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나폴레옹과 빈 체제/영국·러시아의 이란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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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러시아의 이란 진출〔槪說〕[편집]

19세기의 이란은 유럽 열강의 아시아 진출을 둘러싼 싸움 속에 휩쓸려, 카자르 왕조는 오직 쇠퇴일로를 걸었다. 영국은 인도의 경영을 위하여 일찍부터 이란 접근을 꾀하였지만 유럽에서 영국과 대립하고 있던 프랑스가 1807년 이란과 외교관계를 맺어 군사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므로, 새로이 교섭을 진행시켜 1814년 이란과의 사이에 조약을 성립시켰다.

이즈음 이란은 그루지야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대립, 양국은 1804

1812년과 1826

1827년 교전(交戰)하였다. 그러나 두 번 모두 이란이 패퇴하여 1828년에는 굴욕적인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조약은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고 통상상(通商上)의 규정을 정한 외에 러시아에 대해 치외법권을 인정한 것으로서, 치외법권은 그 후 1세기에 걸쳐 이란을 괴롭혔다.

러시아와 싸워 패한 이란은 러시아의 지지를 받아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여 세력 회복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러시아의 세력이 신장하여 인도가 위협받을 것을 염려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완충지대(緩衝地帶)로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이란과 싸워 이를 격파하고 1857년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을 승인하게 하였다.

투르크만차이 조약과 1830년 영국과의 직접 무역 재개에 의해 영국과 러시아 상품의 수입이 증대하자 그 영향을 받아 수공업자나 농민 가운데 몰락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마침내 카자르 왕조의 정치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고조된 결과 1849

1852년 바브 교도(敎徒)의 반란을 야기시켰다. 이 반란이 진압된 후 이란의 중산 계급, 특히 상인층은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카자르 왕조 전제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기에 이르렀다.

바브교[편집]

-敎

이슬람교의 개혁운동으로 19세기 중엽 이란에서 일어났다. 창시자는 시라즈 출신의 미르자 알리 모하메트(1820

1850)인데 1844년 스스로 ‘바브(Bh:‘門’의 뜻)’로서 새로운 시대의 확립자임을 선언하였다. 그의 신자는 급속히 증가하였으나 승려계급과 정부는 이 운동을 탄압하고, 바브를 체포하여 50년형에 처하였다. 바브교는 반란 실패 후, 바하우라의 지도하에 평화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특색을 갖는 새로운 세계 종교로서 재출발하여 현재는 바하이교(敎)라 불리고 있다.

투르크만차이 조약[편집]

-條約 Treaty of Turkmanchai

이란과 러시아간에 체결된 강화 조약. 이란은 러시아와의 싸움에 패하여 1813년 굴리스탄 조약을 맺었는데, 그 뒤 국경지역의 귀속을 둘러싸고 다시 러시아와 싸워 패한 다음 이 조약(1828)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이란은 러시아에 광대한 카프카스의 영토를 할양(割讓)하고, 약 3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또한 러시아에 대해서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이 조약은 그 후 이란과 유럽 제국 사이에 조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그 기준이 되었으며, 열국이 이란을 침략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 치외법권은 1928년 폐지될 때까지 내내 이란을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