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근세의 사상/19세기 영·불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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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편집]

18세기 후반 특히 7,80년대부터 먼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드디어 전 유럽으로 파급해 갔다. 산업혁명이란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자연력의 개발이 진척된 결과 생긴 것이다. 갈릴레이 시대의 자렛대나 활차(滑車)나 수차(水車) 및 풍차가 19세기에는 증기기관, 전기력, 내연기관(內燃機關)으로 대체되었다. 화학공업이 등장하고 봉건적 체제로부터 농업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이들 각 방면에 걸친 기술적 변혁은 결국 대규모의 경제적·사회적 변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공업생산력의 비약적인 증대에 따라 생산양식에 변화가 나타나서 산업자본에 의한 대규모의 공장 생산양식이 발전한다. 그리하여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가 기본적인 생산관계가 되어 자본주의사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에 따라 시민사회의 기초가 굳어지고 아울러 사회의 패권을 장악하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산업 부르주아지가 등장한다. 이 산업 부르주아지의 사상적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이 영국에서의 공리주의(功利主義) 및 프랑스에서의 실증주의 철학 사조이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이란 뉴턴의 자연철학 방법, 즉 경험적 방법을 인간문제에 적용함으로써 '인간학'을 확립하려던 흄의 방향을 더욱 발전시키고 철저하게 한 데에서 생겨난 근대 시민철학의 한 이론적 귀결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실증주의 철학을 완성시킨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이 콩트인데 그에 의하여 19세기의 과학기술을 근본적으로 떠받치고 있던 정신, 즉 실증주의 정신에 새로운 철학적 기초가 주어졌다. 그런데 일찍이 산업혁명을 맞이했던 영국에서는 19세기 중엽이 지나면서부터 자본주의의 모순이 벌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자유경쟁이 생산과잉을 일으켜 공황이 닥쳐왔고, 동시에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적 대립이 뚜렷해졌다. 이러한 사회의 모순을 자각함에 따라 새로운 비판세력이 대두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현존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에서 미래의 이상적인 사회상을 구상하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하여 각각 예술가적인 기질에 의한 개인주의적 반역을 시도한 바이런(1788-1824), 쇼펜하우어, 니체 등이다. 러셀은 전자를 합리주의적 반역, 후자를 낭만주의적 반역이라고 불렀다.

19세기의 프랑스 철학[편집]

-世紀-哲學

19세기의 프랑스 철학에는 네 가지 큰 조류가 있다. 주로 대학 교수들에 의해서 주장된 유심론과 가톨릭 교회의 철학 그리고 유물론과 실증주의이다.

제1의 유심론은 프랑스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자유시민의 철학인데 18세기의 계몽철학이나 유물론에 대하여 그것을 대신하는 것으로 영혼의 불멸이나 신의 존재 및 도덕적 자유를 주장하였다. 나폴레옹의 제1제정 이래 대학 교수인 루아이에 코라르와 빅토르 크장에 의하여 제창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지배적인 공인(公認) 철학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세기말에는 부트루(1845-1921), 베르그송, 블롱델, 브랑쉬비크 등의 철학자를 배출하였다.

제2의 가톨릭 교회의 철학은 귀족적·왕정적(王政的)·승려적인 복고주의를 반영하고 합리주의는 필연적으로 무신론으로 통한다고 간주하여 반이성주의와 전통주의로 기울어진다. 19세기 전반에는 보날(1754-1840)과 메스트르(1753-1821)가 유심론과 지배적인 지위를 다투었으나 후반에는 점차로 세력을 상실하여 이 경향은 오히려 토마스 주의(主義) 주변에서 조직된다. 19세기 전반에는 이 경향 속에서 라므네(1782-1854)처럼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를 제창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제3의 유물론은 18세기의 프랑스 유물론이 왕정복고기나 나폴레옹의 제2제정기에 진보적인 지식인들에 의하여 속류화(俗流化)되어 계승된 것이다. 이것은 결코 공공연한 철학적 체계로 제시된 것이 아니고 남모르게 청년교육의 장소에서 주장되거나 과학 연구를 통하여 제시되었다. 예컨대 인류학자인 앙드레 르페블이 이러한 흐름에 속한다. 이 사조는 유심론과 가톨릭의 철학에게는 공포의 표적이었으나 1870년 이후 서서히 사회주의적 유물론으로 바뀌어 갔다.

제4의 실증주의는 관념론(제1과 제2의 사조)과 유물론(제3의 사조)의 중간에 위치하여 일체의 형이상학적 신앙을 배척함과 동시에 원인과 본질의 인식조차 단념하고 관찰된 제 현상간의 항상적(恒常的)인 상관관계만을 인식하려고 한다. 콩트와 리트레(1801-1888)에 의하여 제창된 이 철학은 비(非)그리스도교화한 광범한 중간층의 입장을 표현하였고, 세기 후반에는 유물론의 혁명화에 의하여 유심론에 접근하면서 사회학이란 형태를 취하여 공인된 유심론과 더불어 대학 교단까지도 지배했는데 그 대표자가 뒤르켐이다.

이데올로기스트[편집]

Ideologist

프랑스 혁명 당시에 콩디약, 달랑베르, 콩도르세 등의 흐름을 도입해서 일어난 철학적·정치적인 그룹으로 관념학(이데올로기)파라고 불린다. 데스튀트 드 트라시, 카바니스, 보르네 등이 그 대표자이다.

이 학파는 형이상학과 정신의 실체성에 관한 학설로서의 심리학을 배제하고 의식의 제 상태로서의 관념(이데)을 분석하여 그 기원을 감각적 경험에서 구하고 그에 입각하여 생리학에서 윤리학·정치학에 이르는 모든 학문을 조직하려고 했다.

대사상가는 없었지만 학설은 메느 드 비랑에게 계승되어 유심론을 거쳐 실증주의에서 신유심론(新唯心論)으로의 흐름을 준비했다. 이 학파는 보나파르트파였으나 나폴레옹이 제정(帝政)을 뜻하자 그것을 비판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이 학파를 이데올로그라고 불러 그를 경멸하였다. 그로부터 이 말은 관념뿐으로 실행력이 없는 공상가를 의미하는 데에 쓰여지게 되었다.

데스튀트 드 트라시[편집]

Antoine Louis Claude Destutt de Tracy (1754-1836)

프랑스의 철학자·심리학자.

콩디약, 달랑베르 등의 견해를 계승하여 관념의 기원을 감각에서 구하고 특히 신체 운동·노력의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감각에서 일반 관념에 이르는 의식의 발생 과정을 분석하여 관념 연합의 원리에 따른 심리학에 의하여 총합하고 이것을 모든 과학의 기초학이라고 생각하여 이데올로기(관념학)라는 명칭을 붙였다.

카바니스[편집]

Pierre Jean Georges Cabanis (1757-1808)프랑스의 철학자·심리학자·의학자.

프랑스 관념학파의 한 사람. 기계론적 유물론, 감각론적 인식론에 의하여 인간의 생리학적 연구에 진력하여 정신에 대한 물질의 근원성(根源性)을 주장하고 "개념은 모든 감관(感官)을 통하여 형성되며 따라서 감각의 결과이다"라는 사실을 임상적·생리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생리학적 심리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

메느 드 비랑[편집]

Francois Pierre Maine de Biran (1766-1824)본명은 고체 드 비랑.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쥐라크 출신으로 파리에 나와서 근위사관이 되었고 나폴레옹 치하에서는 베르쥐라크 군수를 지냈으며, 왕정복고 시대에는 하원의원과 참의원으로 활약하였다. 사상가로서는 프랑스 관념학에서 출발하여 습관을 수동적 습관과 능동적 습관으로 구별해 정신의 능동성·자발성을 인정함으로써 관념학의 유물론적인 경향을 반대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정신의 작용을 기본적 사실로 하여 의식의 중심을 '노력'이라는 원시적 사실에서 구해 "나는 욕구하고 일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심리학을 떠나 이 개별적 자아를 그 형이상학적 본질에서 포착하여 주의주의적 내성철학(主意主義的 內省哲學)에 의하여 인간을 형이상학적으로 규정한다고 하는 독특한 유심론을 전개하였으며, 결국은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에 이르렀다.

인간학신강[편집]

人間學新講 (1823-1824)

메느 드 비랑은 프랑스 관념학파의 입장에서 습관의 분석에 의하여 습관을 수동적·감성적인 면과 능동적·의지적인 면으로 나누고 양자의 대립 가운데에 의식의 근본적 사실을 인정하여 '노력'의 의식을 그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존재는 '욕구하고 일한다'는 것에 의하여 증명된다. 그러나 이 개별적 사실을 출발점으로 하여 형이상학적 범주의 기초를 부여하려 할 경우 그 보편성은 심리학적 설명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여기에서 심리학을 초월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인간학을 전개한 것이 바로 이 저서이다.

다시 말하면 메느 드 비랑은 앞에서 말한 인간에게 있는 수동성과 능동성의 대립에 입각하여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고 거기에 형이상학적 한계를 그었다. 수동적·무의식적 감각 능력이 있고 필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동물적 생'과, 능동성과 수동성, 자유와 필연이 대립하는 '인간적 생'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후자에 있어서는 그 의식 사실의 중심을 이루는 의지적인 '노력'에 의하여 정신은 물질을 이긴다. 그리하여 물질에 대한 정신의 독립성이 확보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지의 자유가 형이상학적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생'에서부터 다시 인간정신의 본원적 상태로서 신(神)과의 합일(合一)에 의한 '영적 생'이 구별되는데 중점은 전2자간의 구별에 있으며 내성철학에 의한 이 인간 연구의 방법은 베르그송에 의한 실재(實在) 일반의 파악 방법으로 전개된다.

절충주의 철학[편집]

折衷主義-哲學

19세기 전반 프랑스에서 루아이에 코리르, 쥐프루아는 메느 드 비랑의 내성철학을 기초로 하여 리드로 대표되는 영국의 상식철학(常識哲學:스코틀랜드 상식학파의 철학), 즉 인간에게 보편적인 공통 의식으로서의 상식(常識)을 학적 인식의 기초로 보아서 일상인(日常人)의 실재론적 신념을 지지하는 학설을 포용, 결합하여 내성(內省)에서 출발하여 보편적·정신적 실재에 도달하려는 유심론적 형이상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이에 의하여 회의론에 대항하였고 당시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던 종교와 도덕을 지키려고 하였다. 이 절충론에 다시 독일관념론을 첨가하여 17세기 고전적 사상가에 접근하려고 한 사람이 빅토르 크장이었다. 이 이상주의적 유심론적 '절충주의'를 수립한 크장은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의 전집 편찬, 파스칼의 작품 간행, 프랑스에서 칸트 철학의 소개 및 철학사 강좌 확립 등에 공헌하였으며, 또한 그 후의 강단철학(講壇哲學)의 선구를 이루었다.

공상적 사회주의[편집]

空想的社會主義

19세기 전반에 나타난 사회주의 사상.

대표자는 프랑스의 생 시몽과 푸리에, 영국의 오언.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 주의)의 창시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하여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혹은 단순히 '공상적 사회주의'라 불렸고, 레닌은 마르크스 주의의 세 원천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였다. 이 사회주의가 '비판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일정한 정면적(正面的)인 비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며 생 시몽과 그 제자들(특히 바잘, 1791-1832)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나 착취를 비판하였고, 푸리에와 그 후계자인 콩시데랑(1808-1893)은 상업과 산업의 무정부성을 고발하였으며, 오언도 자유경쟁과 사적 소유를 비판하였다.

이들 비판에는 예리한 통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주의가 '공상적이라 불리는 것은 먼저 이 비판이 직관적인 묘사에만 그쳐서 자본주의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를 이론적으로 분석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자세하게 구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사회에서 미래의 이상사회로 가는 도정(道程)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실 사회 가운데서 이상경을 부분적으로 실현하는 실험과 이 실험에 의한 설득으로 이상사회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이유로 유력자의 재력에까지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변혁을 계급투쟁의 활동 속에서 포착한다고 하는 정치의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공상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원래 이 사회주의는 노자(勞資)의 계급대립의 미발달이라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스스로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하기보다도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고찰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통찰은 이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의 한 원천이 되게 한다.

생 시몽[편집]

Claude Henri de Rouvroy de Saint-Simon (1760-1825)

프랑스 19세기 초엽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가난한 몰락 귀족의 아홉 형제 중 차남으로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적에 백과전서파의 한 사람인 달랑베르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16세 때 군에 입대하여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하였다. 프랑스 혁명 때에는 자진하여 백작의 칭호를 버렸으나 정치활동과는 거의 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산업시설과 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국유지의 매매에 관련된 투기로 돈벌이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1793년 혁명정부에 의하여 11개월간 투옥당하였다.

지적 활동에 들어가는 것은 1798년(38세)부터인데 먼저 '물리정치학(物理政治學)'을 구상하여 학자들과 사적으로 교제하면서 물리학과 생리학을 배웠다. 1802년에 과학이나 예술의 천재를 옹호할 계획을 <주네브 사람의 편지>에 발표하였다. 이후 빈곤한 가운데서 사상 형성을 위해 노력, 1814년에 <유럽 사회의 재조직에 대하여>를 역사가 티에리(1795-1856)와 공저하여 유럽적 규모의 의회 설립에 의한 평화를 구상한다. 1816년의 <산업>이후 <산업체제론>, <산업자의 정치적 교리 문답> 등으로 이른바 산업주의를 전개한다. 이것은 토지귀족이 지배하는 구사회에 대체하여 '산업자(자본가와 노동자)'가 지배하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인데, 그로써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와 사회의 자의적(恣意的)인 운영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와 사회에 있어서 생산의 의식적 운영으로 교체되어, 국가의 경찰적 기능은 소멸된다고 하였다.

1823년에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실의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여 한쪽 눈을 잃었고, 1825년 최후의 저작인 <신그리스도교>를 출판한 지 약 1개월 후에 사망하였다.

신그리스도교[편집]

新-敎 (1825)

생 시몽의 최후의 저작으로서 주저 가운데 하나. 원래는 <문학적·철학적·산업적 의견>(제1권, 1825)이라는 논집 가운데 제2권의 일부가 될 예정이었으나 다루어지는 주제의 긴급성에서 독립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더구나 '제1의 대화'만이 포함되고 계속하는 제2, 제3의 대화는 결여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원리는 "사람은 서로 형제처럼 지내야 한다"고 하는 계율에 있고, 이 계율로 보아서 사회의 최대 다수자 또는 가장 가난한 계급의 정신적·물질적 생활의 개선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참다운 정신에 적합하며, 특히 실증과학의 진보와 양립될 수 있는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비판하였다.

푸리에[편집]

Fran

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

19세기 초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유복한 모직물 상인의 외아들로 프랑스 동부의 브장송에서 출생하였다. 1791년 19세 때 리옹의 어떤 상사(商社)의 외무사원이 되었다. 1793년 부친의 유산으로 리옹에서 상사를 차렸으나 프랑스 혁명의 소동으로 상품을 징발당하여 파산한다. 그 후에도 사용인으로서 상업실무에 관계하거나 중매인이 된다든가 하여 상업 투기의 기만성을 체험한다. 이 체험에서 사적 소유에 기초를 둔 상업의 무정부성이 그의 자본주의 비판의 요점이 되었다.

1808년에 <4운동의 이론>을 발표하였고, 또 1822년 간행한 주저 <농업가족집단>(개정 증보판 <보편적 통일의 이론> 1834), 기타 저서와 논문으로 집단 소유에 입각한 파랑쥬라는 명칭의 공동조합 제도를 구상하였다.

4운동의 이론[편집]

四運動-理論 (1808)

푸리에가 최초로 간행한 대작이나 익명의 자비 출판이었다. 1799년경부터 새로운 사상을 배양하고 있던 푸리에는 이것을 8개의 메모 형식으로 발표할 계획을 세웠다. 그 가운데 최초의 둘은 새로운 취지의 견해이고 나머지 여섯 개의 메모로 집단적 조합제도를 해설할 예정이었다. 이 저서는 제1의 메모에 불과하지만 그의 학설의 본질적인 점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푸리에 자신은 그 후에 본 저서에서의 견해를 여러 점에 대하여 개정 보완하여, 이 저서를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

4운동이란 사회적·동물적·유기적·물질적의 네 가지 운동법칙(총괄하여 일반적 운명이라 부른다)을 말하며, 이 저서는 사회적 운동법칙을 주제로 하여 전체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사회 발전의 제 단계를 문제로 한 제1부, 남녀 양성의 연애관계 및 가족관계를 문제로 한 제2부, 상업 비판을 한 제3부로, 그것들을 통하여 문명제도의 모순되고 전도된 성격이 기지에 넘치는 독특한 용어로 고발되고 있다.

오언[편집]

(로버트) Robert Owen (1771-1858)

영국의 공상적 사회주의자·협동조합주의자.

북웨일스의 뉴타운에서 출생하였다. 청년시대에 방직관계의

수업을 쌓아 1800년부터 약 25년간 뉴 라나크 방직공장을 경영하는 한편 노동관계의 개선과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에 진력하였다. 그는 자기의 공장에서 노동자와 부인 및 소년노동자의 좋지 못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갖가지 규정과 설비를 두어 1819년에는 자기의 공장에서 공장법(工場法)을 제정하였다.

그는 처음에 이와 같은 실험을 하도록 지배 계급에게 호소하여 그들의 찬동을 얻고자 한 사회개혁가에 불과하였으나 이윽고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즉 북미의 뉴 하모니에 공산촌(共産村)을 건설(1825-1828)한다든지 협동조합운동의 일환으로 '노동교환소'를 설립하여(1832) 공정한 생산물의 교환을 기도해 보기도 했지만 모두가 단기간으로 실패해 버렸다. 또 1832년부터 1834년에 걸쳐 노동조합운동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영국 최초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라 하겠다.

신사회관[편집]

新社會觀 (1813-1816)

오언의 주저. 이 저서는 유럽 여러 나라의 지도자에게 보내어졌다. 오언은 그가 경영하는 뉴 라나크 공장에서 노동시간의 단축과 유년노동의 폐지 등 여러가지 개선을 시도했는데 그러한 실험의 성공이 이 저서의 토대가 되고 있다.

오언의 사상에는 벤담 등의 공리주의와 온건한 개량주의(改良主義)의 영향도 엿보이지만 노동 문제와 자본주의 사회 자체에 대한 태도에는 차이점이 있다. 즉 그는 실업(失業)에 대하여 "참다운 국민적 효용을 갖는 일을 준비하는 것은… 정부의 첫째 의무"라고 하여 공장법의 제정, 그 밖의 시책을 정부에게 권유하였다.

또한 그는 환경이 인간의 성격을 형성한다고 보는 신조에서 '국민교육' 문제를 제기하여 자본주의적 자유경쟁이 인간상호간의 연대(連帶)와 협력을 상실케 한다고 하여 환경=자본주의 사회의 불비점을 시정하라고 역설하였다.

실증주의[편집]

콩트[편집]

Isidore Auguste Marie Fran

ois Xavier Comte (1798-1857)

19세기 중기의 프랑스 실증주의 철학자·사회학자.

프랑스 남부의 도시 몽페리에서 세무서의 하급 세리(稅吏)를 부친으로, 독실힌 가톨릭 교도를 모친으로 하는 왕당파적인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까지 출생지의 학교에서 고전학(古典學)과 수사학 등을 배웠고, 특히 수학에는 천분을 발휘하였다. 1814년 프랑스 혁명 중에 창설된 고등이공과학교(高等理工科學校)에 입학하여 무신론자·공화주의자가 되는데 왕정복고에 의하여 학교가 해산을 당하여 겨우 1년 반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재차 파리로 나온 콩트는 1817년 생 시몽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그를 돕지만 두 사람의 견해에 차이가 심해져서 콩트의 <사회 재조직을 위한 과학적 작업계획>의 발간을 계기로 1824년에 결별하였다.

이 논작을 콩트는 '기본적 소논문'이라고 불러 그 의의를 강조하였는데, 진보와 질서의 통일에 의한 사회 재조직이라는 기본적인 입장이 나타나 있다. 사회의 이러한 재조직을 위하여 콩트는 먼저 철학적 체계를 세울 필요가 있다고 하였지만 생 시몽은 직접 사회의 변혁을 지향했던 것이므로 여기에 양자의 의견이 대립한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생 시몽과 이별한 콩트는 일정한 수입이 없는 여의치 못한 가계(家計), 불행한 가정생활, 자주 엄습하는 정신착란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실증철학 체계의 구성에 진력하여 1830년부터 1842년에 걸친 12년간에 <실증철학 강의> 6권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실증주의의 일대 금자탑으로서 의의가 큰 문헌이다. 이 실증주의를 일반인용으로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이 <실증정신론(實證精神論)>(1844)이다. 이들 문헌에서 콩트는 모든 억측이나 선입견을 배제하고 사실의 관찰과 거기에 존재하는 항상적인 법칙의 인식에 의한 합리적 예견(豫見)을 목적으로 객관주의적인 실증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원래 어떤 통일 원리에 의한 총합적인 철학체계를 추구하였던 콩트는 객관주의적인 지성의 한계를 주관주의에 의하여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 후기에는 주관주의적 실증주의를 전개하였다. 후기의 주저는 <실증정치체계> 4권(1851-1854)이며 거기에서는 '위마니테(人間性)'를 숭배 대상으로 삼는 '인간교(人間敎)'가 제창되었다.

실증철학강의[편집]

實證哲學講義 (1830-1842)

실증정신론[편집]

實證精神論 (1844)

콩트의 주저. 콩트는 실증주의에 입각한 철학체계를 소수의 청강자를 자택에 모아 동년 4월 2일에 제1회 강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정신병이 발작하여 2회의 강의로 중단하였다. 강의는 1829년 1월 4일에 재개되어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에 열어 합계 72회로 완료하였다.

이 일련의 강의 가운데 개강 연설은 1829년 11월 <레뷔 앙시크로페디크(百科全書評論)>란 잡지에 발표되었으며, 그 계속은 18권의 분책에 인쇄되고 전체가 가철(假綴)되어 <실증철학강의> 제1권으로 1830년 7월에 간행되었다. 속권은 역시 그 강의에 입각하여 잇달아 간행되었는데 전체는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다.

즉 제1권(제1과-제18과)은 일반적 서론과 수리(數理)철학, 제2권(제19과-제34과)(1835)은 천문철학과 물리철학, 제3권(제35과-제45과)(1838)은 화학철학과 생물철학, 제4권(제46과-제51과)(1839)은 사회철학의 이론 부분, 제5권(제52과-제55과)(1841)은 사회철학의 역사적 부분, 제6권(제56과-제60과)(1842)은 사회철학의 보충과 일반적 결론.

이 저서의 과제는 수학(數學)에서 점차로 복잡한 여러 과학으로 실증주의의 원리를 일관시켜 제 과학의 총합으로서 실증철학체계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특히 마지막 3권은 사회현상에 관한 이 과제의 수행으로서 사회학의 구상으로 유도하여 갔다.

한편 콩트는 1830년 이래 민중 교육을 위하여 설립된 '고등이공과학교협회(高等理工科學校協會)' 창설자 중 한 사람으로서 천문학 강의를 담당하여 1848년까지 구청 사무소에서 강의를 하였다. 이 강의의 개강 연설이 1844년 2월에 <실증정신론>으로 간행되었고 다시 동년에 강의 전체가 <통속(通俗) 천문학 철학 요론>으로 간행되어 <실증정신론>은 그 서론에 수록되었다.

이상과 같이 간행된 사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증정신론>은 본래 일반 민중에 알맞은 실증주의의 해설인데 콩트 자신이 그것은 <실증철학강의>에서 나타난 광대한 체계와 사상, 압축은 되어 있지만 충실한 제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증정신론>은 3편으로 되었는데 제1편은 실증정신의 지적 우월성을, 제2편은 그 사회적 우월성을, 제3편은 실증학파 도래의 제 조건을 다루고 있다.

콩트에 의하면 실증성은 다음의 것을 의미한다. 먼저 '부정적'에 대하여 '조직적'이라는 것이며 비판과 논쟁 대신 단결과 통일을 구하는 사상으로, 이것은 콩트의 경우 인류 통일의 메시아적 사상과 결부된다. 그러나 이 인류 통일의 이상도 시간에 있어서의 상대성 원리에 의하여 상대화되고 상대화됨으로써 현실화되어야 한다. 고상한 인류애도 시대에 따라서 현실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절대적'에 대한 '상대적'과 '공상적'에 대한 '현실적'이 실증성의 성격이 된다.

더욱이 상대주의적 현실주의는 인류에게 유익한 인식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무익'에 대한 '유익'이 또 하나의 성격이다. 유익한 인식은 법칙의 인식에 입각한 합리적 예견이 목표이며 그것은 '막연'이 아니고 '정확', '불확실'이 아니고 '확실'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와 같은 인식은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고, 그리하여 지적 공동이라는 인류 통일의 기초를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되었다.

뒤르켐[편집]

Emile Durkheim (1858-1917)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의 학계에서 활약한 사회학자.

프랑스 동부 보주현(縣)의 도시인 에피나르에서 유대계 가문에 태어났다. 1882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상스, 상 칸탄 등의 국립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며, 1885년부터 1년간 독일에 유학하여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1887년 보르도 대학 강사로 초청되어 '사회과학과 교육학'이란 강의를 담당하였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대학에서 최초로 실시된 사회학 강의였다. 1896년에 이 강의는 정식 강좌가 되었으며, 뒤르켐은 결국 프랑스에서 최초의 사회학 정교수가 되었다.

그 동안에 학위논문인 <사회적 분업론>(1893)과 <자살론>(1897) 등을 간행하여 학계에서 사회학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사회는 모두가 도덕적 사회라는 관점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행위 규범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학을 구상하여 제3공화정치하에서 프랑스의 도덕적 재생을 기도하였다. 1902년부터 파리 대학에서 강의를 담당하여 사회학과 교육학을 가르치면서 <사회학 연보(社會學年譜)>를 창간하였으며, '뒤르켐 학파'를 형성하여 노동자 생활을 문제점으로 한 아르프바크스 등 많은 후계자를 배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빼앗긴 실의 속에서 자신도 병사하였다.

종교생활의 원초형태[편집]

宗敎生活-原初形態(1912)

뒤르켐의 주저. '서론'에서 원시 종교를 연구하는 의의는 종교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라 하였고, '제1편 전제(前提) 문제'에서는 종교의 본질을 신의 관념에서 추구한 종래의 견해를 비판하여 그것은 성(聖)과 속(俗)이라는 관념의 대치(對置)에 있다고 하였다. 특히 종교의 원초형태는 정령숭배(애니미즘)나 자연숭배(내처리즘)에 있다고 하는 견해를 비판하고 그것을 오스트레일리아의 씨족사회에 존재하는 토테미즘에서 구한다.

토테미즘이란 여러 씨족이 일정한 동물 혹은 식물을 숭배하여 그것을 자기 씨족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또 자기들은 그러한 동물 또는 식물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 사실을 가리킨다. '제2편 원초적 신념'은 그러한 토테미즘의 연구에 할당된 것인데, 그 토테미즘은 미개사회에 널리 볼 수 있는 '마나'라고 부르는 비인격적인 신비스러운 힘에의 신앙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토테미즘이 하나의 신비적인 힘을 가지는 근원은 개인을 초월한 사회의 도덕적 힘에 있다고 하였다.

제3편에서는 원시종교의 의례(儀禮)가 연구되었다. 종교의 본질을 사회 자체에서 추구한 연구로서 유니크한 것으로 뒤르켐 학파의 종교 사회학의 기초를 구축하였으며, 애니미즘에 선행하는 것으로서의 토테미즘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나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견해에는 문제점이 있어 학계의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타르드[편집]

Jean Gabriel Tarde (1843-1904)

19세기 말의 프랑스 범죄학자·사회학자.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현(縣)의 사르라에서 사법관을 부친으로 하는 명문 태생이다. 툴르즈 법과대학 등에서 법률학을 전공한 후에 50세까지 고향에서 사법관의 직위에 있었고, 1894년 사법성(司法省) 범죄통계국장이 되었다. 그 동안에 <비교범죄학>(1886), <형사철학(刑事哲學)>(1890) 등을 간행하여 범죄의 원인을 선천적인 성격에 귀결시키려고 하는 견해를 비판하여 범죄의 사회적 원인을 중시하였다. 또한 1890년에는 <모방(模倣)의 법칙>을 간행하여 사회학자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또 군중(群衆)과 공중(公衆)의 차이점과 세론(世論)의 역할에 대해 논한 <세론과 군중>(1901)을 저작하여 뒤르켐과 더불어 근대 프랑스 사회학의 대표자가 되었다. 뒤르켐이 개인을 초월한 도덕적 구속력을 중시한 데 대하여 타르드는 사회를 개인간의 심적 상호 작용으로 보는 입장에 섰다. 타르드의 견해는 미국 사회학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으며, 1900년 콜라주 드 프랑스의 현대철학 강좌 교수로 임명되었다.

모방의 법칙[편집]

模倣-法則 (1890)

타르드의 주저. 이 저서의 주요한 사상은 타르드가 <철학평론>이란 학술잡지에 발표하였던 것인데 제1장 '보편적 반복'과 제3장 '사회란 무엇인가', 그리고 제4장 '역사란 무엇인가'와 제5장 '모방의 논리 법칙'은 1882년부터 1888년에 걸쳐 앞서 말한 잡지에 발표한 논문에 가필한 것이며 그 밖에 4장이 첨가되어 있다.

타르드에 의하면 사회는 모방·투쟁·발명의 세 가지 과정을 갖는다. 사회 성립은 성원간(成員間)의 유사(類似)를 전제로 하고 이 유사는 모방에서 생긴다. 그러나 모방된 것은 투쟁으로 유도되어 새로운 발명을 유발하고, 발명된 것은 모방에 의하여 보급된다. 이렇게 주장한 타르드는 사회를 결국 개인간의 모방관계로 귀결시킨다. 이에 사회를 개인으로 해체해서 보는 개인주의적 입장이 제시되어 있다.

귀요[편집]

Marie Jean Guyau (1854-1888)

19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진화론 철학의 영향을 받아 진화의 동인(動因)으로서 생(生)을 고찰하였으며 생의 철학의 입장에서 도덕론과 예술론을 전개하였다. 생은 목적인 동시에 원인이며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공통적인 원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무의식적 자발성을 정당화하면서 반성 의식과의 사이에 조화를 회복시키는 것이 도덕의 목적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가장 충실하고 가장 확대된 생' 그것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결합하기 때문이다. 외적 강제로 주어진 도덕은 생의 확충을 저지하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의무도 제재도 없는 도덕'이 바람직한 것이다(<의무도 제재도 없는 도덕 소묘>1889). 그의 사상은 니체에 가깝다.

신유심론[편집]

新唯心論

19세기 후반의 프랑스에는 콩트의 실증주의, 르누비에의 신비판주의와 더불어 메느 드 비랑의 내성철학을 계승함과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 및 셸링, 헤겔의 학설을 받아들이면서 과학 비판을 매개로 하여 종합적인 존재론을 전개한 '유심론적 실재론' 내지는 '유심론적 실증주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먼저 라베송에서 라셸리에로 이어가서 부트루에 의하여 종합되고 베르그송에서 최후의 결실을 맺는 흐름이다. 그들의 논거(論據)가 된 메느 드 비랑의 의지적 노력에 의한 주체의 자유 의지를 처음으로 말하였던 내성철학은 과학주의적인 결정론적 학설에 반대하는 요소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낭만주의적 형이상학의 흐름에 따르면서도 셸링이나 헤겔처럼 형이상학의 논리적 체계로는 향하지 않았고, 과학이 가르치는 사실에 따르면서도 그 근본적 전제·방법을 검토하여 그 한계를 정하여 '실증적 형이상학'으로 지향한 것이다.

라베송 몰리앙[편집]

Felix Ravaisson Mollien (1813-1900)프랑스의 신유심론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을 메느 드 비랑이 말한 습관의 수동성과 능동성에 대한 설과 결부시켜 '습관 그 자체'를 '수동적 또는 능동적 자발성'으로 포착하여 그 자발성이 의식의 자발성을, 그리고 특히 자연 그 자체의 자발성을 지시한다고 보았으며, 메느 드 비랑의 내성철학을 우주적 생명의 해석에까지 확대하였다.

라셸리에[편집]

Jules Lachelier (1832-1918)

프랑스의 신유심론 철학자.

라베송의 사상을 따랐으나 칸트적 관념론에 의하여 의식의 존재를 구성하려고 했다. 먼저 존재에 구비된 기계론적 인과성과 합목적성(合目的性)의 차원(次元)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그 위에 자유의 차원을 고찰한다.

그리고 존재 그 자체의 자발성에 의하여 존재가 확충된 극(極)에 나타나는 자유의 차원은 의식 그 자체라고 하는 유심론적 형이상학에 이르는 것이다.

부트루[편집]

Emile Boutroux (1845-1921)

프랑스의 신유심론 철학자·철학사가.

라베송과 라셸리에의 학설을 계승하여 19세기의 과학적 실증주의를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로써 유심론을 전개했다.

즉 과학적 결정론에 반대하여 '자연법칙의 우연성'을 주장하였고, 이 '우연성'을 목적론적 형이상학에 의하여 기초를 세워서 자유의 성립과 신의 존재를 옹호하였다. 그 과학 비판은 그 후에 과학철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르누비에[편집]

Charles Renouvier (1815-1903)

프랑스의 철학자.

콩트의 실증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칸트의 비판주의를 재흥시켜 그 형이상학 비판 정신을 반형이상학의 방향으로 철저히 하여 형이상학은 우상론(偶像論)에 불과하다고 하는 신비주의를 전개하였다. 즉 칸트의 '물자체(物自體)'의 형이상학적 가설(假說)을 배제하고 현상적인 사실만을 다루어 모든 범주를 '관계'의 범주로 환원시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고 기술할 만큼 철저한 현상론과 상대주의의 입장에 섰다.

그리하여 과학적 결정론에 반대하는 관점에서 주체에게 자유의지를 인정하였고 그에 의하여 인과적 필연성이 지배하는 현상계의 진리에 대한 확실성을 밝혔으며, 개인의 자유로운 인격의 의의를 강조하는 인격주의에까지 이르게 된다.

러낭[편집]

Ernest Renan (1823-1892)

프랑스의 철학자·언어학자·역사가·비평가.

성직을 지망하였으나 헤르더와 헤겔에게 역사와 문헌학을 배워 성서(聖書)의 문헌학적 연구 때문에 신앙심이 흔들려 성직을 단념하게 되었다. 1862년 콜라주 드 프랑스의 헤브라이어(語) 주임교수로 임명받았으나 개강하는 날 예수를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말한 까닭으로 강의를 금지당하였다.

그는 그때까지 종교에 귀착되고 있던 상징과 법칙을 부여하는 역할을 과학으로 바꾸어 '과학이야말로 참다운 종교'라고 공언하였다. 이것은 이상주의에 의하여 신앙의 등가물(等價物)을 이끌어 내어서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앙을 버려도 "마치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역사관은 실증주의와 다위니즘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헤겔처럼 형이상학적이고 주관적인 색채가 짙고, 세계는 과학·예술·도덕성 면에서 성스러운 것을 실현해야 할 생성 유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 생성하는 것의 과학에 대한 필연적 형태야말로 역사학이며, 따라서 과학은 무엇보다도 역사학이어야 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문헌학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문헌학에 의한 성서의 과학적 즉 역사적 연구는 <그리스도교 기원사(起源史)>(1863-1883)와 그 서론이 되는 <이스라엘 민족사>(1887-1893) 등 르낭 필생의 2대 저서를 나오게 했던 것이다. 그 과학실증주의적 방법은 예술 비판에도 영향을 미쳐서 당시의 사실주의 문학과 조금 뒤의 자연주의 문학에 유력한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편집]

Hippolyte Adolphe Taine (1828-1893)

프랑스의 철학자·역사가·비평가·심리학자.

스피노자, 헤르더, 헤겔의 형이상학과 콩디약의 감각론과 콩트 및 밀의 실증주의 그리고 스펜서의 진화론 등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실증주의를 전개하였다. 그것은 혼돈하고 복잡한 현실을 분석과 추상으로써 단순명료한 요소적 세계로 환원한 것이며, "악덕도 미덕도 황산이나 설탕과 마찬가지로 생성물이다"라고 말할 만큼 대담한 표현을 한 일종의 확장된 결정론이다. 그것은 또 <지성론(知性論)>(1870)으로 결실을 맺어 실험심리학의 발전에도 기여한 바 있었다.

이 이론은 역사의 발전법칙으로서의 인종·환경·시대 등 3대 원동력과 정신적 능력의 근본형식으로서의 주요 기능 등 단순한 기초 개념에 도달하여 개인의 작품에서 나아가 민족의 문화에 훌륭하게 적용되었다(<영문학사> 1856-1864, <예술철학>1906). 이 방법은 극단적으로 단순화되었기 때문에 개성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무력하다고 지적받았으나, 스탈 부인 이래 문학 예술의 객관적·역사적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다. 만년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부정적 비판으로 쓰여진 <근대 프랑스의 기원>(1885) 역시 지성의 심리학을 훌륭하게 적용하였다. 그의 사상은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사상계, 특히 사실주의(寫實主義) 및 자연주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영국의 철학[편집]

-世紀 英國-哲學

산업혁명의 진전과 과학·기술의 발달 및 '세계의 공장화' 등의 결과, 19세기의 영국에서는 정치·경제·사회의 여러 제도는 귀족과 지주 본위에서 산업 부르주아지 본위로 개혁되어 갔다. 애덤 스미스, 맬서스, 리카도 등 고전경제학과 그에 이어 벤담, 제임스 밀, J. S. 밀 등 공리주의(公利主義) 사상이 그 개혁의 지도 이념이었다.

스미스는 자본의 자유 경쟁을 주장했고, 그 조정은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겼으며, 벤담은 자본 계산의 논리를 쾌락의 계산에 응용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원리를 세웠다.

과학·기술적 사고의 성장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태도를 합리적인 것으로 하였다. 19세기 초에 이미 프랑스의 동물학자인 라마르크는 생물 진화 이론을 확립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다윈이 그의 실증적 연구를 기초로 해서 <종의 기원>을 저술하여 진화론을 집대성한 시기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거의 1세기가 경과한 1859년의 일이었다.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진화론의 사상을 일반이 알 수 있도록 해설하였고, 또 스펜서는 다윈의 자연도태·생존경쟁·적자생존 등의 견해를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방대한 철학체계를 이루었으며, 산업 부르주아지의 승리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타산적인 자본이 승리한 결과 사람의 마음이 점차 유물론으로 기울어 도덕·예술·종교 등의 정조적(情操的) 가치는 무시되고 노동자의 비참한 상태는 사회 문제로 대두하였다. 밀은 벤담의 이론을 수정하여 정조면을 중시하고 노동자에 대한 동정을 환기시켰다. 19세기 후반에는 독일 관념론의 철학이 메마른 영국의 정신적 풍토에 스며들어 칼라일, 러스킨, 윌리엄 모리스 등 낭만적 사회 사상을 낳음과 동시에 옥스퍼드의 그린과 브래들리를 중심으로 한 영국 관념론의 철학을 형성시켰다.

그들은 인격주의의 입장에 서서 노동자에 대해서도 동정적이었으며, 후에 영국적인 민주사회주의적 정치 노선의 중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공리주의의 철학[편집]

功利主義-哲學

인간은 쾌락과 고통에 따라 기본적으로 움직여지는 자연의 존재라 보았으며, 쾌(快)를 따르고 고(苦)를 배척하는 성질인 공리성을 가지고 행위의 선악을 판정 기준으로 하는 철학이다. 공리성에 착안하게 된 것은 고대에도 동양에도 있었지만 이것을 명확한 원리로 하여 이론화한 사람이 제러미 벤담이었다.

벤담은 로크, 맨더빌(1670경-1733), 흄 등의 공리성을 존중하는 영국 경험론 철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쾌(행복)를 계산 가능한 양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행위를 최고의 선(善)행위라 하고, 이 행위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법률제정 절차를 합리화하려 했다.

벤담의 타산적 사상은 산업혁명을 통하여 정치·경제·사회에서 승리를 거둔 산업 부르주아지 의식을 대표하는 것이었으나 은자연(隱者然)한 그의 사상을 보급시켜 실제적인 것으로 만든 공로자는 밀 부자(父子)였다. 그들은 '철학적 급진파'로서 당시 영국 의회의 혁신파 정책심의회에 참여하여 선거법의 개정, 구빈법(救貧法)과 곡물조령의 폐지, 자유무역 촉진, 식민지 정책의 개선 등 내외의 정치 문제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J. S. 밀의 <자유론>과 <대의정체론>은 자유민권운동에 많은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벤담[편집]

Jeremy Bentham (1748-1832)

공리주의의 확립자. 부친은 변호사.

12세로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법률학을 배우는 한편 로크와 흄 등 경험론 철학과 물리학 및 화학도 연구하였다. 1771년 프리스틀리의 <정부론>(1768)을 읽고 그 속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어구를 찾아내었는데 평생 동안 그것은 그의 철학 원리가 되었다. 1776년 <정부론 단장>을 출판, 그 속에서 공리의 원리에 따라 훌륭한 법률을 제정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1789년에 그의 주요 저서인 <도덕 및 입법의 제 원리 서설>을 써서 그 공리의 원리에서 남자의 보통선거권, 연차의회, 비밀투표, 부인참정권을 주장하였고, 1832년의 제1차 선거법 개정이 실현되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또 번잡한 판례법의 모음인 코먼 로를 비판하면서 공리의 원리에서 누구든지 쉽게 알 수 있는 법전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영국에서 밀 부자, 리카도, 오스틴 등 철학적 급진주의자에 의한 의회개혁운동, 곡물조례 철폐운동의 기반이 되었고, 프랑스 혁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의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라는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도 자유권(自由權) 사상으로 각국에서 그 생명이 지속되고 있다.

도덕 및 입법의 제 원리 서설[편집]

道德-立法-諸原理序說(1789)

벤담의 주저. 1780년에 인쇄가 되었으나 공간한 해는 1789년이었다. 공리의 원리와 그에 의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입법의 과학과 기술을 논한 글인데 서문과 본론 17장으로 되어 있다.

본서를 요약하면 자연은 여태까지 인간을 두 사람의 군주, 즉 고통과 쾌락의 지배하에 두어 왔다. 이 군주들은 우리가 행하는 일체의 사항에 있어서 우리를 지배한다. 공리의 원리란 이러한 예속을 명백하게 인정하고 이성과 법률의 손으로 행복의 조직을 확립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체계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과 사회에서 선이란 쾌락을 촉진하고 악이란 고통을 가하는 일이다. 따라서 개인의 행위에 대한 선악이나 정부의 행위에 대한 선악도 모두가 이 공리의 원리에 따라서 측정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 쾌락과 고통은 양적으로 측정이 가능한 것이며 사회 이익의 총화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원 개개인의 쾌락의 총화라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쾌락을 촉진하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은 법에 의한 제재이다. 따라서 어떠한 입법을 하는가는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이익을 촉진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한다. 이것은 벤담의 입법 정책론과 보다 훌륭한 입법을 보장하기 위한 실천적 의회개혁운동과 결부되어 19세기 전반 영국의 민주화에 공헌을 했다.

제임스 밀[편집]

(제임스) James Mill (1773-1836) 영국 공리주의의 지도자. J. S. 밀의 부친.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에든버러 대학에 수학, 졸업 후 가정교사를 하면서 정치·철학·역사를 연구하였다. 1802년 런던에 나와 가난 속에서도 문필 활동을 계속했다. 1808년에 벤담과 알게 되어 공리주의의 보급에 큰 공헌을 하였다. <영국령 인도사(印度史)>의 성공에 의하여 1819년 동인도회사에 취직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정부는 타인의 침해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며 그 진정한 보장은 대의제도(代議制度)로 가능하다고 하였다. 1824년에 철학적 급진주의자의 기관지 <웨스트민스터 리뷰>를 창간, 의회개혁운동을 촉진시켰다.

존 스튜어트 밀[편집]

(존 스튜어트) John Stuart Mill (1806-1873) 공리자유주의의 대성자(大成者).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조기교육을 받은 일은 유명하다. 16세로 '공리주의자 모임'을 만들어 철학적 급진파를 지도하였으며, 1823년 동인도회사에 입사하였다(1858년까지 근무). 1824년에는 '웨스트민스터 리뷰'로 공리주의의 보급과 의회개혁을 제창하였다. 1826년에는 공리주의에 의문을 품어 정신적 위기에 빠졌으나 한편에서 콜리지, 워즈워스 등의 이상주의를 흡수하고 다른 한편에서 생 시몽, 콩트 등의 역사·사회관을 배워 위기를 극복하였다. 1851년에 재색을 겸비한 티라 부인과 결혼하였으며, 1865년부터 1868년까지 대의원 생활을 하면서 선거법 개정 문제와 노동자·부인의 참정권, 토지 국유화 등의 운동을 후원하였고, 그의 저작도 다방면에 걸치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영국의 전통적인 개인 자유의 존중을 기본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는 이미 자본주의의 모순으로서 사회 및 노동 문제가 표면화하여 노동자를 옹호하려는 사상이 보인다. 예컨대 <자유론>에서 정신적 자유와 더불어 단결의 자유도 중요하다고 역설하였으며, <정치경제학 원리>에서 생산법칙은 불변이지만 분배법칙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하여 사회개량주의 내지 사회정책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특히 만년에는 사회주의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썼으며 그 때문에 그는 과도기의 사상가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한 국가의 사회에서 개인적 자유의 확립에 있고, 이러한 관점에서 의회제도를 개선하고 국민을 위한 교육을 보급하였으며, 점진적으로 선거권을 확대해 갈 것을 주장하였다. 주저로는 <논리학대계(論理學大系)>(1843), <정치경제학원리(政治經濟學原理)>(1848), <자유론(自由論)>(1859), <공리주의(功利主義)>(1863), <대의정체론(代議政體論)>(1861), <부인(婦人)의 해방>(1869), <사회주의론(社會主義論)>(사후 출판, 1879) 등이다.

자유론[편집]

自由論 (1859)

J. S. 밀의 자유에 관한 불후의 명저. 1851년에 결혼하여 이 저서가 출판되기 전년에 급사한 사랑했던 티라 부인과의 공저로서, 전체가 5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 '서문'에서는 예로부터 있었던 자유와 권력의 대립 문제가 이제는 개인과 다수자의 투쟁이란 문제도 포함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단순히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있는 일에 대해서는 개인이 절대적으로 다수자의 전제(專制:단지 관헌에 의한 압제뿐만 아니라 사회에 있는 의견이나 감정의 전제도 포함된다)에 복종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이 자유의 영역이란 ① 의식내의 영역, 즉 양심의 자유와 사상과 감정의 자유, ② 기호 추구의 자유, 즉 우리 자신의 성격에 알맞게 각각의 생활 방식을 세우는 자유, ③ 여러 개인이 단결하는 자유를 의미한다.

제2장에서 '사상과 토론의 자유'는 진리의 발견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것을 다수자가 형벌이나 세론으로써 억압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제3장 '복지의 제 요소 중 하나로서의 개성에 대하여'는 행동의 자유와 생활의 자유를 논하였는데, 그것이 습관과 전통에 지배되면 개인과 사회의 진보는 정체한다고 기술하였다.

제4장 '개인에 대한 사회 권위의 한계에 관하여'에서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개인 영역과 사회 영역과의 상호 관련을 논하여 개인 사회생활을 하는 이상 서로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을 것과 사회 또는 그 성원을 침해 및 방해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부과된 노동과 희생의 할당분을 부담하라고 말하였다. 제5장 '응용'에서는 이상의 여러 원리를 실제 문제에 대하여 응용한 것인데, 특히 인간 형성의 중요한 수단인 교육과 정부가 하는 간섭의 한계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본서는 홉스, 로크, 벤담 이래의 자유에 대한 견해를 집대성하였고, 특히 권력에 따른 개인의 자유 침해를 억제하려고 하였다. 동시에 개인과 사회의 관련에 대하여 언급하고 19세기 중엽의 자유주의(개인주의)와 사회주의와의 관련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리주의[편집]

功利主義 (1863)

J. S. 밀의 주저.

1854년부터 1859년에 걸쳐 집필하여 1861년 <프레이저즈 매거진>에 발표, 1863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공리주의의 원리란 "행위는 행복을 증진하는 정도에 따라 바르게 되며 불행을 낳는 정도에 따라 나쁘게 된다. 행복이란 쾌락 또는 고통의 결여이며 불행이란 고통 또는 쾌락의 박탈이다"라고 정의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벤담이 말한 공리의 원리를 바르게 계승하였으나 벤담이 개인의 쾌락을 단순히 양적으로 계산되는 것이라 한 데 대하여 밀은 쾌락에는 고급에서 저급에 이르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여 벤담 주의에 수정을 가하였다.

즉 그는 개개인의 쾌락은 사회의 행복을 기도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그 때문에 애타심(愛他心)과 정의의 관념을 강조하였다. "만족한 돼지가 되기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편이 좋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좋다"라는 유명한 말은 밀이 단순한 감각론적 공리주의자가 아니라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던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모순과 그 사회의 이질적 구성(귀족·부르주아·노동자)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하여 공리의 원리에 따라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조정하는가를 고찰했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과도기의 사상가라고도 말한다.

진화론[편집]

進化論

생물 진화의 사상을 처음으로 주창한 사람이 누구인가는 간단히 정할 수 없다. 어느 생물이 다른 생물로 변한다는 의견이 있었던 고전 그리스 시대에 아낙시만드로스는 "인간은 어류가 변화하여 생겼다"고 주장하였고, 플라톤은 반대로 어류나 조류는 인간 퇴화의 산물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한 생물 변화의 사상에 진화론이란 이름을 부여하기는 곤란하다. 진화론은 근대 생물학의 일부로서 그 위치를 정해야 한다. 갖가지 생물 사이에 존재하는 계통상의 유연(類緣)관계의 인식을 결여한 생물변화론을 진화론이라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와 같이 한정된 의미의 진화론이 출현한 시기는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이며, 당시 진화론의 대표자로서는 뷔퐁을 들 수 있다. 그의 주저 <박물지(博物誌)> 중 동물에 관한 제1권은 1753년에 출판되었다.

그의 진화론의 배경이 되는 것은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 특히 유물론 철학이었다. 디드로와 같은 유물론자들은 생물간의 유연관계를 덮어두면서 자연계의 사물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연 법칙에 따라서 변화한다고 하는 사상을 가지고 진화론에 접근했다. 이 사상은 라마르크로 계승되어 체계화되고 다시 다윈과 월리스의 출현으로 일반에게 받아들여졌다.

라마르크[편집]

Jean Baptiste de Monet Lamarck (1744-1829)프랑스의 생물학자. 체계적인 학설로써 최초로 진화론을 제시한 사람.

그는 북프랑스, 피칼디의 소(小)바잔탄 마을의 소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라마르크의 진화론도 몇 가지 점으로 보아서 프랑스 계몽사상의 흐름에서 탄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뷔퐁의 환대를 받았으나 그의 사상은 뷔퐁보다도 급진적이었다.

그의 경우 진화론이 싹튼 토양이 된 것은 프랑스 혁명(1789)이라고 말한다. 혁명 전후의 혁신적인 분위기가 진화사상 형성에 유리했던 것만은 아니다. 라마르크는 공화제를 지지하여 왕립 식물원 개조(改組)의 중심이 되고, 1793년 스스로 그 후신인 박물관에서 무척추동물 담당교수가 되었다. 이리하여 본격화한 무척추동물 연구에서 <동물철학>을 낳았다. 라마르크는 자주 무신론자라는 공격을 받았는데, 그는 영적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그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인간사회에 관하여는 상호부조가 공중(公衆)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한다.

동물철학[편집]

動物哲學 (1809)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먼저 <생물체제의 연구>(1802)에서 소묘되고 또한 <동물철학>에서 완성된 모습을 나타낸다. <동물철학>의 '철학'은 '이론'이란 정도의 의미로서 현재로는 <동물학 원론>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동물의 계통 및 진화에 대하여, 제2부는 생명론 및 생리학에 대하여, 제3부는 심리학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가장 유명하며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큰 것은 제1부이다.

라마르크 진화론의 기본은 생물이 원래 점차로 복잡해져 가는 내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 있다. 그 근거로서는 동물을 계통적으로 배열하면 체제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연속적으로 옮겨가는 계열이 얻어지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이어서, 같은 정도로 복잡한 동물 사이에서도 환경이나 습성의 영향을 받아 차이가 생긴다고 라마르크는 지적한다. 예를 들면 보다 단순한 체제를 가진 파충류(爬蟲類)에서 포유류(哺乳類)로 진화해 가는데 포유류에서도 습성의 차이에 기인하여 사지(四肢)가 지느러미 모양으로 변화한 해표(海豹)나 날개 모양으로 변화한 박쥐가 나타난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당초에 묵살되었으나 19세기 후반이 되어서 <종의 기원>의 출현과 함께 진화론이 공인되자 진화론의 한 원류(源流)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윈[편집]

Charles Darwin (1809-1882)

다윈은 잉글랜드 서부 실스베리에서 탄생했으며, 아버지는 의사였다.

다윈이 청년시대에 대학에서 정식으로 배운 것은 의학과 신학이었으나 실제로는 박물학 공부나 채집에 흥미를 빼앗기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1831년에 기회를 얻어 해군의 측량선 비글호에 동승하여 남미 대륙 및 남태평양의 섬들을 순회하고 1836년에 귀국했다.

이 사이에 이루어진 갖가지 생물상의 관찰이야말로 다윈의 마음 속에 진화의 사상을 싹트게 한 것이다. 갈라파고스섬의 생물 대부분이 남미식으로서 더욱이 각 섬의 생물 사이에서 조금씩 차이점을 볼 수 있는 사실은 <종(種)의 기원>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모국으로 돌아온 다윈은 곧 진화 연구에 착수했는데, 런던의 공기가 병약한 그의 건강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교외로 옮기고 그 곳에서 필생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게 되었다. <종의 기원> 발표의 경과에 대해서는 다음 항에서 서술하기로 하고, 그 후의 연구 활동에 대하여 요약해 두고자 한다.

<종의 기원>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저서로 <사육(飼育) 동식물의 변이(變異)>(1868)가 있다. 이 책에서 다윈은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그의 유전학설(遺傳學說)을 해명했다.

인간이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하여 생겨났다고 하는 사고는 진화론의 당연한 귀결이며 다윈도 그와 같이 믿었지만 교회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종의 기원>에서는 이 문제를 회피했다. 헉슬리가 <자연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를 1836년에 간행하여 인류의 동물기원설의 돌파구를 열자, 비로소 다윈도 자신의 견해를 <인간의 유래>(1871)로서 공표했다.

다음 한 가지, 생물학사상 잊어버릴 수 없는 저작이 있다. <식물의 운동>(1880)이 그것이다. 이 책에서 발표된 식물의 속성 연구는 고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가 <종의 기원>은 "우리들의 견해에 자연사적(自然史的) 기초를 부여한다"고 평가했는가 하면 또다른 한편에서는 '우자(優者)에 의한 열자(劣者)의 지배', 결국 반민주주의 사상의 정당화에도 이용되었다.

종의 기원[편집]

種-起源 (1859)

다윈은 1856년에 <종의 기원>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예정의 반 정도 진행한 1858년 6월에 월리스로부터 하나의 논문을 받았다. 이 논문에는 자연도태에 기조를 둔 진화론이 서술되어 있으며, 월리스는 그 발표에 대해 편의를 받을 수 없을까 하는 희망을 다윈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윈의 친구들은 월리스의 논문과 다윈 자신의 논문을 동시에 발표할 것을 권유하여 1858년 7월에 린네 학회에서 처음으로 자연도태설(自然淘汰說)이 공표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사건이 있었으므로 다윈은 이전의 계획을 축소하고, 1859년 11월에 <종의 기원> 간행의 목적을 달성했다.

<종의 기원>은 내용으로 보아서 두 부문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1-5장으로 다윈의 학설의 기본이 기술되고, 둘째 부분인 6-14장에서는 전반(前半)에서의 주장의 전개, 난점의 보강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진화론은 생물의 종(種)은 개별적으로 신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하는 자유사상을 가진 과학자들에게는 믿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창조에 의하지 않은 신종(新種)의 탄생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설득적으로 설명하느냐에 있었다. 이 요청에 답하여 등장한 것이 다윈의 자연선택설이다.

다윈은 먼저 동물·식물에서 볼 수 있는 변이 중에서 인간이 소용되는 것을 선택하여 유용한 품종을 만들어 내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다음에 그는 이 인위선택(人爲選擇)과 흡사한 과정이 자연 상태에 있어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야생생물의 변이(變異) 중 생존에 유리한 놈이 살아남아 자손을 불린다. 예컨대 사슴을 먹이로 하는 이리 떼 중에는 둔중한 이리보다 민활하고 호리호리한 이리 쪽이 생존과 번식의 혜택을 받을 것이다. 이리하여 자연 상태에서는 생존경쟁을 통하여 작용하는 선택 작용, 즉 자연도태가 진화를 초래한다고 다윈은 생각했다.

이리하여 진화론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게 되고 마침내 일반적 지지를 얻기에 이르렀다. 단 다윈은 변이의 원인을 해명하지 않았으나 드 브리스(1848-1935)에 의하여 돌연변이가 발견됐다. 현재도 집단유전학(集團遺傳學)을 기본으로 한 진화론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골자로 한 것이다.

헉슬리[편집]

(토머스 헨리) Thomas Henry Huxley (1825-1895)19세기 영국의 생물학자·진화론자.

런던 근교에서 탄생, 고생하며 의학을 공부하고 해군 군의가 됐다. 1848년 이후 군함에 편승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방면으로 항해하면서 각종 해상 동물을 채집·연구하여 학계에서 인정을 받고, 그 후는 생물학자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동안 다윈과 서로 알게 되고 그의 주장에 공감하여 진화론 사상의 보급에 노력했다. 주저 <자연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1863)에서는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취급하지 못하였던 인간의 기원을 대담하게 논하여 인간 또한 하등 동물에서 진화한 것임을 밝혔다. 그 결론은 "인간과 고릴라, 침팬지 사이의 구조적 차이는 고릴라와 하등 원숭이 사이의 그것보다도 적다"고 하는 유명한 말로 나타나고 있다. 철학·종교면에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창, 현상의 밑바닥에는 비정(非情) 또한 비인격적인 불가지자가 존재한다고 했다. 그 의미로 그의 과학적 합리주의에는 한계가 있으나 그것이 19세기에 이룩한 역할과 의의는 높이 평가되어도 좋다.

스펜서[편집]

(허버트) Herbert Spencer (1820-1903)

19세기 영국의 진화론 철학자.

교사의 아들로 다비에서 탄생했으나 병약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철도 기사·잡지 편집자 등을 지내고, 1853년 이후는 런던에서 재야(在野) 사상가로서 정력적인 저작 활동을 했는데 그것은 대저서 <총합철학의 체계>로 정리되어 있다. 스펜서 사상의 기초는 진화(進化)의 원리인데, 그것은 물질의 결합과 이에 수반되는 운동의 법칙이며,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의 발전 속에 나타난다. 이 법칙은 생물계뿐만 아니라 성운(星雲)에서 인간·사회에 이르는 모든 사상(事象)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사회도 일종의 유기체로서 진화하는 것이며, 그 종극(終極)은 각 성원이 개성을 살려 자유와 행복이 전체와 조화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진화하는 물질의 본원이 되는 절대자에 대해서 그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창, 이것을 종교의 영역이라고 했다. 이에 의하여 그는 학문과 종교의 분리·조정을 꾀했는데 그것은 학문이 종교에서 완전히 독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스펜서의 진화론적 철학은 다윈이나 헉슬리의 사상 운동과 결부되어 19세기말에 놀랄 만한 보급을 보였다. 그 후 자연과학의 뚜렷한 발전은 그의 학설의 기초를 흔들어 놓아, 오늘날에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된 부분이 많다.

총합철학의 체계[편집]

總合哲學-體系 (1860-1896)

스펜서의 주저. 전부 10권으로 된 대저서이며, 1860년에 발표된 전체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36년간에 걸친 초인간적인 노력 끝에 거의 처음의 계획대로 완성시킨 것이다.

제1권 <제1 원리>(1860-1862)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불가지론을 주장함과 동시에 가지적(可知的)인 것의 처음 형태인 무기물의 진화를 고찰하고 제2, 3권 <생물학 원리>(1864-1867)와 제4, 5권 <심리학 원리>(1870-1872)에서는 유기체의 진화를 다루었다.

그러나 스펜서의 이상과 같은 업적은 선배 과학자에게 힘입은 바가 많고, 그 독자적 업적으로 영향이 컸던 것은 제6-8권 <사회학 원리>(1876-1896) 및 제9, 10권 <윤리학 원리>(1892-1893)이다. 여기서 그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사회관, 낙천주의의 윤리설을 주장했다.

영국 관념론[편집]

英國觀念論

19세기 전반(前半)의 영국에서는 공리주의 철학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론적 경향에 불만족한 사람들은 독일 관념론 철학에 눈을 돌려 차츰 칸트나 헤겔의 철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처음 콜리지(1772-1834), 칼라일 등 시인적(詩人的) 사상가가 정렬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스터링(1820-1909) 이래 조직적으로 연구하게 되고 마침내 신이상주의(新理想主義) 철학으로서 꽃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이 사상운동의 기수는 플라톤의 고전 번역가로 이름이 높던 주이트(1817-1893)이며, 그의 문하에서 그린, 에드워드 케어드(1835-1908), 브래들리 등 저명한 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미국에도 전파되어 에머슨(1803-1882), 로이스(1855-1916) 등의 사상가를 낳았다.

칼라일[편집]

Thomas Carlyle (1794-1881)

영국 빅토리아 왕조의 대표적 사상가·수필가·역사가.

스코틀랜드 남부의 독실한 칼뱅파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에든버러 대학에서 학문을 닦은 뒤 수학교사와 가정교사, 저널리스트 등을 전전하면서 빈곤한 생활 속에 정신적 고민을 거듭했다. 그 동안 독일 문학과 친숙해져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등을 번역하였다(1824). 또 괴테와 편지를 교환하여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34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독일, 프랑스를 찾은 외에는 죽을 때까지 거기서 안주했다. 그는 철학적·역사적 저작을 통하여 항상 예언자로서 자인하고 성서보다도 역사 속에서 신의 섭리를 찾고 칼뱅 주의적 악에 대한 증오와 체질적인 분개벽(憤慨癖)에 뿌리박은 엄격성을 가지고 시대를 지배하는 물질주의·공리주의를 비판하고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웠다.

주저로 <의상철학(衣裳哲學)>(후술 참조), <프랑스 혁명사>(1837), <영웅과 영웅숭배>(1841), <프리드리히 2세의 역사>(1858)가 있다.

의상철학[편집]

衣裳哲學 (1836)

칼라일의 주저. 처음 잡지에 발표했으나 영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에머슨의 추천을 받아 미국에서 출판된 것은 1836년, 영국판의 출판은 1838년. 표제의 라틴어 '사르토르 레사르투스'라는 말은 '다시 고쳐진 재봉집'의 뜻으로 '토이펠스드레크씨의 생활과 의견'이 보여주듯 가공(假空)의 독일인 대학교수의 의상철학을 저자가 다시 깁는 형식으로 칼라일 자신의 사상을 말하고 내면적 자서전을 시도한 것.

지상의 모든 사상(事象)을 의복으로 비유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스위프트의 <통 이야기> 등에서 암시한 방식에 따른 듯한데 당시의 영국 공리주의적인 시대 정신을 '악마(독일어로 Teufel)'로 간주하고 그 찌꺼기(독일어로 Dreck)라고도 할 만한 반시대적 철인 토이펠스드레크로 하여금 말하게 한 형식은 참으로 기발하다. 칼라일은 영국의 '성대한 상업'과 '귀중한 헌법'이 오히려 사상의 자유로운 비약을 방해한다고 하여 독일의 '순수정신철학'을 높이 평가하고 공리적 쾌락주의에 해독을 입은 자아를 초월하여 '영원의 긍정(肯定)'의 자각에서 참된 자아에 눈을 떠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영감을 받은 위대한 창조자를 숭배하고 이에 복종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자유를 향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념론적·반속중적(反俗衆的) 철학이 오히려 당시의 영국에서는 경세적인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린[편집]

(토머스 힐) Thomas Hill Green (1836-1882)

19세기 영국의 관념론 철학자.

요크셔 지방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옥스퍼드에서 배우고 후에 베리올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도덕철학 교수가 되었다. 자우이트에 의하여 플라톤이나 칸트, 헤겔의 사상에 이끌려 영국에서의 신이상주의 철학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는 당시 행하여지던 공리주의의 도덕론이나 경험론 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밝히고 독일관념론을 배운 아프리오리한 원리를 세움으로써 이것을 극복하려 했다.

그것은 윤리학 면에서는 인격의 완성이 선(善)이라는 인격주의적 유심론(人格主義的唯心論)이 되어 나타났는데, 그는 이 입장에서 사회나 국가의 자세도 문제로 삼았다. 그의 이 사상은 영국 이상주의 운동에 결집되고 다시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사상적 지주(支柱)가 되었다.

윤리학서설[편집]

倫理學序說 (1883)

그린의 주저. 대학에서 강의한 초고를 정리한 것으로 그린이 일찍 요절하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동료 브래들리에 의하여 정리되었다. 제1권 '지식의 형이상학'은 인식을 감각의 집적이라 하는 경험론에 반대하여 칸트의 주장에 따라서 그 근원에 여러 감각 사이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정신적 원리가 있다고 하였다.

제2권 '의지(意志)'와 제3권 '도덕적 이상과 도덕적 진보'는 그의 체계의 중핵을 이루는데 여기서 그는 유명한 자아실현설(自我實現說), 인격주의적 유심론을 주장했다. 제4권 '행위의 지도에 대한 도덕철학의 적용'에서는 인격의 완성을 촉진해야 할 선한 사회·국가의 창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일관된 논리를 가지면서 또한 현실에서 유리되지 않는 설득력이 강한 윤리학서이며, 영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브래들리[편집]

Francis Herbert Bradley (1846-1924)

영국의 관념론 철학자.

옥스퍼드에서 배우고 1870년부터 평생 동안 동대학 마튼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이었다. <윤리학 연구>(1876), <논리학 원리>(1883)에 이어 주저 <가상(假象)과 실재(實在)>(1893)를 저술하고 여러가지 현상은 진실재(眞實在)가 아닌 가상에 불과하지만 절대자인 진실재에 싸여 있으며, 그래서 절대자는 현상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논하였다. 이것은 헤겔에 가까운 절대적 관념론인데, 19세기 영국에서의 가장 독창적인 형이상학이라고 일컬어진다.

러스킨[편집]

John Ruskin (1819-1900)

영국의 미술비평가·사회평론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부유한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문학·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부친과 퓨리턴적 신앙이 두터운 모친의 이상적인 교육과 종종 있었던 대륙 여행으로 미술 평론가로서의 독자적인 안목을 연마했다.

그 성과가 옥스퍼드 대학 졸업 후 터너의 풍경화를 지지하는 동기에서 쓴 <근대화가론>(1843-1860)이다.

본저를 완성한 1860년에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연구는 종지부를 찍고, 이후의 40년간은 사회·경제·교육·도덕·종교 등 제 문제에 관한 견해의 표명에 충당되었다. 거기에서 예술은 보다 고도의 보다 정신적인 생활수단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들은 주로 강연집으로서 <이 최후의 것에도>(1862), <참깨와 백합>(1865) 등의 표제로 간행되었다. 1869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의 미학 교수로 취임하여 명강의로 학생들을 매료시켰으며, 박물관이나 미술학교를 창립하느라 바삐 뛰어다녔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적 유토피아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사회개량 사상의 보급과 실천에 노력했다.

모리스[편집]

(윌리엄) William Morris (1834-1896)

영국의 사회주의자·시인·예술운동가.

월삼스트에서 탄생, 부친은 부유한 어음 중매인(仲買人). 1853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졸업후 로세티의 영향으로 화가가 되고, 61년부터 장식 공예상을 경영하면서 문필 활동에 종사했다. 1867년 <제슨의 삶과 죽음>, 68년부터 70년 <지상의 낙원>으로써 영국 시단에 부동의 지위를 확립했다.

또 자유당원으로서 76년에는 불가리아인 학살에 항의하는 '동방문제협회'에 참가했으나 자유당의 대(對)아일랜드 반동정책(1882)을 이유로 떠났다.

1883년 민주연맹(이듬해 사회민주연맹으로 개칭)에 참가하여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이 연맹은 마르크스 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보통선거, 공정한 선거구의 확립, 귀족원의 폐지, 아일랜드의 자치, 토지 국유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연맹의 지도자 하인드만과 의견이 맞지 않아 1884년 모리스는 별도로 '사회주의자동맹'을 만들었다.

동맹의 목적은 혁명적 국제적 사회주의(革命的國際的社會主義)의 선전에 있었으며, 기관지 <코먼윌> 제1호에서 "부자(富者)와 빈자(貧者)…의 사회를…가차없이 공격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와 급진적 무정부주의자와의 대립이 격화하였고, 1890년에는 해머스미스 사회주의협회를 설립하여 사회주의 원리의 보급에 힘썼다. 그는 또한 유명한 케름스코트 인쇄소를 설립하여 미술적인 활자를 사용해서 출판을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고전경제학자[편집]

古典經濟學者

애덤 스미스로부터 J. S. 밀에 이르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의 영국 경제학을 고전파(古典派)라고 부른다. 스미스와 밀 이외에 맬서스와 리카도가 유명하다.

이 학설의 중심은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에 의해서 상품 생산 사회로서의 자본주의의 경제 법칙을 파악한 데에 있으며, 그와 동시에 이와 같은 사회를 영원불변의 것으로 생각하고 자본가 지주·노동자라는 계급 관계를 자명(自明)한 전제로 한 것도 특징적이다. 물론 이 학파 내에도 이론적 대립이 있어 특히 곡물관세(穀物關稅)를 둘러싼 리카도와 맬서스의 대립이나, 스미스의 낙관론에 비해서 리카도나 밀에 있어서는 부분적이나마 자본주의의 모순이 파악되어 있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맬서스[편집]

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

영국의 경제학자로서 인구론(人口論)의 개조(開祖)로 불린다.

잉글랜드 남부의 사리주(州)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국교회의 목사로 있었는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구문제에 흥미를 느껴 1798년 <인구론>을 출판하고 더 나아가 경제 문제 연구에 정진하여 후에 <경제학원리(經濟學原理)>로 그것을 체계화시켰다. 그 동안 동인도회사가 설립한 동인도 칼리지에 초청되어 1805년 그 곳의 근대사(近代史) 및 영국 최초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윌리엄 고드윈의 인구론을 비판한 것으로, 식량 증가의 비율에 비해 인구는 훨씬 빨리 증가하므로 빈곤은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경제학원리>에서는 리카도를 비판하면서 오히려 지주 계급의 소비야말로 큰 수요(需要)를 만들어 경제를 번영시킨다고 설파하였다. 곡물 관세 시비를 둘러싼 리카도와의 논쟁은 유명하다. 경제학사상(經濟學史上)으로는 별로 주목되지 않았으나 케인스가 유효수요론(有效需要論)의 선구로서 취급, 재평가했다.

리카도[편집]

David Ricardo (1772-1823)

영국 고전파의 경제학자.

런던의 유태계 주식중개인(株式仲介人)의 가문에서 태어나 14세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실무를 보고 후에 독립해서 거부(巨富)가 되었으며 하원의원이 되었다. 경제학 연구를 시작한 것은 30세를 넘어서이며, 산업자본가의 입장에 서서 지주 보호의 곡물법에 반대하고, 후에 그 체계를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1817)로 간행하였다.

리카도의 경제학상 공적은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을 이론적으로 다듬어서 투하노동가치론(投下勞動價値論)으로 완성시킨 것과, 지대론(地代論)을 추구해서 지대는 유리한 토지를 가진 지주가 불리한 토지와의 차액을 횡령하는 불로소득(不勞所得)이라는 소위 차액지대론(差額地代論)을 확립한 데에 있다. 리카도의 이론은 그 후 경제학의 주류(主流)가 되었으며,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勞動價値論)도 리카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