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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철학[편집]

敎父哲學

교부란 고대의 교회적 저술가 가운데 교회에 의해서 사도적(使徒的) 신앙의 대변자로 승인된 사람을 말한다.

교부의 인정기준은 교리(敎理)의 정통성, 생활의 청정(淸淨), 교회의 승인, 고대(古代)에 속하는 사람 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상사적으로 교부철학으로서 총괄하는 경우 초기의 그리스도교 호교가(護敎家)나 교부의 서적에 나타나는 철학적 요소를 가리키기 때문에 반드시 전기한 조건의 저술가에만 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저술가는 본질적으로 철학자이기보다도 신학자였었으나 그리스도교가 진전됨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기존(旣存)의 사상(그리스 철학, 유대교)과의 대결·동화(同化)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사상을 형성하고 심화시켜 나갔다.

교부철학의 시대는 대체로 다음의 3기로 나눌 수 있다.

⑴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친 시기. 그리스도교에 처음으로 사상적 표현을 부여한 것은 사도(使徒) 바울인데, 그의 1신론(一神論), 로고스 그리스도론에서 이미 철학적 요소를 엿볼 수 있다.

요한의 <복음서(福音書)>에서 볼 수 있는 로고스 사상은 기원(起源)에 있어서나 표현에 있어서나 반드시 철학적은 아니었지만 그 후의 신학자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전파시켰다. 2세기에는 외전(外典:가톨릭 교회의 제2정전)에 부정적 형용사에 의해 철학적으로 묘사된 신(神)이 나타났다. 이 경향은 그노시스 주의자에서 한층 강해진다. 이 이단(異端) 활동과 이교측으로부터의 공격에 대응해서 호교가에 의해 이론적 투쟁이 전개된다. 이때 유대교 호교론적 전통의 영향 외에 플라톤 주의, 스토아파, 극히 소수이기는 하나 회의파의 영향이 배경에 나타난다.

헬레니즘 문화 세계에서 성장하여 그리스 철학을 익히고, 최후에 그리스도교에 귀의(歸依)한 지식인이 그 임무를 맡았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철학으로써 이성적(理性的) 탐구를 포기하지 않고, 철학에 의한 그리스도교 진리의 논증(論證)에 노력했으며, 일레나에우스는 크세노파네스에게서 신에 관한 개념을 끌어내어 전통 신앙을 옹호했다. 테르툴리아누스(160? - 222 이후), 로마의 히포리토스(160/170?- 235) 등의 반(反)그노시스주의적 논증도 있고, 신조제정(信條制定)의 방향이 나타난다.

⑵ 그리스도교 신학의 철학적 발전은 2세기 후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들은 피론 기타 헬레니즘기 유대교의 서적,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의 문헌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신의 선재(先在),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분석, 윤리적 제개념(諸槪念) 등에 그 영향이 명백하다. 또한 피론을 본받아 비유적 방법을 신학에 도입했다.

⑶ 공인(公認) 이후는 신학적인 논쟁이 왕성해져서 고대 그리스도교 교리를 확립하는 노력이 이루어진다. 철학적 사색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신과 그리스도에 관한 의론(議論)도 31론, 그리스도론 등 카파도키아 3교부를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완성을 보아 여기에 유럽 중세 사상사가 확고한 기반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기원[편집]

Christ敎-起源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 첫째로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언제쯤으로 잡는가, 곧 언제 그리스도교가 모태인 유대교로부터 독립하였는가에 대해서 정설이 없다. 예수(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지배를' 알렸다. 예수가 죽은 후에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이며, 예수는 부활하였다. 예수야말로 대망하던 구세주(메시아=그리스도)이다"라고 선교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그리스도'로 선교한 것이다(<신약성서> 항목 참조).

따라서 만일 그리스도교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라고 정의한다면 그리스도교의 기원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가 죽은 후 시작된 제자들의 선교에서 구해져야 한다. 이때 예수는 유대교의 범위에 속한다. 이와 반대로 예수 자신이 창시한 종교가 이미 유대교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서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라고 한다면 기원은 예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 자신의 종교와 제자들의 그리스도교 선교 사이에는 외관상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내실(內實)은 깊은 일치를 보여주므로 그리스도교는 예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제자들의 선교는 예수의 종교를 새롭게 파악하고, 기초를 쌓고 전개한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윤리와 종말론(세상이 끝난다는 告知와 待望)으로 구분되는데, 양자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지배'라는 현실이다. 인간을 초월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고, 사람들을 진실로 자유로운 주체(主體)로 삼으며, 한편 모든 사람을 결합시키는 심원한 현실이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의 지배'로서 이 위에 윤리가 성립하고 '하느님의 지배'의 관철(貫徹)로써 이 세상의 종말과 하느님 나라의 출현이 대망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지배'는 어떤 물건처럼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없다. 사람이 진실로 자유로운 주체가 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긍정하고 이와 같이 살기 시작할 때에 자기의 근저로서 자각되는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생전에 예수를 따르기는 하였으나 '하느님의 지배'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뜻에서 예수의 언행은 수수께끼이다(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어쨌든 이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복음서>를 형성하는 데 아바지하게 된다(<신약성서> 항목 참조).

예수가 체포되어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사건은 제자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최대의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불행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 사건을 새로이 살기 위한 계기로 삼았다. 곧 그들은, 예수는 죄없이 인간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인간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았다고 해석하였다. 이때 비로소 제자들은 충격을 극복함과 동시에 에고(自我)를 버린,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고, 이때 그들은 그때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스승 예수의 언행을 이해하였다. 자신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유인 예수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제자들은 이제 그들이 예수와 마찬가지로 살고 있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예수의 삶과의 동일성(同一性) 자각이 예수가 부활하여 그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부활신앙의 기초가 된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러한 경우에는 죽은 사람이 부활하여 그 힘이 다른 사람에게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마가복음> 6장 14절의 세례 요한 참조).

예수의 '하느님의 지배'라고 부른 현실을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의 '속죄'를 단서로 하여 파악하였다. 이 현실에 의해 제자들은 이제 예수와 마찬가지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 현실을 '부활한 예수'의 작용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고, 죄의 속죄를 위해 죽고 부활한 예수를 선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활자에게는 하느님의 아들·주님·구세주라는 칭호가 붙여지고, 이 칭호는 그대로 생전의 예수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비로소, 어째서 예수는 '하느님의 지배'를 알렸는데 원시 그리스도 교도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선교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설명되고, 또 어째서 양자의 외견상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내실에는 깊은 일치가 있는가 하는 것이 이해된다.

이와 같이 해서 성립된 원시 그리스도 교단은 처음에는 새로운 종교라는 자각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신앙 내용이 이론적 및 실천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유대교와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 결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된 그리스도 교도가 외국 전도를 시작하여 성공을 거두고, 한편으로는 바울이 그리스도교로 개심하여 세계 전도를 개시하게 된다(<신약성서> 항목 참조).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교는 1세기 중엽에는 시리아·소아시아·그리스, 또한 로마에 전파되었다. 그 사이에 외국 전도와 외국인의 개심이라는 사실을 계기로 하여 그리스도교는 민족종교라는 제한을 깨뜨리고 보편성을 가진 세계종교로서의 모습을 선명하게 하였다.

구약성서와 헤브라이 사상[편집]

舊約聖書-Hebrai 思想구약성서는 유대교의 경전으로, 그리스도 교회도 이를 경전으로 채택하였다. 신약성서에서 <성서>라고 하는 것은 구약성서를 말한다. 구약성서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교회에서 경전으로 삼은 다음 <신약>성서에 대하여 <구약>성서라고 하게 된 것이다.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있지 않은 유대교에서는 구약성서라는 명칭은 없고 다만 성서라고만 하는데 이것은 신약성서가 경전이 되기 전의 그리스도 교회(따라서 신약성서의 各書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이다. '구약(舊約)'이란 옛 계약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계약에 대해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3장 14절에서 사용하였다. 새로운 계약이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서>31장 31절에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사용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경전이므로 여기에 포함되는 서적의 범위가 문제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측에서도 보통 신교 교회에서는 구약성서에 포함되는 서적의 범위는 유대교측의 헤브라이 원전(原典)과 같지만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그 외에 외전(外典:가톨릭 교회의 제2정전)이라고 하는 몇 가지 서적을 첨가하고 있다. 따라서 똑같이 구약성서라고 하더라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 중에서도 각 교파에 따라 포함되는 서적의 범위가 다르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외전은 헤브라이 원전에 포함되는 정전(正典)에는 미치지 못한다.

구약성서의 순서는 헤브라이 원전의 순서에 의하지 않고 가장 오래 된 번역인 그리스역(譯)의 순서에 따르는 것이 많다. 이에 따라 첫째는 창세기에서 <에스더서>에 이르는 역사서이다. 둘째는 성서문학(聖書文學)이라고 하는 것으로 <욥기>에서 <아가(雅歌)>에 이르는 것이다. 셋째는 <이사야서>에서 <말라기서>까지의 예언서이다. 외전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구약 각서는 장구하고 복잡한 성립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각서의 소재가 되는 구전(口傳) 또는 문자로 기록된 후의 전승(傳承)을 본다면 기원전 12세기 무렵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점차로 성립한 것이다. 여기에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뿐만 아니라 소아시아나 동부 지중해 세계의 영향도 상당히 엿보이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기원전 587년의 이른바 바빌로니아 포로 이후, 유대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 학문적인 용어법이지만)의 독자적 사상이다. 이 사상의 발전 자취를 개관해 보기로 한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가 메소포타미아 방면으로부터 팔레스티나에 이주한 것은 기원전 2000년대 초기였을 것이다. 그 후 일부가 이집트로 내려가 노예 상태에 빠졌다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내산에서 이집트 탈출을 도운 하느님과 계약관계에 들어갔다. 이른바 모세의 10계가 어느 정도 이 계약관계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의 신에 대한 충성을 기반으로 하는 계약단체로서 출발한 것이다. 팔레스티나 땅에 돌아와 다른 동족들도 이 계약에 가입시켜, 하나의 성소(聖所)를 중심으로 하는 12지족연합(十二支族聯合)으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1000년경 왕국이 형성되어 2대왕 다윗은 예루살렘에 도읍을 정하고 12지족연합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왕국은 세속적인 제도였기 때문에 모세 이후의 종교적 이상과 국가 현실 사이에 모순이 생기고, 많은 예언자가 나와 왕과 국민이 모세 이래의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왕이나 국민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예언자들은 세상에 종말이 올 때 이상적인 상태가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 실현된다는 것을 예언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현실의 왕이 하느님을 따르지 않으므로 이상의 왕이 종말의 날에 나타날 것을 예언한 것이 이른바 메시아 예언이며, 메시아는 '기름 부어진 자(왕을 말함)'라는 뜻의 아람어(셈어족의 하나)이고, 그리스도는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국가는 아시리아나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의 운명에 놓이게 되어 메소포타미아의 포로 생활이 시작된다. 이에 유대 민족은 그 고난 속에서 신앙을 깊게 하고, 특히 민족이라는 단위에서 교단이라는 단위로 바뀌어졌다. 혈통에 의해 태어나면서부터 계약단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신앙에 의해 교단에 속한다는 면이 강해져서 신앙이 주체적으로 심화되었다. 앞에서 말한 성문학(聖文學)에 속하는 <욥기>나 시편의 대부분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하였으며, 구약성서의 신앙이 그리스도교를 탄생시키는 모태가 된다.

그리스도교를 포함해서 헤브라이 사상은 유럽 사상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만 유럽 사상의 가장 순수한 모습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편집]

(영어 Jesus Christ, 그리스어 I

sous Christos, 독일어 Jesus Christus)

유대인 종교가·그리스도교의 개조.

그리스도는 헤브라이어의 메시아('기름 부어진 자'라는 뜻. 구약성서의 시대에는 왕이나 사제는 기름을 부어서 聖別하였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구세주라는 뜻이 되었다)의 그리스어역이다. 원래는 고유명사가 아니었으나 예수야말로 구세주(메시아)라는 신앙이 원시 그리스도 교단에서 성립한 이래,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결합되어 고유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예수는 기원전 4년 전후에 팔레스티나(아마 현재의 이스라엘국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예루살렘 근교의 베들레헴이라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아버지는 요셉으로 갈릴리(팔레스티나 북부)의 목수였다. 어머니는 마리아, 요셉과 약혼중 성령에 의해 잉태하여 처녀인 채로 예수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예수가 자란 곳은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당시 소년은 유대 교의 회당(會堂)이나 가정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관습이었다. 성서(구약성서)를 배우는 것이다.

예수는 물론 유대교도로서 자라났다. 당시는 직인계급(職人階級)에서 성서학자가 많이 나왔다. 예수는 하층민의 벗이었으나 무지무학하지는 않았다.

팔레스티나는 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 사이에 있었으므로 유대민족은 대국의 지배 밑에 놓이는 일이 많았다. 예수가 살던 무렵의 팔레스티나는 로마제국의 세력권 내에 있었으며 직접적인 통치자는 반(半)유대인인 헤롯왕가였다. 수도 예루살렘과 그 근교는 로마로부터 파견된 총독이 통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밑에서 유대인은 경제적으로는 빈궁하고, 정치적으로는 주권을 빼앗겼으며, 종교적으로는 자주 압박을 받아 괴로움을 겪었다.

특히 유대인 상층계급과 로마인으로부터 이중적 중세가 부과되어 하층민의 곤궁은 매우 심했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는 이윽고 구세주가 나타나 유대 나라를 외국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정치적 기대, 또는 낡은 세계가 괴멸(壞滅)하고 신천지가 나타나며, 일체의 악과 불의와 고뇌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며, 이때 하늘로부터 심판자·구제자인 '인자(人子)'가 영광에 둘러싸여 내림하고, 의인(義人)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우주적인 규모의 종교적인 기대가 퍼지고 또 고양되었다. 이것을 '종말론(終末論)'이라고 한다. 예수도, 원시 기독교도 유대교의 종말론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기원 28년경,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예수는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 세례 요한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은 후에 스스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른바 공생애(公生涯)의 개시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저술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또 예수에 관한 기록은 신약성서의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예수가 죽은 후, 생전의 예수를 직접으로는 알지 못하는 복음서 기록자들이 예수에 관한 전승(傳承)을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다. 이때에는 이미 예수야말로 그리스도라는 신앙이 성립되고, 이 신앙에 의해 예수의 생애나 언행이 해석되었으므로('그리스도교의 기원'항목 참조) 예수 전승은 신앙의 입장에서 형성되고 전해진 것이 많았고, 또 복음서 기록자들 자신도 독자적인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어서 <복음서>는 전체적으로 역사적인 보고는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 증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는 역사학적으로는 확실한 것이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예수의 사상에 대해서는 개략적인 윤곽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말은 윤리훈(倫理訓)과 종말론으로 대별되며, 전자는법·도덕에 관한 것, 인생에 관한 것, 사랑에 관한 것으로 구분된다. 예수는 표면적인 것, 눈에 보여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 소유할 수 있는 것에 의존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것이 법이나 도덕이든, 부(富)나 소유(所有)이든, 또는 인간이든간에 이와 같은 눈에 보이는 형태에 매달리고 의존하여 자기의 지주(支柱)로 삼는 것을 금지한다. 예수는 철저히 그 밑바닥에 있으면서 그것을 성립시키는 것, 곧 '하느님의 지배' 자체에 복종하고, 그 위에 서서 '하느님의 지배'를 모든 것에 우선시키고 첫째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느님의 지배'는 모든 사람을 초월하고, 모든 사람의 위에서 작용하며, 모든 사람을 결합시킨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든 간에, 생명 때문에 번민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형제에 대해 노하는 자는 살인죄로 문책받는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방해가 되는 것은 손이든 눈이든 베어버려라" 등은 이런 뜻으로 말해진 것이다.

'하느님의 지배'가 스스로를 관철할 때 모든 악이 멸망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다(종말론). 예수는 이를 대망하며 알렸으나, 예수가 일으킨 이 운동은 유대인 지배계급의 반감을 사고, 로마 관헌에게는 반란으로 보였기 때문에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십자가 형에 처해졌다.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후 제자들은 독자적인 방법으로 예수의 선교를 이어받아('그리스도교의 기원' 항목 참조),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개조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신약성서[편집]

新約聖書

1세기 중엽부터 2세기 초에 그리스어로 쓰여져 2-4세기에 걸쳐 편찬된 그리스도교 교회의 정전(正典). 신약성서는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며, 그 성립에는 다수의 원시 그리스도 교도가 관여하였다.

기원 30년경, 예수('예수 그리스도' 항목 참조)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후 제자(사도)들은 "예수는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죄없이 죽었으며,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야말로 대망하던 구세주(메시아=그리스도)이다"라는 고지(告知)를 중심으로 하는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그리스도교의 기원' 항목 참조).

처음에는 원시 그리스도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회심(回心)하여 그리스도교도의 고지를 받아들였으며, 이것은 동시에 '하느님이 그 아들을 내(바울) 속에 나타내신'(<갈라디아서> 1장 16절) 것이다. 바울은 그때까지 구약성서에 기록되고 유대교도들이 해석·전승해 온 '계율(율법이라고 부른다)'을 지키고 행할 때에만 의인으로서 하느님에게 용납된다고 생각해 왔으나, 회심에 즈음하여 "사람이 의롭다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구제를 받아들이는 신앙에 의해서"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율법을 갖지 않은 이방인(하느님의 선민인 유대인 이외의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이방전도(異邦傳道)를 시작하였다. 바울의 회심은 33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후 바울은 소아시아·그리스·로마에 이르는 넓은 지중해 연안 지역을 여행하며 대도시 중심으로 전도하였다. 중첩되는 고난이나 오해·박해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64년의 로마 황제 네로(37-68)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은 여행중 그가 기초를 닦은 각지의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 그것은 대부분 순수한 개인적 서신이며, 교회의 신앙문제 또는 실제문제에 대해 답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공개를 목적으로 저술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용이 우수하였으므로 신도들은 이를 필사하여 보급하고 보존하였다.

바울의 편지가 전부 전해진 것은 아니지만 1세기 말엽부터 바울 서한집 같은 것이 만들어져서 후에 신약성서에 수록된 것이다. 예를 들면, 소아시아 남부(북부라는 설도 있다)의 갈라디아주 교회에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 기독교도가 와서 이방인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선전하여 신도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이를 안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결코 율법 때문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갈라디아의 신도들에게 격렬하게 호소하였다. 이 서한이 <갈라디아서>로서, 40년대말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리스의 고린도 교회에 분파 대립이 일어나 품행이 좋지 않은 자가 생겨 신도의 실제생활에 여러가지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일일이 간절한 지시를 하였다. 이 지시는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일에 대한 파악으로부터 이끌어 낸 것으로, 바울의 신학사상가로서의 위대성을 보여준다(<고린도전서> 50년대 중엽. <고린도후서>도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쓰여진 바울의 진정한 서한이다).

또한 그가 55년 후반부터 56년 전반에 걸쳐 고린도에 체재하였을 때, 제국 수도 로마의 교회 방문을 결의하고, 미리 그의 신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로마 교회에 보낸 것이 <로마서>이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이전에 성립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개하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한편으로는 예수의 생전의 언행에 깊이 감동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의 언행을 보고 듣고서, 그 근거이기도 하고 또한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하느님의 지배'에 접한 사람들이나, '하느님의 지배'의 구현인 예수 자신을 중요시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사이에(물론 그외의 수많은 신도 사이에) 예수의 언행이 전파되었고, 그러는 동안에 해석이나 변용(變容)을 겪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성자(聖者)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기적의 이야기가 전해지거니와 예수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또 원시 교회의 전도나, 신도의 도덕적 훈련이나, 예배나, 새크러먼트(세례·성찬)에 있어서도 예수의 말이나 행동을 이야기하였다.

예수의 십자가의 '속죄'보다도 오히려 예수 자신의 언행에서 하느님의 출현을 본 사람들이 예수의 어록(語錄)을 편찬하고, 더 나아가 예수의 언행의 전승(그것은 이미 다분히 전설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을 모으고, 여기에 수난과 부활의 이야기를 덧붙여서 이른바 <복음서>를 만든 것이다. 최초의 복음서 기록자는 마가이다. 그는 아마도 예수를 직접 알지는 못했던 원시 교단의 인물인 듯하며, 그가 기록한 <마가복음>은 60년대 후반에(로마에서?) 완성되었다. 그가 수집한 전승이 이미 원시 교단의 그리스도 신앙의 각인(刻印)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직접 제자는 아니었으므로 그의 <복음서>는 사실(史實)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 <복음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를 둔 사도들의 그리스도 파악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으며, 예수 중심의 태도를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다음으로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과 <예수어록>을 사용하여 이에 자기들이 수집한 사료를 추가해서 각기 독자적인 신학적 주장을 가진 복음서를 썼다(둘 다 80년대로 생각된다). 누가는 예수가 죽은 후 성령에 의해 교회가 성립된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이를 '구약시대'와 '예수시대'로부터 구별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교회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예루살렘에 세워지고, 베드로나 바울 등 사도의 활동에 의해 전파되고, 드디어 로마까지 퍼지는 경위를 테마로 하는 <사도행전>(90년대)을 저술하여 최초의 역사 신학자(歷史神學者)가 되었다.

마태는 교회야말로 선민(選民) 이스라엘을 계승한 참된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보고, 마태 당시의 바리새적(的) 유대교와 대결하면서 신도에 대한 하느님의 참된 요구(윤리적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를 설파한 예수의 모습을 기록하고, 또한 교회의, 주로 신도의 기도에 응답하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리하여 마태는 예수의 말을 모아서 <산상수훈>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마태복음> 제5-7장). 이상의 두 가지 예수 이해(십자가 중심과 예수 중심의 이해) 이외에 제3의 이해가 있었다. 부활하여 하느님 옆에 앉은 그리스도, 만물의 주인이며 그래서 만물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 곁에서 활동하는 주 그리스도의 지배를 체험한 신도는 교회에 전해지는 예수의 모습에서 이 지배가 참으로 원만하게 구현된 형태를 보았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예수 전승을 소재로 하여 그들이 몸소 체험하여 알고 있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그렸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마태·마가·누가 세 복음의 경우보다도 훨씬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에서 떨어져 있다.

그것은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갈라디아서> 2장 20절)라고 한 그 그리스도(곧 모든 사람의 곁에 있고 사람을 진실로 사람답게 하는 규정, 이를 원시 그리스도 교도들은 '부활한 그리스도'라고 해석했다. 이것은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지배'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곧 역사상의 사람인 예수가 아닌 '영적(靈的)인 예수'자신을 예수의 모습을 빌려 서술한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이다.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불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복음서> 첫머리의 이른바 '머리말'이 전편의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곧 하느님 곁에 있는 신적(神的)인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다(1장 14절). 로고스는 우리들과 떨어져서 하늘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며, 이 세계 속에서 활동하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상의 문서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신약성서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 외에 바울이 썼다고 하는 서한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서> <데살로니가 후서> <디모데 전서> <디모데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이다.

이중 진정한 바울의 서한은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서> <빌레몬서>이며, <에베소서>나 <골로새서>는 약간의 의문점이 있으며, 나머지는 바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학자가 많다.

위에 든 것 이외에 신약성서에는 저자 불명의 <히브리서>,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썼다는 편지 <야고보서>, 사도 베드로가 썼다고 하는 편지 2편(<베드로 전서> <베드로 후서>), 야고보의 동생 유다가 썼다고 하는 편지 <유다서>, 사도 요한이 썼다고 전해지는 편지 3편(<요한 1서> <요한 2서> <요한 3서>)이 있으나 저자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끝으로 <요한계시록>이 있다. 이것은 원시 교단의 종말대망(終末待望)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상의 문서는 40년대로부터 2세기 초에 걸쳐서 쓰여졌다. 원시 교단이 만들어낸 문서는 이외에도 많지만, 2세기가 되면서 이단적인 사상이 나타나, 사도적 권위 밑에서 정통을 확립하여 교회의 통일을 유지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에 정전(正典)의 결집이 서둘러져, 397년의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내용의 정전 신약성서가 결정되었다('신약'이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새로운 계약이라는 뜻).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와 함께 그리스도 교회의 정전으로서, 그리스도 교회에 대해 규준적(規準的)인 의의를 가질 뿐 아니라 널리 사상·문학·예술, 또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끼쳐왔으며, 현재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인류의 불멸의 공통 재산이 되고 있다.

그노시스파[편집]

Gnosis 派

'그노시스'는 본래 '지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인데, 단지 사물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신·인간의 기원, 그 구원 등에 대한 지식으로서, 이러한 지식에 의해 인간 속의 영적 요소가 구원된다는 종교적 용법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교와의 관련에 있어서는 신약성서에서 보이는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디모데 전서> 6장 20절, <요한 1서> 4장 1절 이하, 기타) 등이 그노시스적 요소의 발아라고 생각되지만, 많든 적든간에 그리스도교의 내용을 갖고 성서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그리스도교적 그노시스파의 활동이 현저해진 것은 2세기 무렵이다.

지방적 특색이나 지도자의 경향에 따라 여러가지 분파가 있었다. 중요한 지도자는 소아시아의 케린토스, 이집트의 바실리데스(104? 사망), 로마의 발렌티누스(?-270년 이후) 등이다. 발렌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에 정통하고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키온도 그노시스파라고 간주되기 쉽지만, 그는 그노시스파의 신화적 사변(思辨)이나 성서의 비유적 해석을 배척하였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그노시스파가 아니다.

그노시스파의 특색은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창조신(데미우르고스)과 최고 신을 구별하고, 이 최고 신으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그노시스'를 준다고 하여, 이른바 가현설(假現說:신적·영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의 육신에 깃들였으나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기 직전에 그로부터 떠났다고 말한다)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3세기 호교가들이 반박론을 써서 교회의 전통적인 그리스도 해석의 옹호에 힘썼다. 또 3세기의 로마제국에서 유행한 마니교는 초기의 그노시스파와 매우 흡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3세기에는 전반적으로 쇠퇴했다.

호교가[편집]

護敎家

2세기경부터 고대 그리스도교의 반대자에 대해서 교회의 가르침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단지 여러가지 비난에 대해 변명을 했을 뿐 아니라 본래 이질적인 그리스 사상의도움을 받아 그리스도교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헬레니즘·로마 세계에 소개한 사상가를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반대자란 유대교도, 성서가 그리스인이라고 부르는 이교도, 그리고 로마의 국가권력이다.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이단 사상도 추가된다. 이러한 적에 대해 신도 단체의 영적 지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단의 철학자와 대등한 논쟁을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사투를 계속했다. 비난의 내용은 독신(瀆神)·무신론·난륜(亂倫)·유아살해(幼兒殺害) 등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교의·의식에 대한 오해나 억측에서 생긴 듯하며, 더욱이 이론을 넘어선 혐오감도 덧붙여졌다. 호교가는 언어적·사상계통적으로 그리스 호교가와 라틴 호교가로 대별되며, 전체적으로 그리스 호교가가 앞서 있다.

2세기 초기의 콰드라투스, 아테네의 아리스테이데스가 각기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등 두 황제에게 호교서(護敎書)를 헌정하였다. 콰드라투스는 에우세비우스(263?-339?)의 <교회사>에서 그 존재가 알려져 있을 뿐이나 아리스테이데스는 아테네의 철학자로 이교·유대교로부터의 그리스도교 공격에 대해 처음으로 학문적 태도와 방법을 가지고 대항하였다.

가장 대표적 호교가 유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을 구사하여 이교의 철학자와 공통의 언어로써 그리스도교를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2세기 후반의 아테나고라스는 역시 아테네의 철학자로서 유일신교(唯一神敎)의 과학적 논증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이 신앙에 대한 비난도 논박하였다.

이어서 리옹의 사제, 소아시아 신학의 대성자 이레나에우스(140?-202?)가 <이단반박론(異端反駁論)>을 써서 그노시스파의 이단을 철저히 배척하고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일신교를 강조하였다. 로마에서는 박식다재한 히폴리투스(160/170?-235)가 활약했다.

라틴 호교가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테르툴리아누스(160?-222 이후). 그의 호교론은 격렬한 아프리카인의 기백이 넘치며, 일신교 신앙을 축으로 하여 이교를 공격한다. 아르노비우스(330? 사망)는, 최상의 이교 철학은 그리스도교와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하였으나 제자 라크탄티우스(240?-320?)는 이교적 종교와 철학의 허망함을 주장하였다. 모두 아프리카 출신으로 아프리카는 말기 라틴 문학의 대표자를 배출한 지방이다.

유스티누스[편집]

Justinus (100?-165)

철학자, 그리스도교 호교가.

순교자 유스티누스라고 불린다. 사마리아의 프라비아네아폴리스에서 그리스인 또는 로마인 양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리탐구의 철학적 편력자로서 스토아 학파, 페리파토스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등을 편력하면서 교사를 찾아보았으나 만족을 얻지 못하고, 최후로 플라톤 주의에 진리가 있다고 믿고 플라톤이 가르치는 이데아의 관상(觀想)에 의해 하느님 보기를 원하고 명상생활에 들어섰다.

이 무렵 그리스도 교도의 한 노인을 만나 말에 의해서보다 행위에 의한 그리스도교 진리의 증명에 감동하여 회심하였다. 인간이 신을 알기 위해서는 명상적 생활에 있어서의 이성적인 탐구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신으로부터 계시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을 알고 이 노인의 증언에 의해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을 주목하고 여기서 신의 계시를 보았다.

그러나 그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철학자라는 점에 있었다. 그는 그리스 철학에 정통했고, 이 그리스적 교양에 의해 그리스도교 진리에 학문적 기초를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회심 후에도 철학자로서 처신하며 로마에서 그리스도교 철학을 가르쳤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참된, 최고의 철학'이었다.

그의 그리스도교는 행위를 중시하는 윤리종교적(倫理宗敎的) 색채가 강하고,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다. 최초의 협의의 신학자라고 간주된다. 전체적으로 교회의 전통에 충실했으며, 그 진리를 위해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교교파[편집]

Alexandria-敎校派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기원후 2세기 말부터 4세기까지 계속된 고대 그리스도교의 신학교. 교양 있는 계층에 그리스도교를 선전하는 데 노력했다.

최초의 교장은 판타이노스로 되어 있으나 대표자는 오히려 그 후계자인 클레멘스(150?-221/220)와 오리게네스이다. 종교적 철학의 연구를 위한 가장 오랜된 그노시스파의 학교가 이집트에 있었고, 또한 알렉산드리아는 필론 이래 유대교 신학의 중심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교교파는 처음에는 양자를 모범으로 삼아 형성되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강의나 대화에 의한 교수는 성서연구가 가장 중요한 코스였으나 한편으로는 보다 높은 지식과 비유적 방법의 습득을 위한 준비교육으로서 그리스 철학(특히 플라톤과 스토아파)이 연구되었다. 그곳의 대학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클레멘스는 아마도 그리스 태생인 듯하며, 여러 도시를 편력하면서 높은 학식을 함양하고 그리스도교에 귀의하여 판타이노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이 죽은 후(190?) 교장이 되었으나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때 그곳으로부터 도망하였고, 그 후의 소식은 분명하지 않다.

주요 저서로는 <그리스인에의 권고>(190?), <교육자>(190-195?), <융단>의 3부작과 기타가 남아 있으며, 내용은 이단 배격으로부터 신앙적 인식의 지도에 걸쳐 있다. 후계자 오리게네스는 후에 카이사레아에 이주할 때까지 성서와 철학을 강의했고, 클레멘스의 종교철학의 원리를 더욱 발전·완성시켰다.

오리게네스[편집]

Origenes (185/186-254/255)

아우구스티누스를 제외한 고대 그리스도 교회 최대의 저술가·성서학자·신학자.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듯하다. 경건한 그리스도 교도인 아버지로부터 초기 교육을 받고 클레멘스 밑에서 성서, 그리스 철학을 깊이 배웠다. 그리스 철학적 인식에 의해 성서의 계시와 신앙의 기초를 닦으려고 하였다. 6세기경 그 사상의 정통성이 문제가 되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에 이단으로 선고되고, 저작은 금서(禁書)가 되었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 고문으로 건강을 해치고 아마도 이 때문에 죽은 듯하다.

삼위일체론[편집]

三位一體論

신은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이라는 세 개의 위격(位格, 페르소나)과 하나의 실체(實體, 숩스탄티아)로 존재한다고 하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

그러나 성서에는 이 용어가 없다. 삼위일체의 신앙은,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 성령에 의해 계시되고 완수된다는 것이 구원의 체험 속에서 처음으로 이해된다고 한다.

트리니타스(삼위일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은 테르툴리아누스라고 한다. 당초에는 1과 3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곤란함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론의 발전으로서 생겼고, 그리스도(子)의 신성을 부인하고 피조자성(被造者性)을 주장한 아리우스(256?-336)가 아타나시우스(293?-373)에 의해 부정된 후에는(아리우스파는 이동 전의 게르만인 사이에 전도되었다) 1과 3의 관계가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사벨리우스는 양체론(樣體論)을 주장, 부·자·성령을 같은 신의 다른 현현양식(顯現樣式)이라 하였고, 마케도니오스는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3자의 현실적 구별이 애매해지거나 삼신론(三神論)에 빠지게 될 위험을 극복하고 고대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였다.

현대에 있어서는 삼위일체론에 대해 고대와 같은 흥미가 상실된 것은 차치하고 그리스적 존재론을 초월한 새로운 존재론으로부터의 재검토가 요청되고 있다. 현재 페르소나는 '존재의 방식', 숩스탄티아는 '존재의 실질적 내용'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카파도키아파[편집]

Cappadocia 派

4세기 후반에 활약한 카파도키아 출신의 세 교부를 말할 뿐 특별히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체계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카파도니키아의 카이사레아의 사교(司敎) 바실리우스(330?-379), 그 친구며 나치안츠의 사교 그레고리우스(329?-389), 바실리우스의 동생이며 뉴사의 사교 그레고리우스(330?-396)를 말한다. 그들은 같은 종교적 이상과 지적 관심을 가지고 긴밀한 우정으로 맺어져 있었다.

아리우스파의 바렌 황제 밑에서 위기에 처해 있던 동방의 정통신앙을 지키기 위해, 실천 능력이 뛰어났던 뉴사의 그레고리우스의 형 바실리우스는 동서 양교회의 사교들과 관계를 개선하려고 일치정책(一致政策)을 시도하였다. 세 사람은 381년 콘스탄티노플의 종교회의에서 정통신앙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를 최종적으로 패퇴시키는 데 있어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오리게네스처럼 성령의 신성, 삼위일체론 등 신학적 논쟁에 가장 좋은 철학적 사상을 원용(援用), 동방신학(東方神學)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암브로시우스[편집]

Ambrosius (339?-397)

밀라노의 사교.

로마 귀족인 갈리아 도장관(道長官)의 아들. 토리르 태생. 리그리아, 아에미리아 총독의 지위에 있었고 세례 전의 몸으로 밀라노 사교에 추대되었다.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이교·이단과 대결, 이를 패퇴시키면서 동방교회와 로마의 제권(帝權)에 대한 서방교회의 권위를 확립시켰다. 그에 의해 길이 열린, 국가에 대한 교회의 우위(優位=테오크라티)는 중세 서방교회의 그 후의 역사를 결정하였다.

펠라기우스[편집]

Pelagius (360?-420)

브리타니아(영국) 태생의 수도사(修道士).

4세기 말에 로마에 와서 법률을 배운 듯하며 이어 수도생활에 들어갔다. 금욕적 생활태도, 도덕적 엄격성 때문에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정통신앙에 대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을 강조하고, 구원에 있어서 은총의 의의를 부정하였다. 이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강한 반박을 받았고, 로마에서는 추종자도 있었으나 아프리카나 팔레스티나에서는 이단으로 몰렸다.

아우구스티누스[편집]

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430)

고대 그리스도 교회 최대의 사상가, 히포 레기우스의 사교.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대표하는 신학자·철학자.

북아프리카, 로마제국의 누미디아(지금의 알제리)의 타가스테에서 이교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 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도시참사회원(都市參事會員)이었으므로 그 신분에 알맞게 또 아버지의 뜻을 좇아 법률가가 되기 위해 마다우라, 카르타고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동안 라틴 문학을 애호하며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英智의 사랑을 권한 철학적 대화편,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에 경도, 진리탐구의 욕구를 마음 속 깊이 느끼고 마니교에서 진리를 구했다.

384년 본디 아프리카 총독인 신마쿠스의 소개에 의해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가 되었다. 여기에서 사교 암브로시우스의 인격과 설교에 감화되어, 전에는 문체와 철학적 내용이 빈약하다고 하여 경멸하던 성서에 깊은 내용과 하느님의 계시가 있으며, 비유적 해석에 의해 이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386년 그리스도교에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육체적 쾌락을 끊지 못해 번민하고 있을 때, "들어서 읽으라"라고 노래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하늘의 계시로 듣고, 성서(<로마서> 13장 13절)를 읽는 순간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신앙적 체험을 거쳐 회심, 다음해 암브로시우스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 무렵에 <행복론> <질서론>이 저술되었다. 자신은 수도생활을 바랐으나 히포 레기우스로부터 사제직을 강청받고 그곳의 노사교 바레리우스가 죽은 후, 후계 사교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에 관련되는 이단사상, 또는 제국의 쇠운과 관련되어 최후 공격을 시도한 이교사상과의 싸움의 과정에서 점차로 완성되어 갔다. 개종 이전에 그는 마니교의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에서 내심의 갈등에 대한 설명을 구했으나, 이제는 유일신에 의한 세계의 창조와 지배가 주장된다. 악은 선의 결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피조물의 불완전성 결과이고, 악은 선과 대립하는 본질은 아니라고 하여 마니교의 2원론이 부정된다.

아프리카 교회의 통일을 위태롭게 한 도나티스트 운동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 확립을 최고의 과제로 만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전집행자(禮典執行者)의 '자격 정당성'과 집행된 예전의 '유효성'과는 관계가 없다는 이론을 발전시켜서 도나티스트의 주장을 반박하고 하느님의 예정·은총에 의한 구원과 교회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서방신학(西方神學)의 기초를 닦았다.

인간은 본디 선하며 자유의지에 의해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에 대해서 타락·원죄·예정의 교의가 확립된 아담의 타락 이래 인간은 원죄를 이어받고, 다만 악을 행할 자유밖에 갖지 못하며, 이에서 구원되려면 은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확신은 자기가 회심 때에 절대적인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학식면에서는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많으며, 플라톤을 읽으려면 라틴어역이 필요했다. 그러나 중세 스콜라 철학자의 사상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이룬 것은 바로 그였다. 13세기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함으로써 일어난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에 대한 반동도 보통 생각하듯이 완전한 반대는 아니었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은 하나의 체계로 정리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고 다면적이며 부조화, 모순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때그때 어떤 한 면만이 강조되거나, 본디 내용은 희박해지고 개념만이 사용되는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중세를 지나 루터, 칼뱅 등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의 심대함은 비할 바가 없다.

저서는 대체로 논쟁 형식을 취하고 서한·설교도 많이 남아 있다. 대저 <신국(神國)>은 사상 최초의 역사철학으로서 그 의의가 크고, 자전적 저작 <고백>은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찬미의 서(書)이다.

시대의 온갖 문제와 성실하게 대결하다가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 공략하고 있을 때 열병으로 죽었다.

고백[편집]

Confessions (397-401)

13권.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전적 저작. 387년까지의 자기의 내적·종교적 발전을 기록한 것.

만년에 쓴 <재론(再論)>에서 그의 말에 의하면 '나의 생활의 악과 선에 관련하여 의롭고 선한 하느님을 찬미'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서술은 끊임없는 하느님에의 찬미에 의해 중단되면서 진척된다. 죄의 고백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예찬하는 책이다.

1-9권은 스스로의 죄가 깊다는 것을 단지 표면적 현상만으로서가 아니라 행위의 밑바닥에 있는 동기 자체로부터 고백하고 엄격히 비판한다. 입신출세를 위해 수사학 등을 배울 때 빠졌던 방탕한 생활, 마니교나 점성술에 미혹되었던 일, 드디어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밀라노의 사교 암브로시우스의 지도에 의해 회심하기까지의 일을 서술하고 있다. 수도생활에 들어가려고 귀향하는 도중 어머니의 죽음을 맞아, 어머니의 경건한 생애를 이야기하고 9권을 끝맺는다. 10권에서는 당시의 히포레기우스 사교로서의 자기관찰·자기비판을 행한다. 마지막 세 권은 성서의 신·세계·시간·영원에 대해 명상하고, 시간론을 전개한다. 그 철학적 의의는 오늘날에도 평가받고 있다. 말기 로마제국의 철학이나 종교사상이 비판적으로 묘사되어 종교 문학사상 새로운 걸작으로 평가되었고, 그의 저서 중 가장 많이 읽히고 있다.

신국[편집]

De Civitate Dei (413-426)

아우구스티누스 필생의 대저. 22권. 심원한 역사철학을 전개한 고대 그리스도교 최대의 호교론(護敎論).

집필의 직접적인 동기는 410년 아라리크가 이끄는 서(西)고트족이 행한 로마시의 약탈에 있다. 당시 정치적인 중요성은 상실되었으나 로마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의의를 갖고 있어서 신성불가침의 도시로 여겨지던 로마의 함락은 제국의 전 국민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었고, "세계의 빛은 꺼졌다… 로마시의 멸망은 결국 전 인류의 멸망이다"(히에로니무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에 민심의 밑바닥에 끈질기게 살아 있던 전통적 이교신앙, 곧 모든 재앙은 하느님의 노여움이라는 고대 로마적 신앙이 표면화되어 그 책임을 그리스도 교도에게 돌리는 논의가 재연되었다.

이는 4세기간 이교(異敎)가 정치적·사회적 세력으로서는 대패하였지만 사상적으로는 결코 압도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 교도도 가끔 동일한 이론적 기반에 서려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신적 지도자로서 이 위기에 대처할 길을 제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 책은 이러한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1-5권은 재앙을 그리스도 교도에 의한 다신교 제사의 금지에 돌리려는 주장을 배격하고, 6-10권에서는 이러한 재앙은 과거에도 있었으며, 신들에게 희생을 바친다 해도 이러한 재앙을 막을 힘이 생기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곧 이 책 전반부는 타설의 반박이며, 자기의 주장은 후반에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11-14권에서 이 세상에 나그네로 머무르고 있는 영광스러운 '신의 나라'와 끊임없는 지배를 구하는 지배욕에 사로잡힌 '지상의 나라'의 영원을, 15-18권은 이 두 나라의 발전을, 마지막 네 권은 이러한 발전의 귀착을 각각 보여준다.

그는 목전에 일어난 재앙을 사실(事實)로 인식하였으나 그렇다고 제국의 전도에 대해 비관적인 결론을 맺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사실의 참된 역사적 의의를 고찰한다.

그 자신에 있어서는 외부 세계의 격동은 내면적인 사상적 성숙의 과정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것은 젊은 날에는 마니교의 2원론, 또는 신플라톤 주의에서 구했던 악의 문제에 대한 철저한 해명이 되었다. 역사에 일어나는 재앙(惡)은 역사를 지배하며 '썩은 것'을 잘라내고, 살려야 핦 것은 모두 남겨놓고 또한 새로운 창조를 하는 하느님의 의지에서 생긴다는 관점이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

로마의 함락은 고트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 위에 심판을 내린다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은 고대 유대의 경세(警世)의 예언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시대가 그리스도교를 신봉하고 있는 때인만큼 옛날보다는 현재의 상태가 낫다고 긍정하는 낙관주의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세계의 사상(事象)을 신의실현(神意實現)의 발전과정으로서 해석하고 있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연속·숙명, 또는 유물적 인과율(唯物的因果律)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의지에 자유로운 선택을 허용하면서도 일체가 예정된 경로를 밟는다는 영적 의의를 가진 사건의 연속이다. 역사의 이러한 의미에 눈을 뜰 때 인간은 하느님과의 일치냐 배반이냐,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 중 어느 쪽을 따르느냐 하는 것이 역사의 현실 속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리스도교의 지반으로부터 산출된 사상 최초의 역사철학이며, 두 개 나라(要素)의 대립을 포함하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역사관은 중세에 일관됨은 물론 17세기 계몽주의시대가 되기까지 서양의 역사사상(歷史思想)에서 가장 기본적인 저류를 이루는 것이 되었다.

동방의 철학자[편집]

東方-哲學者

로마제국의 동서 분립,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배경으로 하여 고대 그리스도 교도의 동서 양교회도, 광의에 있어서의 동서의 문화적 전통 차이 때문에 각각 독자적 발전의 길을 걷게 된다. 동방의 철학자는 그리스 이래의 철학적인 전통에 입각하여 그리스도교 교의의 완성에 최후의 노력을 기울여서 중세 발전의 초석이 된 신학자들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總主敎) 네스토리우스(451? 사망)는 시리아의 게르마니키아 태생으로서 안티오키아 신학의 원리를 배운 다음,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논쟁에서 이단으로 몰려 추방되었다. 그의 주장을 계승한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로부터 인도·중국으로 동진(東進)하여 중국에서는 대진경교(大秦景敎)라고 불리었다. 페르시아의 현존 세력을 아시리아 교회라고 한다. 6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요하네스 필로포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적 주석자로서 뛰어났는데, 교회의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융화를 기도했다.

조금 늦게 막시무스 콘페솔(580?-662?)이 있다. 비잔츠 귀족 출신으로 페르시아인이 침입할 때, 아프리카로 피난하여 이곳의 단성론(單性論) 등 이단을 일소하였다. 8세기에는 다마스커스의 요하네스가 레오 3세의 화상숭배(畵像崇拜) 금지에 반대하고, 또 이슬람교·네스토리우스파 등 이단과 활발한 논쟁을 벌여 그리스도론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알려졌으며, 그의 말은 중세 전 기간에 걸쳐 널리 인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