하고 오히려 섬세한 영혼의 움직임을 전해 주는 종교성조차도 간직하고 있어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의 작품은 다수이나 로트 암 인과 바이에른의 교회당에도 그 대표작을 찾아볼 수 있다.
도너
[편집]Raphael Donner (1693∼1741)
오스트리아의 조각가. 18세기 전반에 고전주의적인 뛰어난 작품을 남긴 도너는 오스트리아의 에슬링겐에서 태어나 1706년경부터 빈에서 줄리아니의 제자가 되었다. 1714년∼1715년에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1720년대는 잘츠부르크에서 주로 메달 주조(鑄造)에 종사하였고, 1730년대는 궁정조각가 겸 건축감독으로서 프레스부르크에서 일하였다. 1738년 이후 빈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도너는 명료하게 분절화(分節化)되고, 치밀하게 구성된 인체표현을 하여 고전주의의 선구자로서 수십년 후의 고전주의자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나, 사실 그가 애용한 둔탁한 광택을 가지는 유연한 납의 질감이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유장(悠長)한 면의 기복을 낳아 동적인 바로크적 감정과는 질적으로 다른, 보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고전주의적 취향을 띠는 조각의 세계를 창출하였다.
17∼18세기 독일의 건축
[편집]-獨逸-建築
독일 바로크의 건축이 30년전쟁의 폐허로부터 재기하게 된 것은 17세기 말 이후이다. 17세기 초두에도 바로크 건축이 생겨난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에리아스 호르에 있는 아우크스부르크 시청사(市廳舍)의 정면을 보면 르네상스 형식의 특징인 수평선의 강조(强調)가 중앙부의 수직적 방향에 의해 깨어져 있으나 바로크적 감각을 감지할 수 있다. 30년 전쟁이 도시나 시민의 힘을 뿌리째 빼앗아 갔으므로 그 후는 지방귀족과 교회의 권력자 등이 주된 주문주(注文主)가 되었다. 그들은 외국의 건축가를 후원하여, 웨스트팔리아에서 쾨니히스베르크에 이르는 프로테스탄트 지역인 북독일에서는 네덜란드로부터, 빈에서 보덴호(湖) 지방에 이르는 카톨릭 지역인 남독일에는 이탈리아로부터 건축가들이 초빙되어 제작을 했다. 그래서 독일의 바로크 건축은 북쪽과 남쪽이 그 성격을 서로 달리하고 있다.
북쪽에서는 프로테스탄트의 설교 중심의 예배형식에 알맞게, 즉 드레스덴의 성모 교회당(聖母敎會堂)과 같이 교회당은 집중식이 애호를 받았으며, 남쪽에서는 뮌헨의 성(聖) 미하엘 교회당과 같은 원통궁륭을 갖는 단랑식(單廊式)의 장당형식(長堂形式)이 지배적이었다. 또 북쪽에서는 내부의 새하얀 벽은 프레스코화(畵)가 없을 뿐 아니라 모르타르의 장식도 볼 수 없는 데 반해, 남쪽에서는 모르타르에 의한 아칸투스 무늬나 과실(果實) 꽃장식으로 벽면을 채우고 있으며, 그 중간에는 천사들이 우의적(寓意的) 장식품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다.
17세기 말에 이르러는 독일인의 활동이 눈에 띄게 되는데 2 세대 사이에 오스트리아·독일의 각 지방(各地方)에서 극히 우수한 건축가들이 배출되어 놀랄 만큼 많은 교회당을 세웠다. 오스트리아·남(南)독일에서는 보로미니에서 유래한 이탈리아 바로크 건축 형식과 프랑스 고전주의와의, 더없이 상상력이 충만된 결합이 이루어지는 데 반해, 베를린·작센·웨스트팔리아에서는 네덜란드의 냉정한 고전주의적 형식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특기할 만한 건축가로서는 베를린의 실뤼터, 오스트리아의 피셔 폰 에를라하와 힐데브란트의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서는 건축에 대한 열의가 점점 높아져 수도원·성(城)·도시 궁전·순례 교회당(巡禮敎會堂) 등이 무수히 세워졌다. 특히 교회건축과 주택건축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원 건축으로는 독일에 우수한 것이 많다. 프란타워에 의한 1702년 메르크의 베네딕트파(派) 수도원은 도나우 하반(河畔)의 암산 꼭대기에 막강한 성과 같은 위용을 보여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18세기 독일 건축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내부공간의 형성에서 볼 수 있다. 장당(長堂)과 집중식의 융합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타원형의 기본 플랜이 갖가지로 변형·확장되어 벽은 복잡한 요철(凹凸)을 나타내며, 공간과 공간이 상호 엇갈려 엮이고, 천장은 천장화가 묘사해 내는 천상적(天上的)·초자연적(超自然的) 공간으로 해소되고, 그리고 다채로운 주위의 벽면은 패각(貝殼)·연골(軟骨)·당초(唐草) 등의 무늬로 모든 부분이 장식되어 있다. 이와 같은 후기 바로크 내지는 로코코 최대의 거장은 발터자르 노이만이었을 것이다. 그가 만든 <피어젠하일리겐(十四聖人) 순례 교회당>과 네레스하임의 교회당은 내부 공간 구성에 있어서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침머만의 비스 교회당은 남(南)독일의 완만한 기복을 갖는 목초지대(牧草地帶)에 위치한 소건축(小建築)이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로코코의 내부공간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한편, 궁전건축에서는 푀펠만이 건립한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전에 자리한 12신화적 상인 곡물의 여신 케레스 상은 환상적인 종합예술 공간에 꼭 알맞는 장식으로 바로크적 팬터지를 보여주고 있다. 장식노이만의 뷔츠부르크·브루흐잘·브륄의 여러 궁전 등이 베르사유 궁전보다도 훨씬 경쾌하고 밝은 시너지를 낸다.
카를 교회당
[편집]-敎會堂
빈에 위치하고 있다. 황제 카를 4세가 1713년, 페스트가 유행하였을 때 행한 서약을 지켜서 1716년 그 초석(礎石)이 놓여진 것이다. 피셔 폰 에를라하의 설계로 된 것인데 사후 그의 아들이 일을 계승하고, 약간의 변경을 가하여 1739년에 완성된 것이다. 로트마이어가 그린 돔의 프레스코를 가진 장타원(長楕圓) 설계의 내부공간 이상으로 이 교회당을 성격 지워주고 있는 것은 정면(파사드)인 것이다. 고대풍의 정면 중앙부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연상하는 원개(圓蓋), 탑상(塔狀)의 좌우익부(左右翼部), 특히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탑과 같은 두개의 거대한 원주(圓柱), 이러한 각부분은 그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통일을 유지하고 있다.
14성인 교회당
[편집]-聖人敎會堂 Viergehnheiligen
1743년 초석이 놓인 후 약간의 변경 외에는 거의 노이만의 설계대로 건축되어 그의 사후 1772년에 완성되었다. 노이만 후기의 작품으로 주축에 세개의 타원형의 공간이 늘어선 특이한 플랜이다. 포이히트마이어의 조각에 장식된 중앙 고제단(中央高祭壇)을 가진 중앙의 타원은 장타원(長楕圓)이며, 이 장타원과 내진의 타원과의 사이를 가로 지른 가로의 타원에 의해 교차부(交叉部)가 만들어지고 있다. 신랑부(身廊部)를 형성하는 장타원의 공간을 가진 경쾌한 리듬의 다양성은 장당형식(長堂形式)과 집중식 방향 사이의 긴장을 반영하여 큰 창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백색·금색·장미색 등의 색채가 서로 어울려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17∼18세기의 독일 공예
[편집]-獨逸工藝
독일 공예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磁器)이다. 특히 18세기 중엽, 마이센 자기(Meissen磁器)는 전유럽에 그 이름을 떨쳤다.
17세기 말에 제조되기 시작한 네덜란드의 델프트(Delft) 도기나, 프랑스 도기에 대해 중국과 한국의 경질(硬質)의 미(美)를 가지는 자기의 제조법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 1709년 작센의 강력한 후작 아우구스트 아래 연금술사(鍊金術師)였던 베트가가 카올린(Kaolin=高嶺土)과 그 소성법(燒成法)을 발견한 후 마이센식(式) 가마는 오랫동안 자기공장을 중심으로 이름이 알려졌었다. 초기에는 화가 헤로르트가 식기와 화병에다 중국의 화조문양(花鳥紋樣)을 색채도 영롱하게 그렸었다. 1731년 마이센에 초빙된 조각가 켄들러가 만든 작고 귀여운 자기인형(磁器人形)은 유럽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그의 자기인형은 뮌헨의 님펜부르크 요지(窯地)에서 활약한 부스텔리에 의해 단순한 인형으로서가 아니라 경쾌하고 우아한 로코코 조각의 소세계(小世界)로까지 승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