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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태평천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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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난〔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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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부터 15년간, 중국 남부의 광대한 지역에 태평천국이라 불리는 정권을 수립했던 농민의 대반란(大反亂)이다. 이는 토지·재산의 균등 분배 등을 이상으로 하고 평등 사회의 실현을 시도한 중국 전근대화(前近代化)에 있어서 최고도로 확대한 농민의 운동이었다.

중국에서는 명말(明末) 청초(淸初) 이후, 상품 생산이 증대됨에 따라 봉건제의 해체 현상이 나타나고 그와 밀접하게 얽혀 청조의 국가 권력이나 지주·부상인(富商人)에 대한 농민의 반항은 증대되어갔다. 이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아편전쟁이었다. 1840년 아편을 강제로 반입하려고 하는 영국 군함에서 중국을 향해 발포한 사건은 중국이 반식민지(半植民地)·반봉건사회(半封建社會)로 전락하는 신호였다. 아편과 공업제품이 급격하게 중국으로 유입됨으로써 중국의 부(富)는 빼앗기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중국 민족의 주권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외국에 팔아 넘기는 난징 조약이 체결되자 농민의 파산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태평천국의 지도자인 홍수전(洪秀全)은 “천하는 상제(上帝)의 일대가족(一大家族)이므로 천하의 사람들은 사물(私物)을 갖지 못하며, 물건은 모두 상주(上主, 天父)에 귀속되고, 주(主, 天主)에 의해 운용되며, 모든 사람들이 평균화되고, 포식난의(飽食暖衣)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더불어 밭 갈고 같이 먹어야 하는’ 이상사회를 실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농민들에게 호소하였다. 태평천국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의 의상을 둘렀으나 실은 토지개혁과 평등사회 실현이라는 웅대한 이상을 품고서 엄격한 규율과 정연한 조직을 만들었다. 태평천국은 안팎에 걸친 적의 공격으로 멸망되고, 지도자인 홍수전은 자살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후의 농민 운동에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 태평천국의 반란에 의해 봉건 권력은 권위를 상실하고 ‘인심은 일변’하여 항조(抗租), 즉 반(反)지주 운동이 일상화되었다. 외국에 대해서도 청조의 보수적인 태도와는 달리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고, 외국 세력이 청조와 제휴한 이후에도 이에 대해 철저하게 항전하였다.

홍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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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秀全 (1813

1864)

태평천국의 지도자로 토지 균분(土地均分)·공동 생활·평등 등을 지향하는 이상 사회의 실현을 시도하였다. 가장 먼저 외국의 영향을 받았던 광둥성(廣東省) 화현(花縣)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과거를 보아 입신 출세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사회의 불합리를 깨달았다. 또한 이즈음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고 청조(淸朝)라는 요마(妖魔)를 타도하여 이상사회 실현을 도모하는 사명감에 불타 상제회(上帝會)를 조직하고, 광둥·광시 등 지방에 포교하였다. 또 군(軍)을 일으켜 북상(北上)하여 난징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이로부터 그는 전제군주화의 길을 밟아 민중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또 국가를 운영하는 현실적인 정책도 가지고 있지 못해서 급속히 지주권력이 잠입했다. 청조·외국군에 의한 난징 함락 직전에 자살했다.

상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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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帝會

모든 사람은 유일지상(唯一至上)의 신 여호와(上帝)의 자녀이며 형제이므로 재화를 평등하게 소비하고 공동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종교결사(宗敎結社)로서, 태평천국의 전신조직(前身組織)이다. 창시자인 홍수전은 자기의 몽상과 그리스도교 전도사의 팜플렛의 영향을 받아 요마(妖魔)가 지배하는 이 사회를 타도함으로써 평등 세계인 천국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널리 설파하였다. 이 신종교 조직은 봉건지주 체제하에 신음하였던 농민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태평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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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天國

이 세상에 천국을 세우기 위하여 청조를 타도하고 재산을 균등하게 할 것을 주장한 홍수전은, 1851년 태평천국이란 국호를 내걸고 광시성(廣西省) 진전촌(金田村)으로부터 진격을 시작하였다. 빈농(貧農)·광산 노동자·운수 노동자 등을 중핵(中核)으로 하고 엄격한 규율, 불타는 듯한 이상, 명확한 목표를 가진 태평천국군은 1853년 난징에 도읍할 때 과거의 농민들이 이루지 못하였던 이상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권 내부의 권력 투쟁에 의해 지도자인 양수청(楊秀淸)과 위창휘(偉昌揮)는 피살되고, 영웅 석달개(石達開)는 부하를 이끌고 천국군을 이탈하고 말았다. 더욱이 봉건 지주 계급이 태평천국에 잠입함에 따라 일어나는 부패 현상은 혁명적인 이상과 실현력을 잠식했다. 이렇게 하여, 청조(淸朝) 반혁명군과 외국 세력의 무력 공격으로 인하여 1864년 소위 천주(天主)인 홍수전의 자살, 난징 함락에 이르러 마침내 태평천국은 멸망하였다.

천조전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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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朝田畝制

평균주의와 공유주의(公有主義)를 목표로 한 태평천국의 이념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는 토지 공유 제도이다. 세계는 천부(天父)의 일대가족(一大家族)이므로 사람들은 사물(私物)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과 토지는 남녀 일률평등(一律平等)으로 분배하고 잉여 곡물은 국고에 납입하는 것을 이상으로 정하였으나,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실시될 수가 없었다. 천조전무제도를 포기한 태평천국은 결국 지주와 타협함으로써 이상을 상실함과 동시에 실세력(實勢力)도 상실하고 말았다.

태평천국기의 여러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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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天國期-反亂

태평천국군의 연승과 조직의 발전은 전국 각지에 고조(高潮)되고 있던 농민 투쟁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였다. 당시 중국의 농민은 각지에서 항량(抗糧)이라는 국가에 납입하는 토지세 반대의 투쟁, 항조(抗租)라는 지주에 대한 소작료 거부 투쟁을 행하고 있었다. 이것이 특히 양쯔강 하류 지역에서 성행되고, 태평천국이 이 지역에 확대되어 난징에 도읍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일대의 농민이 열렬하게 영합하였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양쯔강 이남을 주된 무대로 한 데 대해 그 이북에서는 염군(捻軍)·흑기군 등이 청조에 대해 반봉건(半封建)의 반란을 일으켜 태평천국에 호응하였다.

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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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勇

근대 중국에 있어 그 역할이 특히 현저하였던 민간 의용병이다. 치안유지·내란진압·외적방어면(面)에서 활동하였으며, 정규병(正規兵)인 관군(官軍)의 전력 부족을 메웠다. 청조 중기 이후에는 농민의 반란이나 상품 생산의 발전이 현저하여 전제 권력은 약체화하였다. 여기에 지주·향신(鄕紳)·관료 등은 농민을 결집시켜 향용을 조직,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후부터는 점차로 군벌에 편입되어 갔다.

이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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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秀成 (1823∼1864)

태평천국의 충왕(忠王). 광시(廣西) 성 등현(?縣)의 빈농(貧農)으로 홍수전(洪秀全)이 거사할 당초에는 병졸에 불가했으나, 군공(軍功)에 의해 누진(累進)하였다. 1856년 내분으로 양수청(楊秀淸)·위창휘(偉昌揮)가 함께 살해되고, 석달개(石達開) 또한 태평군으로부터 이탈한 후, 영왕(英王) 진옥성(陳玉成)과 함께 태평천국을 사수하여 창저우(常州)·우시(無錫)·쑤저우(蘇洲)와 강남(江南)의 주요도시를 점령하고, 상하이(上海)를 위협하면서 상승군(常勝軍)과 역전(力戰)하는 등 태평군 최후의 빛을 발하였다. 1864년 천경(天京:난징)이 함락된 후 홍수전의 아들을 옹호하고 탈출을 꾀하였으나,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에게 잡히어 처형되었다. 그 때 천국 내부사정을 기술하여 제출하였다고 하는 「이수성공장(李秀成供壯)」이 있다.

증국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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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國藩(1811

1872)

중국 청대 말기의 정치가·학자. 후난성(湖南省) 상샹현(湘鄕縣)의 농가에서 출생. 1838년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중앙 관청의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이 시작되자 향리에 돌아가 농민을 조직하여 상군(湘軍)이라는 향용(鄕勇)을 편성하여 태평천국 진압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태평천국과 염군(捻軍) 진압의 최고사령관으로서 활약한 공적으로 청말(淸末) 최대의 정치가가 되었다. 유학(儒學)의 연구에도 당대 굴지의 인물로서 송학(宋學)을 중심으로 한 유교이념에 의해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데 몰두한 보수주의자이며, 또 정치적으로도 외국 근대 공업의 도입에 주력한 실리주의자였다.

이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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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鴻章 (1823

1901)

청(淸)말의 정치가. 자는 소전(少?), 안후이성(安徽省) 합비현(合肥縣) 출신. 1847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일어나자, 귀향하여 단련(團練:민간의 자경 조직)을 이끌고 싸웠으나 공(功)이 없었고, 1859년 장시(江西)에 가서 옛 스승인 증국번(曾國藩)의 막료(幕僚)가 되었다. 증국번의 천거로 1862년 장쑤성(江蘇省) 순무사(巡撫使)가 되고, 상하이(上海) 방위를 위해 의용군(義勇軍)인 회용(淮勇)을 이끌고 부임하여, 이수성(李秀成) 휘하의 태평군(太平軍) 주력과 교전, 그의 멸망후 염군(捻軍)의 진압에도 성공하여 유력한 정치가의 제1인자가 되었다.

1870년 직례총독(直隷總督) 겸 베이양대신(北洋大臣)이 된 이후 25년간 그 지위를 유지하면서 주로 청말의 다난했던 외교 절충에 임하였다. 1858년 톈진조약(天津條約), 1895년의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1901년의 신축조약(辛丑條約) 등은 그가 체결한 조약들이다. 이 외에도 그는 군대조직·군사공업의 근대화 등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주동인물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