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19세기의 미술/인상파의 회화
인상파
[편집]印象派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혁신적인 회화운동으로서, 그 새로운 생각은 종래의 색채 및 그 밖의 것을 일변하여, 현대로 발전하는 총체적인 기초를 만들고 있다.
인상파는 1874년 4월에, 파리 카프신가(街)의 전 나다르 사진관을 회장(會場)으로 하여 제일회전(第一回展)을 열었다.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드가, 세잔, 르누아르, 모리조, 기요맹 등의 그룹으로 화가·조각가·판화가 무명 협회전이라는 것이었는데, 회장에 우연히 모네의 풍경화에 <인상, 해돋이>라고 제(題)한 작품이 있어, 그것을 들어 <샤리바리>지(紙)의 비평가 르로아가 그저 인상을 그리는 일당(一黨)이라는 데에서, 인상파라고 야유한 연유로 인하여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그 인상파는 1886년 제8회전까지 계속되는데, 최초에는 압도적인 매도(罵倒)로 시작하여 화가의 고투(苦鬪)가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당시의 표현에 극단적으로 배치되는 화법(畵法)이나 인상파의 작품은 색채에서 혁명적인 참신성을 낳아서, 회화에 태양을 부활시켰다고 할 정도로 색채에 밝은 색감(色感)을 되찾았다. 그 작품 발표에는 이윽고 고갱이나 고흐도 참가했다.
19세기 말기에는, 살롱 화가에도 앵그르 시대의 단정함과 위엄이 결여되고, 틀에 박힌 관념에서 차갑고 깨끗이 그릴 뿐 완전히 막다른 곳에 부딪치고 있었다. 인상파는 그 교착 상태에 활로를 열어 참신성을 주입하고, 회화는 그것을 계기로 하여 급속도로 현대로 향했다.
게르보아의 집회
[편집]-集會
마네를 중심으로 한 청년화가의 모임으로, 토론과 연구를 통하여 인상파의 활동이 탄생했다. 당시는 현대와 달라서 관영(官營)인 단 하나의 전람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살롱이라고 불렀다. 살롱은 한 해에 한 번만 개최하는 단 하나의 발표기관이었다.
19세기 후반에는 화단도 각 경향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그 대립이 현저해지고, 살롱 중에서 보수적인 세력은 1863년에 혁신적인 작품을 대량으로 낙선시켰던 것이다. 그 중 마네나 미국의 화가 화이슬러가 있었는데, 낙선 화가는 그것을 부당히 여겨 정부에 강요, 별도로 낙선 화가 전람회를 개최했다. 그때 마네가 출품한 <풀밭 위의 식사>는 누구에게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숲속에 피크닉을 간 파리 사람들을 그렸는데, 묘사가 참신함에도 불구하고 그 화면에서 특히 여성을 나체로 그렸기 때문에 마네는 풍속을 문란케 한다고 공격을 받았다.
이어 1865년 마네는 살롱에 그의 대표작인 <올림피아>를 출품했는데, 이것도 미풍을 해친다는 이유에서 이전보다 더욱 공격을 받았다. 마네는 공격을 피하여 일시 에스파냐로 여행을 했는데, 귀국하자 그 과감성에 끌려 주위에 청년화가들이 모여들었다. 그 모임은 1866년부터 몽마르트르의 크리시가(街)에 있는 카페 게르보아에서 열렸는데, 문인 졸라도 참가하여 성의 있는 토론이 반복되었다. 모임은 보불전쟁(普佛戰爭)으로 중단되었지만 전후에도 계속하여 모이는 화가들끼리 인상파의 전람회가 열렸다.
인상파의 표현
[편집]印象派-表現
인상파가 등장한 시대는, 일반적으로는 거침없는 묘사나 아름다운 윤곽이 존중된 시대인데, 모네처럼 빛 속에 형상을 용해시키는 묘사는 최초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상파는 새로운 표현을 취했다. 그 하나는 종래의 음영(陰影)을 아주 일변시킨 것이다. 종래는 빛의 효과를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음영은 될 수 있는 대로 짙게 가라앉혔으나, 인상파는 음영도 명도(明度)가 변화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음영에도 풍부한 색채를 두었다.
인상파는 첫째, 색이나 형상이나 빛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빛이 없으면 형상도, 빛깔도 암흑으로 변할 뿐이다. 색은 빛에 의하여 존재한다. 이전에는 나뭇잎은 초록색으로 정해서 그렸지만, 빛의 변화작용에 따라 그 초록색도 변화되어 비치는 것이다. 또 붉은 천에 푸른 항아리를 놓으면, 항아리에는 천의 붉은색의 반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아리를 청색만으로 그릴 수는 없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관념적인 고유색만으로 생각지 않는다. 색은 빛의 관계에서 성립하여, 인상파는 빛이야말로 모든 것의 원동력이라 생각하고, 빛의 작용과 아름다움을 모든 면에서 부활시킬 것을 궁리했다.
예컨대 종래의 어두운 음영을, 모든 색채로 바꿔 놓기만 해도 화면의 명도는 훌륭하다. 색채를 가장 밝게 놓는 방법으로서 그들은 빛을 분석하여 스펙트럼에 나오는 원색을 존중하는 외에, 색을 병렬적으로 놓는 일을 생각했다. 그것은 그림물감을 섞어 흐린 혼색(混色)을 만드는 것을 피하기 때문이며, 다시 진정하여, 예컨대 초록색의 경우에는 노랑과 파랑을 미세하게 화면에 병치하여, 보는 사람의 망막이 그것을 녹여서 녹색으로 느끼도록 하는 등의 새로운 방법을 생각했다.
인상파의 생각은 과거의 화가 중에도 가끔 보이지만 그것에 한층 이론을 붙여 발전시킨 것이 인상파였다. 암색(暗色) 대신에 밝은 색을 써서 어두운 점을 완전히 추방하였기 때문에, 인상파의 작품은 어느 부분이나 신선하게 빛을 띠고 있게 마련이다. 여하간에 인상파는 햇빛 아래서의 제작을 주장하고 있는데, 어두운 화실 내에서의 작업이 아니라 이전부터도 풍경의 묘사에 있어서 항상 자연의 명도를 구하여 햇빛 아래에서 제작한 사람들을 외광파(外光派)라고 불렀다.
마네
[편집]Edouard Manet (1832∼1883)
프랑스의 화가. 마네는 직절적(直截的)인 간명(簡明)을 존중하여, 자잘하고 복잡한 묘사를 즐기지 않았다. 아름다움을 과시하기보다 진실의 전달을 존중했다. 인물도 소위 미화된 묘사가 아닌 현실 그대로 노출하는데 그 간명성은 이상할 만큼 신선미를 발하여 새로운 회화에 선구자적인 존재였다.
마네는 파리의 쟁쟁한 사법관(司法官)을 아버지로 하고 태어나, 처음에는 부친의 반대를 당했으나, 염원을 달성하여 쿠튀르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형식주의에 만족할 수 없어서 별도로 에스파냐 대가들의 강한 파악에 끌리고 있었다. 살롱 에서의 처녀 등장은 1859년이었는데 1863년에는 대량 낙선 속에 끼었다. 낙선 전람회에 출품한 <풀밭 위의 식사>는 표현의선명도도 곁들여서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어 <올림피아>의 출품은 비난 위에 불을 붙인 결과를 낳았는데, 그 무렵부터 마네를 둘러싸고 게르보아 집회가 시작되었다. 전기의 마네는 분명 에스파냐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작품에는 그 밖에도 <피리 부는 소년>(1866)과 <발코니>(1869)가 있는데 그 묘사는 긴밀하여 특히 파트가 힘차다.
이어 보불전쟁(普佛戰爭)을 거친 다음 인상파 전람회가 개최되는데, 마네는 살롱에서의 비난에 이어 계속 냉대를 받으면서도 그 살롱에서의 제압이 오히려 하나의 집착(執着)이 되어, 인상파의 전람회에는 직접적인 참가는 하지 않았으나 제작은 후반기에 들어와 한층 더 인상파가 즐기는 밝은 색을 써서, 감각적이고도 밝은 화면을 만들고 있다. 후기에는 <폴리 베르제르의 주점(酒店)>(1882) 등이 있으며, 생전에는 확고한 영광을 얻지 못했으며 최만년(最晩年)은 불수증(不髓症)으로 고생하지만, 만년의 파스텔도 아름답다.
올림피아
[편집]Olympia
1863년 마네 작. 루브르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이 진열되었을 때 극단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나체는 일반적으로 이국의 정서나 이야기 등으로 아름답게 그리는 것으로만 여겼으나, 그것을 현실세계에 끌어내어 만만치 않게 묘사한 것이 자극의 이유가 되었다.
여인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고, 방금 증정되어 들어온 꽃다발을 하인이 바치려고 하는 순간이다. 침대 오른쪽에는 고양이가 꼬리를 치켜들고 있다. 화면은 백포(白布)가 크게 자리잡고, 육체는 밝게 하고, 반대로 모든 배경은 어두운 색으로 하여 명암을 크게 대조시키고 있다. 여인의 육체는 현실적인 균형을 위해 한층 더 하나의 신선미를 주었고, 그 현실감을 뒷받침하여 든든한 파트에 육체는 안으로 강한 긴장감을 가득 나타냈다. 백포의 흰빛도 안정감을 준다. 마네는 미끄러운 둥근 모양을 배격하고 육체에서 백포까지, 약간 평면으로 배치하듯 커다란 묘사를 나타냈는데, 그것은 화면에 참신한 명확성을 자아냈다. 더욱이 여인의 얼굴은 의외로 순진하고, 하인이 들고있는 꽃다발이 피어나듯 아름답고 화려함을 더하여 그 명확성과 더불어, 단적으로 마네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모리소
[편집]Berthe Morisot (1841∼1895)
프랑스의 화가. 아버지는 지방의 지사(知事)이며, 처음에는 코로에게 배웠으나 1868년에는 마네를 만나 그 제자가 되었다. 마네의 작품에는 자주 등장하는 여성이지만, 마네 밑에서 재능을 기른 모리소는 1874년에 마네의 동생과 결혼했다. 제작을 계속한 모리소는 인상파의 전람회에는 제1회부터 참가했다. 가정은 부유하고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어서, 작품은 신변의 평화로운 생활을 그려 밝은 신선미를 보이고 있다. 여성적인 작품의 전형(典型)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교양을 갖춘 모리소의 작품은 자유로운 터치에다 단아(端雅)한 감각을 빛냈다.
기요맹
[편집]Armand Guillaumin (1841∼1927)
프랑스의 화가. 파리태생으로 생활 때문에 처음에는 어떤 토목과에 잠깐 근무하면서 여가에 회화를 그렸다. 연구소에서 세잔과 피사로를 알게 되어 최후까지 친교를 계속했다. 기요맹은 누구의 감화도 받지 않은 제작으로, 갈색이나 붉은색·자색을 많이 쓰는 반면에, 개성이 강한 매력을 나타내며, 피사로나 모네처럼 세련되지는 못했으나 야성적이면서 중후한 매력을 보이고 있다. 마침 1891년에는 복권에 당첨되어 그 이후부터는 네덜란드와 그 밖의 지역의 풍경을 그리면서 자유로운 제작을 했다.
피사로
[편집]Camille Pissarro (1830∼1903)
프랑스의 화가. 피사로의 작품에는 온기가 통하는 듯 따스한 감정이 충만하다. 인상파의 이론을 실천하여 섬세한 터치로 색채를 쌓음으로써 색채는 아로새기듯 빛나는데, 피사로는 단지 색채를 물체의 빛깔 이상으로 보는 자기의 감정의 언어로 하여금 섬세하게 감정을 펴고 있다.
피사로는 쿠바에 가까운 생 토마섬에서 태어났으며, 12세 때에 파리로 나가 도화(圖畵)를 익힌 다음 회화에 뜻을 두고 1855년에 재차 동경하던 파리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코로와 도비니의 풍경화에 매력을 느꼈고 연구소에서 모네와 세잔을 알게 되며 그 후에도 외광(外光) 아래에서 풍경 그리기에 열중한다. 그는 루브센에 주거를 두고, 보불전쟁이 시작되자 전화(戰禍)를 피하여 런던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금 모네를 만난다.
두 사람은 런던에서 터너를 만나서 빛의 표현에 대한 지도를 받고 인상파의 표현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전후 귀국해 보니 그의 집은 전화로 황폐되어 있었다. 피사로는 얼마 동안 퐁토아스에 살며 거기서 세잔을 만나 그를 인상파의 표현을 끌어들였다. 거기에서 1874년에 친구들과 더불어 인상파 전람회를 결성했다. 피사로는 인상파전(印象派展)의 중심인물이 되어 그의 생애는 제작으로 일관했다. 만년에는 루앵 항구나 파리의 오페라가(街) 등의 풍경을 그렸다. 근대의 가장 훌륭한 풍경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감정은 섬세하고, 초기의 농원(農園)의 연작(連作)도 또한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붉은 지붕
[편집]1877년, 피사로 작. 루브르 미술관 소장. 인상파 이전의 풍경화는 자연의 아름다운 전개나 커다란 성격을 추구하지만, 인상파의 작품은 마을의 아무것도 아닌, 한쪽 귀퉁이나 농원의 일부 등, 아무 곳에서나 아름다움이나 매력을 찾아 내고 있다.
피사로의 아주 초기의 작품은 보불전쟁으로 잃어버렸기 때문에 <붉은 지붕>은 비교적 초기에 해당되지만, 이미 인상파의 화법을 완전히 보여주고 있다. 섬세한 터치에 색채는 잔잔하게 고동치듯 생기를 띠고, 자잘한 빛깔이 서로 융합하여 이른 봄 하루의 농가는 햇빛의 따스함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전경(前景)의 풀은 녹색으로 하고, 과수(果樹)의 가지는 부드럽고 태양을 받아 흰 벽이 반사하고 있다. 거기에 붉은 지붕이 매력을 굳혀 화가는 농원의 생활에 축복이라도 주는 듯하다.
모네는 흔히 새로운 발견에서 행동한 데 비해 피사로는 발견은 적지만, 작품은 중후한 짜임새로 밀도가 있으며 성실과 따스함이 가득 차 있다.
모네
[편집]Claude Monet (1840∼1926)
프랑스의 화가. 인상파의 중심이 된 한 사람으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브르 상인으로서, 모네는 그 토지의 부단을 맡아서 일찍부터 풍경을 그렸다. 이어 파리에 나가 연구소에서 피사로와 만나고, 글레이르의 문하(門下)를 거쳐 르누아르, 시슬레와 친구가 되었다. 후에 인상파 인물들은 자연히 모이게 되었다.
모네는 풍경화를 자유로운 입장에서 진행시켰는데, 공교롭게 보불전쟁을 만나 런던으로 피난하여 거기서 피사로와 재회, 둘이서 연구를 거듭했다. 전쟁이 끝나 귀국 후에는 파리에 가까운 아르장퇴유에서 살고(1872∼1874) 이듬해에는 배 위에 화실을 설치하는 등 모네는 물과 빛을 한없이 사랑하여 빛의 묘사를 계속해 나아갔다.
모네는 물에 대해서는 대가(大家)로서, 수면에 작용하는 빛의 갖가지의 강약을 미묘한 감각으로 그리고 있다. 그 색채는 풍부하며, 관찰은 정밀하다. 모네는 빛에 용해되는 듯한 묘사를 즐겨했는데, 파리의 생 라자르 역(驛)이나 루앙 대성당 등에 많은 연작(連作)을 낳고 있다. 또한 단순한 낟가리를 십여 점이나 그린 것도 모네이며, 모네는 빛의 관계에서 같은 낟가리가 그 때마다 다른 매력을 제공하는 것을 증명했다. 그의 생애는 조용했으며, 단지 제작에만 전념했다. 1883년경부터는 차차 지베르니에 들어앉아서 만년은 인상파의 영광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간소한 생활속에서 오로지 제작에만 열중했다. 같은 제재를 되풀이하여 그렸지만, 수련(睡蓮)의 연작이 특히 유명하다.
루앙 대성당
[편집]Rouen Cathedrals
모네 작. 루브르 미술관 소장. 인상파 작품은 빛의 현상을 자세히 보고, 사물 위를 빛이 어루만지고 반전(反轉)하는 자태를 섬세하게 색채로써 차례로 나타내는데, 그 빛의 표현에서는 특히 모네가 미묘하다. 모네는 빛의 작용에서, 전적으로 같은 정경을 다른 매력으로 그리려는 것을 되풀이해서 추구했다.
이 루앙 대성당에서도 모네는 한 작품마다 새로운 매력을 찾아 내고 있다. 루앙의 본사(本寺)는 고딕에서도 후기에 속한 건축으로서, 이에 그 무렵의 건축은 장식한 위에 장식을 거듭하여, 그 사원도 공중에 레이스를 펼친 듯한 화려함을 보이고 있다. 모네는 정면에서, 또한 이와 같이 비스듬히 옆에서 그리는데, 동시에 흐린 날이나 갠날을 각각 다른 분위기로 그리고 있다.
인상파 이전의 회화가 일반적으로 가장 존중한 것은 물체나 인상(人像)이 입체로 된 완전한 윤곽이었다. 그러나 모네는 빛을 주안(主眼)으로 한만큼, 형태의 일체를 빛에 용해시키고 있다. 사원의 창(窓)이나 조각, 혹은 종탑은
모네의 부드러운 용해에서 일층 레이스처럼 되고, 본래 어두운 회색의 석조건축은 다시 모네의 손에 의해서 하나의 색조로 표현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한없는 억양을 낳고, 음영(陰影) 속에도 색을 빛내어 몽환(夢幻) 속에 보는 듯한 매력까지 창조해 내고 있다.
모네는 그것을 도취된 대로 그리고 있다. 그 단조한 돌의 색조는 모네에게는 색채의 신비가 담겨진 세계였으며, 모네의 관찰과 기술은 자세히 그것을 포착하여 기분좋은 색채의 기쁨으로 이끌어 갔다.
시슬레
[편집]Alfred Sisley (1839∼1899)
프랑스의 화가. 시슬레는 모네나 피사로와 같은 이론을 가지고 그렸기 때문에 어떤 시기에는 같은 묘사를 나타는데, 피사로의 농밀(濃密)이나 모네의 풍요에 비하면 다소 약하긴 하지만, 밑바탕에 조용한 애수를 숨기고 있어 한층 밝고 맑은 면을 보이고 있다.
초기를 살펴보면 다른 소재에는 흥미가 없고 생애를 풍경화로 일관하는데, 시슬레는 영국인으로서 파리에서 태어나 얼마 안 되는 기간을 영국에서 보낸 외에는 시종 프랑스에서 세월을 보냈다. 회화에 뜻을 둔 시슬레는 글레이르 문하에 들어가 모네와 르누와르와 만난다. 아버지는 실업가였는데 보불전쟁의 여파로 파산된 후 사망하자, 시슬레는 회화를 하기로 결심했다.
인상파의 전람회에는 최초부터 참가했는데, 섬세하고 꿈꾸는 듯한 성격으로 인하여 그 풍경화는 맑은 선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이해를 얻지 못하여, 그의 생애는 아주 극심한 빈곤으로 고생했다. 그는 1879년 이후는 퐁텐블로에 가까운 모레에 살면서, 루앙강의 다리로부터 교회·강기슭 등을 싫증내지 않고 그린 외에, 각지를 다니면서 다듬어진 풍경화를 낳았다.
시슬레는 물을 즐겨 그린 모네에 대하여 하늘의 묘사가 교묘하며, 하늘의 변화를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묵살을 당하면서도 화풍(畵風)을 바꾸지 않았으며, 곤궁(困窮)은 계속되어 최후에는 아는 사람과도 멀어진 채 모레에서 죽었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 사고한 시슬레의 풍경화는 맑은 시운(詩韻)을 가득히 담고 있다.
드가
[편집]Edgar Degas (1834∼1917)
프랑스 화가. 드가는 파리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회화에 끌린 드가는 평범한 스승에게서 배웠으나, 어느 날 앵그르를 방문하여 데생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드가는 그 말을 잊지 않았다. 23세 때에 이탈리아로 가서, 초기는 고전적인 엄정(嚴正)을 존중하여, <벨레리가(家)의 사람들>(1860)을 그렸다. 그 후는 귀국하여 인상파전(印象派展)에 참가했는데, 소재는 경마에서 극장으로, 거기서 다시 춤추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드가는 독창적인 화가로 생동적 활동에 흥미를 가졌고, 그 관찰은 예민했다. 그는 상식적인 구도를 버리고, 생각한 경면의 자르는 방법을 생각했다. 또한 상하로부터 올려보고 내려보는 구도를 취하고, 그것과 동시에 빛도 또한 극장 밖의 광선이 내는 여러 가지 작용을 끄집어 내어, 그의 묘사는 새로운 각도에서 전혀 없던 정확함과 신선미를 낳고 있다. 더구나 데생은 엄격하여, 그 의미로는 인상파 속에 속하면서도 고전주의적인 입장을 잃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춤추는 사람이 수없이 나타나는데, 미화(美化)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보여주는 재미있는 면을 잡아 강하게 그리고 있다. 르누아르에게서는 나부(裸婦)를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드가는 무희(舞姬)의 화가였다. 각광의 반사나 주악의 좌석에서 보는 무희들, 휴식의 순간이나 분장실과 그의 연습광경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드가는 찌르는 듯한 신랄함 때문에 친구도 적고 생활을 고독하게 끝마쳤는데, 드가는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중년부터는 눈을 앓아 점차 악화되어 유화의 신중한 제작을 견디지 못해 파스텔화도 함께 그렸고 다음에는 그 파스텔로 그리는 것마저도 차차 거친 터치로 그리지만, 오히려 색채는 빛나는 무희로부터, 목욕하는 나부 등에서 뛰어난 매력을 남겼다. 그러나 만년에는 장님이나 다름없이 되어 그때부터는 이전에 손을 댄 일이 있었던 조각을 손으로 어루만져 제작했는데, 작은 말(馬)이나 나부의 조각은 굉장히 약동(躍動)하는 작품이다.
어깨끈을 매는 무희들
[편집]1897∼1899년, 드가 작. 오하이오 트레드 미술관 소장. 드가는 눈병을 앓게 되자 유화의 제작이 무리하게 되어 유화를 중지하고 파스텔화를 그렸는데, 그 파스텔화는 만년에 이를수록 크게 빛나고 있다. 파스텔은 초크와 같은 성질인만큼 원래는 우아한 것이었으나 드가는 수채(水彩)나 유화 그림물감을 섞는 등 여러 가지로 궁리하여 전혀 없었던 색채의 세계를 낳고 있다. 거기에 얼른 보아 아무것도 아닌 장면을 좁은 각도나 구도를 잡는 방법에서 놀랄 만큼 생동시키는 것도 드가의 특기 중의 하나며, 분장실 안에서 의상을 매만지는 이 장면도 부분적으로 조리개를 맞추어 약동하는 정경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두 사람은 어깨끈을 고치고, 바야흐로 한 사람은 앞을 향해 있는데, 다만 세 사람의 인상(人像)으로서 군상(群像)을 보는 듯한 동적(動的)인 것으로 그렸으며, 얼굴의 각도나 손의 위치에서 그것들은 공간에 동적인 요소를 낳고, 이에 상응하여 빛도 또한 그 명암을 대조시켜서 화면에 생기를 부여하고 있다. 거기에 색채는 전등불의 반사나 터치의 강도로, 인분(鱗粉)을 뿌리는 듯한 빛깔을 발하여 좁은 장면이지만 무희들을 발랄하고 약동하는 듯이 그려내고 있다.
로트렉
[편집]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
프랑스의 화가. 로트렉은 상반신은 성인이지만 하반신은 어린애인 불구였으며, 코안경으로 한층 더 기형(奇形)을 느끼게 했다. 그는 남프랑스 태생으로 프랑스 대귀족의 아들이었다. 알비시(市)에서 출생, 14살 때 저택의 넓은 방에서 굴러 한 쪽 발이 부러지고, 요양지에서 다시 넘어져 남은 한 쪽 발마저 부러졌으며 오랜 세월 동안 혈족결혼으로 인한 이상 체질로 발은 그 이후 발달하지 못했다.
충분한 교육을 받으면서 상류와 영달(榮達)로 나가는 길이 빗나가, 로트렉은 회화에 몰두했고, 동시에 밤거리를 그의 생활로 삼아 세월을 보냈다. 처음에는 파리에 나가 일시 코르몽에게 배우고, 우연히 파리에 나타난 고흐를 알게 되는데, 아카데믹한 교육이 그를 끌어들인 것은 아니고, 그의 작품은 물랭 루즈의 무도장으로부터 서커스로, 나중에는 창가(娼家)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천품의 재능으로 데생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통분(痛憤)을 다한 관찰은 인간과 인생의 현실을 묘사, 더할 나위없는 매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드가를 존경하고 있었는데, 같은 무도장이나 극장을 그릴지라도 그의 작품에는 세기말의 퇴폐적인 색채가 짙게 색칠되어 그가 그리는 여인들은 독화(毒花)의 매력마저 띠고 있다. 작품에는 <물랭 루즈>(1890)나 <라 굴뤼>(1892) 외에 극장이나 창가(娼家)의 작품이 있으며, 물랭 루즈를 위해 제작한 포스터는 포스터로서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그러나 매일 밤 마시는 술은 뇌를 상하게 하여 1899년에는 누이이의 병원에 입원했고, 그 동안에도 기억을 더듬어 서커스의 작품을 그렸다. 퇴원 후에도 건강은 좋지 않아 어머니가 기다리는 남프랑스로 돌아가 37세로 생을 마쳤다.
물랭 루즈에 들어가는 라 굴뤼
[편집]1892년, 로트렉 작.개인 소장. 물랭 루즈는 그 당시에 개장하여 인기를 모은 무도장으로서, 여흥(餘興)으로 프렌치 캉캉이 있으며, 라 굴뤼(많이 먹는 사람)라는 별명을 가진 무희(舞姬)가 분방한데, 그의 포스터에 등장하는 기골(氣骨)이 없는 남자 발랑탕도 인기자였다. 그 무희는 원래 알사스의 세탁부였는데, 야성적인 육체로 분방하게 춤을 추는 것으로 삽시간에 인기를 모았다.
매일 밤 물랭 루즈를 찾는 로트렉은 무희가 무도장에 들어가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친구와 함께 도착하는 장면인데, 왼편 여자는 얼굴을 반만 그린 반면 배경의 벽은 붉게, 좌우의 검은 옷에 대해서 중앙의 자태가 커다란 대조가 되어 선명하고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무지하고 본능 그대로인 그녀는, 틀어올린 머리 아래로 얼굴에는 퇴폐의 상처를 띠고 있다.
화가의 눈은 벗기듯 사실을 파헤쳐 숨김이 없다. 그의 관찰은 통렬하고, 그것은 사실을 쪼개듯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밀도 짙은 색채, 쾌락을 띠는 밤공기며, 쾌락의 이면(裏面)까지 그려 작품은 괴상한 매력으로 충만해 있다. 로트렉은 후에 장날 가설극장의 연예인으로까지 떨어진 그녀를 위하여 그 가설극장의 간판을 그려 주었다.
신인상파
[편집]新印象派
신인상파는 인상파의 색채에 대한 이론을 한층 과학적으로 명백히 한 것인데, 쇠라를 중심으로 극도로 이론적인 제작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인상파가 눈에만 의지하는 색채표현을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인데, 1886년 제8회 인상파 전시회에 쇠라의 작품이 발표됨으로써 또다시 놀라게 했다. 그것은 당시 과학자에 의하여 색채과학의 연구가 급속도로 발전한 데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쇠라와 병행하여 시냐크도 같은 연구에 몰두했다.
색채는 본색으로 칠하는 편이 팔레트 위에서 섞어서 만든 색보다도 한층 선명한 것이다. 인상파는 그러한 혼색(混色)을 꺼렸으나 철저하지는 못했다.
다시 색과 색의 관계에서 광도(光度)·선명도(鮮明度)를 최대한으로 나타내는 데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방법은 색채 과학의 원칙을 크게 앞으로 내세워 순수한 색을 주장, 색과 색을 혼합하는 일을 피했다. 또한 해조(諧調)·조화를 중요시하여 광도의 배합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실제적 화법으로서는 보통 터치로 그리는 것이 아니고 총체적으로 색을 작은 점으로 하고, 색의 강약의 이동에서 거기에 일반적으로는 혼합하여 내던 색을 거꾸로 자잘한 점으로 본래 색을 놓고, 거리를 두고 보면 사람의 눈은 그것을 자연히 혼색처럼 받아들인다는 방법 등을 실시했다.
그 세미한 점으로 그리는 방법을 '점묘(點描)'라고 부르고 있는데 문제점은, 이론적으로는 명확하지만 기계적인 구성이 되는 것으로 일층 깊은 내용이나 복잡한 아름다움을 대할 적에 그 방법의 단조성(單調性)은 방해되기 쉽다는 데 있다.
쇠라
[편집]George Seurat (1859∼1891)
프랑스의 화가. 쇠라는 파리의 집달리 가정에서 출생, 그 생애에는 연구와 제작 외에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으며, 처음에는 데생 학교에서, 다음은 1878년부터 2년 동안 미술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그 후에는 단독 연구에 들어가, 특히 색채연구의 과학서적에 몰두하고,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고인(古人)의 작품형태 명암 등에 공통된 조화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 연구는 명암의 해조(諧調)나 형상의 균형을 주제로 한, 수많은 콩테의 데생에 나타나 있다.
쇠라는 1884년에 처음으로 화단(畵壇)에 창립된 앙데팡당전(展=심사 없는 전시회)에 <수욕(水浴)>을 출품하였는데, 이어 1886년에는 인상파의 제8회전에는 <그랑드 자트의 일요일>을 출품했다. 그것은 정혼(精魂)을 만들어낸 대작으로서, 일반의 무시와는 별도로 신인상파의 발전을 확립시키고 있다. 쇠라는 한 작품을 제작할 때마다 많은 시간을 요했으므로 작품이 적고, 1891년 미완성의 <서커스>를 남겨 현대회화에 갖가지 교시(敎示)를 부여하면서 3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쇠라에 이어서 그와 같은 이론과 기법으로 제작활동을 한 사람은 폴 시냐크이다.
그랑드 자트의 일요일
[편집]1884∼1886년, 쇠라 작.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쇠라는 빛과 그림자의 균형 외에, 형상에 대해서도 수평이나 수직의 선과 형상에서 생기는 기울지 않는 균정(均整)에 최대의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랑드 자트 강가에서는 일요일을 맞아 파리사람들이 피크닉을 나왔다. 유행복을 입은 부인들, 페트인 개와 원숭이·어린이를 데리고 나온 부인이 조용히 산책하며, 물에서는 보트를 젓고 있다. 이 평화스러운 오후의 한때를 쇠라는 커다란 화면에다 구도했다. 약동이라든가 격렬은 쇠라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다. 쇠라는 조용한 성품이었다.
이 작품을 위하여 쇠라는 인물이나 개까지 신중한 습작을 했고, 작품은 그것들을 끼워 넣듯이 구성되어 있다. 그 인물은 간소하여, 그 균형과 배치로 화면에는 소음이 소멸하는 듯 조용함과 정돈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화면에서는 맑은 물과 빛을 띤 풀숲과 그늘에 묻힌 풀의 녹색이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시냐크와 달라서 사색적인 성격을 띠어 부드러우며, 이론적인 구성에 따른 고루하고 단조로움을 커버하여 그 물가로부터 풀숲까지, 그 하루의 행락(行樂)을 현대의 꿈인 듯한 밝은 매력으로 둘러싸고 있다.
시냐크
[편집]Paul Signac (1863∼1935)
프랑스의 화가. 쇠라의 <수욕>을 보기까지는 전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결합되지만, 시냐크는 쇠라보다 한층 강렬하게 빛나는 빛이나 가장 높은 색채를 강조할 뿐 그 색채는 선명하지만, 쇠라의 조용하고 우아한 시정(詩情)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후기 인상파
[편집]後期印象派
고정된 하나의 이론으로 다수의 사람이 그릴 때에는 필연적으로 유사한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인상파의 제작은 새로운 색채나 감각의 세계를 개척했으나, 같은 색채의 법칙으로 그리는 이상 피사로나 모네, 시슬레에게는 조그만 공통점이 나타나 있다.
다만 그들 작가는 감각에 의하여 각자의 성격을 선명하게 했다고는 하지만, 빛의 분석만이 전부가 아니다. 모든 화가가 같은 궤도를 걸어가는 데는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인상파 운동은 새로운 세계를 열었으나, 동시에 지금 한 가지 달성한 것은 개성의 개방이었다. 따라서 인상파 특유의 표현에 먼저 반대한 화법은 그 인상파 중에서 나왔는데, 그것을 후기 인상파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각자의 견해나 체질에서 별개의 목적을 추구하여, 자기만의 표현이나 양식을 존중하는 것인데, 그 개인적인 추구와 발견은 다시 회화의 본연의 자세에 더욱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그것은 세잔, 르누아르 등이 그러하여, 세잔은 자연 속에서 험한 내용을 탐구하고, 르누아르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하여 기쁨의 표현을 찾고, 고갱은 이지적으로 구성하여 새로운 회화시(繪畵詩)를, 거기에 고흐는 충동을 느끼고 격정적인 매력을 그려 내는 등 각 개인이 제각기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다.
그 경향은 현대로 옮겨 오면 일층 선명해져서, 각 개인이 완전히 자기만의 매력을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인상파 사이에서 일어난 개인적인 추구는 회화 위에 제각기 미지의 세계를 제공하여 후에 발전하는 데에 커다란 길을 열고 있다.
세잔
[편집]Paul Cezanne (1839∼1906)
프랑스의 화가. 세잔은 생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근대 회화의 거봉(巨峯)으로서 높이 솟아나고 있다. 살롱에는 해마다 출품했으나 입선한 것은 1882년 단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그 제작은 그 시대에 누구보다도 강하고 높은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세잔은 모자 제품업에서 은행가가 된 사람을 아버지로 남프랑스의 엑스 앙 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중학 시절의 친구로서는 문학가 졸라가 있다. 처음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률을 배우지만, 회화에 전념, 파리로 나와서 연구소에서 독학을 시작했다. 그때 피사로를 만난다. 그러나 최초에는 일시 실망하고 귀향하지만, 다시 파리에 나와 결의를 굳게 하고 연구소에서 독학을 계속하여 마네를 둘러싼 화가들과 어울린다. 이어 보불전쟁을 거친 다음 1872년부터 1874년에 걸쳐 파리에서 가까운 퐁트와스에 갔다. 거기에서는 또한 피사로와 만나고, 피사로의 말에 계발(啓發)되어 갑갑한 작풍(作風)을 일변하여 색채는 밝게 하고, 구성도 강한 질서를 잡고 있다. 인상파의 제1회 전시회에는 <목매다는 집>(1873)을 출품했는데, 세잔의 생애는 단지 제작만을 일삼았고 이 작가만큼 학도다운 연구로 세월을 보낸 사람도 없다.
이어 1877년에는 인상파 전시회에 정리된 출품을 했으나 인상파에 대한 조소는 계속되어, 세잔은 상심한 기분에서 엑스에 은거하여 제작하는 일이 많았다. 세잔의 연구는 고독하였고,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엄격한 성질은 점점 엄격함을 더해가는데, 1895년에 세잔은 작품 150점을 모아서 그의 생애에 단 한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것은 일반에게 무시되었으나, 일부 청년화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세잔은 엑스에 은거하고, 그 때까지도 추구를 계속하던 중에, 1906년 10월 풍경을 그리다가 소나기를 만나 넘어진 후 수일이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
그 작품은 강건하여, 종래의 회화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어떤 타협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고향인 엑스에는 광선이 강하고 자연은 험준하여, 세잔은 고향의 생트 빅투아르산을 붙들고 늘어지듯 계속 그리고 있다. 그 외에 수욕(水浴)의 제작에도 바쁘게 손을 댔다. 또한 정물(靜物)의 제작도 유명한데, 작품은 감정을 주로 하는 표현이 아니라, 강하게 이지적이었기 때문에 하나하나 해명하듯이 표현을 연구하여 그 이론이나 방법이 다음에 탄생하는 현대의 제작에 강한 교시(敎示)를 부여하고 있다.
생트 빅투아르산
[편집]-山
1885∼1887년, 세잔 작. 런던 아트르드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소장. 세잔은 조형(造型)에 대한 강한 과제로서, 사과나 정물의 단조한 모양을 싫증내지 않고 추구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대자연의 생생한 힘의 표현으로서, 동시에 조형의 가장 복잡한 소재로서 고향의 생트 빅투아르산을 되풀이하여 그리고 있다.그 산은 어떤 때는 접근하여 산의 표면을 거칠게 하고, 어떤 때는 화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망을 앞으로 하여 우뚝 솟게 그리고 있다. 화면에서는 모퉁이에 있는 밭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육교까지, 넓은 전망이 아주 팽팽하게 그려져 있다. 산은 자색을 띠고 있는데, 묘사는 일전(一轉)하여 전경(前景)의 소나무는 가지가 뻗고 가지는 움직여 공간이 진동하듯 그려져 있다. 자연은 세잔에게 있어서는 엄숙하고, 그것은 두려운 힘인 것이다. 그 엄숙함을 어떤 모양으로 나타낼 것인가, 세잔은 그 새로운 문제에 모든 힘을 쏟는다. 그 철저한 추구는 세잔의 제작에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풍경에서 찾는 것은 이른바 재미있는 정경은 아니다.
그는 서정이나 도취를 멀리하고, 긴박한 자연을 재현한다. 이 화면에서도, 푸른 하늘과 산과 땅에, 색채는 눈을 씻듯 신선하지만, 신선을 넘어서 작품은 어떤 정신의 깊이를 전해 주고 있다. 세잔은 정물에서 물체의 존재의 존엄성을 찾고, 풍경에서는 자연의 엄격을 찾았으나, 근대 회화에서 그의 제작만큼 정신의 높이를 가르쳐 주는 작품도 없다.
르누아르
[편집]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인상파 중에서 세잔의 엄격에 대하여,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게 화려한 멋을 보인 것은 르누아르이다. 세잔이 풍경속에 자연의 정신을 품듯이 르누아르는 여인을 그려서 미(美)의 도취를 자아내고 있다.
르누아르는 리모주에서 재봉사 집안에 태어났는데, 얼마되지 않아 양친을 따라서 파리에 나왔다. 그러나 가정은 가난하여, 일찍부터 도기공방에 첨화직공으로 들어가 일했다. 그 동안에도 데생을 배우고 미술관에 다녔는데, 도기에는 그림을 붙이는 기계가 발명되었기 때문에 일터를 단념하고 회화에 전념했다. 그 때에 그는 글레르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동문으로 모네와 시슬레가 있어 굳은 우정으로 맺어진다. 처음에는 살롱에도 출품했는데, <리즈>(1867)의 상(像)을 중심으로 그의 작풍은 분명하여지고, 보불전쟁 후에는 파리 교외에서 모네, 시슬레와 함께 제작을 했다.
이어 인상파 제1회 전시회(1874)에 유명한 관람석을 출품했는데 그 당시는 비난을 샀다. 그러나 1876년에는 대작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발표하여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광선과 춤추는 군중으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르누아르는 조심스럽게 생활하였는데, 지우(知遇)를 얻어 사교계의 사람을 그린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 딸들>(1878)과 그 밖의 것도 아릅답다. 세잔은 자연을 추구했지만, 르누아르는 인간에게 그 흥미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1881년에는 이탈리아에 여행하여 라파엘로에 경탄하고, 특히 폼페이의 벽화에 감명을 받았는데, 그 후는 데생의 부족을 생각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제작 경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도 나중에는 이전보다도 한층 빛에 용해되어 리드미컬한 제작으로 변하지만, 후기는 오로지 나부(裸婦)를 추구하여 여인의 육체에 한없는 아름다움을 찾고서는 그 빨간 색조(色調)로써 순화된 작품을 남기고 있다. 르누아르의 생애는 평온했으나 만년을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1899년부터는 남프랑스 해안으로 옮겨 살았다. 이어 카뉴에 정주(定住)하여 오로지 제작만을 계속, 최후에는 영광을 누리며 홀로 들어앉아, 의자 위에서 화필을 쉬지 않고 아름다운 나부의 제작을 계속했다.
목욕하는 여인들
[편집]1918년경, 르누아르 작, 루브르 미술관 소장. 근대 회화에서 명작을 꼽는다면 그것은 르누아르의 작품이다.
르누아르에 있어서 나부는 미의 상징이었다. 르누아르는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이전에 볼 수 없는 풍만하고 화려한 경지를 펼치고 있다. 이 작품은 최후의 대작이 된 것인데, 차차 부자유하게 되는 손을 가지고 절묘(絶妙)한 아름다움을 낳고 있다. 화면에서는 두 사람의 나부가 들가에 누워 있고, 저쪽에는 두 여인이 샘물에서 즐기고 있다. 그것은 현대의 님프(물의 요정)일는지도 모른다. 우거진 나무들이나 풀은 빛에 용해되었고, 그 빛에 육체는 한층 더 용해되고 있다. 빛은 육체를 애무(愛撫)하여 육체의 붉은 색조는 한없이 억양(抑揚)을 낳고, 그것은 관능을 감추어 온도를 느끼게 할 정도로까지 풍요한 순화(醇化)를 이루고 있다.
르누아르는 만년에 작품마다 한층 더 매력을 찾아 나부를 계속 그렸는데, 아주 만년에 이것을 다듬어내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의 회화는 18세기에 와트를 낳아서 가장 프랑스적인 화려미(華麗美)를 나타내는데, 그 와트에서 부시에까지 이어지는 섬세함과 세련미는, 재차 르누아르를 통하여 근대에서보다 아름다운 매력을 꽃피우고 있다.
고흐
[편집]Vincent van Gogh (1853∼1890)
네덜란드의 화가.인상파에서는 고흐의 생애가 초조한 음영(陰影)을 지우고 있다. 고흐는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순데르트의 한촌(寒村)에서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생활을 위해 일찍부터 화상(畵商)의 점원이 되고, 이윽고 런던에서 일터를 구해 일했다. 런던에서는 실연(失戀)한 일이 있으며 고독한 마음은 신앙을 찾아 직장을 버리고, 네덜란드로 돌아와서 신학공부를 하고 견습 전도사로서 벨기에의 보리나즈 탄광으로 간다. 그런데 탄광에서의 폭발, 그 밖의 일들로 분골쇄신하는 봉사를 했는데, 오히려 힐문(詰問)을 받아 성직(聖職)을 떠나 이전부터 조금씩 열중했던 회화에 처음으로 투신하게 된다. 그때 얼마 동안은 어두운 시대를 보내지만, 동생 테오도르는 화상에 근무하며 항상 형에게 우애를 보냈는데, 고흐는 끊임없이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들은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심경을 전달하고 있었다.
고흐는 1886년에 동경하던 파리에 나타났다. 그는 코르몽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그곳에서 로트렉과 만나고, 재빨리 인상파 화가들과 접촉했다. 그 때문에 작품은 어두운 화면에서 일거 밝은 색채로 전향하는데, 밝은 화면으로 전향한 고흐는 태양을 동경하여, 1888년 2월에는 남프랑스 아를르의 여행길에 올랐다.아를르에서도 생활은 착실했는데 태양은 강하게 빛나고 있다. 고흐의 정열은 불타올라 터치는 약동하고 색채는 고동하는 듯이 부지런히 활동하여 얼마 되지 않는 기간 안에 <해바라기>, <하네 다리> 등 수많은 작품을 그려 냈다. 그러나 존경하는 고갱을 아를르에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 되어, 견해와 화풍이 정반대인 두 사람은 끝내 결합하지 못하고, 고흐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갱을 베어 죽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의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흐는 일찍부터 선천적인 뇌장해(腦障害)로 인한 발작으로 괴로움을 받고 있었다. 그는 병원에 수용되었고, 다시 이듬해에는 아를르에서 떨어져 있는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들어갔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제작에 대한 의욕은 강해서 병원의 종업원이나 근방 풍경을 그려서, 그
<올리브나무>의 연작 등은 더욱더 강한 충동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 1890년에 고흐는 생애에 걸쳐 단 한점의 그림이 팔렸으며, 그해 5월에는 퇴원이 허락되어 파리에 나가 잘 아는 의사인 가셰를 찾아가서 파리에서 가까운 오베르촌(村)으로 향한다. 거기에서도 제작은 분방하게 이루어졌는데, 그해 7월 돌연 권총으로 제 가슴을 쏘아 2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황색 보리밭
[편집]1889년, 고흐 작. 6월 런던 테이트갤러리 소장. 고흐는 일정한 스승 없이 전혀 단독으로 전례 없는 회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바라보는 것을 냉정하게 관찰·비판·정리하여 적당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타는 정열로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계속 바라보는 동시에 느껴지는 것이 그의 심신을 불태울 정도며, 그 충동을 채찍질해 그의 터치와 리듬이 생기게 하여 약동하게 한다. 그 때문에 그는 오직 독창적 표현을 하고 있는데, 행복한 아를르 시대부터 보면, 정신병원에 들어간 다음의 생 레미에서 그린 작품은 한층 격렬함을 노출시키고 있다.
그 지방은 바람이 거칠어 이 화면에서도 생 레미의 들판에서는 보리가 흔들거리고, 나무는 바람을 머금고 있다. 전경(前景)의 보리에 거듭된 터치는 정열의 파장(波長)이 전달되어 감돌고, 나지막하게 전개시킨 산도 움직이며, 하늘에는 흰구름이 소용돌이치듯 휘감기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 측백나무가 섰다. 가지를 감아올리고 선 올리브 나무는 마치 녹색의 불꽃 같다. 더욱이 보리밭에서까지 느껴지는 침통함이 가득 흐르고 있는데, 얼마 안 되는 화초가 앞에서 가련한 빨간빛을 점점이 띠고 있다.
아를르와 달라서 생 레미의 풍경은 황량하여, 이 작품은 그것을 색조로도 나타내는데, 힘있게 움직이는 표현은, 고흐에게 뛰는 듯한 충동 속에 흔들리지 않고 황량한 그대로 보여주는 인상이다. 고흐는 심신을 불태우는 제작만 계속하는데, 회화에는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만큼, 그 생명을 고흐만큼 생동시킨 화가도 보기 드물다.
고갱
[편집]Eugene Henri Paul Gauguin(1848∼1903)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고갱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아버지는 자유주의자로서 망명하여 남미 리마로 가던 도중에 죽고, 그후 고갱은 7세 때에 고국에 돌아온다.
바다를 동경하여 선원이 되어 남미도 항해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증권 거래소에서 일했다. 거기서 돈을 모아 결혼하여 평화로운 생활이 계속되었으나 그 무렵부터 회화에 친근하여 인상파 작품을 사들이고, 그 화가들과도 교제하여 1880년 제5회 전시회부터 인상전(印象展)에 그의 회화를 출품한다.
이어 회화에 대한 정열은 더욱더 왕성해져서 1883년에는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화가로서 새출발을 한다. 그러나 회화는 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돈은 다 떨어져서 일시는 아내의 고향인 덴마크로 가는데 덴마크에서 발표한 일도 실패, 고갱은 처자를 남겨두고 단 하나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파리에 나타났다. 그러나 생활은 궁핍하여 포스터를 붙이는 노동도 했다. 그리고 브르타뉴의 퐁 타뱅으로 가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고, 파리로 돌아가서 고흐를 만난다.
그러나 고갱에게는 미개국(未開國)에 대한 정열이 있었다. 문명의 허위도 좋아하지 않았다. 원시(原始) 속에는 꿈이 있다. 거기에는 시(詩)가 살아 있다. 고갱은 1887년 봄에 남미로 건너가고, 다시 마르티니크섬(島)으로 가지만 병으로 인한 고뇌로 귀국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퐁 타뱅으로 다시 가 거기에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새로운 회화의 이론을 주장한다. 이어 고흐의 초대로 아를르에도 가지만 그 우정(友情)은 깨져 버려, 재차 미개척의 땅을 그리워한다. 그 염원을 달성한 것은 1891년으로, 고갱은 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남방의 색채와 미개한 생활은 그리던 땅에 잘 맞고, 그는 그 감동에서 수많은 작품을 그려 낸다. 고갱은 한번 파리에 돌아오지만, 1895년에는 최종적으로 타히티에 돌아간다. 그러나 그림 제작하는 것 외에는 궁핍과 병과 싸우는 생활이고, 1901년에는 도미니카섬으로 옮겨 가서 고독한 생애를 마친다. 그의 강렬하고 장식적인 화풍은 그 뒤의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베 나베 마하나
[편집](즐거운 나날)
1896년, 고갱 작. 리옹 미술관 소장. 고갱이 낳은 작품은, 회화로 쓰여진 문학이며 시였다. 우키요에(浮世繪)의 기법을 단적으로 채용한 작가로, 종래의 빛이나 그늘이나 둥근 모양 등 모든 상식을 떠나서, 이전에는 서양화에서 보지 못했던 평면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그것은 깊이 제재를 생각하고, 결정적으로 정리한 다음 그것을 전개시키는 회화로서, 사물을 그저 보는 그대로 그리는 묘사와는 전혀 그 자세가 다르다. 그 독자적인 표현은 퐁 타뱅 시대부터 나타나는데, 타히티섬에 가 있을 때 낙원의 꽃이 피듯 발전했다.
열대의 빛으로 자연은 색채를 발하고 있다. 거기에 그 이상으로 즐거운 것은, 문화의 사악(邪惡)을 모르는 토착민의 그 단순함과 자연이었다. 고갱은 기도하듯이, 어떤 때에는 영탄(詠歎)하듯이 생활에 파고들어 낙토(樂土)의 신비를 그리고 있다. 작품은 때로 몽환(夢幻)의 매력을 띠어서 이 <즐거운 나날>도 진귀할 정도로 밝은 면을 가득 풍기고 있다. 화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대지의 희색(喜色)을 풍기게 하는 주홍색이다. 다섯 사람의 줄지은 인상(人像)은 봄날 같은 관능(官能)을 띠고, 허리의 붉은색은 밝게 반사되고, 나무는 점점이 꽃을 달고 있고, 어린이들이 즐겁게 먹고 있는 정경은 붉은 색조가 잘 짜여진 매력을 낳고 있다.
고갱은 작품에는 어둡고 신비로운 작품도 있는데 평면적인 표현은 크게 색채를 대조시켜서 중후함을 이룩한 매력을 낳아, 그 이국적(異國的) 분위기를 품위 높은 회화시(繪畵詩)로서 그리고 있다.
르동
[편집]Odilon Redon (1840∼1916)
인상파에 속하긴 하지만, 화단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르동은 남몰래 완전히 고독한 제작을 하고 있었다. 보르도시(市) 태생으로 일찍부터 허약하고 고독한 성격으로 회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보르도시에서 판화가 브레당을 알게 되어 판화기술 외에 표현의 자유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동시에 식물 생리학자 크라보를 알고서 자연의 신비에 놀랐으며, 그 신비의 세계는 생애를 통하여 르동의 꿈과 동경(憧景)이 되었다.
르동은 긴 세월 동안 흑백의 판화를 계속 제작하였는데 그는 속화(俗化)된 판화에 새로운 기품을 부여함과 동시에 다루는 제재가 괴이하여, 전율이나 유혹을 갖는 몽환적인 매력을 낳고 있다. 그 판화 제작에는 시인 말라르메가 성원을 보내지만, 겸허한 르동은 조금도 명성을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60세 때에 돌연한 이변(異變)이 발생했다. 그 때까지 흑백 판화만을 제작하던 르동은 처음으로 색채를 취급했다. 그 유화는 꽃가루가 춤추듯 오색(五色)을 흩뿌려서, 르동만큼 이향(異香)을 머금어 색채에 감미로움을 풍기게 하는 작가도 드물다.
제재는 신화나 종교적인 내용에서 신비한 공상에로 펼쳐지는데 모두가 색채로 그려서 표현하는 르동의 꿈이요 시였다. 원래 고갱의 규모나 르누아르의 풍요함은 갖지 못하지만, 르동은 새로운 각도에서 그 감각을 빛내고 있다. 르동은 고독하여 생활을 조용히, 만년은 파리 외에도 교외에 집을 가지고 화초를 심고 있으며, 르동이 그린 꽃의 제작도 꿈과 맑고 깨끗함으로 감싸여 있었다.
19세기 말기의 화가들
[편집]-世紀 末紀-畵家
19세기 말기에는 인상파의 제작이 직접적인 현대의 선구(先驅)가 되기 때문에 그 밖의 존재가 정채(精彩)를 잃는데 화단의 움직임에 관계도 없고, 당시에는 진귀하게 벽화를 전문적으로 그려낸 화가로서 샤반느의 제작이 뛰어난다.
샤반
[편집]Pierre Puvis de Chavannes (1824∼1898)
프랑스의리옹시(市) 태생으로, 처음은 공과를 지망했으나 병을 얻어 요양을 겸하여 이탈리아로 여행하고 회화에 마음이 끌린다. 귀국 후는 몇몇 스승을 찾아 배우지만, 차차 자유로운 연구를 하여, 벽화제작에 분망하다. 작품에는 <가난한 어부>(1881) 외에, 벽화제작으로는 고향인 리옹의 미술관을 위한 <성림>(1883), 그 밖에 몇 점을 그리고,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의 강당에 우유화(寓喩畵)(1884)를 그렸는데, 제작은 거대한 스케일은 아니지만 구도는 질서가 바르고 고요히, 회색을 머금은 색조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정적을 그려내어, 내성적인 사색이나 시정을 풍긴다. 최후에는 <파리를 지키는 성(聖) 쥐느비에브>(1898)가 있는데 간소화된 고요함을 풍기고 있다.
모로
[편집]Gustave Moreau (1826∼1898)
프랑스 화가. 성서 이야기나 신화를 그린 화가로서, 건축가를 아버지로 하여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는데, 고독한 공상을 좋아하여 오래도록 화실에 파묻혀서 신화나 이야기에 감미로운 꿈을 띄우고 있었다. 그것은 공상 속에서 애무(愛撫)를 집중시킨 정경을 미화시켜 그린 작품이며,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의상과 그 밖에 칠보(七寶)를 군데군데 붙인 듯한 색채를 취하여, 매혹을 머금은 분위기로부터 달콤하고 높은 풍요를 낳고 있다. 작품에는 <오르페> 등 기타 작품이 있는데, 그의 문하에서 루오, 그 밖의 화가가 나왔다.
메소니에
[편집]Ernest Meissonier (1815∼1891)
프랑스 화가. 19세기 말기에 압도적인 지위와 명성을 떨친 화가로서, 놀랄 만큼 세밀한 묘사를 득의(得意)로 했고, 말(馬) 묘사의 명수라고 하며, 명암의 묘사가 정확하여, 사진을 응축한 듯한 정교한 묘사를 보이고 있다. 대표작 <1814년>(1864)은 패퇴하는 나폴레옹을 그려서, 작은 화면이면서도 정경을 아주 가까이 보듯 재현하는 정밀한 묘사를 보이고 있다.
몽티셀리
[편집]Adolphe Monticelli (1824∼1886)
프랑스 화가.근대 회화의 선구자로서, 체질 그대로 분방한 매력을 낳은 화가이다. 마르세유 태생으로 파리에 나갔으나 생활은 가난 속에서 전전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작품은 격정을 띠며, 터치는 혼란할 정도로 동적이어서, 색채에 정열을 발하고 있다. 보불전쟁을 맞아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마르세유에서 살았는데, 남부지방에서의 제작은 한층 약동을 얻어 나무그늘의 유락(遊樂)과 그 밖의 풍속화는 생생한 움직임으로 뜨거운 매력을 그려 내고 있다.
19세기 말기에는, 이상과 같은 특색 있는 화가들은 아니지만, 인상파의 변방에서 조용히 제작한 사람으로, 카리에르나 라파엘리 등의 작품이 있다.
카리에르
[편집]Eugene Carriere (1849∼1906)
프랑스의 화가. 카리에르는 소년 시절 석판화가의 문하생이 되지만, 후에 회화를 그린다. 처음은 신중한 생활을 했는데,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影像)을 화면에 그려보는 것을 궁리했다. 그 때문에 색채를 다 쓰지 않고 단색으로 그려서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깊게 하여, 인물을 음영(陰影)에 매몰되듯 녹여서 그리고 있다. 박력과는 먼 표현이지만, 인상(人像)에는 꿈속을 보는 듯한 호소력이 있으며, 모성애를 그린 작품은, 부드럽고 단아함을 머금고 있다.
팡탱라투르
[편집]Henri Fantin Latour (1836∼1904)
프랑스 화가.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처음에는 쿠르베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마네의 작품을 알고 게르보아의 집회에도 출석을 했다. 인상파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작품은 명암을 깊게 하여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하고 있다. 작품에는 <바티뇰의 화실>(1870) <들라크루아 예찬>(1864) 등이 있다.
라파엘리
[편집]Jean Fransois Raffaelli (1850∼1924)
젊은 시절기 아버지가 파산하여,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으나 회화에 뜻을 두고 최후에는 파리 교외에 정주(定住)하여, 교외의 민중이나 변두리의 풍경에서 분위기를 교묘하게 잡고 있다. 화필로 데생을 하는 듯한 화풍으로서 묘선(描線)을 많이 쓰고, 묘선은 리드미컬하여 색조가 부드러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