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근세의 사상/칸트 철학과 독일 관념론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개설[편집]

칸트 이전의 유럽 대륙의 철학은 인간의 '생각하는 힘'을 만능인 것처럼 간주하여 때로는 공전했다. 한편 영국 철학은 감각적 인상이나 경험을 중시하고 때로는 자연과학적 진리를 의심했다. 칸트는 그 양자를 총합했다. 즉 우리들의 감각 기관(感性)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인상을 생각하는 힘(悟性·理性)이 정리하는 데에 자연의 세계나 그 진리가 성립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면에서 도덕에 산다. 도덕적 의무의 명령은 인간을 이 세상의 인간관계와는 다른, 자유로운 높은 경지로 인도하는 것이다. 도덕에 사는 인간은 거기에 또한 신(神)이나 영혼의 불사를 확신하게 된다. 이리하여 칸트는 이론이성(理論理性, 자연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생각하는 힘)에 대한 실천이성(實踐理性:도덕법칙을 인간에게 명령하는 힘)의 우위를 주장했다. 또 칸트는 엄격하게 구분된 자연과 도덕과의 결합·관련을 생각했다. '실천이성의 우위'를 철저히 한 사람이 칸트를 이은 피히테였다. 그는 말한다. "실천이성(自我)은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연(非我)이라는 장해자(障害者)를 만들고 그것을 극복해 간다"고. 그래서 피히테는 이 자아의 본질을 정신(가이스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셸링은 정신과 자연을 분리하거나 투쟁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근저에 동일자(同一者)를 본 것이다. 이상과 같은 흐름을 통일하여 완성한 것이 헤겔이다. 그는 모든 것의 바탕에 절대적인 정신을 두었다. 이것은 셸링적 동일자와 같은 정적(靜的)인 포괄자는 아니다. 절대 정신은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고 발전해 간다. 자연도 역사도 이른바 정신도 이 절대인 정신이 운동·발전해 가는 단계적인 상(相)에 불과한 것이다. 이리하여 칸트를 잇는 독일 철학(독일 고전 철학)은 헤겔의 절대정신의 현상(現象) 철학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움직이는 근저는 이런 관념적인 정신일까, 헤겔이 사망한 후에 등장하는 유물론자들은 이 점에서 헤겔을 비판했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세계를 운동·변화·발전으로써 파악하는 헤겔의 견해(辨證法)에 영향받아 그것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들은 비판한다. 헤겔은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다. 세계나 인간의 역사를 창조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정신이나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며, 물건의 생산이며, 생산을 위한 인간 관계이다 ― 라고. 또 뒤의 실존주의는 일반적인 이성이나 정신의 주장 속에서 개인이 무시되는 데에 반발한다. 어쨌든 인간이 소외(疏外)된 현대 속에서 오늘날의 사상은 독일 관념론을 여러 각도에서 평가·비판하는 데에 성황을 이루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편집]

Immanuel Kant (1724-1804)

18세기의 독일 철학자.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한 사람.

동(東)프로이센의 발트해를 바라보는 한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에서 1724년의 봄, 아홉 자녀를 둔 가난한 피혁 기구상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때는 이미 서유럽에서는 근대화가 전개되어 가는 희망에 찬 시대였다. 그러나 동유럽 변두리인 이곳에는 전근대적인 관습이 아직도 뿌리를 깊이 박고 있었다. 다만 이 지방의 중심이며 해외 무역의 요지인 쾨니히스베르크는 서구 근대사회로 통하는 문호였다. 이 곳은 인간지(人間知)·세간지(世間知)를 널리 알리는 데에 적합한 일종의 세계시민적 도시였다. 칸트는 생애를 통해 사랑하는 이 거리를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는 Pietismus(敬虔主義)라고 불리는 그리스도교의 신교(루터파의 한 파)가 침투되어, 내면의 신실한 신앙이 존중되고 있었다. 열렬한 신자인 양친, 특히 모친이 칸트의 인품이나 사상 위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칸트는 감사와 경모(敬慕)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가끔 제자들에게 부모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집안이 가난하였던 칸트는 목사와 숙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을 졸업한다. 학자로서의 칸트는 먼저 라이프니츠, 뉴턴류(流)의 자연철학자로서 출발한다. 8년 남짓의 가정교사 생활을 마치고 쾨니히스베르크에 돌아온 그는 계속적으로 자연철학적 역작을 발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중에서도 젊은 칸트의 걸작이라고 하는 <천체의 일반적인 자연사와 이론>은 뉴턴의 원리를 기초로 해서 천체의 생성에 관하여 성운설(星雲說)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었다(1755, 31세). 그러나 칸트는 이와 같은 우주 발생의 근저에 창조자로서의 신의 의도를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연 연구와 신앙이 양립하여 조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국의 경험론자 흄은 칸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흄은 지금까지 조금도 의심받지 않았던 자연과학적인 지식이나 법칙이 실은 부동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경험을 중시하는 그는 자연과학의 기초인 인과율(因果關係)도 연상(連想)의 반복(習慣)에 기인한 주관적인 신념에 불과하다고 했다. 자연과학의 기초인 인과율마저 의심스럽다면 아무런 경험적인 것을 내포하지 않는 신이나 영혼의 불사나 자유를 문제삼는 학문(形而上學)이 부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칸트는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흄의 경고야말로 나의 독단적인 졸음을 깨웠다"고.

그러나 칸트는 흄과는 달리, 자연과학적 진리의 옳음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설령 형이상학의 가능성이 부정된다고 해도 신·불사(不死)·자유 등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칸트의 확신은 조금도 동요하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자연과학적인 진리(습관적인 독단이 아니라 객관적인 부동의 진리)가 어떤 이유, 어떤 근거에 의하여 성립하는지를 음미·검토해 보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서 종래의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이에 의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이 가능한가의 여부를 알아보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학(學)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능력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비판의 문제로 향하게 되었다.

이를 전후하여 칸트는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루소에 의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되었다. 칸트는 학자만이 인간으로서 훌륭하다고 자만하고 무지한 민중을 경멸했었다. 그런데 루소의 글을 읽고 나서 이 자만이 근본부터 무너져버렸다. 칸트는 모든 인간을 존경하는 것을 배웠다. 모든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따위의 인간은 어떤 인간보다도 열등하고 수치스러운 인간임을 깨달았다.

이윽고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된 칸트는 인간의 능력을 비판하는 비판철학, 인간을 문제삼는 인간의 철학으로 지향해 갔다. 그리하여 형극(荊棘)의 사색 10여 년 후인 1781년(57세) 획기적인 <순수이성비판>을 완성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인상을, 생각하는 힘인 오성(悟性)이나 이성이 정리하고 종합하는 데에 자연의 세계적 인식이 성립함을 분명하게 했다. 칸트는 이와 같은 조작(操作)을 실험적 방법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외부의 것에 우리들의 인식이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들의 조작에 의하여 자연의 대상이 인식되는 것이다(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다만 외부에서 주어지는 감각적 소재를 빠뜨린다면 사고는 공허 가운데 놓여 사물을 만들어 낼 방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종래 형이상학은 생각하는 힘을 공전시켜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신이나 불사를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다. 거기에 종래 형이상학의 독단이 있으며 오류가 있었다. 우리들은 형이상학적인 것을, 자연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으로(이론적으로) 문제삼을 수는 없다. 신이나 불사나 자유가 문제되는 것은 자연과학 세계에서가 아닌 도덕적 실천에서인 것이다. 칸트는 이리하여 이론적으로 작용하는 이성을 비판하고 제한함으로써 반대로 도덕이나 종교의 세계를 지키고 보증하려 한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의 완성에 이은 10년간은 칸트 철학의 결실이 가장 많은 기간이었다. <프롤레고메나>(형이상학서설)(1783), <세계시민적 견지에서의 일반사고(一般史考)>(1784),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 <도덕형이상학원론>(1785),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과 같은 눈부신 역작이 계속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그것은 도덕에 사는 인간의 상(相)을 분명히 해 가는 것이었다. 다른 면에서 말한다면 도덕적 실천의 입장에 섬으로써 새로운 형이상학을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나의 내면의 도덕법칙(의무의 소리)은 이 세상의 행복 여하에 관계없이 단호히 해야 할 의무를 명령한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도덕적 의무의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알고 세속적인 것에 사로잡히지 않는 참된 자기의 자유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일면에 있어서 유한한 이상 순수한 선인(善人)인 것은 인간의 영원한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야 하는 이상, 사람은 거기에서 불사를 확신하게 된다. 또 도덕적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스스로의 원리로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덕(德)에 알맞은 행복이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소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덕과 행복의 일치를 보증하는 것은 만능의 신 이외에는 없다. 유한한 도덕적 인간은 여기서 신을 추구하는 일을 허락받은 것이다. 칸트 철학은 이리하여 도덕철학 내지 형이상학으로 높여져 통일되어 가는 것이다.

칸트는 이미 70세 가까운 노령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도덕적·이성적인 입장에서 그리스도교를 이론화하려 했다(<단순한 이성의 한계내의 종교>1793). 그러나 그것은 광신적·보수적인 정부 당국의 비위를 건드려 이후 칸트는 종교에 관한 강의나 저작을 금지당하고 말았다. 그의 조용한 학구적 생애에서는 권력과의 사이에 일어난 단 한번의 트러블이었다. 칸트는 또 국가간의 연합을 기본으로 한 평화론을 제안했다(<영구평화를 위하여> 1795). 또 구체적인 도덕이나 법까지도 논했다(<도덕형이상학> 1797).

또한 칸트는 "인간을 알라!"고 가르쳤다. 산책시간마저도 시계처럼 정확했다고 할 만큼의 규칙 바른 일상생활, 평생 동안의 독신생활,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엄격하여 가까이하기 어려운 철인(哲人) 칸트를 연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20여 년간이나 '인간학'을 강의하고, 이런저런 실패를 저지르는 인간상을 재미있고 우습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자신 사교를 즐겼다. 그가 식탁에 많은 사람을 초대한 일은 유명하다. 귀족·기사·귀부인 등과도 교제했다. 그리하여 인간지·세간지를 깊게 하려 했다. 칸트 철학은 비판철학임과 동시에 인간의 철학이었다. 그리하여 그러한 인간지의 총괄이 <실용적 견지에서의 인간학>(1798)이었다. 더욱더 노경(老境)에 접어들면서 칸트의 육체도 쇠하여져 갔다. 칸트는 체계의 완성을 이룩할 수 없는 노쇠에 학자로서 책임을 느껴 고민했다. 그에게는 노쇠마저도 죄로 느껴졌던 것이다. 1804년 2월 12일, 대철인의 정신을 80년에 걸쳐 지탱해 온 육체는 끝내 운전을 정지했다. "이것으로 부족하다!" 이것이 최후의 말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칸트의 무덤에는 <실천이성비판>의 끝맺음인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졌다. "점점 더욱 많아지는 감탄과 숭배의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우리 위에 있는 하늘의 별들과 우리 내면의 도덕 법칙."

생각하면 칸트의 묘비명으로서 이만큼 어울리는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칸트 이전의 철학은 칸트에게로 흘러들어가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칸트로부터 흘러나갔다고 할 만큼의 칸트였다. 그러나 칸트도 시간·장소 위에서 살고 생각하고 구상했다. 또 전근대적인 것이 감도는 속에서 칸트는 자유나 인간 존중의 철학을 강조했다. 거기에 계몽사상가로서 칸트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뒤떨어진 상황 속에서는 자유의 주장은 서유럽과 달라서 내면적 자유의 강조라는 방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칸트는 낙후된 독일의 근대화를 계몽 군주로서 존경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위로부터의 계몽에 기대했던 것이다.

주저로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단순한 이성의 한계내의 종교> <영구평화를 위하여> <실용적 견지에서의 인간학>(어느 것이나 후술 참조)이 있다.

순수이성비판[편집]

純粹理性批判(1781)

칸트의 주저. '제1비판'이라고도 통칭한다.

청년 칸트는 뉴턴류(流)의 기계적 자연관을 기조로 우주나 자연을 연구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길러 온 경건한 신앙 속에서 사는 칸트는 우주의 배경에서 창조자의 의도를 본다. 이러한 형태로 그에게 있어서는 과학과 신앙이 조화되어 있었다. 과학과 신앙(및 신앙을 기초로 한 형이상학)이란 양립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영국의 경험론자 흄은 칸트의 독단적인 꿈을 깨웠다. 흄은 자연과학의 기본인 인과율(因果律)마저 의심스럽다고 했다. 칸트는 자연과학적 진리의 옳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과학적 진리는 점점 그 옳음을 증명했다. 또 칸트는 경건한 신앙을 동요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땅히 신앙을 뒷받침해야 할 종래의 형이상학은 점점 권위와 신용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신앙이 과학에 의하여 위협을 받는 것은 칸트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칸트는 종래의 형이상학의 독단적인 방법으로 시점(視點)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신앙을 지켜주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하면서 종래의 형이상학에 엄격한 비판의 눈을 돌렸다.

먼저 그는 학문을 만들어 내는 데 대한 인간의 능력을 검토해 보려고 했다. 그 때문에 의심의 여지 없는 학문이며 학문의 모범인 자연과학(수학·물리학)의 진리가 어떻게 하여 성립하느냐를 문제로 삼았다.

과학적 진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감각적인 자극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혼돈된 자극을 "지금·여기에 있다"는 식으로, 정리된 어떤 지각으로 하는 것은 우리들의 감성이 시간적·공간적으로 정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명확한 지(인식)로 삼기 위해서는 또한 생각하는 힘으로서의 오성이 필요하다. 오성은 스스로의 형(카테고리)에 따라서 사고하고 통일하고, 그것으로써 명확한 지(知)를 만들어 간다.

이리하여 우리들에게 있어서 명확한 대상, 확실한 지(認識)는 감각적 직관과 사고, 그리고 감성과 오성 등의 협동에 의하여 성립된다. 더욱 인식된 지(知)를 보다 소수의 원리로 정리해 가는 것이 이성이다. 그리고 이들 여러 능력은 근원적 나(自我)에 의하여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근원적 자아의 활동 내지 조직(실험적 방법)에 의해 자연이 인식되었다. 비로소 밖에 존재하는 것에 우리의 인식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아의 작용에 의해 대상이 인식된다는 것이 판명되었다(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그러나 밖에서 주어지는 감각적 소재가 없이는 자아는 공허하다.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론적인 능력으로서의 오성 내지는 이성의 권한에 대한 명확화는 반대로 이 능력의 행동범위를 규정짓는 것이다. 그런데 종래의 형이상학은 바로 월권을 하고 있다. 생각하는 힘을 공전시켜 감각적인 경험이 주어지지 않는 신이나 불사(不死)나 자유를 자연대상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듯이 생각했다. 거기에 종래의 형이상학의 독단적인 횡포가 있고 과오가 있었다. 그러나 이론이성(悟性·理性)의 행동방식 내지 행동범위의 설정은 이론이성에 의한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암시할 것이다. 도덕이나 종교의 세계, 즉 형이상적인 세계가 불가능하지 않음을 전망하도록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성이 이론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이 세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새로운 형이상학에의 시야가 펼쳐질 것이다.

칸트는 말한다. "나는 신앙에 자리를 주기 위해 지식을 버려야만 했다"고. <순수이성비판>은 한편에 있어서는 이론이성의 월권을 방지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도덕이나 종교의 시민적 활동을 지키는 경찰이었던 것이다. 이 경찰 지위를 분명히 한 것이 바로 이 위대한 저서의 출발점이며 도달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저서가 준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뒤 독일 관념론이 전개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칸트에게 돌아가라"는 신칸트 학파가 나타나 자연과학의 근거나 한계를 문제삼았다. 오늘날까지 이 저서는 철학의 세계에서 권위를 계속 유지해 왔다. 칸트를 비판하는 유물론에 있어서도 이 저서는 칸트 철학 가운데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높이 평가되어 왔다. 다만 이 저서는 당시의 과학이나 도덕적·종교적 환경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는 이 점이 자각되어야만 할 것이다.

실천이성비판[편집]

實踐理性批判(1788)

칸트의 대표적 저술 가운데 하나. '제2비판'이라고도 불린다.

이 저서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 <도덕형이상학원론>(1785)이다. 따라서 두 저서의 내용을 아울러 서술하기로 한다. 말할 나위도 없이 두 저서는 도덕의 세계를 정면에서 밝히려 한 것이다. 여기서 비판되는 것은 순수실천이성이 아니라 실천이성이다. 유한한 인간은 이 세상의 행복을 얻으려는 욕심의 지배를 받아 이를 실천의 원리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한편, 내부에서 단호한 도덕적 명령(의무의 소리)을 받는다. 범인은 갈림길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실천이성비판>은 후자의 길(순수하게 도덕적 의무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선이며 전자(행복의 지배를 받는 것)가 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순수하게 도덕적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오직 의무를, 누구나가 지켜야만 할 의무이기 때문에 이행한다는 태도(형식적 태도)를 의미한다. "그대는 그대가 하려는 바가 또한 누구나가 이행해야만 할 의무인가를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라!" 이것이 내부로부터의 무조건 절대 명령의 골자(최고원리)이며 의지의 선, 악의 척도이다. 따라서 선·악은 처음에 있어서 원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인 것이다.

선의지(善意志)는 인간에게 좋은 여러 성질이나 재능이나 행복마저 초월하여 홀로 찬란히 빛난다. 의지가 선일 수 있는 까닭은, 의지가 지향한 목적이라든지 결과 여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태도 내지 형식에 있는 것이다.

무조건 절대인 내부로부터의 명령은 사실 참다운 자기가 유한한, 비열한 자기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사람은 거기에 참된 자기의 자유에 바탕을 둔 자율(自律)을 자각한다. 인간은 한편으로 유한한 존재로서 이 세상의 인과에 지배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이 입장을 초월하여 초인과 자유로운 세계에 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성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인격이라고 불리며 단순한 물(物)과 구별된다. 그래서 칸트는 앞서 말한 형식적 근본원리를 이렇게 바꿔 말한다.

"자(自)·타(他)의 인간성을 단순한 도구처럼 다루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다루며 인간다운 존경을 해야만 한다"고. 자·타의 의도, 자·타의 인격을 서로가 시인하고 서로 존중할 수 있는 사회를 칸트는 '목적의 나라'라고 불렀다.

단호한 의무의 명령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自愛的 人間)에게 있어서는 체면을 손상당한 불쾌감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면에서 말한다면 자기의 진실을 우러러 보는 기쁨이기도 하다. 도덕법칙 내지 진실한 자기는 이제 존경의 정념으로서 남들이 우러러본다.

번뇌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순수한 도덕적 경지는 영원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래야만 하는 이상 인간은 거기에서 불사(不死)를 확신한다. 또한 인간은 행복 추구를 원리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덕에 적합한 행복이 주어지기를 원한다. 덕·행복의 일치는 마땅히, 또한 허락될 수 있는 소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일치는 만능의 신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사람은 여기서 신에게 애원하는 것이 허락된다. 자유·불사·신이라는 형이상적 개념은 이제 도덕을 통해서 의의를 지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거듭되면 될수록, 또한 길면 길수록 더욱 새롭고 강한 감탄과 숭앙의 정념으로써 마음을 충만케 하는 것이 둘 있다. 우리의 위에 있는 하늘의 별과 우리 내면의 도덕법칙" 이것이 <실천이성비판>을 맺는 말이다.

형식을 제1의로 하고 행복을 낮은 것으로 생각하는 칸트의 형식주의 내지 엄숙주의는 여러가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숭고한 인격주의는 강한 영향을 주었다. '목적의 나라'는 자유로운 자율자(自律者)의 공동태(共同態)로서, 말하자면 당시 서민사회의 이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신칸트 학파의 코헨은 칸트를 '독일 사회주의의 참된 시조'라고까지 불렀다. 대체로 오늘날 윤리학에서 <도덕형이상학원론>으로부터 <실천이성비판>에 이르는 사상이 문제되지 않는 곳은 없을 것이다.

판단력비판[편집]

判斷力批判 (1790)

칸트의 대표적 저술 가운데 하나. '제3비판'이라고도 한다.

이론이성에 의한 자연과 실천이성이 관계되는 도덕은 전혀 별종의 것이었다. 그러나 두 세계는 관계가 없지도 않다. 도덕은 자연 속에서 실현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인과율에 의한 자연이 도덕의 목적을 가능케 하고 도덕에 적합하며 도덕과 조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과연 자연은 도덕과 조화하여 도덕의 목적을 실현하게 되어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할 수 있다면 결국 낡은 형이상학의 독단적인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도덕의 목적에 맞는 것처럼 여겨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는 있다(그러한 힘을 칸트는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모습이 미(美)나 숭고(崇高)라고 불리는 것이며 유기체이다. 즉 미는 아무런 욕망적 관심 없이 사람에게 똑같이 미적 쾌감을 환기시키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도덕의 상징이며 도덕을 촉진시킬 것이다. 또한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높은 산이나 노도가 소용돌이치는 망망한 바다 등, 숭고한 모습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력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사람은 이 자연을 지탱하고 초극하는 우리의 이성이나 인격과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숭고는 이성의 활동(道德)에 적합해져 간다. 또한 유기체를 보면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듯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일부인 유기체가 목적을 지닌 듯이 생각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 전체가 어떤 목적에 의해 통일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이 목적이 문화라고 했다. 문화란 궁극의 목적인 도덕을 위해 인간을 도야하고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저서에 의해 자연 속에서 도덕이 실현될 수 있다는 보증이 과연 주어졌느냐 하는 점은 의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도덕이나 인과적 자연과는 다른 미나 숭고나 유기체의 세계가 있음은 사실일 것이다. 또한 자연은 인간을 도야한다. 그러한 면에 착안했다는 점이 바로 이 저서가 지니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도덕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본 칸트는, 모든 것을 도덕의 입장에서 규정지으려 했으며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단순한 이성의 한계내의 종교[편집]

單純-理性-限界內-宗敎 (1793)

칸트의 이 저서는 도덕 내지 이성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비판하고 순화하여 그것을 참된 도덕적 이성종교로 접근시키려 했다.

이성자(理性者)이긴 하나 유한한 인간은 도덕적 의무에 따라야 한다고 의식하면서도 일을 전도(顚倒)시켜서 자애(自愛)나 행복 추구로 기울어진다. 의지의 나약함이나 불순으로 말미암아, 혹은 의식적으로. 거기에 타락의 죄가 있다. 인간은 감히 이 전도를 하려는 근본악(根本惡)의 성벽을 지니는 법이다.

우리에게는 이 전도를 또다시 전도시킨다는 마음의 혁명이야말로 중요하다. 우리는 이 때문에 악을 극복하여 선의 승리를 가져오도록 싸워야만 한다. 따라서 지상에 성신의 나라(교회)를 건설해야만 한다. 현실의 교회, 또한 그곳에서의 신앙·기도·행사 등은 참다운 신앙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수단이 수단으로서 이용될 때 그곳에 참다운 봉사가 있다. 반대로 그러한 수단이 곧 신의 축복에의 길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허위의 봉사이다.

이상이 종교론의 대강이다. 계몽적 대군주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프랑스 혁명을 두려워하는 프로이센 정부는 반동화(反動化)하고 있었다. 현실의 기독교를 비판하고 개량하려 했던 칸트는 그 뜻과는 반대로 탄압을 받았으며, 이후 종교에 관한 강의나 저술을 금지당하고 말았다. 평생에 단 한번 있었던 권력과의 불행한 충돌이었다.

칸트의 이 종교론에는 내면의 경건한 신앙을 높이 받드는 Pietismus(경건주의)가 잘 나타나 있다. 다만 이성 내지 도덕으로써 종교를 이론화시키고 정당화하려던 종교론은 여러가지로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영구평화를 위하여[편집]

永久平和- (1795)

칸트의 저작. 그의 도덕론에 의하면 전쟁은 악이며 영구평화야말로 인류가 도달해야 할 의무였다. 전쟁이 인격의 품위를 파괴하고 자유를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서 영구평화는 영원한 과제였다. 그러나 현실을 통해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영구평화를 향해 무한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한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조건을 제안한 것이 이 저서이다.

영구평화의 실현을 방해하는 것을 제지시키는 예비조항. ① 장래의 전쟁을 위한 재료를 은밀히 보류한 채로 맺는 평화조약은 불가하다, ② 독립국이 타국에 영유(領有)되지 말 것, ③ 상비군의 점진적인 전폐, ④ 대외전쟁을 위한 국채(國債)의 불가, ⑤ 타국에의 정치적 간섭 금지, ⑥ 전쟁중 어떠한 국가도 암살자의 사용 등 신뢰를 배신하는 비열수단을 취하지 않을 것.

영구평화를 위한 적극적 조건인 확정조항. ① 각 국가가 민주적으로 될 것, ② 자유로운 여러 국가의 연맹, ③ 각 국민 상호간의 방문 보증.

이 평화론의 제1차대전 후의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의 이론을 이미 18세기에 제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평화가 간절히 요청되는 오늘날 칸트의 이 평화론은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실용적 견지에서의 인간학[편집]

實用的見地-人間學 (1798)칸트는 다른 철학 강의와 함께 정규 강의로서 인간지(人間知)·생활지(生活知)에 관한 '인간학' 강의를 30여 년이나 계속했다. 그것은 이 세상의 행복을 얻기 위해 영리해져야겠다는(실용적) 인간의 심리적이며 인성적(人性的)인 모습을, 특히 실용적이기 때문에 범하는 온갖 실패를 흥미있게 들려 주는 것이었다. 사교에 능숙하고 인간지·생활지에 풍부했던 칸트는 이 강의를 할 때면 언제나 학생을 웃기는 선생이었다. 준엄한 비판철학자는 또한 인간미가 풍부한 인간의 철학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강의를 정리한 것이 이 책으로서, 칸트의 손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저서이기도 하다.

빈틈없이 영리해지려는 실용적 인간의 모습,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실패나 잘못을 되풀이하는 모습은 오히려 있어야만 할 진실을 암시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인생살이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진실한 모습을 보다 명확히 하려고 했던 것이다.

칸트는 인간 이성의 관심으로서 ① 나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知識), ②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道德), ③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宗敎), ④ 인간이란 무엇인가(人間學)를 들고 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에는 지식·도덕·종교에 관한 세 가지 과제를 정리하는 것이 인간학일 것이라고도 말한다. <인간학>이란 저서는 그러한 인간학을 꾀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칸트 철학은 방법상으로 비판철학이었다고 한다면 내용상으로는 인간의 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칸트 철학을 둘러싼 사람들[편집]

Kant 哲學-

종래의 독단론과 경험론을 총합한 칸트, 외부에서 주어지는 감각적 소재를 자아(自我)가 사고적(思考的)으로 조작함으로써 자연의 세계나 인식이 성립된다고 하는 칸트, 도덕과 자연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전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은 칸트, 그러한 칸트를 주축으로 하여 당시의 독일사상계는 회전하고 있었다.

라인홀트(1758-1823)나 베크(1761-1840) 등은 칸트 철학의 소개 및 확립에 노력했으며, 흄(Hume)적 경험론의 입장에서, 또는 진리의 기준을 신앙에 두는 신앙철학의 입장에서 슐체(1761-1833), 허만(1730-88), 가르베(1742-98), 멘델스존(1729-86), 마이몬드(1753-1800), 야코비(1743-1819) 등은 칸트 철학에 의문이나 비판을 가하며 반대했다. 비판의 초점은 인식론, 특히 '물(物) 자체'(외부로부터의 감각적 자극의 근원으로서 칸트가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인식되지는 않는다고 했던 것)였다.

그러나 칸트를 둘러싼 사람 가운데 특히 주목해야 할 철학자는 헤르더와 피히테일 것이다. 헤르더는 직접 칸트의 강의를 들었으나 훗날 반(反)이성주의의 입장에서 칸트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피히테는 직접 칸트를 찾아가 학술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훗날 칸트의 '실천이성의 우위'라는 입장을 깊이 추구한 사람이었다.

헤르더[편집]

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

18세기 독일의 '슈투름 운트 드랑(Strum und Drang)'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이며 신학자·문예비평가.

동프로이센의 소도시 몰겐에서 초급교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의학과 신학을 배운 뒤 철학자 칸트의 강의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목사를 천직으로 삼았으나 항상 성직자라는 것과 자기의 사상 및 문필 활동 사이의 모순에 고민했다.

1767년 유럽 편력에 나섰을 무렵의 여행 일기는 '슈투름 운트 드랑'의 심정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유명하다. 1776년 이후 바이마르에서 살았으며 괴테와 친교를 맺기도 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스승인 칸트의 철학을 격렬하게 비판하여 칸트 철학의 추상성·관념성을 스피노자 주의적 범신론 입장에서 공격했다. 그리고 그의 저작은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저술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인류사에 대한 철학의 구상>(다음 항목 참조), <인간성의 교화를 위한 서간>(1797), <민요집>(1778),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1772) 등이 있다.

인류사에 대한 철학의 구상[편집]

人類史-哲學-構想 (1784)헤르더의 주저로 전5부 25권의 대저(다만 제5부 20-25권 부분은 미완성의 구상만으로 끝났다). 제1부는 '자연'의 생성 발전사, 제2부는 '인류'의 형성에 끼친 환경 풍토의 영향을 자세히 논술하고 있다. 제3부와 제4부에서는 세계 여러 민족의 사적 전개가 논술된다. 그의 이 <구상>은 자연철학에 기초를 둔 역사의 백과전서 같은 것이며, 프랑스 계몽사상 역사관의 대규모적 철학적 체계화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닌다.

헤르더는 우선 '자연'을 '오직 하나의 지혜와 선과 힘'이 지배하도록 신이 정리한 생명체로 구명했다. 즉 '위대한 우주의 건물에서 아주 작은 먼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성(遊星)과 항성(恒星)을 지탱하는 힘에서 거미 보금자리의 거미줄까지'의 모든 것에 하나의 '유기적인 힘'이 작용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법칙'이라고 부른다.

법칙을 안다는 것은 '가장 보잘것 없는 것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창조주의 계획과의 명백한 연관을 발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있는 것은 범신론적 목적론의 사상이다.

그는 이런 견지에서 인류사를 자연사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인류사의 목적을 계몽에 의한 '인간성'의 완성에 두었다. 이 책의 두 번째 특색은 여러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다양성을 환경과 연관지은 그 민족의 개성으로서 평가했다는 점이며, 이로써 19세기 독일 역사주의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독일 관념론[편집]

獨逸觀念論

칸트로부터 피히테, 셸링을 거쳐 헤겔에 이르는 독일 철학.

당시의 독일은 통일국가란 이름뿐이며, 프랑스나 영국에 비하여 근대화가 현저하게 뒤떨어져 있었다. 거기에 결정적인 충격을 준 것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침략이었다. 봉건제와 정면으로 싸울 힘이 없었던 독일 지식인은 여기서 다시 근대화와 민족독립을 모순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했었다.

이처럼 거의 빠져나갈 길이 없는 역사적 상황 아래 독일에서는 선진국이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실현했던 것을 정신적·논리적으로 실현하여 '독일 관념론'이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독일 관념론의 주요한 주제는 정신(思惟)의 자립성 문제, 의식의 능동적 활동성 문제였다. 칸트는 사유(思惟)의 여러 형식만을 주관에 돌리고 그 내용은 주어지는 것으로 하여 형식과 내용, 사유와 존재의 2원론을 방치했던 것이다. 현실을 진리로 높인다는 사업에 정신이 적극적으로 참가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자립성이 수립되어야만 한다. 이 2원론의 극복은 우선 "자아가 비아(非我)를 정립(定立)한다"는 주관주의(피히테), 이어 그와는 반대로 객관 속에 자아와 똑같은 정신적 능동성을 발견하여 사유와 존재, 주관과 객관을 일체적인 관계에 두고 고찰하려는 방향(주로 셸링)에서 추구되고, 마지막으로 이 일체적인 관계가 "실체는 동시에 주체이다"라는 견지에서 정신이 자기 부정을 매개하여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으로서 '변증법'의 자각적인 전개에 의하여(헤겔)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이 독일 관념론의 전개는 차례로 '주관적' '객관적' '절대적'이라고 불리기도 하나, 그중에서도 '근대화'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헤겔의 추구와 구성에 있어서 세계사의 동향이 가장 잘 반영되었으며, 이리하여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독일도 철학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피히테[편집]

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7년전쟁이 끝날 무렵이며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나온 해, 작센의 가난한 마을 람메나우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예나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칸트를 방문할 때 증정한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1792)로 칸트의 인정을 받았으나 그 논문이 서명 없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대망하고 있던 칸트의 종교론으로 간주되어 명성을 얻었다. 동시에 피히테는 1793년에 익명으로 나온 두 저서 <유럽의 여러 군주로부터 사상의 자유에 대한 반환을 요구한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공중(公衆)의 판단을 시정한다>로 루소와 칸트 학설의 실천적 실현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을 감연히 옹호하는 가장 전위적 독일 관념론 철학자로 등장하여 얼마 후 예나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1794). 그는 칸트의 관념론을 더욱 철저히 하여 그것을 체계화하려 했으며, 근본원리로서 '사행(事行)'으로서의 자아의 개념을 정립시켜 칸트의 한계를 넘어 독자적인 <전 지식학의 기초>(1794)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행동! 행동!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목적이다"라고 하여 사유와 행동의 일체화를 추구하는 그의 현저한 특질은 지식학을 몇 번이나 다시 쓰고, 학자의 사명에 관하여 몇 번이나 열렬한 공개강연을 시도한 점에서 잘 나타났다. 뒤떨어진 독일의 현상(現狀)에 타협하지 않고 철저하게 현실을 비판했던 그는 마침내 보수파의 공격 목표가 되었으며(무신론 논쟁), 그 때문에 예나 대학을 떠나야만 했다.

프리드리히 슐레겔(1772-1829)의 호의로 그는 베를린에 이주하여 처음에는 낭만파 사람들과 친교를 맺었으나 <인간의 사명>(1799)을 쓴 뒤부터는 이들과도 차차 멀어졌다. 한편 그의 지식학을 단순한 추상적 논리학이라고 하는 비판이 나와 칸트와 대립, 또한 셸링과 헤겔로부터도 공허한 주관주의라는 비판을 받아 자신의 체계에 대한 독자성을 명확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 <봉쇄상업국가론(封鎖商業國家論)>(1800)을 저술하여 '현대의 특징' '학자의 본질' 등의 논제로써 강연을 자주 가졌다.

1805년에 에얼랑엔 대학의 초빙을 받았으나 보불전쟁이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프랑스군 점령을 피하여 각지를 전전했다. 이 무렵 적국 점령하의 베를린에서 독일의 재건을 호소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속 강연은 유명하여 지금도 많이 읽히고 있다.

그 후 베를린 대학의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총장이 되었으나(1811) 해방전쟁 중 종군을 지원, 티푸스에 감염되어 52년간의 극적인 생애를 마쳤다.

대표적 주저에 <전 지식학의 기초> <인간의 사명> <독일 국민에게 고함> 등이 있다.

전 지식학의 기초[편집]

全知識學-基礎 (1794)

피히테는 칸트 철학을 독단론이라고 하는 비난을 막기 위해 칸트가 뜻한 바를 철저히 하고 칸트가 닦은 기초를 체계화하려 했으며, 그것은 최초로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전개한 것이며 동시에 칸트가 남긴 문제의 정통적 계승자로서 철학사상(史上)에서의 위치를 확립시키는 셈이 되었다.

피히테가 그것을 '지식학'이라 부른 것은 "어떻게 해서 지식이 성립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한다는 의도였기 때문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각각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학문의 가장 기초가 되는 원칙, 더구나 여러 학문의 전부에 공통된 원칙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유할 때 반드시 그와 동시에 자아를 사유하고 있으며, 더구나 사유하는 자아와 사유되는 자아로 나뉜다. 자기 의식은 그처럼 대립되는 자아의 일체적인 관계로서 그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사행(Tathandlung, 定立의 활동과 存在의 사실과의 同一)'이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첫째 원리는 "자아(自我)는 자아를 정립한다"는 것이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아가 자아 이외의 타자(他者)를 사유함으로써 "자아에 대해 비아(非我)가 정립된다"고 하는 제2의 원리, 또한 두 가지 원리를 조정하기 위한 상호한정(相互限定)으로서 "자아는 자아에 있어서 가분적(可分的) 자아에 대해 가분적 비아를 반정립(反定立)한다"는 제3의 원리가 설정되어,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이론적 지식의 기초'와 '실천적 학문의 기초'가 탐구되고, 전자에서는 칸트의 카테고리가 조직적·동일적으로 고찰되고 후자에서는 실천적 자아가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동경으로서 그려진다.

인간의 사명[편집]

人間-使命 (1799)

1798년에 피히테는 <신의 세계 통치에 속한 우리 신앙의 기초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도덕적 세계질서가 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며 이 질서 자체가 신이고 우리는 그 외에 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한 포착할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칸트류(流)로 감성적(感性的)인 존재만을 현실 존재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실재성은 절대자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신의 실재를 부인한 것이 되어 이른바 무신론 논쟁이 일어났다.

베를린에 정주한 후에 이 논쟁을 반성·정리한 것이 이 저서이다. 본서를 저술함으로써 종교 문제에 한층 더 깊은 통찰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는 부인에게 써서 보냈다.

본서는 '회의(懷疑)' '지식' '신앙'의 3편으로 되어 있다. <인간의 사명>은 '인간의 본질'을 묻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인간의 실재론적 규정은 오성(悟性)을 만족시켜도 기필코 자유를 추구해 마지않는 우리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체계를 취하느냐 또는 자유의 체계를 취하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결정에 망설일 때 우리는 '회의'에 빠진다.

이 '회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 능력의 본성을 알고 외적 사물의 인식이 우리 자신의 표상능력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관념론적 입장을 끝까지 추구하게 되면 모든 실재를 부정하는 결과에 이른다.

관념론의 입장이 실재성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피히테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은 "양심이 우리에게 도덕적 의무를 명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의무의 객체(客體) 내지 영역이 실재적인 세계가 된다.

그러나 양심의 명령에 오직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사명으로서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지상세계의 목적 달성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계 없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의지가 지배하는 초지상적(超地上的) 세계에 소용되는 것이며, 그것은 도덕법칙에 의하여 요청되는 것이고 그 실재성이 확신되고 신앙되어야 한다. 이 '신앙'으로써 진정 인간의 사명은 다해진다고 하였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편집]

(1808)

보불전쟁(普佛戰爭)은 굴욕적인 틸지트의 강화로 끝났다. 종군을 원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았고, 적의 치하에 있는 것을 불결하게 생각해 아직 점령되지 않은 각지로 전전하였던 피히테는 강화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베를린으로 돌아와, 최악의 불행한 상태에서 조금씩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고 하는 기운이 고조되어 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1807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매주 일요일의 저녁 때 프러시아 학사원의 대강당에서 연속 강연을 하여 독일인의 애국심을 환기시켰는데, 그 강연 내용이 바로 이 저서이다. 프랑스군의 엄격한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사실 출판업자인 파름은 피히테에게 공감하여 반불적(反佛的) 서적을 펴냈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하였다.

그의 열렬한 애국심은 후에 파시즘에 (발췌적으로) 이용되기도 하는 쇼비니슴적인 면이 없지도 않지만, 그가 호소하려던 근본적인 것은 그 자신의 역사철학에 입각한 인간적 자유의 실현이었다.

그는 현실을 이기심만이 현저하게 발달한 '완성된 죄의 상태'의 시대라 하였고, 그것을 '이성 학문의 상태'로 높여야 할 시기에 도달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 국민 전체의 자각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교육이 불가결하다. 그 교육이란 참다운 인간적 자유를 자각시키는 페스탈로치의 신교육이다. 인간의 완전성이라는 자질에서 독일인은 가장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독일인이 망한다면 전 인류도 희망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청년을 교육시킴으로써 독일을 구하고, 그것을 근본으로 하여 전 인류의 도덕적 개혁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절규하였다.

셸링[편집]

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 (1775-1854)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뷔르템베르크의 레온부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고전어를 익혔다. 15세로 튀빙겐 신학교에 진학하였고, 헤겔·횔덜린과 친교를 맺었으며, 플라톤과 라이프니츠·스피노자를 애독, 드디어 칸트와 헤르더를 읽음으로써 철학으로 향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피히테의 '지식학'에 기울어져 피히테가 편집한 <철학잡지>에 기고하는 한편,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전기자기(電氣磁器) 등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여 <자연철학논고>(1797)를 썼다.

1798년 예나 대학의 조교수가 되어, 이윽고 <선험적(先驗的) 관념론의 체계>(1800)를 써서 피히테와의 입장 차이를 뚜렷이 했다. 그는 피히테가 자아의 본질로 보았던 창조적 활동성을 자연에도 인정할 수 있다고 하여 자연철학을 독립된 근본학(根本學)으로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험철학(先驗哲學)에 우선한다고 하였으며(객관적 관념론), 특히 <나의 철학체계 서술>(1801)에서는 절대자를 살아 있는 자연임과 동시에 이성이며,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과의 '무차별'이라 정의하여 헤겔과 같이 이른바 동일철학(同一哲學)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헤겔과 갈라져 절대자에서 어떻게 하여 현실의 다양성이 생기는가에 대해서 신플라톤 주의의 관점에서 논하여 <브루노> <철학체계 서술 속편>(1802), 또한 <철학과 종교>(1804), <인간적 자유의 본질>(1809)을 저술하였고, 그 동안 뷔르츠부르크, 뮌헨, 에얼랑엔의 각 대학을 거쳐 베를린 대학에 초빙되었다. 베를린에 와서부터는 신의 생성 문제로 향하여 직접 맞서서, 후의 비합리주의 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주요 저서로는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1800), <브루노>(1802) 등이 있다.

인간적 자유의 본질[편집]

人間的自由-本質(1809)

셸링이 동일철학에서 만년의 적극철학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저술한 책이다.

동일철학에서는 정신과 자연과의 '무차별'이 논의되고, 자연에 있어서 다양성은 스피노자식으로 절대자의 양태(樣態)라 하였으나, 이 범신론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여 절대자에서 유한자(有限者)가 생기는가를 밝힐 수 없었다. 유한자가 절대자에서 이탈하는 것을 절대자인 신이 허락하는 것은 우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는 개물(個物)의 불완전과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사실과 신에 있어서의 내재(內在)를 어떻게 결부해야 하는가를 반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제를 추구한 것이 본서이다.

그는 범신론의 입장을 버리지 않고 이를 해명하려고 하여, 신에 있어서의 내재와 절대자에 대한 의존이라는 것과, 만물이 그 자신에 있어서 자유라는 것과는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자유인 한에서 만물은 신에 내재한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신에의 내재란 신에 근거와 귀결을 갖는 것으로, 그 창조에 있어서 절대자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신을 닮은 모습으로 선악을 선택하는 자유스러운 존재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신에게는 있을 수 없는 악을 인간은 어떻게 하여 선택하게 되는가. 그는 무한자와 유한자의 양자가 생기는 '무차별'의 근저를 '무저(無底)'라 불렀는데 거기에서 이미 보편의지와 개별의지가 작용하고, 신에게 있어서는 양자가 통일되어 있지만, 유한자에 있어서는 분열되어 있어 전자가 우세하면 선(善), 후자가 우세하면 악(惡)이 된다고 하였다.

인간은 자립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자로서 이 악의 짐을 져야 하지만 그 악은 '무저'에 있어서 가능성을 가진 '근본악(根本惡)'이며, 신이 자기를 계시하여 선을 실현할 때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것이다.

이 저서에 의하여 '악'의 문제가 비로소 정면에서 문제시되었으나 셸링의 사상적 변천에서 말하면 초기의 밝은 스피노자적 범신론은 거의 그림자를 감추고, 어둡고 신비적인 색채가 덮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악에 대한 문제 제기와 인간의 비합리적 파악은 생(生)의 철학과 실존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헤겔[편집]

Georg Wi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19세기 전반 독일의 최대 철학자.

뷔르템베르크의 수도인 슈투트가르트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공국(公國)의 재무관이었고 모친은 민회(民會) 역원(役員) 가문에서 출생했다. 이 집안은 경건하고 소박한 프로테스탄트적 가풍(家風)의 가정이었다.

그가 튀빙겐 대학 신학부에 입학한 이듬해(1789)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다. 그는 이 세계사적 대사건을 친구인 횔덜린·셸링과 더불어 광희(狂喜)로 맞았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감격은 혁명 프랑스의 공포정치와 나폴레옹의 독일 침입으로써도 쉽게 깨어져 버린 도취가 아니었다. 자유의 실현과 사회의 근대화를 역사적 필연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때를 기점으로 점차 굳어져서 결국 흔들리지 않았다.

따라서 대학 졸업 후 스위스의 베른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을 때 쓴 이른바 신학적인 여러 논문 때문에 청년 헤겔은 가끔 신학적이고 신비적이란 평을 받기는 했지만, 그 견해는 단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연구의 초점은 정치와 역사이며, 역사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이 막대한 점에 대한 확인이었다. 당시 그는 철학적 서적뿐만 아니라 그로티우스, 홉스, 흄, 로크, 마키아벨리, 루소 등 근대 정치·사회사상에도 접하여 정치적 소논문을 썼다. 1801년 그는 당시 철학의 중심지이며 낭만파의 메카였던 예나시(市)로 나와 <유성의 궤도에 대하여>란 논문을 써서 교수 자격을 얻고 예나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당초에 셸링과의 동일철학의 입장에 서서 피히테를 비판하여,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체계의 차이>를 내었으며, 또 셸링과 공동으로 <철학비판잡지>를 간행하기도 했으나 점점 셸링과 철학적 입장의 차이를 자각하게 되었다.

이 차이가 확실하게 나타나서 '절대적 관념론'의 관점을 세웠던 것은 최초의 주저(主著)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1807)이었다. 낭만주의적이고 범신론적인 셸링으로서는 절대자가 모든 현상의 근저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었으나(객관적 관념론), 겸하여서 역사적·발전적인 관점도 중시한 헤겔은 이러한 견해에 머물지 않고 다시 한번 그것을 피히테의 입장(주관적 관념론)과 결부시켜 보다 높은 관점에서 새로운 입장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철학적 과제를 '참다운 것을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이라 하고, 셸링의 견해를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밤중'이라 평하였다.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예나 대학이 폐쇄되어 한때 밤베르크에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고, 1808년에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이 되었다. 그곳에서 8년간 머무르는 사이에 그는 38세로 결혼했고 또 제2의 주저인 <대논리학>(제1권 1812, 제2권 1816)을 냈다. 이 저술로써 자기의 철학적 방법을 확립하여 철학체계를 완성할 개요를 얻었다. 그리고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엔치클로페디>(1817)를 저술함으로써 현안(懸案)인 체계를, 개요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일단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겨우 2년간의 재임 후 프로이센의 문부대신(文部大臣)인 슈타인의 초청에 따라 베를린 대학으로 전임하였다.

베를린에 있던 13년간은 이른바 헤겔의 황금시기였다. 그는 슈타인-하르덴베르크의 개혁적 정책에 많은 기대를 걸어, 일찍이 '이성적'이라 생각했던 자유의 실현이 이제 '현실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기고, 프로이센적 '현실'을 '이성적'이라고 해석하였다. 그가 격정적인 학생운동에 냉담했던 것은 자유를 단순하게 주관적인 심정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사회적·역사적으로 국가에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철학적 태도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시점에서 최후의 주저(主著)인 <법철학>(1821)을 썼고 그 영향은 독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도 파급되어 그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그 동안 그는 미학(美學)·종교철학·역사철학·철학사 등을 강의하였고(그의 사후에 遺稿와 聽講者의 노트를 토대로 하여 전집에 수록되었다), 또 사회학에 관한 저술도 계획하였지만 1831년 11월 콜레라에 걸려 급서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정신현상학> <대논리학> <법철학> <엔치클로페디> <역사철학강의> 등이 있다.

정신현상학[편집]

精神現象學 (1807)

36세가 된 헤겔은 1806년 10월 13일 프랑스군 점령하의 예나를 사찰(査察) 기행(騎行)하던 나폴레옹을 보고 세계를 지배하는 개인, 세계정신을 이 눈으로 보았다고 편지에 썼는데, 그날 밤 포화를 멀리 바라보면서 이 최후의 주저를 탈고하였다. 프랑스 혁명으로 세계사의 신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감정이 넘친, 760페이지가 넘는 이 저서로써 헤겔은 처음으로 자기의 철학체계 성립의 인식론적·역사적인 근거를 세웠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20년에 걸친 그리스 고전으로부터 근대정치·경제·철학사상에 이르는 교양과 자기 형성을 인류의 자기 형성과 일체의 것으로 자각한 자부할 만하고 장대한 근대적 인간의 철학적 자서전이라고도 하겠다.

'이 자(者)'로서의 내가 '지금' '이곳'에 '이것'을 보고 있다는 감성적 확실성이 흔들리고, 그러한 상식은 전체적 진리를 포착하고 있지 않다 하며, 참다운 인식으로 나아가는 발전을, 헤겔은 인식론과 논리학 그리고 변증법이 일체가 된 뛰어난 논술에 의하여 저술하였다. 그것은 '감성적 확신에서 지각(知覺이라 번역되지만 심리학 용어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진상확인의 뜻)으로, 다시 오성(悟性=知性)으로'라는 의식(意識)의 발전이요, 자기의식에의 발전이며 나아가서 보편적으로 된 자기의식으로서의 이성(理性)의 여러 단계, 또한 종교의 여러 단계를 거쳐 드디어 사유와 존재의 일체성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절대지(絶對知)의 단계에 도달하는 발전이다. 개인이 이러한 철학적 통찰의 높이에 달하는 데는 보편적인 정신, 사회적·역사적인 인식이 발전하는 여러 단계를 요약적으로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겔은 역사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의식형태, 이데올로기를 그 발전에 있어서 비판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여 자연과학적인 개념 형성 이외에 예술·종교·국가·소유(財産), 사회적인 여러 관계, 도덕 등 여러 문제를 다루어 갔다.

이만큼 내용이 풍부하고 이처럼 난해한 철학서는 없다고 말한다. 충만한 사상을 한꺼번에 썼기 때문에 생생한 문장에 무한한 매력이 있음과 동시에 헤겔 철학 일체를 미분화(未分化)로 포함하는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저서이다. 무엇보다 현저한 것은 독일 관념론 내지 고전적 독일철학의 최대 유산으로서의 변증법, 즉 발전의 논리가 훌륭하게 전개되어 있는 점이다. 특히 '주인과 노예'란 한 구절이 유명하다. 노예는 주인을 위해 다해야 할 노동으로 갖가지 대상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들 여러 대상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형성하며, 이러한 사실로 결국은 노동하지 않고 향락만을 누리는 주인보다 내용이 풍부하여 더욱 높은 자기의식에 도달한다. 인간은 본질적인 제력(諸力)의 대상화·외화(外化)·소외(疏外)와 그 지양(止揚)이란 과정으로 자기 자신을 산출하고 창조한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성과이다. 즉 이 저서는 변증법의 보고(寶庫)인 것이다.

대논리학[편집]

大論理學 (제1권 1812, 제2권 1816)

헤겔의 뉘른베르크 시대의 저서로서 <엔치클로페디>의 제1부를 '소(小)논리학'이라 하는 데 대하여 '대(大)논리학'이라 불린다. 제1권 출판과 제2권 출판의 기간은 마침 나폴레옹 전쟁의 시기에 해당되는데, 그는 피히테처럼 정열을 태우는 일 없이 저술에 전념함으로써 철학체계의 모든 구상을 굳혀 갔다.

이미 그의 철학의 기본적 입장은 <현상학>으로써 표시되었다. 그는 그러한 노력에 의해 도달한 철학적 입장에 서서(이미 諸事物이 끝없는 유동과 다양성에 현혹되는 일 없이), 객관적 및 주관적 세계의 모든 것이 가진 구조와 과정을 추상적인 사유의 영역에서 전개하려고 했다.

그는 전통적인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이 사유의 범주와 형식을 사유의 내용과 분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철학적 인식에 있어서 생생하게 운동을 밀고 나가는 것은 내용의 본성뿐이며… 내용의 제 규정을 정립하고 산출하는 것은 내용의 내적인 반성(反省)이다." 따라서 그의 논리학은 단순히 사유의 형식만을 문제로 하는 일반적인 것과는 달라서 그것은 동시에 존재론(存在論)이다. 그는 이 현실의 현실적 과정을 반성 순화하여 거기에서 '부정적인 걸음'으로서의 변증법을 그 자신의 철학적 방법으로 확립하고, 인식의 주관적 정당성과 객관적 진리성을 통일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의 논리학은 직접성(直接性)에 있어서의 '유론(有論=存在論)'과 반성과 매개(媒介) 사상으로서의 '본질론(本質論)',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고 또 완전히 자기와 함께 있는 사상으로서의 '개념론'으로 전개되었다.

시초는 가장 단순한 '유(有=있음)'라는 규정인데, 이 순유(純有)가 무내용(無內容)이라는 점에서 '무(無)'로 되고, 나아가 양자의 통일로서의 진리, '성(成)'으로 나간다. 이하는 마찬가지로 '유론(有論)'에서는 '질(質)'과 '양(量)'의 대립의 통일로서 '질량'을, '본질론'에서는 '자기 자신으로의 반성(反省)의 본질'과 '현상(現象)'의 통일로서 '현실성'을, '개념론'에서는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일로서 '이념'을 각각 논하였는데, 우리는 이러한 헤겔의 서술의 배경으로 그리스의 엘레아 학파나 헤라클레이토스를 비롯하여 철학적 범주의 전개사(展開史)를 읽어볼 수가 있다. 그것은 이 논리학이 공허한 구성이 아니라 현실적인 구조의 분석임과 동시에 제 범주에 관한 역사적 전개의 정착이기도 한 점을 표시한 것이며, 존재론적 혼동(混同)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의의를 지속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법철학[편집]

法哲學 (1821)

헤겔의 철학체계인 <엔치클로페디> 제3부 <정신철학> 가운데 '객관적 정신'의 장을 강의 목록으로 상술한 것이며 그의 마지막 주저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자연법(自然法)과 국가학 강요(國家學綱要)>란 부제가 붙어 있다.

헤겔은 일찍이 자유를 단순한 주관적 심정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국가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 기대를 처음에는 나폴레옹에 의한 해방에, 이어서 그 영웅이 몰락한 후에는 프로이센의 슈타인―하르덴베르크의 체제에 의탁하였다. 이 기대의 크기는 유명한 서문인 "이성적(理性的)인 것은 현실적(現實的)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말로 짐작할 수 있다. 헤겔은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이성적인 법과 윤리의 체계를 전개하였다.

제1부 '추상적인 권리 내지 법'에서는 직접적 의지로서의 추상적 인격이라고 하는 칸트적인 형식적 적법성의 입장에서 소유·계약·불법(不法)을 논하였고, 제2부 '도덕'에서는 의지가 자기 자신 속으로 되돌아와서 인격을 주관 내지 주체로까지 규정한 입장인데 기도(企圖)와 책임, 의도(意圖)와 복지, 선(善)과 양심을 논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래의 관점에서는 외적 행위규범으로서의 법과 내적 심정의 규제로서의 도덕이 상호보완적으로 포착되고, 칸트는 인격성의 관점에서 도덕을 최고의 원리로 생각하였으나, 헤겔은 추상적 법과 도덕의 대립의 통일(진리)로서 외적 세계에 실현된 '인륜(人倫)'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제3부 '인륜'은 그의 객관적 정신론의 본령인데, 정신의 직접적·자연적 실체로서의 '가족'과, 그것의 분열과 현상으로서의 특수한 인격이 다른 사람의 그와 같은 특수성과 관련한 '욕구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 '시민사회'와 양자의 통일로서, 윤리적 이념의 현실성인 '국가'의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그의 서술에는 프로이센적 현상의 옹호에서 연유한 복고적(復古的) 논조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업(分業)의 진행과 그에 수반된 대중 조직의 문제 등 많은 진보적 테마가 포함되어 후세에 수많은 문제를 제기하였다.

엔치클로페디[편집]

Enzyclopädie (哲學的 諸學의 百科要綱)헤겔이 자기의 철학적 체계를 개설(槪說)한 것인데,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로서 청강생에게 강의 개요를 제시할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다.

이미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에 재직하였을 때부터 자기의 철학적 체계에 대한 구상을 굳혀서 <대논리학>을 완성하였지만 그 체계의 전체적인 서술은 용이하게 실현되지 못한 채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그 요강을 제시하는 본서를 저술하였던 것이다. 헤겔은 계속 손질하여 1827년에 제2판을, 1830년에 제3판을 냈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텍스트는 물론 제3판이지만 3분법(三分法)을 완성하지 못한 초판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헤겔은 그의 전 체계(全體系)를 이념의 전개로서 논술하고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 등 3부로 나누었다. 제1부 '논리학'은 '즉자적(卽自的)이면서 대자적(對自的)인 이념의 학문'이었고, 유론(有論)·본질론·개념론으로 되어 있는데 별도 저서인 <대논리학>의 요약이다.

제2부 '자연철학'은 '타재(他在)에 있어서의 이념의 학문'인데, 개별화의 규정은 '역학(力學)'으로, 특수성의 규정은 '물리학', 주체성의 규정은 '유기학(有機學)'으로 전개되어 있다. 이념은 자기의 밖으로 나와야 현실적이 되는 것이어서 우리는 자연에 있어서도 이념의 전개를 볼 수 있지만, 거기에서 이념은 본래의 양상을 상실한 형태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현실은 불완전한 것으로 기계적 필연성과 우연성만이 지배하여 인간적 자유와는 무연(無緣)한 것이라고 하였다.

'자연철학'은 헤겔에 있어서 가장 떨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에 대해서 제3부 '정신철학'은 말하자면 그의 본령이다. 그것은 '타재(他在)로부터 자기 속으로 돌아오는 이념의 학문'인데 개인의 자연적 의식이 점점 고차원(高次元) 단계로 발전함으로써 각각 심(心)·의식·정신을 다룬 인간학·정신현상학(이 정신현상학은 별저 <精神現象學>과 무관계한 것은 아니나 의도와 내용이 상당히 다르게 되어 있다)·심리학의 3부로 된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으로 실현된 정신을 다루어 법·도덕·인륜의 3부로 된 '객관적 정신'(이것을 상술한 것이 후에 나온 <法哲學>이다), 다시 정신의 최고 발전 단계로서 정신이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절대자의 파악이 각각 직관·감정 내지 표상·사유에 의해 성립되는 예술·종교·철학을 다루는 '절대적 정신'으로 되어 있다.

역사철학강의[편집]

歷史哲學講義

헤겔은 1822년부터 5회에 걸쳐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철학을 강의하였으나 그것을 저서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의 사후에 제자이며 법학자인 간스가 헤겔 자신이 쓴 초고와 청강자의 노트를 기초로 하여 <역사철학강의> 제1판을 냈으며(1837), 간스가 사용한 초고는 후기의 것(1830-1831)으로 각론(各論)의 서술은 상세하였으나 일반적 서론 부분은 그렇지 못하였던 것이다. 헤겔의 생생한 역사관이 충만한 것은 오히려 서론 부분이어서 그 부분이 강조되어 있는 초고에 따라야만 한다는 견해를 따라서 헤겔의 아들이 개정판을 내어(1840) 그것이 글로크너 전집판에 수록되었다. 후에 게오르크 라손은 전집판의 강의가 편자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다고 하여 더욱 대폭적으로 개정, 1917년부터 <역사에 있어서의 이성―세계사 철학에의 서론> 이하 <세계사철학강의>를 냈고, 또 최근에 호프마이스터에 의하여 헤겔의 초고를 간행하였다.

충실한 역사 인식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가. 그는 눈앞에 전개된 사건의 기술인 '본원적(本源的) 역사'와 교훈적·실용적인 '반성적 역사', 역사의 사유적(思惟的) 고찰인 '철학적 역사'의 세 고찰 방법 가운데 최후의 '철학적 역사'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역사를 사유적으로 고찰한다고 하는 것은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며, 따라서 세계사도 이성적으로 진전하고 있다"라는 전제로부터 역사에서 우연적인 것을 제거하여 본질적인 것을 파악하는 방식인데, 그에 따르면 이것은 결코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의 역사 기술은 모두 어떠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이성적 지배의 전제는(고찰한 결과 알게 되는 일이지만) 역사를 충실하게 파악한다는 제약(制約)인 것이다. 일찍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보였던 아낙사고라사의 누스,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의 섭리와 동일한 사상이었으며, 그것을 개념에 있어서 인식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전제에서 ① 정신의 본성의 추상적 제 규정, ② 정신은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을 쓰는가, ③ 정신의 완전한 구체적 실현이 취한 형태, 즉 국가가 각각 고찰되어 있다.

정신의 본성은 자유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며, 세계사의 발전 단계는 그 실현의 정도에 따라 측정된다. 그러나 이성은 스스로 그것을 실현할 수가 없다. 개인이 사리(私利)에 쫓겨 저지른 행위는 실은 '이성의 궤계(詭計)'에 의하여 객관적인 자유의 실현과 결부된다. 개인(英雄)의 역사적 행동은 모두가 그 민족에 기초를 두고 민족정신으로 출현하여 세계사적 사명을 다하는 데서 세계정신과 연결되지만 그 사명을 수행하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이와 같은 세계정신의 실현에 불가결한 기반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그는 '세계사의 지리적 기초'에서 각 지역의 자연적 조건을 검토하여 각론에서는 자유 실현의 정도에 따라 '동양적 세계' '그리스적 세계' '로마적 세계'를 상술하였는데,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론 부분일 것이다.

슐라이어마허[편집]

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1768-1834)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신학자.

브레슬라우의 헤론푸드파(派)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니스키. 바르기의 헤론푸드파 학교를 거쳐 할레 대학에서 신학 외에도 플라톤이나 칸트의 철학에 관심을 갖는다. 1796년 자선병원의 목사로서 베를린에 부임, 낭만파 사람들과 친교를 맺는다. 자기가 자란 정신적 환경의 경건한 종교적 감정과 당시의 자유로운 사고, 비판주의를 어떻게 결부시키겠는가를 평생의 과제로 삼아 <종교론>(1799)을 저술하여 종교에 독자적인 영역을 보증하고, 또한 <독백록>(1800)에서는 신과 자기와의 관계를 추구하고 자기를 절대자의 특수한 표현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개성주의'를 주장했다.

1804년 모교 할레 대학의 신학·철학교수가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전후 베를린 대학의 설립에 참여, 동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신학 연구와 사회의 문화지도를 결부시키고 교회의 국가통제에 반대하며, 경제적 평등이나 사회보장을 논하는 등, 낭만주의의 테두리 안에서이긴 하나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만년에는 대저 <기독교 신앙론>(1821)을 저술했으며, 종교개혁 이후 최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가 되었다.

종교론[편집]

宗敎論 (1799)

'종교를 멸시하는 사람들 중 교양인에 대한 강연'이라는 부제가 있기 때문에 '레이덴(講演)'이라고도 불린다.

종교를 형이상학적 잔재로서 버리든가 혹은 고작 도덕을 보충하는 것으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은 당시의 계몽적 지식인에 대해 종교야말로 그들이 지향하는 인간성의 이상에 불가결의 것임을 호소하려 했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종교는 인식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과 의지와의 중간인, 인간정신의 본연적이며 필연적인 제3의 영역인 심정의 문제이다. 지식과 의지는 절대자를 가정하거나 요구할 수는 있어도 파악할 수는 없다. 감정 속에서만 절대자의 현존이 계시되며 거기에서만 우리는 신을 직접 파악할 수 있다. 모든 마음의 능력 중심점을 이루는 이 경건의 감정이 어떤 작용을 종교적인 것으로 한다.

종교란 우주를 직관(直觀)하는 것, 무한에의 동경, 영원한 것을 감지하는 것이며, 예술과 마찬가지로 전체의 직접 파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신 앞에서는 모든 다양성·개별성은 소멸되나 신에 대한 의존의 감정은 굴종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고양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심정의 사항이기 때문에 교의(敎義)·교조(敎條)는 제2의적(第二義的)인 것이 되며 전통적 해석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 종교적 소질은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오늘의 열광적인 이성이 그것을 억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교육은 모두가 무한자(無限者)를 직관하고 전체의 직접적 파악으로 향하는 예술적 능력과 함께 실시되어야 하며, 이 두 개의 원천이 통일되었을 때 종교는 영광스러운 시대를 맞을 준비가 갖추어진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지식인이 종교 그 자체 이상으로 비난하는 교회에 관해서 필요성을 논하고, 그 타락의 원인을 종교보다는 오히려 종교를 부당하게 이용했던 국가권력의 책임이라 하면서 부당한 간섭에 반대하고 있다.

낭만주의 사조[편집]

浪漫主義思潮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독일·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정신영역―문학·철학·예술·종교―을 지배했던 사조. 주요 인물을 든다면 독일의 슐레겔·노발리스·티크, 영국의 워즈워스·콜리지·바이런·셸리·키츠, 프랑스의 위고 등이다.

낭만주의는 일반적으로 사실주의에 대치되는 개념이나 여기서는 시대사조로서의 낭만주의이다. 문예사조로 본다면 고전주의 뒤에 대립하여 일어난 운동이라 하겠다. 고전주의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개인과 전체의 조화=질서성(秩序性), 표현형식의 명석함, 감정이나 격정에 대한 이성과 의지의 우위성이었다.

이에 대하여 낭만주의가 표방하는 것은 모든 외적 규범으로부터의 개인의 해방, 이성이나 의지에 대한 감정의 해방, 형식의 속박에 대한 상상력의 해방 등이었다.

고전주의가 조화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유한한 형식 속에 표현하려 한 데 대하여 낭만주의는 조화를 구하고 또한 무한에의 동경의 감정을 기반으로 하여 그 표현형식도 유동적이며 자유분방하다.

이상이 대체적인 윤곽이나 이 사조는 프랑스 혁명을 둘러싼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각국의 복잡한 정치 형세를 배경으로 하여 이데올로기 면에서도 극히 복잡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즉 낭만주의는 한편에서 상승기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경향을 나타내고, 다른 한편에서는 멸망 중에 있는 귀족의, 또는 현실의 모습과 혼란에 절망을 느끼는 자가 품는 보수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낭만주의의 원천을 살펴보면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라고 하겠다. 봉건적 압제와 형이상학적 이성주의로부터의 자아의 해방을 찾아 일어난 근대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처럼 해방이 뒤늦은 나라에서는 현실적 희망이 절망적이었다. 또한 귀족적 로맨티시스트는 혁명의 생생한 현실에 견뎌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낭만주의의 보수적·회고적·현실도피적 경향이 진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지상적 속박과 질서와 이성을 부정하여 공상과 환상의 세계로, 다시 말해서 유미주의로 기울어졌으며, 그 시정(詩情) 또한 감상적인 공허한 것으로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진보적 경향의 로맨티시스트는 위고와 하이네처럼 리얼리스트로의 전신(轉身)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낭만주의는 역시 인류 역사상 인간의 감각이 가장 아름답게 꽃핀 한 시기를 이룩했으며, 르네상스의 과제를 어떤 의미에서는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음악에 있어서도 가장 웅변적인 표현자를 배출하여 슈베르트, 슈만, 리스트, 쇼팽, 멘델스존, 브람스, 바그너 등이 한꺼번에 나타나 음악사상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괴테[편집]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의 세계적 문호.

자유시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황실 고문관, 모친은 시장(市長)의 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괴테의 명성이 높아졌을 무렵 예술에 대한 이해심이 많은 바이마르 영주(領主)의 초빙을 받아 고문관으로서 공국(公國)의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비록 생각이 깊은 영주가 다스리는 나라라 해도 뒤떨어진 독일의 현실은 괴테의 근대적인 휴머니즘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1786년 괴테는 영주에게 인사도 없이 이탈리아로 떠난다. 2년 후에 돌아온 그는 겨우 마음의 평온을 얻었으나 그 대신 청춘을 그 희망과 함께 잃어버리고 말았다. 즉 정치적으로는 보다 온건하게, 그리고 예술적으로는 고전주의로 변해버린 것이다. 물론 괴테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필연성을 의식하여 공화제 지지자였으나 혁명이라는 혼란을 무척 기피하고 있었다.

또한 고전주의의 맑은 평온함을 사랑하여 마음의 동요를 노래하는 낭만주의를 '병적인 것'이라 했다. 괴테의 사상은 <파우스트>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관념적·형이상학적 사색을 부정한 파우스트는 자연 그대로의 적나라한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체험을 하기 위해 세계의 끝까지 여행한다. 거기에는 자아를 전 세계까지 확대시키려는 휴머니즘의 웅장한 꿈이 있다. 올림포스의 신에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사상은 괴테에 의해 근대에 되살아났다고 하겠다.

또한 괴테의 사상은 매우 변증법적이었다. 파우스트의 사상은 메피스토펠레스(혹은 메피스토)와의 갈등을 통해서 표현된다. 동시에 파우스트와 메피스토는 함께 봉건적인 것에 대립하고 있으며, 메피스토의 날카로운 비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괴테는 이와 같은 갈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향상을 '고양(高揚)'이라 이름지었다. '교체와 영원' '대립과 조화' '대극성(對極性)과 고양'이라는 대립개념을 세계현상의 원동력으로 보았던 것이다.

주요 저서로는 <파우스트>(제1부 1808, 제2부 1831)가 있다.

실러[편집]

Johann Christoph Friedrich Schiller (1759-1805)18세기 독일의 시인·극작가·미학자. 괴테와 함께 독일문학의거봉.

독일의 마르바하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종교적 색채가 짙은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신학교에 가기를 원했으나 군주의 뜻에 따라 육군학교에 입학, 법률과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졸업할 때 이미 그는 처녀작인 <군도(群盜)>를 완성하고 있었다. 그는 횡포한 군주가 지배하는 고향을 탈출, 평생을 두고 빈곤과 병에 시달리면서도 강철 같은 의지로 작품을 써나갔다. 괴테와의 친교는 그의 사상에도 풍요한 수확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의 독일은 사회적으로는 비참한 시대였으나 사상적으로 '위대한 세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계사를 뒤흔든 프랑스 혁명과 동시대인이었던 실러는 인류적 이상을 미적 교육으로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러의 이 주장은 칸트의 입장을 확대시킨 것으로서 이성과 감성이라는 칸트의 2원론을 '미(美)'에서 통일시키려 했던 것이다. 실러의 미적인 개념은 '아름다운 자유의 딸'이라는 말로 요약될 만큼 자유를 바탕으로 한 미적 이상이라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반면 평화 속에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 인류의 미적 교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요컨대 그리스 이후의 미적 교양의 사상을 계승하는 사람 중 실러는 으뜸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실러가 행한 소박한 시인(괴테)과 정념적(情念的) 시인(실러)과의 유형 분류는 예술유형학(藝術類型學)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그의 대표적 저서로는 <카리아스 서간>(1973), <인간의 미적 교양에 관하여>(1793-95), <소박과 정념에 관하여>(1795-96) 등이 있다.

교육사상가[편집]

敎育思想家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교육사상가라는 이름으로 부를 만한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이른바 범애파(汎愛派)에 속하는 바제도(1723-1790), 잘츠만(1744-1811), 로표우(1734-1805), 나폴레옹 전쟁 후는 피히테, 훔볼트(兄)(1767-1835), 슐라이어마허, 헤르바르트, 프뢰벨, 디스틸베크(1790-1866), 하르니슈(1789-1864) 등은 모두가 빠뜨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각각의 사상적 입장은 다양하나 공통점은 그들의 교육사상이 어떤 의미에서건 국민교육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독일에서의 근대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역사적 과제와 국민교육 사상론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 내용면으로 본다면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의 형성이나 산업혁명의 진행이 기대했던 인간적인 여러 조건의 육성이라는 것이 이러한 사람들의 교육사상 내지는 교육이론의 직접적인 과제로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과학으로서의 교육학 건설이 출발한다. 교육적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체계적으로 축적되고 그것이 이윽고 국민적인 교육제도 안에서 국민의 체제화를 효과적으로 촉진시키는 무기가 되어 간다. 동시에 그것은 체제비판의 능력도 육성하게 되었다.

페스탈로치[편집]

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827)스위스의 교육자·교육사상가.

취리히에서 외과 겸 안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부친을 잃어 어머니와 충실한 하녀의 손에서 자랐다. 독일어 학교, 라틴어 학교를 거쳐 취리히의 대학에서 배워 이곳에서 보드머를 비롯한 당시의 혁신적인 자유사상가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반정부적인 애국자 단체에 가입하여 활약했다.

1768년 22세 때 국민경제에 기여하고 가계를 유지하고자 노이호프에서 농장을 경영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774년에는 교육과 산업의 결합을 목표로 그곳에 빈민학교를 설립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동안에 배양된 그의 교육적 식견은 평생을 두고 사상의 근저가 되었다. 잡지 <에페메리덴>에 게재된 어록인 <은자의 황혼>에서 우리는 그것을 엿볼 수 있다. 1781년에 소설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로 문명을 떨쳤다. 1792년에는 프랑스 혁명정부의 명예시민이 되고, 1798년에 스위스 혁명정부에 참가, 국민신문 편집 주간이 되어 수많은 정치논문을 발표했다.

1798년 말, 51세의 몸으로 반혁명운동 진압 후의 슈탄츠로 가서 고아원 원장이 되었으며, 여기서 교육방법의 원리에 관한 실마리를 파악하게 된다. 약 반년 후 고아원을 떠난 뒤에도 브르크도르프에서 이 노력을 계속하는데 그 성과가 <게르트루트 아동교육법>(1801)이다. 이후 뮌헨브크제, 이베르던 등에서 학교를 경영함으로써 명성을 온 유럽에 떨쳤고, 81세로 사망했다.

그의 교육사상은 산업화가 진행되는 사회 속에서 가난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활지혜와 생활기술을방법면에서 습득시키려 했던 것이며, 항상 그 발상(發想)이 민중의 입장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은자의 황혼[편집]

隱者-黃昏 (1780)

페스탈로치의 대표적 저서 가운데 하나. <황혼>이라는 약칭으로도 불린다.

노이호프에서의 빈민학교 경영이 이미 곤경에 처하게 된 1779년, 친구 이제린이 주재하는 잡지 <에페메리덴>에 싣기 위해 그는 많은 원고를 보내고 있었다. 취리히의 상층 지도자에게 반성을 촉구할 목적으로 쓴 <우리 조국의 자유에 관하여>는 자주 고쳐 쓴 모양이었으나 이제린이 발매금지를 두려워하여 끝내 햇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과 비교하면 약간 일반적이며 추상적인 말로 유럽의 정치권력 비판을 시도한 <황혼>은 익명이긴 했으나 어쨌든 게재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황혼>은 자애(慈愛)가 결핍된 정치권력에 대한 준엄한 책임 추궁의 자세로 일관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자연본성의 요구가 건강하게 충족되는 생활 가운데서 비로소 인간은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정서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인간의 도덕심이나 종교심도 침식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의 정치는 군주가 올바른 신앙을 상실했기 때문에 관료도 부패했으며 국민의 가정은 빈곤 속에 잠겨 있다. 도저히 자연본성의 요구가 충족될 수 없다. 가난한 사람은 그러한 생활 속에서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하고 회의를 품게 된다. 그러나 페스탈로치에 의하면 그러한 회의를 국민이 품는 것은 그들에게 건전한 종교감각·도덕감각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며, 거기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군주가 한시라도 빨리 올바른 종교심을 되찾도록 호소했던 것이다. 그가 주장한 것은 오로지 자애의 부족이었지, 결코 루터처럼(백성의 君父에 대한) 효심(孝心)의 필요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 점을 착각한다면 그의 참뜻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프뢰벨[편집]

Friedrich Fr

bel (1782-1852)

독일의 교육자. 유치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독일 중부의 삼림지대인 취링겐의 소도시 오베르바이스바하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곧 모친이 사망하여 4세 때부터 계모 손에 자랐는데 계모와의 사이가 나빠 쓸쓸한 소년시대를 보냈다.

1799년 예나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배우는 한편 낭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후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하다가 1805년, 프랑크푸르트의 모범학교 교장 그르너와 사귀게 됨으로써 비로소 교직에 뜻을 두고 페스탈로치에게 사숙했다. 후년에 와서는 비판적이긴 했으나 1812년(30세) 이후 베를린 대학 등에서 결정학(結晶學) 연구에 종사. 1816년엔 조카를 비롯한 다섯 명을 학생으로 그리스하임(후에 카일하우)에 일반적인 독일 교육기숙사를 창설, 이윽고 여기서 그의 대표적 저작인 <인간의 교육>을 간행했다(1826). 이 무렵부터 그의 학원은 위험사상의 온상처럼 간주되어 정치적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한때 스위스로 가서 재기를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독일로 돌아와 블란켄부르크에서 유아교육시설을 창설(1837), 그가 고안한 유희도구의 제작·선전에 힘썼다. 1840년(58세)에는 일반적인 독일 유치원을 창립, 유치원의 명칭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1848년, 독일 3월혁명을 적극 지지했으나 이윽고 혁명이 퇴조하여 탄압의 선풍이 유치원에까지 미쳤다. 1851년 우선 프로이센이 유치원 금지령을 공포, 다른 여러 나라도 이에 따랐다. 청원도 헛되이 금령의 해제(1860)도 보지 못한 채 그는 7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사상은 어린이들이 자기활동적인 한 개의 생명체(球)로서 발달하고 완성하는 과정을 직관적으로 파악한다는 점에 특색이 있으며, 신비적이며 난해하다고는 하나 운동 그 자체는 제자들에 의해서 급속히 전 세계로 번져갔다.

대표적 저서로는 <인간의 교육>이 있다.

인간의 교육[편집]

人間-敎育 (1826)

프뢰벨의 대표적 저술. 그의 교육론의 기본적인 구상을 상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부제로 '카일하우 일반 독일 교육사(敎育舍)에서 노력해 온 교육기술·교수기술 및 훈육기술'이라고 달았듯이 그의 10년 가까운 교육 실천에서 태어난 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제1권, 소년기 초기까지'라는 표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소년기 이후에 관해서도 고찰할 예정이었던 모양이나 속권은 집필되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만물을 통일의 면에서 보려던 것이 프뢰벨의 근본사상이나 인간의 교육 또한 외부인 세계의 통일성을 배워 스스로의 것으로 삼는 과정과 내부인 유기체 발달의 각 단계의 통일성이 항상 조화를 지님으로써 바람직한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형식으로서 프뢰벨은 '수동적·추수적(追隨的) 교육'과 '명령적·규정적 교육'의 상호관계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물론 교육·교수·훈육은 "근본적으로, 또한 그 제1의 근본적 특질에 있어서 수동적·추수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나, 명령적·규정적 교육의 상대적 권리를 그는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한다. 인간의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외부에 대한 활동(노동)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헤르바르트[편집]

Johann Friedrich Herbart (1776-1841)독일의 교육학자, 과학적 교육학의 창설자.

베제르 강변의 올덴부르크에서 고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대부터 볼프나 칸트의 철학에 관심을 나타내는 한편 음악, 특히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고 한다. 1794년, 예나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을 배웠는데 특히 그리스 철학에 흥미를 느꼈다. 졸업 후 스위스로 가서 슈타이겔가(家)의 가정교사가 되었으며, 이 기간에 페스탈로치를 방문하여 여러가지로 배운 바가 많았다. 1802년부터는 괴팅겐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1809년부터 1833년까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철학교수를 역임했다. 유명한 7박사 사건(1837)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75세로 사망했다.

대표적 저서로는 <일반교육학> <교육학강의>(1835)가 있다.

일반교육학[편집]

一般敎育學(1806)

헤르바르트의 대표적 저술 가운데 하나. 교육은 단순한 경험이나 관습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기초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덕(德)으로까지 교육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실천철학(윤리학)이 교육의 목적에 기초를 이루고, 인간의 여러 성질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심리학이 교육의 방법을 규정한다는 사고방식이 이미 하나의 저류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만년의 저작 <교육학강의 강요(綱要)>(1835)에서 처음으로 명확해진다.

다만 이 저작의 중심은 '교육적 교수(敎育的敎授)'의 문제에 있으며, 수업의 진행 단계 및 교수 내용의 편성에 관한 원리적 고찰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 모두가 훗날 헤르바르트파(派) 교수이론 속에 전승되었으며, 또한 훈련과 관리는 '본래의 교수'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에 포함된다고 하여 각각의 위치를 규정지으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