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근세의 사상/17세기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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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편집]

-世紀-思想 17세기에 있어서 가장 눈부신 사건은 새로운 자연과학의 등장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이래의 전통적인 자연학(自然學)은 "사물의 본성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의 주위를 맴돌며 "그것은 무엇무엇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 자체의 형상 또는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 시종일관했다. 그것은 자연현상의 배후에 숨은 '가려진 성질'은 생각했어도 자연현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겨나는가를 법칙적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었다. 여기에 대해서 근대의 수학적 자연과학은 사물의 본성이나 형상보다도 현상(現象) 상호의 관계를 문제로 하고, '왜'라는 것보다 '어떻게 하여'라는 의문에 해답하려는 것이었다. 즉 현상 상호의 관계를 양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점에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과학적 자연관의 성립에 관해서는 이것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고찰하는 것이 적당하다. 첫째는 15-16세기의 자연철학자들에 의한 스콜라의 전통적 자연관의 파괴라는 것이다. 예컨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나 브루노는 중세적인 코스모스(宇宙), 즉 일정 질서를 가진 유한(有限)의 완결된 우주상(宇宙像)을 파괴하고, '무한이며 특정의 중심을 갖지 않는' 우주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그들의 손에 의해서 전통적으로 생각되어 왔던 우주의 계층질서적(階層秩序的)인 구조는 근본적으로 파괴되고, 그 대신 무한을 향해서 개방된 생명적인 우주상이 출현한 것이다. 이 세계상(像)의 전환을 한마디로 말하면 '닫혀진 세계에서 무한의 우주로'라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중세적(中世的)인 코스모스 관념을 파괴했으나 거기에서 과학적 자연관이 탄생되는 데에는 또 하나의 사상적 전회(轉回)를 거쳐야 했다. 이 변화는 케플러에서 갈릴레이에의 이동과정에 뚜렷이 나타난다. 케플러는 처음에는 천체를 움직이는 원인은 영(靈)이라고 생각했었으나, 후에 이 힘이 물체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갈릴레이에 이르자 자연의 변화를 가능태(可能態)에서 현실태(現實態)로의 이행이라는 것에 의하여 목적론적(目的論的)으로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은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자연은 수량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물체가 운동하는 세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과 함께 자연을 무한한 동적(動的) 생명의 표현으로 보는 르네상스적 자연관 또한 부정된다. 자연은 생명성·인간성이 완전히 제거된 순수한 기계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변천은 '생명적·유기적 자연관에서 과학적·기계론적 자연관으로'라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17세기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갈릴레이 이후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하위헌스(1629-1695), 영국의 물리학자 보일(1627-1691), 나아가서 혈액순환설로 유명한 하비(1578-1657) 등의 힘에 의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후에 뉴턴(1643-1727)에 의해서 소위 고전역학(古典力學) 체계로 완성되는데, 이것에 철학적인 바탕을 마련하고 새로운 시대의 세계관으로서 확립시킨 사람으로서는 역시 데카르트의 이름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지성의 시대[편집]

知性-時代

17세기의 기계론적 자연관 성립은 단순히 자연인식의 사고방식 전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널리 인간관(人間觀), 가치관의 변환(變換)에도 관련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세계의 기계론화가 철저하게 추진됨과 동시에 인간의 정신은 세계로부터 독립된 순수 지성(감정으로부터 독립된 지성)으로서 확립되었다. 인간은 세계 밖으로 뛰어나온 독립된 어떤 것으로 되는 것에 의해서만 세계를 자기에게 대립해 있는 것, 즉 인식(認識)의 대상으로서 생각할 수가 있다. 자연적 세계의 철저한 기계론화는 이와 같은 세계와는 독립된 주관(主觀)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과 같이 인간이 이와 같은 주체(主觀이라는 의미도 포함하여)가 되었다는 것이 근대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이며, 더욱이 이와 같은 변화는 17세기라는 한 시대에 일어난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는데, 과학에 의한 자연지배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이 지적(知的) 주체로서 세계에 대해서 군림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지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존재형식을 확립한 것은 무어라해도 데카르트의 공적일 것이다.

대륙합리론[편집]

大陸合理論

대륙합리론에 공통되는 성격은 무엇보다도 수학적 방법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라는 점이다. 먼저 데카르트는 물리학에 수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이론적 연구의 성공으로 힘을 얻어, 이 물리수학적 방법을 일반화하여 모든 학문에 통하는 보편적 방법의 이념에 도달했다. 스피노자 또한 수학을 학문의 모범으로 생각하고, 철저하게 기하학적 방법을 철학에 응용하여 철학을 엄밀한 논증적(論證的) 학문으로 하려고 했다. 라이프니츠는 수학적 기호를 사용하여 가장 단순한 진리에서 모든 진리를 연산적(演算的)으로 연역(演繹)하려는 결합술(結合術)을 생각해 냈다.

영국의 경험론과 대비해서 생각했을 때, 대륙합리론이란 사고방식의 특성은 특히 인식의 기원을 문제로 하는 인식론적 견지에서 논의된다. 즉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생긴다고 하는 경험론에 대해서, 합리론은 모든 확실한 인식은 생득적(生得的)이며, 명증적(明證的)인 원리(直觀으로 확실한 원리)에서 유래한다는 입장에 선다. 감각적 경험은 혼란스런 것이라 하여 경시하고, 수학적 인식을 원형으로 하는 것 같은 논증적 지식을 중시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데카르트[편집]

Ren

Descartes (1596-1650)

프랑스의 철학자.

토렌주(州)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606년 10세 때 예수회가 경영하는 라 프레슈의 학원에 입학하여 르네상스의 인문학(人文學)을 섭취한 스콜라 철학의 체계를 배웠다. 개연적(蓋然的) 의론에만 시종하고, 교사들이 약속한 '인생에 유용'하며 동시에 확증된 인식이 주어지지 않는 데에 불만을 품고, 학원 졸업(1616) 후는 전적으로 '세상이라는 책' 또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만 배우겠다고 여행에 나섰다. 22세(1618) 때 네덜란드로 가서 모리스 드 낫소의 군대에 지원 장교로 참가하여 15개월 동안 브레다에 체재했다.

이 사이에 이쟈크 베크만(1588-1637)과 만나서 물리수학적 연구에 눈뜨게 되고, 드디어 수학적 방법을 일반화한 보편수학(普遍數學, Mathesis Universalis)의 구상에 도달한다. 1619년 11월 10일의 일로서, 울름 근교에 있는 방갈로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그날 밤 세가지 꿈을 꾸었다. 그는 그것으로 철학 전체를 혼자의 힘으로 새로이 하는 일을 신으로부터 천직으로 부여받았다고 직관(直觀)했다. 1620년 군적(軍籍)을 떠나 다시 여행길에 올라, 북부 독일, 네덜란드를 거쳐 1622년 프랑스에 돌아와서 다시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일설에는 40년 전 몽테뉴가 여행한 경로를 쫓는 모랄리스트적 인생수업의 여행이었다고 한다. 1625년부터 2년간 파리에 체재하며, 스넬과는 독립으로 '빛의 굴절의 법칙'을 발견했다.

또한 메르센(1588-1647)과 친교를 맺고, 메르센 학회(學會)란 이름으로 알려지는 그의 살롱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의 모임에 참가하고, 이후 자연과학적 연구의 정보를 끊임없이 메르센을 통해서 입수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의 수도회(修道會) 신부들과도 교류하여 지도자 드 베류르 추기경으로부터 새로운 원리에 입각한 학문 체계를 건설하는 것이 신과 인류를 위한 책무(責務)라는 격려를 받고, 오랫동안 마음먹었던 학문 개혁의 계획을 실행할 결의를 굳히고, 1628년 가을부터 20년간 네덜란드에 은거하게 되었다.

그 후 최초의 9개월간 형이상학 소논문(小論文)의 집필에 종사했는데, 제자인 레네리로부터 1629년 3월 이탈리아에서 관찰된 '환일현상(幻日現象)'을 해명하라고 질문당한 것을 기회로 해서 중도에 자연 연구로 전환, 드디어 그것은 전체 자연학을 포괄하는 <우주론>의 구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이것이 완성되어 막 인쇄하려는 단계에서 갈릴레이의 단죄(斷罪)를 알고 지동설(地動說)을 중요 내용으로 한 이 책의 공간(公刊)을 단념했다. 그러나 1637년 메르센의 요청에 따라서 <방법서설(方法敍說)>및 <굴절광학(屈折光學)><기상학(氣象學)><기하학(幾何學)>의 세 가지 시론(試論)을 세상에 내놓았다. <서설>에 이은 세 논문은 <우주론>의 재료로서, 상당히 일찍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다시 4년 후인 1641년에는 10여 년 전부터 계획중이던 형이상학에 관한 주요 저서 <성찰(省察)>을 펴냈으며, 1644년에는 <철학원리(哲學原理)>를 공간했다. 이 전후부터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주목받기 시작하여 갖가지 논쟁의 와중(渦中)에 휘말려 들어갔다.

'자유의 나라'였어야 했던 네덜란드도 데카르트 철학을 위협이라고 느끼는 칼뱅파 신학자들의 박해에 의해서 살기 어렵게 되어 갔다.

때마침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간곡한 초청이 있었기 때문에 16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떠났는데, 5개월 미만의 체재 후인 2월, 54세의 생애를 마쳤다. 평생 고향의 '아름다운 토렌의 뜰'에 대해 동경을 가지면서도 학문의 개혁을 뜻했던 탓으로 '사상도 얼어붙는' 엄한(嚴寒)의 북극에서 객사(客死)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가 생존하였던 17세기 초두의 프랑스는 연이은 종교전쟁(宗敎戰爭)으로 인해서 극도로 피폐하여 혼란이 극에 달한 국내의 질서는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통일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위그노의 반란에서 승리를 한 프랑스는 일단 구교국(舊敎國)으로서 안정되어 절대왕제(絶對王制) 사회에 강력한 통일을 가져와서, 가톨릭적 질서를 재건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철학자라 할지라도 이 질서와 통일을 찾아서 집중하는 국가적 기운(氣運)의 울 밖에 설 수는 없었다. 그에게 기대되었던 것은 이 사상 혼란의 시대에 확실한 원리에 입각한 신학문을 건설하는 역할이었다.

데카르트는 이 시대적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 과학과 그리스도교, 또는 과학과 휴머니즘 사이의 조정·통일을 실현시키려고 했다.

즉 그는 물리수학적 연구를 통해서, 예컨대 물(物)에는 무게라는 실재적 성질이 있기 때문에 낙하(落下)하는 경향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따위의 스콜라적 자연학으로는 아무래도 만족할 수 없어서, 차츰 물질 즉 연장(延長)이라는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이끌려 갔다.

그런데 이 물질 즉 연장이라는 테제(These)는, 물질 현상의 수학적 해법(解法)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성, 자유의지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자연인식의 방법이 동시에 도덕이나 종교의 근거를 굳히는 일도 된다. 여기에서 데카르트는 자기의 도덕적·종교적 관심과 새로운 수학적 자연학을 하나의 체계에서 통일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형이상학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동일한 이성(理性)질서에 따라 자연인식의 기초를 세움과 동시에, 도덕이나 종교에 근거를 주는 장대(壯大)한 철학 체계의 건설을 도모하기에 이른 것이다.

방법서설[편집]

方法敍說 (1637)

데카르트의 주저(主著) 가운데 하나. "양식(良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배분(配分)되어 있는 것이다.…바르게 판단하고, 참(眞)을 거짓(虛僞)과 구별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양식 또는 이성(理性)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것은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며 사람에게 평등하다."

이와 같이 유명한 구절로 시작되는 이 책은 자주 사상의 영역에 있어서의 '인권선언'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이 이성능력(理性能力)에서의 평등이라는 생각을 한발 추진시켜, 사회적 시야로 바꿔 놓고 본다면 바로 루소의 평등사상으로 전화(轉化)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데카르트는 인간의 평등이라는 말을 하고자 했던 것일까, 이 글을 깊이 읽으면 거기에 감추어져 있는 회의적(懷疑的) 어조는 수없이 많다.

그는 결코 양식(良識)의 보편성을 낙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증거로 "모든 사람은 동일한 자연적 빛(센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같은 관념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빛을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전무(全無)한 것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1639년 10월 16일, 메르센에게 보낸 편지).

말할 나위도 없이 그는 사실로서의 인간 정신의 평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반대로 지금은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성 능력의 평등한 발현(發現)을 미래에 실현시켜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성을 순서있게 이끌어 나가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상은 표면상의 말의 의미에 현혹되지 않고, 감춰진 뜻을 꿰뚫어 읽어야 한다. 사상의 무서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저서는 무엇보다도 '방법의 이야기'이다. "이 책을 하나의 역사서로서, 또는 바란다면 하나의 이야기로서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의 정신의 역사로서 철학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다. 그가 여기서 제기하는 방법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저자 자신)의 정신을 바르게 이끄는 방법'(表題에 있는 文句)이었다. 방법은 실제로 채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그는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방법의 4칙(四則)이라는 것은 놀랄 만큼 단순한 것이다. 요컨대 가장 단순한 여러 사실의 명증적(明證的) 직관(直觀)과 이것들을 결합하는 필연적 연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방법을 실제로 사용하여, 자연인식이나 형이상학적 진리를 이끌어 냈을 뿐만 아니라 '생활의 지도, 건강의 유지, 모든 기술의 발명'에도 도움이 될 지식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 책은 프랑스어로 쓰여진 최초의 철학서적이며(그때까지 학술서적은 스콜라(학원)의 말, 즉 라틴어로 쓰여지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기념비적 저작이었다. 왜 프랑스어로 썼느냐 하는 데 대해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고인(古人)의 서적만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보다도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대체로 단순한 분별(分別)만을 작용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나의 의견을 바르게 판단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은 기성(旣成)의 권위를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머리로써 사물을 생각하고 철학(哲學)하는 사람들만을 상대로 해서 쓰여진 것이다. 그것을 하지 못하는, 즉 철학하는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읽지 않는 편이 좋다고 권하고 싶다.

성찰[편집]

省察 (1641)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주저(主著).

<성찰>은 철저한 회의(懷疑)에서 시작된다. 만약 학문에 있어서 확실한 것을 확립시키려고 한다면 평생에 한번은 일체의 것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최초의 토대(土臺)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은 철저히 의심해야만 한다. 그런데 감각은 때로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가 없으며, 또한 평상시와 같이 자기가 지금 이곳에 있다든지, 난로 옆에 앉아 있다는 것도 꿈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보장은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 그러면 수학적 인식은 어떨까. 내가 눈을 뜨고 있든 잠을 자고 있든, 2에 3을 보태면 5이며, 4각형은 4개의 변(邊)밖에 가질 수 없다. 이것까지도 의심할 수가 있을 것인가. 아니, 가능하다. 만약에 어떤 나쁜 영(靈)이 있어서 내가 2와 3을 보탤 때마다 잘못하도록 시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늘도, 땅도, 색깔도, 형태도, 소리도, 기타 일체의 외적(外的) 사물은 나쁜 영이 나의 믿기 잘하는 마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꿈의 계략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되면 나의 외부에 있는 일체의 대상이 과연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의심하게 된다. 외계(外界)의 일체가 꿈이나 환상에 불과한 것이 되어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확실성을 찾아서 밖의 세계를 떠돌아다니던 나의 정신은 별수없이 내부로 되돌아온다. 여기에도 의심의 눈길을 돌리려고 한다. 그러면 그 순간 강한 충격으로 되돌아온다. 여기에는 의심이 정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 점(點)이 있다. 지금 의심하고 있는 그 나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을 것인가. 불가능하다. 아니다, 나는 존재한다. 의심하는, 즉 사유(思惟)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아르메데스의 1점(點)이다(그가 지구 전체를 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 위해 찾은 것은 확고부동한 1점뿐이었다. 그 부동의 1점에 이제야 도달한 것이다).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을 이끌어 낼 수 있겠다.

먼저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내가 지난날 그것이야말로 나의 존재라고 생각했던 육체나 감각은 꿈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끊어 낼 수도 있다. 그러면 생각하는 일은 어떨까. 이것만은 나로부터 뗄 수가 없다. 꿈과 생시가 구별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신체를 가질 수가 있더라도 그와 같은 이유로써 의심하는 사고(思考)가 작용하고 있는 나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동안인가. 물론 내가 생각할 동안이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일을 아주 중지해 버린다면 다음 순간에는 존재하는 것을 아주 중지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그 순간에는 에고 숨――ego sum, 나는 있다――의 확실성은 효력을 잃기 때문에, 다시 나쁜 영(靈)의 허무화의 힘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나의 존재에서 생각한다는 작용을 떼어버릴 수 없는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 되어서 정신 또는 순수지성(純粹知性)으로서의 자아(自我)의 존재가 확립되는 것이다. 이 제1원리에서 출발하여 다른 모든 인식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하 간략하게 그 결론만을 제시한다.

나는 의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 불완전한 존재에서 존재자(存在者)의 관념이 생겨날 수는 없다. 내 속에 있는 신(神)의 관념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면, 그것은 완전한 존재자, 즉 신 그 자체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에서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 나아가서 신이 완전한 이상, 신은 성실하며, 속일 리가 없다는 데서 우리가 명석(明晳), 판명(判明)하게 인식하는 대로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결론지어진다. 물체(신체)의 존재가 증명된 다음 정신은 사고하는 것으로만, 즉 신체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신(心身)의 실제적 구별도 확립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형이상학은 완결된다.

철학원리[편집]

哲學原理 (1644)

갈릴레이 사건으로 '지동설(地動說)'을 중요한 내용으로 한 <우주론>의 공간(公刊)을 단념한 데카르트도 1644년 48세 때에 드디어 자연학을 포함한 전 철학 체계의 공간을 마음먹었다. 이것은 당초 6부로 될 예정이었으나 제5부 '동물과 식물의 본성에 대해서'와 후에 <정념론(情念論)>에서 전개되는 제6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준비 부족으로 결국 집필되지 못하고, 제1부 '인간적 인식의 원리에 대해서', 제2부 '물체적 사물의 원리에 대해서', 제3부 '가시적(可視的) 세계에 대해서', 제4부 '지구에 대해서'가 출판되었다.

이 제3부에서 그는 사실상 지동설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것의 고유한 운동'에 대한 특유의 정의(定義) 방법에 의해서 원리상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념론[편집]

情念論 (1649)

정신과 육체를 엄격히 분리하는 2원론(二元論)의 입장에 철저했던 데카르트도 생애의 막바지에 가까워지자, 정신이면서 동시에 신체이기도 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존재, 즉 인간을 논하기에 이르렀다. 즉 심신관계의 문제를 상세하게 논한 <정념론>을 집필한 것이다.

그 계기를 만든 것이 다름아닌 엘리자베스 공주였다. "사유(思惟)하는 실체(實體)에 불과해야 할 인간의 정신이 의지(意志)에 따른 행위를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 신체의 정기(精氣)를 움직일 수가 있는 것입니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 날카로운 질문은 데카르트를 심히 낭패하게 만들어 그로 하여금 '정념', 즉 신체를 원인으로 하여 정신 속에 야기되는 수동(pas­sion, 情念)의 고찰로 향하게 했다.

그는 인간의 기본적 정념으로서 경이(驚異)·애정·증오·욕망·비애(悲哀)의 다섯 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정념은 모두 남에 의해 움직여지면서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 움직인다고 믿고 내부에서 격발(激發)한다. 따라서 여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 구조를 객관적·기계적으로 분석하여 원인을 인식하고 그것에 의해 정념을 주체로 하는 일, 즉 그것이 가진 수동성(passion)을 능동성(action)으로 변화시켜서, 자유의지(自由意志)의 능동성에 합치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서 이성적 의지에 의해 정념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단호한 판단을 내리는 '고매(高邁)한 마음'을 가르치는 데카르트 도덕이 탄생한다.

정신 지도의 규칙[편집]

精神指導-規則 (1701)

데카르트의 초기 저작. '지도'라는 말의 본의(本義)는 진로·방향이라는 것으로, 인간 이성이 바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정한 진로를 가리키고 있다. 인간의 내부에는 '진리의 종자(種子)'라는 것이 숨겨져 있어서 이것을 그 일정한 진로에 따라 찾아내어 나간다면, 필연적으로 하나의 진리에서 다른 진리로의 연쇄(連鎖)를 따라 어떤 보편적 인식으로 이끌려 나간다. 그와 같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628년, 네덜란드에 이주하기 직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미완성의 유고(遺稿)로서 발견되었다.

기회원인론[편집]

機會原因論

데카르트 철학이 미해결인 채로 남긴 문제는 무엇보다도 심신(心身)의 문제였다. 즉 연장(延長)을 본성으로 하는 물체(신체)와 사고(思考)를 본성으로 하는 정신이 어떻게 관계하며 교섭하느냐 하는 난문(難問)이었다. 나아가 데카르트가 자유의지를 인정한 것에서 생겨난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거기에 엉기게 된다.

이 난문에 대체적인 해결을 내리려고 노력한 데카르트 철학의 계승자들이 소위 기회원인론자(機會原因論者)들이다.

횔링크스[편집]

Arnold Geulincx (1624-1669) 네덜란드의 기회원인론자. 데카르트적인 2원론에 입각하면 정신과 신체는 두 가지의 상이한 실체(實體)이기 때문에, 교호작용(交互作用)이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데도 실제로는 심신의 밀접한 교섭이 일어난다. 그 이유는 신(神)이 양자를 매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 내부에 어떤 운동이 일어날 때 신은 이것을 기회(機會, occasion)라 하여 정신 내부에 그것에 상응(相應)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하고, 또한 정신 내부에 어떤 운동이 일어날 때 신은 이것을 기회로 하여 신체 내부에 거기에 상응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횔링크스는 이 우인론적(偶因論的) 입장에서 신만이 유일한 작용자라 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각자의 무력(無力)함을 알아야 한다고 신에의 절대복종에 따른 엄숙한 타율(他律) 도덕을 전개했다. 그의 주저로는 <윤리학(倫理學)>이 있다.

말브랑슈[편집]

Nicolas Malebranche (1638-1715) 프랑스의 기회원인론자. 그는 인식(認識)의 문제를 '기회원인론'에 입각해서 설명했는데, 그의 주요한 관심은 변신론(辨神論), 즉 종교와 철학(은총의 빛과 자연의 빛)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있었다. 이것은 반대로 말한다면, 데카르트에 의해서 획득된 자연적 인식을 신적 인식에까지 높여서 거기에 객관적 보증을 부여하는 일이다. <진리의 탐구>의 인식설은 그같은 보다 근본적인 형이상학, 그의 경우에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신학에의 서론을 이루고 있다. 두 가지의 실체(實體)로서 뚜렷이 구별되는 정신과 물체와의 사이에 인식이 성립되려면 그 매개자(媒介者)가 필요한데 그것이 '관념'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인식은 우리들이 신의 이성(理性)에 의탁하고, 신의 내부에 있는 '관념'을 매개로 해서만이 얻어지는 것이며, 이것을 "우리는 만물을 신을 통해서 본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상의 근대적인 의미는 그가 <진리의 탐구>에의 비평이나 논박(論駁)에 대한 <석명(釋明)>(1677) 속에서 처음으로 밝힌 '영지적(英智的) 연장(延長)'의 사상 속에 나타나 있다. 연장이라는 것은 무한한 정신 상태로서의 신의 내부에 있다. 우리들이 물체적 사물을 지각(知覺)하는 것은 그와 같은 영지적 연장에 힘입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저로는 <진리의 탐구>(1674-75), <형이상학적·그리스도교적 성찰>(1683),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에 관한 대화>(1688)가 있다.

가생디[편집]

Pierre Gassendi (1592-1655)

프랑스의 유물론적 자연학자·철학자.

샹테르세에서 출생, 일찍부터 교편을 잡았다. 후에 디뉴의 수석 사제(司祭)가 되었는데 파리에서 과학자·철학자와 끊임없이 교제하여 1645-1648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수학교수를 역임했다.

신자연학(新自然學)과 가톨릭 정통 교의(敎義)의 융화를 꾀하여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설(說)과 데카르트 기계론에 반하여, 고대원자론(古代原子論)과 에피쿠로스 윤리설을 부활시켰다. 철학·과학사상의 발전에 대한 영향은 컸으나, 그의 철학은 원자론적 자연학과 목적론적 신학(神學)과의 절충이며,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 주요 저서로는 <에피쿠로스 철학 집성>(1649), <철학 집성>(1658)이 있다.

프랑스 모랄리스트[편집]

'모랄리스트'란 모랄(英語)·무루스(佛語)(모랄, 무루스 모두 관습·습속이란 뜻의 라틴어의 모레스가 어원), 즉 개인에 관해서는 그 정신 상태·기질·습관에서 인생관·세계관을, 또한 사회에 관해서는 전통·습속·관습·도덕 등을 저술하는 작가를 가리킨다.

그들은 이러한 사항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자기를 통해서 현실을 응시(凝視)하여, 그 직접적인 체험과 관찰과 예리한 심리분석에 의해 생활규범으로서의 윤리·도덕을 탐구했다. 소위 모랄은 그 법칙적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협의로서 모랄리스트라고 할 때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17, 18세기 문학자를 지칭하는데, 몽테뉴의 <에세>에서 시작되는 모랄리스트적 사고법은 프랑스인에게 천성적으로 구비된 것으로서, 프랑스 휴머니즘의 전통으로서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실과는 무관한 형이상학적 사변(思辨)을 가장 싫어하는 그들은 단편적인 '성찰(省察)'·'잠언(箴言)'·'초상(肖像)' 따위의 형식으로 자기의 사상을 서술하여 적확(的確)한 에스프리(精神)와 신랄한 이로니(풍자)에 의해 인생의 영원한 법칙을 암시한다.

그러나 연역적(演繹的) 천재인 데카르트 또한 모랄리스트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철학사적으로는 그의 이론적 체계에 결여되어 있던 인생론적 경향을 보충한 것이 그리스도교 변증론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며, 또한 모랄리스트들이었다. 대표자로선 라 로슈푸코, 라 브뤼예르와 "그때까지는 사색하는 모든 사람 밑에서 멸시를 받아가며 인간을 옹호하고, 고귀한 정념(情念)을 사랑하는 일"을 가르친 보브나르그(1715-1747), "진실은 꼭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성을 추하고 골계(滑稽)적인 면"에서 비관적으로 다룬 샹포르(1741-1794),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상적 인간을 그린 주베르(1754-1824) 등을 들 수 있다.

파스칼[편집]

Blaise Pascal (1623-1662)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

법복귀족(法服貴族)의 아들로 클레르몽에서 출생했다. 훌륭한 과학자이며 파리의 메르센 학회(學會)의 유력인사인 부친 에티엔의 극히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파스칼은, 어릴 때부터 비상한 천분을 발휘하여, 1639년 16세 때 <원추곡선론(圓錐曲線論)>을 발표하여 사람들의 절찬을 받았다. 이후 사이클로이드 문제 해결(1658)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수학적·물리학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대기압(大氣壓)에 관한 '파스칼의 원리'의 발견으로 발전한 <진공론(眞空論)에 관한 신실험>(1647)은 과학사상 중요하며, 스콜라 자연학이나 데카르트 자연학도 그 원리에서의 연역에 의해서 진공의 존재를 부정한 데 대해 정밀하고 섬세한 실험적 방법에 의해서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1647년 부친의 염좌(捻挫)를 치료한 데샹 형제의 교화(敎化)에 의해서 파스칼 일가는 얀선주의에 입신(入信)했다(第1의 回心). 이미 과학자이며 사교인(社交人)이었던 파스칼은 이후 그리스도 신자로서 생활하게 된다. 이 세 가지 사실이 파스칼 자신과 그의 철학을 특정짓고 있으며, 모랄리스트 파스칼은 그 일면에 불과하다.

1652년 그보다 빨리 누이동생인 자클린이 얀선주의의 본거지인 포르 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 자신은 사교생활의 기쁨과 끊기 어려운 인연을 발견하여 파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그것에도 지쳐서 초췌와 실의 속에 있을 때, 갑자기 1654년 11월 23일, '은총의 불'(계시의 밤)을 맞았다.

사후 발견된 <메모리알>은 이 계시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신, 야곱의 신, 철학자·학자의 신뿐만 아니라 확실·감정·환희·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신'. 그가 믿는 신은 정의와 원리에서 추론하는 기하학적 정신이 논증(論證)하는 신이 아니라, 심정(心情)에 의해서, 섬세한 정신에 의해서 직관(直觀)되는 인격으로서의 '숨겨진 신(神)'이었다.

1656년 1월 또다시 격화된 얀선주의에 대한 예수회의 공격에 대항하여 파스칼은 <프로방샬>(1656-57)을 집필하여, 신학문제를 일반인들에게 평이하게 해설함과 동시에 예수회의 도덕 기만성(欺瞞性)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657년 가을 무렵부터 '그리스도교 변증론'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1659년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팡세>라고 불리는 수많은 메모만이 남았다. 1662년 "신이여 영원히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파리에서 사망했다.

팡세[편집]

(1670)

파스칼의 주저(主著).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든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전표면이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말로써 알려진 <팡세>는 비꼬는 경구(警句)만이 나열된 단순한 인간관찰의 책이 아니다. 본래 모든 사람을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쓰여진 그리스도교 변증론의 초고(草稿)였다. 그의 사후 유고(遺稿)로서 미정리된 채로 발견된 단편(斷編)에 대한 원고의 판독(判讀)과 정리에 대한 노력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 책 속에는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의 변증법에 의해서 신을 향한 사랑에 이르는 길(道)이 설명되고 있다. 에픽테토스와 몽테뉴에게서 배운 파스칼은 인간을 무한과 허무(虛無), 위대와 비참 사이에 부동(浮動)하는 중간자(中間者)로서 포착했다. 인간은 광대무변한 우주에 비하면 겨우 하나의 점과 같은 갈대처럼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공간에 의해서 우주는 나를 싸고, 하나의 점으로서 나를 삼킨다. 그러나 사고(思考)에 의해서 나는 우주를 싼다"는 점에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 인간은 자기의 비참을 이해하는 점에서 위대하다. "나무는 자기의 비참을 모른다." 에픽테토스는 자기의 비참을 모른 채 자기 힘으로 신을 완전히 알고, 사랑하려 했기 때문에 오만(傲慢)에 빠졌다.

그러나 몽테뉴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내면적 교섭을 갖는 일 없이 자기애(自己愛)의 공허함을 말하고 인간의 비참에 직면한다면 구원할 수 없는 회의와 절망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모순은 신의 위대함과 인간의 비참을 하나로서 체현(體現)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비로소 해결되는 것이다.

이 중개자가 없다면 신과의 모든 교섭은 단절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을 알려고 하는 자는 고립적 정신의 차원을 떠나서, 그리스도와의 깊은 내면적인 공동 관계를 유지하는 '사랑'의 차원으로 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을 직관(直觀)하는 것은 심정(心情)이며, 이성(理性)이 아니다. 이것이 즉 신앙이다." 파스칼은 정신의 질서를 초월해서 이 심정의 질서에 이끌렸을 때 비로소 신과 자기의 확실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파스칼의 본령(本領)이 있다.

라 로슈푸코[편집]

Francois Duc de La Rochefoucauld (1613-1680)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대귀족의 아들로서 파리에서 출생, 15세에 결혼하여 군무(軍務)에 복역한 후, 루이 13세의 궁정(宮廷)에 들어갔으나 왕비 안 드트리슈의 심복인 미모의 슈브루즈 공작 부인과 정을 통하고, 왕비의 반(反)리슈류 음모에 가담, 발각되어서 1637년 8일간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었다. 그 후 왕비의 망은(忘恩)과 냉대(冷待)와 롱그빌 공작 부인의 선동도 있어 프롱드의 난(亂)에 가담, 1652년 상 앙투안의 결전에서 실명(失明)에 가까운 중상을 입었다. 이때 드롱그빌 부인은 이미 그에게서 떠난 뒤였다. 그는 그때부터 일체의 정치적 야심을 포기하고, 고향 베르트유로 돌아가 <회상록>을 집필했다. 이와 같은 음모·배신, 그리고 절망이 그의 인간을 완성시켜 '막심(箴言)'의 하나하나를 생기(生氣)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1658년 다시 파리의 사교계에 돌아와서 오네트 옴(良識人)으로서 드 사블레 부인 등의 살롱에서 사색(思索)을 계속했다. 또한 이 무렵 <클레브의 부인>인 라파예트 부인과 교제를 시작하여 만년까지 계속되었다. 1665년 익명으로 <막심>을 간행하여, 특유한 통찰력과 농후(濃厚)한 페시미즘에 의해서 인간 심리의 심층에 담긴 '자기애(自己愛)'를 예리하게 그려내어 이 장르에 신풍(新風)을 불어넣었다.

막심[편집]

(省察, 일명 도덕적 격언과 잠언) (1665)

라 로슈푸코의 주저(主著). "우리가 미덕(美德)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때때로 행운이라든가, 아니면 우리의 술책이 교묘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여러 행위나 모든 이해관계를 끌어모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남자가 용감하고 여자가 정숙(貞淑)한 것은 반드시 그 용감, 그 정숙 자체에 의한 것은 아니다." '막심'을 중심으로 하여 라 로슈푸코는 인간의 여러가지 행동 일체를 자기애(自己愛)와 이해(利害)에 의해서 신랄하게 묘사한다. 고민과 절망에 가득 찬 자기의 반생(半生)에 대한 심각한 반성에서 생긴 이 페시미즘은 미덕(美德)이 가장된 악덕(惡德)에 불과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폭로하였지만 그러나 인생 자체는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견만의 미덕을 파괴하고 당시의 사교계에 있어서 이상적 인간 유형으로 생각되었던 오네트옴(良識人)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반성이야말로 필수조건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순수하고 다른 정념(情念)이 섞이지 않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 속 깊이 숨겨져 우리들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랑이다" 라 로슈푸코는 그것을 탐구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라 브뤼예르[편집]

Jean de La Bruy

re (1645-1696)

예술가의 재능을 가진 모랄리스트.

파리의 중산계급 출신. 파리 최고법원의 변호사. 이어 캉 납세구(納稅區)의 수세관(收稅官)을 역임했는데, 거의 일은 하지 않고 종일 파리의 서재에서 철학적 명상 속에 지냈다고 전해진다. 1684년, 콩데 공작가(家)의 아들 루이 드 부르봉공(公)의 교육관(敎育官)이 되어 역사를 가르쳤는데, 공의 결혼 후도 부공작(父公爵)의 궁내관(宮內官)으로서 일생을 샹티의 콩데가에서 지냈다.

이 대귀족의 범용(凡庸)함 때문에 한층 고만(高慢)하고 횡포(橫暴)하고, 잔혹한 환경 속에서 그는 <카라크테르>를 참을성 있게 퇴고하여 완성시켰다. 그것은 1688년 익명으로 출판되자 대단한 호평을 받았으며, 이것으로써 1693년 그는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그 첫머리에 "모든 것을 다 말했다. 사람은 너무나 늦게 왔다.…사람은 단지 고대인이나 근대인의 훌륭한 사람들의 뒤에서 낙수(落穗)를 줍고 걸어갈 뿐이다"라고 적은 그는 고대인·근대인 논쟁에 관해서 '고대당(古代黨)'에게 유리한 입회(入會) 연설을 했다.

카라크테르[편집]

(여러가지의 성격, 일명 當世風俗誌) (1688)라 브뤼예르는 그리스의 철인(哲人) 테오프라스토스의 <카라크테르(여러가지 성격)>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거기에다 당시 풍속이나 궁정의 귀족·신부들의 생태를 희극적(喜劇的)으로 풍자한 자신의 <카라크테르>를 첨가하여 발표했다. 번역보다도 자작(自作) 쪽이 그 자유롭고 적확(的確)한 판단과 발랄한 표현에 의해서 호평을 받았고, 사람들은 생생하게 묘사된 '포르트레(肖像)'의 모델을 알아맞히는 데 열중했다. 그는 정념(情念)의 본질보다도 오히려 그 자태에 착안하여 주위의 위선자들에 대한 치밀한 관찰에 의해 감추어진 본성을 폭로하는 식의 구체적이고 보다 현실적인 모습을 모아서 세심하고 참을성 있는 표현력에 의해 성심껏 엮어 나갔다.

실재 인물보다도 한층 현실적인 인물을 창조하는 것에 의해 그는 그의 시대를 풍자하고 현대를 비판할 수 있는 진리 탐구를 뜻했던 것이다. "재무관(財務官)이 완전히 실수를 하면 귀족들은 말한다. '그 작자는 상놈이다. 성도 없고 가문도 없는, 굴러온 놈이다'라 하고 잘하면 '제발 따님을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

라 브뤼예르는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지만 내성(內省)보다도 인간과 사회의 관찰을 중시하여 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하는 비평가로서 18세기의 선구자였고, 또한 우연한 사실에서 영원한 진리를 그려내는 깊은 감정을 가진 예술가였다.

[편집]

Pierre Bayle (1647-1706)

프로테스탄트의 사상가로서스당의 철학교수. 후에 로테르담의 철학·역사 교수를 지냈다.

회의주의적인 경향이 강하며, 낙관론이나 이신론(理神論)을 날카롭게 공격하고 이교도(異敎徒)나 무신론자에 의해서도 진리는 통찰된다고 하여 '관용(寬容)'을 주장했다. 또한 주저 <역사적·비판적 사전(辭典)>(3권, 1697)으로 18세기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으로써 계몽기(啓蒙期)의 선구적인 철학자로 지목되고 있다. 주저로는 <철학체계>(유고, 1737)가 있다.

퐁트넬[편집]

Bernard Le Bovier de Fontenelle (1657-1757)프랑스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의 선구적인 사상가.

루앙에서 출생하여 숙부인 코르네유에게 양육되었다. 변호사였으나 작가를 지망하여 파리의 살롱에 출입하면서 문학작품보다도 광범하고 기민한 재능에 의해서 인기가 있었다.

고대인·근대인의 논쟁에서는 라 브뤼예르가 조소(嘲笑)한 '진보의 관념'을 옹호하였고, 한편 과학적 지식의 보급자로서 회의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에 의해서 종교적 교의(敎義)와 예언의 공허함을 밝히고 자연법칙의 항상성(恒常性)을 주장했다. 또한 과학 아카데미의 종신 간사였다.

주저로는 <사자(死者)의 대화>(1683), <세계의 다양성에 관한 대화>(1686), <신탁사(神託史)>(1687), <고대인·근대인 우열론>(1688)이 있다.

스피노자[편집]

Baruch(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네덜란드의 철학자.

포르투갈계(系) 유대인의 자손으로서 암스테르담에서 출생했다. 처음에는 그곳 유대교회 부속 학교에서 유대학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라틴어 교사이며 자유사상가인 판 덴 엔데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에서는 이단(異端)인 서구 근세 사상과 학문에 접근했기 때문에 1656년 파문(破門) 선고를 받았다. 더욱이 이것은 그와 말을 주고 받는 것, 그에게 4큐비트(약 2미터) 이상 접근하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금한 '대파문(大破門)'이었다.

이 때문에 이후의 스피노자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린스부르크, 포르부르크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소수의 우인들과만 연락을 취하는 생활을 보냈는데, 오히려 심신의 여유를 얻어 <신·인간 및 인간의 행복에 관한 소고(小考)>나 <지성개선론> 집필과 <데카르트 철학 원리> 출판(1663) 등의 결실을 얻었다.

1670년에 <신학·정치론>을 출판했다.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구약성서의 해석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친구인 당시 네덜란드의 정치적 지도자 얀 데 비트를 원조할 의도를 가진, 상당히 급진적인 리버럴리즘(自由思想)의 표명이었다.

이 때문에 그를 위험시하는 경향이 이후 더욱 강화되어, 이로 인해서 15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1675년에 완성되어 있던 주저인 <에티카>를 생전에 출판하는 일이 끝내 불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체계가 약 100년 동안이나 '죽은 개'와 같이 매장되어 버렸던 것이다. 만년의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초청도 거절하고 고독하기는 하였으나 자유로운 생활을 보냈는데, 지병(持病)인 폐결핵 때문에 45세로 덴하흐(헤이그)에서 죽었다.

스피노자 철학의 특징은, 인간의 행복을 일관된 목적으로 하여 세계나 인간의 여러 모습에 대해서 극히 생생한 흥미와 감수성을 가지면서, 그것을 가급적 이성화(理性化)시켜 나가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티카>의 기하학적 형식은 그 최대의 표명이며, 근세적 철학 태도의 가장 빠른 피크의 하나이다. 주저로는 <에티카>(1675경), <지성개선론>(1677) 등이 있다.

에티카[편집]

(스피노자의 유고, 1675경 완성)

스피노자가 진(眞)보다도 선(善), 인간의 행복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라는 것은 자주 지적되는 일인데, <에티카>도 제목(윤리학이라는 뜻)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도덕을 해명하는 시도(試圖)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본성을 가진 것으로서 현재 이 세계에 생활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목적하는 것은 인간 도덕의 해명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세계의 성질과 인간의 본성이 밝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 5부로 된 <에티카>는 그와 같은 문제의 고찰에서 시작된다. 제1부는 '신에 대해서'라는 제목인데, 이것은 세계에 관한 형이상학적 고찰이다. 즉 스피노자가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도 의지도 갖지 않고, 자기 본성의 내적 필연성에 따라서 작용하는 유일한 실체(實體)로 이것이 무한한 속성(屬性)을 통해서 변양(變樣), 발현(發現)한 것이 인간을 포함한 유한(有限)의 개물(個物)의 세계이다. 다시 말해 '신은 곧 자연'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세계 속에 있는 인간의 도덕이라고는 하지만, 도덕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의 정신에 관한 것인 이상, 정신의 본성이 파악되어 있을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제1부는 인식의 문제를 취급하고, 인식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여 예컨대 감성지(感性知), 이성지(理性知), 직각지(直覺知)로 구별하고, 이들 중 마지막 것이 사물을 '영원한 상(相) 아래' 파악하는 데 가장 적절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도덕과 행복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정신의 고찰도 인식의 해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의 관찰에까지 전진하여(제3부), 감정의 취급법을 검토할(제4부) 필요가 있었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해서 행복이 '사랑'의 일종이라는 것, 사랑의 최고의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이 제시되어 인간 행복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그의 철학의 정점을 이루는 '신(神)의 지적애(知的愛)' 사상을 가지고 해답할 수 있게(제5부) 되는 것이다.

지성개선론[편집]

知性改善論(스피노자의 遺稿)

서간(書簡)을 별도로 친다면, 스피노자가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유일한 것인데 극히 짧은데다가 미완성이다. <소고(小考)>와 <에티카>의 중간기인 1662년경에 쓰여졌다. 구성면에서 말한다면, 먼저 서론적 부분이 있어서 학문의 목적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학문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이며, 행복 내지 '진정한 선(善)'이란 정신과 자연의 관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상태, 그리고 이것을 만인(萬人)과 나누어 갖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선의 획득은 우리들의 인식 여하에 따르게 되는 것이며, 거기서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지성의 힘을 음미하고 이것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하므로 우선 최고의 인식 양식이 선정되고, 이어서 본제(本題)인 방법 문제로 들어간다는 절차가 취해지고 있다.

스피노자의 방법은 관념을 기초로 하여 관념 자체의 명석(明晳) 판명(判明)과 정합(整合)을 징표(徵表)로 하여 관념을 전개한다고 하는 성질을 갖는다. 즉 방법이란 "반성적 인식 또는 관념의 관념이다."

이와 같은 방법에 있어서는 관념의 진리성(眞理性)이 관념 자체에 의해서 보증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거기서 스피노자는 다음에 허위의 관념, 허구(虛構)의 관념 등 진실이 아닌 관념의 특징을 들어서 이것들과 진실의 관념과의 구별을 논하고 있다.

<지성개선론>은 본래, 당시 이미 상당히 구상이 진전되어 있던 <에티카>의 기하학적 질서 전체, 그리고 그 출발점이 되는 정의(定義)의 필연성을 기초로 잡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었으므로 후에 연역적(演繹的) 체계에서의 정의의 의미와 규정 방법의 구체적 설명으로 진전되는 것이나, 개물(個物)과 전체라는 까다로운 문제에 봉착하여 의론이 혼란해져서 미완성인 채로 중단된 것이다.

비코[편집]

Giambattista Vico (1668-1744)

이탈리아의 철학자. 역사철학의 기초를 닦았다.

별명을 조반니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라고 한다. 나폴리에서 출생, 철학 외에 법률·역사·언어학을 배우고 나폴리 대학에서 수사학(修辭學)의 교수가 되었고, 후에 나폴리 왕실의 사료편찬관(史料編纂官)이 되었다.

당시의 데카르트 주의자가 한결같이 자연의 세계만을 주목하는 데 반대하여 인간이 만든 역사의 세계, 즉 여러 국민의 세계가 '신과학(新科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신화(神話)나 고대인의 언어 등 비교 연구에 의해서 인류의 공통된 본성(本性)을 파악하며, 이 공통의 본성에 따른 여러 국민의 발전에 대한 공통의 리듬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리듬은 야만적인 가장제도(家長制度)·귀족제도·민중제도·군주제도라는 행정(行程)이며, 또한 그 반복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역사에는 흥륭(興隆)·성숙(成熟)·몰락(沒落)·재귀(再歸)라는 반복이 있으며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규칙성이 있다고 한 점에서 역사주의(歷史主義)라는 사고(思考)의 선구자가 되었다.

주요 저서로 <신과학(新科學)의 원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