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나폴레옹과 빈 체제/자유주의 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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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운동의 전개〔槪說〕[편집]

신성동맹은 자유주의적·민족주의적 혁명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국제적인 보수정치 체제였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이래의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급진 사상 및 회의주의에 대항하고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를 핵으로 삼아 조직적 사상 탄압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신성동맹에 가맹은 하고 있지 않았으나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각국의 가톨릭 교회는 자유주의적 사상에서 민중을 분리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얼른 보기에 완벽하리만큼 조직화된 보수 체제도 역사의 힘찬 흐름을 역류시킬 수는 없었다. 가령 부르봉 왕가가 부활되어서 보수적 귀족에 의한 체제가 부활된 듯이 보였던 프랑스에 있어서조차 부르주아지는 이미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였으며, 부르주아적 발전은 힘차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는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820년대 영국은 산업혁명의 완성기에 접어들어 산업 각 분야에 자본주의가 침투되고 그 공업화에 의한 경제적 영향력은 대륙 여러 나라에 미치고 있었다. 프랑스도 영국의 기계 수출 해금(解禁)과 함께 본격적인 산업혁명기에 들어갔고 후진 지대였던 독일 제국(諸國)에서도 산업 발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프로이센에서는 시타인·하르덴베르크가 시행한 개혁의 성과가 점차로 나타나 농업에서의 자본주의적 여러 관계의 성장이 엿보였다. 이와 같은 발전은 정도의 차는 있으나 다른 후진국에서도 나타났다.

자본주의적 발전은 도시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노동자를 형성했으나 이것은 전제 및 보수적인 체제하의 부르주아지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켰다. 혁명 운동에 대한 보수적 권력의 탄압이 강화되어 혁명운동은 지하로 잠입, 비밀조직으로서 이에 대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혁명운동은 점차로 광범한 민중의 지지를 얻어 마침내 보수체제를 각지에서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부르셴샤프트(학생조합운동)[편집]

學生組合運動 Burschenshaft해방 전쟁 후 독일의 대학생이 결성한 단체. 처음엔 출신지별 단체(出身地別團體)를 대신하는 것으로 조직되어 정치적 의도는 없었으나, 빈 체제하에서 점차 반동정치와 대결하게 되어 ‘자유·명예·조국’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자유 통일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1817년 10월 18일 바르트부르크 숲에서 루터의 종교개혁 300년제(年祭)와 라이프치히 전승기념(戰勝紀念)을 겸한 제전(祭典)을 개최하고, 전독일 부르셴샤프트를 창설하여 반동에 대한 투쟁에 기세를 올렸다. 그 후 극좌파(極左派)인 잔트가 반동적이며 통일의 적(敵)으로 간주된 코체부에를 암살하였다. 이에 메테르니히의 주창에 의한 카를스바트 결의로서 부르셴샤프트는 금지되고, 자유통일운동까지 탄압되었다. 금지된 후 비밀결사적인 청년동맹 등의 이름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나타내게 되고, 1840년에는 현실 정치적인 방향으로 진전하였으나, 1935년 나치스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었다.

바르트부르크 사건[편집]

-事件

부르셴샤프트의 학생들이 바르트부르크 숲에 집합하여 기세를 올린 사건. 그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고, 또 라이프치히의 전승기념일을 겸한 집회에서 루터가 교황의 파문서를 불에 태운 고사(古史)를 본받아, 반동적 서적을 불에 던지는 등 축전집회(祝典集會)가 정치적 시위운동으로 변모했다. 이 운동으로 ‘전독일 부르셴샤프트’가 성립되었지만, 자유주의 운동은 탄압을 받았다. 또 1848년의 3월혁명 때에도 이곳에서 학생집회가 열려 국가통일과 교학(敎學)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에스파냐의 혁명[편집]

-革命

나폴레옹 패퇴 후 부르봉가의 페르디난트 7세가 복위했다. 나폴레옹 지배하에 궐기했던 국민들은 1812년에는 민주적 헌법을 제정하여 놓았으나, 복위한 국왕은 처음에는 승인, 나중에는 이를 거부하고, 신성동맹의 일원으로 자유주의 탄압에 광분하였다. 1820년 미국 식민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소집했으나 왕의 전제에 반대하는 병사들이 반기를 들어 마침내 왕으로 하여금 1812년의 헌법을 재차 승인하게 했다. 같은 해 포르투갈에도 반란이 일어나 에스파냐의 헌법을 모델로 한 신헌법이 제정되었다.

카르보나리(탄소당)의 반란[편집]

-(炭燒黨)-叛亂

나폴리 왕국이 나폴레옹 지배하에 있었을 때 프랑스군에 저항하는 조직으로서 카르보나리(Carbonari)당이 결성되었는데 나폴레옹 몰락 후에도 이탈리아의 민족적 통일을 추구하는 급진적 비밀 조직으로서 존속했다. 그 세력은 피에몬테·토스카나를 비롯한 이탈리아 각지와 프랑스에까지도 확대되었다. 이 비밀 조직에 참가했던 것은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한 급진적 귀족과 지식 계급의 사람들이며, 후에 청년 이탈리아당을 형성하게 된다.

나폴리와 피에몬테의 혁명[편집]

-革命

1820년 에스파냐 혁명의 성공을 계기로 나폴리(Naples) 왕국 내의 카르보나리가 봉기, 국왕을 강박하여 헌법을 제정케 했다. 그러나 라이바하 회의의 결정에 따라서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탄압하고 헌법을 폐기해 버렸다. 그 직후에 카르보나리는 피에몬테에서 반란을 일으켜 헌법을 제정했으나 사르데냐 왕의 요청을 받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재빨리 탄압되어 절대주의가 부활하게 되었다.

데카브리스트(12월당)의 반란[편집]

-(十二月黨)-叛亂

데카브리스트는 1825년 12월 러시아에서 농노제(農奴制) 폐지를 목표로 봉기한 일파로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서유럽의 자유사상(自由思想)에 접하게 된 귀족출신의 청년장교(靑年將校)들이 주류(主流)가 되었다. 그들은 해방전쟁에 참가하여 서유럽의 실정에 비해 러시아의 격심한 후진성을 깨달아 귀국 후 ‘구제동맹’을 결성하고 농노제 및 전제주의의 폐지와 헌법 제정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이 조직은 비밀결사적 성격을 버리고 혁명 사상의 선전을 목표로 하는 ‘복지동맹’으로 재조직되었다. 그러나 1821년 군사 행동에 의한 혁명 달성을 노린 급진파의 비밀결사 데카브리스트(Dekabrist)로 발전하여 남부 및 북부 결사가 조직되었다. 이리하여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의 즉위 선서일(宣誓日)에 무장 봉기했으나 실패로 끝나 지도자인 페스테리·바스토제프·무라비요프·아포스토르 등은 사형, 그 밖의 많은 당원들은 시베리아 유형을 당했다.

피털루 사건[편집]

-事件 Peterloo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에는 경제 불황이 밀어닥쳐 실업자가 속출하였다. 지주는 곡물법에 의해 곡물 가격의 인상을 꾀해 노동자·부르주아지의 반감을 부채질했다. 전시중 잠잠했던 급진적 정치운동은 헌트나 코베트의 지도로 고조되었고, 공업지대에서는 급진적 노동운동도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819년 8월 민주주의적 개혁과 곡물법의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집회가 맨체스터의 성 피터(St. Peter) 광장에서 개최되자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탄압, 무저항의 민중 11명을 살해하고 다수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폭거에 대한 항의 집회가 각지에서 개최되었으나, 의회는 집회의 권리를 박탈하고 출판의 제한을 강화했다. 1820년 2월 보수적인 각료를 암살하려는 카토가(街)의 음모가 경찰 당국에 적발되어 지도자는 처형당했다.

라틴 아메리카 제국의 독립[편집]

-諸國-獨立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는 15세기 말 이래로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의 식민지였고, 18세기 말 이후는 무역을 독점하려 하는 본국 정부에 대한 반항이 움트고 있었다. 1808년에 부르봉 왕조가 붕괴된 이후 식민지에서의 독립 기운은 고조되었다. 1810년 멕시코에 혁명운동이 일어나 1814년에는 신헌법을 제정했으나 본국 군대의 탄압으로 와해되었다.

베네수엘라에서도 1811년과 1813년 2회에 걸쳐 공화국 선언이 있었으나 붕괴되어 지도자 볼리바르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더구나 1814년의 부르봉가(家) 복귀에 의하여 절대주의의 강화는 식민지에도 파급되어 1815년까지에는 대부분의 에스파냐령에서 식민지 지배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의 물결은 또다시 고조되었다. 1817년 볼리바르는 동지를 이끌고 베네수엘라에 상륙, 국내의 게릴라와 합류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볼리바르는 카라카스의 귀족 출신으로 훌륭한 장군이자 정치가였는데 본국의 식민지 지배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해방된 지역에 자유주의적 정책을 실시하고 많은 원주민의 협력을 얻어 1819년 마침내 콜롬비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또한 1816년에 라플레타 연합주(후의 아르헨티나)의 창건이 선포되었고, 이듬해 호세 산 마르틴, 베르나르도 오히긴스의 협력으로 칠레가 독립했다. 마르틴은 1821년에 페루의 일부를 해방시켜 독립했고, 볼리바르는 1824년 상부 페루지방을 해방시켜 그의 이름을 따서 볼리비아 공화국이라 했다. 멕시코에서는 1820년에 에스파냐 본국이 혁명에 의해 자유주의적 헌법이 부활되자 보수적인 이투르비데가 이듬해 반란을 일으켜 본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그는 황제 아우구스틴 1세라 칭했으나, 1823년 그 독재정권은 무너졌다. 이투르비데의 지배하에 있었던 중앙 아메리카도 주권을 되찾아 중앙 아메리카 연합주를 형성했다.

먼로 선언[편집]

-宣言 Monroe Doctrine

라틴 아메리카 제국의 독립은 유럽의 보수체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822년의 베로나 회의는 식민지의 반란 진압을 위해 군대를 파견할 것을 제의했으나 영국과 미국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해 관계가 깊은 미국은 특히 신대륙에 대한 유럽 제국의 간섭을 꺼려, 당시의 대통령 먼로는 1823년 12월 의회에 교서를 보내어 미국의 외교정책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그 기본점은, 남북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 제국의 식민지가 아니라는 것, 미국이 유럽 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이상 유럽 제국도 아메리카 양대륙의 내정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캐닝 외교[편집]

-外交

1822년 보수적 정치가 캐슬레이가 죽고 자유주의적 내각이 성립되었다. 외상 캐닝(Canning)은 베로나 회의에서 에스파냐에 대한 간섭을 거부하고, 4국 동맹에서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한편, 먼로에 협조해서 유럽 제국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간섭을 부인했다. 신대륙 제국의 자유는 영국의 무역상 유리한 점이었다. 그는 그리스의 독립에도 원조를 제공했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방침을 취하였다.

그리스의 독립[편집]

-獨立

4세기에 걸쳐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 있었던 그리스에서는 18세기 말 이래 그리스 민중의 해방투쟁이 집요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1821년 비밀결사 및 재외 그리스인의 지도를 받는 반(反)투르크의 민중 봉기가 일어나 고투 끝에 동년 3월말 그리스가 독립을 선언하고 자유주의적 헌법을 제정했다. 1822년이 되자,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에 대한 대규모 반격을 개시, 그리스의 독립을 위협했다. 유럽의 진보적인 사람들은 그리스의 독립전쟁에 동정하여, 각지에서 그리스 지지자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는 나머지 의용병으로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유럽의 여론을 그리스 지지 쪽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메테르니히는 일체의 반란을 혐오하여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도와 그리스 독립운동을 탄압하려 했다. 그러나 유럽 여론은 그리스에 동정적이었고, 영국은 그리스를 강력히 지지했다. 니콜라이 1세의 치세로 바뀐 러시아도 종전의 입장을 버리고, 신앙을 같이하는 입장과 오스만 제국을 후퇴시켜 남하를 실현하려는 입장에서, 그리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프랑스도 이에 동조하여 영국·프랑스·러사이의 연합 함대는 1827년 투르크 함대를 격멸, 그리스를 구했다. 그리스는 1830년 완전한 독립을 획득했는데 이것은 신성동맹의 약체화를 뜻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