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19세기의 미술/19세기의 프랑스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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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편집]

古典主義

미술에서의 고전주의는 문학과는 달리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나타났다.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그에 이어지는 로마 시대가 문화의 이상으로서 존경을 모으는데, 그 예찬(禮讚)은 상기한 시대에서 엄격한 주의(主義)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고대로의 관심은, 18세기의 중간 무렵부터 폼페이 및 그 밖의 지역에서 많은 고대의 유적들이 발굴되어서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미술에서 그 주의를 철저하게 추진시킨 것은 다비드로서, 다비드는 18세기 세상을 풍미했던 염미(艶美)적 회화를 배격하여, 대혁명 전인 1785년에는 이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발표하고 있는데 그것은 국난(國難)에 임하는 고대의 용사를 묘사한, 준엄을 극한 작품이었다.

대혁명이 일어나자 그 시대는 향락에 빠진 왕조를 공격하고, 건국 이상을 고대에서 찾았고 다시 나폴레옹 시대에서는 로마제국을 이상으로 했기 때문에, 미술에서의 고대 숭배도 압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소재도 고대에서 취하여 애국·영웅·교훈적인 장면을 그린 작품이 제작되고, 그것들은 국가나 사회가 요망하는 것을 적확(的確)하게 표현하는 것으로서 존중되었다. 그러나 그 주의는 당초부터 전대(前代)의 일락에의 반동에 입각했으니 만큼 타협 없이 엄격하였고, 고대를 존중한 나머지 그 형식적인 모방에 결부되어, 화면의 인물을 고대 조각과 같은 인상(人像)으로 그리고, 다시 동작도 조각적인 동작으로 그리는 수법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 때문에 정신적인 엄숙감은 있지만 색채는 냉정이 지나쳐 생기가 부족하고, 미술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인 미(美)와 기쁨에서 멀어져서 그 엄격성은 곧 낭만주의를 유발하고 있다.

현대에 알고 있는 그리스 조각의 걸작이 당시에는 출토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당시 전형이 되었던 것은 그리스 말기부터 로마시대에 걸친 작품이 많고, 그 점도 고전주의 작품이 형식으로 흐르는 원인을 만들고 있다. 그 결함은 이 시대 조각에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비드[편집]

Jacques Louis David (1748∼1825)

프랑스의 화가. 19세기 초두의 화단에 군림하여, 그의 영향은 널리 각국에 미쳤다. 파리의 철물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회화는 조셉 비앙(Joseph Vien)을 따랐으나, 1774년에는 염원(念願)이던 로마 상(賞)을 받고, 이듬해 대망의 로마에서 배우게 되었다. 로마에서는 고고학자와 사귀고, 나폴리에 가서 폼페이의 유품에 관심을 가져 고대의 강건·장중한 제작에 심취하였고 1785년에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발표했다. 이어 혁명이 발발한 해에는 <브리티스>를 발표함으로써 제재(題材)와 정신은 바야흐로 혁명정신의 이상상(理想像)이라고까지 떠들썩했다.

다비드는 혁명의 열렬한 투사로서 일어섰고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에 즈음해서는 그도 투옥되었다. 동란중에도 미술의 파괴를 염려하여 노력한 바가 많은데, 그의 영웅주의는 나폴레옹을 만난 후 더욱 높이 불탔다. 나폴레옹도 다비드를 깊이 신뢰하여 다비드는 궁정의 제일 화가가 되고, 문하에도 저명한 화가가 많아 명실공히 미술계에 군림했다.

작품으로는, 고대 역사나 영웅에서 제재를 찾은 작품에 <사빈의 약탈>(1799) 및 그 밖의 것이 있는데, 장대한 전개의 반면(半面)에는 조각적인 인상이 다소간 딱딱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다음의 화가들이 형식에 사로잡혀 생기가 결핍된 작품을 그리는 동안, 그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표현에 탁월한 재능을나타내어, 혁명 중의 작품인 <마라의 죽음>(1793)은 현장에 입회한 만큼의 처절함을 보이고, 초상화에도 <레카미에 부인>(1800)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에는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군기 수여식>(1810)이 있는데, 나폴레옹이 실각하여 왕조가 부활하자, 다비드는 앞서의 혁명 때에 국왕의 사형에 투표한 책임을 추궁당해 추방되었고, 1816년 벨기에 브뤼셀로 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다비드는 고대의 장중함을 이상으로 하여 지나친 엄격주의를 추구했으나 그 웅장한 제작은 18세기 미술을 일소(一掃)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 놓았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편집]

The Sacre:Napoleon Crowning Josephine

다비드 작(1805∼1807). 루브르 미술관 소장. 나폴레옹은 제정(帝政)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네 개의 초대작(超大作)을 명했는데, 다비드는 <생 드 마르스에서의 군기 수여식>과 이 <대관식>을 완성시켰다. 의식은 1804년 12월에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에서 거행되었고, 로마에서 법왕 피우스 7세가 초청되었다. 황제는 월계관을 쓰고 앞으로 나와서 꿇어 앉은 황후 조세핀에게 바야흐로 왕관을 주고 있다. 가운데 깊숙이 들어간 높은 곳에는 황제의 모친이 그려져 있고, 한 단 낮게 장군과 고관들이 줄지어 있는데 좌우에 줄지은 수많은 인물도 정확한 초상으로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루브르 미술관에서도 가장 큰 회화의 하나로서, 공상을 섞어 일부러 극적으로 만든 화면이 아니라 엄연한 기록화로서, 그러면서도 기록화에 부수되는 단조함이 보이지 않는다. 녹색의 융단에 의상은 현란하게 비치고, 교묘한 빛의 배분으로 인물은 모두가 생동하며, 황제의 모습은 제정을 상징하도록 역사화에서 보여주는 정연한 구성과 그의 탁월한 사실력(寫實力)은 여기에 아름다운 결합을 보이고 있다. 화면에는 호화로운 분위기가 충일하여 조용한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다비드의 문하[편집]

-門下

지로데 드 로시 트리오종[편집]

Girodet de Trioson (1767∼1824)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의 문하 중 그로, 앵그르, 제라르와 견주는 한 사람인데, 몽타르지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배웠다.

그는 한편으로는 문필을 사랑하여 시작(詩作)에도 친근, 제재도 문학적인 것을 취급했다. 그러나 묘사는 외관(外觀)을 어디까지나 단정하게 그리는 스승의 경향을 지키고 있다. <대홍수>는 1810년에 다비드의 <사빈의 약탈>과 동시에 전시되어 상을 탔다. 그의 작품 <엔디미옹의 수면(睡眠)>(1793)은 빛의 효과도 아름답고, 그 당시의 비상한 호평을 얻었으며, 특히 <아탈라의 매장(埋葬)>(1808)이 빛을 일층 짙게 하여 동굴의 음영(陰影)에 조화된 인상(人像)에서 정적의 정다움을 낳고 있다.

제라르[편집]

Fran

ois Gerard (1770∼1837)

프랑스의 화가. 외교관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로마에 부임 중 태어났다. 다비드의 문하생으로서 스승에게도 신뢰를 받아 작품은 우아한 매력으로 싸여 있다.

그는 1796년에 <화가 이사베이와 그의 딸>을 발표하여 일약 알려졌는데, 한편으로는 고대에서 제재를 삼은 작품도 있어서, <프시케와 애신(愛神)>(1798)은 내부로부터의 박력은 없으나, 정답고 부드러운 정돈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전아(典雅)한 섬세함은 초상화에서 한층 더 성공을 거두어 그의 명성은 제정 이후에도 유럽을 위압하고, 각국의 군주나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다투어 초상을 요구하여 그 수는 300점에 달하고 있다.

게랭[편집]

Pierre Narcisse Guerin (1774∼1833)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의 문하생은 아니지만, 작품은 충실히 고전주의적 냉엄성(冷嚴性)을 지키고 있다. 대표작 <마르쿠스 섹스투스의 귀환(歸還)>(1799)은 비극을 간결하게 짜내어 당시는 감명을 주었으나 생기를 결한 경향이 있고, 그는 따로 자유로운 이해에서 문하에 제리코와 들라크루아를 길러내고 있다.

프뤼동[편집]

Pierre­Paul Prud'hon (1758∼1823)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의 군림으로 인하여 얼마 동안 숨겨진 존재였으나, 프뤼동은 그 시대의 쟁쟁한 많은 역사화 가운데 꿈을 싣고서 홀로 백화(白花)가 피듯한 관능적인 매력마저 보여주었다. 가난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클뤼니의 승원(僧院)에서 자랐으나 로마에서 배웠고, 레오나르도 특히 코레조의 기쁨을 머금은 매력에 이끌리고 있다.

작품은 나폴레옹 시대에 인정되었으나, 불행한 결혼으로 생활은 어둡고, 더구나 여성을 그리면 참으로 우아하고 고상하며, 초상에서는 <황후 조세핀의 상>(1805)이 뛰어났다. 또한 <죄악을 쫓는 정의와 복수>(1808)나 <프시케의 유괴(誘拐)>(1808)도 특히 음영(陰影)을 짙게 함으로써 조용한 색조(色調)와 음영에 용해될 듯한 인체는 그 시대에 유니크한 감각적인 부드러움을 보이고 있다.

다만 혁명 후에 발명된 새로운 그림 물감 탓으로 작품이 현저히 손상을 입은 것은 애석한 일이다.

신고전주의[편집]

新古典主義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왕조의 부활을 맞게 되자, 거국적인 영웅주의도 냉각되고, 사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나 동시에 다비드의 실각으로 그 엄격한 고전주의도 새로운 반성을 하게 된다.

그때 다음의 지도자로서 등장한 사람은 앵그르였다. 앵그르는 다비드의 문하로서 일사분란한 단정(端正)을 존중하는 점에서는 공통되나, 다비드의 냉엄주의에 비교한다면 웅대함은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반대로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새로운 방향을 열고 있다.

동시에 시대는 혁명의 동란이나 제정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평상적인 질서를 찾는 시대였으며, 그 새로운 방향은 고전을 존중하면서 또 고전이 갖는 아름다움을 극도로 찬미하는 경향을 취했다.

다비드는 먼저 이상을 고대조각의 냉철한 엄격성에서 추구했으나, 앵그르가 이상으로 한 것은 시대를 바꿔서 우아한 것을 추구한 라파엘로였다. 앵그르는 다비드에 못지않는 철저한 태도로 흠이 없이 곱게 다듬은 아름다움을 요구하고 있다. 그 주장은, 나중에는 각별히 아름다운 사물을 한층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이 곧 미술의 사명이라고까지 강조하고 있다. 제작에 있어서 고전처럼 윤곽을 올바르게 그리고 고전처럼 미(美)를 희구하는 정신은, 앵그르를 중심으로 화단(畵壇)을 압도하여 널리 퍼져갔다.

앵그르[편집]

Jean Dominique Ingres(1780∼1867)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의 문하생이었으나 다비드의 제작과는 반대로 여성을 그리는 데는 독보적인 명성을 얻음으로써 고전주의를 새로운 미의 찬미로 이끌었다.

남프랑스의 몽토방에서 태어나, 부친으로부터 그림과 음악을 배웠는데, 처음에는 음악에도 천분(天分)을 보여 그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17세 때에 파리에 나가 다비드를 따랐다. 염원하던 로마에서 배운 것은 1806년인데, 머문 기간은 18년에 이르며, 그 사이에 심한 노고(勞苦)를 맛보았다. 그때 생활 때문에 연필로 수많은 초상을 그렸는데 연필 초상화는 유려(流麗)한 데생을 보여, 그 전아한 매력으로 후에 절품(絶品)으로서 존중되었다.

데생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그는, 제작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름다운 데생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고전을 깊이 연구하고 있었는데,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에 심취하여, 그 완성된 우미(優美)를 하나의 이상으로 생각했다.>

앵그르는 전형적인 미를 추구하여, 작품은 당시 경향과는 전혀 달리 우미하며, 그 때문에 파리에의 출품은 악평을 거듭했으나, 1824년에 <루이 13세의 기원>을 출품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그것을 기회로 44세에 비로소 파리로 돌아왔다. 1834년에 다시 로마로 갔으며 대작으로는 <호메로스의 예찬>(1827) 등이 있고, 초상화에는 절묘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리비에르 부인>(1805), <리비에르 양(孃)>(1805), <드보세 부인>(1807), <베르탕씨의 상(像)>(1832) 등 다수의 작품이 있으며, 나부의 미를 그린 것으로는 <그랑 오달리스크>(1814), <샘>(1856), <터키탕>(1859)이 아름답다.

다만 작품은 단정(端正)을 추구한 나머지, 색채는 생기를 결하여 어떤 차가움을 나타내는데, 조용한 청순미는 그가 추구한 바이고, 그 때문에 낭만주의와는 격렬히 대립하여 정열적인 들라크루아를 일생동안 허용할 수가 없었다. 앵그르는 문하의 화가도 많아서, 87세의 생애를 마치기까지의 만년은 완전한 영광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랑 오달리스크[편집]

앵그르 작. 1814년. 루브르 미술관 소장. 나부는 이 시대에는 현대와 달라서, 고대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나 이국정서 사이에서 여성의 아름다운 전형으로서 그려진 일이 많았다.

오달리스크는 오리엔트의 후궁을 말하는 것인데 앵그르는 오리엔트의 분위기를 사랑하여 <터키탕>과 그 밖의 작품을 그렸다. 앵그르는 이 오달리스크를 로마에서 그려 1819년에 파리에서 발표했으나, 평판은 이상하게 나빴다. 그것은 당시의 생각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탐미적(耽美的)인 화필(畵筆)을 나타냈었기 때문이다. 앵그르는 이 작품에서도 여성의 얼굴이나 자태를 빈틈 없이 다듬은 단정에 두고 있다. 터번을 두르고 있는 그 얼굴은 라파엘로를 연상시키는 우아함이 있다. 앵그르는 품위를 존중했던만큼, 현실적인 생생한 점을 제거하고 청정화(淸淨化)시켜 그리고 있다. 그 때문에 기묘하게 긴 여성의 등도 그 흐르는 리듬에서 몽환적(夢幻的)인 매력마저 낳고 있다. 거기에 향로나 우모선(羽毛扇)도 고요한 색채로 그려져 뛰어난 재능을 나타낸다.

낭만주의[편집]

浪漫主義

혁명시대에 넘쳐 흘렀던 고대의 애국정신이나 제정시대에 보급된 고대의 영웅정신은 차차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여, 1800년에 이르면 그 반동으로서 낭만주의가 탄생한다.

낭만주의는 문학에 선명하게 나타나서, 그 무렵부터 중세의 이야기나 이국정서 등에 비상한 흥미를 모으고 있다. 그것은 지나치게 위압적인 경향에서 놓여나 인간의 자연적 욕구인 자유·정열로 내닫는 것이지만, 미술의 경우는 단지 제재를 문학이나 정서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혁신적인 사상을 뿌리쳐 감정을 자유롭게 토로하고, 그 내용이나 색채에 훨씬 정열을 의식케 하는 표현을 찾아 나아가고 있다.

고전주의는 고대의 모방을 존중하고 있었으나, 낭만주의는 하나의 전형(典型)을 갖기보다도 개인을 해방하여 개개인의 감수성에서 새로운 창조를 추구하고 있다. 고전주의는 무궤도(無軌道)를 극도로 금지했으나, 낭만주의는 이성에 치우친 냉정함이 본래의 감동이나 정열을 없앨까 싶어 염려하고 있다.

이미 그것은 제1보로서, 프뤼동의 우아하고 고상한 작품도 로맨틱한 꿈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러나 확연한 기운을 보인 것은 그로의 정열적인 제작이었다.

그로는 루벤스의 정열적인 색채에 심취하고 있으나, 한편에서는 스승 다비드의 엄중한 교의(敎義)를 존중하면서도 그 분방한 천성은 유감없이 작품에 나타나서, 특히 전쟁화에는 초연(哨煙)의 냄새와 더불어 사람을 뒤흔들 것 같은 감동이 움직이고 있다. 그로는 그 색채에서도 약동이야말로 작품의 생명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로에 이어서 제리코가 나오고, 다시 들라크루아가 나타나서 낭만주의는 크나큰 비약으로 줄달음치게 되었다.

그로[편집]

Antoine Jean Gros (1771∼1835)

프랑스의 화가. 훌륭한 초상화가이며, 특히 전쟁화에 독보적인 명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로는 파리 태생으로 아버지도 화가였고, 14세에 이미 다비드에게서 배웠다.

그후 1793년에 홀로 이탈리아로 가서, 제노바에서 루벤스의 격정적인 작품에 감화되어 심취했다. 작품에는 <아르콜에서의 보나파르트>가 있고, 1804년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은, 위문하는 나폴레옹이 환자와 만나는 순간을 그렸는데, 긴장과 정열을 충만시킨 대희곡(大戱曲)과 흡사한 박력은 열광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중용(重用)되었는데 특히 <에로의 싸움>(1808)은 전승(戰勝)의 광야를 가는 영걸(英傑)을 중심으로 초연이 남은 전장을 그린 것인데, 단순한 전장의 한 부분이 아닌, 전국(戰局)의 전모를 연상시킬 정도의 웅대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거대한 서사시라 하기에 알맞고, 엄동의 백설이 깔린 들판이며, 한편으로는 전장의 비장감을 약동시켜서 이 작품은 전쟁화의 고금을 통한 명화로서 불려지고 있다.

그로는 이 밖에도 전쟁화를 많이 제작했으며, 스승 다비드가 실각하여 벨기에로 떠날 때 다비드는 가장 신뢰하는 후계자로서 그에게 뒤처리를 부탁하였다. 더욱이 시대는 급속도로 변해 가지만 그로는 책임을 지고 다비드의 교의(敎義)를 계속 지켰으며, 만년에는 <엘키르와디 오메드>(1835)를 발표했으나 도리어 낭만파 화가들의 악평을 받았으며, 자유분방한 천성과 주위의 모순으로 고민하다가 센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제리코[편집]

Theodore Gericault (1791∼1824)

프랑스의 화가. 이 화가는 짧은 생애에 그 시대를 회오리 바람처럼 치달아 빠져갔다. 그는 루앙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그림과 기마(騎馬)에 정열을 쏟아 질풍처럼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회화는 다비드 풍으로만 신중히 그린 게랭에게 배웠는데, 동문(同門)으로 후배에 유명한 들라크루아가 있다. 게랭은 천재를 구속하지 않았다. 제리코는 21세에 <엽기병(獵騎兵)의 사관(士官)>을 출품했는데, 그것은 전장의 호쾌함을 실감있게 전했고 그로에 이어 정열적인 색채로서 강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후 시대의 변동으로 그는 이탈리아에서 배웠으며 특히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天障畵)에 감명을 받았다. 미켈란젤로처럼 웅위(雄偉)한 제작을 염원하여 일시 화풍을 바꾸었으나, 귀국 후 제재를 찾는 중에 메듀즈호(號)의 비극을 알고, 1819년에 그 대작을 발표했다. 그러나 평판은 의외로 좋지 않아 그는 그 대작을 가지고 영국을 순회했는데, 일찍부터 폐를 앓은 그는 영국의 기후로 병이 더욱 악화되었고, 귀국 후에는 <질그릇 굽는 가마> 등을 제작했으며, 낙마(落馬)하여 병이 더욱 악화, 불행한 투병끝에 33세로 요절(夭折)했다. 그의 대표작은 1점에 불과하지만, 그는 자성(資性) 웅대함에 프랑스 회화가 낳은 가장 대형의 천재였다.

메듀즈호(號)의 뗏목[편집]

1819년 제리코 작. 루브르 미술관 소장. 이 대작은 당시의 사건을 그리고 있다. 1816년에 범주 전함(帆走戰艦) 메듀즈호는 식민지로 향해 가는 관원(官員)과 함께 약 4백 명을 태우고 출범했으나, 아프리카의 암초에 걸렸다. 배를 버리고 승원은 구명정(救命艇)에 분승(分乘)했으나 나머지 149명 때문에 커다란 뗏목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양에 나와 밧줄이 끊어져 뗏목 위에서는 한모금의 물과 음식물 때문에 피로 물든 싸움이 벌어졌다.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는, 생존자는 15명, 모두 빈사(瀕死) 상태였다. 이 보도는 세론을 들끓게 했는데, 제리코는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의 흥분된 순간을 잘 묘사하고 있다.

구도는 당시의 평면적 전개를 피하고 피라미드형으로 짜여져 구조의 희망과 감동의 초점이 멋지고 강하게 그려져 있다. 방심하여 죽은 아들을 품에 품은 노부(老父)나 절규하는 인물들의 묘사는 놀랄 만한 박진력을 낳아 현실적인 장면 이상으로, 고대의 비극을 보는 듯한 장대한 힘을 보이고 있다.

제리코는 제작에 임하여 생존자를 남김 없이 방문, 같은 모양으로 뗏목의 모형을 만들고 시체를 화실로 가져다가 그 경직(硬直) 상태를 조사하고, 병원을 방문하여 빈사의 인체를 연구하였는데, 제작할 때 들라크루아가 선배를 위하여 포즈를 취한 것은 또한 미담이다.

들라크루아[편집]

Eugene Delacroi (1798∼1863)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1822년에 <단테의 배>를 처녀 출품했는데, 그 작품은 지옥의 호수를 소재로 하여, 어두운 분위기가 정한(情恨)을 다하고 있다. 이어 1824년 26세의 들라크루아는 <키오스섬의 학살(虐殺)>을 발표했는데, 그 작품은 낭만주의의 수립을 결정지었다고까지 평하고 있다. <단테의 배>를 발표했을 때 액자가 조잡하여 자비로 고쳐준 바 있는 그로까지도, 이 작품에 분노를 느껴 비난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상식에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화면에 약동하는 색채에서 감동을 크게 일으키는 제작은 회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는 전직 외무대신인 아버지로 인하여 파리 교외의 사라통에서 태어났으나, 이상하게도 어릴 때는 잇달은 사고에서 겨우 죽음을 면했다. 그러나 일찍 아버지를 잃고, 회화는 다만 근직(謹直)하기만 한 게랭에게 시사했으나 동문 제리코의 감화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단테의 배>로 주의를 끌고, <키오스섬의 학살>로 19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을 낳았다.

이어 1825년에 영국으로 가서 컨스터블의 색채를 보게 되어 색채에 대한 자각을 높였는데, 제작에는 <사르다나팔의 죽음>(18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1)이 있으며, 1832년에 모르네 백(伯)의 외교단(外交團)에 가입하여 모로코를 여행했다. 그 여행은 7개월에 불과했으나, 광채 나는 빛과 색채는 그의 공상을 비약시켜 그를 열광시켰다. 들라크루아는 되풀이하여 모로코의 제재를 취급했는데, 그 중에서도 <알지에의 여인들>(1834)은 어두컴컴한 방안의 여성을 그렸고, 색채는 주악처럼 호화롭고 풍요하게 엮어 놓았다.

작품은 1841년의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이 정열을 보여 분방하고 거대한 매력을 나타내는데, 그 정열을 약동시키는 제작은 성전(聖典)을 신봉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단(異端)이라고 매도되어, 아카데미(미술원)에의 문호(門戶)는 완전 봉쇄되어, 늘 입후보하면서도 아카데미에 들어가기까지에는 20년을 허비했다. 그러나 1855년의 만국 박람회에서는 대표작이 모여 압도적인 예찬을 획득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약동이야말로 작품의 생명이라는 점이다. 그 약동을 낳기 위해서는 고의로 형태를 흩뜨리고, 색채를 약동시켜 모든 표현을 동적(動的)으로 파악, 요동하는 듯한 생동감이 넘치는 묘사를 보이고 있다. 또 그 웅변의 일체를 색채로 나타내는 데 있어서 들라크루아는 프랑스가 낳은 가장 웅대한 색채 화가이다. 그는 벽화 제작 외에 유명한 일기를 남기고 있다.

키오스섬의 학살[편집]

-虐殺

1824년 들라크루아 작. 루브르 미술관 소장. 당시 그리스에서 일어난 독립전쟁은 전유럽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그리스는 고래(古來)로 동경하는 땅인데, 그 그리스가 터키에 대항하여 일어선 것이다. 그런데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키오스섬에 갑자기 터키군이 상륙했다. 더구나 갑작스러운 대학살에다, 포학의 보도가 알려졌다. 들라크루아는 그 학살을 취급하여 비장한 대희곡(大戱曲)으로서 전개시키고 있다.

화면에는 하늘이 마음껏 넓게 묘사되고, 그 하늘은 이상하리만큼 감동을 북돋우고 있다. 학살은 거의 끝나 젖먹이 아이가 죽은 어미니 유방을 찾는다. 한 노파는 통한(痛恨)의 눈으로 얼빠진 듯 바라보고 있고, 젊은 아내는 숨이 끊어지는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있으며, 침입한 기마병은 나부(裸婦)를 끌고 간다. 그 속에서 인간애의 분노가 꿈틀거리나 작품은 잔인성을 노출함은 아니고 커다란 회화미로 둘러싸서, 비극의 전국(戰局)을 느끼게 할 정도의 감명까지 낳아, 고대의 역사라도 보는 듯한 커다란 전개를 보이고 있다.

청년 화가의 화필(畵筆)이면서도 세부의 묘사도 박력이 있고, 더구나 광대한 하늘은 공기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다채로운 색채로 해서 감동을 북돋우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작품은 발표 당시에, 키오스섬의 학살이 아니고 회화의 학살이라고까지 욕설을 받았으나, 그 당시의 냉정하고 아름답게 묘사하던 회화의 상식을 타파하고 낭만주의 발전에 하나의 애폭을 긋고 있다.

앵그르를 둘러싼 화가[편집]

-畵家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를 둘러싼 시대는, 역사화나 이야기의 작품으로 파묻혔었는데, 그 기간에는 걸출(傑出)한 화가가 적고, 오히려 화단의 싸움 밖에 있는 풍경화에 흥미 깊은 작품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앵그르의 문하에서는 샤세리오가 걸출했다.

테오도르 샤세리오(1819∼1856)는, 남미(南美)의 사마나에서 태어나 2세 때에 귀국하였다. 그는 10세 때에 벌써 앵그르를 동경하여 그 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앵그르가 가장 아끼는 제자로서, 재능이 갑자기 나타났다. 17세 때에 살롱에 처녀 입선했는데, 작품은 여성을 그리는 데는 특히 우려했다. 스승의 격조(格調)는 가지지 못했지만 관능을 나타내어 스승보다도 부드러운 우아함을 낳았다.

그러나 1840년에는 이탈리아로 가서, 그 무렵부터 스승에게서 떠나 거꾸로 들라크루아의 약동에 이끌리어 정감적인 낭만주의로 기울어진다. 작품에는 <목욕하는 스잔나>(1839), <유대인의 안식일>(1848)이 있다.

초상화에서도 <두 자매>(1843)는 단정한 가운데서도 요염함을 가득 나타냈으며,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 회계원(會計院)의 벽화장식(1844∼48)은 후에 화재로 잃어버렸다. 이 화가는 대표자가 될 만큼 재능을 가지면서도 37세로 요절했다.

아폴리트 플랑드랭(1809∼1864)도 앵그르의 문하(門下)로서 스승의 작풍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 그러나 스승의 엄격함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힘없는 평정(平靜)으로 마쳤으나, 종교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 종교의 엄격과 앵그르 풍의 침착성을 융화시켜 사원(寺院)의 장식을 담당했다. 이 밖에 초상화가로서 <나폴레옹 3세의 상>(1863)이 있다.

아폴리트 들라로슈(1797∼1856)는 그로의 문하이다. 그는 고전파와 낭만파의 중간 화풍으로, 한편으로는 격조(格調)와 또 한편으로는 정열을 결해 있으면서도 원만하게 알맞게 다듬은 세련된 태도에서 역사화가로서 그 시대에 명성을 높이고 있다. 그의 <에드워드 4세의 왕자들>(1831)은 조용한 작품이며, <기즈 후작의 암살>(1835)은 걸작으로서 알려져 있다.

오리엔탈리스트[편집]

Orientalist

앵그르와 달리 들라크루아는 문학가·음악가와는 사귀었으나, 회화에서는 직접 제자를 두지 않았다. 그때문에 고립하여 높이 솟았으나 당시는 문학이 바야흐로 이국정조(異國情調)를 특필하던 시대였다. 그것을 반영하여 회화에도 19세기 중기에는 오린엔트의 정서에 몰두한 화가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드칸이다.

가브리엘 드캉(1803∼1860)은 관찰이 예리하여, 오리엔트의 생활을 계속 묘사하였는데, 타국(他國)의 매력을 약동시켜 빛과 음영(陰影)이 강한 효과를 나타냈다. 그 묘사는 의복이나 가옥에 이르기까지 압축된 정열을 가득 담고 있다. 작품에는 <산브르족(族)의 패배>(1834)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외젠 프로망탱(1820∼1876)은 문학가로서도 이름을 떨쳤는데, 한편으로는 알제리의 분위기에 도취하여 이국의 생활을 그리고, 안으로부터의 약동은 부족하지만 투명한 빛을 잘 그려서 작품에는 <아라비아의 매사냥> 등이 있으며, 평론에도 훌륭한 <과거의 대가>를 남기고 있다.

사실주의[편집]

寫實主義

1850년에 쿠르베가 유명한 대작 <오르낭의 매장(埋葬)>을 발표했을 때, 당시의 비평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더럽고 괴상한 것을 최악의 추악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꾸짖었다. 다음 1855년에 쿠르베는 특설 개인전 화랑에서 그의 <아틀리에>를 공개했는데, 그는 회장 입구에 '리얼리즘'이라고 써 붙였다.

양화(洋畵)의 묘사는 예전부터 철저한 사실을 기본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특히 사실주의라고 불렸으니만큼 그것은 철저한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물을 깨끗하게 하고 미화하여 그리는 고전파나, 정열이나 문학적 매력을 구하는 낭만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천사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지 않는다고 했으며, 그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고의로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용서도 없이 현실 그대로 나타낼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형상에도 색채에도 가장 정확한 관찰을 하여 현실의 재현을 철저하게 할 뿐이다. 더구나 소재도 철저하여 종래의 미술이 외면하던 사회의 가난한 일면이나 노동의 가혹한 실체를 진실로 당면한 사실로서, 박력 있는 묘사로 드러내고 있다.

현실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표현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도 명백하지만, 쿠르베 작품은 유례없는 박진력을 낳기 때문에 반대측에 있는 사람은 자연을 추하게 만든다고까지 떠들어댔다. 더구나 당시는 시민계급 외에 민중의 입장이 강화되는 시대로서, 쿠르베는 가장 급격한 사회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투쟁의 형식까지 취하여 사실주의를 진전시켰다.

쿠르베[편집]

Gustave Courbet (1819∼1877)

프랑스의 화가. 스위스에 가까운 오르낭에서 태어났으며 주위의 장엄한 자연은 그에게 감화를 주었다. 파리로 나가서 회화에 뜻을 두었으나 스승이 없는 채 인간이나 자연에 대한 관찰이 그의 스승이었다. 작품 <검둥개를 데리고 있는 자화상>(1844)을 처녀출품했으며, <오르낭의 저녁식사를 마치고>(1849)로 주의를 끌었다. 이듬해 1850년에 출품한 <돌을 깨는 사람>과 <오르낭의 매장>은 그 소재까지도 악평으로 자자했다. 이어서 1855년의 만국 박람회에서는 작가는 자선(自選)하는 작품을 공개할 수 있는 규약에도 불구하고 쿠르베는 먼저의 <매장>이나 새로 그린 <아틀리에>의 대작이 거부되었다. 그에 대하여 쿠베르는 억지로 인접한 곳에서 개인전을 열어, 그 두 작품을 중심으로 40점을 늘어놓고 '사실주의'라고 써 붙였다. 그것은 화단에 대한 도전이었는데 그는 그 투쟁을 그의 최후까지 계속했다.

그런데 보불전쟁(普佛戰爭)에 패퇴하여 파리에서 코뮌의 난(亂) (Commune de Paris, 1871)에 참가, 투옥당한데다가 내란 중에 일어난 나폴레옹 1세의 대기념주(大記念柱) 파괴사건에 대해 일방적으로 책임을 추궁당해 배상하도록 되어 끝내 스위스로 도망하고, 레만 호반(湖畔)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적인 소재가 얼마나 강한 회화를 낳을까 하는 문제는 다음 세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더구나 사진처럼 사실을 잡으면서, 물건을 실재화(實在化)하기까지의 묘사는 전후에 유례없는 압도적인 힘을 낳고 있다. 작품으로는 이 밖에 수렵을 다룬 <사슴이 도망치는 곳>(1866) 등 훌륭한 작품이 있다.

아틀리에[편집]

쿠르베 작(1855). 루브르 미술관 소장. 1850년에 대작 <오르낭의 매장>으로 매도(罵倒)된 쿠르베는 1855년 만국 박람회를 기회로 화단에 도전하는 특별한 대작을 제작했다. 그것이 이 <아틀리에>(화실)인데, 화가는 <화가의 아틀리에, 나의 7년에 걸친 예술생활을 요약하는 실재(實在)의 우화(寓話)>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화실 안에는 하나의 사회를 묘사하는 것으로서 우측에는 독서하는 시인 보들레르를 비롯하여, 친우인 사회주의자 프루동이 그려지고, 자유로운 사랑을 나타낸 연애하는 젊은이 등, 모든 아름다운 세계가 그려지고, 좌측에는 사회의 오염되고 더러운 이면이 그려졌는데, 거지로부터 그가 싫어하는 승려·밀렵자 등이 거기에 잡다하게 섞여 군상(群像)을 이루었다. 그리고 중앙에 쿠르베가 몸을 뒤로 젖히고서 고향의 풍경을 그리고 있으며, 그 앞에 감탄하여 쳐다보고 있는 것은 순진함을 상징하는 어린이다. 배후에는 모델이 섰는데, 그 나체는 놀랄 만큼 매력적이다. 이 화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짙은 분위기에 갇혀서, 그 초점에 화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화면을 상하로 나눠 보면, 많은 인물은 대개 하반에 배치되었고 상반은 벽과 창만 그려져 있다. 쿠르베는 그 부분에는 눈에 띄는 물건은 그리지 않고 있으나 공간을 긴축시키고 있다. 그것은 앵그르파의 미끈한 화면에 비교하면, 꽉 누르는 듯한 강도가 있으며, 특히 그림물감이 강인하여, 그림물감의 강도가 그리는 대상물의 실재감을 뒷받침하여 커다란 매력을 낳고 있다.

도미에[편집]

Honore Daumier (1808∼1879)

프랑스의 화가. 쿠르베만큼 극적인 파란(波瀾)은 없었으나, 철두철미 서민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도 개별적으로 강하게 현실을 묘사했다.

도미에는 풍자화가로서 매우 탁월하였다. 아버지는 마르세유의 유리공(工)으로 파리에서 일했으나 가정은 빈곤하여 도미에는 일찍부터 일을 하였다. 회화를 거의 독학으로 익히는 동안에, 친구로부터 석판화(石版畵)의 기법을 익혔고 그것으로 생계를 삼았다. 당시는 정치 비판이 비등한 시대여서, <카리카튀르>지(紙)에 초빙되어 정치적 풍자화를 그렸다. 이후 도미에는 탄압으로 1832년에는 일시 투옥되었으나, 정치와 사회의 가장 통렬한 비판자인 그의 풍자화는 고자세의 관료로서 만족하고 있는 시민계급까지 가차없이 도려내고 있다. 그때 그는 데생의 귀신이라고도 하는 재능으로 묘선(描線)은 리듬을 띠고 약동하고, 묘사는 인물의 핵심을 잡아 참된 풍자화이면서도, 그것을 예술로서 받아들이는 힘을 나타내고 있다.

풍자화는 <카리카튀르>지(紙)에서 <샤리바리>지에까지 연재되어 막대한 양에 달하는데, 후반은 유화(油畵)로 옮겨서 대작은 없지만 <삼등열차>나 <돈키호테>의 연작(連作)과 그밖의 것을 낳고 있다. 이들 회화는 생전에는 아무런 존경도 받지 못했으나 깊은 음영(陰影) 속에 색채는 열(熱)을 띠고, 간결하면서도 진실이 넘치고 있다. 최만년(最晩年)에는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쇠퇴하여 교외인 마르몽드아에서 살다가 생애를 마쳤다.

자연주의[편집]

自然主義

다비드의 고전주의에서 시작하여, 역사나 문학 등의 소재가 많이 그려지는 동안 누구나 느끼는 것은 자연으로의 복귀나 예찬이 확실히 적은 일이었다. 자연은 예술의 스승이며 그 원천인 것이다. 그 자연을 낭만적으로, 꾸며진 재미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저 솔직하게 관찰하여 자연에서 직접 받는 감명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태도는, 19세기 전반에는 풍경화가 미셸(George Michel, 1763∼1843)을 낳았는데, 미셸은 코로가 나옴에 이르러 참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자연을 솔직히, 꾸밈 없이 본다는 의미를 넓게 보면, 서구의 회화는 일찍부터 자연주의 형태를 취하지만, 풍경을 전문적인 소재로 하여 자연의 솔직한 모습에서 자연에 친근하고, 자연의 참됨을 알고 풍경을 오직 미의 대상으로서 삼는 경향은 19세기 풍경화에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그 풍경화가들은 당시 살롱(전람회)의 인기인으로서 늘 화제를 모으고 있었으나 그 사람들은 화단의 사교인으로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화단 밖에 있어서 저마다의 관찰과 감동에서 몸과 마음으로 자연 속에 융합되어 있다.

풍경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대가를 낳았다고 하지만, 풍경은 일반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배경을 이루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의 풍경화가들은 자연을 신선한 감명(感銘)에서 보고 새로운 발전으로 이끌었다.

코로[편집]

Camille Corot (1796∼1875) 프랑스의 화가.

코로의 풍경에는 시와 진실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히 용해되어 있다. 코로는 빌 다브리에도 집을 가지고 있어, 못가를 되풀이하여 그렸는데, 코로의 화필에 그 수목은 현실과 꿈의 아름다움을 융합시킨 듯하다. 코로는 겸허하고 타인에 대한 따뜻한 인품 때문에, 그 생애는 회화에만 전념(專念)하는 진실로 평화로운 것이어서, 인생의 풍파(風波)도 이 사람을 피하고 있는 것 같다.

코로는 파리의 유복한 양재점에서 태어났으나, 처음 한동안은 양복점의 점원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회화에 마음이 이끌려 다소는 스승을 따라 배우기도 했으나 역시 자연이 그의 스승이었다. 이어 동경하던 이탈리아의 정다운 풍경에 감동했다. 그 이탈리아에서의 제작은 아름다웠으며 그는 모두 세번 이탈리아를 찾았다.

살롱에 출품한 것은 1827년부터이며, 이후에는 오래도록 계속 출품하지만, 시종 풍경화가로서 그렸다. 작품은 엄정한 데생을 주장하는 측으로부터는 공격을 받으나 그 겸허한 진실에서 코로는 점차 조용한 존경을 모으고 있었다. 그 생활은 담담하여 화단의 대립에도 관계 없이 자연의 깊이와 벗하는 조용한 생활을 계속하고, 또한 도미에와의 우정 등 아름다운 삽화도 적지 않다.

작품으로는 <이탈리아의 풍경>도 볼 만하지만, 또 <두에의 종각(鐘閣)>(1871)과 그 밖의 것도 미묘한 정적(靜寂)을 나타내는 외에, 연못가의 온화한 매력에 넘친 <모르트퐁텐의 추억> 등 다수의 작품이 그려졌다.

코로는 생애에 수많은 풍경화를 남기고 있으나, 그 제작은 언제나 겸양하면서도, 다른 어떤 제작에도 못지 않는 높은 인식으로 풍경화를 드높였다. 더구나 만년엔 즐겨 인물을 그리고 있는데, 만년의 인물은 더욱더 맑아져 조용한 감동을 주는 <푸른 옷을 입은 여인>(1874) 외에 <진주의 여인>(1868∼70)의 모나리자와 같은 포즈는 그 품격과 묘사의 적확(的確)으로 19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모르트퐁텐의 추억[편집]

1864년, 코로 작. 이탈리아를 여행한 시대의 코로는 남방의 햇빛에 감동되어, 조용한 가운데서도 밝은 제작을 남겼는데, 코로가 가장 코로답다고 논평되는 연못가의 작품에서는, 코로는 융합되는 듯한 부드러운 묘사를 보이고 있다.

자연은 경우에 따라서는 거친 힘을 나타내는데, 온화한 코로에게는 투쟁적인 성격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을 그리는 경우도 같아서 코로가 즐겨 그린 것은, 여성의 우아하고 부드러움에 비교될 만큼 다듬어진 온화한 정경(情景)이었다. 코로는 자연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친근하게 시적(詩的)인 정경을 차례로 늘어놓고 있다.

모르트퐁텐은 파리보다 북쪽에 있어 넓은 정원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에서도 연못 주위의 황혼녘의 빛은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서 나뭇잎의 끝은 대기 속에 용해되는 듯 생각되고, 나무의 그림자는 조용하고도 짙으며, 연못의 물이 빛날 때에 한 가닥 낮은 자연의 소리에 마을 아가씨와 어린이가 왼편에서 놀고 있다. 그것은 현실적인 정경이지만 동시에 이야기인 듯도 하며, 마을 아가씨를 코로가 물가에 반복하여 묘사하는 님프(물의 요정)의 자태로 대입(代入)시켜도 하등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이 작품은 몽환적(夢幻的) 온화함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온화함은 안식을 낳고, 코로는 눈보다도 사람의 마음에 이야기를 걸어오는데, 단색에 가까운 색조이면서 색채는 미묘하게 변화하여, 녹아드는 초록색이 부드럽고, 아가씨의 치마 하나만이 빨갛게 빛나고 있어서, 다른 화가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시정(詩情)을 낳고 있다.

루소[편집]

Theodore Rousseau (1812∼1867)

프랑스의 화가. 파리 태생이나, 소년 시절에 백부를 따라서 쥐라의

산지(山地)에갔는데 자연의 장대한 박력은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루소는 네덜란드파의 풍경화에 마음이 끌리는데, 자연 속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연의 야성적인 어떤 힘이었다. 그것을 정열적으로 그려서 격렬한 충동을 품게 하는데 그것은 당시 살롱의 경향에 반대하여, 루소는 1835년에 살롱에 낙선하고부터는 퐁텐블로의 수풀에 인접한 바르비종 마을에 머물렀다. 그 살롱에는 반드시 연속하여 낙선되는데, 그는 프랑스 각지를 찾아다닌 외에는 바르비종에서 완전한 은둔생활 속에서 제작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은 형세(形勢)를 바꾸어, 이듬해 살롱에는 다수의 작품이 나란히 전시되어, 정부로부터 <퐁텐블로 수풀의 출구(出口)> 제작을 의뢰받았으며 이어서 1855년 만국 박람회에서는 압도적인 명성으로 보답되었다. 작품에는 <밤나무의 가로수 길>과 그 밖의 것이 있는데, 루소는 나무의 묘사에 탁월하고, 나무를 건축처럼 관찰하여 묘사하는 자연은 거대한 성격과 깊은 진실을 나타내고 있다.

바르비종의 풍경화가[편집]

-風景畵家

바르비종을 둘러싼 풍경화가로는 도비니가 알려져 있다.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1817∼1878)는 파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로부터 초보적인 가르침을 받았으며, 1838년 <파리의 노트르담>을 처녀 출품했다.

1857년에 <봄> <일몰(日沒)>을 발표하여 알려졌는데, 도비니는 물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서 즐겨 넓은 전망을 그렸고, 하늘과 물의 표현에 견실한 힘을 보이고 있다.

오아즈 강변에 거처를 삼고 배 위에 작은 집을 지어, 오아즈나 센강을 돌아다니면서 제작을 한 것도 이 화가이다. 콩스탕 트 루아용(1810∼1865)은 네덜란드에 여행하면서 17세기 풍경화에 감명을 받아 풍경화에 동물을 집어 넣고 있다. 수풀 속을 걷는 가축이나 역광(逆光)의 들판을 걸어가는 소 등은, 정경과 동물이 융합하여 새로운 매력을 자아내고 있다. 그에게는 루소와 같은 정한(精悍)은 없지만, 빛의 묘사가 매끄럽고, 오히려 알기 쉽고 분명한 묘사는 시대적 기호(嗜好)이기도 하다. 작품에는 <밭갈이 하는 소> <아침>(1855) 등을 남기고 있다.

드 라 페니아 디아즈(1807∼1866)는 열살 때 고아가 되었는데, 선천적인 색채감각으로 회화에 손을 댔고, 당시의 조용히 정리된 작품을 극도로 싫어하여 빛깔을 한데 묶어 두듯 터치를 살리고, 현지(現地)를 모르지만 로맨틱한 정열에서 오리엔트의 장면을 많이 그렸으며, 신화에도 즐거움을 가진 외에, 퐁텐블로의 수풀 등을 묘사하고 있다.

밀레[편집]

Jean Fran

ois Millet (1815∼1875)

프랑스의 화가. 바르비종의 화가라고 하면 먼저 생각되는 것은 밀레이다. 그 마을에 오랫동안 산 사람은 루소와 밀레이나, 밀레는 농민을 계속 그렸으니만큼 인상이 깊은 것이다.

밀레는 노르망디의 한촌(寒村)에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니만큼 그는 농민생활을 신앙처럼 진실하게 느꼈으며 화가가 되어서도 사회의 멸시와 투쟁하며 농민의 모습을 계속 그렸다.

도미에는 민중을 그렸고, 그에게는 파헤쳐 내는 맹렬함이 있었다. 그에 반하여 밀레는 사모(思慕)의 열정이 간절하게 나타나, 그 농민의 회화에는 때로 종교적인 분위기까지도 낳고 있다. 그는 회화에 뜻을 두어 노고(勞苦) 끝에 파리로 나아가 스승에게 지도를 받았으나 스승과의 사이는 서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드디어 1840년에 초상화를 출품하여 처녀 입선을 했으나 밀레는 당시의 회화에도, 도회(都會)의 생활에도 친숙하지 못했다.

시대의 취향에 역행하여, 그 생애는 끝없는 빈곤에 쫓기는데, 때로는 절망을 느끼면서, 그 동안에도 농민을 보는 눈은 경건함을 잃지 않았다. 빈곤은 항상 따라다녔는데, 1849년 때마침 파리에는 전염병이 유행하여 온 가족을 거느리고 바르비종 마을로 이주했다. 그 마을에서는 이미 루소가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점점 깊어졌으며, 밀레는 생활을 위해 그리던 그림을 버리고 오로지 농민의 생활만을 그렸다.

작품에는 <씨뿌리는 사람>(1850)이 있고, <괭이를 든 사람>(1862)은 박력이 풍부하며, 시정을 보인 <양 기르는 여인>(1862) 외에 <이삭줍기>(1857), <만종>(1857) 등 다수의 작품이 나왔다. 밀레는 농민처럼 인고(忍苦)하면서 성실한 제작을 관철했다. 그 작품은 고향 풍토의 어두운 면을 반영하여, 그 묘사는 절박한 감동을 내포하고 있다. 밀레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소재를 신앙처럼 존중하여 그 진실을 전하는 화가로서 새로운 세계를 펼치고 있었다.

만종[편집]

晩鍾

1857년 밀레 작. 루브르 미술관 소장. 석양은 완전히 기울고 남은 빛이 대지를 물들일 때, 먼 지평선 교회에서 기도의 시간을 알리는 만종(晩鍾)이 은은하게 들려온다. 농부인 부부는 일손을 멈추고 하루를 감사 기도드리고 있다. 남은 빛은 금빛을 띠고 역광(逆光)으로 사람 그림자를 지으며, 화면에는 축복을 기원하는 것 같은 경건함이 전달되고 있다.밀레는 농가에서 태어나 화가로서 입신하였으나, 허식이 많은 도회생활에는 일생동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진실한 생활이며, 성실한 인생이었다. 그것은 농사만큼 대표되는 것도 없다. 밀레는 화가이면서 또한 농민이었다. 그리고 농민만을 그리기 위하여 시대적 취향에서 유리(遊離)되어 끝없는 빈궁 속에서 허덕였으나 그가 사는 바르비종의 농민도 가난한 생활이 아니었을까.

더구나 여기 그려진 젊은 부부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대지에서의 노동을 신성하다고까지 느껴 경건하게, 또한 인내를 가지고 자연을 신앙하고 노동자체를 믿고 있었다. 밀레는 거기에 존경하는 인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젊은 부부의 기도는 곧 밀레의 기도인데, 신에게 감사하는 경건한 행복에서 지금 저편의 만종과 함께 이 두 젊은이의 가슴 속에 속삭이는 그 기도가 우리들에게까지도 울려오는 듯하다.밀레는 거대한 묘사력의 화가는 아니지만, 화면에 깃드는 진실로써 한 폭의 종교화가 주는 듯한 감동을 화면에 낳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