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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의 형성
[편집]Schola 哲學-形成
로마제국의 멸망(476), 게르만 민족의 이동 이후에 유럽은 얼마 동안 문화 부진의 시기에 들어선다. 이 무렵의 문화는 대륙이 아니라, 오히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알드헬름(640경-709), 베다(673-736)는 초기 잉글랜드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이 동안 북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크 왕국이 발전하고, 카를 대제(742-814) 때 당시의 유럽을 거의 통일하였다. 대제에 의해 시작된 학예의 전개는 중세 유럽에 최초의 문화를 개화시킨 것으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린다. 카를 대제의 본래 의도는 성직자의 교양을 높여서 바른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시키려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우선 정확한 라틴어 습득을 요구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본래 일은 언어 개혁이었다. 대제는 이 운동의 리더로서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 출신인 아르퀴누스(735경-804)를 초빙했다. 곧 중세 초기에 섬나라에 보존되었던 문화가 대륙에 이식되어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개화된 것이다.
아르귄은 다방면의 작품을 남겼으나 학자라기보다는 교육자이다. 대제의 학예부흥에는 유럽 각국의 출신들이 참가하고 있다. 북이탈리아에서는 역사가 파울루스 디아코누스(720경-797경), 독일에서는 대제의 전기작가 아인하르트(770경-840) 등이 왔으며, 시인 오를레앙의 테오도르프(821 사망)는 에스파냐 출신의 서고트인이었다.
이러한 문화인이 활약한 장소는 대제 및 그 후계자의 궁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나, 동부의 프르다, 잔크트 가르넨, 라이헤나우, 또 서부 투르 등의 수도원, 랭스, 샤르트르 등의 사교교회(司敎敎會)도 무시할 수 없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후기의 사상가로서 고트샤르크(808경-867)와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를 든다. 고트샤르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아 이중예정설(二重豫定說)을 주장하여 이단의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논설을 둘러싸고 서프랑크국에서는 신학논쟁이 활발해져 성찬, 신의 예정, 자유의지 등 여러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사상가의 사상 내용은 고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신학도 대체로 교부 등의 주장을 인용하는 정도였다. 그 중에서 독창적이고 뛰어난 사상가는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한 사람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자연구분론(自然區分論)>은 중세 전반의 유일한 철학서로 보고 있다.
10세기에 들어서면 유럽 문화는 다시 침체한다. 그 동안의 주목할 만한 사상가로서는 오랴크의 제르베르(법왕 시루베스테르 2세, 940경-1003)가 있다. 그는 수학 등 자연과학에 학식이 깊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보에티우스
[편집]Anicius Manlius Torquatus Severinus Boethius (480-524)
이탈리아의 철학자·정치가.
로마 귀족으로 동(東)고트 왕국의 테오도리쿠스 대왕 때 재상이 되었다. 뛰어난 학자로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할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반역죄로 몰려 사형을 받아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오르가논> 일부와 포르피리오스(230경-305경)의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範疇論) 입문>을 역주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것은 중세 전반의 유럽에 알려진 유일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또 <산술론>과 <음악론>은 중세 과학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삼위일체론> 등의 신학 논문도 남겨 놓았으나 그의 사상의 중심은 그리스도교보다는 오히려 플라톤 철학에 있다. 처형되기 전에 옥중에서 쓴 <철학의 위안>은 중세로부터 근대에 걸쳐서 유럽의 사상이나 문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철학의 위안
[편집]哲學-慰安
동고트 왕국 테오도리쿠스 대왕을 섬긴 학자 보에티우스가 반역죄에 몰려 사형을 받기 전에 옥중에서 쓴 작품이다. 전5권으로 되어 있는 산문체의 논문인데, 그 사이에 39편의 아름다운 시가 섞여 있다. 여기에서 취급된 문제는 악인이 성공하고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현실과, 세계를 지배하는 신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보에티우스가 감옥 속에서 자신의 불행을 탄식하고 있는데, 뮤즈의 여신들이 그를 둘러싼다. 그때에 어느 때에는 보통 인간과 키가 같으나 어느 때에는 머리가 하늘까지 닿는 기괴한 여신이 나타나 뮤즈들을 쫓아버린다.
이것이 필로소피아(철학)로서 바른 사람이 괴로움을 받는 데 대해 불평을 말하는 작자에게 위안을 준다. 곧 필로소피아는 운명의 부침(浮沈)에 번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외면적인 행복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진실한 부(富)는 정신 속에, 진리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만으로 충분하며, 모든 것에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최고의 선뿐이며, 모든 다양을 조화시키는 위대한 유일자, 곧 신이다.
선한 사람은 영원한 신적 실재(神的實在)에 눈을 돌리고 있는 한 참으로 행복하며, 악인은 참된 존재를 갖지 못하며 참으로 행복할 수는 없다. 그 근본사상은 신플라톤 주의이다. 이 책은 유럽의 사상과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디오니시오스 위서
[편집]Dionysios 僞書
이 책은 성서의 <사도행전>(17장 34절)에 나오는 디오니시오스·아레오파기테스(아레오파고스의 재판관 디오누시오)라는 개종자의 이름을 빌려 5세기 말에 무명(無名)의 사람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쓴 작품이다.
이 책은 4권의 저서와 10통의 편지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은 신플라톤 주의 영향을 받은 신비주의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이다. 4권의 저서는 <천상의 계급제도에 대하여>, <교회의 계급제도에 대하여>, <신들의 명칭에 대하여>, <신학의 신비에 대하여> 등이다. 이 책의 사본은 비잔틴 황제로부터 서프랑크 국왕인 루이 경건왕(敬虔王)에게 보내져 루이왕은 상 도니 수도원장 히르두이누스(842 사망)에게 명하여 라틴어로 번역시켰다. 그러나 이 번역이 없어졌기 때문에 왕은 다시 궁정 소속 학자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에게 번역을 명령했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는 이 번역을 858년경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세계 전체가 단계적으로 질서지워져 있다고 보고 각 존재는 그 완성 전의 정도에 따라 지위가 정해진다고 본다. 모든 사물은 신으로부터 나와 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며, 이러한 이중적 운동이 바로 세계의 역사인 것이다.
곧 우주의 역사가 신으로부터 신으로 흘러가는 운동임을 명백히 함으로써 이 책은 그 후의 유럽 중세사상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결합시키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중세사상의 전개에 있어서 이 책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유럽에 소개한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의 역할은 매우 큰 바가 있다.
프랑크 왕국에서 이 책이 특히 중요시된 것은, 7세기의 창건 이래 프랑크 왕가의 묘지로서 존중되어 온 상 도니 수도원의 보호성자 디오니시오스가, 이름이 같아서 이 책의 저자로 오인되었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들
[편집]Schola 哲學-先驅者-
스콜라 철학은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그전에도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몇 사람의 사상가를 들 수 있다. 영국의 베다 베네라빌리스(尊者 베다)는 신학서 이외에 <시간론> 등 과학서를 남기고 사서(史書) <영국 교회사>를 저술하였다. 아르퀴누스(735-804)도 영국의 요크 수도원에서 공부하고 카를 대제의 학예 발전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성서주석, 교의론, 성자전, 시, 7자유과(自由科)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베렌가리우스(999/998-1088)는 투르 출신으로 신앙에 대해서 이성을 중요시하고 <성스러운 만찬에 대하여>에서 성스러운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를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여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렸다. 베렌가리우스의 주장을 논박한 것이 골 베크의 수도사이며, 후에 캔터베리 대사교가 된 란프랑쿠스(1004경-1089)이다.
그는 이성에 의해 신앙을 강화하는 것은 인정하였으나, 이성의 악용에는 반대하였다. 최초의 스콜라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안셀무스는 그의 제자이다. 프랑스의 페트루스 다미아니(은자 피에르, 1007경-1072)는 그의 저서 <신의 전능에 대하여>에서 철학적 고찰은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전능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세속의 학문에 대해 신학의 우위를 강조하였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편집]Johannes Scotus Eriugena (810경-877경)
아일랜드 출신으로 프랑크 왕국의 카를 2세를 섬긴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 중세 전기의 유럽에서 뛰어난 사상가이다.
그는 <디오니시오스 위서>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는데, 이 번역으로 중세 철학은 플라톤 주의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고트샤르크(808경-867)의 이중예정설을 반박하기 위해 쓴 <신의 예정에 대하여>는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몰렸다.
주요 저서는 865-870경에 쓰여진 <자연구분론> 5권으로, 중세 전기의 유일한 철학서로 간주되고 있다. 이 책은 선생과 학생의 대화 형식으로 쓰여졌고, 신플라톤 주의에 입각하여 만물은 신으로부터 유출(流出)하여 단계적인 구조를 이루며 모든 것은 신에게 돌려야 한다면서 이성과 신앙의 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보편논쟁
[편집]普遍論爭
보편의 문제는 중세철학 전체를 일관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스콜라 철학은 이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이 문제로 끝났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아벨라르두스가 그의 스승 샹포의 윌리엄(1070경-1121)으로 하여금 자기의 학설을 변경시키게 한 문제였고, 솔즈베리의 요하네스(1120경-1180)에 의하면 인간이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논쟁의 중심점은 보편개념(類와 種)의 타당가치 문제 및 개념의 실제성·객관성의 문제이다.
초기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학상의 삼위일체론이나 교회의 보편성과 결합되어 문제가 됐고, 12세기의 사상계를 들끓게 하였다. 발단은 보에티우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포르피리오스의 <범주론 서설(範疇論序說)>에 있다. ① 유와 종은 실재인가, 또는 사고상의 존재인가, ② 실재한다면 물체인가, 또는 비(非)물체인가, ③ 감각적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가, 또는 감각적 대상 자체 안에 존재하는가 ― 이상의 세 가지 문제를 그는 제기하였으나 해결을 보여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설문을 보에티우스는 <범주론 주석>에서 제기하고 실재하는 것은 사물인가, 또는 단순한 음성인가, 하는 형태로 변경시켰다. 사물이라고 하는 실재론(實在論)과 음성이라고 하는 유명론(唯名論)에 분류되는 논쟁을 야기시켰다. 콩피에뉴의 로스켈리누스와 샹포의 윌리엄이 출현하자 양진영의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로부터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에 이르는 전통적 견해는 신학적 이유도 있어서, 실재론에 기울어져 있고, 명확하게 유명론을 제창한 것은 로스켈리누스이다.
극단적인 형태로 실재론을 주장한 것은 윌리엄이었다. 여러가지 가설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철학을 완성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들을 결합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되면 자연학·형이상학의 문제까지 얽힌다.
아벨라르두스에 의해 보편의 문제는 더욱 촉진되었다. 그는 유명론적 색채를 가지면서 조정적 입장을 취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온건한 실재론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그에 의하면 보편은 추상에 의해 획득된 보편개념을 표시하기 위한 선언인 것이다. 사물에 있어서 어떤 객관적으로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물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새로이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비켄나의 저술의 영향을 받아 온건한 실재론을 완성하였다. 보편개념에 있어서 보편의 내용과 형식을 구별하고 사유 밖의 실재와 구체적 개체에 내재(內在)하는 본질을 보편개념의 내용에 대응시킨다. 개념상 보편의 형식은 어떤 주관적인 것으로서 사유의 산물이지만, 사유형식의 기초는 지성의 추상활동(抽象活動)에 있다고 한다.
14, 15세기의 스콜라 철학자인 오리올의 피엘, 윌리엄 오컴, 아이이의 피엘 등은 온건한 실재론을 고려하지 않고 다시금 유명론의 주관적 주장을 폈다. 따라서 신학과 철학을 분리시키고 스콜라적 종합을 붕괴시켰다.
안셀무스
[편집](캔터베리의) Anselmus (1033-1109)
북이탈리아 아오스타 태생. 스콜라 철학자·캔터베리의 대사교, 스콜라 철학의 개조.
란프랑쿠스의 명성을 흠모해 베크 수도원에 들어가 베크 수도원장, 1093년 캔터베리 대사교로 임명되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 이상을 신봉하여 직무수행에는 여러가지 곤란이 있었고, 교권 옹호 때문에 영국왕 윌리엄 1세와 헨리 1세로부터 두 번이나 추방을 당했다.
명상과 사색에 몰두했던 베크 수도원 시대에 대표작 <모놀로기움>을 비롯하여 철학 및 신학상의 주요 저작을 저술하였다. 그는 사변(思辨)에 있어서 변증적 예리성(銳利性)과 지성을 추구함으로써 신앙을 정통적으로 취급하여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 스콜라 철학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믿기 위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프로슬로기움>에서 전개된 신의 존재론적 증명(證明)은 철학사상 불후의 명성을 남겼으며, 데카르트·라이프니츠·헤겔 등 후세의 철학자들에게 남긴 영향은 매우 컸다.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
[편집](1098)
안셀무스가 제자들의 열성에 감동하여 제1회 추방 전에 영국에서 기고(起稿)하여 추방중에 나폴리의 북쪽, 카푸아 지방에서 완성한 역사적 명저.
제자 보손과의 대화형식으로 그리스도의 수육(受肉)과 속죄의 교리를 논하고 있다.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필연적 이유로써 수육과 속죄를 연결한 점에서 철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문에서 연구태도를 말하며 문제를 제기하고, 종래의 해석에 불만을 말하면서 수육과 신인(神人)의 죽음과 인류의 구제와의 필연적 관계에 언급한다.
본론에서 인간의 지복(至福)은 속죄를 필요로 한다는 것, 이 속죄는 신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 이 신인은 죽음의 가능성을 갖는다는 것, 신인의 십자가 위 죽음만이 속죄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임을 논술하고 있다.
결론에 있어서는 합리적 사변을 철저히 전개하여 신의 정의와 사랑을 양자택일의 형태가 아니라, 사랑도 정의도 아우르는 구조관련(構造關聯)에서 조화시키고 있다. 이 점에 극단적인 변증론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수도원 문화의 원숙한 기풍을 볼 수 있다.
로스켈리누스
[편집]Roscellinus (1050경-1124경)
프랑스의 스콜라 철학자. 보편논쟁에 있어서의 유명론 최초의 대표자.
콩피에뉴에서 태어나 소피스트인 요하네스 밑에서 변증(논리)을 배웠다. 교회참사회원(敎會參事會員)으로 논리를 교수하고 신학 문제에 변증적(辨證的) 방법을 적용하였다. 삼신론(三神論)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스와송 종교회의에서 오류 취소를 요구받고 이를 철회하기도 했다. 다시 교수를 시작하여 투르, 로슈(여기에서 아벨라르두스를 제자로 삼았다), 브장송 등에서 활약하였다.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명확하지 않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로부터 안셀무스에 이르는 전통적인 실재론적 견해에 대해 명백히 유물론을 제창한 로스켈리누스와, 극단적인 형태로 실념론(實念論)을 주장하는 샹포의 윌리엄의 출현은 보편논쟁의 대립을 첨예화하였다.
그가 쓴 저작은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고, 그가 가르친 것과 논적들이 그가 가르쳤다고 하여 책망하는 것을 구별하기는 매우 어렵다. 아벨라르두스에게 보낸 편지에 그의 학설이 전해지는 데 지나지 않는다.
아벨라르두스
[편집]Petrus Abelardus (1079-1142)
프랑스의 스콜라 철학자. '12세기의 데카르트'라는 칭호를 들었다.
낭트에서 가까운 파레의 귀족 태생. 기사(騎士)의 길을 버리고 학문, 특히 변증을 택했다. 로스켈리누스, 샹포의 윌리엄, 란의 안셀무스 등에게 배웠고, 곧 스승을 능가하게 되었다. 파리에 학교를 개설하고 신학·철학을 가르쳤다. 전 유럽에서 모인 학생의 수는 5,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놀라운 철인', '유명론의 용장'으로서 이 무적의 논객은 어디에 가든지 한 학파를 이루고 많은 제자에 둘러싸였으나 여제자 엘로이즈와의 비극적인 연애 이후에는 파란많은 생애를 보냈다. 몸을 기탁한 수도원도 안주의 장소는 되지 못했으며, 성공과 함께 혐오, 박해, 이단선고가 따랐다.
삼위일체에 관한 저술로 크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와 대립, 교회로부터 두 번이나 이단이라는 오명을 들었다. 만년에 클뤼니의 페트루스 베네라빌리스(1094경-1156) 밑에서 안주의 처소를 얻고 그의 중개로 화해하여 교회의 온순한 교도로서 세상을 떠났다.
보편논쟁에 있어서 실념론도 극단적인 유명론도 배척하고 참된 실재는 개체뿐이라고 하였으나, 보편도 이러한 사물에 실재적 근거를 갖는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논리적 성격을 깊이 분석한 공적은 매우 크다. 또한 '긍정과 부정'에 의해 교부들의 견해를 의견상 모순을 모아서 바른 해석을 구하려고 한 스콜라적 방법의 추진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행(移行)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도덕론 <나 자신을 알라>에서 행위 그 자체보다 의도에 중점을 둔 견해는 높이 평가된다.
엘로이즈와의 왕복서한
[편집]Eloise-往復書翰 (1132)
중세 굴지의 철학자 아벨라르두스와 드물게 보는 재원의 비극적 연애에서 탄생한 세계적으로 저명한 서한집의 하나.
주인공으로서 인간의 심정을 솔직히 고백한 <재난 이야기>와 <왕복서한>은 중세에서는 보기 드문 자서전이며, 중세 지식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기록이라는 점에 중요성이 있다.
비극적 사건으로 세속을 등진 두 사람의 불행한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어떤 친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 우연히 엘로이즈의 손에 들어가 지난날의 감정을 다시 불붙게 한다. 외곬의 정열과 여성이 쓸 수 있는 가장 격렬하고 대담한 사랑의 표현이 놀랍지만 세속을 등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사정, 세상 사람의 백안시를 참아낸 순정과 총명함, 그리고 그 태도에 동정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사랑과 수도생활의 쓰라린 모순을 내용으로 하면서도, 육신적 사랑을 정신적 사랑으로 바꾸어, 내용을 학문과 수도의 범위에 국한시킨 그 여자의 학식과 신앙은 순진한 정열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엘로이즈의 정열에 비하면 아벨라르두스는 상당히 냉정하다. 그에게서는 과거의 추억으로 스스로를 달래는 체험도 엿보이지만, 제3·제5 서한 시대의 박해와 방랑의 여행에서는 냉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수긍하게 된다.
그러나 제5의 후반부터는 회한의 고백은 순수한 것이 되고 제6 이후부터는 교도(敎導)의 서한을 통하여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사정이 허락하는 한 엘로이즈의 사랑에 보답하려고 노력한다. 그 진정은 존자(尊者) 페트루스의 증언과 그의 만년의 경건한 생활이 잘 보여지며, 교회의 온순한 교도로서의 면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사르트르 학파
[편집]Chartres 學派
샤르트르 지방은 파리의 학풍과 현저한 대조를 보이며, 플라톤 주의와 휴머니즘에 입각한 정신으로 12세기 전반의 지적 중심지가 되었다.
고전연구와 자연연구가 특색이며, 그 황금시대는 역대 총장의 활약으로 이루어졌다. 사르트르의 베르나르(1127경 사망)는 철학적으로 가장 뛰어났고, 고전 교양을 존중하였으며, 그의 유명한 '거인의 어깨 위의 소인'이라는 표현은 이 학파의 기본정신이 되었다.
길베르투스 포레타누스(1154 사망)는 걸출한 변증가(辨證家)로서 보에티우스·아리스토텔레스에 정통하며, <6원리(六原理)의 서>(범주론의 재해석)는 논리학 교과서로 중요하다. 사르트르의 티에리(1150경 사망)는 7자유과(七自由科)의 교과서와 <하느님의 6일간의 작업> 등을 저술하여 플라톤 철학과 창세기 설화의 조화를 의도했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리론(原理論)>을 번역한 바스의 아델라드(1100경의 사람)는 보편자(普遍者)와 개별자(個別者)의 일치를 주장하여 플라톤의 이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결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외에 콘슈의 윌리엄(1080경-1154경)이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91-1153), 시르베르투르도 이에 속하지만, 가장 탁월한 대표자·구현자는 솔즈베리의 요하네스(1120경-1180)로서 역사가·논리학자·정치철학자인 그는 인문주의(人文主義)의 대표자로 섬세한 심정을 가진 세련된 교양인이다. 키케로의 고전 사상과 문체의 부활에 힘썼다.
<메타토기콘>과 <폴리크라티크스>는 귀중한 자료로 가득 차 있으며, 샤르트르 학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은 그를 통해 얻게 된다. 논리를 절대시하는 풍조에 대항하여 이성의 겸허를 구했다. 신이 참된 예지라고 한다면 신의 사랑은 바로 철학이며, 이 철학은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상을 스스로 생활화하는 데서 구해진다고 하였다.
사변적 신비가들
[편집]思辨的神秘家-
12세기의 정신운동에는 인문주의와 변증(논리)과 신비주의가 있었다. '12세기의 르네상스'와 논리 과잉의 와중에서 경종을 울리고 이성의 바른 위치를 나타내는 종교정신의 회복운동이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에 의해 개화된 사랑의 신비주의는 복음(福音)의 소박성에 되돌아갔으며, 지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원적(本源的) 대상인 그리스도의 관상(觀想)에 몰두하였다. 그는 "나의 철학은 예수를 아는 것, 십자가 위의 예수를 아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쇄신된 시토회(會)는 문화면에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인격적으로 파악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키케로로부터의 착상에 의해 사랑의 이론, 심정(心情)의 신학(神學) 분석을 발전시키고, 상 티에리의 윌리엄이나 리바스의 에르레드에게 사랑의 이론, 우애론(友愛論)을 전개시키게 했다.
12세기 신비주의의 고양은 13세기까지 영향을 미친다. 시토회에 속하는 플로리스의 요아킴(1145-1202) 수도원장의 예언적 이론은 프란시스코회 일부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 독특한 역사관은 주목되고 있다.
성 빅토르 학파
[편집]Saint Victor 學派
베르나르두스의 신비주의도 결코 학문의 부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변증과 적극적으로 결합시킨 것은 성 빅토르 수도원의 학자들이었다. 성 빅토르의 후고(1096-1141), 안드레(1175 사망), 리카르두스(1173 사망), 고드프로아, 고체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모든 지식을 그리스도교의 여러 학문 속에 흡수하여, 이를 자기폐쇄적으로 독점하지 않고, 신애(神愛)에로 무한히 열린 관상(觀想)에 기여하도록 하려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이 점에서 후고는 '새로운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불린다.
<학습론(學習論)>에서는 여러가지 학문분류법을 제안하고 기술에 독자적인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 신비학(神秘學)은 철학적 지식의 상위에 있는 것으로, 특이한 체험이나 계시된 사실을 가르치기보다는 자연적 사물을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마음의 집중에 의해 영혼을 평화와 내적 환희로 이끈다. 사색으로부터 성찰(省察)로, 그리고 명상으로 이끌어가고 일체의 인식을 사랑에 집약시킨다. 리카르두스는 스승의 이론을 발전시켜 안셀무스적 방법을 삼위일체론에 적용시켰다. 새로운 히에로니무스(340/50-419/20)라고 불리는 안드레는 당시 과학적 성서해석의 중심 인물이었다.
이슬람 철학
[편집]Islam 哲學
이슬람 철학은 이슬람교의 신앙과 그리스 철학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 사상은 시리아어로 번역된 뒤 다시 아라비아어로 번역되거나, 또는 그리스어로부터 직접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 아랍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이슬람 철학의 성립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지만, 그것은 순수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신플라톤 주의가 혼합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이라고 널리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 신학(神學)>과 <원인론(原因論)>은 어느 것이나 신플라톤 주의의 논문인 것이다.
이슬람 철학자에 의해 전달된 그리스 사상은 12세기 에스파냐의 번역가들에 의해 아라비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에 소개되었고, 이로써 스콜라학(學)이 완성되었다. 이들 번역가들이 유럽 사상의 발전에 기여한 공적은 참으로 크다. 톨레도 대사교(大司敎) 레몬이 개설한 번역소(飜譯所)에는 유럽 각국으로부터 학자가 몰려들어 아라비아어 작품의 라틴어역에 종사하였다.
12세기 후반에 번역가로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은 크레모나의 제라르(1114경-1187)였다. 그는 70권 이상의 아랍어 저술을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이슬람 과학의 유럽 유입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번역가들의 활동에 의해 그리스 사상, 이슬람 사상이 유럽에 전달되었고, 13세기에는 스콜라학이 완성되었다.
이 때에 그리스 사상으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슬람 사상으로서는 아베로에스(이븐 르슈드)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아베로에스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중세 최성기의 이슬람 철학 유입의 중심문제는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할 수 있다.
13세기의 유럽 철학은 각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취한 태도에 의해 결정되었다. 아베로에스가 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브라반의 시게루스(1235?-1281)에 의해 대표되는 라틴·아베로에스 학파이다.
유대 철학
[편집]-哲學
유대 철학은 유대교의 이론과 그리스 철학이 결합된 것으로 이슬람 철학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고, 유럽의 그리스도교 철학에 영향을 주었다.
최초의 유대 철학자는 카이르안의 궁정의(宮廷醫) 이사크 이스라엘리(855-955?)로서, 그의 저서 <정의(定義)의 서>는 전적으로 신플라톤 주의적이다. 파이움의 사아디아 벤 요제프(892-942)는 <신앙과 견해의 서>에서 유대교의 신앙과 학문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벤 가비롤(아비게브론, 1021?-1058?)은 에스파냐 사람으로, 그의 저서 <생명의 원천>은 유럽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나 사고방식은 신플라톤 주의적이다. 유대 철학은 12세기에 마이모니데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의 저서 <곤혹자(困惑者)의 안내(案內)>는 유대 철학의 경전이 되었다.
마이모니데스
[편집]M
sheh ben-Maim
n (1135/39-1204)유대 철학의 대표자. 모제스 벤 마이몬, 이븐 마이몬이라고도 한다.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후에 이집트의 교주(敎主) 사라훗 디인(1138-1193)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주요 저서는 <곤혹자의 안내>로서 신플라톤 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율법의 가르침과 철학의 화합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13세기의 그리스도교 철학,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