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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나폴레옹과 빈 체제/나폴레옹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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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제국〔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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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 임기 10년의 제1통령에 취임한 나폴레옹은 1802년 인민투표 형식을 빌려 종신 통령의 지위에 올랐다. 1804년에는 또다시 인민투표에 의해 황제 칭호를 얻음으로써 이에 프랑스의 제1공화제는 명실공히 종막을 고하고, 제1제정(帝政) 시대로 들어갔다. 1802년의 아미앵 화약으로 이루어진 잠깐 동안의 평화도 1803년에 깨어지고, 그 후 1814년까지 전유럽은 전란의 와중에 휩싸이고 말았다. 1805년에는 제3차 대(對)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주도자인 영국을 정복하려던 나폴레옹의 야망은 저지되었으나, 유럽 대륙의 제국은 모두가 나폴레옹의 위력에 굴복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 전제적 지배하에 온갖 고난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폴레옹의 침략은 이제 혁명기의 봉건적 지배자로부터의 해방전쟁과 같이, 여러 국민에게 혁명의 복음을 전한다는 대의명분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정복하의 여러 국민에게는 자유주의가 전파, 이 자유주의는 드디어 민족주의를 육성하고 프랑스의 지배를 전복시키려는 힘으로 변해갔다.

한편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내의 법제도·경제기구·행정조직의 재건에 노력하여, 장군인 동시에 정치가로서 재능을 발휘했다. 재건의 기본 방침은 혁명 정신이 고조되는 시기에 있어서의 민중의 제반 요구를 억압하는 한편, 봉건적 여러 특권의 부활을 거부하고,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보장하는 국가 체제를 확립하는 데 있었다. 또한 혁명기에 있어서의 반(反)교회적 태도를 지양, 가톨릭 교회에 대해 어느 정도 보호를 부여하는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보수적인 농민의 환심을 사는 한편 급진적인 사상을 견제했다. 또한 귀족제도를 부활하여 망명지에서 귀국한 구귀족에게 본래의 칭호를 인정하는 한편, 하층계급 출신자라 할지라도 자기 부하로서 공적이 있었던 장군이나 정부관리에게 귀족의 칭호를 주어 수많은 제정귀족(帝政貴族)을 창출하였다.

제정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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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政-開幕

수많은 혁혁한 군사적 승리에 의해 대중의 인기를 얻은 나폴레옹은 아미앵 화약 후인 1802년 8월, 인민투표에 의하여 종신 통령이 되었으나 야망에 불타올라, 1804년 5월 또다시 인민투표에 의해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 피우스 7세가 받쳐 든 황관(皇冠)을 스스로 집어들어 대관(戴冠)함으로써 교황보다도 위대한 자기의 권위를 과시했던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고대 로마의 지배자로 자처하고, 전유럽을 호령하는 대야망을 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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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政

구제도의 여러 기구는 혁명기에 이미 부분적으로 개혁이 단행되었으나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한 것은 금융 및 조세기구였다. 나폴레옹은 통령 시대인 1800년대에 프랑스 은행을 설립, 정부에의 대출과 조세 보관 업무를 수행케 했고, 1803년에는 은행권 발행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종래 지방 당국에 위촉되었던 조세 징수는 중앙집권화되었고, 이와 함께 지방장관·시장 등을 중앙정부에서 임명하여 행정기구의 집권화를 꾀했다.

나폴레옹 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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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典

구제도화에 있어서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법률이 존재하지 않고 봉건적 관습, 왕의 칙령, 교회법이 혼용되어 지방에 따라 서로 다른 법률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혁명은 이를 완전히 백지화시키고 말았다. 나폴레옹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이를 법제화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리하여 전후 84회에 걸친 신법전 편찬회의가 열린 끝에 1804년 민법전이 완성된 것을 비롯해서, 1808년에는 상법전이, 1811년에는 형법전 등이 차례로 성립되었다. 이들 법전은 재산권의 보장,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규정하여 부르주아적 사회질서를 유지할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다.

종교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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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敎協約 Concordat

1801년 나폴레옹은 농민을 비롯한 프랑스인 다수가 가톨릭교를 신봉하고 있음에 비추어, 국내질서 유지의 목적에서 반종교적 태도를 완화, 종교 행정에 관해 교황청에 협약을 맺었다. 이것은 국내에서의 가톨릭교의 자유를 공인하는 한편 사교 임명을 정부가 하고, 교황은 이를 정식 서임(敍任)한다고 하는 내용의 것이었다.

제정기의 경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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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政期-經濟發展

통령 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던 프랑스 공업은 제정시대에 접어들어 한층 더 발전상을 나타냈다. 방적 부문에서는 점차로 수공업 공장과 병행해서 기계제 공장이 출현했고, 직포 부문에서도 기계 도입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국내산업의 보호·육성을 적극적으로 도와 수차에 걸쳐 박람회를 개최, 공업 장려에 힘썼고, 모범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농업도 점차로 안정되어 새로운 작물의 재배가 적극 권장되었고, 화폐제도의 통일 및 상업 활동을 자극했다. 결국 나폴레옹의 유럽 제패는 일각에서 바야흐로 성장하고 있던 부르주아지의 새 시장 획득에 관한 기대를 충족시켰다.

제3차 대불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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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次對佛同盟

아미앵 조약 조항을 양자가 다 같이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1803년 5월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상륙 계획을 추진했고, 한편 정권의 복귀에 성공한 피트 수상은 이 강적에 대항하기 위해 1805년 러시아, 오스트리아 및 스웨덴 등 3개국 간에 제3차 대불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연합군이 아우스터리츠에서 나폴레옹군에게 패배함으로써 이 동맹은 허망하게 와해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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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爭

1803년 나폴레옹이 영국과의 전쟁을 재개하면서부터 1815년에 몰락할 때까지 전쟁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동안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3회, 러시아 및 프로이센과 2회의 전쟁을 치렀고, 에스파냐와도 장기전을 벌였는데, 이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이라 한다. 제3차 대불동맹이 결성된 1805년 영국 본토 상륙을 꾀했던 프랑스 해군이 트라팔가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격파당함으로써 나폴레옹의 계획은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동년 12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연합군을 아우스터리츠에서 격파하여 오스트리아 황제를 항복시켰다. 이듬해 10월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을 침공, 예나 회전에서 프로이센 군대에 결정적 타격을 주고, 베를린을 점령했다. 1807년 6월에는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을 프리들란트에서 격파하고, 틸지트 조약을 체결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에 대해 서쪽 국경을 엘베강으로 하고, 서쪽 지역을 베스트팔렌 왕국으로 정해 막내아우 제롬을 왕위에 앉혔다. 또한 프로이센이 폴란드 분할에 의해 얻은 영토를 할양케 하여 바르샤바 공국을 만들고 동맹자인 작센왕에게 주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에 굴복, 그의 동맹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한편 그와 협력해서 영국에 대항할 것을 약속하고, 나폴레옹의 허가를 얻어 투르크와 스웨덴을 쳐서 영토 확장을 꾀했다.

라인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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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聯邦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격파하여 프레스부르크 강화에서 가혹한 조건을 강요, 바이에른·바덴을 비롯한 많은 영토를 할양케 했다. 1806년 바이에른·바덴 등의 4왕국을 비롯하여 공(公)·후국(侯國)을 병합, 프랑스 보호하에 라인 연방을 결성시켜서 프란츠 2세로 하여금 신성 로마 황제의 지위를 포기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성 로마 제국은 명실공히 멸망하고 말았다.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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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陸封鎖令 (-勅令)

나폴레옹이 유럽대륙의 나라들과 영국의 통상을 막았던 체제. 프랑스의 최대 적은 영국으로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참패는 제아무리 나폴레옹이라 할지라도 또다시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엄두도 못내게 했다. 그러나 해상의 패권을 쥐고 경제력이 풍부한 영국은 프랑스에 있어서 더없이 위험한 강적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파멸시킬 것을 계획하고 유럽 시장에서 영국을 고립화시키기 위해 예나·아우어슈테트 싸움에서 프로이센군을 궤멸시킨 후, ‘영국제도(英國諸島)는 봉쇄상태에 있다.’(1조)로 시작되는 베를린 칙령을 포고하였다(1806.11.). 이에 대해 영국이 자유 나포령(自由拿捕令)을 발표하자, 1807년 밀라노 칙령(勅令)으로 베를린 칙령을 강화하였다.

영국에 대한 경제 봉쇄정책은 이미 자코뱅에 의해 채택된 바 있었는데, 이것이 영국 타도를 목표로 하는 나폴레옹에 의해서 전(全)유럽적인 규모로 확대됨으로써,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은 영국과의 통상·통신을 금지한다(2조). 영국인은 발견되는 대로 포로로 하며(3조), 그 재산은 압수한다(4조). 영본국 및 식민지산 상품(植民地産商品)은 몰수한다(5조). 등을 규정하고 있다. 봉쇄령과 프랑스 상품 제일주의는 나폴레옹 지배하에 있던 여러 나라에 고통을 줌으로써 러시아의 이반(離反)을 효시(嚆矢)로 대륙의 제국들이 이반하자,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여 그 자신의 몰락의 길을 열어놓게 되었다.

밀라노 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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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勅令 Dcret de Milan

나폴레옹 1세가 포고한 대륙봉쇄령. 영국은 베를린 칙령에 대항하여 영국 선박의 입항을 금지하는 항구를 전부 역(逆)봉쇄하고, 중립국의 선박이라 할지라도 그 출입을 방해하는 일련의 법령(자유 나포령)을 강력히 시행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책으로서, 나폴레옹은 영국에 기항한 일체의 선박을 영국 선박으로 간주하여 전부 몰수할 것을 선언하고, 앞서의 봉쇄령을 확대 강화했다.

나폴레옹 제정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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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政-全盛期

나폴레옹 제정의 전성기는 1808년에 이룩되었다. 당시 제국의 판도는 북쪽은 북해, 남쪽은 이탈리아의 포강(江), 동쪽은 라인강, 서쪽은 피레네 산맥에 달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왕도 겸하면서 라인 연방의 보호자였으며, 형인 조제프를 나폴리 왕에서 에스파냐 왕으로 갈아 앉혔다. 1809년에는 재차 오스트리아를 격파하여 아드리아해(海)에 면한 일리리아 지방을 할양받았고, 이듬해에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를 황후로 삼아 보나파르트가(家)의 혈통을 고귀하게 만들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