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나폴레옹과 빈 체제/나폴레옹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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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몰락〔槪說〕[편집]

나폴레옹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여러 나라에서는 정치적 자유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봉건적 질곡에서 벗어난 이들 국가에서는 자유주의가 침투하고 머지않아 그것은 민족의식의 앙양을 초래했다. 나폴레옹 자신 민족주의적 에너지를 높이 평가, 이를 인정하고 이탈리아 여러 주의 통치에 있어서는 슬로바키아인과 크로아티아인에게 민족적 자유를 약간 부여하는 것으로서 인심을 얻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정복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철한 태도로 임했다. 그의 강철 같은 의지는 때때로 가혹할 만큼 정복지 주민들의 감정과 기대를 억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국경선은 그의 생각 하나로 자유로이 고쳐 그어졌고 괴뢰국가가 형성되었다. 정복지는 무단 전제주의에 의해 통치되었고, 반프랑스적 행위는 가차없이 탄압되었다. 이러한 지배는 결국 나폴레옹의 의지와는 반대로 뿌리깊은 민족주의적 감정에 부채질하여, 나폴레옹의 지배에 대한 강한 증오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그토록 강력했던 것은 혁명에 의하여 봉건제도에서 해방된 민중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타국에 비해 진보한 사회제도와 병역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점차로 민족의식에 눈뜨고 자기들의 조국에서 외국 세력을 몰아내려는 민중의 기운이 높아져 갔다. 이것은 얼마전 나폴레옹이 싸운 봉건 제후의 용병과는 다른 것이었다. 프랑스에 대한 여러 나라의 반감을 더욱 증대시킨 것은 대륙봉쇄령을 철저히 시행하기 위해 각국에 군사적 압력을 강화시킨 데 있다. 이로 인해서 나폴레옹은 스스로의 몰락을 재촉한 셈이었다.

반도전쟁[편집]

半島戰爭 Peninsular War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나폴레옹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으킨 전쟁. 1807년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대륙제패체제(大陸制覇體制)에 가입시켰고, 1808년에는 그의 형 조제프를 에스파냐 왕위에 즉위시켰다. 그러나 두 나라의 민족적인 결렬한 반감을 불러 일으켜 에스파냐의 게릴라는 프랑스 정규군을 혼란시켜, 전성기에 있던 나폴레옹의 군대를 교란하고, 해방전쟁의 발단을 열었으며, 이것은 곧 나폴레옹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1812년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 에스파냐의 연합군은 살라망카에서 승리를 거두어 마드리드를 점령한 다음, 프랑스인을 축출하였다.

프로이센의 개혁[편집]

-改革

틸지트의 굴욕적 조약을 강요당했던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대한 거액의 배상금과 프랑스 관리의 횡포에 시달림을 당하였다. 물론 프랑스에 의해 약간의 개혁과 봉건귀족 및 교회의 특권 폐지가 실시되긴 했으나 반불(反佛) 감정을 완화시키지 못했다. 프로이센의 지도층은 예나의 패전 후 자국의 후진성을 통감, 프랑스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력배양과 이를 위한 행정개혁 및 군제개혁을 꾀했다. 시타인은 예나의 패전 후에 내정개혁을 건의했고, 수락되지 않자 한때 재상 자리를 내놓았으나 재차 기용되어 농노해방과 영업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를 단행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중앙·지방의 행정조직에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외국인의 용병을 폐지하고 징병제를 채택하는 등 프로이센의 근대화에 진력했으나 나폴레옹의 탄압으로 프로이센에서 추방되었다. 한편 낭만주의 작가들은 독일이 지녔던 과거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국민들에게 자신(自信)과 애국심을 고취하였고,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으로 독일 민족 해방 투쟁에 대한 도덕적 근거를 설파했다. 시타인을 계승한 하르덴베르크는 개혁안을 충실히 실천에 옮겼다. 특히 농노 해방령의 철저화를 기하면서 도시의 자치권과 시민적 권리를 보장하고 조세제의 개혁을 성공시켜 실질적인 부국강병을 진척시켰다. 이렇게 해서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대항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 기회가 오기를 고대했다.

러시아 원정[편집]

-遠征

1807년 이래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가 점차 동유럽 쪽으로 진출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는 영국에 다량의 곡물을 수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륙봉쇄령에 의한 경제적 타격은 심각하였다. 1811년 알렉산드르 1세는 대륙봉쇄령을 더 이상 준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무력 제재를 가하기 위해 자기 지배하의 각국에 병력을 할당하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1812년 6월 러시아에 침입했다. 러시아군은 격돌을 피해 항상 후퇴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모스크바 전방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쌍방이 7만의 전사자를 낸 끝에 나폴레옹은 승리하여 9월 14일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러나 러시아 병사의 모습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16일 밤, 모스크바에 화재가 발생하여 4일간이나 계속 탄 끝에 전(全)시가는 재로 화했고, 곧이어 몰아닥친 무서운 한파 속에 숙영지도 없는 채 군량마저 부족해진 프랑스군은 동사자와 아사자를 무수히 냈다. 여기에 러시아군의 맹렬한 반격이 개시되어 프랑스군은 지리멸렬해져 패주했다. 러시아군의 추격은 파죽지세여서 나폴레옹은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간신히 빠져나왔다. 50만의 병사 가운데 러시아 국경을 넘은 것은 불과 2만 정도였다고 한다.

보로디노 싸움[편집]

Battle of Borodino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도중에 있었던 싸움.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침입한 이래, 러시아는 초토전술(焦土戰術)을 쓰면서 퇴각하며 기회를 엿보아 반격에 나섰다. 모스크바에서 150km 떨어진 보로디노에서 러시아 군은 최초의 반격을 시도하여 나폴레옹 군의 전사자 3만을 헤아리는 승리를 거두어 프랑스 군을 격퇴시켰다.

프로이센의 궐기[편집]

-蹶起

나폴레옹의 패전은 압박당하고 있던 여러 나라에 용기를 복돋워 주었다. 프로이센에서도 민족 해방의 기운이 높아졌으나 나약한 국왕은 나폴레옹에게 도전할 것을 주저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국민군을 동원, 나폴레옹과 싸울 단호한 결의를 보이자 국왕도 마침내 결심, 1813년 2월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라이프치히의 제국 해방전쟁[편집]

-諸國解放戰爭

유럽제국이 동맹하여 나폴레옹의 제패체제(制覇體制)를 타파한 전쟁. 러시아, 프로이센에 합세하여 스웨덴이 대불동맹(제6차)을 결성했고, 이어 오스트리아도 참가했다. 나폴레옹도 1812년 말 파리로 돌아와 급거 군대를 재편하여 대세의 만회를 시도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원정에서 실패하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국민의 해방을 선언하고 니이멘강을 건너자 독일의 여러 방국(邦國)이 이에 호응하였다. 나폴레옹 군은 뤼첸과 바우첸에서 동맹군을 격파하고, 메테르니히의 화평제안을 이용하여 시간을 벌어 40만의 병력을 모아 드레스덴 싸움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였으나, 라이프치히 싸움에서 패배하자 유럽의 각국은 잇달아 나폴레옹의 제패체제로부터 이탈하였다. 나폴레옹은 그래도 평화제안을 거부하였으나 1814년 대(對) 프랑스 동맹군은 동과 남에서 프랑스에 침입하여, 3월말 파리를 함락시켰다. 이에 제국(諸國)은 나폴레옹 체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퐁텐블로의 개인적 조약을 맺어 나폴레옹은 엘바섬의 통치자가 되었다.

왕정복고[편집]

王政復古

나폴레옹 1세의 제정이 붕괴된 후, 프랑스에 부르봉가(家)가 복위해서 왕정이 재흥된 일 및 그 시대. 1814년 4월 1일 임시정부가 성립되고, 의회는 신헌법을 가결하여 5월 3일 파리에 입성한 루이 18세는 이것을 승인하였다. 백일천하(百日天下)로 국왕은 망명하여 임시 중단되었다. 백일천하 이후 과격왕당(過激王黨)을 형성한 귀족 반동세력이 강대해졌으며, 1824년에 샤를 10세 즉위후 과격왕당은 오성(汚聖)처벌법, 망명귀족배상법(1825) 등을 내세웠으나, 그들은 1825년의 공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펴지 못하였다. 의회에는 자유주의자 및 좌익세력이 늘어나고, 그리스 독립전쟁의 원조와 알제리 점령 등으로 임기회복을 도모했으나 1930년 긴급칙령(緊急勅令)에 의한 선거입법을 행하는 등 노골적인 선거간섭으로 7월혁명을 자초, 자멸하였다. 혁명이 일어나 왕은 영국으로 망명하고, 7월 왕정으로 교체되었다.

백일천하[편집]

百日天下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의 파리 입성으로부터 제2왕정복고(王政復古)까지의 나폴레옹 정부. 1814년 3월 연합군은 그 후에도 저항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하여 파리에 입성했고 나폴레옹은 마침내 연합군에 무릎을 꿇었다. 연합국은 프랑스인의 국민감정이 상하지 않게 나폴레옹에게 관대히 대해 지중해 엘바섬으로 옮겨 통치하게 하고 이를 공국으로 인정했다. 프랑스에는 왕제가 부활되어 루이 16세의 아우가 즉위, 루이 18세라 칭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루이 18세가 인기가 없고 빈에 모인 열국의 이해관계가 대립되어 있는 것을 포착하여, 비밀리에 엘바섬을 탈출하여 도중에 병사들을 규합, 파리에 입성하여 루이 18세를 몰아내고 또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이 사태에 놀란 빈 회의의 열강들은 서둘러 타협하여 연합군을 조직하여 나폴레옹 타도에 나섰다. 나폴레옹은 각개(各個) 격파를 꾀하여 1815년 6월 리니에서 블뤼허를 먼저 격파하고, 워털루에서 웰링턴 군을 공격하였으나, 웰링턴을 도우려는 블뤼허 군대의 기습 때문에 대패, 다음날 파리에 돌아와 퇴위, 10월 17일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

워털루 전쟁[편집]

-戰爭

나폴레옹과 대(對) 프랑스 동맹군과의 싸움.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과 그 재기(再起)에 놀란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4개국은 빈 회의에서의 대립을 즉각 그만두고, 동맹군을 프랑스로 진격시켰다.나폴레옹은 13만 병력을 이끌고 벨기에를 침공, 먼저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1815년 6월 18일 브뤼셀 부근의 워털루(Waterloo)에서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군과 격돌했다. 전국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판가름이 나지 않았으나 블뤼허 군대의 측면 공격을 받아 프랑스군은 마침내 괴멸되고 말았다. 루이 18세는 재차 파리에 입성하고 나폴레옹은 남대서양의 고도인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