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고대의 사상/고대의 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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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경의 그리스에서는 본토보다도 식민지에서 문화가 더 발달되었다. 특히 그리스 민족 중의 한 종족인 이오니아인이 이주한 소(小)아시아 서해안의 식민지는 무역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다른 여러 나라와의 접촉이 잦은만큼, 전통적인 습속(習俗)이나 관념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학문 탄생의 모태(母胎)인 자유정신, 합리정신(合理精神)의 발생과 출현을 보게 되었다. 특히 이오니아 식민지의 중심도시 밀레투스(Miletus)에 있어서 그러하였다. 철학의 할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와 그의 제자·학우들로부터 그리스 철학의 제1기인 자연철학(自然哲學)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심사는 외견상 잡다하고, 변화 무궁한 자연현상의 근저에는 어떤 근본물질, 즉 원질(原質)이 있어서 이 원질의 변형·변화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하리라는 신념하에, 그러면 이 원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다. 탈레스는 이것을 물이라고 하였는데, 그 후 약 100년간 이를 공기(空氣)라고 한 사람(아낙시메네스),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는 '무한자(無限者)'라고 한 사람(아낙시만드로스), 불이라고 한 사람(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수(數)라고 한 사람(피타고라스), 혹은 다(多)와 변화를 감각의 미망(迷妄)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불생불멸(不生不滅)·불변부동(不變不動)·유일절대(唯一絶對)의 신(神) 혹은 '유(有)'를 주장한 사람(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혹은 어떤 한 개의 원질만 가지고서는 삼라만상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하여 원질을 수(水)·화(火)·공기(空氣)·지(地)의 4종이라고 한 사람(엠페도클레스), 이 4종으로도 부족하다 하여 질적(質的)으로 상이한 무수한 '종자(種子)'를 원질로 한 사람(아낙사고라스), 끝으로 모든 질적 차이를 양적(量的) 차이로 환원하고, 만물은 질적으로는 동일하나 오직 형태상으로만 차이가 있는 불가분할(不可分割)의 '원자(原子)'로부터 성립한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데모크리토스)들이 연달아 나타났다. 이와 같이 그리스 철학의 제1기는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나 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가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자 자연계보다 인간계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이에 따라 그리스 철학은 제2기인 인간 연구기(人間硏究期)로 들어가는데, 그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소피스트들이었다. 개인의 문제를 흥미의 중심으로 하고, 따라서 국가 전체를 분리하게 한 그들의 운동이 그리스 시대의 계몽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인은 자기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인민집회(人民集會)나 법정(法廷)에 있어서, 상대편을 설복할 수 있는 교양을 간직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교양을 전수(傳受)한 것이 소피스트들인데, 그때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체의 인식의 완전한 상대성(相對性)이 철학상의 가정(假定)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부정(不正)도 정(正)으로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들의 철학에는 많은 부정적인 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적인 맹아(萌芽)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인간을 고찰의 중심으로 한 것은 인식론(認識論)과 윤리학의 연구를 촉진시켰고, 또 학문·법률·도덕·종교 등에 있어서의 일체의 보편타당성에 대한 소피스트적 부정이야말로 이러한 인류의 재보(財寶)를 위한 전사(戰士)로서의 소크라테스를 분기(奮起)시킨 기연(機緣)이 되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소크라테스는 인심을 거스른 사고로부터 각성시키려고 한 그의 태도 때문에 근시안적인 아테네의 주권자로부터 소피스트로 간주되고 기원전 399년 독배를 마시게 되었다. 그는 실제적인 교육가로서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가 비명(非命)의 생애를 마친 뒤에 그의 제자들은 분열하여, 진정한 철학적 견지를 유지하려고 한 일파와, 스승으로부터 단순히 도덕적 자주만을 받아들여 오직 이 일면의 수양만을 문제삼은 사람들로 분파(分派)되었다. 후자에 속하는 것은 키니코스 학파와 키레네 학파이다. 키니코스 학파에 있어서 덕(德)이란 무욕(無欲)이었다. 그들은 이 원칙을 철저히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실천하고 고대 수도승(修道僧)으로서 각지를 방랑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시범을 보였다. 이 키니코스 학파와 정반대되는 키레네 학파는 '덕이란 향락이다'라는 쾌락주의(快樂主義)의 철학을 창도하였다. 이 두 학파 및 그 밖의 소위 '불완전한 소크라테스의 무리'에 대해 진정한 철학의 길을 걸은 유일한 고제(高弟)로서 대립하는 것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초기의 <대화편(對話篇)>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여 주로 도덕적인 개념을 엄밀히 규정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그 후 점점 인식론적·형이상학적으로 심화되어, 모든 감성적인 것의 원형(原型)으로서 영원불멸한 이데아(idea)에 관한 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플라톤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초월론적(超越論的) 2원론(二元論),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은 내재적(內在的) 2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플라톤은 끊임없이 유전변화(流轉變化)하고, 우리의 감관지각(感官知覺)의 대상인 현실계(現實界)를 넘어선 곳에 그 원형이요 이상인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초월론적인 세계의 존재론을 인정하지 않고 이데아를 사물 가운데 내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물은 이데아(이 말은 형상·본질·본성을 의미한다)와 그 기저(基底)로서의 질료(質料) 등 두 요소로부터 성립하는 것이며, 질료가 그 이데아를 완전히 실현하려고 하는 곳에 운동·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 세운 학교 '아카데미아'를 스승 사후에 떠나 자신의 학교인 리케이온(Lykeion)을 거닐면서 강의하였으므로, 후세에 그의 학파를 소요학파(Peripatetics)라고도 한다. 그는 철학자·형이상학자일 뿐만 아니라 경험에 있어서 주어진 모든 것을 존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체의 지식을 포괄하려는 희망을 품은 최초의 사람으로서, 자연과학·역사·교육·문학·정치 등의 연구를 자신도 하고 제자들에게도 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22년에 사망하였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시대의 상황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전적 그리스는 헬레니즘 시대로 들어가고, 국가적 지반의 상실과 더불어 개인주의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 자기 자신 외에는 의지할 곳을 가지지 못한 개인을 위하여 실천적 생활규범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시대 이후에 발생하고 그 후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여러 학파는 형이상학이나 물리학도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윤리학 특히 개인윤리학이었다. 형이상학적 노력은 헛된 것이 되고 주체(主體)는 자기 자신 속에 침잠하였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는 외물(外物)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족(自足)한 현자(賢者)의 심경을, 에피쿠로스 학파는 진정한 내적(內的) 쾌감을 추구하고, 회의학파(懷疑學派)는 외계(外界)의 모든 것을 의심하였다. 스토아 학파의 활동은 기원전 300년경으로부터 로마 제정시대까지 계속되고, 에피쿠로스 학파도 수백 년 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 고대철학은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 의하여 완결된다. 인간지(人間知)의 불완전성이 증명되었으므로 구제는 신앙에 의하여 획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후로 다시 또 한번, 여러 선행학설(先行學說)을 기초로 하여 시대의 요구에 응한 일종의 철학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행하여졌다. 이에 대한 초석(礎石)은 대부분 플라톤의 이데아 설이 제공하였다. 일체 사물의 정신적 본원(本源)으로서 이데아를 내세우고, 이데아의 창조자로서는 신(神)을 생각하고, 신비적 직관(直觀)에 의하여 신의 경지를 체험하려고 하는 것이 신플라톤 학파의 근본사상이었다. 그 주요 대표자는 플로티노스(Plotinos, 204-270)였다. 신플라톤 학파나 이와 유사한 경향은 이에 대항하는 일대 세력으로서 기독교가 출현하자 압도되었다. <孫 明 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