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발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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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문제〔槪說〕[편집]

발칸(Balkan) 반도는 15세기 이래 오스만 투르크 지배하에 있었으나, 쇠퇴에 따라 19세기 후반에는 슬라브계(系) 여러 민족간에 독립운동이 치열해지는 동시에 투르크령(領)의 분할을 노리는 유럽 열강(列强)의 대립이 얽혀 복잡한 국제 분쟁 문제를 낳았다. 이것이 발칸 문제이다.

우선 18세기 이래 남진정책(南進政策)을 취해온 러시아가 크림 전쟁(1853

1856)을 일으켜서 진출을 기도하였으나, 영국·프랑스에 의하여 저지당함으로써 실패하였다.

그 후 발칸의 슬라브계 여러 민족은 단결하여 독립을 달성하려는 범(汎)슬라브주의 운동을 일으키고, 러시아는 그 맹주(盟主)로서 발칸 진출을 꾀했다. 1870년대가 되어 각지에서 투르크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열국(列國)의 관심이 발칸에 쏠렸으나 1877년 러시아는 단독으로 러·투 전쟁을 일으켜 투르크를 격파하고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 유리한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진출을 두려워한 영국, 오스트리아가 이에 반대하였으며, 비스마르크의 중재(仲裁)로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어, 러시아의 야망은 재차 좌절됐다.

이후 발칸에서는 일단 안정이 확보되었으나, 열국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어 독립한 여러 나라들도 대국(大國)의 움직임에 좌우되어,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지(發火地)가 되었다.

러시아의 남진정책[편집]

-南進政策

흑해에서 지중해 방면에 진출해 발칸·근동(近東) 방면으로 세력을 확대하려는 정책이다. 러시아의 주요 생산품인 농산물을 반출하는 통로의 확보, 거기에 19세기 후반에는 공업 제품의 해외 판로 획득이 이 정책의 목적이었다.

니콜라이 1세 시대(1825

1855)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남진의 노력이 되풀이되었다. 이 시대의 발칸·근동은 투르크가 후퇴하고 이 지역 여러 민족의 민족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유럽 여러 나라의 각축장(角逐場)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진정책은 항시 국제분쟁의 요인이 되었다.

크림 전쟁[편집]

-戰爭 Crimean War

남진정책을 취하는 러시아와 투르크·영국·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간의 전쟁(1853

1856). 나폴레옹 3세가 투르크에 대해 성지(聖地) 예루살렘의 관리권을 요구한 것을 계기로 니콜라이 1세가 투르크 영내의 그리스 정교도(政敎徒)의 보호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여 1853년 7월 투르크를 공격함으로써 개시되었다. 투르크의 배후에는 영국·프랑스가 있어 양국은 1854년 3월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후 4월 영국과 프랑스군의 불가리아 상륙, 9월 크림 반도 상륙, 10월 세바스토폴을 포위해 장기전(長期戰)으로 돌입하였다. 1855년 9월 세바스토폴의 함락으로 전세는 결정되어 다음해 1856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어 이 전쟁은 끝났다. 이 조약에 의해 투르크의 영토보전(領土保全)이 규정되고, 투르크는 내정의 개혁과 신교(信敎)의 자유를 약속하게 되고, 러시아는 베사라비아 일부와 흑해에 함대를 두는 권리를 상실했으며, 다뉴브강(江)의 자유 항해도 인정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투르크는 영국·프랑스에 대한 종속관계(從屬關係)가 한층 굳어지고, 러시아는 남진정책이 저지된 동시에 패전으로 국가체제의 약점이 드러나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제반 개혁이 단행되었다. 또한 사르데냐는 이탈리아 통일에 있어서 영국·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참전하였다. 이 전쟁에 나이팅게일이 참가하여 적군과 아군의 구별없이 부상자를 간호함으로써 적십자 운동의 기초를 닦았음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러시아·투르크 전쟁(러·투 전쟁)[편집]

-戰爭

투르크(오스만 제국) 지배하의 슬라브계(系) 민족의 반란을 이용, 러시아가 투르크를 격파하였던 전쟁(1877

1878). 1875년 보스니아의 헤르체고비나와 1876년 불가리아에서 각각 반란이 일어나 열국은 투르크에 내정개혁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래서 1877년 러시아는 단독으로 투르크를 공격하여 승리를 얻었으나, 영국이 러시아에 대항하는 기미를 보여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시켰다.

산스테파노 조약[편집]

-條約 Treaty of San Stefano

1876∼1877년의 러·투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강화조약. 산스테파노는 콘스탄트노플 서쪽 교외의 한 작은 마을이다. 이 조약의 결과, 세르비아, 몬테니그로, 루마니아 3국의 독립과 대(大) 불가리아 자치공국(自治公國)의 건설이 승인되고, 러시아는 영토를 확대하였다. 이 결정이 실현되면 러시아는 실질적으로 발칸을 지배하고, 그 세력을 지중해로 신장(伸張)해 나갈 것이 명백하므로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이에 반대하고 조약의 전면적 개정을 요구하였다. 특히 영국은 강경하여 개전(開戰)도 불사(不辭)한다는 태도를 표시하여 러시아도 이에 굴복, 오스트리아의 제안에 따라 이 조약을 개정하여 국제회의에 붙일 것을 승인하였다. 그리하여 비스마르크의 제청에 의해 1878년 6월 베를린 회의가 열려, 이 조약은 러시아의 양보로 상당한 수정(修正)이 가해졌다. 그 때문에 이 조약은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관계에 있어서 이른바 발칸 문제의 화근(禍根)이 되었다.

루마니아의 독립[편집]

-獨立

루마니아의 남쪽은 불가리아에 인접하고, 동쪽은 흑해(黑海)에 면하였다. 로마시대는 그 속주(屬州)였으며, 몰다비아, 왈라키아라고 불렸다. 중세 이래, 슬라브족, 게르만족, 마자르족에 정복되었으나, 1412년 투르크에 병합되어 자치권(自治權)을 빼앗겼다. 19세기의 민족주의 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1856, 1858년 파리 조약에서 자치권을 얻고, 1859년 몰다비아, 왈라키아의 통일이 성립되어, 쿠자를 공(公)으로 선출하였다. 1866년 호엔촐레른 가의 친척 카롤을 맞이하여 국내 개혁을 단행하고, 1877년 러·투 전쟁을 이용하여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 베를린 회의에서 승인을 받았다.

세르비아의 독립[편집]

-獨立

15세기 이래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19세기 들어 슬라브계 세르비아인(Serbia人)은 대(大)세르비아주의를 내걸고 자주독립 운동을 일으켰다. 1875년 보스니아의 헤르체고비나 반란(反亂) 때 투르크와 싸워 패하였으나, 산스테파노 조약, 베를린 회의에서 독립이 승인되었다. 그 후 러시아의 범(汎)슬라브주의 아래 오스트리아와 대립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되기도 했다.

몬테네그로의 독립[편집]

-獨立

몬테네그로(Montenegro)는 아드리아해(海)에 면한 지역이었는데 현재에는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이다. 15세기 이후 투르크에 종속되었으나, 9세기 중반(中半)에 공국(公國)이란 호칭을 얻어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니키타 1세에 의해 투르크로부터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져 산스테파노 조약, 베를린 회의에서 독립이 승인되었다.

불가리아의 독립[편집]

-獨立

14세기 말 투르크에게 병합되었으나, 19세기 들어 투르크가 약체화됨에 따라 독립운동이 가열하였다. 1876년의 반란에서는 유명한 대학살을 수반하는 투르크의 탄압을 받았다.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러시아 보호하에 대(大)불가리아국(國)이 성립되었으나, 베를린 회의로 투르크의 종주권 아래의 자치국이 되었다. 1908년 투르크의 혁명 때 독립을 획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