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중세의 사상/중세의 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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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사상이라고 하면 서양 중세의 그리스도교 사상을 무시할 수가 없고, 이 사상은 유대교에 유래하는 것이니 이미 '창조'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창조란 한마디로 만유, 즉 이 세상 만물과 그 근원인 초월적인 신과의 관계를 말한다. 천지만물, 곧 자연의 근원(arche)을 생각하게 되고 탐구한 것은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의 시발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대의 그리스 철학사상 속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 시인하는 '무(無)에서의 창조'라는 생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중세의 사상은 그리스도교적인 사상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인간의 사상은 시대적으로 전수(傳授) 및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사상사를 훑어본다면 그리스도교를 바탕 또는 배경으로 하여 그리스 철학을 채택 또는 섭취함으로써 종합 또는 융화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세의 사상은 계시(啓示)에 따르는 신앙의 진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확인함과 동시에 이성에 의거하는 철학적 진리를 인정하면서 양자의 근본적인 귀일(歸一) 또는 필연적인 조화를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대전제 위에서 중세의 철학사상은 성립되었으며, 또한 그리스도교적 신학(神學) 배경 아래 형성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중세사상의 근간(根幹)이 되는 중세 철학을 2분하여 '교부철학(敎父哲學)'과 '스콜라 철학'으로 나누는데, 전자는 그리스도교 신학 형성의 시대에 교회를 육성한 아버지 역할을 한 소위 '교부'들에 의해 논의된 철학으로서 2세기부터 7세기까지에 수립된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세계로 전파 침투하여 헬레니즘의 철학과 접촉하게 되자 그리스도교의 진리성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교회를 변호해야 할 필요를 느껴 2세기에는 소위 호교가(護敎家)들이 배출되었다. 3세기에는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가 지나쳐 신앙의 경지를 높은 지식(gnosis)으로 대치해 보려는 그노시스파가 생겼다. 반면 이같은 경향에 반대하여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철학 배척의 주장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양극단을 물리치고 그리스도교를 이성으로 해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 신학을 체계화해야 할 요청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응한 최초의 신학자가 오리게네스(Origenes)다. 그러자 4, 5세기에 들어서서는 교의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확립할 필요를 느끼게 되자 이같은 교리형성에 이바지한 교회 학자들을 교부(敎父)라고 호칭하였고, 그중 가장 거대한 교부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다. 그는 신학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위대한 철학사상가였다. 그에게 영향을 준 신플라톤 철학은 그의 생체험에서 느끼게 된 악의 문제를 비롯하여 영원한 진리추구를 거쳐서, 신과 자기 영혼의 인식으로 파고들어 그의 깊은 종교체험을 살려서 그리스도교적인 그의 독자적인 철학과 신학을 낳게 하였다. 그는 또 인류역사를 일관하는 신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런 입장에서 창세 이래의 인류 역사를 해석한 역사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리스도 교리의 확립은 교부시대에 끝나고 그 후는 주로 교리의 학적(學的)인 체계화가 문제된다. 따라서 신학의 학적 방법이 수립됨과 동시에 이성의 독자적인 능력이 자각되고, 신앙 내용을 될 수 있는 한 이성(理性)에 의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신학과 구별된 고유한 의미에서의 철학이 확립된다. 이 시대의 학문 연구는 주로 교회나 수도원에 속해 있는 학교(schola)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스콜라 철학'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기로 구분된다. ⑴ 초기 8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스콜라 철학 준비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대표자는 안셀무스(Anselmus)이다. 그는 신의 존재를 성서의 권위에 의하지 않고 이성에만 의거해서 논증하고자 하여 역사적으로 유명한 신의 본체론적(本體論的) 증명을 내세웠다. 한마디로 무한한 신의 최고완전함에서 신의 존재를 논증한 것이다. ⑵ 중기 13세기부터 14세기 전반까지는 스콜라 철학의 융성기여서 심오하고 거창한 철학들이 연이어 수립되어 스콜라 철학이 체계상으로도 절정에 달한다. 이같은 융성의 첫째 원인은 신학의 집대성으로서 여러가지 '명제집(命題集)'이 편집되어 중세 전반(前半)의 철학적 성과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스콜라 철학의 방법이 확립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체계가 서구에 소개됐다는 것이다. 실로 13세기 중엽 그리스도교 철학은 원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화함에 이르렀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처럼 급속히 중세철학에 영향을 끼친 원인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시대사정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당시의 그리스도교적인 서양은 회교적인 아라비아 세력의 침략 아래 있었다. 회교는 사상적 무기로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의해 체계화된 신학을 이미 갖고 있었다는 것, 둘째는 그리스도교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내적·필연적 연관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중심문제는 신과 영혼이어서 자연이 객관적으로 문제시되지 않았었다. 그러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속에는 신학과 심리학은 있었으나 자연학이 없었고, 따라서 그의 신학은 자연학의 정초(定礎)인 형이상학적 기초가 결핍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철학이 다만 신과 영혼에만 관련되지 않고 천지만물, 즉 만유(萬有)를 포괄하는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만으로는 불충분하였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재래의 아우구스티누스 철학과 조화시키기 위하여 나선 이가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와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심화시켜 그 '제1동자(第一動者)', 즉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를 만유의 창조 원인인 신으로 파악하였다. 토마스는 자연과 은총(Gratia)을 구별하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대립시키지 않고 은총이 자연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토마스 철학 속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이 깊은 근저에 있어서 집합된 것이다. ⑶ 14세기 후반기부터 스콜라 철학은 쇠퇴해 간다. 벌써 위대한 체계가(體系家)는 나타나지 않았고, 다만 전시대의 철학에 대한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경향으로 흘러서 관심은 형이상학보다도 오히려 실증적인 자연학(自然學)의 방향으로 옮아가게 되는 것이다. <金 奎 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