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근세의 사상/헤겔 이후의 독일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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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편집]

프로이센적 현상 옹호 입장에 섰던 헤겔 철학은 19세기의 20년대를 정점으로 절대적인 힘을 과시하였고 헤겔의 사후에도 얼마 동안은 학파를 형성하여 독일 철학계에 군림하였으나 30년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분열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헤겔 철학은 모순에 찬 것이었다. 근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발전해 가려는 변증법(辨證法)과 완결하려고 하는 체계 사이의 모순이었는데, 우선 이 모순은 종교 문제에서 나타났다. 헤겔 철학의 궁극 목표는 절대자의 파악인데, 그것을 표상(表象)으로서가 아니라 개념(槪念)으로서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절대자를 개념으로 포착하는 것은 이미 초월신(超越神) 부정의 징조를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사실 괴셀(1781-1861), 가블러, 힌리히스(1794-1861) 등 헤겔의 사변적 형이상학 면을 옹호하고 종교 신앙을 유지시켜 나가려는 우파(右派)에 대하여 헤겔의 합리주의적 측면을 계승하려는 좌파의 슈트라우스와 바우어 등은 복음서 비판에서 점차 무신론의 방향으로 나아가서, 드디어 포이어바흐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그리스도교의 참다운 의미는 인간학이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러, 헤겔의 절대정신의 관념론은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인 유물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 외에 역사가들 가운데 로젠크란초(1821-1874), 에르트만(1805-1892) 등 철학사 영역에서 업적을 올렸던 사람들의 일파를 중앙파(中央派)라 하여 후의 역사주의와 결부시키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즈음에(1840년대 초)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하여 프러시아의 보수정책이 강화되자, 좌파는 종교 비판에 그치지 않고 반봉건적(半封建的) 절대주의에 대한 정치 비판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속에서 현실적 인간해방을 정면의 과제로 삼는 마르크스·엥겔스가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의 비역사적·비변증법적인 성격의 비판을 통해, 전통적인 독일의 철학과 프랑스의 사회주의, 그리고 영국의 경제학을 통일하여 전혀 새로운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1848년 3월혁명이 좌절된 후에 실망한 일부 급진지식인 사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비합리주의 철학이 유행하였고(이것이 후에 니체로 이어진다), 반면에 절대주의 아래에서 겨우 진행하기 시작한 독일의 산업혁명에 호응하여 포크트, 몰레스코트, 뷔흐너 등 자연과학자를 중심으로 하여 18세기적 유물론의 통속화인 '속류(俗流), 유물론'(엥겔스)이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페히너 등의 실험심리학(實驗心理學)에 자극을 주었다. 1862년 비스마르크가 정권을 잡자 통일독일제국이 탄생(1891)하고, 일단 산업혁명이 완료되어 번영기에 접어들었지만, 1870년대의 공황 뒤에는 이른바 독점 단계에 도달한다. 그와 대응하여 종래의 자연주의와 유물론에 대한 반동으로서, 정신의 권위를 회복하여 과학에 대한 철학의 독자적인 입장을 확립하려는 경향이 움텄다. 처음에는 유물론에 반대하면서도 일종의 과학주의로서 과학 비판의 철학이며 과학철학(科學哲學)(신칸트 학파, 現象學派)이었으나 드디어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비합리주의적 세계관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생(生)의 철학이나 실존주의가 탄생하게 된다.

쇼펜하우어[편집]

Arthur Schopenhauer (1788-1860)

19세기의 독일 철학자.

자유시 단치히 태생으로 양친은 네덜란드 계통. 부친 하인리히는 자유를 사랑하는 자존심이 강한 자영상인(自營商人)이었는데, 단치히가 독립을 잃게 되자 그 일가는 함부르크로 이주하였다. 부친보다도 20세 연하인 모친 요한나는 예술가 기질을 가진 재녀(才女)로 남편과 사별 후 바이마르에서 작가로서 명성을 떨쳤으나 쇼펜하우어에게는 그다지 애정이 없었던 듯하였다. 부친은 학교 공부보다도 오히려 '세상이라고 하는 커다란 책'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여 아들에게 영어나 불어를 습득시켜서 유럽 각지를 함께 여행하였다.

쇼펜하우어는 17세로 부친의 상사(商社)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일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부친이 사망한(자살이라고도 한다) 후 의학도로서 괴팅겐 대학에 들어가(1809), 자연과학 외에 회의론자 슐체(1761-1833)에게 철학을 지도받았고 칸트와 플라톤을 애독하였으며, 이어 베를린에서 피히테와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를 들었다.

나폴레옹 전쟁중에(1813-1814) 르돌슈타트에 머물며 논문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의 4근거에 대하여>를 써서 학위를 받았고(1813), 모친이 살고 있는 바이마르에서 괴테와 교제하여 그의 색채론을 옹호하는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1816)를 썼으며, 드레스덴에서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를 출판하였다. 1820년에는 베를린 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나, 자신만만하게 정교수인 헤겔과 겨루어서 같은 시간에 강의를 하였지만 학생에게 호평을 받지 못하여 학기 중간에 강의를 치워버리고는 '학교 철학자들의 음모'라고 격분하여 퇴직하였다. 3년간의 이탈리아 여행 뒤에 베를린으로 돌아왔으나 콜레라가 유행하여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으로 피해 가서 그가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 동안에도 교단에 서는 일이 없이 <자연에 있어서 의지에 대하여>(1836) <윤리학의 두 근본문제>(1841) 외에 방대한 수상집인 <보유(補遺)와 추가(追加>>(1851)를 저술하였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고 벗도 없었으며, 결코 이발소에서 면도하지 않고, 장전된 권총을 품고 자는 등 거의 병적으로 생각될 만큼 세심함과 변태를 전해 주는 일화도 많다. 반면에 그의 성장과정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세상과 인간을 터득한 현실적인 사람이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아카데미즘의 학자, 특히 그의 눈에 사변적으로 보인 셸링이나 헤겔을 매도(罵倒)하였던 것이다.

독일관념론의 이성을 전적으로 신뢰하던 옵티미즘(낙천주의)의 종식을 예감한 쇼펜하우어에게서 가장 확실한 것은 "자기가 의지(意志)하는 존재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의지(意志)', 즉 근원적으로는 맹목적인 충동과 흡사한 '살려고 하는 의지'야말로 참으로 실제적이며, 그에 대하여 사물은 그것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한에서만, 즉 표상으로서만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극단적인 주관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스스로 칸트의 진정한 후계자라 생각하였으며, 칸트의 단순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논증을 멸시한 쇼펜하우어의 이론 체계에는 전체적으로 보아 많은 모순이 있어 학계로부터 무시당하였으나 1848년의 3월혁명이 좌절된 후에 현실을 최악의 세계로 보는 페시미즘(염세주의)과, 의지를 가장 실재적인 것으로 하는 비합리주의자가 실의에 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만년에 간행된 소품집인 <보유(補遺)와 추가(追加)>에 의하여 급격히 동조자를 얻었고, 더욱이 생의 철학이나 실존주의에 영향을 끼치는 바가 컸다.

확실히 쇼펜하우어의 인간 고찰의 예리함은 경탄하고 굴복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편집]

意志-表象-世界 (1818)쇼펜하우어의 주요 저서이다.

낡은 사상의 재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으로, 훗날 많은 서적의 참고가 될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30세 때에 낸 저서였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규정으로 시작되는데, 인식론적으로는 칸트의 주관주의를 계승한다. 사물은 그것이 우리에게 현상(現象)하는 한에서만 인식된다. 때문에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것 이상으로 확실한 진리는 없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단순화하여 여러가지 인식 형식을 오직 한가지 인과율(因果律)의 범주로 환원하였다.

모두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현상이요, 그 현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어 인과율에 지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무엇인가 본질적인 것, 현상 이상인 것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꿈이나 환상과 같이 알맹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 본질의 인식은 우리들의 신체를 통하여 비로소 가능하다. 결국 우리들은 한편으로 인식의 주관(主觀)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수수께끼를 가지는 것이며 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의지와 신체 관계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적인 것이며, 따라서 신체는 의지의 객관태(客觀態), 즉 객관화된 의지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에 적용된다. 인간의 의지와 자연의 곳곳에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외견상으로는 아무리 다르다고 하더라도 원리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원인도 없고 목적도 없다. 의지의 개별적인 작용에는 원인과 목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근원적인 의지는 인과율의 밖에 선 '존재에의 무의식적 충동'이며 '살려고 하는 의지'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마음의 편안함을 얻으려고 한다면 이러한 의지에서 자유로워져 이데아를 관조(觀照)해야 하는데,

이것은 미적 태도의 본질로 예술적 및 철학적 천재만이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 중에서도 특히 음악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미적 해탈(解脫)은 아직도 시간 제약을 받아서 불충분한 것이다. 세계는 근원적으로 악(惡)이기 때문에 어떠한 노력으로써도 향락은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염세적인 체념과, 모든 물질은 근본에 있어서 하나라고 하는 긍정으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는 열반(涅槃)의 경지에서 비로소 참다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독일 관념론의 한 전제에서 출발하면서도 '이성'에게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가 자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강단철학(講壇哲學)으로부터 전적으로 무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는 인명 항목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각자(先覺者)'로서 재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보유와 추가[편집]

補遺-追加 (1851)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청년기는 '시작(詩作)' (直觀)에 적합하고 노년기는 '철학(哲學)' (思索)에 적합하다고 말하였다. 또 40세까지는 '본문'을 저술하고 이어서 30년간에는 '주석'을 가해 가는 것이라 말하였는데, 2권으로 된 이 철학적 수상집은 직관과 인상(印象)이 분방 약동하는 그의 나이 30세 때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주석이다. 1844년부터 6년간에 걸쳐 씌어진 것이었지만 당시 불우하여 무명(無名)에 가깝던 그는 그것을 출판해 줄 출판사를 찾는 데 애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출판되자 국내외에서 점차 주목을 끌게 되어 1854년에는 리하르트 바그너가 대악극(大樂劇) <니벨룽겐의 반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바쳤고, 70세의 탄생일에는 유럽 각국에서 축사가 쇄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생과 자연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박식하고(괴테도 탄복했다고 한다), 더욱이 신랄한 기지와 풍자에 넘친 명쾌한 서술은 읽는 사람의 흥미를 끌 뿐만 아니라 마음의 바닥까지 흔들어서 온갖 편견을 타파해 버린다.

니체가 그를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인류의 위대한 교사라 하였고, 토마스 만이나 지드까지가 상찬한 이유도 바로 그러한 점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우에 1848년 3월혁명의 좌절에 의하여, 이상과 노력의 대상(代償)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당시 유럽 지식인의 갈 곳 없는 심정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헤겔 학파[편집]

Hegel 學派

독일의 사상계에는 헤겔의 생전에서 사후에 걸쳐 그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지배적인 학파 ―― 헤겔 학파 ―― 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30년대의 말경에 헤겔 학파는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간행을 실마리로 우파와 좌파 및 중앙파의 3파로 분열하였다. 그것은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는 지배적인 봉건 세력과 신흥 부르주아지간의 모순의 격화를 노출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헤겔 우파(右派)는 노(老)헤겔파라고도 불리며 주로 헤겔 철학의 그리스도적·보수적 측면을 계승한 것인데, 이것으로써 프로이센의 국교인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였다. 괴셀(1781-1861), 가블러(1786-1853), 힌리히스(1794-1861) 등이 이 파에 속한다.

이에 대해서 좌파는 청년 헤겔파라고도 불리며, 헤겔 철학에서 오직 무신론적이고 혁명적인 결론을 도출하였다. 즉 그것은 헤겔 철학의 보수적인 '체계'를 끊어버리고 모든 것을 생성·발전·소멸 가운데서 포착하는(그러므로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변증법적 '방법'의 측면을 계승한 것이다.

슈트라우스, B.바이어(1809-1882), 루게(1802-1880) 등 종교적·정치적인 급진적 사상가를 위시하여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슈티르너, 라살(1825-1864) 등이 이 파에 속한다. 헤겔 좌파는 그들 사상의 공격 화살을 주로 그리스도교 비판에 향하였다. 그러나 이 비판은 본질적으로는 프로이센 국가를 향한 정치 비판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프로이센 봉건국가는 스스로 그리스도교적인 국가로서 체현(體現)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파에 의한 헤겔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은 먼저 슈트라우스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人間)으로 보았고 성서(聖書)를 신화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 견해에서 더 나아간 사람이 B.바우어이다. 그는 예수의 역사적인 존재마저 부정하고 성서를 고민하는 민중의 문학작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 종교 비판의 철학적인 입각점(立脚點)은 아직까지 헤겔 관념론의 한계내에 있었던 것이다.

이 약점을 극복하여 유물론의 입장에서 더 철저한 헤겔 및 그리스도교 비판을 전개한 사람은 포이어바흐였다.

그러나 포이어바흐는 헤겔 철학의 적극적인 면, 즉 변증법을 거의 평가할 수가 없었다.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개작(改作)하고 더욱이 사적 유물론(史的唯物論)의 확립에 의하여 종교 비판에서 정치 비판으로 나아가 부르주아 사회 그 자체의 비판으로 진전시킨 사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였다.

포이어바흐[편집]

Ludwig Andreas Feuerbach (1804-1872)19세기의 철학자로서 독일 최초의 본격적인 유물론자. 저명한 법률학자를 부친으로 바이에른의 란즈프트에서 출생하였다. 1826년에 헤겔 학도로 에를랑겐 대학을 졸업, 강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저서 <사(死)와 불사(不死)의 고찰>(1830)은 그리스도교를 예리하게 풍자했기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몰수를 당하고 포이어바흐 자신도 교직에서 쫓겨났다. 결국 1836년 이후는 도시를 떠나 부르크베르크의 시골에서 재야의 한 철학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포이어바흐의 철학은 종교(그리스도교) 비판 및 사변적 관념론(헤겔 철학) 비판이며, 거기에서 귀결된 유물론적인 현실적 인간학(인간 중심의 철학)인 것이다.

1839년에 <헤겔 철학의 비판>을 썼는데, 감성적(感性的)·개별적(個別的)인 것을 경시한 헤겔 철학의 메마른 추상성(抽象性)을 비판하여, 자신에 대한 자연주의 및 감성주의(자연적·감성적인 것이야말로 모든 것에 대한 實存性의 근거이다)의 입장을 세웠다. 그렇다고 하여도 거기에는 아직도 독자적인 종교와 신학 비판은 전개되어 있지 않았다.

이 과제는 1841년에 간행된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수행하여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였다.

즉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종교(神)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종교에 의한 자기소외).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을 종교적인 쇠사슬에서 해방하여 생생한 인간성(반은 짐승이고 반은 천사의 감성적 인간)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현실적인 인간학의 주장)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비판은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교의와 본질에 있어서 일치하는 헤겔 철학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그 후에는 <장래 철학의 근본문제>(1843), <종교의 본질>(1845) 등에서 자신의 종교 비판과 헤겔 비판을 심화해 감과 동시에 그의 현실적 인간학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듬어 갔다.

그리하여 1866년에 만년(62세)의 대작인 <유심론과 유물론>을 경제적인 곤궁 속에서 최후의 기력을 발휘하여 써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자신의 존재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과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거기에는 모순이 없다고 하여 자신이 주장한 현실적 인간학의 정당함을 확신하였다.

포이어바흐의 철학은 그 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한 비판적 수용으로 변증법적 유물론 성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교의 본질[편집]

-敎-本質 (1841)

포이어바흐는 당초 이 책을 익명으로 출판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출판자이며 친구인 비간트의 반대로 결국 1841년 봄에 이름을 밝히고 출판했다. 그가 이 저서에서 의도한 바는 무엇보다도 종교와 신학의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을 철저하게 전개하는 일이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신이란 이상화된 인간 이외의 어느 것도 아니다. 때문에 신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질을 아는 것에 불과하다.

이리하여 포이어바흐는 맨 먼저 천상에 있는 신을 지상으로 끌어내렸으며, 인간의 자기소외(自己疏外)=자기상실(自己喪失)을 지적하였다. 즉 인간은 종교 속에서 자기가 만들어 낸 신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여 인간이 자기의 본질(인간다움)을 대상화함으로써 생겨난 신이 더욱더 인간적이고 또 적극적일수록 개개의 인간은 점점 더 동물적이고 소극적인 존재로 왜소화되어 가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종교 속에서 잃고 있는 자기, 즉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임을 자각하고 신학을 인간학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신이 아니고 인간이야말로 종교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면서 현실적 인간학(인간에 있어서 인간만이 최고의 존재이다)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의 주요한 의도는 신을 지상화(地上化)시킴으로써 종교에 있어서 인간의 자기소외를 지적하는 일이었다(그리스도교 비판).

이렇게 본질적으로 유물론적인 예리한 그리스도교 비판으로 일관한 이 저서는 당시의 독일 헤겔 철학에도 만족하지 않았던 사람들(특히 헤겔 좌파의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주었다. 젊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한때는 열광적인 포이어바흐 주의자였다.

장래 철학의 근본 문제[편집]

將來哲學-根本問題 (1843)포이어바흐의 주저. 프로이센 정부의 엄격한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스위스에서 가철본(假綴本)으로 출판되었다.

이 저서는 <헤겔 철학의 비판>에서 <그리스도교의 본질>로 진전해 간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총결산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종교에 의한 인간의 자기소외를 폭로한 포이어바흐는, 적극적인 주장으로 현실적 인간학을 역설하였으나 거기에는 아직도 구체적인 내용이 전개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 이르러 그 과제가 보다 명백하게 다듬어져 있다. 즉 현실적 인간의 본질은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인간과 인간과의 통일 속에 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포이어바흐는 직관·감각 및 사랑을 인간학의 기초에 두고, 거기에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類的本質)을 도입함으로써 현실적 인간학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그것과 함께 잊어서는 안될 것은 이 저서가 가진 헤겔 관념론의 비판이라는 측면이다. 포이어바흐는 이 저서의 여러 곳에서 헤겔의 사변철학(思辨哲學)이 본질적으로는 신학(그리스도교)의 모습을 탈바꿈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슈트라우스[편집]

(다비드 프리드리히) 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

19세기 독일에 있어서 헤겔 좌파의 종교학자이다.

튀빙겐 대학에서 슐라이어마허와 헤겔을 연구하였고, 1831년에 베를린으로 가서 헤겔 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1835년 27세 때에 주저 <예수의 생애>를 썼다.

슈트라우스의 근본 사상은 헤겔 철학과 유물론을 독특하게 종합한 위에 세워진 자연주의적 범신론의 입장이다. 그는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았지만 결코 무신론자가 되지는 않았다.

슈트라우스의 역사적 의의는 헤겔에게서 배운 변증법적 비판의 방법에 따라 복음서(福音書)를 비판하여 그 뒤에 오는 종교 비판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 있다.

예수의 생애[편집]

-生涯 (1835)

슈트라우스의 주저(主著).

슈트라우스는 이 저서 속에서 예수를 인간이라고 해석하고 복음서가 전하는 사실은 유대 민족에 있어서 초기 그리스도 교단의 민족의식이 만들어 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를 자연주의적 범신론의 입장에서 해석한 종교 비판이었다.

<예수의 생애>가 간행되자 그것은 슈트라우스가 의도하였던 헤겔 변증법을 복음서의 역사에 적용한다고 하는 순학문적(純學問的) 의미의 종교 비판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 독일에서 반(反)봉건적인 정치적·사회적인 변혁의 기운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예수의 생애>는 그리스도교를 어디까지나 헤겔 철학에 의해 합리화하려던 당시의 헤겔 학파에 커다란 충격을 주어 헤겔 학파가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

슈티르너[편집]

Max Stirner (1806-1856)

본명은 슈미트(Jahann Kaspar Schmidt). 19세기의 독일 헤겔 좌파의 철학자로서 무정부주의 사상의 선구자이다.

가난한 악기 제작공의 아들로서 서부 독일의 바이로이트에서 출생하였다. 1819년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여학교 교사가 되었다. 1843년쯤 비우어 형제를 중심으로 한 헤겔 좌파에 속하는 급진적 인사들과 교제하게 되었고 1845년에는 주저(主著)인 <유일자(唯一者)와 그 소유>를 써냈다.

이 즈음의 슈티르너는 포이어바흐와 논쟁을 벌이는 등 일약 명성을 떨쳤으나 1848년 3월혁명 이후에는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고 빈곤과 실의 속에서 죽었다. 슈티르너의 근본 사상은 모든 외적 권위를 부정하고 다만 자아의 권위만을 인정하는 철저한 개인주의이다. 그 의의는 개인주의와 무정부주의 입장에서 종교 비판과 정치 비판에 있다.

슈티르너에 따르면 단지 개인 및 자아만이 진실한 존재이다. 참다운 자유인이란 자아로서의 유일자인 개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요구하는 견해는 결국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다 하여 필연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유일자와 그 소유[편집]

唯一者-所有(1845)

슈티르너가 이 저서를 쓴 것은 39세인 헤겔 좌파의 철학자였던 때이다.

이 저서에서 의도하는 바는 포이어바흐가 말한 최고 존재로서의 인간을 더욱 자세하게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거기에서 끌어낸 결론은 '나의 일은 신적인 것도 인간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나의 일이다. 나에게서 나 이상의 일은 없다'라고 하는 철저한 개인주의의 입장이었다. 즉 개인·자아만이 진실한 존재이며 참다운 자유인이란 자아로서의 유일자 이외의 것은 아니다.

슈티르너의 이와 같은 주장은 무정부주의 사상의 선구로서 바쿠닌과 크로포트킨 등 무정부주의자에게 영향을 끼쳤다.

자연과학적 유물론[편집]

自然科學的 唯物論(俗流唯物論)

1848년 혁명 이후 독일 국민은 대공업과 자연과학을 더욱더 발전시켜 나갔다.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바야흐로 대두하고 있던 신흥 국민의 계몽철학으로 등장하였다. 헤겔과 셸링의 고전철학에 염증을 느껴 왔던 그들 자유 지식인들 사이에 이 유물론이 크게 유행하였다.

자연과학적 유물론의 본질은 의식과 사고 등 심적 현상을 에너지 불멸의 법칙이라는 자연법칙으로 환원하려고 하는 기계론적 유물론이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본래의 유물론을 비속화하고 속류화(俗流化)한 것이라 해서 속류유물론이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자연과학적 유물론자로서는 포크트, 몰레스코트, 뷔히너, 디 보어 레이몬(1818-1896) 등이 있다.

포크트[편집]

(카를) Karl Vogt (1817-1895)

19세기 독일의 자연과학적 유물론자이며 동물학자이다.

영혼(의식)이란 에테르상(狀)의 실체라고 주장한 생리학자 바그너와, 뇌수(腦髓)의 기능일 따름이라고 반대한 포크트와의 '유물론 논쟁'은 당시의 독일지식계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포크트의 유물론은 "사상의 뇌수에 대한 관계는 담즙(膽汁)의 간장에 대한 관계와 같다"고 말한 속류유물론의 속물성을 적나라하게 노출한 것이다.

몰레스코트[편집]

Jacob Moleschott (1822-1893)

19세기 독일의 자연과학적 유물론자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의사로서, 생명 현상은 모두가 화학적 과정으로 환원되어, 인간의 사유(思惟)도 뇌수에 받아들인 인(燐)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생리학적 유물론을 역설하였다. 그의 주저(主著)인 <생명의 순환>(1852)은 당시 독일의 급진적인 시민들 사이에 큰 영향을 끼쳤다.

뷔흐너[편집]

Ludwig B

chner (1824-1899)

19세기 독일의 자연과학적 유물론자이다.

다름슈타트의 의사였던 뷔흐너는 몰레스코트의 영향을 받아 모든 현상을 에너지 불멸의 법칙에 의지해 설명하려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사유까지도 중추신경의 물리적 운동일 따름이다. 그의 저서인 <힘의 물질>(1855)은 자연과학적 유물론의 보급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자연과학적 관념론[편집]

自然科學的 觀念論

독일 사상계에 있어서 자연과학의 영향은 19세기 중엽부터 뚜렷해졌다. 먼저 기계적 유물론이 제창되었으나 한편으로 그것에 이어서 자연과학의 입장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관념론과 양립 내지 조화시키려는 형이상학을 시도하는 사상이 19세기 후반에 나타났다. 이를 신형이상학파(新形而上學派)라고도 부르며 페히너, 로체, E.하르트만, 분트 등이 대표한다.

페히너는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셸링 등(특히 스피노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만물은 물체이면서 동시에 정신이며(物心竝行論 또는 汎神論), 신의 정신에 의해서 통일된다고 하였다.

로체는 라이프니츠, 페히너의 영향하에 있었고 하르트만도 셸링, 쇼펜하우어, 헤겔의 철학을 종합하여 진화론과 결부시켰다. 파울젠도 칸트, 쇼펜하우어, 페히너, 분트의 영향을 받아 그 계보를 이어가는 사람이다.

페히너[편집]

Gustav Theodor Fechner (1801-1887)

독일의 자연과학자·철학자이며, 정신물리학의 창시자이다.

필명은 독토르 미제스(Doktor Mises)라 하였으며, 루자티아의 그로스 자르펜에서 출생하였다.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의학과 물리학 및 철학을 배웠으며, 1834-1840년 라이프치히 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있다가 병으로 퇴직, 요양한 후에 철학교수가 되었다. 자극과 감각의 강도 관계를 수량화(數量化)하여 실험심리학 연구법을 확립하였다.

로체[편집]

Rudolph Hermann Lotze (1817-1881)

독일의 철학자.

작센의 바우첸에서 출생하였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생리학·의학·철학을 배우면서 페히너의 물리학 강의도 받았다. 모교에서 근무하였는데 1839년에 의학, 1840년에는 철학 강사였다가 1842년에 괴팅겐 대학, 그리고 1881년에 베를린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실재란 긍정(肯定) 또는 정립(定立)을 의미하고 그중 하나의 형태에 '타당(妥當)'이 있다고 하였다.

하르트만[편집]

(카를 로베르트 에두아르트 폰) Karl Robert Eduard von Hartmann (1842-1906)

독일의 철학자.

베를린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육군학교에서 배워 군대생활(1860-1865)을 하다가 병으로 제대한 후부터 철학에 전념하였다. 의지적이고 이성적인 무의식자(無意識者)를 근원으로 하여 만유(萬有)가 발전한다고 하는 <무의식의 철학>(1869)을 세웠다. 그 후에 인식론에 주력하여 '물자체(物自體)'를 인정하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분트[편집]

Wilhelm Wundt (1832-1920)

독일의 철학자로서 실험심리학의 건설자.

막스 분트의 부친으로, 바덴주(州) 네카라우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튀빙겐,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등 여러 대학에서 생리학과 철학을 배웠으며, 1857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강사가 되어 헬름홀츠의 조수로서 근무하였다. 1864년 조교수로 승진, 1874년 취리히 대학의 철학교수에 취임하였고, 이듬해부터 1918년까지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879년에는 이 대학에서 세계 최초의 심리실험실을 설치하였으며, 라이프치히와 만하임의 명예 시민이 되기도 하였다.

당초에는 J.P.뮐러(1801-1858)의 실험생리학과 헬름홀츠의 감각생리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어서 실험적 방법에 의한 생리학적 심리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것은 개인심리학이지만 민족심리학의 영역에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즉 한 민족의 언어·풍속·종교·신화·예술·법률 등을 그 민족정신의 표현으로 보았고, 이를 통하여 인간정신의 발달 법칙을 밝히고자 하였으나, 그것은 실험적 방법으로는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민족정신의 특수성은 인종학(人種學)·민족성격학의 대상으로서 민족심리학에서 제외되고 있다(<민족심리학>전10권, 1900-1921).

그는 학문을 형식의 학(學)으로서의 수학과 경험의 학으로 분류하여 전자를 후자의 기초학이라 하였고 또한 후자는 대상에 따라 자연의 학과 정신의 학으로 구분하여 이 양분야의 시점 차는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에 있다고 하였다. 정신의 학(學)은 사학(史學)과 사회과학으로 분류하고 심리학은 개별적 정신과학의 기초학으로 삼았으며, 특히 철학은 이상에 든 여러 학의 기본적인 문제를 인식론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 학문 계통은 2세기 전반까지 세계에서 심리학계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다.

생리학적 심리학 강요[편집]

生理學的心理學綱要 (1874-1911)분트의 주저로서 이 책을 간행한 그 해에 철학 교수의 지위와 아내(조피 마우)를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의학, 특히 병리해부학(病理解剖學)을 전공하여 185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한 후에 병리학 교실의 조수가 되었으나, 베를린 대학에서 J.P.뮐러 교수로부터 해부학과 실험생리학을 배웠을 때 비로소 철학에 대한 흥미와 생리학에 대한 의욕을 품게 되었다.

1857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생리학 강사가 되었는데, 그 무렵부터 칸트·헤르바르트,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사상에 관심이 쏠려 의학관계 논문에도 철학의 학설을 인용하기에 이르렀고,또 1863년에 <인간과 동물의 마음에 관한 강의>를, 그리고 1867년에는 <의학적 물리>를 공간하였다. 본 저서는 이상과 같은 경위를 밟아 성립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실체로서의 정신을 배제하여 개인의 의식 작용 또는 직접경험을 분석 대상으로 하였으며, 실험을 수단으로써 생리학을 보조적으로 사용하면서 단순한 구성 요소를 추상한 위에 그것들이 결합하여 심적 형상(心的形象)을 구성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構成的心理學).

또한 심적 요소가 결합한 결과 새로운 내용이 생긴다고(창조적 종합) 하여 그것은 의지에 의한다고 말하였다(主意的心理學). 본서를 요약한 <심리학 강요>(1896)를 통하여 세계의 심리학계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다.

마인랜더[편집]

Philipp Mainländer (1841-1876)

본명 필립 바츠(Philipp Batz) 독일의 철학자.

이탈리아 등지에서 상업에 종사한(1858-1863) 후 오로지 철학에 전념하다가 최후에는 자살하여 버렸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생부정(生否定)의 철학을 설파하였다. 즉 신은 비유(非有:영어 Nonbeing, 독어 Nichtsein)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지의 표현인 세계 과정 속의 모든 개체는 서로 싸우면서 약해지다가 드디어 파멸한다고 말하였다.

생을 부정하는 입장은 염세주의 또는 염세관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낙천관에 대립되는 개념이고, 사상사상(思想史上) 최대의 대표자는 쇼펜하우어였다. 세계 또는 인생의 의의가 그처럼 소극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첫째로 쾌락이 적은 대신 고통이 많다고 하는 이유에서이며, 둘째로 인성(人性)은 악한 것이어서 개선하기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도덕적 이상은 실현되지 않는다는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부르크하르트[편집]

(야콥 크리스토프) Jacob Christoph Burckhardt (1818-1897)

스위스의 역사가.

바젤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베를린 대학에서 랑케와 드로이젠(1808-1884)에게 배운 후 1844년부터 바젤 대학의 교단에 서게 되고, 1858년 동대학의 역사학 및 미술사 교수에 취임하였다. 이보다 앞서 1840년대의 이탈리아 여행이 전기(轉機)가 되어 중세 독일 미술로부터 고전적 이탈리아 문화로 관심을 옮겼고, 최초의 대작인 <콘스탄티누스대제(大帝)의 시대>(1853)에서는 고대 문화의 몰락을, <치체로네>(1855)에서는 이탈리아 미술을 논급한 데 이어 불후의 명저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에 의하여 르네상스 연구사상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였다.

그 후에도 주로 이탈리아의 건축을 주제로 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역사>와 <세계사적 고찰>(1905), <그리스 문화사(4권)>(1898-1902) 등에 결집된 미술사와 역사철학 연구를 계속하였고, 1893년에 바젤 대학의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랑케의 후임으로 초청을 받은 베를린 대학의 교수직도 사양하고 평생을 한 지방 대학에 머물렀는데, 그것은 에라스무스 이래의 인문주의적 도시인 바젤에 대한 애착과 비스마르크의 권력 정치에 대한 반발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편집]

-文化 (1860)

부르크하르트의 주저로서 '예술품으로서의 국가' '개인의 발전' '고대의 부활' '세계와 인간의 발견' '사교와 축제' '도덕과 종교' 등 6편으로 되어 있다. 르네상스란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며, 개인의 가치와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려고 하는 동향을 가진 장식화된 신문화의 개화였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뛰어난 민족정신이 고전 고대문화(古典古代文化)가 인도하는 바에 따라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만들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부르크하르트는 고전의 부흥을 신문화의 절대적 조건으로 삼지 않고, 가령 그것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신문화는 생성되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대문화의 영향을 빼면 그 전개의 실상(實相)은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화가 번영한 시기를 국가의 존재방식과 정치나 전쟁까지도 하나의 예술품으로 간주되는 것과 같은 인공(人工)의 정교함을 보여준 한 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가 말한 르네상스상(像)의 획기성은 르네상스를 '세계와 인간의 발견'에 입각한 신(新)정신 흥륭의 시대라고 본 미쉴레(1798-1874)의 구상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탈리아 인문학파(人文學派) 이래의 고전 부흥이라고 하는 르네상스관을 이에 접합하고, 고전 고대를 매개로 한 중세적인 침체로부터의 문화 부흥이라는 정설을 수립한 점에 있다.

또한 예술이 사라져 가는 소재 속에 영원한 모습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역사 또한 흘러가는 현실 속에 영원한 것을 결정해 간다고 생각한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고상한 문화 이념의 빛나는 발현이라고 칭찬하였다. 그것은 19세기 유럽 문명의 속물주의(俗物主義)와 현실주의에 대한 예술가적 역사가의 반발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론에 있어서 통설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에 대해서는 현대에까지 여러가지 반론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가 중세 문화와 르네상스 문화간에 단절을 강조한 데 대하여 양자를 연속적인 국면으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역사주의[편집]

歷史主義

원래 독일어의 '히스토리스무스'는 18-19세기 독일 사상계에서 계몽사상의 추상적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 새로운 경향, 즉 '역사에 있어서 개성과 발전에 대한 감각'으로써 특징지어지는 세계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상의 독일 국민 국가의 통일운동과 문예사상의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의 발전, 또한 이상주의 철학의 형성 등을 비옥한 토양으로 하여, 랑게를 정점으로 한 19세기 독일사학(史學)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독일사학은 통일의 성립으로 지도이념을 상실하고 본래의 정치사 편향이 더욱 강화되어, 유희적으로 말초적 사실(史實)의 탐색에만 몰두한 나머지 역사주의는 몰이념·몰체계한 상대주의와 동의어처럼 보이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트뢸치에 의하여 '역사주의의 위기'라고 불리게 된 까닭이며, 트뢸치와 마이네케(1862-1954)(<역사주의의 성립> 1936) 등의 사학가는 역사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의의를 지어 보려 했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역사주의는 여전히 불량한 면의 실증주의나 상대주의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짙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의 철학자 포퍼의 논문 <역사주의의 빈곤>(1944-1945)에서는 '히스토리니즘'이 오히려 지금까지의 용어법과는 정반대로 헤겔에서 마르크스까지를 포함한 모든 역사 법칙성 정립의 사관(史觀)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주의의 개념은 오늘날 혼미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오이켄[편집]

Rudolf Eucken (1846-1926)

독일의 철학자.

독일 북부 아우리히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고전문헌학(古典文獻學)의 연구에 뜻을 두었지만 후에 형이상학 방면에서 업적을 올렸다. 1871년에 바젤 대학의 철학교수가 되었고, 1874년에는 예나 대학으로 전임하였다. 연구 생활의 가장 충실한 시기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서양의 철학과 종교 사상을 역사적으로 개관한 주저 <대사상가의 인생관>(1890) 이외에 <정신생활의 통일성>(1888), <정신생활 내용을 위한 투쟁>(1896) <종교의 진리 내용>(1901) 등이 계속해서 그 시기에 간행되었고, 1908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20년에 퇴직한 후에는 강연과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예나에서 8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오이켄의 학설은 '생의 철학'의 일종으로 볼 수 있으나, 자연적인 생명현상이나 사회 생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연을 초월해서 고양된 정신생활과 그에 대한 고유한 가치를 중시한다. 이 점에서 그는 독일관념론의 전통 ―― 특히 피히테 철학 ―― 에 이어져 있으며, 당시에 유력했던 신칸트파의 주지주의에도, 그리고 자연주의나 유물론의 경향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오이켄의 말에 따르면 정신생활이란 하나의 새로운 현실이어서 자기의 내면적 충실을 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창조적 능동성을 가지고 있으나 개인적 활동을 초월한 공동생활의 목적을 실현키 위한 것이다. 정신생활에는 윤리적인 것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정신생활이 그것을 담당하는 한 윤리적 요소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활은 내면화(內面化)의 노고를 거쳐 비로소 가치있는 것이 된다. 종교의 참다운 내용도 절대적인 정신생활의 깊이를 시인하는 데에 존재하는 것이다.

오이켄은 세기말의 도덕적인 퇴폐나 절박한 자본주의의 위기 의식 가운데서 온 힘을 기울여 인생 전체에 걸치는 의의와 가치를 물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도 비인격화한 문명의 영위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해방해야 할 창조적인 정신생활의 근저를 직관할 것을 정열적으로 역설하였다. 그의 설은 한때 세계 각국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딜타이, 지멜, 베르그송, 니체 등의 '생의 철학'만큼 방법적인 새로움과 철저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다지 주목되지 않고 있다.

립스[편집]

(테오도르) Theodor Lipps (1851-1914)

독일의 심리학자·미학자.

독일 서부의 팔츠 출신, 1877년 본 대학의 철학 강사를 시작으로 연구생활에 들어가서, 1884년 브레슬라우 대학의 조교수, 1890년 정교수를 거쳐 1894년에는 심리학자인 시툼프의 후임으로 뮌헨 대학 정교수로 취임하여 뮌헨 심리학 연구소를 창설하였으며,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립스의 심리학은 현대의 심리학과는 달리 철학적 학문이며 그 과제는 체험을 내성(內省)한다고 하는 방법으로서 의식 생활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의 설에 따르면 의식생활은 내용과 작용으로 구별되는데, 이것은 단순한 의식이라기보다 자아에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이 체험자아(體驗自我)의 배후에는 이를 초월하여 이미 의식도 되지 않는 실재아(實在我)가 있다. 여기에서 립스의 철학적 경향을 확실히 찾을 수가 있다.

립스의 독창성은 미학(美學)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미학을 응용심리학으로 보았으나, 미를 단순하게 심리에 귀속한다고 말하지 않고 미적 가치의 독자성을 해명하기 위하여 감정이입(感情移入)이란 심라작용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20세기 초를 지배한 '감정이입 미학'의 대표자였다.

이 밖에 논리학과 윤리학에 관한 저작도 있고, 특히 그의 인격주의적인 윤리학설은 미적 가치를 해석하는 근저가 되고 있다.

그의 주저로는 <미학(美學)>(1903-1906), <심리학원론>(1903), <윤리학의 근본문제>(1899)가 있다.

미학[편집]

美學 (1903-1906)

립스의 미학에 관한 주저로서 심리학적 미학 및 감정이입 미학의 고전이다.

우리는 대상을 관조할 때 거기에서 감각적으로 표출된 내용이 직접 우리의 감정에 호소해 오는 것으로 포착한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의 감정을 대상에 투사하여 더욱이 그것을 대상에 속하는 것으로 체험한다는 것이다.

대상의 감각적 지식과 감정 표출이 이처럼 유추(類推)를 거치지 않고 결부되는 독자적인 심적 과정이 감정이입(感情移入)이며, 미적 영역에서 특별히 순수하게 나타난다.

이 작용의 전제가 되는 미적 관조의 특성을 미적 격재성(隔在性), 미적 객관성, 실재성, 미의 깊이 등의 다섯 가지로 들었다.

여기에서 립스의 예리한 통찰력을 느낄 수가 있는데 그중에도 미의 깊이는 인격적 깊이와 통하는 것이어서, 거기까지 도달함으로써 소재의 추(醜) ―― 소극적인 감정이입의 대상 ―― 도 미로 전환될 수 있다고 말한다. 립스 미학은 주로 향수(享受)의 미학이었으며, 그 내용은 '자기 가치감의 객관화'이다.

립스 미학을 계승하여 그것을 현상학적 방법으로 한층 더 정밀하게 연구하여 이른바 내부로부터 립스를 극복한 사람은 M.가이거(1880-1937)였다. 감정이입 개념에 접착된 '고전적 예술감각'에 대립적인 '추상작용'의 원리를 도입하여 립스를 비판한 사람은 보링거였다.

폴켈트[편집]

Johannes Volkelt (1848-1930)

독일의 미학자이자 철학자이다.

현재 폴란드의 영토인 가리치엔 출신이다. 빈과 예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수학한 후에 1879년 예나 대학 조교수가 되고, 1883년 바젤 대학, 1889년 뷔르츠부르크 대학, 1894년 라이프치히 대학 교수를 역임, 라이프치히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인 한스 폴켈트도 심리학자였다.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아 인식론, 형이상학, 미학, 종교철학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였으나 그의 전공은 미학이었다. 립스와 더불어 '감정이입 미학'의 대표자이지만 립스에 비하여 미와 예술에 대한 경험적 사실의 관찰 범위가 넓어서 이해하기 쉽다.

그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지식의 분석이며 그것은 두 기원으로부터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첫째로 경험적 데이터를 든다. 의식을 떠나서는 외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논리적 사고가 요구된다. 이것 없이는 지각의 소재를 지식으로 성립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폴겔트는 미적 영역에도 독자적인 객관성, 즉 감정 대상성이 있다고 보았고, 감정이입의 근저에는 '타아(他我)에 대한 확실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주저로는 <미학대계(美學大系)>(1905-1927), <미의식론(美意識論)>(1920)이 있다.

미학대계[편집]

美學大系 (1905-1927)

폴켈트의 대표적 저서로서 3권으로 되어 있으며, 감정이입설(感情移入說)에 입각한 심리학적 미학의 백미이다.

제1권은 기초편으로 방법론, 감정이입설, 미적 규범을 다루었고, 제2권은 여러가지 미의 다른 모습을 기술한 미적 범주론이다. 제3권은 예술 창작과 미학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논하고 있다. 후년에 가서 제1권의 내용은 개편되었는데 그 요점은 기술(記述) 태도를 현상학적으로 고치고 미적 감정이입의 논술을 정리하여 한층 더 보편적인 설명에도 이해가 가능한 원리로 한 점과 미적 규범의 사상을 인간학적 색채가 짙은 것으로 했다는 점이다.

폴켈트는 감정이입의 감정을 ―― 립스와는 달리 ―― 현실의 감정이 아니고 현실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의 확실감'을 포함한 표상이라고 생각하였다.

대상이 인간인가 아닌가에 따라 '본래적 감정이입'과 '상징적 감정이입'으로 구별하고 또 미적 감정 전체를 예를 들면 극중 인물의 희로애락과 같이 표정에 이입된 '대상적 감정' 외에 인물의 운명에 대한 사랑·미움이나 동정·반감으로서의 '관여 감정'과 관객의 내적 상태의 고양(高揚) 및 진감을 표시하는 '상태 감정'으로 분류한다.

이 저서는 미를 유일한 원리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수의 원리를 예상하여 미적 체험의 사실을 될 수 있는 한 충실하게 기술하려고 한 점에 특색이 있으며, 이론적 구성의 묘미는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분석된 결과는 경청할 만한 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