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청의 중국 지배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청의 중국 지배〔槪說〕[편집]

청조(淸朝)는 1644년 베이징을 점령하여 명조(明朝)와 바뀌었고,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3대(三代)의 잇단 외정(外征) 결과, 동북 지방에서 외몽골·신장(疆疆)·칭하이(靑海)·티베트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지배하고 그 주변의 지역을 속국으로 하여 중국 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옹정제(雍正帝) 시기에는 지정은제(地丁銀制)의 시행으로 명조말 이래의 세역(稅役) 개혁을 일단 해결하여 국가 지배의 기간(基幹)인 세역제도를 안정시켰고, 일련의 지방 재정 개혁으로 국력의 충실을 초래하여 건륭 시대에는 청조 최성기를 이루었다.

이 명·청 이행기(移行期)의 역사적 의의는 단지 왕조의 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사회 발전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획을 긋고 있다. 즉 명대 후반기 이후의 시비기술(施肥技術) 발달과 윤작품종(輪作品種)의 다양화, 특히 강남(江南)을 중심으로 하는 농촌 수공업의 광범한 상품 생산화 등으로 소농 경영의 상대적인 안정화를 기하여 소농 상호간의 지연적(遲延的) 결합과 공동체적 여러 관계의 강화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송대(宋代) 이래의 대토지 소유 양식까지도 변화시켜 지주층은 지방정치에 실질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지역에 있어서의 정치적 지배를 실현하고, 이것을 발판으로 하여 자주성과 지연적 결합을 강화하여 온 농민에의 지배를 유지하려 하였다. 명조(明朝)말부터 관료 혹은 예비군(豫備軍)으로서의 거인(擧人)과 생원층(生員層)은 향신(鄕紳)이라 불려 사회의 지배 신분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의 의향을 무시하고서는 지방정치가 원활하게 행해질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은 이상과 같은 사태의 출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청조(淸朝)의 중국 지배도 이러한 여러 조건 위에 세워져 있다. 지정은제(地丁銀制)에 의하여 세역부과 대상이 전토(田土)에 집중되어 명대(明代)의 이갑제(里甲制)에 대체하여 촌락이 세역 수취(收取)의 기초가 된 것은 소농 경영의 안정화와 향신층에 의한 대토지 소유의 진전에 대응한 것이며, 강희(康熙)

건륭(乾隆)의 중복된 외정(外征)으로, 고대로부터 중국으로서는 최대의 군사 위협이었던 북방 유목민족의 압력을 최종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시기에 있어서의 생산력 발전과 그것을 재정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던 세역 개혁의 결과이다. 또한 선행(先行)한 요(遼)·금(金)·원(元) 등의 이민족(異民族) 왕조와 달리 과거제도가 관료 등용의 기본축으로서 유지되어, 중앙관청에 만한병용제(滿漢倂用制)가 채택된 것은 지배 신분으로서의 향신층의 사회적 지위가 확립된 것을 반영하고 있으며, 방대한 칙선서(勅選書) 편찬에 따라서 일어난 문자(文字)의 옥(獄)은 이러한 향신층을 청조 지배의 사회적 지주로 만드는 당근과 채찍의 정책이었는데, 동시에 만인(滿人) 황제가 스스로 한문 문집을 저작하거나 한 것은 향신층을 담당자로 하는 전통적인 중국 문화에 대한 굴복마저도 표시하는 것이다.

총괄적으로 건륭기(乾隆期)까지의 청조 지배하의 중국사회는 중국사상에 있어 봉건사회가 가장 성숙한 시기이며, 대외 무역을 거의 광둥(廣東)의 한 항구에 한정한 자족폐쇄적(自足閉鎖的) 체제 아래 동아시아에 대제국을 형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옹정제(세종)[편집]

雍正帝(世宗) (1679

1735, 재위 1722

1735)청조 제5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의 뒤를 계승하여 청조 지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내정으로는 명말기부터 내려온 세역의 개혁을 완성한 지정은제의 전국적 시행과 지방재정에 큰 비중을 차지한 부가세(附加稅)인 화모(火耗)에 대한 중앙 관리의 강화, 지방관에 대한 양염은(養廉銀) 지급 등을 통하여 재정적인 기초를 굳히고 준가르 정벌 때에는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하여 개토귀류(改土歸流)의 정책에 의하여 서남부 지방의 소수민족에 대한 중앙 지배를 확대하였다. 외정(外政)으로서는 캬흐타 조약(條約)에 의하여 외몽골에 있어서 러시아와의 국경을 정하고 칭하이(靑海) 몽골의 반란을 진압하여 칭하이와 티베트 지배를 확보했으며, 준가르의 침공도 격파하였다.

지정은[편집]

地丁銀

옹정 시대를 중심으로 전국에 시행한 세역제도. 당(唐) 중기에 양세법(兩稅法)이 성립된 이래 국가의 세역(稅役) 수취는 여름과 가을의 양세역과 각종 요역(搖役)으로 되어 있었으나 명초에는 세(稅)와 역(役)이 다 함께 현물(現物) 혹은 노동력으로 징수되고 또한 세와 역의 각 내용이 다수 항목으로 나뉘어, 각 항목 부담의 경중(輕重)에 적합한 각 가호(家戶)의 자산과 성정수(成丁數)에 따라 규정된 호등(戶等)의 상하에 의하여 할당시켰다. 명대 중기 이후 세역은 은납화(銀納化)가 진전되자, 은으로 표시된 각 항목을 합산하여 총액을 일괄 할당하였던 일조편법(一條鞭法)이 보급되어, 전부(田賦)는 지은(地銀)에, 요역은(搖役銀)은 전토(田土)에 부과되어, 실질적으로 지은(地銀) 내에 해소되는 부분과 인정(人丁)에 부과되고 정은(丁銀)이 되는 부분으로 나뉘어져, 세역 부담은 지은·정은의 두 항목으로 정리되고, 또 이 과정에서 전부(田賦)뿐 아니라 요역(搖役)도 호등(戶等)에 의하지 않고 전토에 직접 부과하는 경향이 진전되었다. 지정은제(地丁銀制)는 이 정은을 지은의 부가세(附加稅)로 함으로써 세역 전토에 부과하는 일을 최종적으로 실현시킨 것이며, 이것에 의하여 국가 수취의 기초가 전토(田土)에 두어지게 되었다.

만한 병용의 관료제도[편집]

滿漢倂用-官僚制度

청조는 똑같은 이민족(異民族) 왕조이기는 하였으나 요·금·원 등과는 달리 중앙 여러 관청에 만인(滿人)과 한인을 병용한 점으로 뚜렷한 특색을 가진다. 가령 내각의 대학사는 만한인 각 두 사람, 육부(六部)의 각 상서(尙書)도 만한인 각 한 사람을 정원으로 하였다. 군기대신의 임용에 대하여도 거의 이 원칙이 지켜졌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과거제도와 관료제가 결합된 향신의 사회적 지위가 확립되어 있고, 중앙 통치조직 내에도 만인에 의한 권력 독점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칭하이·티베트 정복[편집]

靑海-征服

청조 초기의 칭하이에는 몽골의 한 부족이 이주해 있었는데 17세기 후반 갈단 한(汗) 아래에서 준가르가 강대해지자 뎬산남로(天山南路) 및 칭하이를 정복하고 티베트까지 예속시켰다. 강희제(康熙帝)는 1690년과 1696년 2회에 걸쳐 갈단을 격파하여 칭하이를 판도 속에 거두어 넣었으나, 준가르는 1717년에 또다시 티베트에 침입해 라사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청군이 추격하여 티베트까지 병합해버렸다. 이어서 1723년 옹정제는 칭하이 몽골의 반란을 진압하고 주장대신(駐藏大臣)을 라사에, 샤오닝변사대신(西寧辯事大臣)을 샤오닝(西寧)에 두어 티베트와 칭하이의 지배를 확보하였다.

건륭제(고종)[편집]

乾隆帝(高宗) (1711

1799, 재위 1736

1795)청조 제6대 황제. 옹정 시대에 확립한 국력을 기초로 대규모 외정(外征)을 해 내몽골·외몽골·신장·티베트를 포함하는 청조의 판도를 최종적으로 확정하였으며, 주변 제국을 속국으로 하여 청조 최성기를 이루었다. 준가르·쓰촨성(四川省) 서변(西邊)의 금천(金川)·구르카에 각2회, 회부(回部)·타이완·미얀마·안남(安南)에 각 1회씩 출병하여 예속시킨 공을 자부, 『어제십전기(御製十全記)』를 제작하고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칭하였다. 가끔 국내를 순행(巡幸)하고 전부(田賦)의 전면령(全免令)을 빈발하여 국고의 충실을 과시하였으나 그 오만한 정책이 치정 만년에 가서는 권신(權臣)의 전횡과 재정의 핍박을 초래하고, 더욱이 백련교(白蓮敎) 대란이 발생하여 청조 쇠퇴의 징조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 『명사(明史)』 『사고전서(四庫全書)』 등 많은 흠정서(欽定書)를 편찬시켰으나, 그 과정에서 문자(文字)의 옥(獄)을 통한 사상 통제를 강화하여 학문을 고증학(考證學)의 좁은 길로 틀어박은 일이 되었다.

준부[편집]

準部

청대 톈산북로(天山北路) 준가리아의 지역. 17세기에 서북 몽골의 오이라트가 쵸로스부(部)를 중심으로 유목국가(遊牧國家) 준가르를 건설하자 이 세기 후반 갈단 한 시기에는 하미 투르판에서부터 칭하이와 톈산남로(天山南路)의 회부(回部)를 정복하고 티베트까지 위압하였다. 강희제(康熙帝)는 1690년과 1696년 2회의 원정으로 갈단을 정복하였고, 옹정제(雍正帝)는 외몽골에의 준가르 침공을 저지하였으며, 이어서 건륭제(乾隆帝)는 1757년 본거지인 일리를 공략하여 완전히 이를 박멸하고, 일리장군(伊犁將軍)을 두어 직할 지배하였다.

회부[편집]

回部

청대 동투르키스탄 톈산남로(天山南路)의 지역 및 그곳에 있는 이슬람 교도 터키족(現 위구르족)의 명칭이다. 17세기에 준가르가 흥기(興起)하자 이 지역에 침공하여 명목상 지배자인 동(東)차가타이 한가(汗家)의 자손을 일리로 연행한 뒤에 이슬람 승려 귀족 호쟈의 정권을 그의 예속하에 두었다. 1755

1760년까지 건륭제는 준부와 회부의 2부를 정복하여 일리장군의 통괄하에 두었으나 토착 지주층의 베크를 관리로 임명하여 자치를 인정하고 동시에 한인(漢人)과 대립시켜서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세기가 되자 이슬람 교도의 반란이 속발하여 1877년 좌종당(左宗棠)이 야쿠브 베크의 반란을 평정하고 성제(省制)를 시행하여 신장성(新疆省)이라 하였다.

이번원[편집]

理藩院

청대 번부(藩部)의 통괄기관이다. 태종(太宗)은 내몽골을 평정했을 때에 몽골아문(蒙古衙門)을 설치한 것에 연원(淵源)하여 1638년 이번원이라 개칭하였다. 강희부터 건륭시대에 걸쳐 외몽골·칭하이·티베트·신장을 병합해 이들을 모두 번부로 이번원의 관할하에 두었다. 번부의 통치에는 중앙에서 직접 장군이나 대신이 파견되어 관제상 이번원과는 통속관계에 있지 않았으나 조공(朝貢)·봉작(封爵)·봉록(俸祿)·회맹(會盟)·역전(驛傳)·호시(互市)·재판 등의 번부 사무는 이번원이 담당하고 러시아와의 외교와 내륙 무역도 관할하였다.

청의 속국[편집]

淸-屬國

중국의 여러 왕조는 고대로부터 그 주변의 제국을 책봉(冊封)과 조공 관계에 의하여 속국으로 하고 독자적인 종주권(宗主權)을 설정해 왔으나 청대가 되자 강희

건륭 사이의 외정(外征) 결과, 명대로부터 인계받은 류큐(琉球)·안남에 더하여서 시암과 미얀마마저 속국으로 만들었다.

변발령[편집]

?髮令

변발은 청조가 피지배자인 한인에게 강제로 시행한 두발의 모양이다. 두발을 땋아 등 뒤로 늘어뜨린 것이다. 1644년 베이징(北京)을 함락시킨 청군은 이듬해 난징(南京)을 공략하여 화중(華中) 일대를 제압하자 청조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변발을 강요하였다. 이것은 "머리를 깎지 않는 자는 참수한다(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고 할 만큼 준열하게 시행하였으나 중국 민중의 저항도 격렬하여 강남(江南)의 여러 성시(城市)에서 반란이 계속되어 가정(嘉正)과 장인(江陰)처럼 전성(全城)의 시민이 도살당하는 것과 같은 큰 탄압으로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 변발 강제는 그 후 오랫동안 이민족(異民族) 지배에 대한 저항감을 배양하게 되었다.

문자의 옥과 금서[편집]

文字-獄-禁書

문자의 옥은 강희·옹정·건륭 시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필화사건(筆禍事件)이다. 청조는 이민족으로서 중국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특히 반청적(反淸的) 경향이 흐르고 있던 강남(江南) 향신층의 비판적 동향에 과민하여 사소한 이유로 필화사건을 일으켜 억압하였다. 그 시발은 1663년의 장정롱사건(莊廷?事件)인데 옹정 시대에는 청조를 이적(夷狄)이라 비판한 여유량(呂留良)·증정(曾靜)의 사건이 있고, 옹정제는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저작하여 청조 지배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건륭 시대에 들어서면 탄압은 더욱더 가혹해져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집도 그 목적의 일단은 내용의 검열에 있었다고 하며,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금서(禁書)로 전부 훼손된 것도 수천 부에 달하고 일부분을 뽑아내어 태워진 것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공행[편집]

公行

청대 광둥(廣東)의 유럽 무역 독점기관이다. 유럽인은 Co-hong이라 불렀다. 1685년 광둥(廣東)에 월해관 감독을 두면서 그 통제하에 대외 무역에 관계하는 상인으로 공행이 조직되었는데, 1757년 유럽 무역이 광둥의 한 항구로 한정되자 1760년에는 유럽 무역을 독점하는 공행이 설립되어 그로부터 상인단(商人團) 구성에는 변동이 있었으나 난징 조약이 폐지되기까지 유럽 무역의 유일한 창구가 되었다.

광둥[편집]

廣東

청대에 있어서 유럽 무역의 유일한 항구이다. 당·송 시대 이래로 남해 무역의 중심이 되어 있었으나 18세기부터 유럽 무역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1757년 광둥에만 한정되게 되었고, 월해관 감독 아래서 공행이 조직되어 유럽 무역을 독점하였다. 아편전쟁의 결과 5개 항구가 개항되자 그 후에는 그 지위를 상해(上海)에 빼앗겼다.

매카트니 사절단[편집]

-使節團

매카트니(George Macartney)는 영국의 외교관이며 식민지 관료였다. 1793년 중국으로 파견되어 건륭제와 회견하여 자유무역과 통상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당시 영국의 아시아 무역 독점기관인 동인도회사의 무역 업무는 중국에 집중되어 있었고, 또한 최대의 식민지인 인도 경영으로 보아도 중국과의 아편무역은 중요한 재원이 되었던 시기여서,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영국은 대화무역(對華貿易)의 자유로운 확대를 기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