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나폴레옹과 빈 체제/사회주의 사상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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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사상의 형성〔槪說〕[편집]

산업혁명 이전부터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해악이나 모순을 비판하고, 이상향(理想鄕)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적 사상이 대두하고 있었다. 모어나 캄파넬라의 사상 가운데에는 벌써 이러한 유토피아 사상이 나타나 있었다. 이 사상은 산업혁명의 진행과 함께 더욱 증대하는 사회적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실현시키려는 바뵈프나 부오나로티의 평등주의로 발전했다. 이 사상은 1824년부터 1848년까지의 사회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고, 브랑키의 공산주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사유재산 제도를 변혁하는 요구이자, 1848년의 프랑스·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산업혁명의 진전을 본 영국에서는 로버트 오언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낳게 했다. 이 사상에서도 계급 의식은 불충분하고, 다만 이상 사회의 모델 추구가 중심 과제였다. 프랑스에 있어서 이 시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의 특징은, 독일 소(小)생산자의 자유·평등 실현이 중심이었다. 이들의 사상은 18세기의 계몽주의 및 합리주의에서 도출된 사회 개혁 사상으로, 비현실적·공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심각해짐에 따라, 이 사회의 메커니즘과 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모순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투쟁에 의해 사회주의로 전환시킬 필요성을 명확히 체계화한 것이 마르크스주의라고 하겠다.

공상적 사회주의[편집]

空想的社會主義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 사상을 두고 공상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그 사상은 토머스 모어의 저서 『유토피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해악에는 민감하여 이를 저지할 열의가 강하나 관념적인 동시에 영원한 정의나 신의 섭리에서 구하려 하기 때문에 당장 현실에서 유리되는 결과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와 계급투쟁의 전망을 지니지 않았다. 바뵈프(Franois Emile Babeuf, 1760

1797)는 19세기 말 봉건영주의 부정에 통분하여 빈농층의 해방을 위해 토지의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생산물의 국가 관리에 의한 공산주의를 주창했다. 생시몽(Saint Simon, 1760

1825)은 불로 소득의 계급을 배제하고, 과학과 산업이 지배하는 사회를 종교적으로 통일시킴으로써 이상사회를 실현시킬 것을 구상했다. 또한 푸리에(Franois Marie Fourier, 1772

1837)는 프랑스 혁명 후의 사회에 통렬한 야유를 퍼붓고, 팔랑주를 이상 사회의 단위로 해서 생산을 합리화하고, 소비를 절약하는 전형적인 소생산자 사회를 실현시킴으로써 모든 사회 모순이 해결된다고 생각하였다. 영국의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

1858)은 인간의 행복은 성격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판단, 뉴라나크의 공장에서 이를 실험하고, 인도주의에 의한 노동자 구제에 힘썼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에서의 뉴하머니는 완전히 실패했다. 이와 같은 계몽주의나 합리주의 사상에 의한 공상적인 사회개혁은 현실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학적 사회주의[편집]

科學的社會主義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의 발전을 모순의 발전으로서 과학으로 분석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내부적 모순에 의한 붕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에 관한 방향을 제시했다. 공상적 사회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할 가능성을 프롤레타리아트 자신 속에서 계급 투쟁의 필요성만으로 보았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편집]

Karl Heinrich Marx (1818

1883)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독일의 트리에르에서 태어나 헤겔 철학의 변증법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의 영향을 받아서 유물변증법을 확립했다. 『라인 신문』의 주필이 되어 정부를 공격하고 1843년 파리로 망명, 엥겔스와 친교를 맺었다. 1847년 『철학의 빈곤』을 발간, 계급투쟁의 이론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을 밝혔다. 1848년 2월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발표, 3월혁명 후의 독일에서 혁명운동을 전개하여 추방령을 받고 런던으로 망명했다. 이 곳에서 가장 의욕적으로 경제학 연구를 추진, 『경제학 비판』·『자본론』에서 그 성과를 발표했고, 또한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 조직의 해산 후에도 국제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독일 사회민주당의 태도를 비판하여 『고타 강령 비판』을 저술, 런던에서 사망했다.

엥겔스[편집]

Friedrich Engels (1820

1895)

독일의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스주의의 창시자. 라인 지방의 직물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3년 맨체스터에 있는 부친의 공장에서 많은 노동자들과 사귀어 공산주의자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1845년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를 저술하여 공상적 사회주의자를 비판했다. 1844년 파리에서 마르크스와 평생의 우정을 맺었으며, 1848년 『공산당 선언』을 발표, 혁명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고 맨체스터로 돌아가 『독일농민전쟁』을 썼다. 엥겔스는 경제적으로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적극 도왔다. 1883년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를 저술하여 과학적 사회주의의 보급에 힘썼다. 마르크스가 죽은 후 『자본론』을 정리하여 출판하고, 제2인터내셔널을 지도하면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저술, 마르크스주의의 완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