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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과 미국〔槪說〕
[편집]19세기 들어 북부 산업자본의 성장은 점차 활발해져 특히 미·영전쟁(美英戰爭)을 계기로 개시된 산업혁명의 템포가 1840년부터 가속되었다. 또한 이민의 증가, 철도와 운하의 발달,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 등으로 19세기 중반에는 남부·북부·서부 지역간의 이해대립이 현저해졌다.
북부의 근대공업 발달은 시장의 확장과 통일을 구하여, 보호관세·은행제도의 충실화·자영농지법(自營農地法)·국내 개발 등의 여러 정책을 요구하였다. 남부의 경제는 면화(綿花)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무역에 의한 번영을 추구하여, 북부의 보호무역에 반대하고 면화 플랜테이션의 확장을 서부에 구하며, 노예제도 옹호의 입장에서 북부에 대한 경제적 종속화에 반발하고 나섰다. 미시시피강 서쪽의 영토가 병합되고, 서부에 새로이 탄생하는 노예주(奴隸州)와 자유주(自由州) 문제에 관해 미주리 협정이나 1850년의 타협 등으로 상호 대립하는 이해관계가 일시적인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854년의 캔자스·네브래스카법(法)의 채택은 북부에 강력한 노예제도 반대 운동을 촉발하여 공화당(共和黨)의 결성을 보기에 이르렀다. 서부에 새로이 탄생되는 주(州)가 자유주가 되느냐 노예주가 되느냐 하는 점을 주(州)의 주민(住民)의 결정에 위임한다는 1854년의 협정은 무제한으로 노예제 확대를 서부에 허용하는 것이라고 북부에서는 생각하였다. 1860년의 대통령 선거에 의한 링컨의 당선은 남부 노예주의 분리를 가져왔다. 이렇게 하여 야기된 남북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나, 미국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의 기본 조건을 완성하고, 국민적 통일 국가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남북의 대립
[편집]南北-對立
산업혁명을 통한 면방공업(綿紡工業)의 발전으로 19세기 초 남부의 노예제 면화(綿花) 플랜테이션은 재차 번영을 되찾았다. 면화 플랜테이션은 비옥한 토지를 찾아 남서부(南西部)로 확대하였으나 노예제도의 서방 확대는 새로운 노예주를 증가시키게 되어 북부와의 정치적 대립을 격화시켰다. 남부는 면화 수출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데 대해, 북부의 성장기에 있는 근대공업은 외국 상품의 유입을 제한하는 보호무역을 요구했던 것이다. 1820년대 이후 서부 개척이 급속도로 진전됨에 따라 남부의 정치적 우세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북부의 공업 발전은 자유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대하고, 노예제 반대 운동은 인도주의의 주장과 결부되어 한층 세력을 폈다. 1837년의 공황(恐慌)과 멕시코 전쟁에 의한 텍사스 병합 등으로 서부의 새로운 주(州)를 노예주로 하느냐 자유주로 하느냐의 문제로 남부 양지역의 정치적 대립은 더 심각해졌다. 1854년의 캔자스·네브래스카법(法)에 대해 북부의 노예제도 반대자는 공화당을 결성하고,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결정적인 대립으로 돌입하였다.
노예제 플랜테이션
[편집]奴隸制-
17세기 초 버지니아에 수입된 흑인노예가 북아메리카에서는 최초의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는 영국 상인의 노예무역이 발전하고, 남북 캐롤라이나의 플랜테이션제(制) 농업과 결부하여 급속하게 발달하였다. 이러한 노예노동은 주로 남부의 농업에 사용되어 면화나 담배 등 플랜테이션의 단순 노동에 가장 적합했던 것이다. 독립혁명 후에는 한때 쇠퇴 과정에 있었으나 영국 산업혁명의 진전으로 면화수요가 증대됨에 따라 1820년대 이후 노예제 플랜테이션은 번영기를 맞았다. 면화가 미국의 수출무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 플랜테이션은 19세기 미국 경제의 성장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스토 부인
[편집]-夫人 Harriet Beecher Stowe (1811
1896)인도주의적 여류작가. 결혼 후 켄터키로 이사하여, 플랜테이션의 노예 생활을 목격한 뒤 도망노예(逃亡奴隸)를 동정하였다. 1850년의 도망노예 단속법에 분격, 1851년부터 1852년에 걸쳐 『엉클 톰스 캐빈』을 워싱턴의 신문에 연재하고, 완결 후에 단행본을 만들어 30만부가 팔렸으며, 노예제 폐지 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미주리 협정
[편집]-協定 Missouri Compromise
1821년에 미주리주(州)의 연방 가입에 관해 북부의 자유주와 남부의 노예주간에 체결된 협정이다. 1819년 미주리를 연방에 가입시키는 문제가 생겨 매사추세츠주(州)의 일부인 메인 지방을 자유주로 하고 미주리를 노예주로 할 것, 미주리주(州)의 남부 경계인 북위 36도 30분 이북에는 노예주를 설치하지 않을 것, 자유주와 노예주의 수를 동수로 유지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공화당
[편집]共和黨 Republican party
캔자스·네브래스카법(法)에 반대하여 결성을 보게 된 정당이다. 다수의 휘그당원과 민주당 가운데도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당원이 집결하여 1854년 미시간에서 공화당의 결성을 보았다. 1856년의 대통령 선거에는 패하였으나 1860년에는 링컨을 출마시켜 노예제 확대의 금지, 보호관세의 주장 아래 승리를 거두었다.
링컨
[편집]Abraham Lincoln (1809
1865, 재임 1861
1865)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켄터키 출생. 가족과 함께 인디애나, 일리노이 주(州)에 이주, 잡화상을 경영하였으나 실패하고, 우편국장이 되었으며 측량도 하였다. 후에 독학으로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일리노이 주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1847∼1849년 미국 하원의원으로서 멕시코 전쟁을 비난, 조건부의 노예제 폐지를 제안하여 점진적·타협적 노예 폐지론자의 입장을 취하였다. 1855년 상원의원, 다음해 공화당에 가입하였다. 노예제 확대에 타협적인 인민 주권론에 입각한 더글러스와 유명한 논전을 전개, 노예제의 불확대와 자유 제도에 입각한 연방의 견지(堅持)를 절규하여 일약 전국에 명성을 떨쳤다. 1860년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공화당에 추대되어, 북부 민주당의 더글러스, 남부 민주당의 브리켄리지, 헌법 연방당의 벨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이 때문에 남부 여러 주(州)는 분리하여 아메리카 맹방(盟邦)을 결성하고, 북부에 무력도발로 대항하였다. 그는 남부 여러 항(港)의 봉쇄, 의용병 50만 명의 징모, 공채모집(公債募集)을 위시하여 인신보호령(人身保護令)의 정지, 강제 징병 실시, 언론집회의 자유 제한 등을 행하여 전쟁을 지도하였으며, 점진적 노예 해방을 목표로 하였으나 북부 급진론자의 억제가 어렵게 되자, 1863년 1월 1일을 기하여 전노예 해방을 선언하였다. 동년 격전지 게티즈버그에서 불멸의 연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영원히 지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를 남기었다. 1864년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1865년 9월 남군 총지휘관 리의 항복에 의해 무력투쟁은 끝났으며, 재건의 과제를 담당하였으나, 열광적 남부파 배우인 존 부스에게 관극 도중 암살되었다. 그는 당시의 농민, 자본가, 노동자, 급진주의자들의 복잡한 여러 세력(勢力)을 파악하여 북부에 광범위한 전선을 펴서 노예주(奴隸主) 세력의 타도에 성공하였으며, 연방 재건의 길을 개척한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
아메리카 맹방
[편집]-盟邦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남북전쟁 때 연방을 탈퇴한 남부 11개 주(州)의 조직체이다. 1860년에 링컨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자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비롯한 7개 주(州)가 연방을 탈퇴하여, 1861년 2월 4일에 아메리카 맹방(盟邦)을 결성하고 대통령에 제퍼슨 데이비스를 선출하였다. 그 후 버지니아,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등 4개 주(州)가 이에 가맹하였다.
데이비스
[편집]Jefferson Davis (1808∼1889)
미국의 정치가. 켄터키 주(州)에서 출생, 1828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미시시피에서 농원의 소유주가 되었다. 1846년 멕시코 전쟁에 종군, 귀향후 미시시피주에서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53∼1857년에 국방장관을 거쳐 상원에 복귀하여 노예문제에서 주권론을 강력히 주장하여 민주당 남부파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다. 미시시피의 연방 탈퇴 때 상원의원을 사직하고 1862년에 남부연합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취임했다. 1865년 남부의 패전으로 체포되어 2년간 감옥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다. 여생을 남부 입장의 옹호를 위해 바친 그는 만년에는 저술에 전념했다. 저서에 『남부연합정부의 흥망』이 있다.
남북전쟁
[편집]南北戰爭 Civil War
미국에 있어서의 남부와 북부간의 내전(內戰). 제2차 아메리카 혁명이라고도 하는데, 이 전쟁으로 남부의 플랜테이션, 노예제도(奴隸制度)가 폐지되고, 북부의 산업자본의 승리가 확립되어, 근대 국가로서의 아메리카 통일이 완성되었다.
남북 대립의 근본원인은 남부의 노예제도가 획기적으로 발전한 데 있었다. 1830년대 이래, 북부에서는 인도주의적 노예제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1854년에는 노예제 확대에 반대하는 북부 및 서부의 민주세력이 결집(結集)하여 공화당이 성립되었다. 1860년에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의 여러 주(州)는 연방을 탈퇴하고, 아메리카 맹방을 결성하였다.
남북 노예주가 아메리카 맹방을 결성하였으나 링컨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연방 유지를 선언하여, 1861년 4월 섬터 요새(要塞)에 수비군을 증강하려 하였다. 남부는 즉각 섬터 요새에 공격을 개시하였다(1861
1865). 또한 북부는 남부를 해상 봉쇄하였으나 7월 불런강(江)의 전투에서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에게 패배하였다. 북군은 1862년에는 미시시피강을 제압하고 그랜트 장군은 테네시에서 남하하여 멤피스를 점령하였으며, 해군은 뉴올리언즈를 점령하였으나, 동부전선에서는 남군이 우세하였다. 1862년 9월 링컨은 노예해방 예비 선언을 하고, 1863년에는 남부의 빅스버그, 포트허드슨이 북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다음해 셔먼의 지휘로 조지아의 애틀랜타, 서배너가 점령당하였다. 동부전선에서는 리치먼드의 공방전(攻防戰)이 전개되고, 1864년에는 북군의 포위작전이 성공하여 1865년 4월, 리 장군은 마침내 아포머톡스에서 항복하였다. 60만 명 이상의 희생에 의해 미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노예해방령
[편집]奴隸解放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에 의해 발포된 선언. 1863년 1월 미국에 대해 반란상태(叛亂狀態)에 있는 여러 주(州)의 전노예(全奴隸)를 즉시 전면 해방한다는 내용이다. 델라웨어, 켄터키, 메릴랜드, 미주리의 경계 4주(州) 및 테네시, 버지니아, 루이지애나 등 북군(北軍) 점령 여러 주(州)의 노예는 대상외로 되었다. 점차적이며 유상적(有償的)인 노예해방을 주장하는 링컨과 공화당(共和黨)내 보수파(保守派)와 즉시 전면 해방과 노예주(奴隸主)의 조기일소(早期一掃)를 기도하는 진보파(進步派)와의 타협적 선언으로써 나타났으며, 동시에 전세계에 북부의 명분을 표명하는 의도도 있었다. 따라서 이 선언은 남북전쟁(南北戰爭)에 있어서의 전략적(戰略的) 의의를 가지며, 노예 각주(各州)의 조기복귀(早期復歸), 남부의 사기(士氣) 상실 등이 중시되며, 노예 해방의 본질적 실현은 1865년의 제13헌법 수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랜트 장군
[편집]-將軍 Ulysses Simpson Grant (1822
1885)
북군의 사령관으로 활약하여 북군을 승리로 이끈 장군으로 제18대 대통령을 지냈다(재임 1869
1877). 오하이오주(州)에서 태어나 멕시코 전쟁에서 용명(勇名)을 떨쳤으며 남북전쟁에서는 1862년 테네시주(州)의 헨리 요새를 함락시켜 소장(少將)에 임명되었다. 1863년에는 빅스버그의 전투와 채타누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1864년에는 사령관으로서 리치먼드를 포위하여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을 항복시켰다. 186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당선, 대통령으로서 2기(二期) 재임했다. 남부 재건 문제의 처리에 힘썼으나 정계의 부패사건 속출로 혹평을 받았다.
은퇴 후 남북전쟁의 체험담을 잡지에 기고했고, 회고록을 집필했다.
게티즈버그 전투
[편집]-戰鬪
게티즈버그(Gettysburg)는 워싱턴 서북방 약 108㎞에 있는 작은 마을로 남북전쟁 중 최대의 격전지였다. 남군의 명장(名將) 리는 승패를 단번에 결정하려고 북군의 본거지에 깊숙이 침투했다. 북군도 장군 미드를 기용하여 주력 부대를 집결하였으므로, 1863년 7월 1일에서 3일에 걸쳐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어 남군의 사상자는 2만5천 명을 넘었고, 남군의 공격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링컨은 동년 11월 이 격전지를 국립묘지로 지정하여 전사자에 바치는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연설을 하였다.
홈스테드법
[편집]-法 Homestead Act
1862년에 성립한 자영농지법(自營農地法). 이것은 1860년에 일차 연방의회를 통과하였으나 남부 출신의 부캐넌 대통령에 의해 저지되었다. 남부의 탈퇴로 이 법안은 1862년 5월에 성립되었으며, 공포 후 5년간 정주(定住)한 사람에게는 160 에이커의 토지를 무상으로 주는 것으로 되었다. 이 법안으로 서부 개척은 촉진되고, 서부에 대한 북부의 영향이 강화되었다.
대륙횡단철도
[편집]大陸橫斷鐵道
남북의 대립으로 대륙횡단철도의 부설은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남부의 여러 주가 탈퇴하자 1862년 의회는 태평양 철도법에 의거하여 유니언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 양 철도회사에 특허를 인가하였다. 정부가 토지와 보조금을 회사에 공급하였으므로 양사(兩社)는 동·서에서 건설을 추진시켜 1869년 5월 10일에 최초의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하였다.
서부개척
[편집]西部開拓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남북의 대립이 서부(西部)로의 발전을 크게 방해하고 있었으나, 남부 여러 주의 이탈로 서부의 발전은 급속도로 진척되기 시작하였다. 1862년의 자영농지법과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은 서부 개척에 있어 획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되었다. 백인 농민의 서부 이주는 급속도로 진행되어서 인디언 거주지를 침범하기 시작하여 양자간의 분쟁이 격화하였으나 인디언 문제는 결국 무력에 의해 해결되었다. 철도 건설의 진전으로 중서부의 소나 돼지가 화차에 의해 수송됨에 따라 전후 텍사스, 로키 산맥 동부의 대평원에 목축업이 대규모로 발전하였다. 농업 기술의 발전과 북구계(北歐系) 이민의 증가로 서부의 농업 지역도 급속도로 확장되어갔다. 서부 발전은 자본주의 경제의 시장과 원료 공급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남부의 재건
[편집]南部-再建
링컨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는 전전(戰前)의 남부 유권자 10퍼센트가 합중국에 충성을 약속하고 노예제 폐지에 찬동하면 연방 복귀를 인정한다고 하였다. 이 주장에 대하여 급진파는 남부 의회가 제정한 흑인법(黑人法)에 반대하고, 흑인 시민권을 옹호하는 시민권법의 제정, 해방흑인국(解放黑人局)의 기한 연장, 존슨 대통령의 재건책을 반대했던 남부를 5개 군관구(軍管區)로 나누어 군정을 펴서 흑인 투표권을 보증하는 헌법 수정 제15조를 가결하였다. 급진파의 실패는 남부 구(舊)세력의 부활을 보게 하고, 1877년 연방군이 철수하여 ‘견고한 남부’를 출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부에 있어서 소토지소유자(小土地所有者)의 탄생과 동시에 세어 크로퍼라는 특수한 소작인을 낳게 하였다.
알래스카 구입
[편집]-購入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아메리카 모피 회사의 재정 파탄과 크림 전쟁에 의한 영국군의 점령을 염려하여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려고 하였으나 남북전쟁의 발발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867년 국무장관 슈워드는 720만 달러로 이를 매수하였으나 당시 알래스카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이 구입은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