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나폴레옹과 빈 체제/산업혁명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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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의 영향〔槪說〕[편집]

산업혁명은 장기간에 걸친 조용한 혁명이었으나, 그 영향은 프랑스 대혁명의 그것보다 더욱 결정적으로 사회를 변화시켜 나갔다.

기계제 대공업의 성립은 점차로 수공업자를 몰아냈고, 자본주의적 대농장 경영의 성립은 허다한 소자작농 및 영세 소작인을 몰락시켰다. 이렇게 해서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 계급과 자본에 예속된 임금 노동자 사이의 계급적 대립이 발생했다고 한다. 산업혁명은 노동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여줌으로써 국민 총소득을 높여주었으나 소득의 분배는 결코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산업혁명의 초기, 즉 최소한 1840년 이전에는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은 1820년대부터 반 세기에 걸쳐 세계의 공장이라는 지위를 확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계적 대공업은 언제까지나 영국의 독점물에 그치지는 않았다. 우선 프랑스·벨기에 등에 이어 독일·미국에서 기계제 대공업화를 위한 활발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신흥공업도시[편집]

新興工業都市

산업혁명이 진전됨에 따라 인구가 공업지대로 집중되는 경향이 현저하게 되어 맨체스터·리버풀·버밍엄·글래스고·에든버러 등의 공업도시는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도시에서는 과잉인구가 빚는 폐단도 커서 각처에 비위생적인 노동자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도로 포장은 되지 않고, 배수시설도 전혀 불완전하여 전염병의 유행이 도시의 사망률을 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아동 및 부인 노동[편집]

兒童-婦人勞動

기계화에 따라 생산공정(生産工程)이 단순한 공정으로 분할되자 숙련공은 필요없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 노동자는 일반적으로 공장에서의 조직적 노동을 혐오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공장주는 저임금의 아동 및 부인 노동자를 고용했다. 빈민 구호소에 수용된 교구(敎區) 견습공들은 이러한 저임금 노동의 주요 공급원으로서, 때로는 3,4세 때부터 강제 취역당했다. 탄광 등의 작업에도 부인·아동의 노동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단결금지법[편집]

團結禁止法

영국 정부는 1799년과 1800년 두 차례에 걸쳐, 노동자가 조직을 만들어 고용주에 대한 임금 인상이나 노동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을 금했다. 여기에는 고용주측의 금지조항도 정했으나, 노동운동 억압을 주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저항과 자유주의의 함양으로 1825년에는 마침내 단결금지법이 철폐되기에 이르렀으며, 노동조합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러다이트 운동[편집]

-運動

기계는 자본주의적 생산기구 아래 도입된 것으로, 인간을 노고(勞苦)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에게 있어서 기계는 그들의 노고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계를 때려부수는 행위는 기계를 소유하는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는 하나의 변형이었다. 러다이트(Luddite) 운동은 1811년과 1812년에 일어난 대규모적인 기계부수기 운동이었고, 노팅엄셔·요크셔·랭커셔를 중심으로 수많은 역직기(力織機) 편기가 파괴되었다.

공장법[편집]

工場法

아동 노동의 비참상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1802년의 견습공 건강법에 이어 1819년에는 새로운 공장법이 제정되었다. 이것은 면공업에 있어서 9세 이하 아동의 노동을 금하고, 16세 이하의 노동시간은 하루 12시간으로 제한한 것이었다. 1833년에는 견(絹)공업을 제외한 섬유공업에 있어서 9세 이하 아동의 노동을 금지하고, 연령에 상응하는 최고 노동시간을 정했다. 공장법은 1844년과 1847년에 더욱 충실한 내용으로 개정되어, 18세 이하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하루 최고 10시간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 공장법은 섬유공업을 대상으로 한 것일 뿐 공장 노동자 전체에게 적용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대륙 제국의 공업화[편집]

大陸諸國-工業化

18세기의 프랑스는 경제력에 있어 영국과 패권을 다툴 정도였으나 혁명의 혼란으로 크게 뒤지게 되었다. 1825년 이후 영국으로부터 기계를 수입하고, 섬유공업에서 공장제도가 실현되었으나, 석탄 부족으로 대공장의 형성은 대체적으로부진했다. 그리고 무역정책도 보호관세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벨기에는 영국과 함께 일찍부터 자본주의 발전을 보았으나, 19세기에 접어들어 네덜란드와 합병하자, 그 자본을 이용해서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시장으로 하여 산업혁명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그 후 벨기에가 분리되자 본래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오히려 생산활동이 쇠퇴해 갔다.

관세동맹[편집]

關稅同盟

1834년 프로이센의 주도하에 독일연방(獨逸聯邦) 사이에 맺어진 관세동맹. 1818년 프로이센에서 특수 수입품(特殊輸入品)을 제외한 국내 소비 물자의 관세를 대폭 인하하고, 국내 교역에는 관세를 폐지하였는데, 인접한 여러 나라에서도 차차 이에 동조하여 1828년에는 20여 개국이 참가한 프로이센 관세합동으로 발전하였다. 1828년 1월 프로이센에 대항하기 위하여 바이에른 및 뷔르템베르크는 남(南)독일 관세동맹을 맺고, 같은 해 9월에는 하노버, 작센, 헤센 등 중부독일 제국(諸國) 및 프랑크푸르트, 브레멘과 같은 자유도시(自由都市) 사이에 중부독일 동맹(同盟)이 성립했는데, 프로이센은 이와 같은 3개의 관세동맹이 합동하도록 노력함으로써, 1834년에는 남부의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및 작센, 튀링겐 등 18개국의 가맹에 의해 독일 관세동맹이 성립하였다. 이것에 의하여 동맹국은 서로 관세를 폐지하고 자유 통상을 추진, 또 동맹 외의 제국(諸國)과의 통상에는 공통으로 협정한 세액(稅額)을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 1840년대에는 가맹국이 더욱 확대되어 남독제방(南獨諸邦)에 미치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내의 제국(諸國)은 거의 참가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은 경제적으로 독일을 통일하고, 1835년의 철도부설과 함께 상공업(商工業)의 발전을 촉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