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프랑스의 제2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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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제2제국〔槪說〕[편집]

2월혁명 후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은 1852년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1850년대의 나폴레옹 3세는 경제발전과 크림 전쟁의 승리 등 외교정책의 성공을 통해 국민 각층의 지지를 얻어 안정된 독재권력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860년대에 들어서자 그의 전제체제(專制體制)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860년 영국에 굴복하여 관세를 인하함으로써 산업자본가의 반감을 사고 또 공화파(共和派)의 반(反)정부운동과 노동운동도 점차 활발해져 갔다. 대외적으로는 멕시코 혁명에 대한 무력간섭의 실패가 내외에 걸쳐 위신을 실추시키고, 프랑스군(軍)의 로마 주둔도 국제적으로 평(評)이 좋지 못하였다. 또 인도차이나로의 진출도 당장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한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인기 회복을 위하여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그는 패하여 세당에서 항복을 하였으므로 불만을 폭발시킨 시민들이 제정(帝政)을 폐지하였다. 더욱이 그 다음해 파리 코뮌이란 혁명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베르사유에서 성립된 임시정부는 독일군의 협력을 얻어 이를 진압하였다. 이후 왕당파와 공화파간의 대립이 계속되었으나 1875년에 제3공화제가 성립하였다.

제2제국[편집]

第二帝國 (1852

1870)

나폴레옹 3세의 제정(帝政). 1852년의 헌법은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였으나 반대파의 활동이 엄격히 탄압되고, 실질적으로는 황제의 독재 정치가 실시되었다. 황제는 2월혁명 후 자본가층(資本家層)의 정치적 무력(無力)과 노동운동의 후퇴라는 정세를 배경으로 나폴레옹에 대한 추모를 이용하면서 보수적 농민과 군인의 인기를 모으고 자본가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권력을 획득, 정권을 유지했던 것이다.

나폴레옹 3세[편집]

-世 Charles Louis Bonaparte Napolon (1808

1873, 재위 1852

1870)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인 네덜란드 왕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제1제정(帝政) 몰락 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망명생활을 하여 자유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그 후 프랑스에 돌아가 보나파르트가의 제정(帝政) 부흥을 위해 여러 번의 반란을 계획하다가, 종국에는 체포되어 종신금고(終身禁錮)의 판결을 받고, 복역 중 영국으로 탈출하였다. 2월 혁명 후 나폴레옹 1세의 명성을 이용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 뒤 1851년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憲法)을 제정하여 10년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했다가, 이어 국민투표로 제위에 올라 나폴레옹 3세라 칭하였다. 이것이 프랑스의 제2제정이다.

국내 통치로는 산업자본가(産業資本家)와 노동자(勞動者) 사이를 능숙하게 조정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국민의 인기를 얻기 위해 크림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인도차이나에도 침입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멕시코 전쟁에서는 실패하였고, 또한 프로이센의 대두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비스마르크의 술책(術策)에 속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일으켰다가, 스당에서 패배하여 제정은 몰락하게 되었다.

멕시코 내정간섭[편집]

-內政干涉

나폴레옹 3세의 외정(外征) 실패를 드러낸 사건(1861

1867). 1855년 멕시코에 자유주의자 혁명이 일어나 대지주(大地主)·교회세력을 제압하고 또한 재정난으로 외채(外債)의 지불을 정지시켰다. 멕시코에 채권을 보유하였던 프랑스는 1861년 영국·에스파냐와 더불어 출병(出兵)하였고, 양국이 철병한 후에도 남아 내정(內政)에 간섭,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공(公)을 괴뢰황제(傀儡皇帝)로 앉혔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는 무력으로 반항하며, 미국도 먼로주의에 따라 강력히 항의하였으므로, 나폴레옹 3세도 불가불 철병하여 1867년 공화정부가 부활하였다.

막시밀리안[편집]

Ferdinand Maximilian (1832∼1867, 재위 1864 ∼1867)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빈에서 출생. 1854년에 오스트리아 해군 사령 장관, 1857∼1859년 롬바르드·베네치아 왕국 총독을 지냈고, 나폴레옹 3세의 원조를 얻어 멕시코 제국(帝國)의 황제에 추대되었으나, 멕시코인을 이해치 못하고 처음부터 실패를 거듭하여, 많은 유력인은 반대파의 후아레스 를 따랐다. 1865년 미국이 먼로주의에 의해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 나폴레옹이 그것을 수락했기 때문에 제국(帝國)은 와해되고, 막시밀리안은 공화파의 후아레스와 싸웠으나, 체포된 후 사살되었다.

후아레스[편집]

7 Benito Pablo Jurez (1806∼1872)

멕시코의 법률가, 대통령(재임 1857∼1872). 인디언 출신. 1847∼1852년 고향인 오악사카의 주지사를 역임, 1855년 혁명 때는 산타 안나를 타도하고 알바레스의 법무장관이 되었다. 1857∼1861년 임시 대통령으로서 헌법을 제정하여 정교(政敎)분리, 교회 재산의 해방, 토지개혁을 하려 하였으나 대지주·성직자의 반대에 부딪쳐 3년간 내란을 겪었다. 다행히 이를 진압하였으나, 1864∼1867년에 보수파는 프랑스의 원조를 청하여 나폴레옹 3세의 무력간섭, 막시밀리안 황제의 옹립의 사태에 이르렀다. 그는 미국과의 국경지대에 버티면서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1867년 황제를 케레타로에서 사로잡아 군사재판에 붙여 총살하였다. 1872년 혁명전쟁 중 사망하였으나 ‘공화국의 구제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편집]

-戰爭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전쟁으로 독일 통일을 완성시켰으며, 프랑스에서는 제2제정을 붕괴시킨 전쟁(1870

1871).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후에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는데, 1870년 레오폴트가 에스파냐 왕위에 오르게 되자, 나폴레옹 3세는 이를 강경히 반대하였다. 이에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프랑스의 간섭을 배제해야겠다고 통감하고 있던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엠스 전보(電報)사건 등을 교묘하게 외교적으로 조직하여 프랑스로 하여금 선전포고를 하도록 유도하였다. 프로이센군은 몰트케 장군의 신속한 작전으로 메스·스당 싸움에서 연승하였고,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포로가 되어 9월 2일 항복했다. 파리에서는 임시 국방정부가 성립되어 독일군에게 항전했으나, 1871년 1월 28일 독일군은 파리에 진주, 베르사유가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보다 앞선 1월 18일에는 빌헬름 1세의 독일 황제 대관식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거행되어 독일의 통일이 완성되었다. 동년 5월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렌을 독일에 할양하고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되었다. 이는 이후 오랫동안 프랑스의 대(對) 독일 감정을 악화시킨 원인이 되었다.

티에르 임시정부[편집]

-臨時政府

1871년 파리의 함락 항복 후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성립된 정부. 독일군 감시하의 선거로 구성된 국민의회를 기반으로 하였고, 보수적 공화주의자 티에르(Thiers)를 수반(首班)으로 수립되었다. 이 정부는 독일과의 사이에 굴욕적인 베르사유 가조약(假條約)과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체결하고, 독일군의 협력을 얻어 파리 코뮌을 진압하였다.

파리 코뮌[편집]

Paris Commune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파리에 성립된 소시민·노동자의 혁명정권. 파리 시민은 티에르 임시정부가 굴욕적인 강화를 체결하고, 또한 파리를 무장해제하려는 데 반대하여, 1871년 3월 보통선거를 통해 자치정권을 수립하였다. 코뮌은 수시로 파면할 수 있는 9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입법·행정 양권(兩權)을 겸하는 새로운 형(型)의 정권으로서 허다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로부터 포로를 석방받은 임시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5월 말 1주간의 시가전을 치른 후 붕괴되었다. 파리 코뮌은 허다한 결함을 내포하는 정권이었으나 소위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권’이라 하는 견해도 있다.

제3공화국[편집]

第三共和國

제2제정이 붕괴된 후 성립된 공화정체(1871

1940)이다. 1871년 티에르의 임시정부는 독일과 강화를 맺고 파리 코뮌을 분쇄하였으며 공화제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그 후, 정치형태에 관해서는 공화파·왕당파 등도 여러 파로 나뉘어 다투었으나 1875년에 제3공화제 헌법이 제정됨으로써 공화제가 확립되었다. 이 헌법은 3권 분립의 원칙에 입각하여 대통령은 임기 7년이나 권한은 작고, 사실상의 주권은 내각에 있었다. 의회는 2원제로 하원은 남자 유권자의 보통선거로 선출되었다. 복잡한 사회층을 반영하여 소당분립(小黨分立)이 계속되어 항시 연립 내각(聯立內閣)이었으므로 내각은 약체를 면치 못하여 자주 경질되었다.