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근세의 사상/르네상스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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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편집]

Renaissance 프랑스어로 '재생(再生)'이라는 의미. 이탈리아어로 리나스켄자 또는 리나스키멘토, 라틴어로 레나스켄티아. 원래는 종교용어로서 '사자(死者)의 재생(再生)' 또는 '부활(復活)'을 뜻하였다. 보통 중세(中世)에서 근세로의 과도기(過渡期)로 14세기부터 15, 6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문예부흥(文藝復興)'을 지칭한다. 르네상스 문화는 상인을 중핵(中核)으로 한 시민문화(市民文化)였다. 그것은 중세에 처음으로 대규모적인 상인자본(資本)이 전개된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흥륭(興隆)하였다. 그 문화의 역군(役軍)은 거의 상인·상인지주(商人地主), 또는 상인귀족 계층에서 출현하였다.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길드 조직에 의하여 원격지상업(遠隔地商業)·금융업, 또는 가내공업을 영위하였다. 그들은 도시의 지배층을 형성하고 그 경제력에 의해 상당히 일찍 영주(領主)와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토지를 손에 넣고, 그 촌락을 그대로 예속화시킨 지배영역, 즉 도시국가 체제를 이룩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도시국가에 있어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상층시민층(上層市民層)은 14세기 이후 점차로 참주(僭主) 또는 그의 궁정귀족(宮廷貴族)으로 되어 갔다. 15세기 및 16세기에 있어서의 이탈리아 성기(盛期) 르네상스는 이와 같은 참주의 궁정을 둘러싸고 개화(開花)된 문화였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君主論)>에 묘사되어 있는 것같이 이들 참주들은 이미 종교나 도덕에 의하여 국가를 보존한다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로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운명의 여신의 미소 외에는 다만 그들 자신의 비르투(力量)만을 의지하여 지배권의 획득과 유지를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부르크하르트에 의하여 르네상스 국가의 특색으로 되어 있던 '계산되고 의식된 피조물(被造物), 예술작품으로서의 국가'가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막상 중시된 것은 혈통이나 가문이 아니라 개인의 역량(力量)이었다. 때로는 조상이 농민 출신인 일개 용병대장(傭兵隊長)이 군주로까지 되었다. 예컨대 밀라노 공국(公國)을 얻은 프란체스코 스폴싸 등이 그러하다. 이들 참주들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궁정에 역량이 있는 학자나 예술가를 초치(招致)하여 보호자가 되었다. 그들은 그로 인하여 마치 자신이 적법하다고 인정된 듯이 생각하였고, 학자나 예술가들도 군주를 찬미함으로써 그의 은혜에 보답코자 하였다. 더욱이 피렌체 공화국에서 참주가 되기 전의 메디치가(家)와 같이 그 거대한 부(富)의 독점으로 인하여 시민의 반감을 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또 그 인기를 얻기 위해 사원(寺院)이나 공공건물을 시(市)에 기부하는 자도 있었다. 이러한 보호자들을 에워싸고 학자나 예술가가 서로 역량을 다투었고, 그로써 그들이 목표한 것은 이미 단순히 신(神)을 위해서도 또한 부(富)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인간성을 야만스런 자들로부터 구별하여 가치있는 것으로 되게 한, 개인적 역량에 대한 '명예'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르네상스가 종교나 경제보다도 인간성(후마니타스)을 존중한 것의 의의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이 명예나 인간성은 결코 혈통이나 가문에 유래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개인적 역량에만 유래한다는 데에 상인귀족적 가치관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인적 역량이 가장 잘 함양되고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분야가 학예(學藝)이다. 학예의 모범을 혈통이나 문벌(門閥)만을 문제시하는 야만스런 중세에서 찾을 수 없다면, 고대로 소급하여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참으로 고대야말로 모든 학예의 황금시대였다. 그 위에 고대 로마의 영광은 이탈리아의 민족정신을 항시 불러일으켜 주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참주나 상인귀족은 고전적 교양을 몸에 익힌 유능한 비서가 실무상 꼭 필요했고, 또한 발달한 도시국가는 로마의 시민법에 통달한 사법관이나 관공리(官公吏)를 다수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모든 요청이 쌓이고 쌓여 '고대의 부활'이라는 의미에서의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고대 로마 등의 유적 발굴, 보존에 관한 포지오에서 라파엘로에 이르는 정열, 교황 니콜라스 5세나 대(大)페데리코 등에 의한 고대의 책자 수집·필사(筆寫), 비잔티움의 그리스 학자의 영향에 의한 메디치가의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 창설 등은 그러한 '재생' 감정의 소극적 표현이었다. 그 적극적 표현은 문학이나 미술 등의 창조적 작품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보카치오나 비비라니 등은 시(詩)는 단테에 의해, 회화(繪畵)는 지오토에 의해 재생됐다고 기술하였다. 당시 사람들에 의해, <신곡(神曲)>의 단테, <칸쏘니에레>의 페트라르카, <데카메론>의 보카치오는 동시에 또한 고대부흥의 아버지로서 또는 스승으로서 상찬(賞讚)되었다. 그들에 의해 준비되었던 인문주의는 15세기 들어 폭발적으로 보급되었다. 바라는 자유로운 학예(學藝)가 당초에는 장기간에 걸쳐 타락하여 사멸(死滅) 직전에 있었으나 다시 활기를 찾아 부활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

고대철학의 부흥[편집]

古代哲學-復興

르네상스에서 고대철학의 부흥은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에 의한 고전의 일반적 연구에서 파생(派生)된 것이다.

그들의 고전 연구의 동기(動機) 중 하나는 스콜라 철학이나 신학에 의하여 규제된 고전 텍스트를 순수하게 또 엄밀하게 고전 그 자체의 모습으로 되돌려서 연구하려고 하는 문헌학적(文獻學的) 요청에 의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동기는, 인문주의자는 학자인 동시에 작가·관공리·비서·정치가·성직자이기도 한 데서 그들의 문학작품, 공문서나 사적 서간(私的書簡), 비명(碑銘)·송사(頌詞)·연설·설교 등을 문학적·수사적(修辭的)으로 아름답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그를 위해서는 고대인의 모범이 무엇보다도 요긴했다. 이런 동기에 의하여 고전의 새로운 원전(原典) 소개나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의 재해석 및 재평가가 행해졌다.

이러한 인문주의자의 운동은 고유한 의미에서의 인문학연구의 테두리를 넘어, 종래 스콜라의 폐쇄적 아성(牙城) 속에 독점되어 있던 철학의 영역까지도 침식해갔다. 즉 철학의 라틴어 원전 중에는 세네카나 보에티우스나 키케로의 대부분이 이미 잘 알려져 있었으나 새로이 다른 모양으로 읽히게 되었다. 키케로의 <아카데미카>나 루크레티우스의 저작이 새로이 소개되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스 철학의 원전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하여 종래 알려져 있던 저작은 별개의 문체와 새로운 용어로 다시 번역되었다. 처음으로 라틴어로 번역된 것으로서는 플라톤과 신플라톤 주의자의 대부분의 저작,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세크스투스 엔피리쿠스, 플루타르코스나 루키아노스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방대한 새 자료의 사용법에 관해서 다수의 인문주의자는 키케로의 예를 좇아 다양한 저자에게서 적의인용(適宜引用)한다고 하는 절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실제 르네상스는 키케로 주의의 시대라고까지 일컬어진다. 다른 한편 개개의 고대 사상가나 학파의 철학설(哲學說)을 부활시키려 기도한 인문주의자도 있었다. 바라의 에피쿠로스 주의, 피치노의 플라톤 주의, 리프세우스의 스토아 주의, 몽테뉴의 회의주의(懷疑主義) 등이 그 예(例)에 해당한다.

반스콜라적 인문주의자[편집]

反 Schola的 人文主義者

일체의 신학적 권위에 대한 선입견을 떠나, 고전만을 위해 고전을 읽는다고 하는 인문주의자의 자유검토의 정신에 의한 연구태도는 13세기 브라만의 시게르스 이래, 스콜라 신학자들로부터 이단(異端)이란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인문주의자는 무엇보다도 '인생에 있어서 유용(有用)한 것에 관한 명료하고 확실한 인식'을 구하고 있었으므로 그 점에 있어서 스콜라학을 번잡하기만 하고 공허하며,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스콜라학과 인문학과의 대립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論理學)과 키케로적 수사학(修辭學)의 대립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문주의자 가운데에는 문법과 수사학에 관련된 새로운 단순화된 논리학으로 스콜라적 논리학을 대신하려고 기도한 자도 출현하였다. 가령 바라, 아그리콜라, 니조리우스, 그리고 특히 페토르스 라무스가 그에 해당된다. 비베스의 귀납적 방법도 그 발전 형태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문주의자에 의한 언어문헌학(言語文獻學)의 방법은 원전(原典)으로부터 신적(神的) 권위를 불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역사적 기록으로서 평가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대 세계의 발견은 동시에 인간의 가치 발견이 되어 인문학(人文學)은 스콜라학에 대해 '보다 인간적인 학예'라고도 불리었다.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성서와 교부(敎父)의 원전 비판(原典批判)을 행하는 데까지 가서 마침내 스콜라적 세계관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단서가 되었다.

에라스무스[편집]

Desiderius Erasmus (1466경-1536)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난 16세기 최대의 인문학자.

성직자의 사생아. 아우구스티노 율수참사회 수사(律修參事會修士)였는데, 수도원을 나와버렸다. 후일 교황으로부터 특사(特赦)를 받았다. 인문주의는 그와 더불어 이탈리아 지방에 있어서의 소수 학자의 독점으로부터 전 유럽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스·라틴의 고전정신의 보급에 공헌한 편저(編著)로서 <격언집>이나 <대화집>이 있다. 또 바라의 영향에 의하여 신약성서 그리스어 원전의 라틴어역 및 주해(註解)나 성 히에로니무스 저작집(著作集)의 교정 간행(校訂刊行) 등을 실행했다.

치우신 예찬[편집]

痴愚神禮讚 (1511)

1509년 여름, 에라스무스는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의 여행 중 동배(同輩) 중 매우 현명하고 기지(機智)에 찬 친구 토머스 모어를 생각하다가 그의 라틴명 모루스에서 모리아(痴愚女神)를 연상하고 그녀의 입을 빌려 당시의 어리석은 세상을 풍자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의 모어의 집에 도착하자 단숨에 이 책을 저술해 냈다.

사람의 세상에는 치우(痴愚)가 충만하며, 더욱이 치우에 의하여 사람은 도리어 행복해진다고 모리아는 자기예찬(自己禮讚)의 연설을 한다. 치우는 생명의 근원이며 청춘과 쾌락을 약속하나 학식은 노쇠(老衰)의 상징이다. 학자나 현인(賢人)은 책 이외의 인생에서는 무능하나 우자(愚者)는 현실 경험을 통하여 오히려 진정한 사려분별을 터득하게 된다. 황금시대의 소박한 사람들과 같이 아무런 학예도 없고 자연에만 이끌려 사는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

그리하여 왕후(王侯)·귀족·부자·기예가(技藝家)·학자·성직자 등 모든 신분 계층의 사람들이 현명하다고 자찬하는 진짜 바보(痴愚者)라고 조소를 받는다. 이와 같이 인생은 치우신(痴愚神) 작희(作戱)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치우신과 혈연관계에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우(愚)를 통해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 하고, 또 그의 경건한 신도들이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찾는 행복이란 일종의 착란광기이기 때문이다. 본서는 에라스무스의 저작 중 예술적으로도 세평상(世評上) 가장 성공한 것이다. 후일 가톨릭의 금서목록(禁書目錄)에 올랐다.

플라톤 철학의 부흥[편집]

Platon 哲學-復興

르네상스기의 플라톤 철학의 부흥은 15세기 3인의 대표적 플라톤 주의자, 즉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마르시리오 피치노 및 피코 델라 미란돌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들에 의해 피렌체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플레톤과 그의 제자인 베사리온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비교논쟁(比較論爭)의 계기를 만들었다.

플레톤의 생각에 감격한 코지모 데 메디치는 후년(後年) 피렌체 교외의 별장에 피치노를 초치(招致)하여, 플라톤과 그 학파의 저작(著作)을 모두 번역시키려고 하였다. 피치노는 그 곳에서 당시 가장 뛰어난 인문주의 학자들을 모아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를 창설하였다.

그는 그의 '플라톤 신학' 등에 있어서 철학과 시를 사랑에 의해 합일케 하는 '경건한 철학'을 주장하였다. 피코 데라 미란도라는 <인간의 존엄에 관하여>라고 하는 연설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자유로이 선택하는 인간의 존엄에 관하여 논하고, 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성서(聖書)와 카발라(유대의 신비설) 등 인간사상의 철학적 평화를 주창하였다.

플레톤[편집]

Georgios Gemistos Plethon (1355-1452)

비잔티움의 플라톤 학자·철학자.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미스트라의 참주에 봉공하고 동로마제국 개혁의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피렌체의 공회의(公會議)에 그리스 정교회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그의 감화(感化)에 의해 코지모 데 메디치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재흥(再興)을 착안하였다.

플레톤은 로마 교회의 신학이 주요 근거로 삼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해 플라톤적 신학이 우월함을 역설하여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기적 등의 교의(敎義)를 부정했다.

<법률집성(法律集成)>에 표시되어 있는 이상국가론(理想國家論)은 토머스 모어나 캄파넬라 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해석[편집]

Aristoteles 解釋

이탈리아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는 인문주의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기의 현상이었다. 그것은 보통 아베로에스 주의, 또는 파도바 학파로서 취급되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오히려 세속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또는 이탈리아 학파로 규정한다. 철학과 신학, 이성과 신학, 아리스토텔레스와 종교적 권위 등 각각의 것 사이의 분리(分離)가 공통적으로 주장되었다. 또 이성과 감각적 경험만이 자연적 인식의 원천이라고 하였다.

파도바 대학의 아키리니나 토라포리노 등은 아베로에스파(派)였는데, 그들의 제자인 폼포나치는 오히려 알렉산드로스파에 가담했다. 아베로에스파에게는 영혼은 보조적 형상으로서 배(船)에 대한 사공과 같이 육체로부터 분리 독립되어 존재한다. 알렉산드로스파는 영혼을 형상적 형상(形相的形相), 가령 배의 본질 그 자체라고 하였다. 자바레라는 양자를 비판하여, 지성(靈魂)의 질료(質料=關係)로부터의 분리는 존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작용에 따른 분리로서의 추상의 의미라고 하였다(사공이 배를 보고 있을 때 배도 그를 보고 있다).

폼포나치[편집]

Pietro Pomponazzi (1462-1525)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 철학자.

파도바 대학 철학교수. 후일 페라라 및 볼로냐 대학에서도 가르쳤다. 주저(主著) <영혼의 불사(不死)에 관하여>에서 그는 아베로에스설, 플라톤설, 토마스 아퀴나스설을 비판하여 영혼의 불사라는 것은 자연적 이성,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서는 논증될 수 없는 것으로서, 하나의 신앙개조(信仰個條)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에 의해 신앙과 이성과의 공존(共存)을 설명하고 이성(理性)의 상대적 독립을 강조하였다. 그의 <마술(魔術)에 관하여>는 금서목록에 올랐다. <운명에 관하여>에서는 스토아적 운명론이 문제로 취급되고 있다.

스토아 철학의 부흥[편집]

Stoa 哲學-復興

종교개혁과 반동종교개혁(反動宗敎改革)에 수반하는 내란(內亂)에 대해 평화적·법적 통일을 꾀하려고 하는 국가이성(國家理性)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신봉자 중에는 법복(法服)의 귀족이 많았다. 재난에 충만된 외적 세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자연의 법, 즉 이성에 좇아서 항심(恒心)을 갖고 사는 것이 현자의 유덕(有德)한 생활이라고 하여 국가이성의 입장에서 민중의 인종(忍從)과 위로가 설파되었다. 이 파(派)의 대표적 사상가는 리프시우스 및 듀 베르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부흥[편집]

Epicouros 哲學-復興

이것은 고전 존중과 더불어 인간의 자연성 존중이라는 인문학 연구의 성과이다. 바라는 일종의 그리스도교화된 에피쿠로스 주의를 전개하였다. 그에 의하면 스토아적 금욕주의는 자연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에도 반(反)하는 악덕(惡德)의 가르침이다. 쾌락이야말로 자연과 일치된 인간의 진정한 선(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목표하는 내세(來世)의 행복도 일종의 쾌락이다. 또 가상디는 스콜라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학을 비판하고,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 특히 원자론(原子論)을 부활시켰다.

=회의론자[편집]

懷疑論者

르네상스의 회의론은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고 자문(自問)한 몽테뉴에게서 가장 전형적인 표현을 발견하였다. 그의 친구 샤론은 호교론적(護敎論的)으로 몽테뉴를 체계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그의 <지혜에 관하여> 가운데서 자신을 아는 것, 즉 인간의 연구를

문제삼고 있다. 인간은 허무하고 약한 것이다. 인간의 모든 동요(動搖)는 오류의 끝없는 경과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도 정신도 애매하여 사람을 기만하였다. 그러나 그런 의견을 물리치고 판단을 거부하여 정신의 자유를 지니는 것이 현자의 제1 계율(戒律)이다.

또 포르투갈의 프란시스코 산체스에 의하면 경험은 종종 사람을 기만하여 더욱이 사물의 외적 우유성(愚有性)밖에는 나타내지 않는다. 판단은 경험의 결과에 바탕을 두고, 개연적(蓋然的)인 추측밖에 줄 수가 없다. 샤론도 산체스도 회의론이 인간의 허무함을 가르침으로써 종교에 유용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몽테뉴[편집]

Michel de Montaigne (1533-1592)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페리고르주(州)의 몽테뉴에서 출생하였다. 조상은 보르도의 부유한 상인. 부친은 이탈리아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어 귀족 생활을 보냈다. 어린시절에는 라틴어만으로 이야기하며 놀도록 키워졌다. 6세에 보르도의 귀이엔 학원에 입학하였다. 주어진 학과에는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익숙해진 라틴어로 오비디우스나 베르길리우스 등을 숨어서 탐독하였다. 아마툴루즈에서 법학을 배운 후 21세 때 페리그의 어용금재판소(御用金裁判所) 참의(參議), 24세 때 보르도의 고등법원 참의가 되었다. 거기서 경험한 법이나 재판상 문제, 인간의 다양성, 정념(情念)에 밀려가는 인생, 인간의 판단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점 등은, 후일 <에세>에서 중요한 제재(題材)가 되고 있다.

또한 고등법원의 동료이며 인문학자이기도 하였던 라 보에시와 고대풍(古代風)의 유덕(有德)한 친교를 가졌었다. 라 보에시의 현자(賢者)다운 생(生)과 사(死)는 단지 책 속에서의 인문주의를 넘어서 도덕과 인생의 최고 문제를 현실적으로 생각하게끔 하였다. 라 보에시의 병사로 인한 우울함을 메우기 위해 결혼하였다. 그리고 3년 후 부친이 사망하였다. 이듬해 부친의 유지(遺志)를 따라 레이몽 스봉의 <자연신학(自然神學)> 번역본을 파리에서 출판하였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등법원 참의의 직무를 내놓았다.

그리하여 1571년 38세의 생일에 은퇴 결의(決意)를 표시하는 라틴어로 된 명문(銘文)을 몽테뉴성(城)의 서재에 새겼다. 이후 그곳에서 무위(無爲)에 의해 헤매는 망상(妄想)의 괴물을 <에세>라 하여 작중에 서술하고 있다. 그래도 종종 공적 사건(公的事件)에 관여했다. 바야흐로 종교전쟁(宗敎戰爭)이 한창일 때이고, 그는 충실한 국왕의 신하이면서 규이즈가(家)와도 나바르왕(王)과도 친교가 있었다. 1580년 <에세> 초판(初版)을 간행한 후 얼마 안되어 온천에서 요양하고자 이탈리아까지 여행하였다(<여행일기>는 18세기에 출판). 여행 도중 보르도 시장으로 선출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재선되었기 때문에 4년간 봉직하였다.

1585년 마티니욘 원수(元帥)와 나바르왕과의 조정화의(調停和議)를 꾀하던 중 보르도시에 페스트가 만연하였다. 이에 그는 차기 시장을 원수에게 인계하고, 한집안이 모두 잠시 동안 유랑생활을 하였다. 그 경험이 그를 에피쿠로스적 자연주의자로 변화시켜 갔다. 앙리 4세의 즉위에 따라 궁정 일을 볼 것을 요청받았으나 사양하였다. 베이컨, 데카르트, 파스칼, 그 밖에 모랄리스트 또는 계몽주의자들까지 몽테뉴의 사상과 문체(文體)의 샘물을 마시며 성장하였다.

에세[편집]

Essais

몽테뉴의 수상록(隨想錄).

몽테뉴는 서문 속에서 "나 자신이 내 책의 제재(題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문주의자이며 모랄리스트인 그가 묘사하는 것은 그의 생애의 독서와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몽상(夢想)이며, 인간과 그 역사, 다시 자연까지도 포함하는 소우주(小宇宙)로서의 자아이다. 그의 자기성찰(自己省察)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그대 자신을 알기' 위함인데 도리어 모든 인간을 내성(內省)케 하는 교훈이 되었다.

그가 <에세>의 저술에서 목표로 한 것은 대체로 세 시기에 따라 크게 다르다. 제1기는 스토아 주의 시대이다. 친우 라 보에시나 세네카의 영향이 강하게 보여 이성과 의지의 힘에 의해 고통과 죽음을 멸시하라고 설파하고 있다. 제2기는 회의주의 시대이다. 플루타르코스와 세크스투스 엔피리쿠스의 영향이 그를 점차 스토아 주의로부터 탈피시키고 피론 주의에로 인도하였다. '레이몽 스봉의 변호(辯護)'의 장(章)으로 대표되고 있다.

신의 은총에 의한 신앙을 결여한 인간적·자연적 이성은 동물의 능력보다도 뒤떨어진다. 지식에 의한 자만은 인류의 파멸을 가져온다. 오히려 어떠한 독단도 배제하고 판단을 중지하고 부동심(不動心)을 갖는 것이 평화적으로 사는 길이다.

이 사상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크 세 쥬)라고 하는 의문형으로 표시된다. 신(神) 이외의 모든 피조물은 부단히 생성유전(生成流轉) 과정에 있으므로 포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무지를 깨닫고, 그 모든 도구(道具)를 바쳐 겸허하게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 분수에 맞는다. 최후의 시기는 자연철학의 시대이다. 그는 이미 제1기에 있어서와 같이 스토아적 이성에 의하여 자연을 극복하는 대신 소크라테스를 모범으로 하여, 경험을 중시하고 자연에 따르려 하였다. 그리고 자연을 신격화(神格化)하여, 우리의 좋은 안내자, 우리를 양육하는 어머니라고 하였다. '아이의 교육에 관하여' 장(章)에는 그러한 자연적 지혜와 고대의 범례(範例)에 의한 교육론이 서술되어 있다.

종교개혁[편집]

宗敎改革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전에 95개조의 논제(論題)를 게시한 것을 계기로 전유럽은 약 100년에 걸쳐 신앙의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도 격동하였다. 그는 처음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신학상의 의문을 던진 데 불과하였으나, 그것이 철저히 개혁운동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① 교회나 교황(敎皇)이 14세기 이래 분열되었고, 중세(重稅)를 과하는 등 타락하여 민중의 반감을 사고 있던 점, ② 교회제도를 지탱하고 있던 봉건제(封建制)가 15세기 말부터 시작된 경제적 발전으로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하여, 그와 동시에 통일적 국민국가가 대두한다는 변동의 시대였던 점, ③ 교회의 정통신학 중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신하여 신앙과 이성을 분리하고 특히 전자만을 강조하는 오컴의 사상이 세력을 얻게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더욱이 에크하르트, 타울러(1300-1361)의 신비주의사상, 평신도간에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공동생활의 형제회' 운동,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 루페블 데타플(1455경-1536), 로이힐린(1455-1522), 에라스무스 등 인문주의의 입장에서 실시하는 성서의 원전 연구와 로마 교회의 해석에 대한 비판이 있다. 또 선구적 운동으로서는 영국의 위클리프(1320경-1384), 체코의 후스(1370경-1415),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1452-1498) 등이 이적(異蹟)의 효력과 사제제도(司祭制度)를 비판하고 교회개혁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루터에 이르러 공공연한 종교개혁 운동이 된 것은 그가 문제로 삼는 것이 가톨릭의 공덕사상(功德思想)을 단적으로 표현한 면죄부라는 구체적인 것으로, 그것이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이라는 독일의 국민적 정서와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1550년까지 인구의 반수는 가톨릭에서 이탈하였고,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1484-1531)가 로마 교회의 절대성(絶對性)을 부인하고 개혁운동을 지도하였다. 계보적으로 후계자인 칼뱅은 제네바에서 신정정치(神政政治)를 행하고 주저(主著)인 <그리스도교 강요(綱要)>는 개혁파 교회 신앙의 기본원리를 담고 있다. 칼뱅파의 사상은 독일 남부, 프랑스, 네덜란드에 침투되고, 영국에서도 루터파와 더불어 그 영향을 받은 국왕이 개혁운동의 주도권을 취하여 영국교회를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종교개혁은 신앙을 인간의 내면성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 동시에, 일상생활과 신앙의 결합을 요구하였다. 여기에서 성립을 보게 된 금욕윤리(禁欲倫理)는 세속내(世俗內)의 직업운동에 대한 헌신과 결부되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형성에 가장 적합한 정신 태도였으며, 또 낡은 사회질서에 대한 반역(反逆)으로 근대적 자유를 낳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루터[편집]

Martin Luther (1483-1546)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가.

작센 지방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으나 곧 일가(一家)는 만스페르트로 이사하고 부친은 채광부(採鑛夫)가 되었고, 후일 정련소(精鍊所)를 경영하였다. 조부의 대까지는 농부로서 그는 자기 자신을 '농민의 자식'이라고 일컬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수사(修士)가 되었으나 노상에서 심한 우레를 만나, 그것을 계기로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1512년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이 즈음 '탑(塔)의 체험'이라 불리는 회심(回心)을 갖게 되었다. 신의 옳은 역할은 심판에 있지 않고 은총에 있다. 은총을 받는 조건은 율법을 지킨다든가 선행(善行)을 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를 확신하며, 자기의 전존재(全存在)를 신에 복종케 하는 데에 있다. 인간은 불순(不純)하고 구제되기 힘든 죄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용서한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기적이다. 이 신앙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 '회심(回心)에 의해 얻어진 이 신앙'만이 신앙의 핵심이며 종교개혁을 일관하는 중심 사상이다.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역할을 부인한 루터가 죄값 면제(免除)의 보장으로서 면죄(免罪)를 교회가 헌금(獻金)에 의해 각 사람에게 준다고 하는 면죄부 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은 당연하다. 때마침 마인츠의 대사교(大司敎)가 된 알브레히트는 교황으로부터 면죄부 판매의 허가를 얻어서, 수입의 반은 그가 차지하고 나머지 반은 로마의 성 페트로 성당 건설에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면죄의 교의(敎義), 교황의 권리에 의문을 품고 <95개조>의 제안을 하였으나, 그것은 또 로마의 착취에 대한 독일 국민의 분노이기도 하였다.

루터는 개혁운동의 기초를 강화하고 원칙을 명백히 하기 위해, 1520년에 3대 논문을 계속 발표하였다. <독일 국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준다>에서는 로마의 탐욕을 질책하고, 제후(諸侯)들이 교회로부터 부(富)와 권력을 빼앗고 자국의 영토를 로마로부터 해방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교회의 바빌론 유폐(幽閉)>에서는 교회가 은총을 의식(儀式) 속에 봉해 넣었음을 비난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는 신앙을 갖는 자는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저작에 의해 루터에게는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장(破門狀)이 송부되었으나 그는 이를 소각하고, 또 보름스의 국회 소환에는 자설(自說)의 취소를 거부하는 등, 시대의 선두를 가는 영웅으로 보였다. 이 즈음 그의 필생의 걸작이라고 하는 독일어역 성서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후 칼시슈타트의 소란, 기사(騎士)의 난(亂), 농민전쟁과 같은 격화된 운동은, 루터의 '신 앞의 평등'을 슬로건으로 하였으나, 그는 거꾸로 진압자(鎭壓者)가 되었다. 그가 주장하는 자유평등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의미이며, 사회개혁은 신앙이 맺는 열매로서 서서히 실현되어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편집]

Christ人-自由

루터의 종교개혁의 3대 논문 중 하나로서, 독일어와 라틴어로 쓰여 동시에 출판되었다. 1519년의 에크(1486-1543)와의 논쟁에 의해 루터는 자기의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교황사절(敎皇使節) 미르티츠로부터 온화한 태도를 취할 것을 권고받았다. 이에 대해 루터는 자기의 진의는 교황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고, 교회내의 폐해를 시정하는 데에 있다는 뜻의 저작(著作)을 세상에 내놓을 것을 약속하고 그대로 출판하였다.

우선 자유는 외적인 것에 의해서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은 신앙에 의해 의(義)로워지고, 따라서 신앙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자유란 혼(魂)의 자유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죄를 용서받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혼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신의 말씀일 뿐이며, 그것이 기록된 것, 즉 성서(聖書)뿐이다. 여기에 그의 '신앙뿐' '성서뿐'이라는 입장이 명백해진다. 신앙이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며, 착한 행위와 공덕(功德)이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선인이 착한 업(業)을 만드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든 그리스도인이면 신 앞에 서서 기구(祈求)할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사제(司祭)인 것이다. 그것은 또 어떤 사람이나 심부름꾼이며, 봉사자(奉仕者)임을 의미한다. 여기에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을 위해 살 책임이 주어진다. 이렇게 하여 루터가 주장하는 자유는 정치적·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적·영적(靈的) 자유인 것이다. 짧은 글이나 복음주의(福音主義)의 요점이 담겨 있어 독일뿐만 아니라 당시 전 세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 중의 하나이다.

멜란히톤[편집]

Philipp Melanchthon (1497-1560)

독일의 인문주의자·종교개혁자.

라인강 상류의 작은 마을 브레텐의 대장간집 아들로 태어나 백부(伯父)인 고전학자 요한 로이힐린(1455-1522)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추천으로 1518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그리스어 교수에 취임. 그 후 별세할 때까지 42년간 교수로서 그 고장에 살면서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주요 저서 <신학강요(神學綱要)>(1521)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와 조직을 수립하기 위해 평신도도 알 수 있게끔 쓰여진 그리스도교 교리서(敎理書)이다. 루터가 성서를 대담하게 영적으로 해석한 데 비해서 그는 성서 본문의 내용을 마음대로 해석치 않고, 인문주의의 입장에 서서 전체의 통일을 존중하였다.

칼뱅[편집]

Jean Calvin (1509-1564)

프랑스의 종교개혁의 조직자.

스위스에서 활약하였다. 북프랑스의 노와용에서 중산계급인의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 덕으로 교회녹(敎會祿)을 받아 파리에서 공부하였다. 이 시절에 루터의 가르침을 받았다. 오를레앙에서 브르쥬의 대학으로 옮겨,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서연구에 종사하였다. 1533년 10월 말 회심(回心)하여, 이후 복음(福音)을 위한 싸움에 생애를 바치었다. 1534년 가을, 신교도가 로마의 교회 비적(秘蹟)을 공격하고 그 결과 프랑수아 1세에 의한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바젤에 일시 은신하며 종교개혁의 진의를 뚜렷이 한 그는 신교도(新敎徒)를 옹호하기 위한 저작에 착수하여 <그리스도교 강요>(1536)를 완성했는데, 오늘날에도 프로테스탄트 최고의 신학서로 평가되고 있다.

다시 이탈리아로 향하던 그는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조직하고 교회의 질서를 세웠으나, 심한 개혁행동으로 인해 추방되고 슈트라스부르에서 복음 신앙을 기초로 하는 사상과 생활의 조직화를 행하여 칼뱅파 교회의 원형(原型)을 만들었다. 1541년 재차 제네바로 돌아가 사망할 때까지 개혁운동을 지도하였다. 그간 신학상의 노작(勞作)은 성서주해(聖書註解)로서 출판되고, 또 제네바 대학을 창설하였으며, 유럽 각지로부터 온 학생들이 그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는 성서에서 교의(敎義)를 확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교회를 조직·운영하며 교회의 훈련을 중시했고, 장로제도(長老制度)를 채용하고 교회를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시켰다. 그는 교회도 국가도 신의 경륜을 실현함이 그 사명이라 여겨 사회생활 전체를 성화(聖化)하려고 했다. 이 사명은 현세적 생활에 봉사하는 직업노동 중에서 강조되어, 그것은 당시 대두되었던 신흥중산적(新興中産的) 생산자층에 신봉(信奉)되어 새로운 직업윤리를 낳았다. 그의 가르침은 영리활동(營利活動)이 향락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윤리적 요청으로 되어 있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에 작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강요[편집]

Christ敎 綱要 (1536)

종교개혁자 칼뱅의 주요 저서.

그는 프랑스에서 망명하여, 제네바에 오기 전에 한때 바젤에 은신했는데, 그 곳에서 복음의 진리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교과서로서 또 프랑스에서 박해받던 프로테스탄트를 변호할 목적으로 1535년에 저술하여 그 다음해에 출판하였다. 당시 그는 26세로 조직적인 내용과 프랑스왕 프랑수아 Ⅰ세에게 헌정된 서문에 의해 프랑스 종교개혁의 수뇌자(首腦者)로 지목되었다. 초판과 4판을 비교하면 분량도 4배 반으로 증보된 것이나, 근본정신에는 변화가 없다. 4판에서는 신(神)·그리스도·신앙·교회의 4부로 나뉘어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관하여 전체를 계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루터의 중심진리(中心眞理)는 '신앙뿐'이었으나 칼뱅의 경우, '신의 지상권(至上權)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 중심이 되어 있다. 그로부터 신은 자유로운 의지(意志)로 구원을 받을 자와 멸망에 들 자를 결정한다고 하는 구원예정설(救援豫定說)이 도출된다. 그러나 이 예정설에 절망하고 자기의 절대무력(絶對無力)을 알 때에 도리어 십자가의 대속(代贖)에 의해서 죄가 용서받음을 깨닫게 된다. 거기에 구원의 확실성이 있다. 성서는 신의 말씀이며, 그것은 성령(聖靈)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므로 이렇게 하여 구원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인이며 그 단체가 교회이다.

신이 선택한 자의 깨끗함을 바라는 이상 신도는 일상생활의 규율을 바로잡아 신을 기쁘게 해야 한다. 교회가 이를 지도할 뿐만 아니라, 정치상으로도 당국자는 신의 영광을 찬양하며 복음의 옹호자여야 한다. 법률은 신의(神意)의 발표이며, 정치는 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해져야 한다. 이 생각에 의거하여 칼뱅은 제네바에서 신정정치(神政政治)를 행하였다.

신비사상가[편집]

神秘思想家

종교개혁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세 독일 신비주의로부터 계승된 정신, 내면적 신앙을 존중한다고 하는 정신은 재차 상실되어 갔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점차로 그 교의(敎義)의 체계를 만들어 내어 형식화되어 갔던 것이다. 한편 프로테스탄트 교회로부터도 이단으로 박해를 받으면서, 소박한 대중 가운데 뿌리 깊이 남은 내면적 신앙의 정신을 지켜 신비적인 말로 그것을 고백한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신비사상가들이다.

루터의 신봉자 중 한 사람이었던 독일의 슈벤크펠트(1489-1561)가 일찍이 이 점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반대하였으나 프랑크(1499경-1543경)를 거쳐 다시 바이게르(1533-1588)에 이르면 신비사상은 독특한 신비적인 우주론(宇宙論)으로 전개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뵈메에 이르러 종교개혁 후의 독일 신비주의 신학이 개화(開花)하게 되는 것이다.

후일 이러한 사람들의 신비사상은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다만 그 중에서 형식적 권위에 반대하는 민중의 진보적인 면을 나타내던 신비사상도 점차로 반과학적(反科學的) 미신과 결부되는 반동적인 역할을 강화하여 갔다.

뵈메[편집]

Jakob Böhme (1575-1624)

독일의 신비사상가. 게를리츠 근처의 아르트자이덴베르크에서 출생하여 게를리츠에서 구두방을 경영하였다. 드레스덴 등에서 산 후 게를리츠에서 영면하였다. 교육을 얼마 받지 못하였으나 성서나 신학서를 애독하고, 또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특수한 환각(幻覺)을 체험하여 <아우로라 혹은 서광(曙光)>을 위시한 저서 속에서 신비적 사상을 기술하였다.

어떤 때 그는 주석으로 된 도구에 빛이 반사되는 것을 보고 단숨에 자신의 사상의 근본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빛은 어둠이 있어 비로소 나타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의 사랑은 그와 대립하는 죄악과 더불어 비로소 나타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아우로라 혹은 서광>을 쓴 이래 교회에서는 이단자로 박해를 당하였지만 민간 신자들의 지지를 받아 계속하여 저술함으로써 종교개혁 이후의 최대 신비사상가가 되었다.

아우로라 혹은 서광[편집]

Aurora-曙光 (1612)

뵈메의 처녀작이며 주요 저서이다.

신비적인 체험 가운데 신의 현출(現出)을 본 뵈메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형식주의를 타파할 '서광'의 때가 왔다고 생각하여 이 저서를 썼다. 이처럼 장대한 신비적 우주론 27장 가운데서 그는 독특한 용어법과 비유를 통하여 죄악의 근원과 신의 현출이란 문제를 추구하였다.

신은 만물의 근원이며 선과 악이 대립하는 가능성은 신의 본성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든 죄악은 신에게 책임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신은 현실의 죄악의 원천이 아니다. 현실의 죄악은 '천사의 타락'에 의한 것이라고 역설한 뵈메는, 신의 본성에서 선과 악이 충만된 우주가 창조되어 가는 양상을 신비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신의 계시(啓示)는 학식이 높은 신학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내적 신앙 속에 사는 소박한 사람들에게 신비적 체험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뵈메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신념에 따라 이 우주론 역시 자연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과는 거의 무관계한 '신비스러운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 책이 근대사상으로 향하는 사상적 조류의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 위치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점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오는 것이다.

자연철학자[편집]

自然哲學者

고대 그리스에 대해서 말한다면 소크라테스 이전의 최초의 철학자들은 주로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총괄적으로 고찰(자연학)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아직도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은 미분(未分) 상태에 있었다. 본래의 의미로 자연철학자라 하면 오히려 철학적 원리에서 전 자연(全自然)의 설명을 시도한 르네상스기의 철학자들(파라켈수스, 카르다노, 브루노)일 것이다. 그들은 다시 고대 그리스에서 최초의 철학자들이 가졌던 자연관으로 돌아가면서 중세 신학이나 교회의 권위 때문에 배후로 물러났던 자연을 전면으로 이끌어 냈다.

자연의 이와 같은 복권은 생생한 자연 감정을 소생시켜 드디어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등에 의해 근대 자연과학을 확립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일종의 사변적(思辨的)인(관찰, 실험에 의하지 않는) 자연철학이 재차 셸링과 헤겔 등에 의해서 부활되어 갔다. 다만 이것들은 전체적인 철학 체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들을 '자연철학자'라 부르는 것은 적당하다고 할 수 없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편집]

Nicolaus Cusanus (1401-1464)독일의 철학자·신학자. 근세철학의 선구적 사상가이며 성직자로서 교회개혁에 진력하였다. 그는 신비적인 신플라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어서 '대립물(對立物)의 일치'를 역설하였다. 예를 들면 원의 직경을 무한히 연장시키면 직선이 되어 원과 직선이라고 하는 대립물이 일치하는 바와 같이, 무한자로서의 신에게서는 모든 모순이 통일된다고 하였다. 유한한 인간이 이와 같은 일치를 알지 못하는 것을 학문에 의하여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학문 있는 무지(無知의 知)'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근세 철학사상의 사람들, 특히 브루노, 라이프니츠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파라켈수스[편집]

Paracelsus (1493-1541)

스위스의 의학자(醫學者)·자연철학자.

르네상스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로서 성격은 분방하였고 그의 지식은 다방면에 걸쳐 풍부했으며 유럽 여러 곳을 편력하였다. 또한 중세적인 요소를 가지면서도 그는 아라비아 의학의 전통을 잇는 문헌적인 지식을 부정하여 자연 그 자체 내에서 지식의 원천을 추구, 전 자연계가 '대(大)우주'임에 대하여 인간의 신체를 '소(小)우주'라 하였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대우주의 여러 원소(유황, 수은, 염)가 응집해 있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병(病)은 이들 원소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일어난다고 하였고, 본래의 조화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여러 금속의 조합(調合)을 내복약으로 사용한 의화학(醫化學)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카르다노[편집]

Cardano Girolamo (1501-1576)

이탈리아의 철학·수학·의학자.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철학자이며, 널리 전 자연을 간파하는 '세계영혼'을 생각해 내어 이것이 열이나 빛으로서 일체를 형성하는 기본 원소라고 하는 자연관을 취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이 가진 자연관을 포함함과 동시에 갈릴레이 등에서 시작하는 근대 자연과학의 형성으로 향한 역사적 전제가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에 어울리게 수학자로서는 대수방정식(代數方程式) 등의 이론을, 의학자로서는 정신병학에의 선구적인 작업을 한 것도 기억해야 한다.

텔레지오[편집]

Bernardino Telesio (1508-1588)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의한 자연관을 비판하여 자연현상을 전통적인 기성의 관념으로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우리들의 감각적인 경험을 자연인식의 원천이라 하여 냉(冷)과 열(熱)의 두 원리를 모든 자연현상의 기초에 두면서, 동시에 이 자연 전체를 자연 이외의 다른 힘에 의하지 않고 사물 자체에 내재하는 원리로 구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유한 원리에 따르는 사물의 자연> 1586). 또 근대적인 자연 연구의 길을 열기 위하여 아카데미아(과학원)를 나폴리에 창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브루노[편집]

Giordano Bruno(1548-1600)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자연철학자.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이단자로 몰려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박해를 받으면서 유럽 각국을 방랑하였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을 지지하였으며, 우주의 무한성과 등질성(等質性)과 균등성을 확신하여, 우리의 세계(태양계)는 기타 무수하게 생멸(生滅)하는 여러 세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만물의 극미한 부분(단위)은 살아 있는 '단자(單子, 모나드)'라 하고, 신은 '세계영혼'으로서 만물에 내재하는 우주 최고의 생명, 원인, 원동력이라 하였으니 그의 입장은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었다. 그리하여 후세에 있어서 라이프니츠의 '단자론' 또는 스피노자의 '신 곧 자연'이라는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1592년의 종교재판으로 로마에서 7년간 옥중생활을 한 후에 칸포 데 피오리에서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원인·원리 및 일자[편집]

原因·原理-一者 (1584)

브루노의 주요 저서.

다른 여러 저서와 마찬가지로 신대화체(新對話體)로 쓰여 있으며 5장(章)으로 되어 있다.

이 저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입각하고, 더욱이 우리의 태양계를 무수한 세계 중의 한 세계로 보면서 우주의 무한성과 영원성 및 통일성을 설파하고 있다. 신이 이와 같은 자연 전체 속에 있다고 하는 범신론의 입장에 서서 이러한 신의 활동현상으로서의 전 우주는 우리들의 인식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에 의하면 이와 같이 '세계영혼'의 형태를 한 신은, 원인으로서는 외면적으로 모든 사물의 형성을 촉진하고 원리로서는 내면적으로 모든 사물의 산출에 기여하며, 그 최고 능력, 즉 보편적 이성(理性)으로서는 우주의 만물을 망라하는 유일자(唯一者)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더욱이 그 때에 주목되는 것은 제3장 이하에 기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에 의하여 '질료(質料)' (마테리아)의 개념에 새로운 하나의 의미가 만들어진 점이다. 다시 말하여 브루노의 그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식의 궁극적인 '질료' ―― 스스로는 현실적인 형성력이나 능동성도 결여된 원시적인 소재 ―― 가 아니고, 따라서 '형상'에서 수동적으로 일정한 특성이나 형태를 얻는 이른바 혼돈된 가능태(可能態)가 아니다. 오히려 부르노의 그것은 자기 속에 모든 발전 형태를 품고 있는 것, 하나의 '신적인 것'·'모든 자연물의 조산부(助産婦) 및 모(母)'였다. 이 새로운 의미는 드디어 중세 이래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질료' 개념에서 근대 자연과학의 의미에서 자기운동적인 '물질' 개념으로 향하는 중요한 길을 열어주는 것이 되었다.

근대 자연과학의 확립기[편집]

近代自然科學-確立期

유럽에 있어서 근대 자연과학의 확립은 거의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이룩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철학은 봉건적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기성 개념과 신학적인 권위에 대항하면서도 아직껏 자연에 내재하는 신의 보편적인 힘이라고 하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다소나마 범신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발명과 발견의 시대'(망원경과 인쇄술의 발명, 미국 대륙의 발견, 항해술의 발전 등)의 영향을 받아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실험적 정신과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지동설의 제창에 이어 근대 자연과학은 갈릴레이, 케플러 등에 의하여 먼저 수학적 자연과학을 선두로 기초를 닦고 드디어 뉴턴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유럽의 근세는 결정적으로 중세부터의 전통적인 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물의 관찰과 실험이며, 그리하여 자연에 고유한 '법칙'을 추구한다. 중세에 있어서는 세계를 오직 능동적인 고정적 형태와 전적으로 수동적인 혼돈(混沌)한 재료(質料)로써 구성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근대의 자연과학은 그와 같은 기성의 형태 대신에 수학적인 법칙을 포착하여 그것을 '물질' 자체의 '운동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가령 갈릴레이의 자유 낙하의 법칙과 케플러의 유성(遊星) 궤도의 3법칙,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등은 모두가 그 실례(實例)인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신은 중요한 과학적 업적을 올리지 않았으나 이 시대의 정신을 대단히 선명하게 표명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인간이 자연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자연법칙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제1 조건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에 복종하는 것만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길이며, 이리하여 갖가지 전래(傳來)의 '이돌라(幻像)' 파괴를 통해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다. 이 어구는 근대 자연과학의 확립기에 기본 태도를 보여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편집]

Leonardo da Vinci (1452-1519)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의 만능 과학자·예술가·기술자.

회화·조각 등에도 불후(不朽)의 걸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물리학·천문학·토목학·조병학(造兵學)·기계학(機械學)·해부학(解剖學) 기타에서도 천재적인 개척자이기도 했다. 이 방면에 걸친 대량의 작품이 오늘날에도 남겨져 있는데, 자연 연구의 관점에서만 보아도 갈릴레이나 케플러에 의하여 시작되는 근대 자연과학이 전개되는 단서가 된다. 철학적인 면에서 말하면 그는 자연현상을 초자연적 힘이나 추상적인 사변(思辨)으로 설명하는 것을 배제하여 오로지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며, 더욱이 그 때에 수학을 매개로 하는 정밀한 법칙의 인식을 추구하였다. '진(眞)' 또한 '미(美)'와 마찬가지로 법칙적인 질서와 필연적인 창조에 불과하였다. 만약 신이 우주의 제1의 창조자라 한다면 "회화(繪畵)는 구상(構想)을 매개(媒介)로 한 제2의 창조인 것처럼 과학은 지성을 매개로 하는 제2의 창조이다." 또한 과학적 인식에 있어서 추리와 실험이 밀접하게 결합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점에 대해서 "이론은 통수(統帥)이며 실천은 병졸이다", "이론 없이 실천에 빠지는 자는 키와 나침반도 없이 배를 탔고 그 배가 어디로 가느냐에 대한 확신도 전연 갖지 않은 선원과 같다. 언제든지 실천은 훌륭한 이론으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도 역시 당시의 다른 과학자들처럼 전 자연을 하나의 산 것으로 보았고, 그런 점으로 범신론적 관점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에 있어서 기적이나 우연을 부정하였고 필연적인 법칙만의 지배를 인정한 점으로 보아 지극히 근대적이었으며, 다방면에 걸쳐 천재성을 발휘한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보편적인 사람'임과 동시에 가장 투철한 선구자였다.

코페르니쿠스[편집]

Nicolaus Copernicus (1473-1543)

폴란드의 천문학자.

지동설의 제창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른바 하늘과 땅의 관계에 대한 종래의 '상식'으로 되어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이래의 '천동설'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돈다고 하는 태양중심적인 세계상(世界像)은 당시에 우론(愚論)이라 조소를 받았다. 게다가 위험한 설이라 하여 공격을 받기도 했다. "무릇 모든 발견 가운데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보다 더 큰 영향을 인간의 정신에 부여한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괴테는 말하였다.

그는 모국의 크라카우 대학과 이탈리아의 여러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30세가 넘었을 무렵부터 학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면서 겨우 죽음 직전에 공간(公刊)된 <천구(天球)의 회전에 대하여>(6권, 1543)는 종교개혁자인 루터로부터도 부인되었고 가톨릭 교회로부터는 금서(禁書) 목록에 실려졌다. 이를 공공연하게 지지한 사람은 그 후의 갈릴레이와 케플러뿐이라 하여도 무방하다. 이 사실은 근대 자연과학의 출발점에서 종교와 과학이 충돌하는 전형적인 실례였다.

갈릴레이[편집]

Galileo Galilei (1564-1642)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천문학자.

피사 및 파도바 대학의 교수를 역임한 후에 메디치가의 코지모 2세(1590-1620) 아래에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피사의 사탑(斜塔)에서 낙체 실험을 하여 그 유명한 자유 낙하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스스로 창안한 망원경으로 목성(木星)에 위성(衛星)이 있다는 것이나 은하(銀河)가 항성(恒星)의 집단임을 발견해 낸 것 등은 특히 유명한 일이다. 이 천체 관측에 의해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확증하였으나 1616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을 파기하도록 강요당하였다. 더욱이 <2대(大) 세계체계에 대한 대화>(1632)로써 로마에 유폐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강제적으로 이 설의 철회를 선서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것은 단순한 전설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후에 그는 <두 개의 새 과학에 대한 논구>(1638)를 출판하였으나 이미 지동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고, 두 눈의 실명 상태로 쓸쓸한 만년을 보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중세 이래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반항하여 문헌의 인용에 의존하지 않고 감성적(感性的)인 경험과 실험을 중시함과 더불어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 자연이라는 위대한 서적' 자체를 구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에 의하면 엄밀히 관찰된 자연현상을 가장 단순한 여러 요소로 분해하고(분석적 방법), 이어서 수학의 힘을 빌려 그것들을 질서있는 전체로 종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총합적 방법). 이와 같이 귀납법(歸納法)과 연역법(演繹法)의 통일에 의해서 처음으로 자연의 필연적인 법칙성이 규명되어 새로운 과학이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케플러의 친구이기도 하였으나, 그가 마련한 새 과학의 토대는 드디어 뉴턴 역학(力學)으로 발전하는 길을 닦았으며, 이런 의미에서 근대 자연과학(특히 力學)의 창조자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케플러[편집]

Johannes Kepler (1571-1630)

독일의 천문학자.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신앙을 공공연하게 고백하였으므로 박해를 받아 극심한 곤욕과 궁핍을 참으면서 각지를 두루 편력하였으나, 1600년 프라하에서 덴마크의 천문학자 브라에(1546-1601)의 조수가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다년간 브라에가 종사하였던 천문관측의 재료를 토대로 태양 둘레를 도는 유성 운동의 궤도와 속도에 대하여 이른바 '케플러의 3법칙'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新天文學> 1609, <세계의 조화> 1619).

그 이전인 청년시대에는 그도 역시 신플라톤 학파나 신피타고라스 학파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거기에서 벗어나 드디어 천문학과 물리학을 수학적 기초에 입각하여 실증적으로 규명하게 되었다. 그에게 세계는 하나의 시계와 같은 기구로서 "물질이 있는 곳에 기하학(幾何學)이 있다"고 보았으며, 세계의 '조화'도 오직 '자연의 여러 법칙'에 따른다고 하였다. 후에 '케플러의 3법칙'은 뉴턴에 의한 만유인력이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도 근대 자연과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꼽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베이컨[편집]

(프랜시스) Francis Bacon (1561-1626)

영국의 철학자·정치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국새상서(國璽尙書),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 대법관인 니콜라스 베이컨(1509-1579)의 차남이다.

1573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으나 스콜라 철학을 중시하는 데 반발하여 자연과학과 문학의 연구에 열중했다. 1576년 프랑스 주재(駐在) 영국 대사를 따라 프랑스로 갔으나 1579년 부친의 급서로 귀국하였다. 1584년 하원의원으로 피선되었다. 제임스 1세 시대에 이르러 왕의 총애를 받아 점차 승진, 1607년 검사장, 1613년 검찰총장, 1616년 추밀고문관, 1617년 국새상서, 1618년 대법관, 1621년에는 세인트 올반스 자작(子爵)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의회에서의 독직 행위 때문에 탄핵을 받아 런던탑에 투옥되었으나 1623년에 석방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약 15년간 영광된 관직에 있으면서 활약했으며, 한편으로 여러가지의 뛰어난 저서를 발표하였다. 그의 사상은 당시의 전기적(前期的)인 축적을 강행하고 있던 영국 자본주의를 반영하여 실제적·산업적 관점에서 자연을 정복하려던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 제1부에서는 '환상(幻像)'(이돌라)의 제거, 즉 자연과학적 인식의 실제적 인용을 방해하는 관념론적인 왜곡(歪曲)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제2부에서는 사물의 본질인 '형상(形相)'=단순성질(單純性質)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이를 여러가지로 조합하여 무한히 다양한 것으로 만들어 낼 수가 있다(發明)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인류의 현재 상태에서 무엇이 결여되고 무엇을 보충하는 것이 당연한가를 탐구하고, 그러기 위해 학문을 수집·분해·정리하여 전망해 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뉴 어틀랜티스>에서는 실험과학자들의 조직적 공동 연구를 기도하여 인류복지 달성이라는 빛나는 이상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들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지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군주에게 그 실현을 기대했다. 그러므로 그의 유토피아 이야기는 모어나 캄파넬라와 같은 예리한 현실 비판 자세를 잃고 있다. 그러나 합리주의적 자연과학의 방법은 근대철학의 성립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에세이[편집]

Essays (초판 1597)

몽테뉴의 <에세>(2권 1580)와 더불어 당시 가장 대표적인 베이컨의 수필집.

부제가 <생활과 도덕에 관한 충언>이라 되어 있는 것처럼 베이컨의 수필집에는 실제적인 인간의 실제적 영지(英智)가 풍부하게 담겨 있으며, 바로 이 점이 몽테뉴의 은퇴한 학자적·사색적 수필집과 다르다. 전 58편은 그의 생애에 걸친 경험과 사상 형성의 자취를 어디서나 찾아볼 수가 있는데 <역경에 대하여> <이자(利子)에 대하여> <인간의 천성에 대하여> <사물의 이번(異變)에 대하여> 등은 초기의 불우하고 빚졌던 시대, 또 만년의 실각문제(失脚問題) 등을 관련시켜서 읽으면 매우 흥미진진한 바가 있다. 물론 <교지(狡智)에 대하여> <내 몸을 위한 지혜에 대하여> <우정에 대하여> <시기심에 대하여> <야심에 대하여> <아이들과 벗에 대하여> <당파에 대하여> <명예와 평판에 대하여> 등과 같은 훌륭한 처세의 교훈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에세이>에는 정치와 경제에 대한 훌륭한 단평(短評)도 있다. 가령 <종교상의 일치에 대하여>에서는 국가의 태평을 위하여 종교적 관용정책을 시행할 것도 권고하고 있으며, <폭동과 사변에 대하여>에서는 폭동의 원인이 극빈에 있다고 지적하였으며, <무신론에 대하여>에서는 그 원인이 종교적 분열과 승려의 부패에 있다고 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참된 위대성에 대하여>는 한 나라에 너무나 많은 귀족과 신사 계급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의 불가함을 논하여, 중산계급을 육성하여 생산자임과 동시에 우수한 병사의 공급원을 확보할 필요성을 설파하여 중상주의(重商主義)와 자본주의 형성기의 정치·경제사상을 어느 정도까지 표현하고 있다.

학문의 진보[편집]

學問-進步 (1605)

'영어로 쓰여진 최초의 철학서'라 일컬어지는 베이컨의 저서이다.

제임스 1세에게 바치는 형식을 취하였고 학식이 높은 국왕 아래에서 행복한 치세가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전 2권으로 제1권에서는 학문과 지식의 훌륭함과 그것을 증진시키고 보급하는 공적이 기술되어 있고, 제2권에서는 학문의 진보를 위하여 고찰되고 시도되는 각 행위와 사업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또 그 각 행위 가운데서 가려낼 수 있는 결함이나 불비점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제1권에서 신학자·정치가 또는 학자 자신이 학문의 진보를 방해하고 있는 불건강한 상태를 먼저 지적하였다. 그리고 제2권에서는 학문을 부문별(역사·시·철학·신의 계시에 의한 학문)로 정리하여 발전과 결함을 밝혀내고, 인간의 재산목록으로서 인간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자연 또는 기술의 작품·성과) 모든 발견을 말하고 그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아직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가, 혹은 발견해 내지 못하고 있는가가 명백해진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직접 현재에 도움이 되는 실험을 중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다른 실험의 발견에 가장 보편적으로 중요한 실험과 원인의 발견에 가장 많은 도움을 주는 실험을 다른 무엇보다도 중시하라고 하였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고 숙달된 지식인 학문은 신의 성질과 섭리 속에 인간에게 계시된다고 하였다. 때문에 그는 자연의 최고 법칙, 즉 신(神)이 하시는 업(業)에 대해서는 인간의 탐구가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여부는 알 수가 없으나 모든 변화를 통하여 틀림없이 인식되는 '자연의 법칙'을 찾아낼 것을 염원했다.

노붐 오르가눔[편집]

Novum Organum (1620)

<신기관(新機關)>이라고도 번역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오르가논'이라 불린 데 대하여 '새로운 논리학'이란 의미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1620년에 '대혁신'이란 표제로 저자의 성명(聲名), 국왕에 바친 헌사(獻詞), 대혁신의 서언(序言), 대혁신의 구분(區分)을 권두에 두고 <노붐 오르가눔>도 그것과 더불어 간행되었다. 학문에 대한 큰 혁신은 프랜시스 베이컨에게는 젊은 시절부터의 열렬한 소망이었는데 대혁신의 구상은 1607년경에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대혁신의 구상에 있어서 제1부 <제학(諸學)의 구분>, 제2부 <노붐 오르가눔 또는 자연의 해명에 대한 지표(指標)>, 제3부 <우주의 현상 또는 철학 건설을 위한 자연지(自然誌)와 실험지(實驗誌)>, 제4부 <지성의 계단>, 제5부 <선구자 또는 제2 철학의 예단(豫斷)>, 제6부 <제2 철학 또는 행동적 학문>의 6부작으로 하려고 했다.

따라서 <노붐 오르가눔>은 제2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본서는 2부로 나누어져서 제1부는 그의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는 데에 장해가 되는 갖가지 편견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편견을 이돌라라 불렀고, 거기에는 ① 종족의 이돌라(인류라고 하는 종족에게 있는 보편적인 선입견), ② 동굴의 이돌라(개인적 편견), ③ 시장의 이돌라(인간의 언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편견), ④ 극장의 이돌라(근거나 주장도 없는 철학의 학설이나 잘못된 논증에서 생기는 편견)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제2부에서는 귀납법에 의한 진리의 발견이 거론되어 있는데 자연계의 다양한 사물은 일정 소수(一定小數)의 단순 성질의 여러가지 조합이기 때문에 이 단순 성질을 포착할 수 있으면 이들을 여러가지로 조합하여 무난히 많은 것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귀납법이 중시된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을 가장 보편적인 존재라고 하는 제1원리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 당시는 연역법 편중의 시대였지만 그는 귀납법이야말로 학문의 진정한 방법이라 함으로써 학문의 실증적 연구와 근대과학으로 향한 빛나는 길을 개척했다.

뉴 어틀랜티스[편집]

New Atlantis (1627)

모어의 <유토피아>(1516),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1623)와 더불어 당시 3대 유토피아 가운데 하나이며 베이컨의 저서이다.

이 책은 1627년에 출판이었는데, 이 작품이 쓰여진 해는 1622-1624년이라 한다. 어틀랜티스란 대서양상에 있다고 예로부터 상상되어 왔던 신비스러운 거대한 섬의 이름인데, 그는 이 어틀랜티스를 오늘날의 미국과 동일시하여 뉴 어틀랜티스는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는 태평양상(太平洋上)의 한 고도(孤島)로 상정하였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군주국으로, 종교 및 인간 관계에 있어서 예절이 존중되고 있다. 이 나라의 중심은 명군(名君)인 소라모나가 창설한 사로몬 학원으로, 이 학원의 목적은 "사물의 여러 원인과 은밀한 운동에 대한 지식이며, 인간 제국(帝國)의 영역을 확대하여 가능한 모든 것을 성취하는"것으로, 이 학원은 말하자면 과학과 기술의 연구소이다.

본서는 후에 런던에서 창설된 철학학원(1645)과 퓨리턴 혁명 후의 영국학사원 창설(1662)을 촉진시켰고, 또 18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성과인 <백과사전> 편집에 자극을 준 점에서 영향이 매우 크다. 반면에 사회제도와 정치기구 면에서는 놀랄 만큼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일례를 들면 그 나라가 가부장(家父長)제도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과, 이 작품에는 플라톤과 캄파넬라의 유토피아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사유재산의 부정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전기(前期) 스튜어트 절대왕정을 그대로 시인하여 유토피아의 실현을 제임스 1세에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사실에서 이 이야기가 미완성인 채로 방치되어 그 이상 현실 사회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된다.

사회철학[편집]

社會哲學

사회철학을 일반적으로 사회에 관한 철학적인 기초를 지우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철학의 내용을 시민사회 성립의 철학적 기초를 지우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그 형성은 모두가 근대사회 이후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사회철학은 홉즈의 시민적 철학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사회철학이 시민적 철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봉건적인 사회구성이나 사고의 양식에 대하여 예리하게 대립하는 것이 된다. 사회도 신의 섭리 아래 있는 자연으로서 그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스콜라 철학 시대와는 달리 사회철학은 무엇보다도 사회를 합리적·법칙적으로 파악하여 사회란 인간의 작위(作爲)로 구성되는 것이고, 따라서 사회는 인간이 자유롭게 개량할 수 있다는 견해로 유도해 간다.

마키아벨리나 모어가 현실 사회를 실증적으로 포착하였고, 캄파넬라나 베이컨이 과학과 합리주의에 의하여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였으며, 홉즈가 인간본성을 유물론적 감각으로 분석하여 거기에서 인공국가(人工國家)를 형성하여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확보하려 했던 일은 사회철학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 사회철학=시민사회의 철학은 그 후 시민사회가 순조롭게 발전한 영국 철학의 중심 원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더욱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여 사회에서의 경제법칙이 포착되는 스미스 시대가 되면 사회철학 속에서 사회과학으로 발전해 가는 방향이 나타난다.

마키아벨리[편집]

Niccolo Machiavelli (1469-1527)

르네상스 말기의 이탈리아 정치학자·역사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마키아벨리즘의 이름으로 유명하다. 1469년에 피렌체에서 출생하였다. 1498년 29세 때에 피렌체 공화국의 서기가 되었다. 이후 15년간 외교와 군사에 관계하면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으며, 프랑스·독일·스위스에 파견되었다. 그 동안 1499년에는 북이탈리아의 여왕 카테리나 스포르차, 1500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12세, 1502년에는 체잘 볼차 등 당시의 위대한 국왕·정치 지도자들과 피렌체를 위하여 절충을 벌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경험과 위대한 정치 지도자들과의 상봉(相逢)은 그의 국가적 통일을 위한 힘의 정치학을 형성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512년 9월 메디치가의 재흥 후에 면직을 당하여 은퇴한 뒤 불후의 명저인 <군주론>과 <정략론(政略論)><피렌체사(史)>를 썼다.

군주론[편집]

君主論 (1513)

당시 분열 상태에 있었던 이탈리아의 통일을 숙원으로 삼아 쓰여진 마키아벨리의 저서이다. 1513년 7월-12월 사이에 썼다고 한다. 출판된 해는 1532년인데 사본으로 널리 읽혀져 당시 여러가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는 14세기 이래 군주국가와 도시국가가 군립(群立)해 상인(商人)의 이해와 더불어 여러 국가간의 세력균형 정책이 취해져 국가적 통일이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유럽에는 강대한 군주국이 출현하여, 프랑스의 샤를 8세는 1494년 이탈리아로 침입하여 오래지 않아 이탈리아 전토를 석권하였다. 이러한 정치 상황을 앞에 둔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발전을 위해서는 강대한 군주국에 의한 국가적 통일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그 실현의 꿈을 메디치가(家)의 군주인 로렌초에게 걸었던 것이다.

본서는 전 6장으로 되어 있다. 당시의 이탈리아 정치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로 이탈리아를 구제하고자 했으며, 그를 위하여 그는 국가의 성격과 종류, 영토의 획득·유지의 수단, 영토 상실의 이유를 고찰하였다. 이 가운데서 그는 군주가 여우의 교지(狡智)와 사자의 폭력을 가지고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서 자기를 관철하려는 불굴의 생활력(브일토우)을 가져야 하는데, 예를 들면 군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절대 도덕적인 면에서 고려하지 말고, 그것이 유익한가 또는 무익한가에 대해서만 고려해야 하는 등 오로지 정치 기술적 합리성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논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사상은 악마의 대변자라고까지 일컬어져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은 희생당해도 무방하다고 하는 국가이성(國家理性)과 파시즘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라는 악평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루소와 같은 민주주의자로 칭찬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의 <정략론>은 로마 공화정(共和政)의 연구이며 <군주론>에 있어서까지 군주가 훌륭하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인민의 지지를 얻으라고 역설한다. 그가 왕정론자(王政論者)인가 또는 민주주의자인가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서는 공화정을 취하는 도시국가로서는 달성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치에서 힘의 결정적인 요인을 인정한 점과, 정치세계에는 도덕적 요인을 무시하고 오직 기술적 합리성만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 점으로 정치를 리얼하게 파악하는 방법을 기술하여 정치학 발전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모어[편집]

(토머스) Sir Thomas More (1478-1535)

헨리 8세 시대의 영국 정치가·철학자.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하다.

부친은 법률가인 서 존 모어. 1492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시대에 평생의 벗인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사귀게 되었다. 1504년 국회의원에 피선되었다. 1515년 양모(羊毛) 취급에 영국이 유리하도록 절충할 사자로서 네덜란드에 파견되어 정치적 수완을 인정받았다. 1518년부터 헨리 8세에게 중용되어 1529년에 대법관이 되었다. 1532년 왕의 이혼문제에 대해서 가톨릭 교도는 이혼할 수 없다고 하여 왕의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1535년 사형을 당했다. 주요 저서인 <유토피아>는 당시 영국의 정치·경제·사회 상태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으로서 근대 유토피아 이야기의 최대 걸작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유토피아[편집]

Utopia (1515-6)

전체가 2권으로 된 모어의 저서이다.

제1권은 당시의 영국 사회에 대한 현상 비판이며, 제2권은 그것과 대비하는 의미로서 이상국인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제2권은 1515년에, 제1권은 1516년에 쓰여졌다. 이야기는 모어가 국왕의 명령을 받아 브뤼셀로 가서 뛰어난 학자이고 모험가인 라파엘 히스로디를 만나는 데에서 시작한다.

제1권에서는 히스로디에 대해서 듣는 편의 한 사람인 피타스가 당신과 같이 학식이 높은 사람이 정치에 참여한다면 국정이 잘 되어갈 터인데 왜 참여하지 않느냐고 묻는 말에 대답하여 히스로디는 유럽 특히 영국의 정치에 비판을 가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는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은데 군주들은 전쟁으로써 영토를 확장하려 한다고 말하며, 또 영국에서 부랑자(浮浪者)가 증대하는 원인으로 지주들이 양모(羊毛) 가격 인상에 착안하여 밭을 망가뜨려서 담을 쌓아 목장(牧場)으로 만든 결과 농민이 토지를 상실한 것(양이 사람을 물어 죽인다)과 봉건가신단(封建家臣團)의 해체를 들고 있다. 그리하여 "재산의 사유(私有)가 인정되고 화폐가 만능의 힘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는 국가의 바른 통치와 번영은 불가능하다"고 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였다.

제2권에서는 유토피아 제도와 생활이 기술되어 있다. 이 국가는 공화국이며 기본적으로는 농업국가여서 전 시민이 교대로 농업에 종사한다(공무원으로 선정된 지식계급은 제외). 노동시간은 6시간이며 여가는 수양에 충당된다. 6시간으로써는 생산 부족을 초래한다는 반론(反論)에 대해서는 영국과 달리 여기에서는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여자나 승려들과 같은 대단히 많은 기식자(寄食者)·귀족·지주(地主) 등도 일하지 않고 놀고 먹을 수는 없는 국민 개로(皆勞)이기 때문에 생산은 오히려 남는다고 하였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절대왕정의 비판임과 동시에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기에 생기는 혼란을 훌륭하게 포착한 것이라 하겠고,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중요한 점을 지적한 것으로 평가된다.

캄파넬라[편집]

Tommaso Campanella (1568-1639)

이탈리아의 철학자.

1568년 남이탈리아 칼라브리아의 스틸로 근처에서 출생하였다. 유토피아 이야기인 <태양의 나라>의 저자로서 유명하다. 13세로 스틸로의 성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20세에 탁발 수도승이 되었고, 나폴리의 산 졸조 수도원으로 옮겼으며, 또 코센차로 가게 되었다. 이때에 유물론을 역설하는 텔레지오(1508-1588)의 설에 마음이 끌려 <감각철학(感覺哲學)>을 써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후 10년간 이탈리아 각지를 방랑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부터는 남이탈리아를 스페인의 압제하에서 해방하여 신정정치(神政政治)에 의한 이상왕국을 건설하는 운동에 종사하였으나 1599년에 폭동 음모가 발각되어서 이후 27년간을 투옥 생활로 보냈다. 이 시기에 주요 저서인 <태양의 나라>와 <갈릴레이 변호론><합리철학> 등을 썼다. 1629년에 석방되어 프랑스의 루이 13세의 초청을 받아 파리의 산트레노 수도원으로 가서 조용한 만년을 보냈다.

태양의 나라[편집]

(1623)

모어의 <유토피아>, 베이컨의 <뉴 어틀랜티스>와 더불어 근대 초기의 3대 유토피아 중 하나로서 캄파넬라의 저서.

본서는 어떤 승원주(僧園主) 아래에 머무르고 있는 제네바의 한 함장(艦長)이 주인에게 항해중 있었던 회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태양의 나라는 타브로바나(실론섬)에 있는 이상국이며 평원 한가운데의 높은 언덕에 있는 작은 나라이다. 정체(政體)는 호오(최고 지배자)라고 불리는 제사(祭司)의 지배하에 있는 신정정치 국가로서 주요한 지도자는 모두가 제사이다. 이 국가의 특징은 공산제(共産制)를 시행하는 점이어서 생산수단의 사유는 전폐되고 노동은 전 시민의 의무로 되어 있다. 아이들의 교육도 국가 기획으로 행해지며 부녀의 공유제(共有制)도 인정되고 있으나 그것은 국가가 정한 자손증식법(子孫增殖法)의 규정에 의한다. 노동시간은 4시간이며, 여가는 독서와 연구에 충당되는데 국민 개로(皆勞)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되어 있다. 군사에 대해서는 국민개병(國民皆兵)이며, 관리의 선정은 시민대회에서 추천된 자 가운데 공동으로 결정한다. 국가 문제에 대해서는 신월(新月)과 만월(滿月) 때마다 대회가 열려 20세 이상의 남녀가 출석하여 그 국가의 결함과 관리의 집무 상황에 대한 비판과 토의를 행한다.

본서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있는 점에서 모어와 같으나 정체가 신정정치여서 모어만큼 날카로운 현실 비판을 찾을 수가 없고, 또 과학 존중이란 점에서 보면 신비적 점성술(占星術)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베이컨만큼 합리주의 및 실증정신이 투철하지 못하다.

보댕[편집]

Jean Bodin (1530-1596)

프랑스 절대주의 형성기의 정치학자·법학자.

툴루즈 대학에서 법학을 배워 1561년 파리로 나와 변호사가 되었다. 1571년 이후 왕실을 섬겨 1583년까지 국정에 참여했다. 위그노 반란에 의한 격렬한 종교적·정치적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주의 절대권력으로 국내의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1576년 <국가론>(6권)을 써서 정치학의 체계화를 시도하였으며, 또 근대적인 의미에서 주권(主權)의 관념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주의 무제한적인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고, 국가의 가장 견고한 지주(支柱)로서 정의를 강조하고 또 주권은 신법(神法)·자연법·만민법에 구속을 당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기초인 가족과 사유재산의 불가침도 주장하였다.

흐로티위스[편집]

Hugo Grotius (1580-1645) 네덜란드의 법학자·철학자. <전쟁과 평화의 법>(1609)의 저자로서 근대 국제법의 아버지라 일컬어진다. 명문인 프로트가(家)의 장남이며 11세로 라이덴 대학에 입학하여 24세로 홀란트, 제일란트, 서(西)프리슬란트의 검사총장이 되었다. 자유통상을 제창, <공해론(公海論)>(1609)을 썼다. 1613년에는 영국의 네덜란드선 억류사건이 일어나자 영국으로 가는 특사의 일원이 되어 런던으로 갔으며, 귀국 후 로테르담 시장이 되었다. 1618년 신학상의 논쟁에 휩쓸려 아르미니우스파(신의 은총을 받아들이느냐 여부는 각자의 자유 의사에 달려 있다고 하여 루터·칼뱅의 예정설에 반대)의 지도자로서 종신금고형에 처해졌다. 1621년에 프랑스로 망명하였고, 1625년 파리에서 <전쟁과 평화의 법>을 출판하였다. 1634년 스웨덴왕인 구스타프 아돌프의 초청을 받아들여 프랑스 주재 대사가 되었다. 1645년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는데 이번에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뤼벡으로 가는 도중에 다채로운 생애를 끝마쳤다.

전쟁과 평화의 법[편집]

戰爭-平和-法 (1625)

근대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흐로티위스의 불후의 명저.

본서는 프로레고메나(序言)와 전3권으로 된 대저작이다. 서언에는 만민법·자연법·의사법(意思法)의 정의를 기술하였고 특히 국민과 외국민의 동맹 조약, 여러 약정에 관한 지식=전쟁과 평화의 법으로서 만민법의 체계적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제1권에서는 "모든 힘의 행사가 일체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회에 반하는 힘, 즉 타인의 권리를 뺏으려는 힘의 사용이 금지된다…"라고 하는 정전론(正戰論)을 기술하였다.

제2권에서는 정전론을 규명하기 위하여 어떠한 것이 공통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소유되는가,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어떠한 권리를 갖는가, 지배권 내지 소유권에서 어떠한 의미가 발생하는가에 대하여 말하였다.

제3권에서는 전쟁에 있어서 어떤 것이 허용되는가와 여러 가지 강화·전쟁에 관계가 있는 온갖 관례가 검토되고 있다. 그는 로마 교황이나 각국의 군주도 자연법에 입각하여 통치해야 한다고 강조한 점으로 홉스와 로크의 선구자라 하겠고, 또 그에 입각한 세계 평화를 위한 인류 재결합의 정신은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과 같은 세계적 평화기구의 형성 원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