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17∼18세기의 미술/이베리아 제국과 식민지의 미술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이베리아 제국과 식민지의 건축

[편집]

이베리아 제국과 식민지

[편집]

서구의 서남단에 있는 지브롤터를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와 마주보는 이베리아 반도는 중세 이래 진보된 아랍 문화와 오랫동안 공존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남쪽으로 내몰고 근세에는 가장 먼저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두 나라에 의해 신세계(新世界)의 놀라운 개척이 이루어져, 페루에서 얻은 은(銀)으로 유럽의 경제는 혼란을 빚었다.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가(家)는 오스트리아, 플랑드르, 북이탈리아 등이 그 지배하에 들어, 16세기의 서유럽은 에스파냐식(式)의 의례(儀禮)나 유행을 좇을 정도였다. 그러나 1580년 이후 반세기 남짓 동안에 포르투갈 왕위도 겸하고 있던 세계제국(世界帝國)인 에스파냐도 이미 신흥 네덜란드·영국의 경제력 앞에 쇠퇴 일로를 걷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화에 있어서의 황금의 세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에스파냐의 고전적 건축

[편집]

-古典的建築

15세기 말로부터 16세기 전반(前半)에 걸쳐 중세 말의 플랑브와앵 양식보다도 더욱 장식면에 공을 들인 플라트레스크(Platresque) 양식이 에스파냐 각지에 출현하였다. 이 아랍의 혈통이 섞인 것 같은 벽체 장식에 있어서의 정열적 표현과 전혀 반대로 15세기 전반에 그라나다의 카를로스 5세 궁전은 단정한 고전 건축으로, 이 경향은 반세기(半世紀) 후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그 수법이 계승되어 있다. 그것은 수도원과 궁전과 왕릉(王陵)을 겸한 네모꼴의 대건축으로, 극단적으로 장식이 적은 엄숙한 모습을 황량스러운 산간(山間) 속에 보여주고 있다.

17세기에 들어서도 에스코리알의 건축가 중 한 사람인 에레나는 엄정한 양식을 지키고 있으나 이는 토렌토 공회의 후의 반종교 개혁운동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에스파냐 바로크 건축의 형성

[편집]

-建築-形成

1620년대부터 카톨릭 내(內)에 있어서 화려한 종교예술이 공인되기 시작하지만 1640년대가 되어서는 예수회가 각지의 건축에 신풍(新風)을 불어넣었다.

이 가운데서도 화가·조각가로서 일류였던 알론소 카노(1601∼1667)의 그라나다 대성당의 파사드가 명쾌하고 논리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말에서 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서 에스파냐 바로크 건축은 절정에 달하지만 그것은 보로미니에 있어서와 같은 양체로서의 건축공간의 전개라고 하기보다는 벽면 장식으로 생기는 공간의 일류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가 있다.

이미 플라트레스크 양식에 있어서도 명백한 바와 같이 중세 이래의 무데하르 예술의 경험이나 중남미(中南美)에 있어서의 마야와 아스테카나 잉카 등의 전통예술 양식과의 교류도 이 장식 과잉(過剩)의, 바로크 양식의 형성과 관계가 있었다.

추리게레스크 양식

[편집]

-樣式

그 대표자는 추리게라(Jose Churriguera) 형제의 제단장식이다. 그들은 주로 마드리드와 사라망카에서 활동하나, 특히 살라망카의 산 에스테반 성당 제단(聖堂祭壇)(1693)은 포도 또는 아칸투스의 잎으로 장식되며, 도금된 나선 원주(螺旋圓柱)가 좌우에 선 높이 30m쯤 되는 대제단으로 민족적인 종교적 정열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페드로 데 리베라는 장식제단을 한층 더 호화롭게 하고 그것을 파사드의 장식으로 하여, 추리게레스크(Churriguerresque) 양식을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마드리드의 후생숙사(厚生宿舍)는 그 대표작이다.

순수하게 추리게레스크에 속하는 것은 아니나 나르시소 토메에 의한 톨레도 대성당 내의 트란스파렌테 예배당(1732)은 눈을 속이는 것 같은 묘사와 기교적 조명 효과에 의해 바로크적인 일류저니즘의 정점(頂點)을 이루는 것 중의 하나이다.

안달루시아의 피게로아 등

[편집]

에스파냐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피게로아와 그 일족이 고형장식(固型裝飾)과 다수의 원주(圓柱), 그리고 채색도판 등을 장식요소로 하여, 세비야의 바로크 건축의 난숙기(爛熟期)를 이룩하였다. 그라나다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프란시스코 우르타드는 세고비아의 에르 파우라르의 칼트파(派) 예배당에서 채색 스투코와 색대리석을 십분 이용하여 짙은 환상적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 구상(構想)은 우르타드의 것에 가까우나, 설계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그라나다의 칼트파 수도원 성기실(聖器室)은 기하학 무늬를 갖는 백색 스투코의 벽체에 둘러싸여 있어 방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독특한 공간 효과를 갖는데 로코코적인 우아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발렌시아의 도스 아과스 후작저(현 국립도예미술관)도 로코코적인 것이나, 파사드의 부조(浮彫)에는 독특한 파토스의 표현이 담겨 있다.

갈리치아의 건축

[편집]

로마네스크의 전통이 뿌리깊은 에스파냐 서북부 갈리치아 지방은 바로크화(化)가 비교적 빨랐다. 그 중에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오브라도이로라고 불리는 파사드가 주목받을 만한 것이다. 작가는 카사스 이 노보아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산타 클라라의 파사드는 강력한 무기적(無機的)인 문양 구성에 의하여 금세기의 추상주의를 상기시켰다.

포르투갈의 건축

[편집]

포르투갈은 1580년에서 1640년까지 에스파냐 왕에게 지배를 받았으나 문화적으로는 반드시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외국인의 활약이 두드러진 바가 있다. 플라트레스크 양식과 동시대(同時代)의 포르투갈은 마니에르 양식이라고 하는 역시 풍요한 장식예술을 가지고 있었으나 18세기에 들어서는 이탈리아인(人) 나소니가 포르토시(市)의 성 베드로 성당, 독일인 루트비히가 건립한 마프라 수도원, 궁전은 마니에르 양식의 전통을 살린 바로크 양식을 이루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건축

[편집]

라틴아메리카에 있어서 식민지는 본국 예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에스파냐 식민지인 멕시코·페루에서는 원주민의 전통적인 장식양식과 통합되어, 본국 이상으로 열광적인 종교건축이 만들어졌다. 멕시코시의 대성당과 산 도밍고 데 프에브라의 로사리오의 예배당, 리마의 산 프란시스코 성당 등은 그런 예에 속한다.

그러나 포르투갈 식민지인 브라질에서는 보로미니풍(風)의 독일적인 바로크 건축이 오히려 환영받고 장식조각은 저조하였다.

이베리아 제국과 식민지의 회화

[편집]

에스파냐의 회화 황금시대

[편집]

-繪畵黃金時代

15세기에는 플랑드르 회화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16세기에 들어서는 이탈리아의 영향이 증대되고, 중기(中期) 이후는 마니에리슴 국제양식이 이탈리아나 플랑드르로부터 도입되었다. 그 중에서는 종교화가 루이스 데 모라레스, 포르투갈인의 궁정 초상화가(宮廷肖像畵家) 산체스 코엘료 등이 주목을 받았다.

멕시코에는 아론소 바스케스와 같은 이름 있는 화가가 활약하였다.

그레코

[편집]

Greco, El(1541∼1614)

에스파냐 화가.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비잔틴 미술과 베네치아파(派)에게 배웠고 본명은 도메니코 테오토코풀리. 그레코에 이르러 마니에리슴의 유형을 벗어나, 자유로운 형체와 공간처리에 의해 정신적인 표현을 수행하게 된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埋葬)>(1586), <오순절(五旬節)> <묵시록(默示錄)의 환상> 등이 그 예이다. 톨레도에 살면서 주로 종교화를 그렸으나 초상화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바로크의 형성기

[편집]

-形成期

그레코의 예술에는 이미 바로크 전성기의 그것에 가까운, 풍부한 감각성을 나타내는 것이 있으나, 17세기의 10년대에서 20년대에 걸쳐 카라바지슴이 수용되었다. 그 과도기에 속한 작가로는 카스티야 지방의 오렌테, 발렌시아 지방의 리바르타, 안달루시아 지방의 로아레스 등이 있으며, 도메니코파(派)의 화승(火繩) 산체스 코탄의 정물화에는 금욕과 지적인 명상성(暝想性)이 주어져 있다.

리베라

[편집]

Jose Ribera(1588∼1652)

에스파냐의 화가. 발렌시아의 하티바에서 태어났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나폴리파(派)의 중심이 되었으며 리베라에 의해 비로소 에스파냐에 있어서의 바로크 리얼리즘은 충격적으로 강렬한 표현이 주어졌다.

추악함을 강조하려는 듯한 사실주의는 잔혹한 순교도(殉敎圖)에 있어서 특색을 발휘하게 되는데 여성상에서는 감미로움도 첨가(添加)되어 있어, 이 시대의 에스파냐인으로서 국제적인 대중성을 가진 오직 한 사람의 화가임을 알 수 있다. <성(聖) 바르톨로뮤의 순교(殉敎)> <성녀 아그네스> 등의 작품명이 부가되어야 할 것이다.

수르바란과 세비야파

[편집]

해외무역의 중심지로서 발달을 했던 안달루시아의 세비야가 17세기에 있어서 최대의 화파(畵派)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크로의 이행(移行)을 추진한 로아레스, 이론가이기도 하고 벨라스케스의 악부(岳父)이기도 한 파체코, 힘찬 필치의 노(老)에레라 등이 전반까지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1세대쯤 젊은 화가들이 바로크의 전성기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an, 1598∼1664)이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에스파냐 서부의 에스투라 마두라의 작은 읍(邑)에서 출생하여, 지방에 있는 화가 밑에서 수업(修業)을 쌓고 1629년 세비야에 정주(定住)하기까지 카라바지슴을 습득했으나, 이 고장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조각가 몬타네스의 영향을 받아 그의 활동은 필치를 살린 유동적(流動的)인 것이 아닌 조각과 같이 명확한 형체를 가진 것이었다. 그것은 종종 유장(悠長)한 의상의 수선(垂線)이나 평행선에 의해 안정되고 간결한 구성을 간직하고 있어 유장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소홀히 다루고 있지 않은 세부 묘사와 서로 어울려 존재와 신앙의 불변성의 증표가 되어 있다. 이 침묵에 싸인 신비적인 사실주의는 1650년 전후로부터 젊은 무리요의 예술에 인기를 빼앗김으로써 동요를 일으켜 마드리드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절명하였다. 따라서 걸작은 전반(前半)에 이루어진 것이다. <성(聖) 베드로 노라스코의 환상>과 <성(聖)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광> <성녀(聖女) 카시르타> 등 세비야 주변의 수도원을 위해 그린 작품이 많다.

수르바란의 친구로 세비야 출신의 또 한 사람의 천재적 화가인 벨라스케스에 관해서는 후에 기술하기로 하나 조각가·건축가이며 화가이기도 하였던 알론소 카노도 격렬한 기질 때문에 안정되지 못한 생활을 보냈다.

무리요와 레알

[편집]

17세기 후반에는 루벤스나 반다이크의 영향도 있어 두르바란에 있어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결고한 조각적 묘사가 아니고 공기의 진동을 느끼게 하는 것 같은 유연한 필치를 엿볼 수 있다. 그에 따라서 서정성도 한층 풍부해진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세비야의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Murillo, Bartolome Esteban, 1617∼1682)의 예술인 것이다. 감정의 진실성, 완성된 자유로운 조형력(造形力)에 있어서 난숙기가 되었고 그 감정의 섬세함과 감미로움에 의해 18세기 예술을 준비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인품도 그 예술과 같이 원만하여, 젊어서부터 이상주의적인 형체와 조화의 감각을 타고나 그 점은 특히 <순결한 잉태>의 주제로 잘 발휘되어 있다. <성(聖) 이사벨 여왕의 간호>도 대표작에 속한다.

이 작품이 놓여져 있는 세비야의 카리다(La Caridad=慈愛) 시료원(施療院)에는 <세속적 영광의 종말> <잠시 동안의 생명>과 같은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한 무서운 작품이 있다. 그 작자는 환 발데스 레알(Juan de Valdes Leal 1630∼1691)로, 성격이나 예술이 모두 무리요와는 대조적인 경쟁 상대였다. 이 리얼리즘도 또한 에스파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비야파(派)는 그들로서 끝나지만 이미 수도 마드리드의 화파(畵派)가 우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은 벨라스케스였다.

벨라스케스와 마드리드파

[편집]

(Diego Rodriguez de Silva Val-azquez, 1599∼1660)

에스파냐의 화가. 산체스 코엘료와 같이 포르투갈 귀족의 혈통을 타고났다. 세비야에서 에레라, 파체코에게 사사(師事)한 다음 1623년에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궁정 초상화가가 되었다.

세비야 시대에는 조각적인 명확한 형체감(形體感)과 명암대비의 테네브리슴을 보이고 있었으나, 루벤스와의 8개월간의 교류와 두 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통하여 밝고 유동적인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는 에스파냐에 있어서의 바로크적 사실주의 회화의 정점을 형성하는 것이나 동시에 그것은 자연의 단순한 사실을 초월하여 화가의 회화적 상상력의 산물(産物)이 되었다. 그 균형과 절도의 감각에는 에스파냐적인 정밀성과 장중(莊重)함이 있고 그 배후에 있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의해 풍부한 정신성이 실현되어 있다.

<주정꾼들(바쿠스의 대관)> <브레다성(城)의 함락> <직녀들> 등의 대구도의 작품 외에 다수의 초상화가 있어, 그 중에는 궁정의 어릿광대나 백치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 불행한 사람들도 왕족들과 다름없는 담담한 필치로 묘사하여 인간존재의 중요성과 그 본질적인 비극성에까지 추구해 들어갔음을 보여준다.벨라스케스의 영향을 받아 마드리드화파는 세비야파(派)를 능가할 정도의 세력이 되나 그 가운데서도 궁정화가인 페레다·카레뇨·클라우디오 코엘료 등이 주목을 끌었다. 세비야로부터 온 아들 에레라도 호방(豪放)한 바로크적 화가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의 에스파냐의 바로크 회화는 이미 리베라·수르바란·벨라스케스 등의 예술이 가진 진실·솔직함과 중후한 파토스가 결여되고 있어, 이에 국제적인 바로크 장식양식과 경쾌한 로코코 예술로의 접근을 느낄 수가 있다.

18세기 에스파냐 회화의 쇠퇴, 외국 작가의 활약

[편집]

-繪畵-衰退, 外國作家-活躍

1692년에는 나폴리의 장식화가 루카 조르다노가 초빙되었고, 그리고 호아킨트가 대작을 완성하였다. 18세기에는 부르봉가(家)의 펠리페 5세가 합스부르크가(家)를 계승하여, 에스파냐를 프랑스화(化)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건축과 조각은 바로크의 절정기를 맞게 되나 에스파냐 회화는 아주 쇠퇴해 버린다. 1752년에는 왕립 아카데미가 설립되고 프랑스의 화가가 초청되어 오고, 베네치아의 티에폴로, 신고전주의 화가 멩스의 활약이 뚜렷하였다.

18세기 말이 가까워져 고야가 등장할 때까지는 에스파냐 화가의 침체기(沈滯期)인데 그 중 몇 사람을 열거하면 루이스 알카사르는 프랑스 로코코 회화를 소화하여 귀족적인 풍속화를 그렸으며, 루이스 메렌데스는 산체스 코탄 이래의 전통적인 주방 정물화에서 성실한 사실주의를 회복시켰다. 프란시스코 바이에우는 에스파냐적인 풍경화에 있어 고야보다 선행하였다.

이베리아 제국과 식민지의 조각

[편집]

에스파냐의 조각

[편집]

-彫刻

에스파냐는 이미 16세기 전반에 있어서 알론소 베르게테나 환 데 후니 같은 소위 바로크적 감정표현을 지닌 대조각가를 낳았다.

17세기에는 발랴돌리드·마드리드·그라나다·세비야 등을 중심으로 하여 조각이 많이 만들어져, 모든 조각은 돌이 아니고 목재에 채색을 한 종교 조각으로서, 그 사실성은 조상(彫像)으로 된 그리스도나 성인(聖人)들이 품고 있던 종교적인 정념을 그대로 전달한 것을 목표로 하여 실물처럼 만들었다. 그 결과 조상(彫像)은 진짜 의복을 입히기 때문에 두부(頭部)만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성주간(聖週間)에는 그런 살아 있는 것 같은 조상이 차에 태워져 거리를 누볐다. 현금에도 행해지고 있는 이 민중적인 종교적 정열의 표현에는 그림보다도 실물과 같은 조각이 한층 유효한 것이었다.

발랴돌리드 페르난데스의 조각

[편집]

-彫刻

베르게테나 환 데 후니가 작품을 남겼던 발랴돌리드에서는 그레고리오 페르난데즈(Gregorio Fernandez=Hernandoz, 1576∼1636)가 격정을 누르면서, 그러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건실한 사실조각(寫實彫刻)으로 그 유례가 드문 깊은 종교적 파토스를 표현하고 있다. <피에타> <슬픈 마리아> <성녀(聖女) 테레사>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사진이나 극에 있어서와 같은 몸짓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박진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형적으로도 뛰어난 것임을 무시할 수 없다.

세비야파와 몬타네스

[편집]

페르난데스와 비교하는 환 마르티네스 몬타네스(Juan Martinez Montanes:1568∼1649)는 세비야를 중심으로 제작하였다. <성(聖) 프란시스코 데 보르하>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등이 유명하다. 세비야 지방에서는 고전주의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알론소 카노, 자연 존중을 추진한 베드로 데 메나, 17세기 말에는 호세 데 모라, 롤단 부녀(父女) 등이 있었다. 무르시아의 프란시스코 사르실료는 극단적인만큼 드라마틱한 표현을 구사하였다.

마드리드에서는 포르투갈인인 마누엘 페레이라의 활약이 주목을 받았다. 또한 나르시소 토메의 트란스파렌테 예배당과 도스 아그와스 후작저(侯爵邸) 등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건축과의 연계성은 독일-오스트리아의 바로크와 공통되는 점이 있다.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조각

[편집]

-彫刻

포르투갈에서도 조각은 대부분 성당용(聖堂用)이나 마샤드 드 카스트르는 왕의 기마상(騎馬像)을 만들었다.

브라질에서는 마나스 제라이스 지방의 콩고나스 드 칸포에서 아레이쟈니노(작은 불구자)라고 불리던 흑인 여자노예와 백인 건축가 사이에서 태어난 프란시스코 리스본(1738∼1814)이 유럽에서는 이미 쇠퇴되었던 종교적인 정열을 12인의 예언자상(豫言者象)에 새겨넣었다.

에스파냐의 공예

[편집]

에스파냐의 공예

[편집]

에스파냐는 전통적인 금속세공이 18세기에 발전을 본 외에 고블랭직(織)이나 도기(陶器)의 왕립공장(王立工場)이 신설되고, 고블랭직에는 멩스와 젊은 고야가 그 본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