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현대의 사상/생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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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편집]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철학을 그저 한마디로 '생의 철학'이라 부를 수도 있다. 따라서 '생의 철학'이란 매우 다의적인 의미를 지닌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협의적인 의미로서의 '생의 철학', 즉 19세기 이후 현대철학의 한 사조로서의 '생의 철학'에 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근세철학 사상사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단연 우위적인 자리를 차지해 온 것은 아무래도 합리주의 사상, 즉 주지주의(主知主義) 사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의 결과는 마침내 정신적인 면에선 차츰 지나친 사변적(思辨的)인 것이 인간의 심정마저 경화시켜 갔으며, 또한 물질적인 면에선 고도로 성장해 가는 기계와 기술문명이 인간 생명의 고동 소리를 압살(壓殺)해 가는 듯한 느낌마저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합리주의에 반기를 들고 그것에 불신 내지 반항하여, 생의 응결(凝結), 생의 경화(硬化)에서 벗어나 어디까지나 싱싱하게 살아 있는 생 자체만을 파악하려는 것이 바로 이 '생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더 부연해 본다면 이러한 '생의 철학'은 원래 헤겔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관념론의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 내지 반항에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후 그것은 신(新)칸트 학파와 실증주의의 대립에서 또한 더욱 그 자리를 굳혀 갔던 것이다. 생각건대 신칸트 학파의 비판철학과 실증주의 철학이란 똑같이 반(反)헤겔적이면서도 다만 과학에 대해서만은 유독 매우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본다. 그러나 '생의 철학'에선 이러한 이성주의(理性主義) 내지 과학주의적인 것만으로는 도저히 인간의 살아 있는 진정한 생(Leben)을 파악하기가 매우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었으며, 이리하여 이성주의 내지 비판주의, 실증주의에 매서운 비판을 가하게 되었고, 생에는 로고스(Logos)적인 면보다 도리어 파토스(Pathos)적인 비합리적인 면이 더욱더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의 철학'의 대표자로서는 보통 딜타이, 짐멜, 베르그송을 들지만 그 밖에 쇼펜하우어를 포함시키기도 하고 또한 니체를 넣기도 하며, 때로는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자들마저 부가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만 앞서의 세 철학자에 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딜타이는 그의 "생을 생 그 자체로부터 이해한다(Das Leben aus ihm selber verstehen)"고 우뚝 내세웠다. 그리고 "생만이 모든 현실이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러면서도 그는 "생이란 본질적으로 역사적(歷史的) 생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 존재를 단지 표상(表象)하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나아가 의욕하고 정감(情感)하는 존재로서도 파악하였다. 즉 그는 인간의 정신구조를 첫째, 어떤 대상을 파악하는 표상이 가장 기초가 되어 있으나 그 위에다 어떤 대상을 설정하는 의욕이 또한 거기 있으며, 그리고 가장 드높은 자리에는 가치평가하는 감정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표상하며, 의욕하며, 감정을 지니고 있는 '전체적' 인간으로서 추구하고 파악하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딜타이는 생이 생을 파악하는 방도로서, 체험과 체험의 표현과 그리고 그 표현의 이해 등 세 가지를 들었거니와 근원적인 생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체험(Erlebnis)을 '생의 내화(內化)'라 말하였고, 그리고 우리가 어떤 무엇을 체험할 때에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니와 그 표현(Ausdruck)을 '생의 외화(外化)'라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우리가 어떤 표현을 이해하게끔 될 때 그 이해(Verstehen)를 생의 내적(內的)인 것과 외적(外的)인 것의 통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생을 생 자체에서 이해한다고 함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여겨지거니와, 또한 그는 이러한 '생의 철학'을 하나의 '역사적 이성의 비판'이라 칭하기도 하여 '생의 철학'에 있어서 역사적 방법을 매우 중요시한 셈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그의 '해석학적 방법'이라고 하겠다. 즉 그는 어떤 인간의 생이란 그것이 단순한 개인적인 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통하여 있는 것이며, 사회적 연관을 지닌 생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개인적 존재 이상의 역사적·사회적인 실재로서 생을 철학의 대상으로 여기는 점이 바로 딜타이의 '생의 철학'의 특이한 점이라고 하겠다. 다음 짐멜의 '생의 철학' 사상에는 니체의 "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라고 한 말과, 괴테의 "자기를 초극하는 인간만이 자유롭다"라고 한 말이 어딘가 상통한다. 그의 철학의 특질을 우선 한마디로 말해 본다면 '생의 자기초월(自己超越, Transzen­donz des Lebens ber sich selbst)'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그는 그 생에 있어서 시간성(時間性)을 아주 중요시하였으며, 시간이 생 자체의 구체적인 존재형식이라고까지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 생의 특질을 단순히 끊임없이 생성한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고 항시 그 스스로에 어떤 한계를 부여하고 그것에 개성적인 어떤 형식을 주면서도, 나아가서는 그 형식을 타파하여 그것을 다시금 생의 흐름 속에다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라 하였다. 바꿔 말하면 생이란 한편 현실적으로는 한정된 자기의 형식을 부단히 초월해 가는 그의 이른바 '보다 많은 생(mehr Leben)'이면서 동시에 그 생이란 항시 창조적으로 자기에 어떤 형식을 부여하는 '생 이상의 것(mehr als Leben)'이라고 말한다. 이때 '보다 많은 생'은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意志)'를 방불케 하는 것이라 하겠고, '생 이상의 것'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연상케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끝으로 베르그송에 있어서는, 그가 스스로의 철학적 입장을 살아 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설명하는 유물론이 아니라, 죽은 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입장이라고 말하였거니와 그 또한 그의 '생의 철학'의 특질을 시간성에다 둔 셈이라고 하겠다. 즉 생이란 끊임없이 생성 발전하는 것이며, 그 자신 지속적이고 시간적인 것이라 한다. 이러한 생을 파악하는 기능으로서 그는 지성(知性) 대신 '직관(intuition)'의 기능을 매우 중요시하였거니와, 이때의 직관이란 어떤 신비적 직관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그것은 시간 속에 있어서 '생의 약동(elan vital)'을 그대로포착하는 일종의 공감작용(共感作用)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지적 사유(知的思惟)가 생을 마구 분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직관이란 생 자체 속에 있어서 살아 있는 생 자체를 그대로 파악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더 나아가 진정한 실재란 단순히 외계의 조건에 의해서만 진화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생충동(生衝動)에 촉구되어서 안으로부터 비약적으로 진화해 가는 우주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근원적 생명의 진화 그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부단한 '생의 약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창조적 진화' 그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 우주 전체를 '지속(持續)의 모습 아래(sub spe­cie duratio nis)'서 보았던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생의 철학'을 결론적으로 요약해 본다면, '생의 철학자'들은 기계주의적 면에 대해서 오직 싱싱한 생명주의적 면만을 강조하였는가 하면, 이성주의적 면에 대해서 직관주의적 면을 훨씬 중요시하였다고 보며, 그리고 자연주의적 면에 대해서 역사주의적 면을 우월하게 채택한 입장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그들 '생의 철학자'들은 생을 언제나 싱싱하게 살아 있는 생으로서, 그리고 분석적이고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인 것으로서 보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朴 俊 澤>

니체[편집]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19세기 후반 독일의 대표적인 생의 철학자로 실존철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

라이프치히 근교에서 교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5세 때 아버지를 사별하고 조모의 집에서 누이동생 엘리자베트와 함께 어머니가 키웠으며, 수재여서 고전적 교양으로 유명한 명문 김나지움인 프포르타 학원에서 공부했다. 본·라이프치히 두 대학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1806-1876)에게 사사하여 고대문헌학(古代文獻學) 연구에 노력하고, 그의 추천으로 1869년에는 약관 24세로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정열과 의무감에 찬 니체는 지원하여 독·불전쟁에 종군하고(1870), 과로로 인한 중병으로 평생 편두통과 안질을 앓았다. 이 때문에 바젤 대학 교수를 사퇴하고(1879), 스위스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으로 조촐한 독신생활을 계속하면서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 각지에 체재하며 저작활동에 전념하였다.

경건한 목사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희망을 무시하고, 니체는 그리스적인 자연계에 마음이 이끌려 그리스도교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고, 라이프치히 대학 학생 시절에 읽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나 바젤 대학 교수 시대에 친교를 맺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음악에서 받은 영향과 고전문헌학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를 냉혹하게 탄핵하고 자연적 생을 중시하는 사상에 도달하여 갔다.

그리스의 서정시인 핀다로스(전 522-전 442)의 "너 자신이 되라"는 말이 니체의 사색을 이끄는 근본적 동인(動因)이었는데, 자유로운 자기 형성의 이념을 다음과 같은 3단계의 변화를 통해 전개했다.

( 초기(탄생부터 1876년의 32세까지)

그리스 비극이나 고대철학을 깊게 연구함으로써 고전적 교양의 매력과 천재의 영자(英姿)에 감동하여 근대문명의 속물적(俗物的) 경향에 반항하는 이상주의적이며 낭만주의적인 시대이다.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 심취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회의에 사로잡혀 <비극의 탄생>(1822), <반시대적 고찰(反時代的考察)>(1873-76)을 썼다.

( 중기(1876-1881년의 37세까지)

쇼펜하우어 및 바그너와 결별하고 독자적 사상을 자유롭게 탐구하면서 과학적 실증주의의 분석방법을 구사하여,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모든 기성권위의 절대성을 파괴하고 모든 진리의 상대성을 강조하여 회의와 니힐리즘에 자기 자신을 던져버리는 정신적 방랑의 시대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80), <서광(曙光)>(1881), <즐거운 지식>(1882년의 제4서까지)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 후기(1881-1900년 사망 때까지)

니힐리즘에 대결하여 초월하기 위한 근본사상이 형성된 원숙기로, 영원회귀(永遠回歸)·운명·사랑·초인(超人)·권력에의 의지 등 근본개념이 명확해지나 광기(狂氣)가 심해져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11년간 간호를 받은 후, 바이마르의 누이동생 집에서 고독한 죽음을 맞이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85), <선악의 피안>(1886), <즐거운 지식>(1886년의 제5), <도덕적 계보학(系譜學)>(1897), <바그너의 경우> <우상(偶像)의 박명(薄明)> <반그리스도인(反基督者)> <이 사람을 보라> <니체 대 바그너>(1889), <권력에의 의지>(1882-88) 등이 있다.

이러한 저작을 통해서 니체는 19세기 말의 데카당스적 삶이나 재상 비스마르크의 권력정치로 생긴 속물문화(俗物文化)와 대결하고, 이러한 병폐의 근원을 그리스도교적인 피안주의(彼岸主義)의 가치체계에서 발견하고 참된 생존의 긍정을 가능하게 하는 가치체계를 정립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기존의 모든 가치의 전환을 꾀하고, 이러한 것들의 구속으로부터 생을 해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신을 부정하는 니체에 있어서 우주·인생의 실상(實相)은 '영원회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일한 재료의 조립(組立)'으로 생기는 여러 현상이 '무한한' 시간적 계기(繼起) 속에서 생기(生起)한다고 하면, 동일한 조립으로 되는 같은 것은 모두 몇 번씩이든 반복해서 회귀(回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자연의 생성은 원환(圓環)을 이루어 회전하는 무한한 반복과정으로 파악된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생성의 원환 속에서 등가적(等價的)인 것이 되고, 그 자체의 독자적인 일회적(一回的) 의의는 부정되므로, 영원회귀의 사상은 니힐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운명애(運命愛)'의 정신에 의해 이 허무한 현실과 일체가 되어 살려고 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의 입장에서 보면, 생의 현실을 이루는 모든 순간의 영원한 원환질서(圓環秩序)의 중심이 되어 영원한 의미를 간직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인생인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하고 가슴을 펴고 주장할 수 있는 인생을 만들어 가야 한다.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죽은 신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 군림해야만 고귀한 인류의 범형(範型)인 '초인(超人)'이며, 이러한 초인을 길러내는 것이 인류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목표인 것이다.

'초인'은 생의 본질을 이루는 '권력에의 진리'의 체현자(體現者)이며, 모든 저항을 극복하고 보다 강대한 생을 실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인데, '초인'의 이념이 제시하는 이러한 권력량(權力量)의 증대야말로 새로운 가치정립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약자의 원한감정(怨恨感情)을 바탕으로 한 종래의 '노예도덕'이 말하는 선악 관념의 피안(彼岸)으로 나아가, 약자를 강자의 지배에 복종하게 하려는 '군주도덕'이야말로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본래의 자연적인 가치질서를 바르게 자각화(自覺化)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19세기 후반의 위기의 시대를, 전적으로 예외자(例外者)의 입장에서 사색한 니체의 사상 윤곽이다. 이 사상은 생전에는 거의 이해되지 않았으나 20세기가 시작되면서 많은 뜻있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었다. 특히 문화를 위한 생이 아니라 생을 위한 문화여야 한다는 니체의 생명주의(生命主義) 철학은 '생의 철학'의 중요한 원천으로 평가된다. 또 니체의 능동적인 니힐리즘의 입장은 야스퍼스나 하이데거 등 실존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비극의 탄생[편집]

悲劇-誕生 (1872)

니체의 처녀작으로 바그너에게 헌정한 저서이다.

니체는 고대 문헌학자로서의 연구를 통하여 그리스 비극의 정신이야말로 진실한 문화창조의 원천임을 알았다. 이 책은 그리스 해석을 전개하면서 그리스 비극의 정신을 현대에서 부흥시킨 것이 바그너의 음악임을 논하여 친구 바그너의 신예술운동을 지원하려고 한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개체적 생은 죽음과 파괴를 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에 집착하려는 자에게는 생은 고뇌와 비극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실을 예감한 그리스인들은 광명과 예술의 신(神)인 아폴론에 의해 상징되는 몽환적(夢幻的)인 미(美)의 세계를 구상하고, 이에 의해 생의 암흑을 잊어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인 위안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파괴함으로써 모든 것을 새로이 창조하는 자연의 근원적인 생산력을 상징하는 풍요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주재하는 운명적 필연(必然)의 흐름에 개아(個我)의 생을 몰락시켜 가는 비극적인 도취의 체험이야말로 보다 근원적인 생의 체험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아폴론적 몽환의 이데아계와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충동계(衝動界)의 긴장된 일체관계(一體關係)에 있어서 생을 표현하려고 한 것으로서, 지적 합리성에 의거하여 형태를 갖추어 보려고 하는 천박한 인생 파악보다 훨씬 심원한 예지의 결정인 것이다.

독창적인 그리스 해석을 전개한 이 책은 실증적 과학성을 중시하는 당시의 문헌학계로부터는 완전히 무시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비극'을 인내하여 독창적인 사상가로 탄생한다. 다음의 <반시대적 고찰>은 이러한 예외자의 입장에서 독·불 전쟁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독일문화의 승리로 착각한 19세기 말 사상계의 속물성(俗物性)을 날카롭게 비판한 경세(警世)의 서(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편집]

人間的-人間的- (1878-80)

니체의 실증주의 시대의 대표작. 기성의 모든 진리관이나 가치관의 배후에는 속물적인 타산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여 과장된 절대성의 가면을 벗기고 해방하려고 한 자유로운 진리탐구서이다.

니체는 여기에서 모든 진리나 가치의 관념은 생이 스스로의 충실·발전을 위해서 선택한 유리한 현실해석의 관점에 지나지 않으며 생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일종의 실용주의적인 인식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관은 진리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그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도 절대적 진실성을 빼앗긴 것이 되어, 니체는 점점 회의와 니힐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방황시키고 수년 동안의 친구인 바그너와 헤어져야 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무한한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편집]

(1883-85)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기본으로 하는 생명 긍정의 사상을, 고대 페르시아의 배화교(拜火敎) 시조 차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웅대한 시극(詩劇) 형식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생명 찬가의 서이다.

4부로 되어 있으며 1883-85년에 걸쳐서 쓰여졌는데, 니체는 즐거운 영감에 싸인 채 각부를 각기 10일 정도의 단시간내에 단숨에 썼다. 그러나 니체의 자신이나 기대도 헛되어 이 책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으며, 특히 제4부는 출판을 맡아주는 곳도 없어 40부만을 자비출판하여, 그중 7부를 친구에게 증정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속편을 쓰려고 했던 니체의 계획은 변경되고 미완성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 이제야말로 인간은 무한한 자기초극(自己超克)을 거듭하여 신을 대신하는 초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초인'은 생의 본질을 이루는 '권력에의 의지'의 완전한 체현자(體現者)이며, 무의미한 것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는 '영원회귀'사상의 중압에서 떨치고 일어나 무의미한 생과 일치가 되어 삶으로써 자유로운 가치창조의 생으로 바꾸는 '운명애'의 실천자를 말하는 것이다.

선악의 피안[편집]

善惡-彼岸 (1886)

니체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사상을 산문 형식의 아포리즘(잠언)으로 표현한 책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하는 자가 적은 것은 시적 표현 형식이 가진 난해성에 있지 않은가 반성하고, 보통의 산문에 의해 그 사상을 부연·해설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니체는 차안(此岸)의 생을 피안의 신에게 희생으로 바치라고 가르치는 그리스도교가 생을 퇴폐시키는 원흉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에 의해 권위가 주어진 기존의 가치체계를 부정하고 선악관념의 피안에서 발견되는 자연적인 생을 충실히 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에서 새로운 가치를 구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가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선악' 관념에 의해 생을 구속하지 말고 그 피안에 서서 생실현(生實現)의 '우열'이라는 구체적 관념으로부터 새로운 도덕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도덕적 계보학[편집]

道德的系譜學 (1887)

니체의 윤리학상의 주저로, 아포리즘(잠언) 형식으로 쓴 '선악의 피안'에서의 요지를 완전히 통일하여 하나의 이론체계로 정리한 이론 전개서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그리스도교에 바탕을 두고 성립한 인인애(隣人愛)의 도덕은 약자들이 품는 비열한 원한감정(怨恨感情)에 의해 거짓 구성된 위선도덕(僞善道德)이며, 강자의 발을 억지로 끌어당겨 약자에게 종속시키려고 하는 '노예도덕'에 지나지 않는다고 탄핵한다. 그리고 본래의 고귀한 도덕은 자연 질서에 따라서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는 '군주도덕(君主道德)'의 입장에서 구해야 한다. 평등 이념에 의해 강약의 가치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인간을 평균화 시키는 '인인애'의 도덕에 대해서, 강자의 전형인 '초인'의 육성을 목표로 노력하는 '원인애(遠人愛)'의 도덕이야말로 참된 인도성(人道性)을 관철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권력에의 의지[편집]

權力-意志 (1882-88)

니체의 이론적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이 유고는 누이동생이 편집·발간하였다.

니체 만년의 유고인 이 책은 '모든 가치의 전환의 시도'라는 부제가 붙었으며, 생의 충일을 지향하는 권력의지를 새로운 가치정립(價値定立)의 원리로 하여 현대의 니힐리즘 문명을 초극하는 방향을 찾으려고 한다. 여기에서 다가올 시대가 니힐리즘의 세기임을 예고하고 이 니힐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도피의 '수동적(受動的) 니힐리즘'에 머무르지 말고 니힐(허무)한 생존 현실 속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들어 니힐한 현실과 일체가 되어 살려고 하는 '능동적(能動的) 니힐리즘'의 입장에 서서, 운명애(運命愛)의 정신에 의해 필연적 운명을 자유로운 창조의 원리로 바꾸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생에의 의지'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권력에의 의지'로서 보다 힘차고 보다 충실한 생으로 무한한 향상을 수행하려는 것이 생의 실상(實相)이므로 기존의 일체 가치의 전환 후에 창조되어야 할 가치정립의 새 원리는 생의 본질인 권력량(權力量)의 증대에서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니체의 권력의지설은 후에 나치즘의 권력 사상을 합리화하는 반동이론으로 악용되었으나 니체의 권력의지설의 참뜻은 냉혹한 자기초극(自己超克)을 위한 내면적인 사상 원리를 명백히 하려는 데 있으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외적 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베르그송[편집]

Henri Bergson (1859-1941)

20세기 초엽의 프랑스 최대의 철학자.

양친은 모두 유대인이며 고등사범학교를 졸업(1882)하고는 지방이나 파리에서 고등중학교(리세)의 철학 교사를 계속했고, 1900년에 콜라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그간 베르그송은 주저 <시간과 자유> <물질과 기억> 등으로 프랑스 철학계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었으나, 교수 취임 후에는 일반 사람들에게 더욱 유명해져서 그의 강의에는 항상 많은 청강자가 몰려들었다. <창조적 진화(創造的進化)>(1907)가 출판된 후에는 저작·논문이 차례차례 여러 외국에서 번역되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미·영의 각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여러 번에 걸쳐 강의나 강연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맹의 자문기관 '지적협력에 관한 국제위원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내는 등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25년 병상에 누웠으나 투병의 고난을 이기고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源泉)>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932년에 탈고하였다. 그 동안 1928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운동의 실재성(實在性)을 승인하고 일체를 과정적(過程的, 시간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유래하는 사상적 전통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의 이론은 전체적으로 매우 변증법적인 내용으로 차 있으나 끝내 변증법의 방법적 확립은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계속 거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속(持續)=시간의 관념에 기초를 둔 베르그송 철학의 탁월한 독자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더라도, 그의 철학에 대한 근본적 비판의 여지가 남는 것은 바로 변증법적 사고와의 관계라는 문제이다. 베르그송은 오성적(悟性的, 분석적) 사고의 한계(운동=지속의 파악에 대한 오성적 사고의 무력 또는 장애로서의 역할)에 대한 비판을 사고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시켰다.

그러므로 초극하려는 노력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었다. 본질적 대립·변증법적 모순을 명찰(明察)하고 있으면서도 변증법적 사고의 방법적 자각이라는 최후의 일보를 보류하고 있기 때문에 베르그송 철학은 그 이론과 방법의 전 분야에 걸쳐서 1원론(一元論)·2원론(二元論) 사이의 끊임없는 동요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베르그송 철학의 전체와 맞설 때, 우리는 천재의 노력만이 이룩할 수 있는 사색의 폭과 깊이와 빛을 갖춘 일대 결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간과 자유[편집]

時間-自由 (1889)

베르그송의 이 책의 원제는 <의식의 직접소여(直接所與)에 관한 시론(試論)>으로 베르그송 철학의 시간=지속의 관념에 기초를 둔 독자적인 영역이 처음으로 전개된다.

박사 논문으로 씌어진 이 책의 의도는 우리들의 심리적 영역에 있는 양적 측정(量的測定)의 관점(정신물리학)이나 결정론적(決定論的) 사고(연상심리학)의 오류를 지적하고 이를 통해서 자유를 확증하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정신물리학이나 심리적 결정론을 일반의 본성 자체를 기계적 결정론 성립의 근원으로서 비판하는 수속을 밟았다.

공간적 표상(表象)과 언어=기호에 의해 성립된 지적 반성=사고는, 예컨대 물리적 운동을 파악할 때에 등질적(等質的)인 시간과의 대응(對應)에서 바라본 공간상의 위치관계로만 파악할 뿐이며, 이러한 등질적 시간은 과정적인 실제의 시간이 아니라 무수한 시점(時點)을 포함한 하나의 선(線)으로서 동시성(同時性)의 시점으로부터 본 시간, 곧 공간화(空間化)된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운동의 공간화, 시간의 공간화는 완료된 운동, 경과한 시간에만 겨우 적용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고는 운동 그 자체, 시간 그 자체, 일반적으로는 끊임없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과정적인 연속성=지속을 파악하지 못한다.

베르그송은 공간(空間)의 제 특성 ―― 동시성, 정지=고정, 무한가분(無限可分)과 병존=상호외재성(相互外在性), 등질성=양 등 ―― 과는 아무 공통점도 갖지 않았다고 하여 시간=지속을 공간으로부터 2원론적으로 확실히 구별하고 우리들의 내적(內的)·본원적(本源的) 자기인 순수의식(純粹意識)을 그러한 지속으로서, 질적인(등질적이 아니고 구체적인) 시간 그 자체로 파악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결정론은 우리들의 참된 자기와는 관계없는 추상적 장면에서만 성립된다. 그리고 지성이 아니라 직접적인 내감(內感)을 통해서 본원적인 자기와 스스로 일체가 될 때, 우리의 자유로운 본질은 참으로 자유로운 것으로서(적극적=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편집]

物質-記憶 (1896)

베르그송은 박사 논문에 이어 이 책의 테마를 다루기 시작하여 발표까지는 약 7년 걸렸다.

박사 논문에서는 시간과 공간, 지속과 연장, 질과 양, 그리고 의식과 물질 등의 구별은 2원론적 단절(斷切)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정신과 물질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서 2원론적으로 병립시킬 경우 이와 같이 전혀 별개의 것이 명백히 일정한 연결을 보여주는 우리들의 심신관계(心身關係)에 대한 설명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데카르트의 송과선(松果腺)의 이론을 상기할 필요도 없이, 이 심신관계는 2원론적 존재론의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고투는 이 책을 상당히 난해한 것으로 만들었으나 해결의 큰 줄기는 ① '형상(形象)'의 이론 및 행동주의적 지각론(行動主義的知覺論)과 ② 의식=지속의 관점에서 베르그송이 독자적으로 이해한 '기억'에 관한 이론으로 성립되어 있다.

베르그송은 아마도 처음부터 물적 대상(物的對象)의 세계의 실재성은 의심하지 않았던 듯하며, 역점은 주로 속류 유물론에 대해서 정신의 실재성을 적극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②(전술)의 부분에 놓여 있다.

베르그송이 가장 고심한 한 가지 점은 심리현상에 대해서는 불가분·불가결한, 그리고 그 자체가 물적 대상인 뇌수의 기능을 해명하고 확정하는 것이었다. 뇌수는 표상을 산출하는 기관도 기억의 저장소도 아니고 행동의 전달기관이며, 또한 순수지각은 어떠한 표상작용도 아닌 대상과의 관계에서 행동의 전달이며, 지각에 의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우리들의 외부에 실재하는 형상(形象)이다 ―― 이것이 하나의 결론이다. 한편 베르그송이 말하는 '기억'은 우리가 상기하느냐 안하느냐에 관계없이 그 불가분적 연속성에 있어서 현재의 의식=지속 속에 보존되어 있는 과거의 의식=시간의 전체이다.

상기는 행동의 요청과 결부되어 뇌수의 기능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그러나 기억의 기억화작용(記憶化作用)은 의식의 '지속으로서의 본성(本性)' 자체와 일체를 이룬 것으로 뇌수나 상기와는 관계없이 존립하고 있다. 행동이라는 접합점에서만 뇌수와 접촉하고 있는 자립적인 기억의 영역이야말로 바로 정신의 실재성의 영역인 것이다.

베르그송은 정신과 물질 쌍방의 실재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행동'을 통로로 하여 일단 양자의 연관을 맺었다. 그러나 이 통로설정을 위해 출발점에서 도입한 '형상'이라는 개념의 불명확성, 곧 실재론자의 '대상'과 주관적 표상(主觀的表象)과의 중간물로서 그 동요하는 성격은 끝내 정리·극복되지 않은 채 이 책의 약점으로 남아 있다.

창조적 진화[편집]

創造的進化 (1907)

베르그송 철학 전체의 정점을 이루고 그의 사색의 형이상학적 총괄로서 의의를 갖고 있다. 이 책에 이르기까지의 의식의 지속 및 정신적 주체의 자유에 관한 탐구는 생명일반이라는 근원의 지반까지 파헤쳐서 생명의 진화라는 시야 속에 자리잡게 된다.

자유로운 본질로서의 의식=지속은 이 책에서 '에랑 비탈(생명의 약진력)'이라는 관념에 도달함으로써 처음으로 근본적인 의의를 얻게 된다. '자유'는 '창조성'이라는 의의를 갖게 되고, 이 창조성은 생명의 지속 속에 보존되어 있는 원초적 생명의 '에랑(약진력)'에까지 소급된다.

이 본원적(本源的)인 약진력이 생명의 진화 전체를, 나아가서는 총체적(總體的)으로 불멸의 발전을 하고 있는 세계 전체를 일관하는 자기운동적(自己運動的)·창조적인 근원이라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생명의 지속은 물질의 세계에 들어와서 물질의 세계를 잠식하면서 차츰 진화의 가지를 펼친다. 이것은 물질을 동화하고 이용하고 물질의 저항을 극복해 가는 '에랑'의 전면적 개화(자유의 실현)에의 지속인 것이다.

사람들은 베르그송에게서 플로티노스의 유출설(流出說)과의 외견상 유사점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의 약진력' 이론이 단지 형이상학적 공상에 그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베르그송은 과학적 증명으로 뒷받침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 절차로서 우선 기계론적 진화론이나 목적론적 진화론에 대한 실증적 견지로부터의 비판, 나아가 실증적 데이터의 검토(눈의 구조 비교, 기타)에 입각한 '생명의 근원적 약진력'의 추측, 그리고 '근원적 약진력'의 견지로부터의 진화 전체에 대한 독자적 전망이 전개된다.

이 책의 특징은 지금까지의 베르그송의 2원론적 시각(視覺)에 대해 1원론적인 통일의 방향성(方向性)이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존재론적으로는 의식과 물질, 지속과 공간 등의 구별이 끊임없이 창조성을 향하는 지속의 상향운동(上向運動)과 물질적 타성·반복성, 공간적 확장에로 이완하는 그 하향운동과의 구별에 의해 설명된다. 또 인식론적으로는 사고와 직관의 단절이 지성과 본능, 각기의 형성·분화(分化)에 관한 진화론적인 분석에 의해 극복되고, 양자의 협동 가능성의 기초가 되어 주지주의(主知主義)와 반주지주의의 동시적 극복을 지향하고 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편집]

道德-宗敎-源泉 (1932)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보다 25년 뒤에 발간된 이 책은 <창조적 진화>의 테마의 연장으로서, 또 <창조적 진화>를 집필중에 이미 떠올랐던 과제에 대한 해답으로서 씌어진 것이다.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11월혁명 후 새로운 국제적 모순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대두된 파시즘, 그리고 다시금 전쟁에 대한 어두운 예감 등 격동과 불안의 세기에 대처해 보려는 문제의식이 이 책의 저류가 되고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표면상의 테마는 '도덕과 종교'이지만, '생명의 창조적 지속'이라는 기본관점에서 씌어진 베르그송류(流)의 '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과 종교는 그 발생 기반='원천'인 사회생활의 차원에서만, 또는 사회생활과의 관련에 있어서만 문제가 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인간적=사회적 생존 및 사회의 발전은 정신적 실현과정이라는 뜻을 갖고, 도덕과 종교를 그 집중적 표현의 축으로 하는 한에서만 문제가 되고 있다.

<시간과 자유>에서 자유 문제로부터 출발하고, 이를 <창조적 진화>에서 생의 창조성 문제로 깊이 고찰한 베르그송은, 여기서는 다시 생명의 형이상학으로부터의 전개로서 자유 문제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자유'는 추상적으로 개인의 자유로서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 상호간의 원환적(圓環的)인 상호침투 관계 그 자체에 있어서의 문제로서 취급되고 있다. '닫혀진 사회'와 '열려진 사회', 이에 대응하는 '닫혀진 도덕' 또는 '정적(靜的) 종교'와 '열려진 도덕' 또는 '동적(動的) 종교' 등의 대립적 관계에 대한 베르그송의 사색 중에서 사람들은 '소외(疎外)'와 '소외의 지양(止揚, 아우프헤벤)'이라는 변증법사관(辨證法史觀)의 도식(圖式)을 상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사회적 관심에는 경제학적인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노력은 역사에 내재하는 모순과 긴장을 사회의 계급대립 문제로 해명하려는 방향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거꾸로 인간적 창조성의 전적 해방=자유의 보편적 실현 문제는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와 일체가 된 종교적 인류애에 도달하는 문제로서 집약되고 있다.

사상과 움직이는 것[편집]

思想- (1934)

베르그송의 두 논문집 중 하나이며 다른 논문집은 <정신의 에네르기>(1919)이다.

두 책은 모두 주로 철학 전문가 이외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짧은 논문이나 강연을 수록한 것으로, 베르그송 자신의 뛰어난 입문서·해설서이다.

<정신의 에네르기>에 수록된 논문들이 주로 심신관계에 관한 특수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데 대해 이 책에는 철학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진리와 방법론의 문제에 대한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집필시기는 <형이상학 입문>(1903)으로부터 <서론 Ⅰ·Ⅱ>(1922)까지의 약 20년간이란 장기에 걸쳐 있다.

지멜[편집]

Georg Simmel (1858-1918)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독일의 철학자·사회학자.

신교로 개종한 유대인을 양친으로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심리학·역사를 배우고 1888년 칸트의 물질론에 관한 학위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얻은 다음 4년 후에는 동대학 철학 사강사(私講師)가 되었다. 그 후 철학개론·철학사·논리학·윤리학·종교철학·사회학·정치심리학 등 다방면의 강의를 담당하여 폭넓고 뛰어난 사상가임을 보여주었으나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1914년(56세)까지 사강사와 원외교수(員外敎授)의 지위에 머물러 있는 불운을 겪었다. 같은 해에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 초빙되어서야 정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4년 후 제1차 세계대전에 정신적 타격을 받아 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병사했다.

지멜의 사상의 발전은 세 단계로 구분된다.

제1기―실증주의적 경향이 강한 시기로 <사회분화론(社會分化論)>(1890), <역사철학의 제 문제>(1892), <화폐의 철학>(1900)이 주된 저작이다.

제2기―칸트의 영향 밑에서 비합리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는 시기로서 <칸트와 괴테>(1906), <쇼펜하우어와 니체>(1907), <사회학>(1908), <철학의 근본문제>(1910) 등의 저작이 있다.

제3기―생의 철학이 제창된 시기로서 <생의 철학>이 대표작이다.

사회학자로서의 지멜은 독일에서 형식사회학(形式社會學)을 창시한 것으로 저명하며, 특히 전술한 저작 <사회학>의 제4장 '투쟁'과 제6장 '사회권(社會權)의 교착(交錯)'은 뛰어난 분석으로 유명하며, 사후에 <로고스>라는 학술잡지에 발표된 <단상(斷想)-일기초>(1919)도 제3기 지멜의 사상적 고뇌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귀중하다.

세기말의 사상가로서 유럽 정신문명의 현실을 다룬 지멜은 성실한 지식인이었으나 정치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독한 가운데 타계하였다.

역사철학의 제문제,철학의근본문제,생의 철학[편집]

<역사철학의 제문제> 歷史哲學-諸問題 (1882) <철학의근본문제> 哲學-根本問題 (1910) <생의 철학>生-哲學 (1918)

지멜의 철학사상의 세 발전단계에 대응하는 세 개의 주저이다.

제1기의 주저 <역사철학의 제 문제>는 '하나의 인식론적 연구'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당시 독일학계의 중심적인 쟁점의 하나였던 자연과학(법칙과학)과 정신과학과의 인식론상 차이를 다룬 것으로, '역사연구에 있어서의 심리적 전제에 대해서' 논한 제1장과, '역사적 법칙에 대해서' 논한 제2장과,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 논한 제3장으로 되어 있다.

지멜은 자연과학적 인식과 역사연구를 매개하는 것으로서 심리학의 의의를 중요시한다. 즉 헤르바르트의 심리학의 영향을 받고 있던 지멜은, 역사란 심리현상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역사연구의 전제로 심리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는데, 이 책 초판에서는 역사학과 법칙과학을 구별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무의미할 만큼 양자를 대립적으로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 이 점에서 아직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제2기에 들어서서 전면적으로 개정된 제2판(1905)에서는 제1장의 제목을 '역사연구의 내적 제 조건'이라고 바꾸는 동시에 여전히 역사학은 응용심리학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연과학과 역사학의 과제는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자연과학이 소여(所與)를 법칙에 의해 인식하는 데 대해서 역사과학의 과제는 1회적이며 개성적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다고 본다. 여기서는 명백히 신칸트 학파에의 접근을 볼 수 있다.

제2기의 <철학의 근본문제>는 신칸트 학파에 접근한 시기의 저작으로서, 제1장은 철학의 본질에 대해서 논하고, 제2장은 존재와 생성, 제3장은 주체(主體)와 객체(客體)에 대해 고찰하고, 제4장은 이념상의 요구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의 철학사상은 신칸트 학파와 동일하지는 않다. 신칸트 학파 이상으로 주관주의적이며, 외계의 객관적 실재성은 부정되는 경향에 있으며, 이런 점에서 베르그송에 접근하고 있다. 이 경향은 제3기의 생의 철학에 이르러 완성된다.

제3기의 주저 <생의 철학>은 '형이상학적인 4장'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생의 초월성'이라는 제목의 제1장은 생의 기본관념을 논하고, '이념의 전화(轉化)'라는 제목의 제2장은 생이 어떻게 해서 생과는 전혀 반대의 성질을 가진 경직된 문화에 전화되는가를 논하고, '죽음과 불사(不死)라는 제목의 제4장은 윤리의 본질을 논한다.

또 제2장부터 제4장까지는 처음 각각 잡지 <로고스>에 논문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즉 제2장은 <이념의 형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서 이 잡지 제6권(1916-17)에, 제3장은 <죽음의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서 제1권(1910-11)에, 제4장은 <개별적 법칙-윤리의 원리에 관한 한 시론(試論)>이라는 제목으로서 제4권(1913)에 발표되었다. 이 논문들은 이 책에 수록될 때, 제2장은 증보되고 다른 2장은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다.

이 책에서는 신칸트 주의를 넘어서서 생의 개념이 중핵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생은 세대를 넘어서 부단한 생성과 흐름 속에 있으나 그것은 한계가 있는 개체에만 나타나며, 일정한 문화형식에만 깃들인다. 이 점에서 생은 형식에만 깃들이지만 그러나 형식에는 깃들이지 못한다는 모순이 생기고, 자기의 한계를 끊임없이 넘어서서 형식을 깨뜨리고 씻어버리는 생의 자기초월이 주장된다. 여기서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생의 철학의 주관적인 상대주의가 생기고 이 상대주의는 회의론에 통한다. 또한 이러한 생의 문제성은 자아의 수준에서는 개인적 생의 무의미성이라는 근본문제가 된다. 여기에서 종교의 필연성이 생긴다. 그러나 지멜은 역사상의 제 종교가 이미 붕괴하였음을 인정하며, 진리와 오류의 피안에 서서 과학·예술 등 다른 세계와 견줄 수 있는 자율적인 독자적 세계를 종교를 위해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신 없는 종교이다.

윤리 영역에서는 유일하고 자유로운 인격의 개념이 기초가 되는데, 이러한 개념이 도덕을 상대주의적이며 무정부주의적인 혼돈으로 이끌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딜타이[편집]

Wilhelm Dilthey (1833-1911)

독일의 철학자.

헤센주(州)의 모스바하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목사였다. 신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는(1852-53) 쿠노피셔에게서 헤겔 철학을, 베를린 대학에서는(1853-1854) 프리드리히 아돌포트렌드렌부르크(1802-72)에게서 현실 내지 개별을 출발점으로 하는 철학의 방법 및 철학사를, 랑케에게서는 사학을, 또 카를 임마누엘 니츄(1789-1868)나 트베스텐에게서는 슐라이어마허적인 신학을 배웠다.

제1회 신학시험에 합격한 후(1856), 김나지움의 교원이 되었으나 다음해에 사직하고 철학 연구(특히 슐라이어마허 연구)에 전념하여 1864년 1월 <슐라이어마허의 윤리학 원리에 대해서>로써 박사학위를 얻고 곧 베를린 대학의 사강사가 되었다. 1866년 바젤 대학 교수가 되고 1868년 킬 대학으로 전임하고도 슐라이어마허 연구를 계속하여, 드디어 1870년에는 <슐라이어마허의 생애>를 발간했다.

이 책에 의해 명성이 높아졌으며 브로츨라프 대학 교수(1871)를 거쳐 1882년에 로체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그리스 철학사가 에두아르트 젤러(1814-1908) 등의 영향에 의해 역사적 의식을 더욱 깊게 하여 정신사(精神史) 연구를 시작하고 또 그 방법론의 반성에 바탕을 두어 정신과학론을 폈다(<정신 제 과학 서설>).

딜타이는 정신의 산 모습, 생의 내적 연관(聯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정신과학파(달타이파)를 통해서 20세기 사상계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세계관의 제 유형과 형이상학적 제 체계에 있어서의 그 형성[편집]

世界觀-諸類型-形而上學的諸體系-形成 (1911)딜타이의 주저 가운데 하나로서 제자인 프리시아이젠 켈러(1878-1923)가 편집한 <세계관·철학·종교>에 수록되어 공간되었으나 전집에서는 제8권 <세계관의 연구>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제8권에는 <역사적 의식과 세계관> 등의 유고도 포함되어 있다.

서론 ― 철학의 제 체계가 각기 자기의 보편타당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성립해 온 철학체계의 다양성이나 제 체계 사이의 항쟁의 사실과는 모순된다고 하고, 철학의 중핵은 세계해석이지만 세계연관을 파악하려고 하는 다양한 철학체계는 인간의 인식의 내적 연관을 구해야 하며 원래 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본론 ― 우선 철학체계가 성립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구명하고 있다. 즉 생경험(生經驗)이 세계관 형성의 기저적(基底的) 조건이며 각 개인의 개성·국민성·시대, 기타 특수 조건도 여기에 첨가되므로 세계관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 규칙성을 포함한 구조적 형상(構造的形象)이므로 비교법에 의해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된다. 가치있고 강력한 세계관은 특히 자유 세계에서 살고 있는 종교적, 예술적(특히 문학적), 형이상학적 천재에 의해 나타나며, 세계관의 유형으로서는 형이상학적 유형이 가장 영향이 크고 대표적이다. 이를 딜타이는 자연주의, 자유의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으로 정리한다. 본론은 그 후의 역사적 비교에 의한 유형 정리에 커다란 방향을 제공했다.

정신 제 과학에 있어서의 역사적 세계의 구조[편집]

精神諸科學-歷史的世界-構造 (1910)

딜타이의 책으로 <역사적 이성 비판의 기도>라는 부제가 붙었으며, 1910년 1월 프로이센 학사원의 총회에서 발표된 후에 이 학사원의 논문집에 수록·공간되었다.

딜타이 전집 제7권에 이 책의 보충론인 유고 2편(<정신 제과학의 기초 부여를 위한 제 연구> <정신 제 과학에 있어서의 역사적 세계의 구조 속편>)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제1부―자연과학과 대비하면서 정신과학의 특질을 논하고 있다. 정신과학의 대상은 원래 생체험(生體驗) 속에 주어진 것이 객관화됨으로써 성립하는데 이 객관성은 체험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정신과학에서는 대상의 객관성을 다시 체험에 결부시켜 파악(즉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제2부―학문 발달의 발자취를 더듬어 봄으로써 자기의 인식론 내지 학문론을 더욱 보강하고 있다.

제3부―정신 제 과학의 방법론적 기초 부여를 더욱 깊게 하면서, 인간적·역사적·사회적 실재로서의 정신적 세계(역사적 세계)의 구조를 명백히 하려고 노력한다.

우선 정신 제 과학에 있어서의 대상 파악을 직접적 의식 내지 해명으로부터 논증적 사고(論證的思考) 내지 판단에의 과정, 또한 생의 체험 내용이 외계에 표현된 것(대상)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정신과학의 연구는 생의 체험의 주체인 개인과의 관련에 의해 성립하는데 개개인의 생경험은 상호간에 관련되어 이해될 수 있다. 이에 의해서 개인들간에는 공통성이 있고 그 근저에는 역사적 세계가 성립되어 있다. 이러한 생의 객관화로서의 역사적 세계의 파악이 정신과학의 과제라고 한다.

슈프랑거[편집]

Eduard Spranger (1882-1963)

독일의 철학자·교육학자. 리트와(1880-1962)와 함께 딜타이파(정신과학파)의 대표자.

베를린 교외에 있는 상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고 주로 파울젠(1846-1908)·딜타이에게서 배웠으며, 1905년 <역사 과학의 기초>로 학위를 얻고, 1909년 베를린 대학 사강사(철학·교육학 담당)가 되었다.

당시의 대표작은 <빌헬름 폰 훔볼트와 인간성 이념(人間性理念)>(1909)이다. 1911년에 모이만(1862-1915)의 후임으로서 라이프치히 대학의 원외교수(교육학 담당)로 취임, 다음해 정교수로 승진됐다. <문화와 교육>(1919)은 이 시기에 거둔 성과이다.

1920년 아로이스 릴(1844-1924)의 후임으로서 베를린 대학 교수(철학·교육학 담당)로 옮겨가고 1922-27년까지 '교육·교수를 위한 중앙협회'의 교육학 연구부를 지도하였으며, 1925년에 잡지 <교육>을 창간, 프로이센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936-37년에는 교환교수로 일본에 왔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베를린 대학 학장이 되었으나 대학이 소련 점령지구에 들어가자 1946년 튀빙겐 대학으로 옮겼다.

신인문주의(新人文主義)를 중핵으로 하면서 문화철학·문화교육학·정신과학적 심리학 등 여러 영역에 기여하였다.

생의 제 형식[편집]

生-諸形式 (1914)

슈프랑거는 딜타이의 영향 밑에서 신인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정신사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 그 방법론의 검토를 통해서 정신과학의 본질을 문제로 삼게 되었고, 특히 주관과 객관, 문화적 현실과 윤리 등의 관계를 축으로 하여 라이프치히 시대에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당시 칸트 철학의 반(反)형이상학적 경향을 강조하고, 니체에게도 관심을 보이던 베를린 대학 교수 릴의 70회 탄생일을 기념하여 그에게 바쳐다. 그리스어로도 번역되었는데(1916), 릴의 후임으로서 베를린으로 옮겨가자(1920) 개정·확충되었고, 제2판(1921)에는 '정신과학적 심리학과 인격의 윤리학'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슈프랑거는 릴의 서거를 애도하여 그의 탄생 80년을 기념하여 제5판에서도 약간의 증보·개정을 했으며(1925), 얼마 되지 않아 이 판을 대본으로 영역판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그 후 본서는 개정되지 않고 1950년에 제8판을 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연과학적(요소) 심리학을 거부하고 주관을 객관과, 부분을 전체와 관련시키는 정신과학적(구조) 심리학의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정신을 주관적·객관적·규범적(規範的) 등 3단계로 나누고 정신구조를 개인으로 보아 단순한 내재적 연관으로부터 규범적으로 의미 있는 연관으로 고양함으로써 딜타이의 구조심리학을 넘어서서 객관적 및 규범적인 정신의 한 방향을 중심으로 정돈된 개인의 정신구조에 관한 이상적 유형(생의 형식)을 고찰하고 '인격의 윤리학'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그의 교육 사상의 문화윤리학적인 근저를 이루는 것이다.

슈펭글러[편집]

Oswald Spengler (1880-1936)

독일의 철학자.

하르츠의 광산촌에 태어났고 아버지는 광산기사였다. 뮌헨, 베를린, 할레 등 각 대학에서 수학·자연과학·철학·역사·미학 등을 배우고 졸업 후 1910년까지 수년간 교편을 잡았다. 그 후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뮌헨에서 고독한 독신생활을 보내며 사색과 저술에 몰두했다.

주저 <서양의 몰락>의 집필 동기는 1911년 여름 제2차 모로코 사건에 의한 세계대전의 위기가 절박해진 데 있었다고 하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어도 병약했기 때문에 병역이 면제되어 그 해에 뮌헨의 누옥(陋屋)에서 완성한 <서양의 몰락> 제1권은 1918년에야 겨우 출판되었다. 그 후 이 책이 대단한 반향을 얻어 슈펭글러의 생활조건은 개선되고 한두 군데 대학에서 교직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고고한 비전문적 학자로서의 생애를 관철했다.

1920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제 민주주의에도, 바이에른 소비에트 정권류의 사회주의에도 반대하고 프로이센 주의를 참된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프로이센 주의와 사회주의>를, 또한 1921년에는 <서양의 몰락> 제2권을 출판했으나 이미 이전처럼 세인의 주목을 끌지는 못하였다. 발흥되고 있던 나치스로부터 슈펭글러는 불건강한 페시미스트라는 평을 받았으나 그의 사상을 대전전의 생의 철학으로부터 파시즘으로 이행해 가는 과도기에 자리잡게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서양의 몰락[편집]

西洋-沒落 (1918-22)

슈펭글러의 이 책에는 '세계사의 형태학 소묘'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제1권은 '형태와 현실', 제2권은 '세계사적 전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제1권―세계사의 무대에 그 때까지 등장했던 8종류의 고도문화(高度文化)를 들고 있다. 즉 이집트 문화·인도 문화·중국 문화·고대 문화(그리스·로마 문화)·이슬람 문화·멕시코 문화·유럽 문화이다. 슈펭글러는 각 문화가 고유한 운명에 따라서 발생·성장·성숙·몰락이라는 주기를 경과하면서 세계사를 구성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문화는 다른 문화의 발전 내지 귀결이 아니라 각기 '단지 1회에 한하는' 것이며, 다른 것과의 비교를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 속에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문화는 창조 모체인 영혼의 자기표현이며 영혼이 그 창조력을 고갈시켰을 때 쇠퇴한다. '근대유럽'도 이 숙명을 면하지 못하며 이 문화도 문명화·대중화·도시화·기계화·외연화(外延化)라는 상황 속에서 몰락에 직면하고 있다.

제2권―세계사상의 각 문화가 걸어온 정치 발전의 제 단계의 구극적인 의미를 그 생성의 상(相)에 있어서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슈펭글러의 거시적인 시야를 가진 세계문화론은 아카데미즘의 세계에 아무런 전문 영역도 갖지 않은, 말하자면 아마추어 학자의 독창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서유럽과 그 문화에 대한 불안과 절망에 빠져들어갔던 패전국 독일을 비롯하여 각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상한 반향을 일으켜 20세기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의 몰락'이 일종의 유행어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화유형론(文化類型論)' 또는 '문화형태학(文化形態學)'이라는 슈펭글러의 구상은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 계승되어 갔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편집]

Jose Ortega y Gasset (1883-1955)니체, 딜타이 등의 영향을 받아 생의 철학의 입장에서 주체적(主體的)인 인간론을 전개한 현대 에스파냐의 문화철학자.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독일에 유학하고 귀국 후에는 모교 마드리드 대학의 철학과 사학의 교수가 되고(1915), 또 잡지 <에스파냐>(1915), <서구평론(西歐評論)>(1923)을 창간하는 등 현대 에스파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했다. 1936년의 에스파냐 내란 후 유럽이나 남미의 각국에 망명(亡命)하였다가 1942년에 귀국하였는데 마드리드에서 72세로 사망하였다.

오르테가는 남국의 키에르케고르라고 불려진 에스파냐의 우나무노(1864-1936)의 실존적 사상을 비판적으로 섭취하고 그 반(反)합리주의 입장을 딜타이에게서 배운 '생명적 이성' 내지 '역사적 이성'에 의해 극복함으로써 생과 이성의 올바른 종합을 시도했다. 이러한 견해는 처녀작 <돈키호테론>(1914)이나 <척추 없는 에스파냐>(1922)에서도 이미 나타나 있으나 이러한 사상을 명백히 내세운 것은 <현대의 과제>(1923), <예술의 비인간화>(1925), <위기의 본질>(1937) 등의 여러 저작에서였다.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오르테가는 진리를 생명의 희생물로 삼는 생명지상주의(生命至上主義)와 거꾸로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 생을 버리는 유리주의(唯理主義)의 양 극단을 동시에 배척하고 과학과 생의 올바른 종합을 생명적·역사적 이성에 의해 성취하려고 한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해서 현대문화의 문제성을 지적한 것이 <대중의 봉기>(1930)로서 오르테가는 이 문화론에 의해 오늘의 대중사회론(大衆社會論)의 개조라고도 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대중의 봉기[편집]

大衆-蜂起 (1930)

현대 에스파냐의 생철학자 오르테가의 문화철학상 주저로서 대중사회론의 개척자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에 의해 그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오르테가에 의하면 평균인 대중(平均人大衆)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지만, 원래 비속하고 나태한 대중은 조리있는 교섭에 의해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싫어해서 성급하게 폭력과 직접행동에 호소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단지 정치상의 위험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 가치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므로 본래의 지배적 권위의 소유자인 엘리트(選良)의 지배권을 회복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그들의 지도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