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나폴레옹과 빈 체제/빈 체제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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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체제의 붕괴〔槪說〕[편집]

영국에서 산업자본이 확립되었을 무렵, 유럽 대륙에서는 여전히 빈 체제가 확고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점차 동요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여러 나라에 있어서의 절대주의에 대한 투쟁은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함께 강화해갔다. 신성동맹은 점차 중요한 연결점을 절단당하고 그 기능이 약화돼 가는 반면, 자유주의적·민족주의적 혁명운동은 더욱 힘차게 표면화되어 갔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1830년대에 산업 발전을 이루어 공장제 공업이 각지에 출현하고 알사스 로렌·파리·르앵·리용 등지는 주요 공업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은행·금융업의 발전도 뒤따랐다.

그러나 소규모 경영은 결코 없어지지 않은 채 오히려 농공업에 있어 중산적인 생산자가 증대되는 추세를 보였는데, 이러한 프티부르주아는 이 시대에서 특히 급진적일 수도 있었다. 루이 18세의 후계자인 샤를 10세(찰스 10세)의 보수정치는 마침내 7월혁명을 유발시켰다. 메테르니히는 정통주의가 깨어졌다 해서 탄압을 계획하였으나 그럴 사이도 없이 혁명은 벨기에로 비화(飛火)하여 이탈리아, 폴란드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독일에서도 일부 나라에 헌법 제정의 움직임이 보였고, 영국 또한 이 영향을 벗어나지 못해 민주적 기운이 앙양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7월혁명은 유럽 제국에 끼친 영향과, 왕조 교체에 따른 빈 조약의 결의가 깨어진 것으로 봐서, 보수적인 빈 체제가 본격적으로 와해되기 시작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7월 왕정은 부르주아 상층의 입장에 선 정권이었기 때문에 민주적 개혁은 일부에 국한되었다. 산업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는 7월 왕정에 대하여 불만이 컸으며, 특히 온갖 탄압을 받은 노동자는 부르주아 정권에 실망하여 민주주의적 요구와 함께 사회주의적 요구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샤를 10세(찰스 10세)[편집]

-世 Charles Ⅹ (1757

1836, 재위 1824

1830)

1824년 루이 18세가 죽고 동생 샤를 10세가 즉위하였다. 그는 절대주의를 강화, 망명지에서 귀국한 구(舊)귀족에 대해 국고에서 거액의 보상금을 지불하였고, 가톨릭을 강화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탄압하고 언론통제를 엄격히 했다. 그는 의회와 충돌을 일으킬 때마다 해산으로써 대응했다. 1830년 왕이 임명한 대신을 의회가 불신임하자 왕은 보복조치로 의회를 해산시키고 새 의회의 선거를 명했다.

7월혁명[편집]

七月革命

1830년 샤를 10세는 해외원정을 단행하여 군사적 위력을 과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할 의도에서 알제리로 출병했다. 이것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시위 운동이었다. 그러나 새로 선출된 의원은 반대파가 압도적이었다. 그는 무모하게도 아직 소집되지 않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새 선거법에 의해 선거권을 제한하려 했다. 국민들의 항의는 맹렬해져, 7월 28일 파리 시내에는 도처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라파예트가 이끄는 공화당원들의 무력봉기가 일어나 국왕군과 격돌했다. 온건한 자유주의자는 또다시 1789년이 재연되는 것이 두려워, 가(假)정부를 조직하여 샤를의 먼 친척이자 대혁명 때에 혁명파로서 활약한 오를레앙공의 아들 루이 필리프를 국왕 대행으로 임명,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샤를은 국왕군이 점차 혁명군쪽으로 전향해 가는 것을 보고 사태의 중대성을 파악, 칙령을 취소하고 대신을 파면시키는 한편, 손자에게 양위를 선언하고 퇴위했다. 혁명 세력은 샤를의 퇴위만을 승인하고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정식 인정했다. 그는 국민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명목으로 ‘국민의 왕’ 또는 혁명의 초연(硝煙) 속에서 왕이 되었기 때문에 ‘바리케이드의 왕’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으면서도 정치적 성과를 빼앗긴 공화주의자들에게는 불만스러운 왕이었다. 그가 수행한 일은 입법부에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고 선거 제한을 완화시킨 정도에 그쳤다.

루이 필리프[편집]

Louis Philippe (1773

1850, 재위 1830

1848)

루이 필리프는 오를레앙공(公)의 아들로, 프랑스 혁명 때는 국민군에 참가하여 자코뱅파에 소속되어 활약했다. 7월혁명 때에 티에르·미네 등의 자유주의자나 부유한 시민·대상인·금융업자 등의 지지를 얻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선거권의 제한을 완화했으나 그 수는 20만에 불과하고, 왕제를 지지하는 것은 상층 부유시민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도 주식거래를 할 정도여서, 주로 금융 자본가를 옹호하는 입장에 섰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증권왕’이라고 비꼬아 불렀다. 노동자, 급진적 지식인뿐만 아니라 승려·소자본가들까지도 그의 정책에는 불만이었다. 필리프는 동방(東方) 문제의 대책과 관련해 티에르를 퇴직시키고 기조를 기용했으나 보수적인 기조 내각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고, 더욱이 1846년의 농업공황으로 사람들의 불만은 더욱더 증대하였다. 1848년 2월 보수적인 정치에 대한 개혁 요구는 민중의 봉기를 초래, 왕은 부득이 영국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폴란드 독립운동[편집]

-獨立運動

빈 회의 결과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폴란드(Poland)에서도 1830년 11월, 7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 및 대학생이 주동이 된 혁명이 발생, 지주·귀족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황제와 교섭하여 개혁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황제는 개혁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듬해 2월, 폴란드에 군대를 파견하여 가차없는 탄압을 개시함으로써 가을까지 혁명세력을 완전히 진압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병영으로 화했고, 혁명적 지식인은 국외로 망명하였다. 1846년 갈리치아 지방에 폴란드 귀족·지식인의 반란이 있었으나 이는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곧이어 농민은 영주에 대한 폭동을 일으켰으나 삽시간에 진압당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정부는 농민의 노동지대(勞動地代)를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벨기에 왕국의 독립[편집]

-王國-獨立

빈 회의 결과로 네덜란드와 벨기에(Belgium)는 한데 뭉쳐 네덜란드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정부는 구(舊)네덜란드를 우대하고, 벨기에 인에게는 중세를 과하는 등 벨기에인에게 극히 불리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국왕인 윌리엄 1세는 벨기에인에게 네덜란드어(語)의 사용을 강요하고, 가톨릭을 부당하게 차별했다. 7월혁명은 이러한 벨기에인의 평소부터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독립운동은 수차에 걸쳐 탄압당했으나, 영국·프랑스 등의 여론의 지지를 받아 1831년 런던 열강회의에서 독립과 국외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승인받았다.

청년 이탈리아당[편집]

靑年-黨

마치니가 지도한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목적으로 한 결사(結社). 마치니는 망명 중, 카르보나리당에 의한 1831년 혁명의 실패를 반성하여, 이탈리아의 혁명은 소수의 혁명가나 그룹의 단순한 정치운동이 아닌, 일반 민중에 뿌리 박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신에 대한 신앙과 인간성에 대한 확신에 의해 청년 이탈리아당을 창설하였다. 공화주의와 통일주의를 내걸고 게릴라 전법으로써 외국의 지배에 항거하였고, 기관지를 발간하여 이탈리아 민중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1833년에는 당조직이 이탈리아 각지에 확대되어 당원 수는 6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는 이듬해에 청년 유럽당을 조직하여 독일·폴란드·스위스에서도 민족주의적 운동을 고무함으로써 유럽의 혁명적 기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칠월왕제[편집]

七月王制

7월 혁명에 의한 오를레앙가(家)의 성립은 빈 체제의 기둥이던 정통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라 하여 메테르니히를 경악케 했으나, 실태는 그렇게까지 혁명적이 아니었다. 루이 필리프를 지지한 금융자본가들은 보통선거를 비롯한 민주주의적 요구를 억압하려 했다.

정권의 자리에서 경원당한 산업자본가와 노동자의 불만은 매우 커서 공화제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한편 노동자의 대(對)자본가 투쟁도 강화되어 1834년에는 리용의 견직물 공업 노동자의 폭동이 발생했고, 그 밖에 각지에서 스트라이크가 계속 발생하게 되었다. 왕은 단순히 노동자의 단결을 금하고 억압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적 요구와 함께 사회주의적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도 증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