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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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성립〔槪說〕[편집]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진출은 가톨릭 선교사 아드랑 사교(司敎)가 완복영(阮福映)의 월남 건국(1802)을 원조한 것을 계기로 하나, 그 후 나폴레옹 3세의 출병으로 코친차이나(交趾支那)를 획득하고, 1874년 베트남에 불평등조약(不平等條約)을 강요하였다. 1883년의 보호국화(保護國化)는 다음해의 청(淸)·프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프랑스의 지위를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 주어, 1887년에는 프랑스령(領) 인도차이나 연방이 성립되었으나, 결국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 지배하에서 구(舊)지배층은 존속하였지만 공유지(共有地)는 탈취당하여 전경지(全耕地)의 6분의 1 이상이 프랑스인 농원으로 화하였다. 현물세는 현금납(現金納)이 되고, 알코올이나 아편은 프랑스 상인에 독점되어 폭리의 원천이 되었다. 이리하여 인도차이나는 쌀·고무 등의 식료(食料)·원료 산지(産地)로 전락하였다.

베트남(월남)[편집]

Vietnam 越南

베트남에서는 15세기 이래 여(黎) 왕조가 존속하고 있었으나 16세기 말 권신(權臣) 막(莫)씨를 물리치고 베트남을 통일한 정(鄭)씨가 실권을 장악하자 여(黎)씨는 명목상(名目上)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정씨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완(阮)씨는 남부를 근거지로 하여 여 왕조와 정씨에 대항하였으나, 1773

1802년의 타이손당(西山黨)의 난(亂)에 의하여 일족(一族)이 잡혀 죽고, 여 왕조·정씨도 멸망해 버렸다. 난(難)을 면한 완씨 일족인 완복영(阮福映)은 프랑스인 선교사 아드랑 사교(司敎) 피뇨의 후원을 얻어 타이손당(西山黨)을 멸망시키고 1802년 베트남을 통일, 베트남(越南)국을 세워서 1803년 청나라의 책봉을 받았으니, 이 사람이 세조 가륭(世祖嘉隆)이었다. 가륭제(嘉隆帝)는 앞서 말한 대로 프랑스인 선교사를 후대하였으나 다음 대(代)의 성조(聖祖, 민만) 제(帝) 이후에는 압박을 가하였다. 이 시기를 완씨 안남(阮氏安南)이라 부르고 있다.

프·월 전쟁[편집]

佛越戰爭

가륭제(嘉隆帝)의 아들 명명제(明命帝) 이후 완씨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였는데, 나폴레옹 3세는 1858년 에스파냐의 선교사 살해 사건을 이유로 에스파냐와 더불어 출병하여 사이공 등지를 점령하였다. 1862년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고, 코친차이나 동부가 프랑스령(領)이 되었다(제1차는 프·월 전쟁). 프랑스는 또한 1863년에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만들고, 1867년 코친차이나 서부도 병합하고 말았다. 다시 북쪽으로 진출하여 1873년 하노이를 점령하고, 1874년 화친조약을 체결(사이공 조약)하였으나 1883년의 하노이 점령으로 인하여 제2차 프·월 전쟁이 되었고, 1884년 청·프 전쟁으로

전화(轉化)되었다.

사이공 조약[편집]

-條約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조약. (1) 1862년의 체결―프랑스는 사이공 등 코친차이나 동부를 할양받고, 투란(현 다낭)의 개항(開港),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2) 1874년의 체결―프랑스는 송코이강(紅河) 항행권, 통킹(東京) 주병권(駐兵權)을 획득하고,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승인하였으나, 이는 프랑스 보호령화의 전제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 양(兩) 조약으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경영의 바탕이 구축되었다.

청·프 전쟁[편집]

淸佛戰爭

베트남을 둘러싸고 중국과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전쟁. 통킹 지방에 무역장(貿易場)이 열리고 프랑스인의 왕래가 빈번하게 되자, 베트남 관헌(官憲)과의 충돌이 종종 일어났다. 이에 베트남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잔당(殘黨)이라 볼 수 있는 흑기군(黑旗軍)의 수령 유영복(劉永福)과 연락하여 프랑스인을 압박하려 했으나, 1882년에 프랑스군이 출병하여 하노이를 점령하였다. 다음 해 프랑스에 새 내각이 성립되자 다시 적극책을 써서, 쿠르베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국도(國都)인 위에를 위협하였기 때문에 베트남은 이에 굴복하여 조약을 맺고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청조는 베트남이 중요한 번속국(蕃屬國)이었으므로 사이공 조약 이래 누차 항의하여 프랑스의 행동을 승인하지 않다가, 강경책을 써서 청병을 통킹(東京)지방에 파견하여 프랑스군을 위협하였다. 한편 청의 이홍장(李鴻章)은 프랑스 함장(艦長) 푸르니에와 협약을 맺어 사건을 해결하려 하였으나, 1884년 관음교에서 청·프 양군이 충돌하여 청·프는 전면적 전쟁에 돌입하였다. 쿠르베 함대는 청국함을 푸저우만(福州灣)에서 격침하고 타이완의 여러 항구를 봉쇄하였다. 통킹 지방에서는 다음 해 청군이 프랑스군을 격퇴시켰는데, 청국 총세무사(總稅務司)의 알선에 의하여 6월에 톈진조약을 맺어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리하여 베트남은 청의 번속국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프랑스는 1887년 코친차이나, 통킹의 2직할지와 베트남, 캄보디아의 2속국(屬國)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구성하고, 1893년에는 이에 라오스까지 병탄(倂呑)하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편집]

-領-聯邦

1885년 베트남의 보호령화에 성공한 프랑스는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성립시켰다. 연방은 직할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와 보호령인 통킹, 안남, 캄보디아로 구성되고 안남과 캄보디아에 있어서는 왕실 및 정부가 명목상 잔존하였다. 그 후 1893년에 보호령으로서 라오스가 이에 편입되었다. 하노이에 인도차이나 총독부가 설치되어 총독이 문무(文武) 대권(大權)을 총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