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나폴레옹과 빈 체제/19세기 전반의 세계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19세기 전반의 세계〔槪說〕

[편집]

이 시기는 18세기의 4/4반기에 있었던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시작하여 1848년 2월혁명에 이르기까지 절대주의의 붕괴를 통하여 수립된 시민사회의 발전기에 해당한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은 둘 다 계몽사상이 낳은 시민혁명이다.

계몽사상에 인도된 시민혁명은 절대주의의 봉건적 지배와 예속이라는 형태의 경제외적 수취체제를 타파하여 사유(私有)의 절대성 원칙에 의하여 상품의 소유자가 서로 자유롭고 평등한 입장에서 상품을 교환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확립한 동시에 귀족과 평민이라는 불합리한 신분제적 사회체제를 무너뜨리고 법 앞에서의 만민 평등과 개인 상호간의 자유 원칙이 지배하는 시민사회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시민사회에서 개인이 궁극적 책임을 지는 개인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각 개인이 국민의 일원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 정치질서가 이룩되었다. 요컨대 시민사회의 이념은 자유주의의 구현이었다. 시민혁명이 실현한 또 하나의 이념은 국민주의였다. 한 나라의 중앙집권제는 절대군주의 손으로 기초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신분제와 봉건제가 지배한 절대주의 사회에서는 개인과 개인과의 자유로운 교섭을 통한 국민의식이란 발현될 수 없었던 것인데, 이제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 실현된 시민사회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성취될 수 있었다. 근대 국민국가의 형태로 나타난 국민주의는 자유주의와 함께 시민사회의 2대 특성이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종말을 고하였을 때 혁명의 재발을 막으려는 비엔나의 반동체제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탄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혁명과 나폴레옹에 의하여 전 유럽에 이미 뿌려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혁명사상은 반동체제의 탄압하에서도 좀처럼 죽지 않고 꾸준히 자라고 있었다. 1820년 전후에는 신대륙의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낡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달성하고 있었으며, 동남 유럽의 그리스도 오스만 제국의 오랜 속박에서 해방되는 독립운동이 성공을 거두었다. 더구나 1830년의 7월혁명과 그 영향에 따른 벨기에의 독립은 비엔나 반동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이었다. 이 반동시대의 사상적 경향을 대표한 것은 낭만주의이다. 프랑스 혁명을 인도한 계몽사상과 합리주의는 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의 혁명과 전쟁에 시달린 민중은 보편적·객관적 합리성을 주장하는 합리주의에서 고개를 돌리고 주관과 정서와 시를 동경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성이나 법칙보다 감정을, 이지적 근대 정신보다 종교적 중세문화를, 도시보다 전원을, 개인보다 민족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이 무정형(無定型)의 낭만주의는 반동시대 시민계급의 부동성(浮動性)을 반영한 사조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래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산업혁명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이 물러남과 더불어 대륙 여러 나라에도 힘차게 발전하여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산업혁명은 노동조건의 변화와 광범한 노동자 계급을 형성하여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노자(勞資) 대립의 해결을 요청하는 노동운동을 일으켰다. 영국의 헌장운동(憲章運動, Chartist Movement)이 절정에 달했던 것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것도 2월혁명이 발발한 1848년이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산업화에 따르는 현실문제에 직면하게 되면서 낭만주의는 지도성을 잃고 차츰 대두하는 현실주의에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주의는 아직 본격적인 힘을 발휘할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현실주의가 시대적 사조가 된 것은 과학이 생산기술에 직접 결합하는 19세기 후반에서이다. 19세기 중엽에 있어서는 과학이 아직 생산 기술에 직결되어 있지 않았고, 과학은 과학대로 독자적 영역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과학사상도 아직 운동이나 진화의 개념이 들어와 있지 않고 18세기적인 법칙적 과학사상에 머물러 있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것은 1859년이었다.

과학과 생산기술의 결합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량생산도 가능하지 않았고, 따라서 기업활동이 제국주의적 충격을 받기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유럽 이외의 아시아·아프리카에서는 전통적·전근대적 사회질서에 머물러 있었다. 프랑스가 1830년에 북아프리카의 알제리를 점령하고, 영국이 중국에서 아편전쟁을 일으켰으나, 이러한 사건들은 제국주의적 성격의 것이라기보다 아직도 중상주의적 성격의 것이었다. 유럽에서 가까운 아프리카의 검은 대륙도 역사와 문화의 전통이 장구한 지중해 남안(南岸)의 회교 지역을 제외하고는 서구의 침략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원시 대륙으로 방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